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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2월 11일 대림 제2주간 수요일
제1독서 : 이사 40,25-31
복 음 : 마태 11,28-30
그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28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30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오늘의 묵상>
김재덕 베드로 신부
예수님께서는 당신에게 와서 안식을 얻으라고 말씀하십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마태 11,28).
그러나 많은 신앙인은 예수님께 가서 안식을 얻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럼 어디에서 안식을 얻고 싶어 할까요?
기도보다 세상이 주는 흥밋거리로 마음을 채우는 것을 안식으로 삼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생각과 마음 안에 담기보다,
누군가를 향한 비난과 험담에서 안식을 얻는 사람이 있습니다.
성체 앞에 머물며 예수님과 함께하는 시간을 가지기보다 게으름, 게임, 술, 인터넷 등
하느님께 머물지 못하게 하는 것들을 안식처로 여기는 사람이 있습니다.
“너는 알지 않느냐? 너는 듣지 않았느냐?
주님은 영원하신 하느님, 땅끝까지 창조하신 분이시다.
그분께서는 피곤한 줄도 지칠 줄도 모르시고, 그분의 슬기는 헤아릴 길이 없다.
그분께서는 피곤한 이에게 힘을 주시고,
기운이 없는 이에게 기력을 북돋아 주신다”(이사 40,28-29).
우리의 안식처는 하느님이십니다.
영혼이 지치고 마음이 메마를수록 우리가 가야 할 곳은
바로 살아 계신 예수님께서 계시는 성체 앞입니다.
여러분의 안식처는 어디입니까?
예수님께 가십시오. 그분 곁에 머무르십시오.
우리가 이 선택을 할 때 우리 영혼은 다시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아멘.
조명연 마태오 신부
UN에서는 매년 세계 행복 보고서를 발표합니다.
행복이 측정 가능하다는 듯, 지수화 그리고 서열화했습니다.
그런데 행복은 그렇지 않음을 깨닫습니다.
사실 매년 5위 아래 떨어지지 않은 나라가 북유럽에 있는 핀란드입니다.
우리나라는 2024년 세계 행복 보고서에서 52위를 차지했습니다.
그렇다면 핀란드와 우리나라의 행복 차이가 엄청날까요?
사실 핀란드 국민은 과묵하고 신중해서 잘 웃지 않는다고 합니다.
유럽에서 술을 가장 많이 소비하는 나라이며, 유럽에서 자살률 1위의 나라이기도 합니다.
인구 대비 당뇨병 환자 수가 세계 최고 수준이라는 것도 놀랍습니다.
과연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행복은 지극히 관념적이고 주관적입니다.
순위가 그래서 자기의 행복 기준이 타인의 행복 기준과 달라질 수 있습니다.
누구는 삶과 일이 조화를 이룰 때 행복하다고 말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도 충분히 행복할 수 있습니다.
가지고 있는 것이 없어도 행복하다고 하는 사람도 있고,
남이 부러워할 정도로 많은 것을 가지고 있어도 불행하다고 말하는 사람이 너무나 많습니다.
이를 통해 중요한 사실 하나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소유의 많고 적음이 아닌, 세속적인 욕심의 많고 적음에서 행복이 결정되는 것이었습니다.
행복은 세상의 기준에 있지 않음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행복 선언이
세상의 기준과 정반대에 놓여 있는 것입니다.
세상은 고통과 시련 안에서는 행복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고통과 시련 너머에도
분명히 당신과 함께하면서 행복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을 이런 측면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마태 11,28)
고통과 시련이 찾아오면 행복이 없다고 하지 마십시오.
바로 그때 주님께로 가야 했습니다.
주님을 잊었고, 주님께 나아가지 않았기 때문에 행복을 느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세상의 고통과 시련은 너무나 불편하고 무거워 보입니다.
그러나 주님과 함께하면 편한 멍에와 가벼운 짐이 될 수 있습니다.
나의 행복을 어디에서 찾고 있습니까?
남에게서가 아니라 바로 자기 안에서 찾아야 합니다.
즉, 다른 사람과의 비교가 아닌, 자기 안에 주님께서 함께하신 것
그 자체에서 행복을 찾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어떤 고통과 시련도 행복할 수 없는 이유가 되지 않습니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 복음은 이렇게 참으로 복된 선언으로 시작됩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마태 11,28)
'안식'을 주시겠다는 선언입니다.
이는 듣기만 하여도 벅찬 감격입니다.
여기서 '안식'이란 단순한 쉼이 아니라 ‘구원’과 동의어입니다.
(히브 3,11.18; 4,1.3.5.10-11; 묵시 14,13 참조).
“안식을 주겠다.”는 이 벅찬 초대는
‘안식’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얻어지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우쳐줍니다.
곧 ‘안식’(구원)은 그것을 가지신 분으로부터 받게 되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것을 가지고 계신 분만이 주실 수 있으니,
주시는 분에 의해 얻어지는 것임과 동시에, 바로 당신이 구원자라는 선언이요,
'안식'(구원)은 당신이 선사하는 선물이요, 사랑이요, 자비요, 호의임을 말해줍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누구에게 주시는가?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주시기 위해 먼저 초대하십니다.
“나에게 오너라.”라는 문구는
현인들이 자신의 학교에 와서 지혜를 배우라고 부를 때 사용하는 전형 구문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때 부르는 대상은 주로 ‘배우지 못한 자들’(집회 51,23)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이들 모두'를 부르십니다.
이들은 우선 23장의 '무겁고 힘겨운 짐'(23,4)에서 알 수 있듯이,
613개의 율법의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 유대인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들을 부르시는 이유는
단순히 지혜를 전수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안식'(구원)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단순히 그것을 “주겠다”라고만 하시는 것만이 아니라
그것을 얻을 수 있는 길도 가르쳐 주십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마태 11,29)
그것은 바로 당신의 '당신의 멍에를 메고' 당신에게서 배우는 것입니다.
'멍에를 멘다'는 말은 당시의 유대인 사회에서 스승과 제자 사이를 말해줍니다.
당시의 팔레스타인의 ‘멍에’는 혼자 메는 것이 아니라,
항상 짝을 이루어 두 노역자가 함께 메게 되어 있듯이,
‘예수님의 멍에’는 예수님과 함께 메는 것을 의미합니다.
곧 예수님께서 저희와 하나가 되어 동행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과 함께 메는 ‘멍에’이기에
‘그 멍에는 편하고, 그 짐은 가볍습니다.’(마태 11,30)
사실 ‘멍에’는 ‘순종’을 나타내는 비유입니다(사도 15,10; 갈라 5,1).
그러니 예수님께 순종하며 가르침을 받으라는 초대입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께 순종하셨듯이 말입니다.
그렇다면, 순종으로 무엇을 배우라는 말씀인가?
바로 ‘예수님, 당신의 마음’을 배우라는 말씀입니다.
아버지 앞에 항상 지니셨던 그 마음인,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을 배우라 하십니다.
그러면 '안식'을 지니고 계신 그분으로부터 ‘안식’을 얻게 될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진 ‘짐’은 우리를 짓눌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를 도와주고 북돋아 줍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은총을 지고 가는 것이 아니라, 은총이 우리를 지고 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은총을 돕는 것이 아니라, 은총이 우리를 돕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지고 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우리를 지고 가십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단지, 가르치시고 모범을 보여주시는 스승만인 것이 아니라,
함께 걸으시고 동행하시면서, 몸소 우리를 지고 인도하는 참된 스승이십니다.
단지 그 '길'을 제시하는 스승이 아니라,
'길'을 함께 가실 뿐만 아니라 '길 자체'이신 참 스승이십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의 제자 됨'이란, 단순히 예수님을 뒤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과 하나 되어 걸으며, '예수님의 마음'을 배우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의 마음,
곧 '양순하고 겸손하신 마음'(마태 11,29)을 선물로 주십니다.
우리는 이미 사도 바오로의 고백처럼,
‘그리스도 예수께서 지니셨던 그 마음을 품게 되었습니다.’(필립 2,5)
바로 그 마음 안에서 '배움의 순례길'을 걸어갑니다.
그리고 우리는 마침내 그 ‘참된 안식’을 얻을 것입니다.
<오늘의 말·샘 기도>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마태 11,29)
주님!
당신의 멍에를 메게 하소서.
위에 있지만 짓누르지 않는, 묶지만 옭아매지 않는,
오히려 편하게 하는 사랑의 멍에를 메게 하소서.
함께 지며 나누는, 함께 가며 끌어주는, 그 손을 놓치지 않게 하소서.
동행해 주고 길이 되어 주는,
온유하고 겸손하신 그 마음을 따라 살게 하소서. 아멘.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반영억 라파엘 신부
몸은 고달프고 힘이 들지만, 본연의 일을 하고 있으면 기쁩니다.
더군다나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그렇게 할 수 있다면 더없이 복되다 할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가 하는 일이 억지로 마지못해하는 일이 되면
무거운 짐이요, 멍에가 될 것입니다.
마땅히 해야 할 일, 꼭 해야 할 일을 즐기면서 기쁘게 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마태11,28).고 말씀하셨습니다.
당시에는 사람들이 무거운 짐과 멍에를 메고 괴로워했습니다.
무엇보다 억눌리고 고된 가난의 생활이 짐이 되고 힘이 들었으며,
율법의 수많은 규정을 지켜야 하는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의 구원과 생명을 위해 주어졌던 율법(에제키엘 20,13)을
율법학자들은 수백 가지의 특수한 규정을 만들어 견딜 수 없는 짐이 되게 하였습니다.
유다교에는 613개의 계명이 있었는데 248개 조항은 명령, 365개 조항은 금령이었습니다.
법을 만든 그들도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율법을 위해 사람이 존재하게 되었으며
계명은 선과 생명에 보탬이 되기보다
오히려 인간을 자유롭지 못하게 하는 굴레와 족쇄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서 배워라” 하시며
산상 설교를 통해 참된 행복과 율법(마태5장-7장)을 철저하게 가르치셨습니다.
율법학자들은 법에 사람을 맞추었지만, 예수님께서는 사람을 위한 법을 확인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폐기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랑으로 완성하러 오셨습니다.
이제 예수님의 계명은 무거운 짐이 아닙니다.
“그분의 계명은 힘겹지 않습니다”(1요한5,3).
사랑의 법을 제한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이시면서도 인간의 모습으로 겸손하게 이 세상에 오셨고
하느님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시며 스스로 모든 이의 종이 되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십자가의 죽음까지도 받아들이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 주어진 짐이요, 멍에입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뜻을 스스로 그리고 적극적으로 기꺼이 받아들이셨기에
편한 멍에요, 가벼운 짐이었습니다.
따라서 주님께서 주시는 멍에와 짐은
결코 넉넉한 삶의 편안함에서 오는 무사태평함이나
악과 공존하기 위해 놓여 진 안일한 평화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 삶의 여정도 고달픔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그러나 나의 삶을 봉헌하고 끊임없이 사랑을 실천하면
내적인 평화와 기쁨, 행복을 맛보게 됩니다.
사실, “남을 사랑하는 사람은 율법을 완성한 것입니다”(로마13,8).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로마13,10).
주님의 계명을 준수하고 계명의 의미를 살려고 최선을 다하면
반드시 예수님의 멍에는 위로의 원천이 되고
인간적인 욕심을 포기하는 힘이 될 것입니다.
“주님의 가르침은 완전하여 생기를 돋게 하고
주님의 법은 참되어 어수룩한 이를 슬기롭게 하네.
주님의 규정은 올발라서 마음을 기쁘게 하고
주님의 계명은 맑아서 눈에 빛을 주네”(시편19,8-9).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죽음 교육에서 고은 시인의 ‘순간의 꽃’이라는 시를 읽었습니다.
짧은 시인데 깊은 여운을 주는 시였습니다.
오늘은 그 시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노를 젓다가
노를 놓쳐버렸다.
비로소 넓은 물을 돌아다보았다.”
노를 젓는 일이 필요하고,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노를 젓는 방향이 중요합니다.
물질, 성공, 권력, 업적이라는 방향을 향해서 노를 저으면
아무리 열심히 저어도 참된 행복을 향해 나갈 수 없습니다.
노를 놓쳐서 잠시 멈추면 비로소 방향을 알 수 있습니다.
사목이라는 노를 저어서 33년을 달려왔습니다.
보좌신부 때는 청년부와 주일학교를 대상으로 노를 저었습니다.
행사하고, 밥 먹고, 술 마시면서 청년들을 만났습니다.
돌아보면 말씀과 영성이 부족했습니다.
본당신부 때는 사목회를 중심으로 교우들을 대상으로 노를 저었습니다.
많은 행사가 있었고, 만남이 있었습니다.
돌아보면 말씀이 부족했고, 영적으로 메말랐습니다.
교구청에 있을 때는 교구청을 중심으로 교구 신자들을 대상으로 노를 저었습니다.
교육이 있었고, 행사가 있었습니다.
돌아보면 교우들이 바라는 것을 제대로 채워주지 못했습니다.
역시 말씀과 영성이 부족했습니다.
뉴욕의 신문사에 있을 때는 코로나 팬데믹의 중심에 있었습니다.
신문사 운영이라는 노를 저었습니다. 재정적인 어려움에 늘 노심초사였습니다.
달라스 한인 성당에서 사목이라는 노를 젓고 있습니다.
어쩌면 현직에서 젓는 마지막 노가 될 수 있습니다.
잠시 노를 멈추고 말씀과 영성을 향해 방향을 바꾸어야겠습니다.
‘물벌레와 잠자리’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물벌레는 물속에서 살며 물 표면을 올라가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물속 생활에 익숙한 물벌레들은 자신들의 세상을 떠나
물 밖으로 나가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알지 못합니다.
그들 사이에서는 물 위로 올라간 친구들이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어느 날, 물벌레 중 하나가 물 표면을 향해 올라가기로 결심합니다.
물을 떠나 물 밖으로 나온 물벌레는 기다리고 있던 변화를 맞이하며 잠자리로 변태하게 됩니다.
잠자리가 된 물벌레는 하늘을 날며 새로운 세상과 자유를 경험합니다.
그러나 이제는 물속으로 돌아갈 수 없음을 깨닫습니다.
그는 물속에 남아 있는 친구들에게 자신이 겪은 변화를 알리고 싶지만, 방법이 없습니다.
이 이야기는 변화와 성장, 그리고 우리가 알 수 없는 세상에 대한 신비로움과 연결됩니다.
물벌레에서 잠자리로의 변태는 인간 삶의 단계적 변화를 상징하기도 하며,
종교적 관점에서는 죽음과 부활, 또는 새로운 생명에 대한 은유로 해석되기도 합니다.
물벌레가 잠자리로 변하는 과정은 삶과 죽음의 순환을 상징하며,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한 성찰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새로운 짐과 멍에를 이야기하십니다.
어떤 짐과 멍에일까요?
강도 맞은 이웃을 돌보아 주었던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측은지심입니다.
지난날의 잘못을 뉘우치고 아버지께 돌아가는 둘째 아들의 수오지심입니다.
이제는 그리스도가 내 삶의 전부라고 고백했던 바오로 사도의 사양지심입니다.
성령의 열매를 분별하는 시비지심입니다.
친구가 오리를 같이 가자고 하면 십리까지도 함께 가주는 따뜻한 마음입니다.
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기 전에 먼저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바라는 열정입니다.
벗을 위해서 목숨까지 바치려는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해야 할 일들을 좋아하셨다고 생각합니다.
그러기에 십자가를 지는 일도, 복음을 전하는 일도, 힘들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여러분이 해야 할 일을 좋아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의 짐과 멍에는 여러분을 행복하게 할 것입니다.’
우리가 대림 시기를 지내는 것은,
우리의 능력과 우리의 업적 때문에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것이 아님을 묵상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크신 사랑이, 우리의 허물과 잘못을 모두 용서하신다는 것을 돌아보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살면서,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우리에게 상처를 준 이들을
넓은 마음으로 보듬을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2024년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지고 가려던 짐과 멍에는 무엇이었을까요?
“주님께 바라는 이들은 새 힘을 얻고 독수리처럼 날개 치며 올라간다.
그들은 뛰어도 지칠 줄 모르고 걸어도 피곤한 줄 모른다.”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조욱현 토마 신부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28절)
주님께서는 율법의 멍에를 멜 힘조차 없는 지친 사람들에게 말씀하신 것이다.
악마에게 시달리며 무거운 짐을 지고 무수한 죄에 억눌린 우상 숭배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29절)
우리는 그분에게서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29절)한 것을 배우라고 하신다. 그
분의 겸손을 배울 때, 멍에는 편하고 짐은 가벼워진다.
왜 주님께서는 그 길을 좁은 길이라고 하셨을까?
게으른 사람들에게는 좁은 길이다. 그러나 잘 배운 이들에게는 그 계명이 가볍다.
설사 잠깐 육체적 고통이 따른다 해도, 희망 안에 양육되고 있는 사람은
그 고통을 쉽게 견디어 내는 신심이 깊은 사람이다.
그러면 왜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이 어렵게 보이는 것을 요구하시는가?
이것이 어렵게 보이는 것은 멍에를 메고 그분의 말씀을 믿는다면
얼마나 편하고 가벼운 짐인지를 체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분의 짐은 관습과 규정이 아니라, 영혼의 결심이기 때문이다.
생명을 원하고 좋은 날들을 보고 싶어 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부정과 악의의 멍에를 벗어버려야 한다.
모든 악덕의 멍에를 벗어버리지 않으면, 그리스도의 편하고 가벼운 멍에를 멜 수 없다.
그리스도의 멍에를 힘들다고 여기는 것은
세상에 물든 마음으로 하늘의 것을 사랑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 마음은 아직 그리스도께로 오지 않았기 때문에
그분의 멍에를 메고 그분의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을 배울 수가 없다.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29절)
세상 주인들의 짐은 힘을 점점 더 빠지게 하지만,
그리스도의 짐은 그 짐을 진 이들을 오히려 도와준다.
우리가 은총을 지고 가는 것이 아니라, 은총이 우리를 지고 가며,
우리가 은총을 돕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도우라고 은총이 우리에게 주어졌다.
주님께 감사하며 살아가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주님께 가기만 하면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요즘 저는 유명 강사들에게 사람들이 몰려가고,
그들의 상담과 치유 프로그램에 열광하는 것을 볼 때 마음 불편합니다.
주님께서 당신에게 오라고 하시는데 그들에게 가니 말입니다.
우리 신자들도 그러니 더욱 마음이 불편하고 안타깝습니다.
그러면 저는 안 그럴까요?
예, 저는 이런 마음이기에 그들에게 가지는 않습니다.
저는 안식을 얻는 법은 확실히 주님께 배웠고 배운 대로 살려고 합니다.
문제는 그렇게 배웠건만
주님께 힘을 얻어 안식을 누리려고 하지 않고
피곤을 덜어 안식을 누리려고 하는 측면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배터리를 충전하지 않고 그저 사용을 중지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지요.
배터리는 충전해야지 지속 사용할 수 있지
사용을 중지하는 것만으로는 지속적으로 사용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용한 배터리를 충전기에 꽂는 것처럼
우리도 주님께 가 안식도 얻고 힘도 동시에 충전해야 합니다.
오늘 독서에서 이사야서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그분께서는 피곤한 이에게 힘을 주시고
기운이 없는 이에게 기력을 북돋아 주신다.”
우리는 기를 쓰고 뭣을 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기를 쓰고 뭣을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다 빠지겠지요?
그러니 이렇게 기를 쓰고 뭐를 한 뒤에는 기를 보충해야 합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기운이 없는 이에게 기력을 북돋아 주신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당신께 힘을 얻으라 하실 뿐 아니라 배우라고도 하십니다.
무거운 짐을 가볍게 지고 편하게 지는 법 말입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런데 주님께서는 당신의 멍에가 편하고 그 멍에로 짐을 지면
짐이 가볍다고 하시는데 우리는 오히려 그 멍에는 불편하고 짐이 무겁다고 합니다.
주님의 멍에는 온유와 겸손이고, 져야 할 짐은 십자가이기 때문인데
우리 생각과 달리 주님께서는 주님의 멍에 곧 겸손과 온유가 왜 편하다 하실까요?
사실 그것은 실천하기가 쉽지 않지, 이해하기가 어려운 것은 아닙니다.
뒤집어 생각하면 알 수 있습니다.
겸손한 사람이 짐을 잘 지지 교만한 사람은 짐을 잘 지지 못할 것입니다.
겸손한 사람은 무거운 짐을 마땅히 자기가 져야 할 짐이라고 생각하기에
온유하게 지지만 교만한 사람은 ‘이것이 왜 내게’라며 화를 낼 것이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겸손하기가 가장 어렵다는 것입니다.
사실 겸손하기가 무거운 짐 지는 것보다 더 어렵고
그래서 겸손해지기보다 어쩔 수 없이 무거운 짐을 지게 되는데
다행스럽게도 나이를 먹으며 무거운 짐이 우리를 겸손하게도 합니다.
어쨌거나 우리는 이 대림절에 안식과 힘을 주시기 위해 오시는 주님께,
어떻게 무거운 짐을 져야 하는지 가르쳐주시기 위해 오시는 주님께 달려갑시다.
주님께 가기만 하면 힘 얻는 것과
무거운 짐을 가볍게 지는 법을 배우는 것을 일거에 해결할 수 있습니다.
독수리처럼 날개 치며 위로 올라갑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때로 매일 매일 우리에게 배달되는 성경 말씀이
얼마나 큰 위로요 기쁨이 되는지 모릅니다.
오늘 우리가 봉독하는 독서 말씀과 복음 말씀은
온통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위로로 가득합니다.
특히 이사야 예언자의 말씀은
여기 쑤시고 저기 아픈, 저같이 나이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새로운 희망을 지니게 해줍니다.
“젊은이들도 피곤하여 지치고, 청년들도 비틀거리기 마련이지만,
주님께 바라는 이들은 새 힘을 얻고, 독수리처럼 날개 치며 올라간다.
그들은 뛰어도 지칠 줄 모르고, 걸어도 피곤한 줄 모른다.”(이사야 40,30-31)
맞습니다.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주님은 영원히 청춘이십니다.
언제나 새롭고 활기로 가득하십니다.
주님은 노쇠하거나 은퇴하시는 법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언제나 주님만 바라보고, 주님 안에 길이 머무는
우리 역시 아무리 나이가 먹어도 늙는 법이 없습니다.
주님 안에서라면 목숨 다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청춘을 살 수 있습니다.
비록 세월의 흐름 앞에 너나 할 것 없이 약해지고 작아지지만,
삶은 점점 위축되고 결국 소멸 되겠지만,
주님 안에 사는 사람, 주님만 바라보는 사람은 피곤한 줄도 지칠 줄도 모릅니다.
제가 요즘 온몸으로 실감하는 바입니다.
주님께서 제게 큰 자비와 은총을 주셔서, 상상을 초월할 강철 체력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제가 봐도 놀랄 정도입니다.
꼭두새벽부터 시작해서 잠자리에 들 때까지 이리 갔다 저리 갔다 엄청 바쁩니다.
일이 눈에 보이니 어쩔 수 없습니다.
피정 집 운영, 미사, 기도, 고백성사, 신앙상담, 특강, 원고 작성, 청소, 수리, 시장, 주방...
그 와중에 물때가 좋으면 해루질에 낚시...
꽉 찬 하루를 보내고 잠자리에 들면 온몸이 파김치처럼 되지만,
놀랍게도 하룻밤 자고 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에너지가 백 퍼센트 충전되어 원상 복귀됩니다.
나름, 열심히 살려고 하니 주님께서 힘을 주시고 기력을 북돋아 주시는가 봅니다.
제 체험 상 나이 들수록 더 움직여야 합니다.
좀 아프다고 누워만 있으면 통증은 점점 더 심해집니다.
근심 걱정도 주님께 맡기고, 건강 문제도 주님께 맡기고, 병고도 주님께 맡기고,
죽음에 대한 두려움도 주님께 맡기고,
그렇게 모든 것 맡기고 나면, 신기하게도 몸과 마음이 얼마나 가벼워지는지 모릅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가장 큰 위로자요 결정적인 위로자이신 예수님이 계십니다.
이런 고통 저런 상처를 이고 지고 힘겹게 살아가는
우리를 향한 그분의 말씀은 또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지 모릅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마태 11, 28)
세파에 지칠 때마다, 그래서 걷기를 포기하고 싶을 때마다 나아가야 할 곳이 있습니다.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신 예수님, 바다처럼 관대하고 모든 것을 수용하시는 예수님,
한없이 따뜻하고 편안한 하느님의 품입니다.
이사야 예언자의 표현대로 그분은 에너지 충전소입니다.
그분께서는 피곤한 이에게 힘을 주십니다.
기운이 없는 이에게 기력을 북돋아 주십니다.
젊은이들도 피곤하여 지치고, 청년들도 비틀거리기 마련이지만,
주님께 바라는 이들은 새 힘을 얻고, 독수리처럼 날개 치며 올라갑니다.
그들은 뛰어도 지칠 줄 모르고, 걸어도 피곤한 줄 모릅니다.
자기 마음이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은 행복하다.
전삼용 요셉 신부
오즈의 마법사에는 양철 나무꾼이 나옵니다.
저는 오래전부터 양철 나무꾼이 저와 비슷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워낙 이성적으로 사는 사람이어서 사랑을 느낄 심장을 원했던 것입니다.
저는 저의 심장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집착으로 모든 고통을 주는 게 마음임을 어느 정도는 깨닫고 있었던 것입니다.
양철 나무꾼이 새로운 심장을 가지게 되는 과정을 살펴봅시다.
양철 나무꾼은 본래 닉 초퍼라는 이름의 솜씨 좋은 나무꾼이었습니다.
그는 아름다운 먼치킨 소녀와 사랑에 빠져 결혼을 약속했습니다.
그러나 먼치킨들을 지배하던 동쪽의 악한 마녀는
이들의 사랑을 막기 위해 닉의 도끼에 저주를 걸었습니다.
“동쪽 마녀가 내 도끼에 저주를 걸어,
도끼를 휘두를 때마다 내 몸의 한 부분을 잘라냈습니다.”
도끼는 그의 팔다리를 하나씩 베어내었고,
친절한 양철장이가 이를 대신하여 양철로 그의 몸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결국 그의 몸은 전부 양철로 대체되었지만, 도끼는 그의 가슴마저 베어내고 말았습니다.
이에 양철장이가 그의 가슴을 양철로 대체했지만, 이에 따라 닉은 심장을 잃고 말았습니다.
“그때 나는 깨달았습니다….
심장이 없이는 더 이상 내가 사랑했던 소녀를 사랑할 수 없다는 것을.”
심장을 잃은 그는 사랑할 수 없다는 사실에 괴로워하며 공허함을 느꼈습니다.
그에게 심장의 부재는 가장 중요한 것을 잃어버렸다는 상실감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는 여전히 나무꾼으로서 일을 계속했지만, 마음속 공허함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나는 심장이 없으니, 감정을 느낄 수 없습니다. 사랑 없이 삶은 텅 빈 것처럼 느껴집니다.”
어느 날 비를 맞고 녹슬어버린 그는 숲속에서 움직이지 못한 채 방치되었지만,
도로시와 허수아비가 그를 발견하여 구해주었습니다.
그들의 도움을 받은 양철 나무꾼은 자신의 이야기를 나누며
“나는 마법사를 찾아가 심장을 달라고 부탁하겠소.
그래야 다시 사랑할 수 있을 테니.”라며 여정에 동참하게 됩니다.
에메랄드 시로 가는 여정에서 양철 나무꾼은 심장이 없다고 믿으면서도
동료들을 위해 여러 번 희생하며 자신의 따뜻한 본성을 드러냈습니다.
강을 건너다 허수아비를 구하기 위해 도끼를 휘두르고,
함정에 빠진 사자를 구출하는 등 친구들을 돕기 위해 헌신했습니다.
그의 행동은 사랑과 배려가 여전히 그의 안에 있음을 보여주었지만,
그는 여전히 자신이 완전하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나는 이런 일을 할 수 있소.
하지만 내 가슴에서 그것을 느낄 수 있다는 의미는 아니오.”
마침내 마법사를 만났을 때, 그는 심장을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마법사는 그에게 심장을 주겠다는 약속과 함께, 서쪽 마녀를 물리치라는 임무를 내렸습니다.
임무를 마친 후, 양철 나무꾼은 마법사에게 돌아와 자신의 소망을 이루기를 간절히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마법사는 양철 나무꾼에게 이미 그에게 심장이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그의 자신 없는 행동에도 불구하고, 친구들을 위해 보여준 희생과 사랑은
진정한 심장의 존재를 증명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미심쩍어하는 양철 나무꾼이 더 이상 공허함을 느끼지 않도록
마법사는 그에게 비단으로 감싼 톱밥 심장을 주었습니다.
마법사는 말했습니다.
“이 심장은 당신이 이미 사랑하고 배려할 줄 안다는 사실을 기억하게 해줄 것입니다.”
비단은 부드러움과 연약함을, 톱밥은 단순함과 강인함을 상징합니다.
곧 온유함과 겸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저에게 ‘성체’였습니다.
오늘 복음은 저의 서품 성구입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저는 얼음 같은 마음이 사라지고 따듯한 예수님의 마음을 원했습니다.
이웃을 사랑할 수 있어야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을
하.사.시.를 통해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따듯한 심장은 사랑이 거창한 행위나 완벽함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작은 선택과 타인을 위한 배려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심장을 받은 양철 나무꾼은 깨달음을 얻으며 말했습니다.
“이 심장을 영원히 간직하겠소.
이 심장은 양철이라도 사랑을 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해 주니 말이오.”
다른 사람이 저를 위해 울어줄 때 저는 그 감정을 느끼지 못하고 내일 걱정부터 했습니다.
그러니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따듯한 가슴을 원했습니다. 이전의 심장이 미웠습니다.
성체를 통해 제 안에 이미 따듯한 심장이 있다고 믿고 온유하고 겸손하여지려고 노력하였습니다.
그런데 정말 어느 순간부터 제 안에 예수님의 심장이 있다고 조금씩 믿어지는 것이었습니다.
영화 ‘블랙스완’은 자신이 유명해지지 못한 발레리나 어머니가
딸에게 자기 꿈을 강요하여 딸의 인생을 나락 가게 만드는 내용입니다.
주인공은 자신이 프리마돈나를 하지 못해 힘들어하는 것 같았지만,
실제로 자기를 힘들게 만드는 것은 엄마의 기대였습니다.
엄마를 위해 살인까지 저지르지만, 결국 그 일은 자기를 죽이는 일이었습니다.
엄마가, 우리가 모두 가지고 태어나는 마음입니다.
뱀의 마음입니다. 그 마음을 미워해야 합니다.
어떻게? ‘착한 뜻’을 가지면 됩니다. 지혜를 가지면 됩니다.
사랑하면 행복하다는 지혜로 사랑하려는 착한 뜻만 가지면
지금 심장을 미워하고 온유하고 겸손한 예수님의 마음을 바랄 수 있게 됩니다.
레베카는 아브라함의 종에게 우물에서 물을 길어주고 그의 낙타들까지 물을 먹였습니다.
이 착한 행동이 결국 이사악과 결혼하여 그의 심장과 하나가 되게 하는 결과를 가져다주었습니다.
구약에서 십계명을 먼저 주신 이유가 이것입니다.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을 배우고 실천하려는 사람에게 당신은 당신 심장을 내어주십니다.
그것이 성체입니다.
성체를 영하며 우리는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살아가고 있음을 확신하게 됩니다.
이것이 ‘안식’입니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