소주?
소주 제조방법 소주(燒酒)의 소는 세 번 고아 내린다는 뜻이다.
소주는 양조주를 증류, 이슬처럼 받는다고 해 노주라고 하고 화주, 또는 한주라고도 하며 무색투명하다고 백주라고도부른다.
지역에 따라 아락주, 아라기, 아랭이 등으로 불리는 것은 중동지역으로부터 전해진 것과 관련이 있다.
중세 페르시아에서 개발된 증류법은 12 세기, 십자군을 통해 유럽으로 넘어와 브랜디와 위스키를 탄생시켰고,
칭기즈칸의 원나라를 통해 고려에 전래돼 소주를 선보였다.
소주는 증류방법에 따라 증류식과 희석식으로 구분한다.
증류식은 예로부터 전해 오는 재래식 소주와 마찬가지로 단식 증류기를 사용해 만든다.
증류식 제조는 65년 이래 양곡 정책으로 30년 동안 중단됐다가 최근 다시 부활했다.
원료로는 전분이 많이 들어 있는 쌀 보리, 옥수수 등 곡류와 감자, 고구마 등을 쓴다.
원료를 삶거나 쪄서 소화시킨 후 누룩 등의 곰팡이 효소를 이용, 당분으로 만든 다음 밑술을 첨가해 발효시킨다.
이렇게 만든 술덧을 단식 증류기에 넣고 한두번 증류해 받아낸 것이 증류식 소주다.
우리가 마시는 대부분의 소주는 희석식 이다.
희석은 알콜 농도가 높은 주정에 물을 타 농도를 낮춘다는 뜻이다.
위스키, 브랜디, 보드카 등 모든 증류주는 정해진 농도에 맞추기 위해 희석하는 과정을 거친다.
희석식과 증류식의 다른 점은 증류방법이다.
희석식 소주의 원료인 주정을 만들땐 연속식 증류기가 쓰이는데,
단식증류기로 만들면 알콜 농도가 60%를 넘지 못하지만 연속식
증류기로는95%이상의 고농도 알콜을 얻을 수 있다.
더욱이 증류과정에서 휴젤유, 알데하이드 등 술에 나쁜 불순물을 거의 대부분 제거 할수 있어 주정의 생산비를 낮출 수 있다.
발효원료로는 쌀, 보리 등 곡류와 고구마, 타피오카 등의 전분질 원료가 쓰인다.
주정 공장에서 만들어진 원료 주정은 소주공장으로 옮겨져 25% 안팎의 농도로 희석되어 소주가 된다.
이때 사용되는 중성주정은 완전히 정제돼 불순물이 없는 대신 원료나 발효산물의 풍미도 없다.
즉 무미건조하다. 따라서 첨가물료를 써 조미를 하는데 이때의 블랜딩 기술의 차이로 맛의 차이가 생기는 것이다.
최근에 개발되는 고급 소주엔 원료곡물의 풍미를 살린 곡물 주정이 사용되며, 자화수처리 등 새로운 기술이 적용되기도 한다.
우리나라의 주정 정제수준은 세계 어느 나라보다 앞서 있다.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증류주 보드카의 장점은 자작나무 숯으로 여과한 깨끗한 맛인데우리 소주는 이보다 더 깨끗한 맛에 부
드러움까지 갖추고 있다.
소주의 역사
삼국시대 이전부터 빚은 청주 - 청주는 오늘날 일본의 술처럼 생각하지만 실제로 우리나라가 원조이다.
일본의 고대 역사서를 보면 '백제사람 인번이 일본으로 건너와 새로운 방법으로 술을 빚는 방법을 알려주었다'
이 청주를 증류하면 소주가 되고, 희석하면 탁주가 된다. 바로 청주는 '맑은 술'이라는 뜻으로 탁주에 비교되는 말이다.
한편 우리나라 사람들은 술을 으레 '약주'라 부르는 경향이 있다.
본래 약주는 모든 술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청주만을 의미하였다.
여기에는 흥미로운 유래가 있다. 조선 증종 때 서울의 약현(지금의 중림동)에 서거정의 후손 서약이 살았다.
그의 부인인 이씨가 청주를 잘 빚었는데 사람들은 이를 '약현집 술'이라 불렀고,
여기에서부터 약주가 술을 의미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그 일화 이전에도 술은 약으로서의 효능을 보여 주었을 것이다.
술은 '백약의 으뜸'이라 하여 적당히 마시면 건강에도 좋다는 이야기는 오래 전부터 전해 내려오는 말이다.
무튼 청주는 오늘날 각종 연구에서 그 효능을 인정받고 있으며, 최근엔 일본 아키타대의 연구실험에 의해 청주가 암을 억제한다는
사실이 밝혀지기도 하였다.
사치스런 술에서 서민의 곁으로 - 소주는 기원전 3000년경 서아시아의 수메르에서 처음 만들어졌다고 한다.
바로 수메르인들이 증류주를 처음으로 만들어냈다는 것이다.
술이 지중해쪽으로 뻣어나가 맥주.와인과 함께 술문화를 이룩했고, 알프스 산맥을 넘어가서는 위스키와 브랜디를 빚게 했다.
그러나 동쪽으로 전파되기까지는 많이 시간이 걸렸다.
중국에서 증류주가 처음 만들어진 것은 원나라 때에 이르러서이고,
우리나라로 건너온 것은 고려말이니 소주가 동방으로 오기까지는 무려 4000년이 걸린 셈이다.
그 이유는 술을 즐기지 않는 이슬람민족이 실크로드를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 소주가 일본으로 건너간 것은 임진왜란 때,
두씨라는 사람이 포로로 끌려가 일본에서 처음으로 소주를 만들 게 되었다는 것이다.
증류식 소주가 중국을 거쳐 한반도에 전래된 것은 고려말로 알려져 있다.
당시 소주는 순수한 곡식으로 만들었고, 맛이 특이하고 독한데다 뒤끝이 깨끗해서 인기가 높았지만 독한데다 뒤끝이 깨끗해서 인기가 높았지만 값이 비싸 서민들은 마실 엄두를 내지 못했다.
조선조까지만만 해도 소주는 사치스런 술로 통했고 권력가와 부유층이 즐기던 술이었다.
서민들은 어쩌다 약용으로 쓰는게 고작이었다.
약골이었던 단종이 왕에 오른 뒤 대신들이 보양을 위해 소주를 권했다는 기록이 있고,
성종때는 서민들이 소주 마시는 것을 두고 어전에서 과소비 논쟁을 벌였다고 전해진다.
사간원에서 백성들이 소주를 만들어 마시는 것은 사치니 이를 금하는 왕명을 내려야 한다고 청원을 한 것이 발단이 돼 신료들이 이를 둘러싸고 격론을 벌인 것이다.
그러다가 조선조말 소주는 서민들의 술로 자리를 잡는다.
당시 소주는 지금의 서울 공덕동 자리에서 주로 만들어 졌는데, 다량으로 생산돼 값이 헐했다.
그덕에 마시면 배가 부른 막걸리를 마시던 서민들도 소주를 즐기게 됐다.
소주가 산술로 이미지를 굳힌 것은 박정희 정권 시절이다.
경제성장을 밀어붙이며 한편으로 술, 섹스, 스포츠 등 이른바 3s는 풀어주는 정책을 폈던 박정권은
수출의 역군인 저임의 노동자 들이 소줏잔을 기울이며 회포를 풀도록 소주값은 크게 못올리게 했다.
60년대 식량난이 닥치자 양곡관리법을 제정, 쌀을 원료로 한 비싼 술은 아예 개발도 못하도록 막았다.
그 결과 지금의 25도 짜리 희석식 소주는 30년이 넘도록 같은 맛을 유지하고 있고 애주가들의 입맛도 그 균일한 맛에 길들여졌다.
원료는 주정으로 값싼 타피오카와 잘라 말린 고구마를 썼고, 얼마전 까지만 해도 사카린을 첨가물로 사용했다.
박 전 대통령은 스스로도 친지, 직원들과 술판을 벌일 때면 사발에다 소주를 가득 부어 단숨에 들이킨 뒤 잔을 돌린 것으로 알려져있다.
유명을 달리하는 순간에 비록 시바스 리갈이란 양주를 돌렸지만.....
국민의 술 소주도 술꾼들의 취향이 고급화하면서 변신하고 있다.
고급 제품 이른바 프리미엄 소주의 등장이 그것이다.
주류업계의 한 관계자는 그러나 소주는 주로 내돈 주고 마시는 술이라며 소주 프리미엄 시장의 성장에 한계가 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역시 소주는 서민들의 영원한 벗으로 남을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