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사상에서 주목되는 왕이 여럿 있는데,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근초고왕과 성왕이고, 다음은 고이왕, 무령왕, 무왕이다. 무왕이 주목받았던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6좌평제 등의 정치제도 정비를 통한 왕권 강화, 미륵사ㆍ왕흥사 등의 창건을 통한 이데올로기 정비, 꾸준한 대수(對隋)ㆍ대당(對唐)외교를 통한 선진문물의 수입과 국제적 위상 제고, 신라와의 전쟁을 통한 영역 확장, 익산 경영을 통한 권력구조 재편 시도 등을 들 수 있다.
먼저 국내정치적으로 볼 때 이 시기의 백제는 일반적으로 관산성 전투의 대패로 인해 실추된 왕권을 점차 회복하려고 노력하는 시기로 알려져 있다. 학자에 따라 왕권의 회복 정도는 논란이 되고 있지만, 위덕왕 중반 이래로 왕권 회복을 위한 시도가 꾸준히 전개되었고 무왕 후반 즈음에는 가시적인 성과를 거두었다는 데에는 대체로 동의하고 있는 상황이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6좌평제의 실시, 미륵사ㆍ왕흥사 창건, 익산 경영 등이다. 그러한 시기이기에 “서동요”에서는 비록 사료에 드러나는 내용은 아니지만 여러 가지 허구적 장치들을 통하여 위덕왕 이래의 왕들이 왕권을 회복하고 강화하는 방편들을 제시하고 있다.
또한 이 시기는 수(隋)라는 통일제국이 등장하여 국제정세가 급변한 시기이기도 하다. 이러한 상황에서 백제는 신라의 한강유역 점령과 관산성 전투의 패배라는 국가적 위기상황을 신라와의 전쟁을 통해 벗어나고자 하였고, 특히 무왕대 초반 이래 이러한 현상이 두드러진다.
다만 백제 혼자만의 힘으로 신라와의 전쟁에서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기는 어려웠기 때문에, 수 또는 당(唐)과 같은 통일제국과의 외교를 통하여 선진문물을 수입하는 것은 물론 외교적인 배후를 든든하게 하려고 하였다. 거기에 학자에 따라 인정 여부가 엇갈리지만 오랜 숙적이었던 고구려와도 관계 회복을 시도하려고 하였던 듯하다.
사료상으로는 백제와 신라의 전쟁이 무왕대 초반에 두드러지고 있지만, 육로상으로 영역이 전부 맞닿은 양국의 상황상 위덕왕대 중반 이후에도 간헐적인 국지전은 계속되지 않았을까 추정된다.
무왕대 신라와의 전쟁은 한강유역과 낙동강 서쪽의 두 방향으로 진행되었는데, 한강유역 쪽은 일진일퇴할 뿐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으나 낙동강 서쪽 특히 옛 가야지역에서는 일정한 성과를 거두었다. 특히 624년의 속함성(速含城: 지금의 함양) 등 6성의 점령은 642년에 의자왕이 대야성(大耶城: 지금의 합천) 및 주변 40여 성 점령이 가능하게 하는 교두보를 마련한 사건으로서 가장 대표적인 성과라 할 것이다.
무왕의 탄생 비밀은 사실 학계에도 논란이 끊이지 않는 문제이다. 법왕의 아들이라는 『삼국사기』의 기록을 믿지 않는 의견이 다수이지만, 부정할 이유가 없다는 의견도 만만치 않다. 또 법왕의 아들을 부정하는 경우라도 구체적으로 누구의 아들임을 제시한 견해는 거의 없고, 『삼국유사』의 연못의 용과 교통하여 낳았다는 기록에 의거하여 방계의 몰락한 왕족이라는 다소 모호한 표현으로 넘어가는 정도이다. 다만 이 경우 왕족이라 하더라도 방계라는 왕권과는 거리가 먼 자가 어떻게 왕위에 올랐는가를 설명하는 데에는 어려움이 있다.
그런 점에서 몇 년 전 텔레비전에서 방영한 드라마 “서동요”의 설정이 나름대로 타당성이 있다. ‘위덕왕의 숨겨진 아들’로서 금기를 범하고 낳았기 때문에 왕권이 실추된 상황에서 귀족들의 논쟁거리가 될까봐 공개될 수 없는 존재였다는 설명은 당시의 역사상에 비추어도 크게 어긋남이 없다. 왕실의 어떤 행사보다도 가장 우선시되는 제사의 금기를 범한 것이기에 더욱 그러하다.
사실 방계라면 상식적으로 왕위계승과는 관계가 멀어야 정상이고, 즉위한다 하더라도 정통성 논란으로 온전한 왕권을 발휘하기 어렵다. 즉위 후 무왕의 행보를 보면 몰락한 왕족으로서 초기의 권력기반이 취약한 면은 보이지만, 정통성 논란으로 권력행사 자체에 어려움을 겪었다고 보기는 어려울 만큼 비교적 순탄하게 진행되고 있다.
게다가 2007년에 발견된 “왕흥사 사리기(舍利記)”에 따르면 위덕왕에게는 아좌태자(阿佐太子) 말고도 재위기간에 죽은 왕자가 더 있었다고 한다(또는 아좌태자를 포함한 세 왕자로도 해석한다). 우연인지 모르겠으나 어느 쪽으로 해석하더라도 아좌태자 아래로 죽은 두 왕자가 있고 무왕이 넷째라는 드라마의 내용과 일정 부분 부합하고 있어 흥미롭다.
다음으로 선화공주의 실재성 문제는 크게 두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하나는 『삼국사기』는 물론 『화랑세기』에도 선화공주가 등장되지 않는다는 점, 다른 하나는 “미륵사 서탑 사리기”에 따르면 미륵사 창건에 선화공주가 관여한 흔적이 보이지 않으므로 서동 설화의 선화공주는 허구의 인물이라는 점이다.
첫번째 문제는 『삼국사기』와 『화랑세기』의 기록적 특징을 고려하면 쉽게 이해될 수 있다.(다만 『화랑세기』의 위작 논쟁은 이 글에서 다룰 성격의 것이 아니기에 일단 논외로 한다.) 『삼국사기』는 기록에 누락이 많고 특히 왕자, 공주들이 빠짐없이 기록된 사료가 아니다. 따라서 기록된 왕자, 공주의 정치적 비중이 컸다고는 할 수 있어도 기록되지 않았다고 해서 실재성을 의심할 수 없는 성격의 사료이다.
한편 『화랑세기』는 정사가 아닌 풍월주들의 역대 전기라는 점을 고려하면 풍월주와 관계된 인물들만 기록되는 것이 특징이다. 따라서 어린 나이에 신라를 떠나 화랑들과 별다른 관계가 없었던 선화공주는 기록이 되지 않고, 풍월주를 지낸 용춘과 혼인 등의 관계로 얽혔던 덕만(德曼)ㆍ천명(天明) 두 공주가 등장하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두번째 문제는 이미 많은 학자들이 이야기한 대로 무왕의 재위기간이 40년이나 되기 때문에 “미륵사 서탑 사리기”에 등장하는 사탁씨(沙乇氏) 왕후가 선화공주가 죽은 이후에 책봉된 계비(繼妃)일 가능성이 있다는 점, 미륵사의 구조상 서탑이 있는 서원(西院)과 중원(中院)ㆍ동원(東院)의 창건주체가 다를 가능성이 있다는 점, 선화공주 문제 이외의 내용이 미륵사의 발굴조사 결과와 대부분 일치하기 때문에 설화의 정확도가 매우 높다는 점 등으로 충분히 설명할 수 있다.
게다가 예전에 백제와 신라의 치열한 대립상황에서 어떻게 혼인동맹이 가능한가라는 의문도 제기된 바 있었지만, 무왕의 즉위를 전후한 시점은 아직 본격적인 전쟁의 시기가 아닌데다가 성왕이 한강유역을 신라에게 빼앗기고 나서 관산성 전투 이전에 신라와 혼인동맹을 맺은 적이 있다는 점 등으로 설명이 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