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초기 폭군으로 알려진 임금은 누구일까?
모본왕
5대 모본왕은 고구려 역사에서 처음으로 신하들에게 죽임을 당한 인물이다. 그는 고구려의 대표적인 폭군으로 알려져 있다. 모본왕은 대무신왕의 원자로 태어나 대무신왕15년(32)에 태자로 책립되었으나 왕이 죽자 태자가 어리다 하여 대무신왕의 동생인 민중왕이 왕위에 올랐다. 후에 민중왕이 죽자 왕위를 계승하였다. 《삼국사기》에는 모본왕이 성품이 사납고 정치를 잘 돌보지 않아 백성들의 원한을 사 재위 6년 만에 신하 두로에게 피살되었다고 한다.
모본왕의 업적
《삼국사기》의 고구려본기 모본왕 6년에는 “2년 4월. 서리가 내리고 우박이 왔다. 8월. 사자를 보내 국내의 굶주린 백성을 구제했다. 누가 두로에게 말하기를 “대장부가 왜 우느냐. 고인의 말에 나를 어루만지고 보살펴주면 임금이요, 나를 학대하면 원수라 하였으니, 지금 왕이 포악한 짓을 하여 사람을 죽이니 백성의 원수이다. 그대는 왕을 죽여 버려라.”라고 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그러나 기록으로도 고구려의 모본왕이 폭군이라고 하기에는 의심스러운 부분이 있다. 우선 그는 흉년이 들어 굶주린 백성들을 구제한 임금이다. 신하들에게 쫓겨난 임금으로는 14대 봉상왕이 있는데, 그는 백성들의 굶주림을 아랑곳하지 않고 궁궐 만드는 노역을 강제로 시켰다. 모본왕은 봉상왕과는 아주 다르다.
모본왕은 48년에 우북평, 어양, 상곡을 지나 북중국의 중심이라는 태원까지 공격하여 후한의 간담을 서늘하게 한 경험을 가진 왕이다. 이를 바탕으로 태조대왕 시기인 53년 서쪽으로 요하를 건너 요서 지역에 10개 성을 건축했다는 기록이 《삼국사기》에 등장한다. 모본왕의 태원 정벌은 분명 큰 업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업적에도 불구하고, 모본왕은 폭군으로 몰렸다.
폭군으로 몰린 모본왕
이러한 모본왕이 정말 폭군일까? 모본왕이 폭군으로 몰린 이유는 매번 사람을 깔고 앉고 누울 때는 사람을 베개로 베어 사람이 혹 움직이든지 하면 죽이어 용서치 아니하며, 신하로서 간언을 하면 활을 당기어 쏘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일들은 모본왕을 곁에서 모시는 사람들이 아니면 알 수가 없다.
모본왕을 죽인 두로는 누군가로부터 그를 죽이라는 이야기를 듣는다. 즉 그는 다른 사람의 사주를 받아 모본왕을 죽인 것이다. 두로에게 왕을 죽이라고 명령을 한 자는 모본왕이 죽은 후에 가장 큰 이익을 본 사람들일 것이다. 모본왕이 죽은 후 나라 사람들은 태자가 임금의 자질이 모자라다는 이유로 왕위를 넘겨주지 않고, 불과 7세의 어린 아이를 왕위에 앉혔다. 그가 곧 태조대왕이다. 그러나 7세 아이가 정치를 할 수 없었으므로, 한 동안은 그의 어머니인 부여태후가 수렴첨정(휘장 뒤에서 임금을 대신하여 정치를 하는 것)을 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모본왕의 죽음으로 인해 가장 큰 이익을 얻은 부여태후의 무리들이 두로에게 명령을 내린 자들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승자가 만든 폭군
역사의 진실은 신하들과 잦은 충돌을 했던 모본왕이 신하들의 공격을 받아 시해당한 것이라고 하겠다. 신하들이 자신들의 행동이 정당했다는 것을 백성들에게 선전하기 위해 모본왕이 못된 임금이었다고 누명을 씌웠다고 볼 수 있다.
역사 기록은 승자들이 남기기 마련이다. 차대왕, 봉상왕, 영류왕 등도 신하들에게 죽임을 당했다. 이런 임금들에 대한 평가는 권력을 쥔 사람들에 의해 왜곡될 가능성이 크므로, 신중해야만 한다. 마찬가지로 고구려 역사도 고구려인들이 아닌 고구려를 멸망시킨 당나라, 신라인에 의해 기록되었기 때문에, 신중하게 평가해야 한다. 글로 남겨진 것이 모두 다 진실은 아닌 것이다.
첫댓글 신대왕도 단석괴랑 연합해서 유주병주침공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