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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12:12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 향해 오르시는 예수 행렬은 가이사랴에서 에루살렘으로 올라오는 로마군의 위풍당당한 행진과 대비됩니다. 그런데도 무리는 환호했고, 그 기세에 놀라 근심하는 무리가 있습니다. 그 행렬에 환호의 길을 열어 준 것은 다름 아닌 무명의 증인들이었습니다. 공주야! 나귀는 왕에게 어울리는 탈 것이 아니다. 위엄과 권위를 드러낼 수 있는 아라비안 우람한 말이 어울린다. 하지만 예수님은 나귀를 타고 겸손하게 입성하신다.
The procession of Jesus riding a donkey to Jerusalem contrasts with the imposing march of the Roman army from Caesar to Jerusalem. Nevertheless, the crowd cheered and there were a group of people who were surprised and worried about the momentum. It was none other than unknown witnesses who opened the way for cheers in the procession. Princess! The donkey is not a suitable ride for a king. It suits Arabian horses that can show dignity and authority. However, Jesus humbly enters on the donk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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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발굽 소리만 들어도 겁을 먹고 두려워해야 했던 이들에게 참 평화의 나라는 어떻게 오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나사로를 살린 사건으로 인해 예수를 향한 기대감이 커졌다. 더욱이 갈릴리에서, 그것도 유월절에 행할지 모르는 일에 큰 기대감을 가졌다.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메시아 찬양을 부르면서 예루살렘 입성을 환영한다. 그 찬양 그대로 그는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다. 하지만 과연 그가 이룰 나라는 그들이 기대하는 나라일까?
It shows how a true land of peace comes to those who had to be scared and afraid of the sound of horse hooves. Expectations for Jesus grew as a result of the incident that saved Nasarrow. Furthermore, I had high expectations for what might be done in Galilee on Passover. He welcomes the entry to Jerusalem, waving palm branches and singing praises for the Messiah. As the praise implies, he is the king of Israel, who comes to the name of the LORD. But is the country he will achieve the country they expe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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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우리가 위정자들들에게 기대하는 나라는 과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나라인가? 호산나 찬양하던 이들이 기대하는 메시아라면 백마를 타고 입성해야 어울렸을 것인데, 예수는 어린 나귀를 타고 입성하신다. 베다니에서 예루살렘이라면 걸어서도 금방 갈 수 있는 가까운 거리인데, 굳이 어린 나귀에 의지하여 입성하시는 것은 자신을 스가랴 선지자가 예언한 고난당하는 메시아로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몇 사람이나 이런 예수의 자기 계시를 이해했을까?
Is the country that we expect from the rulers today the country that God wants? If it were the messiah that the Hosan or the praises expected, it would have been appropriate to enter on a white horse, but Jesus enters on a young donkey. It is a short walk from Bethany to Jerusalem, but the reason you rely on the young donkey to enter is because you understand yourself as the struggling messiah predicted by the prophet Sugarya. How many people understood Jesus' self-revel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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숱한 표적 앞에서도 예수를 죽일 생각만 했던 종교권력자들의 오류를 이 환호하는 군중들도 비슷하게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오늘 우리가 환호하는 정치 권력자들을 향한 우리의 기대는 과연 신앙적으로 정당한가? 그들에게 메시아적 기대를 걸고 있다면 누구를 지지하든 정신 차려야 한다. 예루살렘 입성하시는 예수를 열렬하고 극진하게 환영한 무리의 정체가 드러난다. 그들은 예수가 나사로를 살릴 때 그 자리에 있었던 자들의 증언을 들은 사람들이다.
Aren't these cheering crowds similar to the errors of religious powers who only thought of killing Jesus in front of many targets? Are our expectations for the political powers we are cheering for religiously justified today? If you have messianic expectations on them, you must wake up no matter who you support. The identity of the group that enthusiastically and sincerely welcomed Jesus entering Jerusalem is revealed. They are the people who listened to the testimony of those who were there when Jesus saved Nasarr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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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예수를 향해 무언가를 기대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바리새인들이 그들의 반응을 보고 온 세상이 그를 따른다고 과장하여 말할 정도로 그 환영은 진지했고 절실했다. 바리새인들도 남들의 반응을 중계할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입장도 얼른 정리해야 했다. 나는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예수에 대해 어떤 메시아로 기대하겠는가? 지금 우리는 어느 행렬을 따라가는가? 예수님은 지금도 나의 왕이시며 주 이신가? 나는 주님의 오심에 대한 의미를 깨닫고 섬기는 삶을 살고 있는가?
They couldn't help but expect something toward Jesus. The vision was so serious and urgent that the Pharisees saw their reaction and exaggerated that the whole world was following him. The Pharisees also had to quickly organize their positions, rather than relaying other people's reactions. What kind of messiah would I expect from Jesus entering Jerusalem? What procession do we follow now? Is Jesus still my king and lord? Do I live a life of service by realizing the meaning of the Lord's miscarri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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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왕으로 찬양 하시는 예수님(12-13)
a.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에 관한 소문:12
b.예수님을 환영하는 무리들:13
어린 나귀를 타시는 예수님(14-16)
a.나귀를 타고 예언을 성취하는 예수님:14-15
b.제자들이 나중에 에언 성취를 깨달음:16
표적으로 인해 찬양 받으시는 예수님(17-19)
a.나사로의 부활로 인해 예수님을 찬양함:17-18
b.바리새인들이 놀람: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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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튿날에는(12a)
명절에 온 큰 무리가(12b)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12c)
오신다 함을 듣고(12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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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13a)
맞으러 나가(13b)
외치되 호산나(13c)
찬송하리로다(13d)
주의 이름으로(13e)
오시는 이(13f)
곧 이스라엘의(13g)
왕이시여 하더라(13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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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는(14a)
한 어린 나귀를(14b)
만나서 타시니(14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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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기록된바(15a)
시온 딸아(15b)
두려워 말라(15c)
보라 너의 왕이(15d)
나귀새끼를 타고(15e)
오신다 함과 같더라(15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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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들은(16a)
처음에 이 일을(16b)
깨닫지 못하였다가(16c)
예수께서 영광을(16d)
얻으신 후에야(16e)
이것이 예수께 대하여(16f)
기록된 것임과(16g)
사람들이 예수께(16h)
이같이 한 것 인줄(16i)
생각났더라(16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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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사로를(17a)
무덤에서 불러내어(17b)
죽은 자 가운데서(17c)
살리실 때에(17d)
함께 있던 무리가(17e)
증거 한지라(17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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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무리가(18a)
예수를 맞음은(18b)
이 표적 행하심을(18c)
들었음이라(18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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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리새인들이(19a)
서로 말하되(19b)
볼 찌어다(19c)
너희 하는 일이(19d)
쓸데없다(19e)
보라 온 세상이(19f)
저를 좇는 도다 하니라(19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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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를 환영하는 인파들_
The crowd that welcomes Jesus.
나귀 타고 입성하시는 예수_
Jesus who enters on a donkey.
예수의 입성에 대한 다양한 반응_
Various reactions to Jesus'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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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살이의 압제와 육체의 질고 가운데 눌려있는 우리들을 위해 오신 것을 감사합니다. 이제 십자가에 들려 올려 지면 온 세상이 나를 좇게 될 줄을 믿사오니 주님 나를 구원하옵소서. 그리하여 사람의 환호에 흔들리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겸손한 리더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Thank you for coming for the oppression of life in the world and for us who are in the middle of the tough and pressed body. Now that I believe that the whole world will follow me if I am raised to the cross, Lord, save me. Thus, may you be a humble leader who does not waver by human cheers and only looks at God.
2026.3.12.thu. Clay
신학 비평//
1) 두 행렬의 대비 — 로마의 말과 예수의 나귀
요한복음 12장은 역사적 상징이 매우 분명한 장면입니다. 예루살렘에는 늘 두 종류의 행렬이 존재했습니다. a. 로마 군대...말/무력/제국/통치와 공포 b. 예수...나귀 겸손/평화와 구원 로마 총독은 유월절 때 예루살렘에 군대를 이끌고 들어왔습니다. 폭동을 막기 위한 제국의 과시 행진이었습니다. 그 행렬은 갑옷-창-말발굽 소리로 채워져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의 행렬은 완전히 다릅니다. 종려나무 가지-환호-어린 나귀요한복음은 여기서 말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힘의 과시로 오지 않는다.
2) 나귀의 상징 — 겸손한 왕권
고대 근동에서 나귀는 단순히 가난한 탈것이 아닙니다. 평화 시대에 왕이 타는 짐승이었습니다. 전쟁할 때 왕은 말 탔고 평화의 왕은 나귀를 탔습니다. 예수의 행동은 우연이 아니라 구약의 예언 성취입니다. “보라 네 왕이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신다.”(스가랴 9:9) 이것은 단순한 겸손의 표시가 아니라 메시아의 자기 선언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정치적 메시아가 아니라 고난의 메시아입니다.
3) 군중의 환호 — 신앙인가 기대인가?
군중은 외칩니다. “호산나!” 호산나는 원래 뜻이 “우리를 구원하소서”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어떤 구원을 기대했는가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로마의 억압-경제적 고통-민족의 굴욕에서 해방시켜 줄 정치적 메시아를 기대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를 “이스라엘의 왕”이라고 외칩니다. 하지만 예수의 왕국은 군사 혁명-정치 권력과는 전혀 다른 나라였습니다. 바로 십자가의 나라입니다.
4) 환호와 배신의 군중
요한복음이 암시하는 비극은 이것입니다.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던 군중이 며칠 후 외칠 말은 “십자가에 못 박으라”입니다. 군중의 환호는
언제나 신앙이 아니라 기대일 수 있습니다. 기대가 충족되지 않으면 환호는 곧 분노가 됩니다. 그래서 예수는 군중의 인기를 믿지 않습니다.요한복음 전체에서 예수는 항상 군중의 열광을 경계합니다.
5) 제자들의 늦은 깨달음
16절은 중요한 신학적 통찰을 줍니다. 제자들은 처음에 이 일을 깨닫지 못했다. 예수의 행위는 그 순간에 이해되지 않습니다. 십자가와 부활 이후에야 모든 사건이 연결됩니다. 이것이 신앙의 특징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지나고 나서 이해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수의 입성 뒤에는
특별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나사로 사건의 목격자들입니다. 그들은 죽은 사람이 살아난 것을 봤고 그 이야기를 퍼뜨렸습니다.. 그 결과 군중이 모였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유명한 지도자가 아니라 무명의 증인들을 통해 퍼집니다. 복음은 늘 그렇게 전파됩니다.
6) 종교 권력의 공포
바리새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온 세상이 그를 따른다.” 물론 과장된 표현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두려움은 진짜입니다. 종교 권력은 언제나 기적보다, 진리보다 대중의 움직임을 더 두려워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권력을 흔들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종종 강한 지도자와 정치적 구원자를 메시아처럼 기대합니다. 그러나 예수의 왕권은 십자가와 섬김입니다. 그리고 지금 세상에는 여전히 두 행렬이 있습니다. a. 힘의 행렬 b. 십자가의 행렬 나는 어느 행렬을 따라가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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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 입성은 승리의 행렬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은 독자에게 미리 알려 줍니다. 이 행렬의 끝에는 십자가가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의 왕권은 세상의 왕권과 정반대입니다. (세상 왕: 힘으로 통치, 예수 왕: 사랑으로 희생) 나귀를 탄 왕은 세상을 정복하러 온 왕이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러 온 왕입니다. 우리가 환호하는 왕은 과연 ‘하나님의 왕’인가, 아니면 우리가 원하는 정치적 메시아인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