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과 퇴임 대통령 1 – 조선이 누구에게 먹히는 게 유리했을까?
며칠 전(5/10) 새 정부가 들어섰군요. 그 전에(8일) 김지하도 갔네요. <5적>, <타는 목마름>으로 시작하여 <죽음의 굿판>까지 한 시대상을 반영한 시인입니다. 저항과 기존 권력과의 타협(collaboration)이라는 이분법적 프레임에서 벗어나 그리고 후년에 생명문제에도 경도했던 시인의 폭넓은 정신적 방황을 탐구하는 자세가 필요하지 않을까 합니다. 운동권 후배들이 그를 배신자라고 낙인찍는 걸 보니 너무 단순하고 한심하다는 생각이 드네요. 한국사회가 당면한 문제들을 이제 흑백논리로서 접근하기에는 너무 복합적지 않은가요?
최근 한 신문에서 고종을 ‘매국노’라고 칭한 글도 보았습니다. 5월 12일 글방에 오른 글을 보니 고인이 된 고대 한승조 명예교수가 조선이 주변 강대국에 먹힐 운명이라면 러시아보다 일본에게 먹히는 것이 유리하다고 했더니 앞뒤를 잘라버리고 조선이 일본에게 먹히는 것이 유리하다고 말했다면서 욕을 엄청 먹었다더군요. 사진을 보면 고종은 온화한 신사 같지요? 떠나는 대통령의 환히 웃는 모습이 묘하게 겹치고 또 연상되어 이 글을 씁니다.
먼저 이 글은 어떤 정파적 관점을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말씀드립니다. 고종부터 시작하죠. 한 마디로 그는 ‘망국의 군주’입니다. 이건 부인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입니다. ‘매국노’라고 칭한 것은 좀 지나치지 않을까요? ‘매국노’의 사전적 의미는 국가를 외세에 팔아먹었다는 말일 겁니다. 그는 제국주의 시대에 근대화를 통한 부국강병이라는 국가경영에 실패하여 나라를 망쳤지요. 글 쓴 분은 아마도 국가의 자산인 철도나 전기, 수도 등 근대시설 건설권, 광산이나 산림 등 개발권, 그리고 어업권 등 이권 등을 몇 푼 안 되는 돈을 받고, 요즘 식으로 말하면 코미션을 받고 챙기고 팔아먹었습니다. 망해가는 부자가 남은 골동품을 팔아먹는 꼴이었지요. 결국 매국한 셈이지요. 그는 또 무당과 방구석에 처박혀서 국정은 뒤로 하고 일본을 저주하면서 한담으로 시간을 보내고 문제가 생기면 대신들 뒤에서 숨었지요. 당시 외국문서들도 ‘국고는 탕진되고 매관매직이 판치고 외국 사신들이 뭘 따지러 오면 평상시에는 알현(면회)을 청해도 거들떠보지 않던 대신들을 내세워 자기는 뒤에 숨으며, 사회는 혼란한데 왕이라는 인간은 로마가 불타는 것을 보면서 기생들과 술잔을 기울이는 네로와 같으니 이 나라는 망하지 않을 수 없다’면서 ‘그들이 싫어하는 일본이나 러시아 중 하나에게 먹힐 것’이라고 쓰고 있습니다.
고종을 계몽군주라고 예찬하는 분들이 제법 있습니다. 유명한 학자들도 있지요. 요즘은 고종의 비행(?)이 더욱 많이 자주 알려지면서 좀 수그러들었습니다만. 고종이나 명성황후 민비가 몇 가지 근대화 조치들을 도입한 것을 두고 개혁, 계몽군주라는 겁니다. 근대화란 체계적으로 진행되어야지 왕권의 강화에 도움이 된다고 총 몇 자루 사오고 창덕궁에 전기 가설하면 개혁인가요? 고종이나 민비에게는 왕실, 아니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고 권력을 세습하는 것 외에는 근대적 마인드를 가지고 국가를 부흥시키겠다는 비전은 찾아 볼 수 없습니다. 고종 찬미론자들은 고종의 개혁이 실패했다는 점은 인정하드라도 착한 사람이 아니냐고 반론을 내세우죠. 그러면서 고종과 만난 외국인들이 고종이 나이스하고 중국고전에 통달하고 아버지 흥선 대흥군과는 달리 기독교 선교사들에게 관용적이라고 칭찬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착함’은 군주의 덕목이 아니죠. 이들 외국인들은 고종이 훌륭한 ‘군주’라는 말은 하지 않습니다. 조선 총독같이 행세한 중국의 원세개(袁世凱)가 호통 치면 눈물을 찔끔찔끔 흘리는 물러빠진 겁 많은 사내일 뿐이었습니다. 군주로서의 강단(剛斷)이란 찾아 볼 수 없었지요. 마키아벨리의 표현을 빌릴 것도 없이 가장 기독교적인 (선한) 군주가 유능한 군주는 아닌 건 자명한 이치입니다.
당시 조선이 주변 강대국 중 하나에게 먹힐 것이라면 러시아보다는 일본에게 먹히는 것이 나을 것이라고 나도 강의 시간에 말하곤 했습니다. 왜냐구요? 대륙국과 해양국과의 차이 때문입니다. 대륙국은 대부분이 큰 영토를 가진 강대국입니다. 이들이 강성할 때 한번 편입된 주변 지역은 영원히 그들의 영역으로 남습니다. 중국 주변지역들을 봅시다. 유목민들이 살던 비옥한 초원은 오래전에 중국의 차지가 되었습니다. 몽골은 다행히(?) 소련 덕분으로 독립국으로 남았지만 몽골의 노른자인 내몽고를 빼앗겠습니다. 대만의 중국인들은 아직도 현 몽골을 ‘외몽고’라면서 중국 영토로 간주합니다. 신강은 한인(漢人)들이 살던 지역이 아닙니다. 청 제국 때 정복한 지역입니다. 티베트도 당 태종 때 문성공주가 시집간 것(640년)을 연고를 중화문명을 전파했다면서 중국 땅이라고 주장하죠. 그러면 대만은? 강희제 때이니 17세기 후반인 1684년 명의 잔당들이 대만을 근거로 청조에 저항하는데 이를 굴복시킨 후 대만은 중국의 ‘불가분한’ 영토라고 우기고 있지요. 미국도 수교에 합의하면서 양안(兩岸) 즉 중국본토와 대만을 한나라라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를 반대하면 중국은 당장 잡아 삼킬 듯이 적대국으로 간주하며 국교를 단절합니다. 만주는? 청 태조 누루하치가 만주의 여러 부족들을 통합하여 스스로 만주족이라 부르면서 중국과 분리된 정체성(identity)를 강조한 지역입니다. 청이 270여 년간 중국을 지배하고 나니 이제는 중국의 영토가 되었습니다. 이들 모든 지역들이 역사적 연고라는 명목으로 중국 땅이 된 것입니다. 러시아는 다행히 소련이 분열되면서 각 공화국들이 독립했습니다만 러시아는 여전히 이들을 러시아의 영향권으로 간주합니다.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와 완전히 갈라서서 서유럽 쪽으로 붙으려는 게 이번 우크라이나 전쟁이죠.
그러면 해양국가는 어떤가요? 한 때 강성하여 대륙의 일부를 지배하지만 대륙에서 통일국가가 성립되면 결국은 자기들 섬으로 밀려납니다. 대표적인 국가가 영국입니다. 과거 영국은 혼인과 정복으로 프랑스 일부를 장악했지요. 우리가 잘 아는 포도주 산지 보르도는 300년 이상 영국이 지배했습니다. 영국왕은 영국에서 거둬들인 세금으로 프랑스 궁중에서 잘 먹고 잘 살면서 프랑스어로 말했던 겁니다. 그러나 100년전쟁(1337-1453)에서 프랑스가 승리하면서 칼레지역만 남기고 프랑스에서 쫓겨났습니다. 영국과 가장 가까운 칼레 역시 1558년 프랑스에 귀속됩니다. ‘칼레의 상실’은 한동안 영국인들에겐 악몽 같았지요. 그러나 이때부터 영국은 유럽 대륙에서 영토를 얻기 위해 대륙 국가들과 싸우기 보다는 신대륙으로 눈을 돌립니다. 이후 세계 최대의 식민제국을 이루었지만 하나씩 독립하면서 이제는 영국본토로 쪼그려 들었습니다.
일본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메이지 유신이후 강대국으로 발돋움한 일본은 아시아와 태평양에서 제국을 건설했지만 80년을 버티지 못하고 본토 4개 섬으로 쪼그려 들었습니다. 이것이 해양제국의 운명입니다. 대륙을 상대로 한 이들의 팽창은 일시적이란 말입니다. 대륙국가들이 분열되고 쇠퇴한 시기를 이용하여 일시적으로 팽창을 도모할 수는 있습니다. 일본 역시 1차 대전을 천재일우(千載一遇)라, 천년에 한번 올까 말까한 기회라면서 팽창에 열을 올렸습니다. 러시아나 중국 등 대륙국가들이 국력을 회복하면 일본과 복수전을 시도할 것이고 그러면 일본은 대륙에서 물러날 운명이었지요. 한 가지 덧붙이자면, 미국도 해양국이라 할 수 있지만 그 영토는 어느 대륙국에 못지않습니다. 더구나 미주대륙에서 영토 확장을 끝낸 후 다른 대륙에서 영토를 탐하지는 않습니다. 한 때 필리핀을 식민지로 만들었지만 2차 대전 후 식민지 해방이라는 세계적 추세를 스스로 주도하면서 자발적으로 독립시켜 주었습니다.
그러니 한국이 러시아나 일본 중 한 나라에게 먹히는 것이 당시 제국주의적 탐욕과 팽창의 시대에 피할 수 없는 운명이라면 일본에게 먹히는 것이 언젠가는 독립할 수 있는 희망이 있어 낫다는 것입니다. 중국은 청일전쟁 전 소위 개화파들을 중심으로 조선을 합방하려는 시도가 있었습니다. 러시아 짜르 니콜라이는 한반도는 육로로 러시아와 연결될 운명이라고 쓰고 있습니다. 19세기 제국시대에 이같은 일이 일어났다면 한국은 당시 어느 외교문서에 언급된대로 지금은 잊혀버린 중앙아시아 아프가니스탄 북부 조그만 지역 (그 이름조차 기억할 수 없는데 복하라Bokhara인 듯)같은 신세가 되었겠지요. 복하라는 소련의 분열 후 우즈베키스탄의 일부이지만 19세기 후반 러시아에 병합되었는데 조선의 운명도 이같이 될 것이라 했지요. 그러면 지금 누가 조선의 독립을 언급할까요? 1945년 소련이 단독으로 일본을 몰아냈다고 해도 2차 대전 후 세계정세에서 완전한 병합은 불가능했을지 모르지만 핀란드나 발틱 3국과 같이 러시아의 억압적 지배에서 벗어나기는 어려웠을 겁니다. 결국 우리의 힘으로 일본을 몰아내지 못하고 미국이 일본을 패퇴시키고 소련이 개입하여 분단으로 나아간 것입니다. 나의 이 말도 앞뒤를 잘라버리면 역시 매국노가 되겠지요? (2022.5.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