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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2월 8일 대림 제2주일(인권 주일, 사회 교리 주간)
제1독서 : 바룩 5,1-9
제2독서 : 필리 1,4-6.8-11
복 음 : 루카 3,1-6
1 티베리우스 황제의 치세 제십오년,
본시오 빌라도가 유다 총독으로, 헤로데가 갈릴래아의 영주로,
그의 동생 필리포스가 이투래아와 트라코니티스 지방의 영주로,
리사니아스가 아빌레네의 영주로 있을 때,
2 또 한나스와 카야파가 대사제로 있을 때,
하느님의 말씀이 광야에 있는 즈카르야의 아들 요한에게 내렸다.
3 그리하여 요한은 요르단 부근의 모든 지방을 다니며,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였다.
4 이는 이사야 예언자가 선포한 말씀의 책에 기록된 그대로이다.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
‘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
5 골짜기는 모두 메워지고 산과 언덕은 모두 낮아져라.
굽은 데는 곧아지고 거친 길은 평탄하게 되어라.
6 그리하여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
<오늘의 묵상>
김재덕 베드로 신부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루카 3,4).
사람들이 많은 ‘도시’가 더 효과적일 텐데 하느님께서는 왜 광야를 고르셨을까요?
더욱이 그 말씀을 선포할 사람으로도 사람들에게 권력과 영향력을 가진
본시오 빌라도, 헤로데나 필리포스, 대사제 한나스와 카야파가 아닌,
광야에서 살고 있던 세례자 요한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선택으로 “그리하여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3,6)라는
구약의 예언을 완성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방법으로 구원을 준비하지 않았습니다.
불가능해 보이고 아주 비효율적인 방법, 비합리적이고 너무나 미약해 보이는 방법으로
당신께서 계획하신 일을 이루셨습니다.
믿음 없이는 절대로 알아볼 수 없는 방법들을 하느님께서는 선택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은 세례자 요한을 통하여 우리에게 분명하게 말합니다.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3,3)야말로 우리 마음 안에
‘골짜기는 메워지고, 산과 언덕은 모두 낮아지며,
굽은 데는 곧아지고, 거친 길은 평탄하게 되어,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구원을 보게’하는,
예수님의 오심을 준비하는 가장 탁월한 길이라는 것을 말입니다.(3,4-5 참조)
고해성사는 우리가 이러한 은총의 길로 들어가게 해 줍니다.
많은 교우가 ‘회개하는 마음’ 없이 그저 ‘판공 성사 표’가 나왔기 때문에 고해성사를 합니다.
회개하는 마음과 함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찾아오시는 영혼의 길을 준비하면 좋겠습니다.
우리도 대림시기를 지내며 하느님의 구원을 보는 은총의 주인공이 되면 좋겠습니다.
“그리하여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 아멘.
조명연 마태오 신부
지금 제 나이는 오십 대 중반입니다.
문득 마흔에는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를 생각해 봅니다.
처음으로 본당신부로 나가서 재미있고 기쁘게 살았던 기억이 납니다.
또 빠다킹 신부라는 이름을 본격적으로 알렸던 시기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살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사제였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만약 마흔에 아이를 여섯이나 둔 아빠였다면 어떠했을까요?
교회 안에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을까요?
또 사회생활 역시 그렇게 재미있게 살기 힘들었을 것 같습니다.
여기에 자녀들을 부족함 없이 키우기란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더구나 교육비가 얼마나 비싸고, 들어가는 생활비도 만만치 않을 것입니다.
부족함이 많은 저로서는 아이 여섯과 함께 잘 살기란 불가능해 보입니다.
그런데 이를 성공적으로 했던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제 부모님이십니다. 전혀 쉽지 않은 삶을 사셨을 것입니다.
이런 부모님을 잘 모셔야 할 텐데, 이제는 기도로만 못다 한 효도를 대신할 수밖에 없습니다.
두 분 모두 하느님 나라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사실 지금 제일 후회가 되는 것은 부모님 말씀을 잘 듣지 않았던 것입니다.
듣지 않고 오히려 반대하면서 제 할 말만 했던 기억이 제일 큰 후회가 됩니다.
어쩌면 잘 듣는 것이 가장 큰 효도가 아닐까요?
하느님께 충실한 자녀의 삶을 사는 것도 마찬가지임을 깨닫습니다.
그냥 자기 하고 싶은 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었습니다.
그 말씀을 듣는 것에서부터 효도가 시작됩니다.
그런데 말씀을 들으려고도 하지 않는다면 어떨까요?
하느님 말씀에 곧바로 “그렇게 어떻게 살아요? 나는 싫어요!!”라면서 화를 낸다면 어떨까요?
효심 가득한 자녀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대림 제2주일인 오늘 복음은
예수님을 준비한 세례자 요한의 모습을 우리에게 전해줍니다.
그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고, 그분의 길을 곧게 내라는 사명을 받았습니다.
그 사명을 실천하는 것이 결코, 쉽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풍요롭고 화려한 세상을 등져야만 했습니다.
광야에서 낙타털로 된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띠를 두르고 산 세례자 요한입니다.
그리고 그의 음식은 메뚜기와 들 꿀 뿐이었습니다.
‘요한’이라는 이름이 ‘하느님께서 은총을 베푸셨다’라는 뜻인데,
그 모습을 보고서 과연 은총을 받은 사람처럼 보일까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천하는 것이 제일 중요했던 세례자 요한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들도 하느님의 말씀을 들어야 함을 강조하면서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를 선포합니다.
우리도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천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느님의 구원을 볼 수 있습니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이제 우리는 대림 2주일을 맞이하였습니다.
대림은 단순한 ‘기다림’이 아니라
이미 오시기로 되어 있는 분에 대한 갈망과 희망입니다.
우리는 오늘도 희망을 품고 그분이 오시길 노래합니다.
김지하 시인은 아프고 어두웠던 암흑의 군사독재 시절에
그 간절함을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얼어붙은 저 하늘
얼어붙은 저 벌판
태양도 빛을 잃어
아 캄캄한 저 가난의 거리
어디에서 왔나
얼굴 여윈 사람들
무얼 찾아 헤메이나
저 눈 저 메마른 손길
오 주여, 이제는 여기에
오 주여, 이제는 여기에
오 주여, 이제는 여기에
여기에 우리와 함께
오 주여, 이제는 여기에 우리와 함께하소서."
- '금관의 예수'
오늘 말씀 전례에서 제1독서와 제2독서,
그리고 복음은 같은 메시지를 서로 다른 방식으로 전해줍니다.
제1독서에서 바룩 예언자는 아주 특별한 사건을 전해줍니다.
여기에서 예루살렘을 자녀를 잃은 ‘과부’로 비유합니다.
그런데 그에게 “하느님에게서 오는 영광과 아름다움을 입어라.”(바룩 5,1)고
기쁨이 선포됩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당신에게서 나오는 자비와 의로움으로,
당신 영광의 빛 속에서 이스라엘을 즐거이 이끌어 주시리라.”(바룩 5,9)고 말합니다.
제2독서는 바오로 사도가 필리피 신자들을 위해 드리는
아름다운 기도입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날을 맞이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오는 의로움의 열매를 가득히 맺어,
하느님께 영광과 찬양을 드릴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필리 1,10-11)라고 기도합니다.
복음에서는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루카 3,6)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구원’을 보기 위해, 우리는 지금 세례자 요한과 함께 ‘광야’에 나와 있습니다.
사실 ‘광야’는 아무도 살지 않는 곳이기에,
어느 누구의 도움도 없이 홀로 자신을 마주해야 하는 곳이기도 합니다.
사방이 트여 있어서 어디 하나 숨을 데가 없으니
벌거벗고 자신의 실상을 낱낱이 확인하는 곳이기도 합니다.
저에게는 우리 공동체가 바로 ‘광야’입니다.
제 실상을 낱낱이 확인할 수 있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공동체 안에는 항상 고독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공동체 안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현존과 부재를 동시에 체험하기도 합니다.
사실 홀로 있을 때보다 형제들과 함께 있을 때가 훨씬 고독할 때가 많습니다.
홀로 있을 때는 자신의 필요를 채울 수 있는 즐거운 시간이 되고,
형제들과 함께 있을 때는 서로 다름과 차이로 힘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함께 있을 때가 더 괴롭고 힘들고 고독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바로 이러한 이 ‘광야’로 불러내시어 사랑을 속삭여주십니다.
그러기에 공동체가 바로 하느님께서 자신을 숨기시는 사막이요,
동시에 하느님께서 자신의 현존을 드러내시는 사막입니다.
곧 공동체가 저를 불러내어 사랑을 속삭여주는 아름다운 저의 광야입니다.
여러분에게는 가정이 광야요, 본당이 광야요, 직장이 광야요, 이 세상이 광야일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를 듣습니다.
“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
~ 그리하여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루카 3,4-6)
요한은 자신이 단지 ‘미리 주님의 길을 닦는 이’일 뿐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복음사가는 말합니다.
'요한은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였다.'(루카 3,3)
그는 용서를 선포하였지만, 결코 자신이 죄를 용서할 것이라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그는 비록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표시’로,
물로 세례를 베풀었지만, 결코 죄를 용서할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죄를 용서할 수 있는 권한은 오직 하느님께만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시어 우리에게 죄의 용서할 수 있는 권한을 주기까지는 말입니다.
그러기에 그는 단지 죄의 용서를 받을 수 있는 준비를 시켰을 따름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성령을 불어넣을 그릇과 그 공간을 만들 수는 있었지만,
그 그릇에 생명을 불어넣는 일은 오직 하느님만이 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이 오셔서 바로 이 일을 하실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하는 것이 세례자 요한의 사명이었다면,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 그릇에 생명을 불어넣는 사명을 지니셨던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과의 근본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곧 ‘사명의 차이’뿐만 아니라,
‘신원의 차이’의 차이가 확연히 드러나게 됩니다.
요한이 말하고 있는 것은 '용서를 위한 회개'였던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그를 맞이하기 위한 ‘준비로서의 회개’인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선포한 회개는 하늘나라가 선물로 주어졌기에
그에 합당한 응답인 ‘결과로서의 회개’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 맥락에서 예수님께서는 '용서를 위한 회개'가 아니라,
'용서를 받았기에 하는 회개'를 선포하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회개했기에 하늘나라가 오는 것이 아니라,
하늘나라가 우리에게 선물로 주어졌기에
그에 합당한 삶으로서의 회개인 것입니다.
곧 우리의 회개가 먼저가 아니라 ‘하느님의 용서’가 먼저입니다.
이토록 우리는 이미 용서와 은총을 입었습니다.
이제 우리도 용서하고, 그 은총을 나누어야 할 때입니다.
그러니 성탄을 준비하는 대림을 보내면서,
이미 와 있는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
하느님의 용서와 자비를 알아보고, 신뢰해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그에 합당한 감사의 응답으로
진정한 회개로 성탄을 기다리고 맞이해야 할 일입니다.
그리하여 그 뜨거운 하느님의 사랑을 만나시길 바랍니다.
<오늘의 말·샘 기도>
“굽은 데는 곧아지고, 거친 길은 평탄하게 되어라.”(루카 3,5)
주님!
사방이 탁 트여 어디 하나 숨을 곳이 없는 곳,
발가벗겨진 광야로 불러내어 제 실상을 보게 하소서.
당신의 영을 불어넣으시어
제 안의 굽은 곳, 거친 길을 새롭게 하소서.
오늘도 제 마음의 광야에 숨어계시는 현존으로
속삭이는 사랑의 노래를 듣게 하소서. 아멘.
나를 기다리고 계신 하느님
반영억 라파엘 신부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오늘은 대림 제2주일입니다.
대림초 두 개에 불이 당겨졌습니다.
우리의 마음도 그만큼 빛났으면 좋겠습니다.
우리의 어두운 마음에 주님의 빛이 환히 비춰지길 희망하며
기쁨의 성탄으로 한 발 더 내딛기를 빕니다.
피아노 조율은 언제 해야 합니까?
피아노 조율은 ‘연주가 끝난 다음에 하는 것이 아니고
중요한 연주 앞에서 조율’을 합니다.
우리의 삶도 다르지 않습니다.
아무렇게나 산 다음에 후회하고 회개하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 하느님의 말씀으로 삶을 조율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이 순간이 얼마나 소중한데 함부로 헛되이 삽니까?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여정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회개한다는 것은
바로 나를 당신의 모상대로 창조하신 하느님께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지상적인 마음가짐에서 하늘을 향한 마음으로 탈바꿈하는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였는데
이는 이사야 예언자가 선포한 말씀의 책에 기록된 그대로였습니다.
그 내용을 보면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 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
골짜기는 모두 메워지고 산과 언덕들은 모두 낮아져라.
굽은 데는 곧아지고 거친 길은 평탄하게 되어라.
그리하여 모든 사람이 구원을 보리라.”는 내용입니다.
이 말씀은 곧 마음을 바꾸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심보를 바꾼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삶의 양식을 바꾸고 하느님께로 향한다는 것은
분명 광야에 길을 내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입니다.
마음 보따리를 바꾼다는 것은
죄의 용서를 받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일이지만
하느님의 은총과 인간의 단호한 결단이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사람은 남의 잘못은 잘 보지만
자기 허물은 보지 못하는 연약함을 지녔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신을 제대로 보지 못하면 결국 돌이킬 마음도 없게 됩니다.
사실 고해성사를 자주 보지 않는 사람은 고백할 것이 없어집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살필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거울을 보며 외모를 단장하듯이
하느님의 말씀으로 마음을 비춰봐야 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인 “성경은 영혼을 비추는 거울”입니다.
한번 살펴보십시오.
우리 이웃과의 관계 안에서 골이 나 있는 것은 없는지?
혹 골이 있다면 그 골을 메워야 합니다.
서로의 견해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누구에게나 좋은 점과 부족한 점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나와 다른 그를 ‘나와 틀리다’ 고 단죄하며 거리를 둘 것이 아니라
다름을 인정하고 존중해야 합니다.
골짜기는 메워져야 합니다. 산과 언덕들도 낮아져야 합니다.
높아지려고 하는 마음, 교만함이 있었다면 겸손함으로 낮아져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인간으로 내려오신 그 마음으로,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시던 그 모습으로,
간음한 여인의 처지로 내려가서 허리를 굽혀
땅바닥에 무엇인가 쓰시던 그 예수님의 마음으로 다가가야 합니다.
그리고 굽은 데는 곧아져야 합니다.
마음이 굽으면 모든 사람과 사물이 다 굽어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마음이 굽으면 모든 사람과 사물이 다 굽어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굽은 마음을 곧게 해야 합니다.
시기와 질투의 마음으로 보면 증오와 저주를 낳게 되고 영혼이 망가집니다.
있는 그대로를 볼 수 있고, 인정해 주는 올곧은 마음이 필요합니다.
아울러 거친 길은 평탄케 해야 합니다. 거친 마음은 상처만 남깁니다.
남이야 손해를 보든 말든 나만 잘살면 된다는 생각은 위험합니다.
“화는 불입니다. 뜨거운 불입니다.
그러나 그 불로는 방을 따뜻하게 할 수도 밥을 지을 수도 없습니다.
나무를 태울 수도 쇠를 달굴 수도 없습니다.
오로지 자신의 속만 태울 뿐입니다”(이규경).
잘못된 열심은 영혼에 상처만 남긴다고 했습니다.
분수에 맞지 않는 기대로 화를 키워서는 안 되겠습니다.
시리아의 이사악 성인은
“죄인이든 의인이든 모든 사람은 하느님께로 마음을 돌려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회심하는 이들을 가장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회심의 노력이나 기간은 죽는 순간까지 항구해야 합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니 마음을 돌이키는 일은 한두 번에 끝날 일이 아닙니다.
매일이 마음을 돌이키는 회개의 때입니다.
그리고 “끝까지 참는 사람은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마태10,22).
그리고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죄가 드러날 때 고백하는 것은 회개가 아니라 자백입니다.
회개는 자발적인 것입니다.
아무도 내 죄를 알지 못하고 추궁하지 않는데도 하느님 앞에 부끄러워 고백하는 것입니다.
2 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여러분이 순수하고 나무랄 데 없는 사람으로 그리스도의 날을 맞이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오는 의로움의 열매를 가득히 맺어
하느님께 영광과 찬양을 드릴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필리피1,10-11)하고 권고합니다.
따라서 하루하루가 예수님을 삶의 중심에 모시는
나무랄 데 없는 축복의 날 되길 희망하며
‘내가 바라는 하느님’을 기대하지 말고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나’로 거듭날 수 있는 한 주간 되시길 바랍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이면 무엇이든 할 준비를 갖추고
‘주님의 마음에 드는 것이 무엇일까?’
‘그분이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일까? ’를 생각하며
아기 예수님께 드릴 선물을 준비했으면 좋겠습니다.
무엇보다도 회개의 핵심은 하느님께 돌아오는 것입니다.
잘못했다고 발만 동동 구르고 안타까워하는 것이 아니라
전과는 다른 삶의 모습을 보이는 것입니다.
회개는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회개는
한없이 자비로우신 아버지를 ‘다시 발견하는 데서 얻어지는 결실입니다.
자비의 하느님! 너그러우신 사랑의 하느님에 대한 올바른 인식은
끊임없는 회개의 원천입니다”(요한바오로2세).
“회개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척도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우리를 기다리십니다.
내가 그분을 알기 전부터 나를 사랑하셨고 용서해 주실 준비를 하고 계십니다.
하느님께서 언제나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잊지 않기를 바랍니다.
언제나 나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하느님을 향한 삶의 추구로 주님께 기쁨을 드릴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지나치게 세상과 땅만 바라보지 않고
머리를 들어 하늘을 바라볼 수 있는 은혜가 함께 하기를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어릴 때입니다. 미술 시간에 스케치북과 크레파스를 가져갔습니다.
크레파스는 12색, 24색이 있었습니다. ‘빨주노초파남보’ 무지개색이 있습니다.
검은색, 흰색, 연두색, 갈색, 분홍색도 있습니다.
이렇게 모두 색을 중심으로 이름이 정해졌습니다.
그런데 유독 피부의 색으로 이름을 부르던 크레파스가 있었습니다.
그 이름은 ‘살색’ 크레파스입니다.
그 살색은 백인의 피부를 뜻하는 하얀색이 아니었습니다.
그 살색은 흑인의 피부를 뜻하는 검은색이 아니었습니다.
그 살색은 황인의 피부를 뜻하는 누런색이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그 크레파스는 살색 크레파스가 아니라, 누런색 크레파스였습니다.
어린 시절에 저는 크레파스의 색을 통해서도
어쩌면 인종을 차별하는 교육을 받았는지도 모릅니다.
지금부터 17년 전입니다.
저는 이탈리아 로마 공항에서 캐나다 토론토 공항으로 가는 비행기를 타려고 했습니다.
체크인하는 중에 착오가 있었는지 보안요원이 저를 불렀습니다.
저는 5시간 넘게 조사를 받았습니다.
이유는 저의 외모가 범죄 용의자와 비슷했기 때문입니다.
나중에 비행기에 탑승할 수 있었지만 이미 시간은 늦었습니다.
저를 조사하는 요원들에게 미안하다는 이야기를 듣지 못했습니다.
저는 저의 외모와 피부색 때문에 인종차별을 받았는지도 모릅니다.
오늘은 대림 제2주일이며 인권 주일입니다.
인권 주일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모든 인간은 성별, 나이별, 피부의 색으로 차별받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하느님 앞에 우리 모두는 소중한 존재라는 의미입니다.
슬프게도 인류의 역사는 인권 차별의 역사입니다.
인권 차별은 지금도 진행되고 있습니다.
가슴 벅차게도 인류의 역사는 인권 차별을 극복하는 역사이기도 합니다.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은 ‘쉰들러 리스트’를 제작했습니다.
폴란드에서 사업하던 독일인 쉰들러는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수용소로 끌려가야 했던 사람을 보았습니다.
쉰들러는 자기의 재산을 모두 팔아서
죽음의 수용소로 가야 했던 유대인들을 구했습니다.
쉰들러의 선행으로 살아남은 유대인들의 후손이
매년 쉰들러의 무덤을 찾아 경의를 표한다고 합니다.
뉴저지의 뉴튼 수도원에는 마리너스 수사님의 무덤이 있습니다.
마리너스 수사님은 한국전쟁 당시 화물을 운송하는 선장이었습니다.
흥남 부두에서 화물 선적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남쪽으로 피난하려는 피난민을 보았습니다.
선장님은 배에 있던 화물을 모두 버리고 피난민을 태웠습니다.
그렇게 배에 오른 14,000명의 피난민은
성탄절인 12월 25일에 거제도에 무사히 도착했습니다.
배에서 4명의 아이가 출생했습니다.
마리너스 선장은 하느님의 섭리를 알았고,
수사가 되어서 평생 뉴튼 수도원에서 지냈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의 부모님도 그 배에 있었습니다.
미국을 방문했던 문재인 대통령은 마리너스 수사님의 무덤을 참배하였고, 기념식수를 했습니다.
오늘 성서 말씀의 주제는 ‘높은 산은 깎아내고, 골짜기는 메운다.’입니다.
이는 인종, 혈통, 세대, 이념, 사상, 신념, 신분, 종교 때문에
차별과 멸시가 있어서는 안 된다는 의미입니다.
하느님의 품성은 사랑이고,
하느님의 모습은 끝없이 자신의 것을 내어주는 희생과 나눔의 모습입니다.
사람이 하느님을 닮았다는 것은
바로 하느님처럼 이웃을 사랑하고, 자신의 것을 이웃에게 내어주는 것입니다.
그런 하느님을 닮은 모습대로 살아가는 사람의 인권은 소중하고 아름다운 것입니다.
“높은 산을 낮게 하고 깊은 골짜기를 메우고 험한 길을 고르게 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닐 것입니다.
동방 박사들이 험한 산과 거친 들판을 건너고서야 아기 예수님께 경배를 드릴 수 있었듯이
우리 안에 직면한 문제들을 풀어내고
오시는 주님을 기쁘게 맞이하는 일도 쉬운 일만은 아닙니다.
우리가 진심으로 회개하고, 우리들의 사랑이 참된 지식과 분별력을 갖출 때
그래서 우리가 순결하고 나무랄 데 없는 사람이 될 때
우리는 우리에게 오시는 아기 예수님을 맞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성 프란치스코는 하느님의 모습을 닮은 우리들이
살아가야 할 방향을 아름다운 기도로 남겨 주었습니다.
‘위로받기보다는 위로하고,
이해받기보다는 이해하며,
사랑받기보다는 사랑하게 하소서.
우리는 줌으로써 받고,
자기를 버리고 죽음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
조욱현 토마 신부
오늘 전례는 우리에게 오시는 구세주를 잘 맞이할 수 있도록 하는 회개이다.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베풀어주시는 구원은 어떤 정치적인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과 이웃 그리고 하느님께 대한 마음 자세를
온전히 새롭게 바꾸어 새로운 인간으로 변화하는 것이다.
인간이 자신의 순수성을 되찾는 것 그것이 우리가 모두 필요로 하는 구원이다.
구원에 이르는 첫 단추는 바로 근본적으로
나 자신을 변화하는 것으로 하느님 앞에 회개라고 할 수 있다.
바룩 예언자는 참된 회개는
“높은 산과 오래된 언덕은 모두 낮아지고,
골짜기는 메워져 평지가”(바룩 5,7) 되게 하는 데 있다.
우리의 마음속에 있는 주님을 맞아들이고 모시는데,
장애가 되는 모든 것들을 없애도록 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할 때 우리는 “당신 영광 안에서 안전하게”(5,7) 나아갈 수 있다.
하느님 안에 우리가 머무르는 삶이 될 때, 참된 해방을 누리며,
하느님을 우리 안에 모시는 것 자체가 이미 구원이라고 할 수 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보편적인 역사 안에 들어오셨고,
이제 그분이 역사의 중심이며, 역사에 충만한 의미를 부여하시는 분임을 강조하고 있다.
바로 그리스도의 오심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는 보편적인 역사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6절) 이사야의 예언을 인용하고 있다.
세례자 요한은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로서
주님의 오심에 대비하여 마음을 준비시키기 위한 구체적인 가르침을 주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인간의 내적 쇄신을 의미하고,
또 한편으로는 그 내적 쇄신을 실현하는 성사적 행위를 수행하였다.
“그는 요르단 부근의 모든 지방을 다니며,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였다.”(3절).
이 세례는 근본적으로 마음의 회개를 불러일으켰고,
그 마음의 회개는 물이라는 상징을 통해 표현되었다.
여기서 물은 인간을 새롭게 하고 깨끗하게 해 주며
하느님으로부터의 죄의 용서를 선포하는 상징적 의미가 있다.
그리고 이어서 “주의 길을 마련하여라.”(4절)는 것은
주님의 오심을 알리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인간의 윤리적 차원에서의 큰 변화를 요구하는 것이 분명하다.
낮아져야 할 산들은 바로 복음 첫머리에 말한 티베리우스, 헤로데
그리고 다른 정치지도자들이 가지고 있던
이기주의, 특권의식, 권력의 남용 등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메워져야 할 골짜기들과 언덕들은
인간을 무기력하게 만드는 불신과 실망과 낙담과 운명론과 체념에 빠져있는 태도를 말한다.
우리의 마음 안에 주님께서 임하실 수 있는데
장애가 되는 모든 것을 비우고 내적으로 모든 면이 새로워져야 한다는 의미이다.
이렇게 윤리적인 면에서 항상 새롭고도 신선함을 갖추는 것이 우리 신앙인의 영원한 과제이다.
우리는 언제나 우리 마음에 장애를 가질 수 있는 나약한 인간이다.
그러나 항상 새로운 마음으로 다시 시작하는 자세를 갖는 것이 중요하다.
이러한 가운데 하느님께서도 우리 안에서 당신이 시작하신 훌륭한 일을 완성하실 수 있다.
이러한 완성은 이렇게 순화된 영적 감각에서 이루어진다.
우리 신앙인은 이 순화된 영적 감각을 통하여 선을 알고 행할 뿐 아니라,
가장 옳은 것이 무엇인지를 가릴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되어,
사랑과 정의 안에 계속해서 성장해 갈 수 있다.
“그리하여 여러분이 순수하고 나무랄 데 없는 사람으로 그리스도의 날을 맞이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오는 의로움의 열매를 가득히 맺어,
하느님께 영광과 찬양을 드릴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필립 1,10-11)
바오로 사도는 말하고 있다.
여기서 사도는 그리스도의 날을 두 번(필립 1,6.10)이나 반복하고 있음을 주목하여야 한다.
그날에 우리는 우리의 성덕과 정의의 결실을 내어놓아야 하는 날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대림은 항상 우리를 깨어있게 하고
우리가 처한 상황에서 가장 옳은 일을 가려서 할 수 있도록 초대하는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주님을 우리 안에 모시는 것 자체로 우리는 이미 구원에 다가서는 것이다.
주님께서 우리를 당신의 뜻대로 이끌어 주시기 때문이다.
그 주님이 우리에게 오실 수 있도록
우리 안에 있는 높은 언덕들인 이기주의나 특권의식 또한 권력의 남용 등,
골짜기들인 실망과 좌절 그리고 우리 사이의 불신 같은 것을 없애는
우리 자신의 내적인 준비와 사랑의 실천이 따라야 할 것이다.
이 대림시기를 지내면서 더욱 우리의 삶을
하느님 안에 살 수 있도록 깨어있는 삶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이것이 우리가 가진 시간 속에서 가장 옳은 일을 가려서 할 수 있는 일이 될 것이다.
오실길을 같이 마련하는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오늘 대림 제2주일에 우리는
주님께서 오시는데 그 길을 마련하라는 말씀을 듣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듣고서 주님께서 길이 없어 못 오시나,
길을 내지 못해서 못 오시나 이런 생각이 듭니다.
사실 주님께서 오시는 길은 주님께서 내실 것입니다.
이 말은 주님의 길을 우리가 내기 싫어서 하는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겸손의 차원에서 하는 말입니다.
우리가 무슨 능력이 있다고 주님의 길을 낼 수 있단 말입니까?
‘주님, 주님께서 오시는 길은 제가 내겠습니다.’라고 감히 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길을 마련하라는 말은 어떤 뜻이겠습니까?
주님께서 하늘로부터 이 세상에 오시는 길은 주님께서 마련하시지만
주님께서 나에게 오시는 길은 내가 마련하고,
우리에게 오시는 길은 우리가 마련해야 한다는 말일 것입니다.
먼저 나에게 오시는 길을 마련하는 것에 대해 보겠습니다.
이 주제를 묵상하면서 마련하는 것과 반대되는 것이 뭔지 생각해 봤습니다.
마련의 제일 적극적인 반대는 거부일 것입니다.
주님께서 내게 오는 것을 거부한다면 마련하기는커녕
길에 바리케이드를 치거나 문을 닫아걸거나 하겠지요.
그런데 이렇게 적극적으로 거부하는 이유는 주님이 내게 오시는 것이
나를 파괴하거나 괴롭히는 것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복음에 더러운 영들이 주로 보인 태도이고,
현대적으로 적용하면 Privacy 고수 태도입니다.
더러운 영은 주님께서 게라사라는 자기 영역에 들어오는 것이 싫어서
게라사 마을 입구에서 주님을 막고서는 나를 괴롭히려고 오셨냐고 따지고,
떠나달라고 애걸하는데 통하지 않자 돼지 안으로 들어가게 해달라고 합니다.
다음은 무관심입니다.
예를 들어 신앙이 없는 사람은 주님이 오시건 말건 상관없고 그래서 무관심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 세상을 사랑하고 더 정확히 말하면 세속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사실 주님은 이 세상에 오셨고 세상 모든 이를 구원하러 오셨습니다.
그렇지만 주님과 하느님 나라에 관해서는 무관심한 사람,
이 세상에 더 관심이 많은 사람을 일컬어 세속적인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신앙인이라고 하는 우리도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하느님 나라보다 이 세상일에 관심이 더 많고 근심 걱정도 많습니다.
요즘 같으면 우리나라 돌아가는 것 때문에 대림절은 저리 밀려난 실정입니다.
그런데 세상이 어지러울수록 오히려 주님을 놓치지 않도록 집중해야겠지요.
다음으로 우리에게 오시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는 것에 대해 보겠습니다.
예를 들어 내가 단독 세대라면 나에게 오시는 주님만 맞이하면 될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가족과 같이 살거나 공동체로 생활한다면 같이 맞이해야겠지요.
이 대림절에 이런 의식과 노력이 필요합니다.
혼자서 주님을 맞이하지 않는 다시 말해서 혼자서 대림절을 보내지 않고,
공동체가 같이 주님을 맞이하고 대림절을 보내려는 의식과 노력 말입니다.
예를 들어 부부간에 혼자 기도하고 같이 기도하지 않는 집이 많고
자녀들과 같이 기도하지 않는 가정은 더 많습니다.
나 외에 가족이 신자가 아니거나 갈등이 많아 같이 기도하지 않는다면
그래도 이해할 수 있는데 다 신자인데도 같이 해야겠다는 의식이 없고
그래서 노력도 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문제이겠지요.
대림절 초를 마련하여 그 불을 하나하나 밝히며 주님 오심을
같이 깨어 기다리고 준비하며 기도하는 우리 집이 되면 얼마나 좋을까요?
보다 맑은 정신으로 깨어있기 위해서 사막 체험은 필수입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벌써 대림 두 번째 주일입니다.
오늘 복음 말씀 서두에는 당대 세상을 주름잡고 있던 사람들의 이름이 쭉 나열되고 있습니다.
티베리우스 황제, 로마 황제를 대신해 유다에 파견나와 있던 본시오 빌라도 총독,
갈릴래아 영주 헤로데, 그의 동생 필리포스, 대사제 한나스와 가야파...
엄청 대단한 사람들로 여겨지지만, 한 명 한 명 자세히 들여다보면
너 나 할 것 없이 부족하고 나약한 존재들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당시 세상과 종교의 주류 세력으로서
높은 자리에 앉아 세상과 교회를 쥐락펴락하던 권세가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말씀은 높은 자리에 앉아서 세상을 주름잡던
명망가들이나 세력가들이 절대 아니었습니다.
생각할수록 하느님은 참 묘하신 분입니다.
그분이 지니고 계신 본질적인 성향이랄까 속성 중에 두드러진 것 하나가 하향성입니다.
끝도 없이 아래로 아래로 내려오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느님의 말씀은 당시 가장 낮은 곳에
낮은 모습으로 살아가던 세례자 요한에게 내렸습니다.
그는 놀랍게도 생명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황폐한 광야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늘 깨어있기 위해, 늘 맑은 정신을 유지하기 위해,
언제나 자신의 촉각을 하느님께로 맞추기 위해 광야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광야는 사실 무지막지한 곳입니다. 극한 체험을 하기에 딱 맞는 곳입니다.
먹을거리, 마실거리, 즐길거리라고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저 세찬 모래바람, 끝도 없는 메마름과 무미건조함,
세상과의 철저한 단절과 외로움만이 존재하는...
모든 것이 결핍된 장소였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바로 그런 사막에서 끝도 없이 자신을 단련시키며
예수님께서 등장하시기만을 간절히 기다렸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사막이 필요합니다.
모든 것이 다 갖춰진 상태에서 매일 호의호식하며 부른 배를 두드리다 보면,
주님 말씀과는 무관한 삶을 살게 되기 마련입니다.
보다 맑은 정신으로 깨어있기 위해서 사막 체험은 필수입니다.
주님의 목소리를 보다 명확히 듣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결핍이 필요합니다.
남아있는 대림 시기, 보다더 명료하게 하느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
우리도 기쁘게 사막으로 들어가면 좋겠습니다.
그 사막이 어디인지 잘 살펴보아야 하겠습니다.
서공석 요한 세례자 신부
오늘 복음은 세례자 요한의 출현을 알립니다.
루카 복음서는 그것이 역사적으로 어느 시점에 일어난 일인지를 정확하게 언급합니다.
로마황제 티베리오 치세 15년이고, 본시오 빌라도가 로마 총독으로 유대아를 통치할 때입니다.
당시 팔레스티나의 영주 세 사람과 대사제들의 이름도 밝힙니다.
이 복음서는 예수님의 탄생을 알릴 때도 당시의 로마황제와 총독의 이름을 정확히 언급합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하나의 神話에 그 기원이 있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확인되는 과정을 거쳐 발생하였다는 것입니다.
복음서들은 세례자 요한이 요르단강 부근에서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였다고 말합니다.
그 시대 팔레스티나에는 여러 형태의 세례 운동들이 있었습니다.
율법과 성전 의례에 대한 유대교 당국의 요구는 엄하였습니다.
사람이 그 요구들을 온전히 수행하기는 어려웠습니다.
따라서 많은 사람들이 죄인으로 낙인찍히고,
하느님으로부터 버려진 절망감을 안고 살아야 했습니다.
그 시대의 세례는 흐르는 강물에 사람의 몸을 잠기게 하여 죄를 씻는 의례였습니다.
그것은 유대교 실세인 사제와 율사가 시작한 것이 아니라,
민중 안에서 일어난 일종의 신앙부흥 운동이었습니다.
그것은 죄의식에서 사람들을 해방시키는 의례였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그 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한 사람들 중 한 분입니다.
그러나 그분의 세례는 다른 세례 운동가들의 것과는 달랐습니다.
다른 세례 운동가들이 단순히 죄를 씻는 의례로 세례를 행했지만,
요한은 세례를 주면서 화개, 곧 삶의 전환을 요구하였습니다.
요한의 세례는 삶을 근본적으로 바꾸겠다고 결심한 사람이
일생에 단 한 번 받는 의례였습니다.
예수님도 제자들을 가르치기 전에 요한의 세례 운동에 가담하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지 않았으면, 복음서들이 예수님이 요한으로부터
세례받은 사실을 굳이 언급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스도 신앙 운동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체험한 제자들이 중심이 되어 발족하였습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우리를 위한 구원의 길을 보았습니다.
초기 신앙공동체는 예수님이 요한으로부터 세례받은 사실을 말하면서
세례자 요한을 정확히 자리매김해야 했습니다.
당시에 요한의 제자들도 사람들을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세례를 베푼 요한이 세례를 받은 예수보다 더 훌륭한 인물이라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초기 그리스도 신앙공동체는
예수님의 길을 준비하기 위해 파견된 요한이라고 자리매김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은 이사야 예언서(40,3-5)를 인용하여 그 사실을 설명합니다.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
‘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그분의 길을 내어라...
그리하여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
예수는 하느님의 구원을 보여준 주님이고 요한은 그분의 길을 준비한 인물이라는 해석입니다.
오늘 복음은 요한이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였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회개는 어려운 절차가 아닙니다. 자기 삶을 바꾸겠다는 결심입니다.
하느님이 계시지 않는 듯이 살던 사람이 하느님이 함께계시다는 사실을 깨달아,
자기 뜻대로 살지 않고, 하느님의 뜻을 따라 살겠다고 결심하는 것이 회개입니다.
요한은 세례를 주면서 그 결심을 사람들에게 요구하였습니다.
유대교 지도자들은 모세로부터 비롯된 신앙을 왜곡하였습니다.
율사들은 율법 준수를 강요한 나머지, 사람들이 율법 준수에만 마음을 빼앗기고,
하느님을 잊어버리게 하였습니다.
사제들은 성전에 바칠 것만 강조한 나머지, 사람들이 제물 봉헌에만 마음을 쓰고,
하느님을 생각하지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는 와중에 하느님은 율법 준수와 제물 봉헌에 충실하지 못한 사람을 죄인으로 판단하고,
그 죄에 대한 대가로 그들에게 벌을 주는 존재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스라엘에게 율법 준수와 제물 봉헌이 있는 것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이 우리의 삶 안에 살아계시게 하기 위한 일이었습니다.
율법은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기에 사는 데에 필요한 생활 지침이었습니다.
제물 봉헌은 사람이 노동하여 얻은 것을 하느님 앞에 가져와서
하느님의 시선이 그 위에 내려오게 하여,
그분의 시선으로 자기가 얻은 産物을 보는 象徵的 의례였습니다.
인간이 자기가 얻은 것을, 자기 한 사람만의 것이라 생각하지 않고,
하느님의 시선으로 그것을 보고 처리하게 하는 상징적 의례였습니다.
얻은 것이 은혜로우면, 그것을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도
은혜로운 것이 되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율사와 사제들은 지키고 바칠 것만 강조하다가 율법과 제물 봉헌의 참뜻을 잊어버렸습니다.
하느님은 사람들을 벌하는 존재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그 시대 이스라엘 안에 발생한 세례 운동은
그런 왜곡된 신앙으로 말미암은 폐해에서 벗어나겠다는 민중의 몸부림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셨습니다.
남성 위주의 가부장 사회에서 아버지라는 단어에는 어머니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어머니가 포함된 아버지는 자녀에게 은혜로운 존재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도록” 기도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은혜로우신 하느님의 일을 땅에서 우리가 실천하며 살겠다는 기도입니다.
은혜로움을 실천하는 사람이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하느님이 자비로우시고, 사랑하고, 용서하신다는 말은
그분을 아버지라 부르는 사람도 자비와 사랑과 용서를 실천한다는 말입니다.
하느님을 어떤 분이라고 말하는 것은 자녀 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알려줍니다.
하느님의 자녀는 하느님의 생명을 이어받아 이 세상에 사는 사람입니다.
오늘 복음은 이사야서를 인용하여 말합니다.
’골짜기는 모두 메워지고 산과 언덕은 모두 낮아져라...
그리하여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
하느님을 빙자하여 의인과 죄인을 갈라놓고,
사람을 차별하던 높은 사람들은 낮아지고,
그드로부터 무시당하던 낮은 골짜기,
곧 죄인들은 하느님의 은혜로우심으로 메워져야 한다는 말입니다.
모두가 은혜로우신 하느님을 체험하고,
그 은혜로우심을 실천하게 하라는 말씀입니다.
그것이 구원입니다. 신앙인의 삶은 이웃에게 은혜로운 것이 되어야 합니다.
하느님은 저 멀리 내세에만 계시지 않습니다.
우리의 삶이 사람들에게 은혜로울 때, 하느님은 우리 안에 살아계십니다.
“섬기는 사람이 되라.”(마르 10,43)는 예수님의 가르침도
이웃에게 은혜로운 사람이 되어
하느님이 우리 안에 살아계시게 하라는 말씀입니다.
[출처] ‘벨라수녀 영화방’ : 오늘의 말씀 묵상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