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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2월 6일 대림 제1주간 금요일
제1독서 : 이사 29,17-24
복 음 : 마태 9,27-31
그때에 27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는데 눈먼 사람 둘이 따라오면서,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외쳤다.
28 예수님께서 집 안으로 들어가시자 그 눈먼 이들이 그분께 다가왔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내가 그런 일을 할 수 있다고 너희는 믿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들이 “예, 주님!” 하고 대답하였다.
29 그때 예수님께서 그들의 눈에 손을 대시며 이르셨다.
“너희가 믿는 대로 되어라.”
30 그러자 그들의 눈이 열렸다. 예수님께서는
“아무도 이 일을 알지 못하게 조심하여라.” 하고 단단히 이르셨다.
31 그러나 그들은 나가서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를 그 지방에 두루 퍼뜨렸다.
<오늘의 묵상>
김재덕 베드로 신부
복음에 나오는 눈먼 두 사람은 예수님께서 그들을 고쳐 주실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내가 그런 일을 할 수 있다고 너희는 믿느냐?” “예, 주님!”(마태 9,28)
이들은 그저 ‘가만히’ 있지만은 않았습니다.
복음은 눈먼 두 사람의 행동을 다음과 같이 묘사합니다.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는데 눈먼 사람 둘이 따라오면서,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외쳤다(직역: 울부짖었다).
예수님께서 집 안으로 들어가시자 그 눈먼 이들이 그분께 다가왔다”(9,27-28).
눈먼 두 사람은 ‘따라갔고’, ‘외쳤고’, ‘다가갔습니다.’
참된 믿음은 예수님을 ‘따라가게’ 하고,
그분께 ‘울부짖게’ 하며, 그분 곁으로 가까이 ‘다가가게’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믿음에서 나오는 이런 행동을 보일 때,
다른 것이 아닌 바로 그 믿음의 힘으로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은총을 나누어 주십니다.
“너희가 믿는 대로 되어라”(9,29).
만일 기도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기도하지 않고 있다면,
성체 앞에 다가가 예수님께 울부짖으며 은총을 청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꿈적도 하지 않고 있다면,
하느님께서 고해성사를 통하여
우리의 모든 죄를 없애 주신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고해소로 향하지 않고 있다면,
여러분은 ‘죽은 믿음’, ‘아무 힘도 드러내지 못하는 믿음’을 가진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답을 알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불행한 신앙인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복음에 나오는 눈먼 두 사람처럼 우리의 믿음이 예수님께 다가가
필요한 은총을 청하는 힘을 드러내면 좋겠습니다.
“너희가 믿는 대로 되어라.” 아멘.
조명연 마태오 신부
언제나 한결같은 사람이 정상일까요?
아니면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는 사람이 정상일까요?
사람들은 한결같은 사람이 정상이라고 말하면서,
한결같지 않은 사람을 향해서는 비난하는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정말로 한결같은 사람이 정상일까요?
어느 드라마에 이런 대사가 나왔다고 합니다.
“사람이 그렇게 한 겹이야? 삼겹살도 세 겹인데….”
여러분의 마음은 몇 겹이 되는 것 같습니까?
사람의 마음은 한 겹이 될 수 없습니다. 무수한 마음과 감정이 있는 인간인 것입니다.
그래서 누군가로부터 “너는 이중적이야!!”라는 말을 들으면 반성해야 할 것입니다.
겨우 두 겹밖에 안 된다는 것으로, 너무 단순하게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침, 저녁, 저녁에 생각하는 것이 모두 다를 수밖에 없고,
이렇게 다른 것이 지극히 정상적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똑같은 모습만을 가지고 있어야 정상인 것처럼 생각합니다.
미사에 참석할 때 매번 기쁘십니까?
당연히 주님의 잔치에 함께하는 것이니 기뻐해야 하지만 때로는 슬픔의 감정도 갖게 됩니다.
활기차게 오늘 하루 살겠다고 다짐하지만 1시간도 지나지 않았는데,
피로감을 느끼고 주저앉기도 합니다.
어때요? 이렇게 몇 겹의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비정상적일까요?
아닙니다. 이것이 인간입니다.
그런 인간인 ‘나’인데, 이런 인간인 ‘남’을 왜 인정하지 못할까요?
자기는 지극히 정상적인 다중적인데, 다른 사람의 이중적인 모습에 분노한다는 것이
얼마나 이율배반적인 모습인가요?
따라서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인정한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주님께 대한 믿음도 여기서 시작했습니다.
눈먼 사람 둘이 예수님을 따라오면서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라고 외칩니다.
소문을 들어 알겠지만, 그들이 직접 예수님의 능력을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무것도 볼 수 없는 눈먼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소문은 놀라운 기적을 행한다는 것도 있었지만,
마귀 우두머리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서 기적을 행한다는 부정적인 내용도 있었습니다.
또 유다인들이 존경하는 종교 지도자들의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소문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직접 보지 않아도 믿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믿는 대로 되어라.”라고 하셨고, 그러자 그들의 눈이 열렸습니다.
무성한 소문에 충분히 흔들릴 수 있는 상황이었어도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믿는 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주님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많은 말이 많습니다.
그런 말에 흔들리는 것이 아니라,
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주시는 주님이라는 믿음으로 주님 앞에 나아가야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있는 그대로의 주님을 받아들이는 것이 됩니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도 우리는 눈을 뜨며 깨어나고, 눈을 감으며 잠에 듭니다.
그런데 묘한 것은 눈을 감아야 더 잘 보이는 것이 있고,
눈을 뜨고도 전혀 보지 못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리고 눈을 뜨고도 보지 못하는 이가 있고, 눈을 감고도 보는 이가 있습니다.
오늘 독서에서는 말합니다.
“그날에는~ 눈먼 이들의 눈도 암흑과 어둠을 벗어나 보게 되리라.”(이사 29,17)
복음 환호송에서는 노래합니다.
“보라, 우리 주님이 권능을 떨치며 오시어, 당신 종들의 눈을 밝혀주시리라”
그리고 복음은 ‘눈먼 두 사람의 눈이 열려 보게 된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는데, 눈먼 사람 둘이 따라와서 집 안에까지 따라 들어왔습니다.
그들은 눈이 멀어, 보지도 못하는 사람들이었는데도 말입니다.
그러니 그들은 비록 눈은 멀었어도 믿음으로 이미 눈 뜬 이들이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볼 수는 없었어도 그분에 대해서 들을 수는 있었습니다.
보지 못하면서도 들은 바를 믿었으니, 진정 복된 이들이었습니다.
많은 이들은 보고도 믿지 못하는데, 보지 못하면서도 믿었으니 말입니다.
그러니 그들은 이미 눈이 열린 이들이었던 것입니다.
곧 믿음의 눈이 열린 이들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이 이야기는 눈먼 이가 보게 된 이야기가 아니라,
‘믿는 이가 보게 된 이야기’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그들의 눈을 치유해 주실 것을 믿었고,
그래서 그 믿음이 이루어졌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분을 보지 못하게 하는 것은 우리의 불신이요,
그분을 보게 하는 것은 바로 우리의 믿음일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눈에 손을 대시며 이르셨습니다.
“너희가 믿는 대로 되어라.”(마태 9,29)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믿음을 기다리십니다.
그것은 우리에 대한 그분의 믿음입니다.
그분의 이 믿음에 우리의 믿음이 하나가 된 것입니다.
그러자 눈이 열렸습니다.
예수님은 믿음으로 손을 대시고, 그들은 믿었습니다.
예수님은 믿음으로 말씀하시고, 그들은 말씀을 믿고 눈을 떴습니다.
그렇습니다.
눈먼 이들은 건강하게 되어서 믿게 된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써 건강해졌던 것입니다.
그들은 믿었기에 눈이 열린 것이지, 눈이 열렸기에 믿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원하는 바를 믿은 것이 아니라, 믿는 바를 원했던 것입니다.
먼저 믿고, 믿는 바를 청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믿음에서 참된 빛이 오고, 믿음에서 참된 관상이 옵니다.
그들은 길을 가는 동안에는 보지 못한 채, 믿음으로 길을 걸었습니다.
그런데 집 안에 들어가서야 보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지금은 믿음으로 걸어가지만,
그날이 오면 그분의 집안에서 참 빛을 보게 될 것입니다.
“주님은 나의 빛 나의 구원이시다.”(시편 27,1, 화답송 후렴)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마태 9,27)
주님!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
보지 못하게 하는 불신의 암흑을 벗어나 보게 하소서.
먼저 믿고, 믿는 바를 청하게 하소서.
원하는 바를 믿은 것이 아니라 믿는 바를 원하고,
보게 되어 믿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보게 하소서.
믿음의 눈을 열어 주시어, 나를 먼저 믿으시는 당신의 믿음을 보게 하소서.
이미 자비를 입었으니 자비를 베풀게 하소서. 아멘.
그들의 눈이 열렸다.
반영억 라파엘 신부
사람마다 다르긴 하지만 꼭 이루고 싶은 소망이 있습니다.
그 소망을 이루기 위해서는 그만한 노력이 필요합니다.
생각지도 않게 소망이 이루어질 수도 있지만,
정성과 사랑을 쏟았을 때 더 큰 기쁨을 누리게 되고 보람을 차지하게 됩니다.
최선을 다했으면 그것으로 만족한 것입니다. 그것이 행복입니다.
그런데 자꾸만 다른 것과 비교하니까 있던 행복도 사라지고 맙니다.
어떤 눈먼 사람 둘이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소망이 무엇이겠습니까? 눈을 뜨는 것입니다.
눈을 뜨려면 눈을 치료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사람을 만나야 합니다.
그들은 마침 길을 지나가시는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마태9,27). 하고 외쳤습니다.
그리고 자비를 입어 눈이 열렸습니다.
그들에게는 눈을 뜨고자 하는 소망이 있었고,
그것을 이루어 주실 예수님께 대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그 믿음을 인정하였습니다.
그들은 믿음으로 희망하였고, 하느님의 능력을 체험했습니다.
믿음으로 하느님으로부터 모든 것을 받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매일의 묵상을 통하여 예수님을 향한 믿음과 사랑의 성장을 이루고
마침내 주님의 능력에 감사할 수 있길 기도합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 그림은
밀라노의 어떤 백작의 요청에 따라 3년 동안에 걸쳐 완성했다고 합니다.
그 그림은 예수님께서 중앙에 앉아 계시고 제자들이 양옆에 앉아서
함께 마지막 식사를 하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처음 그림은 예수님께서 오른손에 잔을 들고 계셨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볼 수 있는 그림은 그렇지 않습니다.
거기에는 한 사연이 있는데
다빈치는 작품이 완성될 무렵에 친구에게 그림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러자 그 친구가 대뜸 “다빈치, 여기 예수님께서 든 잔은 꼭 진짜 같은데!”라고 말했습니다.
이 소리를 듣고 다빈치는 그림을 수정하였답니다.
진짜같이 보이는 잔을 지워 버리고 예수님의 팔이
가만히 탁자 위에 올라가 있는 지금의 모습대로 말입니다.
그것은 그의 믿음이 그렇게 했습니다.
결코, 예수님보다 더 중요하게 드러나는 부분이 있어서는 안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때 나이가 43살이었답니다. 저는 그동안 무엇을 했나 모르겠습니다.
신앙인이라고 하면서 우리의 삶은 예수님보다 더 중요한 것이 너무 많습니다.
돈도 벌어야 하고요, 취미생활도 해야 하며, 분위기 좋은 곳에 가서 친구도 만나야 합니다.
때맞춰 여행도 해야 하고, 입에 맞는 음료도 마셔야 하며 할 일이 너무 많습니다.
먹고, 마시고 즐겨야 합니다. 그러다 보면 기도는 물론 미사도 소홀히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보다도 세상 것을 즐기고 찾고 있다면 눈뜬장님입니다. 무늬만 신앙인입니다.
신앙인은 잠시 스쳐 지나가는 것에 매달리지 않고, 영원히 남는 것을, 붙들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육적인 눈뿐 아니라 영적인 눈, 믿음의 눈을 떠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이 세상을 심판하러 왔다.
보지 못하는 이들은 보고, 보는 이들은 눈먼 자가 되게 하려는 것이다”(요한9,39).
보고 있다고 착각하는 눈을 어루만져 참으로 볼 수 있게 해주십시오.
주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눈을 뜨게 해주십시오.
주님께 대한 믿음으로 영적인 시력을 회복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포트워스 신부님, 안식년 중인 동창 신부님과 엘파소엘 다녀왔습니다.
10시 15분 비행기였는데 기상 악화로 2시간 지연되었습니다.
덕분에 공항에서 걸을 수 있었고, 음악회 프로그램에 들어갈 인사말을 준비할 수 있었습니다.
때로는 늦는 것도 도움이 될 때가 있습니다.
후배 신부님은 엘파소의 명소인 ‘화이트 샌드’로 안내해 주었습니다.
2시간 늦었기에 화이트 샌드에서 석양을 볼 수 있었습니다.
때로는 늦는 것이 도움이 될 때가 있습니다.
사제관에 도착하니 교우분들이 맛있는 저녁을 준비해 주었습니다.
엘파소는 주일에 30명 정도 나오는 공동체입니다. 15가정 정도 된다고 합니다.
제가 있는 달라스는 주일에 800명 정도 나오는 본당입니다.
규모의 차이는 있지만 하느님의 축복과 하느님의 사랑은 같습니다.
하느님의 은총은 공동체의 크기에 비례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은총은 공동체의 믿음에 따라서 주어집니다.
공동체가 믿음으로 서로 이해하고, 사랑으로 서로 나누며,
희망으로 기쁘게 살아간다면 그곳이 바로 하느님 나라입니다.
2박3일 짧은 일정이었지만 형제들이 함께 모여 이야기를 나누는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예전에 ‘시골 쥐와 서울 쥐’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시골에서 평화롭게 살던 시골 쥐는 어느 날 친구인 서울 쥐를 초대합니다.
시골 쥐는 자신이 먹는 소박한 음식을 서울 쥐에게 대접합니다.
하지만 서울 쥐는 음식을 보며 비웃으며 말합니다.
‘이런 초라한 음식을 먹고 산다니, 내게 오면 훨씬 더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 있어!’
서울 쥐는 시골 쥐를 도시로 초대합니다.
도시에는 화려하고 맛있는 음식들이 가득했지만, 문제는 위험이 많다는 것이었습니다.
맛있는 음식을 먹으려던 두 쥐는
고양이가 갑자기 나타나 도망쳐야 했고, 사람들에게도 쫓기기 일쑤였습니다.
결국 시골 쥐는 말합니다.
‘나는 이렇게 위험천만한 삶을 살면서 맛있는 음식을 먹기보다는,
안전하고 평화로운 내 삶으로 돌아가고 싶다.’
남의 떡이 커 보인다는 말이 있습니다.
주어진 현실에 만족하면서 기쁘게 사는 것이 현명한 삶의 태도입니다.
물질적 풍요와 화려함은 겉보기에 매력적일 수 있지만,
그것이 안전과 평화를 희생한다면 그 가치는 줄어듭니다.
꼭 남의 삶을 부러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자신의 상황 속에서 행복을 찾는 것이 진정한 만족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나는 비천하게 살 줄도 알고 부유하게 살 줄도 압니다.
배부르거나 배고프거나, 넉넉하거나 궁핍하거나
그 어떤 경우에도 대처할 줄 아는 비결을 배웠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간다면 어느 곳에서도 위로와 평화를 찾을 수 있습니다.
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간다면 어느 곳에서도 불평과 불만이 넘쳐날 겁니다.
오늘 독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날에는 귀먹은 이들도 책에 적힌 말을 듣고,
눈먼 이들의 눈도 어둠과 암흑을 벗어나 보게 되리라.
겸손한 이들은 주님 안에서 기쁨에 기쁨을 더하고,
사람들 가운데 가장 가난한 이들은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 안에서 즐거워하리라.”
저는 그날이 시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기다리기도 했고, 그래서 떠나려고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날은 저의 마음이었습니다.
그날은 시간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날은 어떠한 처지에서도 감사하는 마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날은 언제나 기뻐하는 마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날은 늘 기도하는 마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불평하고, 지금 원망하고, 지금 비관하면 언제나 제가 머무르는 곳은 가시방석입니다.
그러나 지금 감사하고, 지금 기뻐하고, 지금 기도하면 제가 머무르는 곳은 언제나 꽃자리입니다.
넉넉한 마음과 진중한 마음으로 신자들과 함께하는 신부님들에게
그날은 늘 ‘꽃자리’가 되리라 생각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눈이 먼 소경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비록 앞을 볼 수 없었지만, 소경은 불평하거나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비록 앞을 볼 수 없었지만, 소경은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시는 예수님의 소문을 들었습니다.
가난한 이들과 함께하신다는 예수님의 소문입니다.
아픈 이를 치유해 주신다는 소문입니다.
죄인들을 따뜻하게 품어주신다는 소문입니다.
그래서 앞을 볼 수 없었지만, 소경은 주님께로 나아갔습니다.
그리고 눈이 먼 것은 죄를 지었기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것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소경의 갈망을 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비록 눈이 멀었을지라도 하느님의 사랑을 보았던 소경의 마음을 보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믿는 대로 되어라. 그러자 그들의 눈이 열렸다.”
감사할 수 있다면, 기뻐할 수 있다면, 기도할 수 있다면
주님께서는 우리의 영적인 마음을 환하게 열어 주실 것입니다.
두 소경의 눈을 보게 하시다.
조욱현 토마 신부
소경 두 사람이 예수님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하고 청하였다.
예수께서는 “내가 그런 일을 할 수 있다고 너희는 믿느냐?” 하셨을 때,
그들은 “예, 주님!”하고 그들이 대답하자
예수께서는 그들의 눈을 만지시며 치유해 주셨다(27-30절).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데리고 가까운 집으로 가신다.
그리고 본 이가 아무도 없는 곳에서 고쳐 주시며
아무에게도 일 일을 이야기하지 말라고 하신다.
군중들에게서 칭송을 받는 것을 경계하시고 그렇게 하라고 하신다.
두 사람은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듣기만 하고도 믿음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자신들의 눈으로 이 기적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들은 곧바로 복음을 선포하는 사람들이 되었다.
그들은 그때 일어난 일을 알리지 말라는 지시를 들었지만, 그 일을 알렸다.
이 소경들의 치유 기적은 하나의 표징으로서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 앞에 “빛”을 필요로 함을 가르쳐주고 있다.
두 눈먼 사람들은 믿음이 없음을 나타낸다.
그들은 아직 참된 빛, 곧 율법과 예언서가 예고한 하느님의 외아들을 볼 수 없었다.
이 두 사람은 하느님의 아드님에 대한 믿음을 고백하자마자 시력을 되찾았다.
소경들의 되찾은 시력은 우리가 항상 청해야 할 신앙의 빛을 의미한다.
우리 자신을 보면 그것을 만들어내지도 못하면서
너무나 쉽게 그 빛을 잃어버리고 잃어버린 줄도 모르는 경우가 많다.
이 빛은 우리가 청하고 받아들일 자세만 되어 있다면
하늘로부터 끊임없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놀라운 선물이다.
우리는 지금 예수님의 우리 인간의 역사 내에 오심의 신비를 거행하고 있다.
예수님의 이 ‘오심’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빛이 필요한 것이며,
이 신비를 이해할 수 있는 내적인 “빛=밝음”은 신앙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이 소경들의 치유 사화는 상징적으로 말해주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탄생하시고 우리 가운데 임하시는 그 신비를 이해하고
또한 우리의 삶 속에 그것을 체험할 수 있으려면
이 소경들이 예수님께 가지고 있었던 큰 믿음의 “빛”이 필요한 것이다.
슬픈 예감을 전혀 가질 필요가 없게 하는 믿음이 있다.
전삼용 요셉 신부
왜 슬픈 예감은 절대 틀리지 않는 걸까요?
왜 부정적인 예측은 항상 현실이 될까요?
이런 가사의 노래도 있습니다. 실제로 그런 경험을 하며 살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대부분의 부정적인 이해가 현실이 되어 눈 앞에 펼쳐지기 때문입니다.
엊그제 현 대통령이 한밤중에 계엄선포를 하였습니다.
군대가 국회를 난입하여 무언가를 장악하고 방해하려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는 하루 만에 감정적으로 시행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다행인 것은 국회의원들이 당일 회의를 위해 대부분 서울에 머물고 있어서
신속하게 과반수 이상 모일 수 있었다는 데 있습니다.
국회에 통보하지 않고 계엄을 선포해
소위 반국가 세력을 척결하려 하였다면 이는 내란죄에 해당한다고 합니다.
내란죄의 수장과 깊이 관련된 이들에 대해서는
사형이나 무기징역과 같은 벌에 처합니다.
앞으로 어찌 될지는 모르겠지만, 윤 대통령은 왜 자기 운명을 이렇게 재촉하는 것일까요?
그가 사는 세상은 무언가 두려움의 세상입니다.
자신과 가족을 음해하려는 종북세력이 넘쳐나는 환경에 놓인 것입니다.
거의 망상에 가깝습니다.
이렇게 올바른 상황의 판단이 안 될 때 생기는 감정이 ‘두려움’입니다.
두려움은 내가 잃을 게 많다는 잘못된 믿음과
나의 것을 빼앗으려 하는 이들이 많다는 잘못된 두 믿음의 결합으로 나타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믿는 대로 되어라.”
두려워하면 두려운 일이 생기고,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은 기분이 들면 좋은 일이 생긴다는 뜻입니다.
행복한 삶을 위해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법칙 하나만 뽑으라 하면
저는 이것을 뽑고 싶습니다.
이 원칙은 우주의 법칙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이 법칙을 믿지 않습니다.
아마 윤 대통령이 많이 갖지 못했을 때는 그만큼 두려움도 적었을 것입니다.
감사원장, 서울 지검장 탄핵 결의가 있는 날이 있는 날이었습니다.
이는 대통령 관저와 김건희 여사와 직결되는 사항이었습니다.
사실 예산안에 대한 것은 거의 700조에 가까운데
심의에서 4~5조 조정안에 관련된 것이라 결정적인 이유가 될 수 없습니다.
설사 이유가 된다고 해도 국회에서 예산안 심의하는 것을 가지고
대통령이 계엄령을 발포할 사유는 되지 못합니다.
실제로는 자기 사람들을 보호하려는 의지가 컸다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 사람은 자기가 지킬 수 있다고 착각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죽음 앞에서 사람은 무엇을 가질 수 있을까요?
그때는 아무것도 가질 능력이 없는 존재임을 스스로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내 힘으로는 아무것도 지킬 수 없고
내 힘으로는 아무것도 가질 수 없음을 아는 게 믿음입니다.
이번 계엄은 대다수 전문가가 볼 때
국가 혼란 상태는 아니었다는 결론이 날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행복하기를 원하십니다. 그
래서 “믿는 대로 되어라!”하고 말씀하십니다.
무엇을 믿으라는 말씀일까요?
오늘 두 소경은 예수님께서 자신들의 눈을 뜨게 할 능력이 있는 분임을 믿었습니다.
예수님을 어디까지 믿어야 두려움이 완전히 사라지고 두려운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요?
나를 고칠 수 있는 분은 나를 창조한 분일 수밖에 없습니다.
높은 곳에 흔들다리를 만들고 유리로 아래가 보이게 하는 관광지가 많습니다.
많은 이들이 두려움에 떨면서도 결국 떨어지지는 않을 것이라 믿고 즐깁니다.
놀이기구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주 가끔 사고도 나지만, 교통사고 날 확률보다 적기 때문에 그런 것을 즐깁니다.
그렇게 믿을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을 만든 이가 바로 인간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녀도 탈 수 있는 놀이기구를 위험하게 만들 리 없습니다.
결국 자기 자신과 온 세상의 창조자를 믿기 전까지는 완전히 두려움을 떨쳐버릴 수 없습니다.
두려우면 두려운 일이 일어납니다. 물론 긍정적인 믿음으로 성공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두려움은 우리 생명과 관련되기 때문에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믿어야 합니다.
무엇을? 바로 세상에 오신 그리스도께서 우리 창조자이시기 때문에
망가지면 고치실 수 있고 죽으면 다시 살리실 수 있는 분임을 믿는 것입니다.
그분의 능력을 믿을수록 우리는 평화를 얻고 그 평화가 우리를 선하게 만들고
온유하게 하며 결국엔 구원에 이르게 합니다.
창조자를 믿어서 손해 볼 게 없습니다.
개안의 여정
“눈먼 무지의 병에 대한 근원적 처방은 주님과의 만남뿐이다.”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주님은 나의 빛, 나의 구원, 나 누구를 두려워하랴?
주님은 내 생명의 요새, 나 누구를 무서워하랴?”(시편27,1)
교황님의 카리타스 대표단에 주신 말씀이 참 신선했습니다.
“Be teachers of wisdom(지혜의 교사가 되어라)”
어지러운 세상에서 참으로 필요한 어른은 지혜의 교사일 것입니다.
지식이나 재능이 아닌 지혜의 덕입니다. 옛 현자의 지혜로운 말씀입니다.
“덕이 모자라서 패가망신한 수많은 사례들이 있지만,
아직도 우리는 사람을 볼 때, 그 재능만 바라보고 추앙한다.”<다산>
“나라를 어지럽힌 신하와 집안을 망하게 했던 자식은 재주는 넘치지만 덕이 부족하다.
이로써 거꾸러진 자가 많다.”<자치통감>
완벽한 재능보다는 뭔가 부족하고 모자라 보이는 겸손한 이들의 적당한 빈틈은
결점이 아니라 오히려 덕이자 지혜요 사랑임을 깨닫습니다.
오솔길 아늑한 사진과 더불어 수도형제와 주고 나눈 덕담이 있어 나눕니다.
“시가 나올 것 같은 그림이지요.”
“그림 자체가 시네요.”
이어 짧은 시를 전했습니다.
“오솔길
넘어
임 계신 곳
주님의 빛 속에
걸어들 가자
오늘도
내일도
우리 함께”
즉시 받은 답글입니다.
“저는 저 길 넘어 모레 엄마 보러 갑니다.ㅎㅎ”
엄마가 있어 고향집 휴가입니다.
우리의 본향은 임 계신 곳 천상의 아버지의 집이고
지상에서 천상을 향한 순례여정중의 삶입니다.
믿는 이들 누구나 이런 ‘본향집에 대한 향수(homesick at home)’를 지니고 있는 법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눈먼 두 사람이 우리의 근원적 갈망을 대변합니다.
어찌 보면 대다수가 무지의 눈먼 사람들 같습니다.
요 몇 년간 동방영성에서 주요 소재가 되는
순전히 지혜의 결핍인 무지에 대해서 얼마나 강조했는지 모릅니다.
무지의 죄. 무죄의 악, 무지의 병, 무지의 해악은
인간 재앙과 불행의 근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번 비상계엄의 내란 행위도 그대로 무지의 절정을 보여줍니다.
오죽하면 “미쳤다, 바보다”라는 말이 나오겠습니까?
사람을 미치게 하는, 바보로 만드는 무지의 죄악입니다.
무지에 눈멀면 답이 없습니다. 무지의 벽이라면 지혜의 문입니다.
대하다 보면 답답하고 불편한 벽 같은 불통의 사람은 완고한 무지의 사람이고
가슴이 탁 트이고 편안하게 하는 소통의 사람은 온유한 지혜의 문 같은 사람입니다.
눈먼 무지에 대한 답은 지혜의 원천인 주님과의 만남뿐입니다.
복음의 눈먼 사람은 믿음의 눈은 활짝 열렸기에
주님만이 구원임을 깨달아 부르짖습니다.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빛이신 주님을 보고자 하는 갈망이
믿음의 눈을 활짝 열어 주었고 이어지는 주님의 응답입니다.
이런 심정으로 자비송을 바치며 미사를 시작하는 것입니다.
“내가 그런 일을 할 수 있다고 믿느냐?”
“예, 주님!”
“너희가 믿는 대로 되어라.”
눈이 열린 이들은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를 그 지방에 두루 퍼뜨립니다.
주님을 만남으로 무지의 눈이 활짝 열려 어둠에서 벗어난 두 맹인입니다.
그대로 대림시기는 이사야 예언이 실현되는,
날로 믿음의 눈이 열려가는 개안의 여정 시기이기도 합니다.
“그날에는 귀먹은 이들도 책에 적힌 말을 듣고.
눈먼 이들의 눈도 어둠과 암흑을 벗어나 보게 되리라.
겸손한 이들은 주님 안에서 기쁨에 기쁨을 더하고,
가난한 이들은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 안에서 즐거워하리라.”
주님만이 참된 기쁨에 행복이요 참된 지혜요 부요임을 깨닫습니다.
바로 복음의 겸손하고 가난했던 두 맹인은 이런 주님을 만났고
이제 온전히 날로 주님을 찾아 지혜로워지는 개안의 여정을 살게 되었습니다.
주님과의 만남 중에 날로 눈은 열려 밝아지고 벽은 차차 변하여 문이 됩니다.
참으로 추구할 바 개안이요 지혜입니다.
날로 작아지는 무지의 벽과 더불어 날로 넓어지는 지혜의 문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벽이 없이 온통 사면팔방으로 활짝 열린
지혜의 문, 생명의 문, 사랑의 문, 진리의 문이셨던 분입니다.
무지에 대한 근원적 처방이자 답은 지혜 자체이신 주님과의 끊임없는 만남뿐입니다.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무지의 병을 치유하시어
날로 지혜로워지는 개안의 여정을 살아가게 하십니다.
“주님께 청하는 오직 한 가지,
나 그것을 얻고자 하니,
내 한평생, 주님의 집에 살며, 주님의 아름다움 바라보고,
그분의 성전 우러러보는 것이라네.”(시편27,4). 아멘.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