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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리마당 단기서(段祺瑞) 명조
又新 추천 0 조회 236 23.12.23 14:20 댓글 26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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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23.12.24 11:27

    첫댓글 단기서의 명조는 여러 책에서 인용을 많이 한 명조입니다.
    쉬운 듯 하면서도 책에서 언급한 내용들이 달라서 혼란을 주고 심하면 명리서가 맞지 않다고 하는,
    그래서 회의감을 주는 명조입니다. 제대로 공부하신 분이라면 심각하게 고민하고 또도 고민해야하는
    명조입니다만, 이런 좋은 글에 댓글이 없다는 것은 제대로 공부하신 분들이 드물고, 만만하게 나는 이렇게
    본다는 등의 허접한 글들에만 댓글이 몰리는 세태가 한심할 뿐이지요.
    단기서의 명조는 자평진전뿐만이 아니라 조화원약, 자평수언, 적천수보주, 고고집등에 언급되어 있는
    명조입니다. 그리고 비슷한 사주로 거지사주로 언급된 임오시는 적천수에 나오는 명조이고요.
    임오시로 보는 책도 있고, 계미시로 보는 책들도 있는데, 같은 임오시로 본 것에서도, 적천수는 굶어죽은 사주로
    본 반면 위천리의 고고집이나 서락오의 명인명감에서는 단기서의 명조로 보았죠. 그외 대부분의 책에서는 계미시로
    봅니다. 서락오의 책들 중에서 같은 인물의 명조가 다르게 나온 것들이 몇개가 있는데, 어느것이 맞는것인가 하는 것은
    뒤에 나온 책에서 나온 것이 맞다는 것입니다. 즉 먼저 나온 책에서의 명조는 아직 공부가 덜 된 것이라는 것입니다.

  • 작성자 23.12.24 22:13

    명리학을 학문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지 않고 빨리 배워서 먹고살면 된다는 생각이 많은 것 같습니다.

    현업에 있는 분들은 굳이 어려운 공부를 하지 않아도 손님 받는데 큰 지장이 없으니까 할 필요성을 못 느끼는 것 같습니다.
    대충 동일명조도 다르게 살더라는 핑계거리가 있으니까요.

  • 23.12.24 11:41

    이것은 서락오의 책들을 읽어보면 스스로 인정한 것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제가 위천리를 싫어하는 이유는 그 풀이를 보면 억지를 쓰고 있다는 것을, 적천수의 풀이와 비교해보면
    금방 알 수가 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명조들을 볼 때에는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오랜만에 좋은 글을 보았고, 혹 이 글을 보시는 분이 명조들을 올리실 때에 복사를 허용하게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복사를 불허 하시는 분들을 보면 뭣 하러 글을 올리나 하는 생각도 드는 것이 사실입니다.
    공부를 하다가 보면 이론도 물론 중요하지만 사주 샘풀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느껴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 작성자 23.12.24 22:06

    위천리는 젊은 시절 역학으로 돈도 많이 벌고 유흥도 즐겼다고 하는데 말년에 홍콩으로 이주해 힘들게 살았다고 합니다.
    위천리는 명리보다는 육임이나 관상에 더 조예가 있었던 것이 아닐까 하는 느낌을 받습니다.

  • 23.12.24 16:24

    거지사주는 아니고 재물을 번 적도 있어서 가족을 형성하다가 운이 나빠 파재하여 중이 된 팔자입니다

    壬乙己乙
    午亥卯丑

    辛 壬 癸 甲 乙 丙 丁 戊
    未 申 酉 戌 亥 子 丑 寅

    此己土之財,通根在丑,得祿於午,似乎身財並旺,不知己土之財,比肩奪去,丑土之財,卯木剋破,午火食神,亥水剋之。壬水蓋之,無從引化,所謂上下無情也。初逢戊寅丁丑,財逢生助,遺業頗豐;一交丙子,沖去午火,一敗而盡;乙亥運,妻子俱賣,削髮為僧,又不守清規,凍餓而死[임철초]

    이 기토의 재성은 축토에 통근한다 또 오화에도 득록하니 마치 일신과 재성이 함께 왕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기토의 재물을 비견이 탈거함을 알지 못하고, 축토재성은 묘목의 극파를 당하고 오화는 식신인데 해수를 극하니 임수는 개두의 상으로 인화하여 종하지 못한다 소위 상하가 무정하다할 것이다 초년에 무인, 정축대운을 만나 재물이 생조를 만난 것이라 자못 재물이 풍족하였다 병자운으로 바뀌자 오화를 충거하니 일패하여 재산이 세더니 을해운에 처자를 모두 팔고 머리를 깍고 출가하였다 또 계율을 지키지 않더니 추위와 꿂주림으로 동사하였다 [임철초]

  • 23.12.24 13:43

    壬乙己乙
    午亥卯丑

    辛 壬 癸 甲 乙 丙 丁 戊
    未 申 酉 戌 亥 子 丑 寅

    劫祿身強,無官規範,只好取財瀉之,所幸己財祿在時支午,又有畜土通根,可用。早運北方雖非佳境,但有丙丁傷食瀉身生財,還可。不吉在子運中己祿被沖,亥子畜會水局,波折四起,波折未平,又入比劫之奪財之運。此等八字怎可言富貴?實在貧賤之極了。有一說,乃貧僧之造。可信。[서락오]

    겁재가 록이니 신강한데 무관사주라 규범이 없다 다만 부득히 재성을 취하는데 다행이도 기토 재성이 시지의 오화에 득록하였다. 역시 축토에도 통근하니 쓸만하다 초년 북방수운에는 비록 경치가 좋은 곳은 아니지만 병졍의 식상운에 일신을 빠르게 생재하니 재물이 있었다. 자수운에 기토가 득록한 오화를 충파하니 불길하다 해자축 수국이니 풍파가 사방에 일어났는데 역시 비겁운에 들어서자 탈재운이므로 풍파가 끝나지 않았다 이런 팔자를 어찌 부귀하다고 말하겠는가 실재로 빈천하게 끝난 사람이다 일설에 승려가 되었다고 하는데 믿을만 하다

  • 23.12.24 13:22

    壬 乙 己 乙
    午 亥 卯 丑(亡 72歲, 丙子)

    70 60 50 40 30 20 10 00
    辛 壬 癸 甲 乙 丙 丁 戊
    未 申 酉 戌 亥 子 丑 寅

    ----------------------------------

    *출전(出典):서락오(徐樂吾) 저(著) 고금명인명감(古今名人命鑑)-단기서

  • 23.12.24 13:55

    서락오의 적천수보주에는 단기서에 대한 명조를 다음과 같이 시간이  未時 로 소개되어 있다.

    癸乙己乙
    未亥卯丑 

    壬癸甲乙丙丁戊
    申酉戌亥子丑寅  

    지지가 해묘미 목국이다 그런데 팔자에 관이 없으니 곡직격을 구성한다 초년운에 용신을 도우니 특히 비겁의 양운이므로 일로가 순조롭다. 절경의 풍관이 끝이 없다 계유운에 유금이 축토를 서로 끌어 당기는데 묘목을 충한다. 비록 파란곡절이 많았지만 필경 관성과 인수가 용신이다 고로 이름을 천하에 알렸다 귀가 분명하다. 임신운에 축중의 신금이 신금을 인출하여 목금전투가 일어난다 임계수는 수왕하니 힘이 강한 식상을 제거하고 인효가 쟁투한다 절대 비경은 아니다 신미운에 국이 역행하니 불가행이다 이런 팔자는 만약 기토가 편재라면 정화는 식신이니 반드시 경계를 높이 오를 것이다[서락오]

  • 23.12.24 14:04

    이 서락오 계미시 간명을 보면 이해 안되는 구절들이 많습니다

    곡직격이라 간명을 해 놓고서는 발전했던 말년의 계유대운에 관성과 인수가 용신이니 이름을 천하에 알렸다고 하니까요[억지 해석을 하는 것 같음]

    일단 곡직격이 되면 관성을 만나면 패격으로 대패합니다 그런데 단기서는 계유운에 승승장구한 사람입니다
    고로
    즉 계미시가 틀립니다

  • 23.12.24 22:21

    단기서
    출생(出生):(陰曆) 1865년(同治 4년) 02월 09일 午時生
    사망(死亡):(陰曆) 1936년(民國 25년)
    독일에서 군사학을 공부하고 1911년의 신해혁명(辛亥革命)이 끝난 뒤   위안스카이 [袁世凱] 총통 밑에서 육군총장이 되었다. 1916년 위안스카이가 죽기 직전에 총리가 되었고 뒤이은 3정부에서도 계속 총리직에 있었다.

    65- 75- 85 - 95 - 1905- 1915
    戊 -丁 - 丙-- 乙 --- 甲---- 癸
    寅 -丑 - 子-- 亥 --- 戌 ---- 酉

    단기서는 1865년 출생자이므로 신해혁명이 성공한 후 1911년 이후에 등장한 인물 같아요 즉 그 이전 생애가 미상입니다 추측하기로는 고난이 심했을 것으로 추정이 되는데 왜냐하면 동일인물이 병자년에 자오충으로 일패하다가 을해운에 이르러 완전히 파가하죠 승려는 계유운까지 살지 못하고 동사한 것이죠 그런데 대운수가 다른 것이니 단기서가 중년에 고생하다가 잘 인내하여 수학하여 기다렸다면 계유운이 관인(官印)의 길로가 분명해서 태과(太過)한 비겁(比劫)을 금으로 극충하여 제어하는데 성공하기 때문에 큰 발전이 따를 수 있습니다

  • 23.12.24 14:28

    단기서는 1936년 병자년에 사망했는데
    역시 병자운에 패망한 승려 사주와 동일한 겁니다
    [오화가 자오충을 받아 대패하는 팔자임]

    또한 독일로 수학했다고 하는데
    독일은 금운이 강한 유럽이라 관성의 용신운으로 간 것도 사망하지 않고 벗틸 수 있었는데
    이처럼 거주하는 풍수가 행운이 됩니다[독일에서 군사학을 공부함]

    일단 동일명조라도 시대가 다르면
    대운수가 달라지므로 세운과 대운의 만남 또한 달라집니다
    독일은 금운이 강하여 본인의 용신운에 해당하는 곳이니 거주한 것도 변수가 됩니다

  • 작성자 23.12.24 21:54

    https://namu.wiki/w/%EB%8F%A4%EC%B9%98%EB%A3%A8%EC%9D%B4

    https://baijiahao.baidu.com/s?id=1764039597487851793&wfr=spider&for=pc

  • 23.12.24 21:57

    @又新 1865년 안후이성 허페이(合肥)의 루안(六安) 태평집에서 태어났다. 그의 할아버지 단패는 원래 장시성(江西省) 포양(鄱阳)현 사람으로 유명전과 사염을 거래하고 단련을 만들었으며 회군 통령에 이르렀다. 이런 배경 덕분에 집안이 부유하여 할아버지의 주선으로 숙천병영글방에서 6~7년간 공부하며 유복한 생활을 하였으나 1879년, 15세에 할아버지가 급서하면서 집안이 몰락했다. 1881년, 돤치루이는 은전 한잎을 가지고 루안을 떠나 2천리나 떨어진 산둥성 웨이하이웨이(威海卫)의 관대인 친척 단종덕을 찾아갔고 그의 도움으로 군대의 잡역부를 거쳐 사서로 일하게 되었다. 1883년에는 부친 단종문이 그를 면회하러 왔다가 돌아가는 길에 도적을 만나 살해당하는 비극을 겪었는데 상을 치루기 위해 휴가를 신청했으나 반려당했다.

  • 23.12.24 22:28

    @又新 이게.사실이면 승려팔자도 초년운에 유복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파가한 것이죠
    단서기도 어려서 유복했다가 조부 부친 사망으로 가난해처해 진것으로 봅니다

    다만 대운수가 다르것이므로 병자대운의 자수운에 세운이 동방목과 남방화윤으로 흘러요 또한 이 시기에 독일 군사학교 유학을 간 것이니까 금이 강한 나라에 퓽수의 영향을 받아서 버틸수 있다고 보았고

    을해운은 역시 전란이 발생한 겁니다
    전쟁기간에 길할 수 없는 것이죠 언제 죽을 지 모르니까요
    단서기도 분명히 을해운에 죽을 처지에 놓였던 겁니다 승려가 을해운에 파가하여 동사한 것처럼..
    그러다가
    역시 깁술토인 술토운에 오술합의 화기로 발복하기 시작하였고 계유운에 묘유충으로 겁재를 충에서 발복했다고 봅니다

  • 23.12.24 14:03

    중국내 많은 연구자들은 단기서의 시를 癸未시로 본다. 물론 壬午시로 보는 사람도 있다.

    癸乙己乙
    未亥卯丑

    壬癸甲乙丙丁戊
    申酉戌亥子丑寅

    단기서 사주는 해묘미목국이 분명하니까 전왕하다 할 만 하죠[지전삼물]
    따라서 순응해야 길한 것이니까 북방수운에 발전하고 서방금운에 필패합니다

    일단 곡직격의 전왕으로 본 것이면 관성운에 사망할 수 있는 사주인데
    오히려 계유운에 대발한 것이므로 계미시가 될 수 없습니다

  • 작성자 23.12.24 22:48

    년보를 살펴보면 癸酉운에 망한 것 같습니다.

  • 23.12.24 23:15

    @又新 1911년부터 1925년 까지

    여러 중책을 맡은 겁니다.
    와중에 낙락은 있어도요
    [국무의원이ㅡ아니더라도 야권 중책은 맡을 수 있겠죠]

    일국의 총사령관.총리가 흔한게 아니죠
    그런 중책을 술토 대운 시작해서 계유윤이 일구어 낸 겁니다

  • 23.12.24 23:09

    @갑진 1911년 신해혁명이 발생하자 위안스카이의 지시에 따라 혁명 진압에 나섰으나 강경진압을 주장한 펑궈장과 달리 남쪽과 정전협정을 체결하고 남북 평화협상을 주도하여 남방 측에 혁명에 우호적인 인물로 인식되었다. 위안스카이가 내각총리대신에 임명된 후 북양군 제2군 총통 겸 호광총독 대행, 북양 1군 사령관을 맡아 리위안훙의 호북군정부와 대치했다. 1912년 위안스카이와 혁명군의 합의가 이루어짐에 따라 북양군 장교 46명과 연명으로 선통제 퇴위를 강요하고 2월 5일, 1군 협통..

    1924년 2차 직봉전쟁이 일어나자 북경정변으로 펑위샹이 차오쿤을 축출하고 베이징을 장악했으며 1924년 11월 15일 장쭤린과 펑위샹의 초청으로 임시 집정에 임명되어 다시 중국의 지배자가 될 수 있었다.

  • 작성자 23.12.24 23:16

    @갑진 다시 중국의 지배자가 될 수 있었다. 하지만 실권은 장쭤린에게 있었다.
    ---

    허수아비에 지나지 않은 자리라고 봐야지요.

  • 23.12.24 23:23

    @又新 하이고

    그래서 일국의 2위를 파격으로 보는 겁니까.

    2위던 3위던....귀격이라 봐야죠

    총리가 안되면
    국무위원이라도 하는 겁니다
    그런 자리가 망했다고 보시나요
    무슨 동네 이장출신 선거하는 것도 아니잖습니까.ㅋ

    중국 서열 2위를 청년시절의 군사학교 교관하고 비교하면 안되죠

    그러니까
    병자운.을해운은 아직 귀격이라 할 수 없는 것이고요
    술토대운 계유운에 이르러서 귀격이라 말할 수 있더는 사실입니다

  • 23.12.24 16:37

    단기서는 未시라야 납득이 됩니다.

    癸乙己乙
    未亥卯丑 곡직격

    壬癸甲乙丙丁戊 대운0세
    申酉戌亥子丑寅

    실제 단기서는 酉대운 시작
    1919년 55세 5·4 운동으로 반일 규탄시위로 정치적인 위기를 맞음.

    1920년 56세 庚申년 직환전쟁에서 배패한후 은퇴.

    임신대운 60세 갑자년에 펑위샹의 쿠데타.. 요청에의한 임시집권하였으나 펑위샹의 들러리 신세

    62세 병인년 학생들 유혈진압. 펑위샹에게 축출 .4월

    텐진의 일본 조계로망명 불교에 심취..

    1933년 상하이로 이주.
    1935년 국민정정부 위원임명. 거절
    1936년 11월 사망.

    자평진전 평주 서낙오 서문 1936년이므로 당시 단기서의 행적을 미루어 미시라고 바꾼것이라 추정..



  • 23.12.24 16:44

    신해혁명 이전에도 잘나감.
    부친은 무관출신

    20대 독일유학후 군관으로 활동
    신해혁명 직전 위안스카이의 3대 심복
    ..위키백과 참조..

    곡직격이니 월간 己土가 病임.
    갑을운에 병을 제거..

    또 乙人 삼합 해묘미이면..
    득일삼분격에 해당. 제후의 명이라 묘선에 나옴.





  • 23.12.24 17:13

    단서기

    그의 조부는 군인이엿으나 그의 아버지 Duan Congwen은 시골에서 일했고 그의 어머니는 Fan이었습니다. 
    1878년 두안페이(Duan Pei)가 직위에서 사망하고, 두안치루이(단서기 Duan Qirui)는 허페이(Hefei) 시샹(Xixiang)으로 전학을 갔다가 1년여 만에 가난으로 인해 학교를 그만뒀다
    1882년에 아버지는 방문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강도를 당해 살해당했고,
    사건은 곧 해결되어 살인자가 잡혔다. 이듬해 어머니는 슬픔에 잠겨 돌아가셨다
    부모가 일찍 돌아가셔서 외할머니 밑에서 자랐다.

    -어릴적 청년시기에는 가난하기 때문에 조부의 영향을 받아 군사학교로 진학한 것 같습니다

  • 23.12.24 17:15

    子대운 이십대 중반 부터 풀림..
    두차례 문과에 도전했다가 실패 포병으로 입대.?.

    己토가 병이니 10대 정축.병대운은 병을 살려주니..좋을게 없겠죠.

  • 23.12.24 17:18

    안휘성 출신으로 증국번과 이홍장이 지휘하던 회군에서 복무했던 단종문(段從文)과 그의 아내 범씨(范氏)의 아들로 태어났다. 1885년 북양무비학당에 입학하여 포병과를 전공하였다. 1889년 해외유학생으로 선발되어 2년간 독일 제국에서 유학하였다. 중국에 돌아와서 위안스카이가 지휘하던 북양군에 들어갔고, 톈진에서 병사들을 지휘감독하였다. 이 때, 위안의 심복이 되었으며, 펑궈장, 왕스천과 함께 "북양삼걸(北洋三杰)"로 불렸다.

    위키..

  • 23.12.24 17:10

    壬乙己乙
    午亥卯丑

    壬癸甲乙丙丁戊
    申酉戌亥子丑寅

    록겁용재 己토가 용신임.
    좌우 쟁탈당하니 재물,처가 뜬구름 같다.

    병대운까지 탈재를 막아주니 재물이 풍성 .

    子대운 기토의 록을 파괴, 군비쟁재이니 일패도지..

    을해운 처자를 팔아먹고 승려가 되었지만 규율을 지키지 못하고 쫒겨나 굶어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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