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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룡강(黑龍江). 혼동강(混同江)! 그 이름이 없었다.
○ ‘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에서, 만약(萬若) 「흑룡강(黑龍江) 곧 흑수(黑水)라는 강(江)의 이름이 없었다.」면 어찌될까?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다. 왜냐하면 「조선사(朝鮮史)에 등장(登場)하는 고대왕조(古代王朝)가, 반도(半島) 북방(北方)에 있었다는, 역사(歷史)해설(解說)이, 모두 사기극(詐欺劇)으로, 막을 내려야 하기 때문이다.」
곧 『‘숙신(肅愼)’국으로부터 부여(夫餘), 고구려(高句驪) 및 읍루(挹婁), 물길, 말갈(靺鞨), 발해(渤海), 금(金)나라, 청(淸)나라』 등의 왕조(王朝)들 위치(位置)가 모두 뒤틀어지기 때문이다. 이들 모든 나라가, 「약수(弱水)=흑수(黑水)=흑룡강(黑龍江)」이라는 등식(等式)아래, 역사(歷史)해설(解說)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특히 청(淸)의 개국시조(開國始祖) 노이합적(奴爾哈赤)이, 『백산흑수사이(白山黑水之間)에서, 사시의 절후에, 우뚝 솟아 일어났다. (他崛起白山黑水之間的時候)』고 말한, 청(淸)나라의 개국(開國) 기원(起源)자체(自體)가 없어져 버린다. ‘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논자(論者)’들에게 이러한 이야기는,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식은 땅을 흘릴 일이다. 그러나 이 상황(狀況)은, 실제(實際) 상황(狀況)이다.
아래의 기록(記錄)을 보면서, 함께 냉정(冷靜)하게 판단(判斷)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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海國圖志 卷076 / 國地總論 下(原無今補)/ 天下名河亞細亞洲
●〔克魯倫河之水,由黑龍混同江入海,此東北一大幹,圖中有之而無水名,中略. : 극노륜하(克魯倫河)의 물은, 흑룡강(黑龍江) 혼동강(混同江)이 들어와, 바다로 들어가는데, 이 물은 동북(東北)의 가장 큰 줄기인데, 도(圖)【해국도지(海國圖志)를 말함】엔 있으나, 물 이름(水名)이 없다. 중략.〕라고 하였다.
㉠ 위의〔海國圖志卷076/國地總論 下(原無今補)天下名河亞細亞洲〕에서 (原無今補)라는 말이 무엇인가? “원래 없어 지금 더했다”는 뜻이다. 이 말은 『강(江) 이름이 없었는데, 지금 이름을 써 넣어, 보충(補充)했다.』는 뜻일 게다.
➨ 그렇다면 “극노륜하(克魯倫河)”은 어디에 있는, 어떤 강(江)의 이름인가? 지도에서 보면 : 극노륜하(克魯倫河)는, 흑룡강(黑龍江)의 최 상류(上流)의 이름으로, 외몽고(外蒙古) 올란바토르 동(東)쪽에서 발원(發源)하여 흐르다가, 호륜호(呼倫湖)로 유입(流入)되는 조그만 강(江)이다.
➨ 따라서 위 원문(原文)의 뜻은 : 극노륜하(克魯倫河)의 이름은 있으나, 당시(當時)에 흑룡강(黑龍江)이나 혼동강(混同江)이란 이름이 없었다는 이야기다. 동북(東北)지방(地方)의 가장 큰 물줄기인데, 도(圖)에는 그려져 있으나, 그 이름이 없었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 기록(記錄)대로라면 : 『해국도지(海國圖志) 속에, 강(江)은 그려져 있었으나, 그 강(江)의 이름은 없었다.』 는 이야기다. 이게 무슨 말인가? 해국도지(海國圖志)의 저자(著者)인 위원(魏源)은 당시(當時), 청(淸) 황상(皇上)의 백성(百姓)으로, 청(淸) 나라의 개국시조(開國始祖)도 모르는 자(者)였다고 한다면, 해국도지(海國圖志)라는 엄청난 분량(分量)의, 엄청난 책을 편찬(編纂)했다는 말은 거짓이다.
㉢ 위원【(魏源,1794-1856)】은, 호남성(胡南省) 사람으로 1847년부터 1852년에 걸쳐 해국도지(海國圖志)를 편찬했는데, 해국도지(海國圖志) 첫 권속에 『해국도지(海國圖志)는 청(淸)대의 위원(魏源)이 편찬(編纂)했는데, 공(共)히 일백권이다. 초판은 1843년에 간행되었다. 海國圖志 : 清代魏源所編撰,共一百卷.初版於一八四三年刊行. 』고 기록(記錄)해 놓고 있는데, 『60권 중간(重刊)은 1,847년에, 100권의 완간은 1,852년에 이루어졌다.』고 한다.
➠『위원(魏源)의 해국도지(海國圖志)속에는, ‘흑룡강(黑龍江)’이란 강(江)의 이름이 없었다.』는 말은, 『후대(後代)에 해국도지(海國圖志)를 주석(註釋)한, 어느 사람이 보충(補充)해서, 흑룡강(黑龍江)이란 이름을 적어 놓았다.』는 말이 된다. 이 시기(時期)는, “1,852년 이후(以後)”다.
㉣ 우리 카페에서, 그동안 일관(一貫)되게 주장(主張)했던 그대로이다. 현재(現在)의 북방(北方)삼성(三省)의 만주(滿洲)라고 하는 곳은, 그 땅의 지명(地名)이나 산(山), 강(江)등의 이름이 없었다는 이야기다. 곧 옛 고전(古典)에 기록(記錄)되어 있지 않다는 뜻이다. 이곳지방은 뚜렷하게 요충지(要衝地) 땅이 아니었으며, 왕조(王朝)의 먼 변방(邊方)으로, 눈여겨보지 않았으며, 이곳에서 발흥(發興)한 왕조(王朝) 또한 없었다는 뜻이다.
이러한 예는, 20세기 초(初), 일인(日人)들이 이곳에 눈독을 들이고, 조사(照査)를 해보니 「삼백(三百)만 명(名)도 되지 않는 사람들이, 광막지야(廣漠之野)에서 무인지경(無人之境)속에서 살고 있었다.」고 하였다. 하북성(河北省) 동(東)쪽으로부터 『요녕성 + 길림성 +흑룡강성 + 흑룡강(黑龍江)남북 안(南北 岸)의 러시아령과 달단해협(海峽)과 사할린까지』 그 땅의 면적(面積)이 얼만가? 생각해 보자.
㉤ 그렇다면, 『서력(西曆) 1,852년 이전(以前)까지는 : 노이합적(奴爾哈赤)【1,559년 – 1,626년】이 여진(女眞)족으로, 백산(白山) 으로부터, 흑수(黑水)=흑룡강(黑龍江)사이에서 우뚝 솟아 일어나, 청(淸)의 개국(開國)기초(基礎)를 닦았다는 말은, 현 만주(滿洲) 땅이 아니었다.』는 이야기이며,
『그러나, 어느 때인지는 정확(正確)하게 모르나, 반도(半島) 북방(北方) 땅을 만주(滿洲)라 부르면서, 백산(白山)=백두산(白頭山)도, 흑수(黑水)=흑룡강(黑龍江)도 생겼다는 이야기다.』 이러한 이야기는, 조선사(朝鮮史)를 연구(硏究)하는 우리에게, 아주 중차대(重且大)한 것이다.
아래의 기록(記錄)들을 보면서, 조선사(朝鮮史)의 진실(眞實)은, 무엇일까를 생각해 보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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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中華民國滿族協會 (滿族文化第1期目錄) 중의,「清太祖努爾哈赤的一生 / 金承藝」본문(本文) 중에 관심(關心)부분(部分) 발췌(拔萃)
〔努爾哈赤 ; 大清王朝帝業的建基人,生在公元一五五九年,那是明代世宗嘉靖三十八年。死於公元一六二六年,這年是明代熹宗天啟六年;也是他自己所建後金天命年號的第十一年。他崛起白山黑水之間的時候,當時東北亞洲的情勢是怎麼樣的呢?: 노이합적(奴爾哈赤) : 대청(大淸)왕조(王朝)의 제국(帝國)의 터를 닦은 사람인 노이합적(奴爾哈赤)은, 1,559년, 명(明) 세종(世宗) 가정(嘉靖)38년에 태어나, 1,626년 명(明) 희종(熹宗) 천계(天啓)6년을 맞아 죽었다. 나라를 건국하여 후금(後金) 천명(天命) 연호 11년이다. 그가(청 태조 노이합적을 칭한다) “백산흑수지간(白山黑水之間)”에서 사시의 절후에 우뚝 솟아 일어났다.〕고 하였는데, 노이합적(奴爾哈赤)이 일어났던 곳은 어디일까?
◎ 본인(本人) 주(注) : 위의 논문(論文)은, 동북(東北)공정(工程) 일환(一環)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판단(判斷)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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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두산(白頭山) 동남(東南) 기슭에서 발흥(發興)했다? “백산흑수(白山黑水)”라고 했으니 말이다.
〔白 山 黑 水 之 間 : 백산과 흑수 사이〕
○「백산(白山)과 흑수(黑水)사이!」수많은 고전(古典)에서, 「백산(白山)과 흑수(黑水)는 이곳이다, 저곳이다」라고, 말하는 산(山)과 강(江)의 이름으로, 우선(優先) “백산(白山)”에 대해서는 : 「송(宋) 홍호(洪皓)의 송막기문(松漠紀聞)」에서도 마찬가지로, 현(現) 북방삼성(北方三省)지대(地帶) 또는 반도(半島)북방(北方)과는, 전혀 관계(關係)없는 지세(地勢)를 말하고 있다.
〔長白山在冷山東南千餘里,蓋白衣觀音所居.其山禽獸皆白,人不敢入,恐穢其間,以致蛇虺之害. : 장백산(백산)은 냉 산(冷山) 동남(東南)으로 천여(千餘)리 떨어져 있다. 백의(白衣)의 관음보살(觀音菩薩)이 이곳에서 산다. 그 산(山)의 모든 짐승(禽獸)도 모두 희다. 용감치 못한 자(담이 작은 자)는 들어가지 못하는데, 거친 곳의 두려움에 떠는 사이, 살모사와 이무기가 와 해를 끼친다. 黑水發源於此,舊云粟末河.契丹德光破晉,改為混同江. : 흑수(黑水)가 이곳에서 발원(發源)하는데, 옛(舊) 말에 따르면 속말하인데, 글란(契丹)의 덕 광(德光)이 진(晉)을 파하고, 이름을 고쳐 혼동(混同)강이라 하였다.〕 고 기문(紀聞)에 적고 있다.
➊ 그러함에도, 해국도지(海國圖志)에서는 그 이름이 없다. 이름이 없다는 것은 관심(關心)이 없었다는 이야기며, 관심(關心)이 없다는 말은, 이곳 산하(山河)는, 해당(該當)사항(事項)이 없었다는 이야기다. 결국(結局), 「흑수(黑水)」는 오늘날의 흑룡강성(黑龍江省)에 있는 흑룡강(黑龍江)이 아니었다는 이야기다.
➋ 또 덕광(德光)이 진(晉)을 파했는데, 진(晉)과 전혀 관계(關係)없는, 4-5천리 동(東)쪽 땅에 있는, 속말하(粟末河)의 이름을 고쳐, 혼동강(混同江)이란 이름을 붙인 것은, 또 무엇일까?
➌ 흑수(黑水)! 조선사(朝鮮史)를 복잡(複雜)하게, 혼란(混亂)속으로 빠뜨린 장본인(張本人)이라고 해도 과언(過言)이 아닌데, 현(現) 흑룡강(黑龍江)과는 전혀 관련(關聯)이 없다. 왜냐하면, “흑수(黑水)”은 이미 주대(周代) 이전(以前)부터 기록(記錄)되어 있으며, 그 어느 곳에도 현 북방삼성(北方三省)지대를 논(論)한 기록(記錄)이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그 후대(後代)의 기록(記錄)인 해국도지(海國圖志)가 이를 입증(立證)하고 있는 것이다.
➍ 고지도(古地圖)인 “대청광여도(大淸廣輿圖)”를 보면, 「포창해(蒲昌海) 북쪽으로 “천산(天山)이 있고, 흑산(黑山)국이 있으며, 그 북쪽에 흑수(黑水)”」가 표시되어 있다. 물론(勿論) 거연 성(居延城) 주위에 있는 약수(弱水)를 또 “흑수(黑水)”라고 표시하고 있다. 어느 것이 정확(正確)한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다만 현(現) 흑룡강(黑龍江)과는 관련(關聯)이 없다는 사실(事實)이다. “흑수(白山黑水)”란 말은, 「돈황(燉煌) 서(西)쪽 또는 서북(西北)쪽에 있었다.」는 주장(主張)이 설득력(說得力)을 갖게 된다.
➎ 여러 사료(古典)로 보건대 : 흑수(黑水)=흑룡강(黑龍江)은, 우랄산맥(山脈)의 서쪽지대의, 흑해(黑海)로 유입(流入)되는 “볼 가 강”이 유력시(有力視)된다.
➏ 결국(結局), 흑수(黑水)니, 흑룡강(黑龍江)이니 하는 이름은, 근세기(近世期)에 조선사(朝鮮史)를 왜곡(歪曲), 조작(造作)하면서 차용(借用)하여 붙인 것에 불과(不過)하다.「후금(後金) 곧 청(淸)의 시원 지(始原地)는, 현 북방삼성(北方三省)지대(地帶)가 될 수 없다.」 이 말은 『백산흑수(白山黑水)와 노이합적(奴爾哈赤)과 여진(女眞)등이 있어야 할 곳은, 서토(西土) 땅이며, 흑해(黑海)주변(周邊)이 될 수밖에 없다.』는 뜻이며, 현(現) 대륙(大陸)측의 동북공정(東北工程)이란, 반도(半島) 사학자(史學者)들의 어처구니없는, 식민사관(植民史觀)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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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그렇다면 :『나선정벌(羅禪征伐)』도, 반도(半島) 북방(北方)지대에서 벌어졌던 사건(事件)이 아니라는 이야기가 성립(成立)된다.
➠ 다음 백과사전 / 브리태니커 / 에서는 : 《『나선(羅禪)은 러시안(Russian)을 한자(漢子)음(音)으로 표기한 것이다.』라고 설명(說明)하고 있으며, 『러시아는 13세기 이후 몽골족의 지배하에 있다가 15세기 후반에 몽고족을 몰아내고 점차 세력을 확장하여, 17세기 전반에는 헤이룽강[黑龍江]유역까지 진출하였다. 1651년(효종 2)에 헤이룽강의 우안(右岸)에 알바진(Albazin) 성을 쌓아 군사 기지로 삼고, 다음해 우수리강[鳥蘇 里江]하구에 새로 성을 쌓으려 하여 청나라와 충돌이 자주 일어났다. 이에 청(淸)의 영고탑(寧古塔) 도통(都統)이 2,000명의 병력으로 러시아군을 공격했으나 총포를 가진 러시아군에게 패하고 말았다. 그 뒤 러시아가 헤이룽강의 지류인 송화강(松花江)유역까지 진출하여 더욱 적극적으로 물자를 약탈하자, 청나라는 그곳의 러시아인을 토벌하기 위해 조선(朝鮮)에게 원병(援兵)으로 조총수(鳥銃手)들을 요청(要請)하였다.』고 하면서, 『이것이 “나선정벌(羅禪征伐)”을 하게 된 원인(原因)이다.』라고 설명(說明)하고 있다.》
➠ “나선(羅禪)”이 “러시아”이며, 조선(朝鮮)에서 출동(出動)한 원군(援軍)이, 현재(現在)의 흑룡강성(黑龍江省)에 있는 흑룡강(黑龍江)변에서, 청(淸)군과 함께, “러시아”군을 격퇴(擊退)시켰다는 옛 기록(記錄)이 사실(事實)일까? 한 번 세부적(細部的)으로 고찰(考察)해보자.
➊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 / 天地 / 地理類 / 人種 / 羅禪辨證說 : 《羅禪者.或作羅先.一作虜車.國俗稱車漢.傳言女眞遺種. : 나선(羅禪)은, 혹은 나선(羅先)이며, 일작 노거(虜車)이다. 풍속에서는 거한(巨漢)이라고 이른다. 전해 오는 말로는 ‘여진(女眞)’의 유종(遺種)이라고 한다. 【未知住居何方.或言居於黑龍江北.或云處於黑龍江上流.或謂無定居.以船爲家.以抄掠爲主云. : 어떤 곳에서 거주하는지 아직 알 수 없다. 혹 흑룡강(黑龍江)의 북쪽에서 산다는 말도 있고, 혹은 그곳이 흑룡강(黑龍江) 상류(上流)라고도 하고, 혹은 정착해 사는 곳이 없다고도 하며, 이들은 배(船)가 집이며, 노략질로 빼앗는 것(抄掠)을 주로 한다고 한다.】 【似是古黑水靺鞨.卽粟末靺鞨.居肅愼地.東濱海.西屬突厥.南高麗.北室韋.離爲數十部落.或是生女眞.黑水部民.在南者繫籍于遼.號熟女眞.在北者不籍于遼.號生女眞.又號黑龍江野人.或謂黑龍江夷人云. : 옛 흑수말갈과 같다. 곧 속말(粟末)말갈(靺鞨)이며, 숙신(肅愼)의 땅에서 사는데, 동쪽은 바다 가이며, 서쪽은 돌궐(突闕)에 속했고, 남쪽은 고려(高麗)이며, 북쪽은 실위(室韋)로, 수십(數十)부락이 떨어져 있다. 혹은 생여진이라고 하는데, 흑수부의 백성이다. 그 남쪽에 사는 자들은 요(遼)에 속했으며, 호가 숙여진이고, 북쪽에 있는 자들은 요(遼)에 간섭을 받지 않는데, 호가 생여진이다. 또 흑룡강(黑龍江)야인(野人)이라고 부르며, 혹은 흑룡강(黑龍江) 이인(夷人)이라고 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➋《胡嶠陷虜記.單于突厥之北.有黑車子.又北牛蹄突厥.東北至韈劫子.其人髦首.披布爲衣.不鞍而騎.大弓長箭.遇人殺而生食.契丹等國.皆畏之. : 호교(胡嶠)의 함로기(陷虜記)에, 선우돌궐(單于突闕)의 북쪽에 흑 거자(黑車子)가 있으며, 또 북쪽에 우제돌궐(牛蹄突闕)이, 동북(東北)에는 ‘말 겁 자’에 이르는데, 그 사람들은 나팔머리를 하고, 피포가 옷이며, 안장 없이 말을 타고, 대궁(大弓)에 장전(長箭)을 쓴다. 우연히 사람을 죽이면 날로 먹는다. 글란(契丹)등의 나라는 모두 이들을 두려워한다.》고 하였다.
➨ 반도(半島) 북방(北方)의 흑룡강(黑龍江) 남북(南北) 지역 어디에도, “흑거자(黑車子)나 우제돌궐(牛蹄突闕)의 나라”가 있었다는 역사서(歷史書)의 기록은 없으며, 이곳은 호로하(瓠蘆河) 주위의 글란(契丹) 선대(先代)들이 살았다는 곳이다. 이곳은 중앙(中央)아세아(亞細亞)의 북방(北方)지대다. 현 러시아 땅이다.
《又北,牛蹄突厥,人身牛足,其地尤寒,水曰瓠河,夏秋冰厚二尺,春冬冰徹底,常燒器銷冰乃得飲. : 또 북쪽의, 우제돌궐(牛蹄突闕)은, 사람의 신체가 소다리와 같은데, 그 땅은 더욱 추워, 호 하【瓠河 : 호 로 하(瓠蘆河)를 말하는 것으로, 고구려(高句驪) 망 후, 고구려(高句驪) 부흥 군(復興軍)과 당(唐)군과의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곳이다.】의 물은, 여름과 가을에도 얼음이 얼어 두께가 2척(尺)이나 되는데, 봄과 겨울에는 더욱 철저하게 얼어, 상시 얼음을 그릇에 넣어 불에 녹여 물을 만들어 마신다.
➨ 위의 「호로하(瓠蘆河)」는 : 글란(契丹)의 선대(先代)들이 살던 곳을 찾을 수 있는 중요(重要)한 단서(端緖)가 된다. 이곳은 고구려(高句驪)의 영토(領土)였으나, 당(唐)에 뺏기고, 부흥 군【復興軍 : 고구려(高句驪)와 말갈(靺鞨)병사로 구성되었음】과 당군(唐軍)과 치열(熾烈)한 접전(接戰)을 벌인 곳이다.
◎ 독사방여기요(讀史方輿紀要) 산서(山西) 外夷附考 / 瓠<盧瓜>河,在漠外.胡嶠曰:黑車子之北有牛蹄突厥,人身牛足,其地有寒水,曰瓠<盧瓜>河,夏秋冰厚三尺,春冬冰徹底,常燒器銷冰,乃得飲雲. : 호로(과)하는, 막외(漠外)에 있다. 호교(胡嶠)가 이르기를 : 흑거자의 북쪽에 우제돌궐이 있는데, 사람의 신체가 소다리와 같은데, 그 땅은 더욱 추워, 호(로과)하의 물은, 여름과 가을에도 얼음이 얼어 두께가 3척(尺)이나 되는데, 봄과 겨울에는 더욱 철저하게 얼어, 상시 얼음을 그릇에 넣어 불에 녹여 물을 만들어 마신다. 】라고 설명(說明)한 것을 보면, 이곳이 반도(半島) 북방(北方)지대가 될 수 없다.
◎ 독사방여기요(讀史方輿紀要)에서는 : 산서(山西)편에 기록(記錄)되어 있으며, 막외(漠外)지방에 있다고 하였는데, 산서(山西)란 오늘날의 산서성(山西省)지방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산(山)의 서(西)쪽 지방을 말하는 것이며, 외몽고(外蒙古) 중서부 지방과 신강성(新疆省) 북방(北方)지대 및 그 서(西)쪽까지」를 망라(網羅)한다.
➌ 五洲衍文長箋散稿(오주연문장전산고) 天 地 篇 / ‘羅 禪’ 辨 證 說 에 따르면,【아래의 원문(原文)은 관심(關心)부분(部分)만 발췌(拔萃)한 것임】
1) ❲四月二十九日到愎介國.國男女皆端雅.以鬚髥有無辨男女.五月初五日到曰介國.此國之人.本淸人餘種. : 4월 29일 퍅개국(愎介國)에 다다랐다. 이 나라의 남자와 여자는 모두 바르고 우아하며(端雅), 수염과 구레 나루가 있는데, 남녀가 분별(辨)하지 않는다. 5월초 5일 ‘왈개국(曰介國)’에 다다랐는데, 이 나라 사람들은, 본시 청인(淸人)의 여종(餘種)이다.〕
2) ❲六月初三日到黑龍江.江廣二十餘里.深不可測.水色如漆.所産魚及江邊禽獸皆黑. 問淸人曰.此江自何而來.曰宋加羅.自萬里城北.是從蒙古而來.黑龍江從女眞經蒙古而來耳.車漢之賊.以水爲地.以船爲屋.不耕不織.以攘奪爲業云. : 6월초 3일 흑룡강(黑龍江)에 다다랐다. 강(江)은 넓어 20여리이며, 깊이는 측량키 어렵고, 물의 색깔은 검은 칠과 같다. 이곳에서 나는 물고기와 강변의 금수(禽獸)는 모두 검다. 청인(淸人)에게 물어보니, 이 강(江)은 ‘송가라’라 이른다. 만리성(萬里城 :만리장성) 북쪽에서, 몽고(蒙古)를 따라 오는데, 흑룡강(黑龍江)은 여진(女眞)을 지나 몽고(蒙古)를 따라 온다. 거한【車漢=나선(羅禪)】의 적(賊)은, 이 땅의 물에, 배가 집이며, 농사도 베 짜기도 하지 않으며, 약탈(掠奪)을 업(業)으로 한다.〕
➨ 지형(地形)지리(地理)와 방위(方位)를 보자 : 『만리장성(萬里長城)은, 현 산서성(山西省) 서(西)쪽에서 중단(中斷)되었다. 따라서 장성(長城)의 북쪽이라면 몽고(蒙古) 땅이며, 이 몽고(蒙古) 땅을 따라오다가, 흑룡강(黑龍江)으로 유입(流入)되는데, 흑룡강(黑龍江)은 여진(女眞)을 지나 몽고(蒙古)를 따라온다고?』
➨『송가라강(宋加羅江)이 서(西)쪽에서 동(東)쪽으로 물이 흐르다가, 흑룡강(黑龍江)으로 유입(流入)되는데, 송가라강(宋加羅江)과 흑룡강(黑龍江)이 만나 큰 강(江)이 되고서 부터는, 반대(反對)로 역류(逆流)하여, 서(西)쪽의 몽고(蒙古) 땅을 따라 흘러간다?』 참으로 웃기는 이야기다. 자연법칙(自然法則)을 벗어나는, 외계인(外界人) 집단(集團)들이다. 매국(賣國)사학자(史學者)들은 말이다.
3) ❲六月初十日.船泊于宋加羅,黑龍兩江合流處.翌日黎明.八國兵士.無不力戰.砲雷動地.知進無退.終日大戰. : 6월초 10일, ‘송가라’에 배를 대었는데, 흑룡강(黑龍江)과 송가라 두 강이 합치는 곳이다. 익일(翌日) 여명(黎明), 8개 나라 병사가, 힘을 다하여 싸웠는데, 포 소리가 땅을 진동시켰다. 지진무퇴(知進無退 : 진격만 알고 퇴각은 없다)로 종일 큰 싸움을 하였다.〕
4) ❲二十五日曉.賊之形貌.身長十餘尺.面大一尺.目長而深.白而黑.赤髮蓬糊如海毛.垂在肩根.衣服與諸夷頗異.中略. : 25일 새벽(曉), 적(賊)의 생긴 모양은(形貌), 키가 십여 척이고, 얼굴은 커 1척이며, 눈은 길고 깊으며, 하얗고 검다. 붉은 머리털이 쑥을 풀로 붙인 듯 ‘해 모(海毛)’와 같이, 어깨를 드리웠고, 의복(衣服)은 여려 이(夷)와 매우 다르다.〕
➨ 이들의 생김새(面目) 설명을 보자 : 우선(優先), 『신장(身長)이 크고, 얼굴도 넓적하고 크고, 눈은 길고 깊으며, 붉은 머리털이다.』라고 하였다.
5) ❲八月二十日.到蒙古.中略.車漢賊毒害諸國.今幸攻滅.以絶遺種.(中略).地勢平坦.無山川之險.五穀茂盛.其瓜三尺.西瓜大如盆.五人共食不盡. : 8월 20일 몽고에 다다랐다. 중략. 거한(車漢=羅禪)의 적은 여러 나라에 해독을 끼쳤으니, 이번에 다행히 공격하여 멸하여, 유종(遺種)은 끊어졌다.(중략). 그 땅의 지세는 평탄하고, 산천(山川)의 험한 곳은 없으며, 오곡(五穀)은 무성(茂盛)한데, 그 과(瓜)는 3 척이나 되는데, 서과(西瓜 : 수박?)는 큰 동이와 같이 크다. 다섯 사람이 함께 먹어도 없어지지 않는다.〕
➨ 이곳의 지세(地勢)와 땅에서 나는 토산물(土産物)을 보자 : 『오곡(五穀)이 무성(茂盛)하고, 3척이나 되는 엄청난 크기의 수박(西瓜)등이 자라는 곳은, 동토(凍土)의 땅일 수는 없다.』 이러한 이야기는 대자연(大自然)의 법칙(法則)을 깨는, 초유(初有)의 사건(事件)이랄 수 있다.
6) ❲十月十七日.三女曰.車漢賊西戎巨猾.猛將勁卒.相繼僨敗.今者凶醜已盡.邊患永絶. : 셋째 여자가 말하기를, 거한(車漢=羅禪)적(賊)은 서융(西戎 : 서쪽 오랑캐)으로 많이 교활하다. 용맹한 장수와 굳센 병사가, 서로 이어 분패(僨敗)하니, 지금 거한(車漢=羅禪)은 추악함이 다하여, 변경의 우환이 영원히 끊어졌다.〕
➨ 이들의 인종(人種)은 : 서융(西戎)이라고 하였다. 『서융(西戎)은 서쪽에 사는 오랑캐란 뜻이다.』
7) ❲十二月十五日.到豆滿江.六鎭守令邊將留待江上.人皆慰之曰. : 12월 15일, 두만강에 다다랐다. 육진(六鎭)의 수령, 변장(邊將)들이 강위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사람들을 모두 위로하면서 이르기를,〕
8)❲更閱或者所記者.於六鎭慶源地方.則盧車國.北狄之外.國俗傳盧車.又云羅先.屢侵北狄.北狄每戰不利.中略.有宋加羅江.其地東西狹南北長.(中略).此今所謂羅鮮者.似是盧車之遺種.而出沒黑龍,松花兩江之境. : 육진(六鎭) 경원(慶源)지방의, 곧 ‘노거국(盧車國)’은, 북적(北狄)의 밖으로, 나라의 풍속에 ‘노거(盧車)’로 전하는데, 또 “나선(羅禪)”이라 한다. 북적을 번거롭게 침노하니, 북적(北狄)은 매전마다 불리하였다. 중략. ‘송가라 강(江)’이 있는데, 그 땅은 동서(東西)는 좁고 남북은 길다. 중략. 이것이 지금 소위 “나선(羅禪)”인데, 노거(盧車)의 유종(遺種)과 같다. 흑룡(黑龍)과 송화(松花)의 양강(兩江) 지경에 출몰(出沒)한다. 傳聞淸道光帝.以羅禪等雜種.占據我廢四郡中.중략.我邦廢四郡.在關西江界府地方.間於關西,關北之界.중략. : 전해오는 것을 듣기로 청(淸)의 도광제(道光帝)는, 나선(羅禪)등의 잡종(雜種)이라 한다. 우리나라의 “폐4군 가운데”를 차지하고 자리 잡았다. 중략. 우리나라의 폐4군은, 관서 강계(江界)부 지방, 관서(關西)와 관북(關北)지경의 사이(間)이다. 중략.〕
➨ 경원(慶源)지방 : 노거(盧車) 곧 나선(羅禪)이 있다. 이곳은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경원 도호부 : 덕릉(德陵)과 안릉(安陵)이 있다. 이러한 땅에, 조선(朝鮮)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가 있었던 곳이며, 그 선조(先朝)들이 살았던 곳으로, 달단동(韃靼洞) 또한 주변에 있었을 것이다. 반도(半島) 북방(北方)과는 전혀 관계(關係)없는 땅이다.
9) ❲咨文有四郡所據賊爲四十二部.一部爲數千戶.又傳聞四郡賊.號曰羅禪.或稱自聖國.戶至十餘萬.而淸將所領兵一萬四千騎步云.廢四郡顚末.別有辨證.與此參考焉. : 자문(咨文)에 ‘4군(郡)’에 거(據)하고 있는 적(賊)은 42부로, 1부는 수천(數千)호이다. 또 전해 듣기로 4군의 적(賊)은, “나선(羅禪)”이라 부르는데, 혹은 스스로 부르기를 ‘성국(聖國)’이라 하며, 호수(戶數)가 십여만에 이른다. 청(淸)의 장병(將兵)이 14,000 보기(步騎)라 이른다. 폐4군 전말은, 별도 변증(辨證)이 있으므로, 함께 이것을 이에 참고한다.〕고 하였다.
➨ 폐(廢) 사군(四郡)【여연(閭延). 우예(虞芮). 무창(茂昌). 자성(慈城)】땅에서 살고 있는 적(賊)이 ‘42부’라면, 그 땅의 넓이가 얼마나 광대(廣大)했겠는가? 생각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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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위의 글을 보면 : 나선(羅禪)”이란, 『조선(朝鮮)의 “폐 4 군 지방”을 차지하고 있던 자(者)들』임을 알 수 있다.
➊ 왕조실록(王朝實錄) / 연산군 8년 임술(1502,홍치 15) / 9월17일 (병술) : 좌의정 성준, 우의정 이극균이 아뢰기를 / ❲昔崔潤德西征時,本道軍數至二萬五千.近年又欲西征,點其軍額,只一萬五千,減耗太半.脫有不虞之變,如契丹,紅軍,則將何以禦之?今計莫如實邊. : 옛적에 최윤덕(崔 閏 德)이 서정(西征)할 때에 본도(本道) 군사의 수효가 2만 5천 명에 이르렀는데, 근년에 또 서정(西征)코자 하여, 그 군대 정원을 점검하니, 다만 1만 5천 명뿐이므로 줄어든 수효가 절반 이상이나 됩니다. 혹시 거란[契丹]·홍건적(紅巾 賊)과 같은 뜻하지 않은 변란이 있게 된다면 장차 무엇으로써 막겠습니까? 지금의 계책은 변방을 충실하게 하는 것만 같지 못합니다.』하였다. (중략).〕
➨【서정(西征) : 건주위(建州衛)의 야인 추장(野人酋長) 이 만주(李 滿 住)가 파저강(婆猪江)으로 옮겨와, 폐사군(廢 四郡) 지대를 침입하므로, 1433년(세종 15년) 세종(世宗)은 최윤덕(崔潤德)을 시켜 이를 정벌케 하였음.】라고 설명(說明)하고 있다. 이 말대로라면, 조선(朝鮮)의 ‘폐 4군’은, 조선(朝鮮)의 「서(西)쪽 또는 서북(西北)지방에 있었다.」는 것이다. 이래야 “서(西)쪽을 정벌(征伐)”하게 되는 것이다.
➋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의 기록(記錄) 내용은 : ‘폐 4군’에 침입(侵入)한 이만주(李滿住)를 치기 위해, 최윤덕(崔潤德)을 보냈는데, 『이때 “서쪽을 정벌했다”는 뜻으로 “서정(西征)”이라 불렀다』는 것이다. 반도(半島)의 북방(北方)지대에 있었다는 “폐 4군 지방”을 치기 위해 출전(出戰)한 사령관(司令官)과 병사(兵士)들이 북(北)쪽으로 가지 않고 서(西)쪽을 토벌하러 갔다? 는 사실(事實)을 알자.
➨ 이 말은 곧 『“여진(女眞)”은 서쪽 또는 서북(西北)지방에 있었다.』는 것을 증거(證據)하는 대목이며, 건주위(建州衛) 역시 당연히 서(西)쪽에 있었음이다. 여기서 폐사군(廢四郡)이란, 『여 연(閭 延). 우 예(虞 芮). 무 창(茂 昌). 자성(慈 城)』을 말하는 것이며, 4군(四郡)은 세종(世宗) 때 개척(開拓)하였으나, 단종 3년(1455)에 “여 연(閭 延). 우 예(虞 芮). 무 창(茂 昌)”의 3군을 폐(廢)하였고, 세조 5년(1459)에 “자성(慈 城)”마저 폐(廢)하여, 이후 폐사군(廢四郡)으로 불렀다.
➌ 승정원일기 / 고종 10년 계유(1873, 동치12) / 8월 13일(기축) 맑음 : 상이 이르기를, “의무려산(醫巫閭山)은 우리나라로 말하면 양북(兩北) 사이, 즉 폐사군(廢四郡) 근방에 있는가?” 하니, 이 근 필이 아뢰기를, “동북(東北)에서 발원(發源)하는 산맥은 장백산(長白山)에서 시작하여 서남(西南)으로 굽이쳐 내려, 그 형세가 매우 장대합니다.” 하고, 한경원이 아뢰기를, “의무려산(醫巫閭山)의 일맥이 흘러들어 우리나라의 백두산(白頭山)이 되었는데, 그 사이에 산야가 광활하여 도로와 마을이 아득히 단절되어 있습니다.” 하였다.
➨ 반도(半島)북방(北方)의 장백산(長白山)과 요녕성(遼寧省)에 있다는 의무려산(醫巫閭山)은, 그 근원(根源)이 전혀 다르기 때문에, 비교(比較)조차 할 수 없다. 의무려산(醫巫閭山)과 백두산(白頭山) 사이 수천(數千)리는, 요하(遼河)등의 몇 개 하천에 의해 절단(絶斷)되어 전혀 다른 곳이다.
➍ 심전고 제2권 / 유관잡록(留館雜錄) / 제국(諸國) : ❲鄂羅斯.亦名大鼻橽子國.在黑龍江北.距中國二萬餘里.十年一至留館遞易.不朝不貢.其人黑面高鼻性悍. : 악라사(鄂羅斯)는 대비달자국(大鼻橽子國)이라고도 하며 흑룡강(黑龍江)의 북쪽에 있으니, 중국에서 2만여 리나 떨어져 있다. 10년에 한 번 와서 관에 머무르며 교역(交易)을 할 뿐, 조공은 하지 않는다. 그 나라 사람은 검은 얼굴과 우뚝한 코에 성질이 사납다.〕
➨ 악라사는 러시아를 말하는 것으로 우랄산맥 서쪽에 있었다. 따라서 위의 글에서 말하는 흑룡강은, 우랄산맥 서쪽에서 찾아야 옳은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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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시(當時)의 생활상(生活相)에 대한 무지(無知)함속에서, 엿볼 수 있는 것은 오직 “당시(當時)의 분”들이 기록해 놓은 “기록(記錄)”이란 매체(媒體)를 통해서 일부나마 가능(可能)한 것이다. 『이때 “그 분들”이 써 놓은 지형지리(地形地理), 방향(方向), 특이지형(特異地形), 토산물(土産物)등등에 관한 것은 지금 “21세기(世紀)” 기준(基準)이 아니라, “수천(數千)년전”의 당시(當時)의 기준(基準)이다.』 이것을 망각(忘却)하고 역사(歷史)를 말한다면, 그것이 바로 왜곡(歪曲)이요, 조작(造作)이다.
○ 역사왜곡(歷史歪曲) 또는 조작(造作)이란 『고의적(故意的)이거나, 계획적(計劃的)일 경우와 무지(無知)함에서 자신(自身)도 모르게 하는 경우(境遇)가 있다.』 항상 당시(當時)의 경우(境遇)를 생각지 않고, 오늘날의 기준(基準)으로 모든 것을 이해(理解)하려 한다면 낭패(狼狽)를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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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에서, 만약(萬若) 「흑룡강(黑龍江) 곧 흑수(黑水)라는 강(江)의 이름이 없었다.」면 어찌될까?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다. 왜냐하면 「조선사(朝鮮史)에 등장(登場)하는 고대왕조(古代王朝)가, 반도(半島) 북방(北方)에 있었다는, 역사(歷史)해설(解說)은, 왜곡(歪曲)과 조작(造作)으로 얼룩진 것이기 때문이다.」
2015년 07월 30일 <글쓴이 : 문무(文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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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세계 최고 여행기라며 내놓은 "열하일기"는 연경에 있는 황제를 뵈알하러 가는 이야기인데 그렇다면 연행록도 진실이 아닌 창작소설일 가능성은 없는걸까요? 조선은 대륙에 있었다라고 볼때에 연행록 또한 여러모로 적합하지 않는것 같습니다.
대부여님, 안녕하세요!
연행록 대부분이 왜곡되었다고 봅니다. 특히 리수(여행거리)는 조작된 것이 확실합니다. 다만 여기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은, 방향과 산천지세, 주변의 풍경, 주변의 부족이나 종족등을 참고할 수 있다고 봅니다. 지금 "북경가는 여정"을 정리하고 마무리를 하고 있는데, 의주로부터 출발한 사신단이 가는 방향을 보면, 반도 조선왕조는 확실하게 존재하지 않았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우리가 가진 역사서나 학자들의 기록과 대륙측의 원전내용과 서로 비교해보면, 대략적인 윤곽이 나오며. 어떤 것이 왜곡된 것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진실을 거짓으로 덮을 수 없다고 봅니다. 늘 건강하시길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