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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신료의 역사
- 향의 역사
“그리스도와 향신료를 위해(christos e espiciarias!)"
이 말은 1498년 5월 인도에 도착한 바스코 다 가마의 선원들이
향신료로 막대한 부를 챙길 생각에 기쁨에 겨워 지른 환호성이다.
바스코 다 가마가 인도에 도착하기 전, 수세기 동안 향료 무역은
베네치아 상인들이 독점하고 있었다.
중세 유럽에서는 후추는 매우 귀해서 말린 후추 열매 1파운드(약 453그램)이면
중세 영주의 토지에 귀속되어 있는 농노1명의 신분을 자유롭게 할 수 있었다.
후추는 오늘날 전 세계 저녁 식탁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흔한 것이 되었지만
중세에서는 후추를 비롯한 계피, 정향, 육두구, 생강같은
향신료는 소수만이 마음껏 소비할 수 있었다.
향신료에 대한 수요는 점차 늘어났고
이 거대한 수요로 말미암아 대항해 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후추와 바스코 다 가마
인도가 원산지인 열대성 관목인 피페르 니그룸(Piper nigrum)에서 나오는
후추는 지금도 보편적으로 가장 많이 쓰이는 향신료이다.
오늘날 후추의 주 생산지는 인도, 브라질,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등의 적도 지역이다. 후추나무의 줄기는 튼튼하고 다른 물체를 타고 6미터 이상 자란다.
2~5년이면 붉은 구형의 열매를 맺기 시작하고 적정 조건에서는 40년간 열매를 맺는다. 후추나무 한 그루는 매년 10킬로그램의 향신료를 생산한다.
후추의 약 4분의 3은 검은 후추로 팔린다.
검은후추는 덜익은 후추를 균발효시켜 얻는다.
흰후추는 다 익은 열매의 껍질과 과육을 제거하고
건조시켜 얻는 것으로 후추의 4분의1이 흰 후추에 해당한다.
열매가 익기 시작하자마자 수확해서
소금물에 절인 푸른후추(green pepper)는 유통량이 매우 적다.
특산품 상점같은 곳에서 종종 볼 수 있는 색다른 색의 후추는
인공적으로 물들인 것이거나 원래부터 색상이 그런 종류이다.
후추를 유럽에 소개한 것은 아랍 상인들로 생각되는데,
이들은 다마스쿠스를 지나 홍해를 건너는 고대 향료길을 이용한 것 같다.
기원전 5세기가 되자 그리스에 후추가 알려졌다.
당시 그리스에서 후추는 요리용이 아니고 의료용, 그것도 대개 해독제로 쓰였다.
그러나 로마인은 그리스 인과는 달리
후추나 기타 향신료를 양념으로 광범위하게 사용했다.
1세기, 아시아 및 아프리카 동부 해안에서
지중해로 수입되는 물품의 반 이상은 향신료였고 대부분은 인도에서 들여온 후추였다. 향신료는 두가지 이유로 요리에 사용되었다.
첫째가 음식의 부패를 막는 것이고 둘째는 향미를 더 좋게 하는 것이었다.
로마 시대에는 운송은 느리고 냉장 기술은 아직 발명되기 전이어서,
신선한 음식확보와 보관이 큰일이었을 것이다.
음식이 상했는지 여부를 알기위해
로마의 소비자들이 믿을 수 있는 것은 자신들의 후각밖에 없었다.
유효기간표시는 까마득한 먼 미래의 일이었다.
상한 음식과 맛과 냄새를 감추기 위해 후추와 기타 향신료들이 사용되었는데.
이들은 음식의 썩는 속도를 늦추는데 도움이 되기도 했을 것이다.
또한 후추와 기타 향신료들을 풍부하게 사용하면 말리고, 훈제하고,
소금으로 간한 음식의 맛을 더욱 좋아지기도 했다.
중세시대, 대부분의 유럽인은 아시아와 교역할 때
바그다드를 지나 흑해의 남부 해안을 경유해 콘스탄티노플에 이르는 경로를 이용했다. 향신료는 콘스탄티노플에서 항구도시 베네치아로 운반되었다.
중세가 끝날 때까지 400년 동안 거의 모든 무역은 베네치아에서 이루어졌다.
6세기부터 베네치아는 인근 개펄에서 생산한 소금을 시장에 내놓아
괄목할 만한 경제 성장을 이루었다.
베네치아는 어느 나라와 교역을 하든 베네치아의 독립을 보장받는다는
현명한 정치적 결단을 내린 덕분에 수세기 동안 번영을 누렸다.
베네치아 상인들은 11세기 후반에 시작해 근200년 간 진행된
십자군 원정 덕분에 세계 향료 시장에서 제왕의 지위를 공고히 할 수 있었다.
베네치아 공화국은 서유럽에서 온 십자군에게 수송선, 전함, 무기, 자금을직접 공급해서 바로 이득을 챙길 수 있었다.
따뜻한 중동 지역에서 추운 북쪽의 고국으로 돌아가는 십자군들은
원정 중에 즐겼던 이국적인 향신료를 가져가고 싶어 했다.
아마 처음에는 후추는 진귀한 품목이었을 것이다.
썩은 냄새를 감추는 효과와 맛없는 건조음식에 고유의 풍미를 더해 주는 효과,
짠 음식의 소금 맛을 완화 시켜주는 그 효과 때문에
후추는 순식간에 필수품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베네치아 상인들은 방대한 새 시장을 얻었고 전 유럽의 무역업자들은 향신료,
특히 후추를 사기위해 베네치아로 몰려들었다.
15세기, 향료 무역은 베네치아 상인들의 독점으로
다른 나라들이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었으며
베네치아 상인들이 챙긴 이윤은 어마어마했다.
다른 나라들은 인도에 갈 수 있는 새로운 길,
특히 아프리카를 빙 둘러가는 바닷길의 개척 가능성을 진지하게 검토하기 시작했다.
포르투갈 왕 주앙1세의 아들이자 항해가인 엔히크 왕자는
외향의 극한 적인 기상조건을 견딜 수 있는
튼튼한 상선을 대규모로 만들어 선단을 조직했다. 바야흐로 대항해 시대의 시작이었다.
15세기 중반, 포르투갈 탐험가들은 남쪽으로
아프리카 북서 해안의 베르데 곶까지 내려가서 콩고 강 어귀까지 도달했다.
4년 뒤인 1487년 포르투갈 항해가 바르톨로뮤 디아스는 희망봉을 돌았다.
1498년, 포르투갈 탐험가 바스코 다 가마스는
디아스가 개척한 항로를 따라 인도에 도착했다.
인도 남서 해안을 다스리고 있던 캘리컷 지역의 지배자는
후추열매를 주고 금을 받기를 원했다.
세계 후추무역을 지배할 꿈에 부풀어 있던 포르투갈 인들은 후추를 사기 위해
금이 필요할 줄을 꿈에도 몰랐다.
5년 뒤, 총과 군대로 무장한 바스코 다 가마는 캘리컷을 정복,
후추 무역을 포르투갈의 지배하에 두었다.
이것이 포르투갈 제국의 시작이었다.
포르투갈 제국의 영토는
아프리카를 포함해 동쪽으로 인도와 인도네시아에 이르렀고
서쪽으로 브라질에 이르렀다.
스페인도 향료 무역, 특히 후추에 관심을 두고 있었다.
1492년 제노바 인 크리스토퍼 콜롬버스는 서쪽으로 항해하면
인도의 동쪽 가장 자리에 도달하는 더 짧은 항로를 찾을 수 있을거라 확신하고
스페인 국왕 페르디난드 5세와 여왕 이사벨라를 설득해서
탐사 여행의 재정지원을 받았다,
콜럼버스의 확신은 어느 정도 맞았지만 전적으로 옳지는 않았다.
유럽에서 서쪽으로 가면 인도에 도착할 수는 있었겠지만 더 짧은 항로는 아니었다.
광대한 태평양과 그 당시 알려져 있지 않던
아메리카 대륙이 중간에 가로막고 있었으니까
후추는 베네치아를 거대한 도시로 만들었고
대항해 시대를 주도했으며 콜럼버스가 신세계를 찾아 나서도록 했다.
후추에는 도대체 무슨 성분이 들어있을까?
검은후추와 흰후추에 공통으로 들어있는 활성 성분은 피페린(Piperine)이다.
피페린의 화학식은 C17H19O3N이고 구조식은 다음과 같다.
피페린을 섭취할 때 우리가 느끼는 매운맛은 사실 맛이 아니라,
피페린이 일으키는 화학작용에 대한 우리 통각 신경의 반응이다.
이런 반응이 일어나는 과정이 완전히 밝혀지지 않았다.
하지만 적어도 통각 신경이 피페린에 반응하는 이유는
피페린분자의 모양이
통각 신경 말단에 있는 단백질 모양이 잘 들어맞기 때문인 것으로 여겨진다.
피페린분자가 신경 말단의 단백질 분자와 결합하면 신경 말단의 단백질은
모양이 변형되면서 어떤 신호를 내보낸다.
이 신호는 신경을 따라 뇌에 전달되고 우리 뇌는 “아 매워.”같은 말을 지시하게 한다.
1492년 10월, 인도에 다다르는 서쪽 항로 개척에 나선 콜럼버스가 육지에 닿았을 때
그는 인도 어딘가에 도착했다고 생각했다.
인도에 도착하면 발견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웅장한 도시나 왕궁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 땅을 서인도제도라 부르고 그곳 사람들을 인디언이라 불렀다.
콜럼버스는 두 번째 항해 때 서인도 제도의 아이티에서
매운 맛이 나는 새로운 향신료, 고추를 발견했다.
고추는 자신이 일고 있는 후추와는 전혀 다른 향신료였지만 콜럼버스는 개의치 않았다.
고추는 포르투갈 인을 따라 동쪽으로 전파되어 아프리카를 빙 둘러
인도 너머까지 건너갔다.
고추는 50년만에 전 세계로 퍼져 지역요리,
특히 아프리카, 동아시아, 남아시아 요리와 빠르게 결합했다.
고추는 콜럼버스 항해가 가져다준 가장 중요하고
지속적인 해택 가운데 하나임이 분명하다.
고추와 콜럼버스
후추는 종이 하나뿐이지만 고추는 캅시쿰 속 밑에 다양한 종이 있다.
고추의 원산지는 열대 아메리카다.
인류는 9000년전부터 고추를 사용해 왔다.
고추는 같은 종에는 벨페퍼(Bell paper), 스위트 페퍼(Sweet paper),
피멘토(Pimento), 바나나 페퍼(banana papper), 파프리카(Paprika),
카옌 페퍼(cayenne pepper)등이 있다.
타바스코 페퍼(Tabasco pepper)는 캅시쿰 프루테스켄스(Capsicum frutescens,
목질의 다년생)의 변종이다.
고추는 색깔, 크기, 모양이 다양하지만
고추가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매운맛은 캡사이신 때문이다.
캡사이신의 화학식은 C18H27O3N이며 구조식은 피페린과 유사하다.
캡사이신과 피페린 모두 산소와 이중결합을 이루고 있는 탄소와 옆에 질소가 있고,
탄소로 이루어진 방향성 고리 하나를 갖고 있다.
우리가 느끼는 ‘맵다’는 감각이 분자의 형태에 기인하는 것이라면
캡사이신과 피페린 모두 매운맛을 내는 것은 당연하다고 볼 수 있다.
분자 형태론이 들어맞는 세 번째 ‘매운’분자는
생강의 뿌리줄기에서 볼 수 있는 진제론(zingerone, C11H14O)이다.
진제론 분자는 피페린이나 캡사이신보다 작지만 방향성 고리를 갖고 있다
진제론도 캡사이신처럼 HO와 H3C-O를 갖고 있다. 하지만 질소 원자는 없다.
우리는 왜 고통을 주는 매운 물질을 먹으려고 하는 걸까?
아마 우리 몸에 좋은 몇 가지 화학적인 이유 때문인 것 같다.
캡사이신, 진제론, 피페린은 침의 분비를 증가시켜 소화를 돕는다
(침은 음식물이 내장을 잘 지나갈 수 있도록 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포
유류의 경우 미각 세포가 주로 혀에 있지만,
매운맛의 분자들이 보내는 화학 신호를 감지할 수 있는 통각 신경은
우리 몸 곳곳에 있다. 고추를 썰다가 무심코 눈을 비빈 적 있는가?
고추를 수확하는 농부들은 캡사이신이 들어있는
고추기름이 몸에 닿지 않도록 고무장갑과 보안경을 쓴다.
후추의 매운맛은 음식에 뿌린 후추의 양에 비례하는 것 같다,
반면 고추의 매운맛은 그렇지 않다.
고추는 색깔, 크기, 원산지에 따라 ‘매운 정도’가 달라진다.
그렇다고 해서 색깔, 크기, 원산지에 따른 비례나 역비례 관계가 성립하는 것은 아니다. 일반적으로 작은 고추가 맵지만 가장 큰 고추가 가장 덜 매운 것도 아니다.
동아프리카에서 재배되는 고추가 세계에서 가장 맵다고들 하지만
지리적 요인에 따라 매운맛이 정해진다고 할 수도 없다.
매운맛은 대개 고추를 건조시켰을 때 강해진다.
우리는 종종 혀가 얼얼할 정도로 매운 음식을 먹은뒤 만족감이나 흡족감을 느끼는데,
이 느낌은 엔도르핀 때문인 듯하다.
엔도르핀은 우리 몸이 통증에 대해 반응할 때
뇌에서 자연스럽게 분비되는 화합물인데 아편과 비슷한 물질이다.
엔도르핀 분비현상이라면
사람들이 맵고 자극적인 음식을 중독적으로 좋아하는 이유가 설명이 된다.
고추가 매울수록 고통이 커져 엔도르핀이 많이 분비되고 궁극적으로 쾌감도 더 커진다.
파프리카는 굴라시(파프리카로 맵게 한 쇠고기와 야채로 만든 스튜)같은
헝가리 음식에 잘 정착된 반면, 고추는 유럽음식에 잘 융화되지 못했다.
유럽에서는 매운맛을 내는 분자로 후추의 피페린이 정착된 탓이다.
포르투갈이 캘리컷을 지배 하면서 후추 무역은 약 150년간 포르투갈의 지배하에 놓였다. 17세기 초에 이르자 네덜란드와 영국이 포르투갈의 후추무역을 넘겨받았다.
암스테르담과 런던의 유럽의 주요 후추무역항이 되었다.
1600년, 동인도 향료 무역에서 영국의 점유율을 높이기 위해
영국 동인도 회사가 설립되었다.
설립 당시 동인도 회사의 원래 이름인 동인도 제도 무역 런던 상인 조합이었다.
인도에 가서 후추를 싣고 돌아오는 항해에 자금을 대는 일은 위험 부담이 컸기 때문에 상인들은 자신들이 입게 될지도 모를 손실 규모를 줄이기 위해
항해에 대한 몫을 요구했다.
이런 관행은 주식을 사는 것으로 발전되어 현대 자본주의의 시초가 된 것으로 여겨진다. 물론, 지금은 별 볼 일 없게 되어버린 피페린 세계 주식 시장과 같은
복잡한 세계 경제 구조의 단초를 제공했다고 하는 것은 확대 해석일 수도 있겠다.
마젤란의 항해
후추 외에 소중한 향신료는 또 있었다.
바로 육두구(nutmeg)와 정향이다.
육두구와 정향은 후추보다 더 귀했다.
육두구와 정향은 향료 제도,
즉 몰루카 제도(오늘날 인도네시아 말라쿠 주)에서 유래했다.
육두구 나무, 미리스티카 프라그란스는 몰루카 제도에 속한 반다 제도에서만 자랐다.
반다 제도는 자카르타에서 동쪽으로 약 2500킬로미터 떨어진
반다 해 위에 외롭게 떠있는 7개의 섬이다.
반다 제도의 섬들은 작다.
가장 큰 섬의 길이가 10킬로미터가 되지 않고 가장 작은 섬의 길이는 겨우 2~3킬로미터이다. 반다 제도의 섬들과 비슷한 크기의 섬이
몰루카 제도 북쪽에도 있는데 테르나테 섬과 티도레 섬이다.
이 두 섬은 세계에서 유일하게 정향나무, 유제니아 아로마티카가 자라는 곳이었다.
수세기 동안 몰루카 제도 주민들은 육두구와 정향을 재배해서
이곳을 방문하는 아랍, 말레이, 중국 상인들에게 팔았고
육두구는 아시아와 유럽으로 전파되었다.
육두구와 정향이 유통될 수 있는 무역항로는 잘 확립되어 있었다.
육두구와 정향은 어떤 경로를 거치든 서유럽 소비자에게 전달되는데
12단계의 유통경로를 거쳐야 했다.
각 유통단계를 거칠 때마다 향신료의 가격은 2배로 뛰었다.
이런 이유 때문에 포르투갈의 인도 총독 아퐁소 디 알부르케르케는
실론 섬과 말레이 반도의 말라카를 점령하고 동인도 향료 무역을 장악했다.
1512년, 알부케르케는 몰루카 제도에 도착해 이곳 사람들과 직접 교역하면서
육두구와 정향 무역을 독점했고 곧 베네치아 상인들을 능가했다.
스페인도 향료 무역에 눈독을 들였따.
1518년, 포르투갈 항해사 페르디난드 마젤란은 자신의 탐험 계획이
조국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자 스페인 왕실을 찾아가,
서쪽으로 가면 향료 제도에 도착 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항해 기간도 단축 할 수 있을 거라는 자신의 계획을 설명하고 설득했다.
스페인은 마젤란의 탐험 계획을 지원할 이유가 충분했다.
동인도로 가는 서쪽 항로가 개척되면
스페인 선박들은 포르투갈 항구를 이용할 필요도 없어지고
아프리카 및 인도를 경유하는 동쪽 항로를 이용할 필요도 없어지기 때문이었다.
여기서 잠깐 교황 알렉산더 6세가 포고한 교령 이야기를 하고 넘어가자,
케이프베르데제도 서쪽에서 50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가상의 경선이 있다.
교황의 교령에 의해 포르투갈은 이 경선의 동쪽 영토를 하사받았고
스페인은 서쪽영토를 하사받았다.
이런 모순된 교령이 나올수 있었던 것은
당시 교황이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을 간과했거나 무시했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스페인이 서쪽으로 가서 향료 제도에 도착할 수만 있다면
스페인은 향료제도에 대한 합법적 권리를 주장할 수 있었다.
마젤란은 스페인 황실에 자신이 아메리카 대륙을 통과할 견문을 갖추고 있음을
확신시켰고 자신도 그렇게 확신했다.
1519년 9월, 마젤란은 스페인을 떠나 남서쪽으로 내려가
대서양을 건너 지금의 브라질, 우루과이, 아르헨티나 해안을 따라 내려갔다.
라플라타 강 어귀를 만나자 마젤란은 드디어 태평양으로 가는 길을 찾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라플라타 강 어귀를 따라 200여 킬로미터를 나아갔을 때 나타난 것은
지금의 부에노스아이레스였다.
마젤란의 의심과 실망은 이루말로 표현 할 수 없었다.
마젤란은 실망할 때마다 다음 곶만 돌면
대서양에서 태평양으로 가는 통로가 나올 것이라 확신하며 계속 남으로 내려갔다.
5척의 작은 배와 265명의 선원으로 시작된 항해는 악화일로에 있었다.
남쪽으로 갈수록 낮은 더 짧아지고 강풍은 더 끊임없이 불어닥쳤다.
갑작스러운 조수로 인한 위험한 해안, 거대한 파도, 끊임없는 우박과 진눈깨비,
얼어붙은 삭구에서 미끄러져 배에서 떨어질지도 모른다는 생명의 위협 때문에
항해의 비극은 더해만 가고 있었다.
항해도중 선원들이 폭동을 일으키기도 했다.
폭동을 진압한 마젤란은 남위50도에 이르러서도 태평양으로 가는 해협이 보이지 않자 남국 겨울의 나머지를 그 곳에서 보냈다.
다시 항해를 계속한 마젤란은 드디어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마젤란 해협을 발견해 내고 무사히 통과했다.
1520년10월, 마젤란 선단의 배4척이 마젤란 해협을 통과했다.
보급품이 떨어지자 마젤란 휘하의 장교들은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정향과 육두구의 유혹 때문에
동인도 제도의 향료무역을 포르투갈과 나눠 가질 경우
돌아올 부와 영광 때문에 마젤란은 항해를 멈출 수가 없었다.
마젤란은 3척의 배를 이끌고 서쪽으로 항해를 계속했다.
어느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광대한 너비의 태평양을 건너는 일은
남아메리카 남단의 마젤란 해협을 통과하는 것보다 훨씬 힘든 일이었다.
1521년3월 6일 탐험대가 마리아나 제도의 괌에 상륙하면서
선원들은 굶주림과 괴혈병으로 인한 죽음의 공포에서 잠시 벗어났다.
10일뒤 마젤란은 필리핀 제도의 조그마한 섬, 막탄에 상륙했다.
이것이 그의 마지막이었다 주민들과 사소한 충돌로 마젤란이 살해당한 것이다.
마젤란 본인은 몰루카 제도에 도달하지 못했지만
그의 배와 선원들은 정향의 원산지, 테르나테 섬에 도착했다.
스페인을 떠난지 3년 18명으로 줄어든 생존 선원들은 마젤란 선단의 마지막배,
빅토리아 호의 오래되고 낡은 선체에 26톤의 향신료를 싣고
강을 거슬러 세비야로 돌아왔다.
향신료가 유럽을 깨어나게 했다
후추과 관련한 거짓말 같은 이야기가 있다.
십자군 전쟁을 일으킨 교황 우르바노 2세는 검소하기 짝이 없는 교황이었지만
육식을 즐겼다고 한다.
이슬람의 세력 확대로 지중해 동쪽이 이슬람에 넘어가자
후추 수입에도 큰 타격이 있어 품귀 현상이 일고 값도 엄청나게 올랐다.
물론 예루살렘이 이슬람 세력권에 떨어져 성지 순례도 어렵게 되어
성지 탈환을 위해 십자군 전쟁을 일으켰지만,
어쩌면 후추를 마음껏 먹지 못하는 분노가 교황의 머릿속에서 작용해
예루살렘 성지 순례로 합리화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십자군 전쟁의 진정한 원인이 성지 순례였는지
아니면 후추였는지는 우르바노 2세 자신도 잘 몰랐을 것이다.
종교의 이념이 지배하고 육체와 감각이 천시되었던
중세 유럽의 어둠을 향신료가 깨우기 시작한 것이다.
중국의 정화 함대가 서양과 비교할 수 없는 위엄의 대함대를 이끌고
먼저 세계를 누볐지만 마땅히 교역할 물건이 없어서 문을 닫았다.
육류를 즐긴 서양의 욕구, 향신료에 대한 감각의 욕구가 서서히 유럽을 깨우기 시작한 것이다. 감각이 개인과 국가의 운명을 바꾼 것이다.
매운맛의 화학구조
정향과 육두구는 과가 다르고 원산지도 해양을 사이에 두고
수백 킬로미터 떨어져 있으며, 독특한 향기 역시 다르지만,
분자모양이 매우 유사하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정향유의 주성분은 유게놀(eugenol)이고 육두구유의 주성분은 아이소 유게놀이다.
이 두 방향족 화합물은 이중 결합의 위치만 다르다.
유게놀 및 아이소 유게놀의 구조와, 생강에서 볼 수 있는 진제론의 구조도
매우 유사하다. 세 분자의 구조는 유사하지만 향기는 전혀 다르다.
식물들이 우리 좋으라고 방향족 화합물을 만들어 낼리는 없다.
식물들은 풀을 뜯어먹는 동물이나 수액을 빨아먹고 잎을 갉아먹는 곤충,
체내에 침입하는 균류로부터 도망칠 수 없기 때문에 유
게놀, 아이소유게놀, 피페린, 캡사이신, 진제론같은 방향족 화합물을 만들어
매우 강력한 천연살충제이다.
우리가 이런 방향족 화합물을(소량으로) 섭취할 수 있는 것은
우리 간에서 매우 효과적인 해독작용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이론상 특정 향신료를 과다 섭취하면
간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신진대사중 하나에 장애가 온다.
하지만 신진대사에 장애가 올 정도가 되려면 엄청난 양을 섭취해야 하는데,
이것은 일어나기 매우 어려운 일이므로
우리가 향신료 과다 섭취를 걱정할 필요는 없을 듯하다.
정향나무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도 유게놀의 향기는 뚜렷하게 맡을 수 있다.
유게놀은 정향나무의 말린 꽃눈에서도 얻을 수 있고 다른 부분에서도 얻을 수 있다.
기원전 200년, 정향은 중국 한나라 왕실에서 신하들의 구취 제거제로 쓰였다.
정향유는 강력한 소독제 겸 치통약으로 귀하게 쓰였다.
지금도 정향유는 치과에서 종종 국소 마취제로 사용되고 있다.
육두구나무에서 육두구와 메이스가 나온다.
육두구는 살구처럼 생긴 열매에 들어있는 밝은 갈색의 씨앗을 갈아서 만든 것이고
메이스는 씨앗을 감싸고 있는 밝은 갈색의 씨앗을 갈아서 만든 것이고
메이스는 씨앗을 고 있는 붉은 빛깔의 껍질로 만든 것이다.
육두구는 오래전부터 약으로 쓰였다.
중국에서는 류머티즘과 위통을 치료하는 데 쓰였고
동남아시아에서는 설사와 복통에 쓰였다.
유럽에서는 최음제와 마취제로 쓰였을 뿐만 아니라 흑사병 예방약으로도 쓰였다.
흑사병은 1347년 처음 그 발생이 기록된 이후 주기적으로 유럽을 휩쓸었던 전염병이다. 사람들은 흑사병을 막기 위해 육두구를 넣은 작은 자루를 목 주변에 둘렀다.
장티푸스, 천연두 같은 전염병들도 주기적으로 유럽의 여러지역을 강타했지만
가장 무서운 병은 역시 흑사병이었다.
흑사병은 세 유형(선 페스트, 폐 페스트, 패혈증)으로 발생했다.
선 페스트에 걸리면 사타구니와 겨드랑이의 림프선이 부풀어 올라 고통을 받았다.
선 페스트 환자의 50~60퍼센트가 치명적인 내부 출혈과 신경 손상을 겪었다.
발생 빈도는 덜 하지만 훨씬 더 치명적인 유형은 폐 페스트였고,
폐 페스트보다 더 치명적인 패혈증이었다.
엄청난 양의 세균이 혈액을 공격하기 때문에 패혈증에 걸리면 하루를 못 넘기고 죽었다.
신선한 육두구에서 나온 아이소유게놀 분자가
선 페스트 세균을 나르는 벼룩을 접근하지 못하게 했다는 것은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또한 육두구의 다른 분자들도 충분히 살충성분을 가질 수 있다.
방향족 화합물인 미리스티신(myristicin)과 엘레미신(elemicin)도
육두구와 메이스에서 볼 수 있는 물질이다.
두 화합물의 구조는 서로 유사하며 우리가 이미 살펴본 육두구,
정향, 후추분자의 구조와도 비슷하다.
육두구는 흑사병을 물리치는 신비한 힘을 갖고 있다고 여겨졌을 뿐만 아니라,
‘정신착란을 일으키는 물질’로도 여겨졌다.
육두구가 환각제 성분을 갖고 dLT다는 것은 수세기 전부터 알려진 사실이다.
1576년의 한 보고서를 보면 “임신한 한 영국 여성이 10~12알의 육두구를 먹고
향기에 취해 정신 착란을 일으켰다.”라고 나와 있다.
이 보고서를 곧이 곧대로 믿기는 어려울 것 같다.
특히 그 여성이 먹었다는 육두구의 개수가 그러하다.
오늘날 연구 결과에 따르면 육두구 한 알만 먹어도 메스꺼움을 느끼고 땀을 비 오듯이 흘리며 심장 박동이 빨라지고 혈압이 매우 높게 상승하고 며칠 동안 환각에 시달린다고 한다. 이런 증상은 단순한 정신착란의 증상이다.
12알이 아니라 이보다 훨씬 적은 양만 섭취해도 죽음이 눈앞에 다가왔을 것이다.
더군다나 미리스티신을 다량으로 섭취하면 간에 치명적인 손상을 입는다.
육두구와 메이스 뿐만 아니라 당근, 셀러리, 딜, 파슬리, 검은후추 등도
미리스티신과 엘레미신을 소량 함유하고 있다. 그
렇다고 해서 환각 효과를 느낄 목적으로
우리가 이런 물질을 다량으로 섭취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사실 미리스티신과 엘레미신이 환각 물질이라는 증거도 없다.
다만 아직 밝혀지지 않은 우리 몸의 신진대사 경로로 인해 이 물질들이
다른물질, 즉 암페타민(amphetamine, 중추신경을 자극하는 각성제)
비슷한 소량의 화합물로 전환될 가능성은 있다.
이런 시나리오가 가능한 이유는 엑스터시(ecstasy)라고 불리는3,4-메틸렌 다이옥시-엔-메틸 암페타민(3,4-methylenedioxy-N-methylamphetamine, MDMA)을 불법 제조할 때
사프롤(safrole)이라는 물질을 시작물질로 사용하는데 사프롤은 미리스티신에서
OCH3가 빠진 물질이기 때문이다.
사프롤은 사사프라스나무(sassafras tree)에서 얻는다.
사프롤은 코코아, 검은 후추, 메이스, 육두구, 야생생강등에서도 볼 수 있다.
뿌리에서 추출되는 사사프라스유는 약 85%가 사프롤이고
한때 루트비어의 주향신료로 사용되었다.
오늘날 사프롤은 발암 물질로 간주되고 있고
사프롤과 사사프라스유는 중독 식품으로 분류되어 사용이 금지 되어 있다.
뉴욕이냐, 육두구냐 그것이 문제로다
16세기 내내, 포르투갈은 정향 무역을 지배했다.
하지만 독점은 하지 못했다. 포르투갈은 정향무역을 지배했다.
하지만 독점은 하지 못했다.
포르투갈은 테르나테 섬과 티도레 섬의 추장들과
무역과 요새 건설에 대한 협정을 맺었지만 이 협정은 얼마가지 않아 무용지물이 왰다.
몰루카 제도 사람들은 협정을 맺은 뒤에도 이전부터 거래하던 자바 인들이나
말레이 인들에게 계속해서 정향을 팔았기 때문이다.
17세기, 네덜란드는 포르투갈보다 더 많은 인원과 화력이 더 좋은 총에
더욱 무자비한 식민주의로 무장했다.
네덜란드는 막강한 네덜란드
동인도회사(Vereenigde Oostindische Compagnie)를 통해 향료 무역의 주역이 되었다. 하지만 네달란드의 향료 무역 독점은 쉽게 이루어지지도 않았고 오래 가지도 못했다.
1602년 설립된 VOC가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얼마 남지 않은 전초 기지를
완전히 몰아내고 몰루카 제도 사람들의 저항을 무자비하게 진압하며
향료 무역을 독점할 수 있게 된 것은 1667년 이었다.
좀더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서 이야기를 시작해 보자.
네덜란드는 향료 무역에서 자신의 지위를 더욱 공고히 하기 위해
반다 제도의 육두구 무역까지 지배할 필요가 있었다.
1602년 네덜란드와 반다제도의 추장들은 반다제도에서 생산된 모든 육두구 독점권을 VOC에 보장하는 조약을 체결했다.
그런데 반다제도 사람들은 독점이라는 개념을 받아들이지 않았거나
아마도 이해하지 못했던 것 같다.
네덜란드 외의 다른 무역업자들이 최고가를 부르면 그들에게도 육두구를 팔았던 것이다.
네덜란드의 대응은 무자비했다.
함대와 수백명의 군인들이 출현하고 반다 제도에 최초의 대형 요새가 세워졌다.
이 모든 것이 육두구 무역을 손에 넣기 위한 것이었다.
네덜란드의 공격, 반다 제도 사람들의 반격, 대량학살, 조약 갱신, 조약 파기 같은
일련의 사건이 진행되면서 네덜란드의 태도는 더욱더 단호해졌다.
네덜란드는 요새 주변을 제외하고 육두구 숲을 모조리 파괴했으며
반다 제도 사람들의 집을 불태우고 추장들은 처형했다.
본국에서 온 네덜란드 이민자들이 반다 제도 사람들을 노예로 삼고
육두구 생산을 감독했다.
VOC가 육두구 무역을 독점하는 데 있어서 마지막 남은 걸림돌은
반다 제도의 가장 외딴 곳, 런 섬에 상주하고 있는 영국인 들이었다.
절벽에서초차 육두구나무가 자랄 정도로 육두구 나무가 무성했던 작은 환초,
런 섬은 유혈이 낭자한 전장이 되었다.
네덜란드의 무지막지한 포위 공격, 상륙, 육두구 숲의 파괴가 있은 후 1667년,
양국이 맺은 브레다 조약에서 네덜란드는 맨해튼 섬에 대한 권리를 포기 선언했고,
영국은 런 섬에 대한 모든 권리를 네덜란드에 넘겨주었다.
맨해튼의 뉴암스테르담은 뉴욕이 되었고 네덜란드는 육두구를 손에 넣었다.
네덜란드의 온갖 노력에도 불구하고 네덜란드의 독점은 오래가지 못했다.
1770년 한 프랑스 외교관이 몰루카 제도의 정향묘목을
프랑스 식민지였던 모리셔스로 몰래 갖고 들어왔다.
정향은 모리셔스에서 아프리카 동해안을 따라 빠르게 퍼져 나가
잔지바르의 주요 수출품이 되었다.
정향과 달리 육두구는 원산지인 반다 제도 밖에서 재배하기가 어렵기로 유명했다.
육두구나무는 기름지고 촉촉하고 배수가 잘 되는 흙과,
그늘지고 덥고 습하면서 강한 바람이 있는 기후에서 잘 자랐다.
원산지 밖에서는 육두구 재배가 힘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네덜란드는 섬 밖으로 나가는 육두구 종자가 싹트는 걸 방지하기 위해
모든 육두구를 석회수에 담그는 조심성을 보였다.
하지만 끝내 영국은 육두구를 싱가포르와 서인도 제도에서 재배하는 데 성공했다.
카리브 해의 그레나다는 육두구 섬으로 유명해졌고 향신료의 주요 생산지가 되었다.
만약 냉장고가 출현하지 않았다면
전 세계적인 거대 향료 무역은 지금까지도 틀림없이 계속되었을 것이다.
냉장고가 출현하면서 후추, 정향, 육두구가 더 이상 방부제로서 필요 없게 되었고
이들 향신료의 성분인 피페린, 유게놀, 아이소유게놀, 기타 방향족 화합물 등에 대한
엄청난 수요도 사라졌다.
지금도 후추를 비롯한 기타 향신료들은 여전히 인도에서 재배되고 있지만
주요 수출품은 아니다.
인도네시아 일부가 된 테르나테 섬과 티도레 섬, 반다 제도는 옛날보다 더 한적하다.
정향과 육두구를 싣기 위해 대형 선박이 방문하는 일은 뜸해졌고
이작은 섬들은 뜨거운 태양아래 선잠을 자고 있다
간간이 관광객들이 방문해서 오래돼서 무너지는 네덜란드 요새를 답사하거나
원시 그대로의 산호초에서 다이빙을 즐기고 있다.
향신료의 유혹은 이제 과거지사가 되었다.
지금도 우리는 향신료가 우리 음식에 더해 주는 풍부하고 푸근한 풍미를 여전히 즐기고 있지만 향신료가 벌어들인 부, 향신료가 일으킨 전쟁, 향신료가 고무시킨 놀라운 탐사를 생각하는 일은 거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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값진 재물로서의 향신료
스바의 여왕, 선원 신드바드, 마르코 폴로 등 동양의 신비를 환기시키는 전설적 인물들은 모두 향신료와 관련이 있다. 또 성서에도 기원전 10세기경 솔로몬을 방문한 스바의 여왕이 금과 많은 보석, 방향물(芳香物)을 선물로 드렸다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 ‘방향물’이란 맛과 향에 변화를 주기 위해 음식이나 음료에 첨가하는 모든 물질을 가리킨다.
‘향신료’(e′pice)라는 단어는 1150년경에 프랑스에 나타났는데,
이는 프랑스어 ‘espe?ce’(돈)를 가리키는 라틴어 species에서 파생된 것이다.
이렇게 처음부터 금과 향신료는 서로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기에
금과 향신료는 역사 속에서 가장 값진 재물의 동의어로 남게 되었다.
치료와 향기, 저장수단으로서의 향신료
바빌론의 왕은 향신료를 넣은 요리와 포도주를 좋아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기원전 330년경 페르시아에 침입했을 때
다리우스 2세의 궁전에서 300명에 가까운 요리사와 향신료만을 담당하는
수많은 노예들을 보았다.
고대 이집트 역시 약용식물과 향수와 방향물을 신들에게 봉헌물로 바치거나
사람들의 병을 치유하고 향기롭게 하는 데 이용했다.
메로빙거 왕조가 쇠퇴하기 시작하자 많은 향신료가 다시 서양의 귀족과 재력가들,
그리고 수도원 등의 식탁에도 등장한다. 한
편 일반사람들이 향신료에 심취한 데에는 음식물을 저장하는 수단이 열악한데다
이용 가능한 먹을것들이 그리 많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완두콩, 잠두콩, 콩류, 뿌리들을 주된 양식으로 삼았기에
그 밋밋한 음식재료들을 맛나게 해주는 향신료에 열광했던 것이다.
또한 식료품의 냉장시스템이 부족한 탓에 고기류가 쉽게 부패했는데,
향신료를 넣은 소스가 상한 맛을 감춰줄 수 있었다.
富의 상징으로서의 향신료
로마에서 향신료는 싼 값에 살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또 메로빙거 왕조가 쇠퇴하기 시작하자 많은 향신료가 서양의 귀족과 재력가들,
그리고 수도원의 식탁 위에 등장한다.
그리하여 손님들은 자신들을 초대한 집의 요리 맛과 부(富)의 진정한 상징이 된
향신료들을 보고 그 집 주인을 평가했다.
귀족들은 양념들 중에서 가장 비싼 것들을 선호했다.
왜냐하면 비용이 요리의 가치와 식탁의 품격을 좌우하며 풍미 또한 돋우기 때문이다.
그들은 더 맛좋은 향신료들을 손에 넣기 위해
전 세계를 탐험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음식과 약품, 종교용품으로서의 향신료
18세기부터 향신료들(여러 가지를 혼합한 향신료들)을 주성분으로 해서 만들어진 양념들에 뚜렷한 변화가 나타난다.
뇌물로의 오용은 줄어들고, 요리의 맛은 그 자체로 인정되었다.
오늘날, 여전히 동양에서는 막대한 양의 향신료가 소비되고 있는 반면
(이를 증명하기 위해서는 인도에서 생활하거나 체류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서양에서는 중세시대에 그토록 높이 선호됐던
강렬한 맛들이 좀 소홀히 되는 경향이 보인다.
예를 들면 몇몇 예외를 제외하고는 포도주에 향신료가 첨가되지 않는다. 향
신료의 특혜는 몇몇의 리큐어와 아페리티프 종류에 주어지고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