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세가 본 떨기나무는 쎄네( http://blog.daum.net/sunghwa/15853299 )로서 가시가 있는 것으로 본다. 즉, 가시나무였던 것이다. 모세는 이 가시나무라는 있는-것[존재자]을 모세 자신의 생각이나 관념으로 그리기 이전에 그분이 있게 하신 그대로를 만난다. 즉 마이스터 엑크하르트(Johannes Eckhart, Eckhart von Hochheim, 1260년경-1327년경)가 말한, 자신의 생각을 놓아버리고 나타나는 그대로를 영접하는 Gelassenheit[방념(放念)=letting it go]의 상태가 된 것이다. 관념의 왜곡 없이 드러나는 쎄네의 있음의 빛에서, 있음 자체이신 하나님을 만난 것이다. 그래서 모세에게 보이는(see) 바로는 가시나무 속에 있음의 빛이 불타올라 꺼지지 않았던 것이다(출애굽기 3장 2절~4절). 말하자면 있음의 빛께서 가시나무를 쓰고 계신 셈이고, 있음의 빛께서 나무에 매달려 있는 셈이다.
이와 관련하여 생각나는 구절은 예수에게 가시 면류관을 씌우는 장면이다(마태복음 27:29, 요한복음 19:2~3). 같은 쎄네인지는 모르겠으나 비슷한 가시나무였던 것으로 보인다( http://blog.daum.net/leeborn777/7096347 ). 또한 그리스도께서 매달린 십자가도 결국 나무로 만들어진 것으로서, 다시 한번 있음의 빛이 나무에 매달려 있는 모습을 떠올리게 할 수 있다. 결국 모세가 있음의 빛을 만난 이야기를 읽은 사람에게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시 면류관을 쓴 모습은, 있음의 빛께서 가시나무를 쓰고 나무에 매달려 있는 모습(출애굽기 3장 2절~4절)을 떠올리게 할 수도 있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 일체의 해설이 없다. 이렇게 해설 없이 비슷한 장면을 보여주어 그 상징을 듣는 자 스스로 파악하게 하는 비유법을 인유(引喩, allusion)라고 하는듯하다. 이와 비슷한 방법으로는 해설 없이 비유적인 상황을 전달하는 것은 우화적 비유(parable)라고 하는데 그리스도께서 즐겨 쓰시던 방법이다.
가시나무는 이스라엘 백성의 고통의 상징일 수 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고통의 상징일 수 있다. 하지만 잊지 말아야 할 핵심 사항 중 하나는 고통 속에도 있음의 빛은 있다는 것이다. 아니 고통 속에서 있음의 빛은 더 강렬하게 느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첫댓글 가시나무{ 고난 속에서 깨닫는 인류의 여정} ㅡ> 빛{광명,로고스} ㅡ> 생명의 근원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