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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덕호 목사 / 성령님은 충만할수록 좋습니다. (민 11:24-30)
오늘도 주님 앞에 나와 예배하는 모든 성도님들 가정에 주님의 은혜와 평강이 충만하시기를 빕니다. 서로 축복해주실까요? “성령님을 받아 능력 있는 신자가 되십시오.”
제가 신학교에서 일할 때 특이한 학생이 하나 있었습니다. 이 학생은 명문대학을 나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신문사에서 부장까지 지낸 사람입니다. 나이도 거의 50이 다 되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신학교에 다니고 있는 것입니다. 좀 특별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한번은 어떻게 해서 신학교에 오게 되었는지 물어봤습니다. 그랬더니 이 학생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사회에서 잘 나가다가 어느 날 예수님을 믿게 되었는데 예수님을 너무 믿어버렸습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버리고 어려운 사람들을 돕기 위해 어느 산골에 들어가 장애우를 섬기는 목회를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아무래도 목사 자격이 있어야 할 것 같아서 신학교에 왔습니다.”
여러분 이 전도사님의 말 중에 좀 이상한 표현이 있지 않습니까? “예수님을 너무 믿어버렸습니다.”라는 말이 이상하지 않습니까? 예수님을 너무 믿어 버렸다니? 예수님을 믿는데 어느 정도 이상으로 믿으면 나쁜 겁니까? 예수님을 믿는 것은 많이 믿을수록 좋은 것 아닙니까? 그런데 이 전도사님은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이 전도사님은 저와 대화하면서 이 말을 두세 번 반복했습니다. “예수님을 너무 믿어버렸어요.” 이때 그 얼굴에 어떤 회한 같은 것이 스쳐 지나갔습니다. 저는 이 말을 들으면서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이 분이 예수님을 믿고 기쁨과 감격이 북받쳐 온 몸을 바쳐 예수님을 섬겼는데 지금 얼마나 힘들면 예수님을 너무 믿어버렸다고 말할까?’
저는 이 전도사님이 예수님을 믿고 그렇게 헌신한 것을 후회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어려운 목회를 하며 신학교까지 다니는 게 너무 힘들어서 일시적으로 이런 말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주님의 은혜가 얼마나 감사했으면 그렇게 헌신했겠습니까? 또 그 헌신이 얼마나 힘들었으면 일시적으로나마 예수님을 너무 믿어버렸다는 말을 했겠습니까? 짧은 대화였지만 정말 많은 것을 느낀 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이 분은 남들보다 예수님을 더 많이 사랑하고 더 많이 헌신하여 더 많은 고생을 했습니다. 그러면 이것이 그에게 손해입니까?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 헌신에 대해 충분한 상급을 내려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믿는 데는 손해가 없습니다. 아무리 많이 헌신해도 절대 손해가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반드시 헌신한 것보다 더 큰 축복을 받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 데는 너무 믿었다는 말이 없습니다. 다만 우리가 믿음을 지키기 위해 헌신하다가 너무 힘들어서, 또 주님의 뜻에 따라 바르게 살다가 너무 힘들어서 일시적으로 이렇게 말하는 것뿐입니다. 예수님은 많이 믿을수록 좋은 것입니다.
이렇게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게 또 뭐가 있을까요? 돈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자녀에게 용돈을 많이 줄수록 좋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니지요. 왜 그렇습니까? 돈은 자기가 관리할 수 있을 정도만 있는 게 좋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어린이만 그런 게 아닙니다. 어른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른도 자기가 관리할 수 있는 이상의 돈이 생기면 돈이 너무 많아진 것입니다. 그러면 불행해지는 것입니다. 복권에 당첨된 사람들이 대부분 더 불행해지는 게 바로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건강은 좋을수록 좋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너무 건강한 사람은 이웃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진정한 지도자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징기스칸은 장군을 세울 때 너무 건강한 사람은 세우지 않았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힘들지 않으니까 부하들이 힘들어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너무 건강한 장군은 부하들을 잘 보살피지도 못하고 작전도 부하들에게 무리하게 세워서 오히려 전투력이 약화되는 것입니다.
권세는 클수록 좋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유명한 말이 있지요. “절대 권력은 절대 부패한다.” 사람은 너무 권세가 크면 안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람들이 세상에서 가장 많이 사모하는 돈, 건강, 권세가 다 너무 많으면 좋지 않은 것입니다.
왜 세상의 좋은 것들은 너무 많으면 해로운데 예수님을 믿는 것은 많을수록 유익할까요? 세상의 것들은 우리를 변화시키지 않은 채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인품은 그대로 있는데 돈과 권력만 많아지니까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주머니는 그대로 있는데 황금만 자꾸 집어넣으면 주머니가 터져서 다 쏟아져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황금이 많을수록 유익하려면 주머니도 계속해서 같이 커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의 돈이나 권력이 많아진다고 인격이 그만큼 좋아지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래서 세상의 좋은 것들은 너무 많아지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 것은 다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다른 것이 주어지기 전에 먼저 우리 자신이 변합니다. 인격, 생각, 지혜, 능력이 모두 변합니다. 점점 하나님을 닮아갑니다. 그래서 돈이나 권세를 많이 얻어도 해가 되지 않고 유익이 되는 것입니다. 심지어 어려움을 만나도 축복이 되는 것입니다. 믿음이 좋을수록 먼저 인격이 그만큼 훌륭해지기 때문에 세상에서 어떤 것을 받아도 축복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을수록 좋은 이유를 좀 달리 표현하면 이렇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하나님이 좋은 것만 주십니다. 더 잘 믿을수록 더 좋은 것을 더 많이 주십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더 잘 믿을수록 더 유익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중요한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없이 세상에서 얻는 것은 너무 많아지면 해롭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감당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도우심은 많을수록 좋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많이 함께해주실수록 좋습니다. 많이 인도해주실수록 좋습니다. 좀 표현이 이상하지만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세상 것은 너무 많이 받으면 나쁘지만 하나님은 많이 받을수록 좋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받는 게 뭡니까? 성령님을 받는 거지요. 그러니까 성령님은 더욱 충만하게 받을수록 좋은 것입니다.
여러분 성령님의 충만하심을 사모하십니까? 사모하시지요? 이게 우리교회의 금년 표어이지요? 매주 축복하는 말씀이지요? 그런데 여러분 성령님의 충만하심을 사모할 때 절대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성령님이 너무 많이 임하시면 내가 광신자가 되는 게 아닌가 염려하지 마십시오. 재산 다 바치고 망하는 것 아닌가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성령님은 항상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만 주십니다. 반드시 우리를 축복의 길로만 인도해주십니다. 그러니까 성령님을 사모하실 때 마음 놓고 더욱 성령님의 충만하심을 사모하십시오.
그런데 나에게 성령님이 임하시면 누구에게 유익합니까? 물론 나에게 유익하지요. 그러면 다른 사람에게는 해가 됩니까? 아니지요. 다른 사람에게도 유익하지요. 왜냐하면 성령님이 충만한 사람은 사랑의 열매를 맺는데 사랑은 이웃에게 유익을 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내가 성령님이 충만할수록 나와 이웃 모두가 유익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거꾸로 생각해보십시오. 다른 사람에게 성령님이 임하시면 나에게도 축복이 되는 것입니다. 악한 사람에게 성령님이 임하시면 어떻게 될까요? 악한 사람이나 그 이웃에게 해가 될까요? 아닙니다. 성령님이 악한 사람에게 임하시면 악한 사람의 악을 막으십니다. 이게 바로 악한 사람에게 유익한 것 아닙니까? 그러면 악한 사람의 이웃에게도 당연히 유익하지 않습니까? 성령님이 임하시면 모두에게 유익합니다. 그러니까 내가 잘 되려면 나에게만 성령님이 충만히 임하시도록 기도할 게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성령님이 충만히 임하시도록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한 전도사님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자기는 운전할 때 난폭운전 하는 사람을 보면 화가 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에는 혼잣말로 욕을 했는데 그게 좋지 않은 것 같아서 이렇게 바꿨다고 합니다. “예수 믿고 구원받아라.” 어떻습니까? 참 좋은 방법이지요. 나쁜 사람보고 나쁜 놈이라고 욕해서 좋을 게 뭡니까? 그러나 예수 믿고 구원받으라고 축복해주면 얼마나 좋습니까? 그 사람이 구원받으면 그 사람도 좋고 그 사람이 앞으로 난폭운전을 하지 않을 테니까 다른 사람에게도 좋습니다. 혹시 그 사람이 그 축복을 받지 못하면 그 축복은 나에게로 돌아옵니다. 그러니 얼마나 좋습니까?
다른 사람에게 성령님이 충만히 임하시도록 축복해주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사람이 성령님을 충만히 받으면 먼저 그 자신에게 좋습니다. 그러면 나에게는 손해가 됩니까? 아닙니다. 나에게도 유익이 됩니다. 그 사람이 나를 사랑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 사람이 성령님의 은사를 받아 그 은사로 나를 섬길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잊지 마십시오. 성령님이 충만한 사람은 절대 나에게 해를 끼치지 않습니다. 자기가 성령님이 충만해졌다고 자랑하며 내 속을 상하게 하지 않습니다. 내 지위를 넘보지 않습니다. 성령님이 충만하면 오직 사랑과 겸손으로 이웃을 섬깁니다. 그러니까 내 이웃이 성령님 충만해진다는 것은 나를 사랑하고 섬기는 사람이 생긴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내 주위에 성령님 충만한 성도가 많아질수록 좋은 것 아닙니까?
오늘 본문에서 모세가 보여주는 자세가 바로 이것입니다. 본문의 배경은 이렇습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땅으로 인도해 가는데 길은 험하고 백성은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모세는 말할 수 없이 힘들었습니다. 너무 힘들어서 하나님께 자기를 죽여 달라고 했을 정도입니다. 민수기 11:15입니다. “주께서 내게 이같이 행하실진대 구하옵나니 내게 은혜를 베푸사 즉시 나를 죽여 내가 고난당함을 내가 보지 않게 하옵소서.”
그러자 하나님은 장로 70인을 세워서 모세를 도와주게 하겠다고 하셨습니다. 이를 위해 70인의 장로들에게도 모세에게 임한 영을 임하게 해주겠다고 하셨습니다. 민수기 11:16-17입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스라엘 노인 중에 네가 알기로 백성의 장로와 지도자가 될 만한 자 칠십 명을 모아 내게 데리고 와 회막에 이르러 거기서 너와 함께 서게 하라. 내가 강림하여 거기서 너와 말하고 네게 임한 영을 그들에게도 임하게 하리니 그들이 너와 함께 백성의 짐을 담당하고 너 혼자 담당하지 아니하리라.’”
그래서 모세가 장로 70인을 지명해서 불렀는데 2명은 오지 않고 68명만 왔습니다. 하나님은 약속대로 모세에게 임한 영을 그들에게도 임하게 해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 참석하지 않은 2명에게도 영이 임하였습니다. 이 두 사람은 자기 장막에서 성령님을 받은 것입니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모세의 충직한 부관인 여호수아가 그 2명은 성령님을 받지 못하게 하라고 권했습니다. 본문 27b절입니다. “여호수아가 말하여 이르되 ‘내 주 모세여 그들을 말리소서.’” 그러자 모세가 뭐라고 합니까?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암송한 29절입니다. “모세가 그에게 이르되 ‘네가 나를 두고 시기하느냐? 여호와께서 그의 영을 그의 모든 백성에게 주사 다 선지자가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여기서 여호수아는 모세보다 훨씬 믿음이 미숙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교회에는 여호수아보다 더 미숙한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이라면 어떻게 했을까요? 70명의 장로가 성령님 받는 것 자체를 반대했을 것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모세가 받은 영을 다른 사람들도 받으면 모세의 독보적인 권위가 약해지지 않겠습니까? 물론 70명이 성령님을 받아 능력 있게 모세를 도우면 모세에게도 힘이 되고 백성에게도 유익할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래도 모세의 권위는 약해질 위험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의 권세만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70명의 장로가 성령님 받는 것 자체를 반대하게 되는 것입니다.
실제로 우리 주위에 이런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자기가 권력을 잡기 위해 나라의 이익에는 관심도 없이 오직 자기 이권만을 위해 투쟁하는 정치인이 얼마나 많습니까? 정치인만 그렇습니까? 성도들 중에도 자기 세력만 지키기 위해 교회에 좋은 일꾼이 세워지는 것을 반대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제 친구 목사가 전도사 시절에 서울의 한 교회에 담임목회자로 부임했습니다. 그런데 부임할 때 장로님들이 뭐라고 했는지 아십니까? 이렇게 요청했습니다. “전도사님, 교인이 줄어들면 안 됩니다. 그렇다고 너무 많아져도 안 됩니다.” 여러분 교인이 줄어들면 안 된다는 말은 이해가 되시지요? 그런데 교회가 성장해도 안 된다는 말이 이해가 되십니까? 왜 이런 말을 했을까요? 항상 자기가 주도권을 가지기 위해서 그런 것입니다.
본문에서 여호수아는 믿음이 약한 사람이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정말 교회에서나 사회에서나 이런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공동체가 어떻게 되든 나만 권세를 잡으면 된다는 생각을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 우리와 우리 교회가 함께 망하고 말 것입니다.
여호수아를 보십시오. 68명의 장로가 성령님 받는 것은 반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자리에 나오지 않은 2명이 성령님 받는 것은 반대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아마 두 가지 이유 때문일 것입니다. 첫째, 모세를 위해서 시기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모세도 알아차렸습니다. 그래서 “네가 나를 두고 시기하느냐?”라고 말한 것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이 두 사람은 모세가 불렀는데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모세에게 순종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에게 성령님이 임하시고 능력이 생기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혹시 모세를 대적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여호수아는 이들이 성령님 받는 것을 반대한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는 달랐습니다. 모세의 목적은 오직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자기는 어떻게 되어도 좋습니다. 그러니까 혹시 자기에게 반대하는 사람이 생기더라도 성령님의 지혜와 능력을 받아 하나님의 일을 잘하는 사람이 많아져서 하나님의 뜻만 잘 이루어지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말을 듣는 사람이나 자기 말을 듣지 않는 사람이나 모두 성령님 받게 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여호수아가 2명에게 성령님이 임하시는 것을 반대한 두 번째 이유는 단순히 모세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을 위해서 그런 것일 수도 있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이 모세를 지도자로 세우셨는데 두 사람이 능력을 받아 모세를 반대하면 온 백성에게도 해가 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모세의 말에 순종하는 68명의 장로들에게 성령님이 임하시는 것은 좋지만 모세를 따르지 않는 사람에게 성령님이 임하시는 것은 위험한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이런 이유로 반대했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생각에는 치명적인 오류가 있습니다. 그게 뭡니까? 성령님이 임하시면 악한 사람도 선해진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한 것입니다. 모세를 반대하던 사람도 성령님을 받으면 모세가 하나님의 종으로 일하는 한 모세를 돕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염려는 정말 쓸데없는 염려인 것입니다. 세상에 어떤 망나니도 성령님만 받으면 선하게 변하기 때문에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입니다.
모세는 이것을 알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심지어 모든 백성에게 성령님이 임하시기를 바란 것입니다. 29b절입니다. “여호와께서 그의 영을 그의 모든 백성에게 주사 다 선지자가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여러분 백성이 다 선지자가 되면 어떻게 되는지 아십니까? 모세가 지도자의 자리를 잃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우리교회의 모든 성도님이 성령님을 충만히 받아 말씀과 능력이 충만해지면 목사 입장이 뭐가 되겠습니까? 그러면 평신도들은 성령님이 충만하지 않은 게 목사에게 더 좋은 겁니까? 아닙니다. 모두가 성령님이 충만하면 우선 하나님 나라를 위해 큰 일을 할 수 있으니까 하나님께 좋습니다. 그러면 된 것 아닙니까? 목사나 당회원은 자기 권위가 떨어져도 이것으로 만족하고 기뻐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평신도들이 정말 성령님이 충만하면 더 겸손해져서 목사의 말에 더 귀를 기울이고 당회의 지도에 더 잘 순종하게 됩니다. 그래서 진짜 모두에게 더 큰 축복이 되는 것입니다.
모세는 어떻게 해서 이런 귀한 모습을 갖추게 되었을까요? 우선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해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얼마나 좋은 분인지 알았기 때문입니다. 성숙한 믿음 때문이었지요. 그리고 또 한 가지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자기 힘으로는 도저히 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도저히 자기가 백성을 이끌어갈 수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죽여 달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이렇게 자기가 얼마나 부족한지 알았기 때문에 하나님이 다른 사람에게도 성령님을 부어주시고 크게 사용해주시기를 바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사역하다가 어려움을 겪으신 적이 있습니까? 너무 힘들어서 낙심한 적이 있습니까? 염려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그런 어려움을 통해 여러분을 진정한 믿음과 이웃을 존중하는 성숙한 인품으로 이끌어주시는 것입니다. 모세가 혼자서도 잘 할 수 있었다면 다른 사람에게 성령님이 임하기를 바랐겠습니까? 우리도 어려움 속에서 겸손해지고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다른 사람에게 성령님을 보내주시고 그들을 귀하게 쓰실 때 그것을 기쁨으로 받아들이는 고귀한 종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령님은 우리를 더 큰 축복으로 인도하기 위해 우리에게 오십니다. 성령님이 충만하실수록 나와 이웃에게 축복이 됩니다. 성령님이 더 많은 사람에게 임하실수록 우리 모두에게 더 큰 축복이 됩니다. 우리 모두가 자신이 성령님의 충만하심을 입도록 기도할 뿐 아니라 다른 성도와 다른 사람에게도 성령님이 충만히 임하시도록 기도하여 우리교회와 우리 가정이 성령님의 충만하심을 받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의 축복을 풍성히 받게 되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주님의 말씀을 마음에 품고 세상에 나가십시오.
우리에게 성령님이 임하시면 우리와 이웃 모두에게 축복이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성령님 보내주시기를 원하십니다. 항상 자신과 이웃에게 성령님이 충만하시기를 위해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다른 성도에게 성령님이 임하시는 것을 기쁨으로 받아들이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성령님의 역사 속에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행복한 가정과 교회를 이루어 귀하고 복된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이근수 목사 / 하나님의 창고는 보화로 가득하다 (민 11:31-35)
우물 안 개구리
시골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조그마한 우물에서 태어난 작은 개구리가 대대로 우물 안에 살면서 마음껏 헤엄치고 놀았습니다. 더할 나위 없이 만족스러웠습니다. “이보다 더 좋은 삶은 없을 거야. 내게 부족한 것은 하나도 없어.” 그러던 어느 날 개구리가 고개를 들어보니 우물 위에서 한줄기 눈부신 빛이 들어왔습니다. 개구리는 문득 우물밖에 호기심이 생겼습니다, 저 위는 뭐가 있을까? 개구리는 벽을 타고 조심조심 기어 올라갔습니다. 마침내 꼭대기에 이르러 주위를 둘러보았습니다. 이럴 수가! 제일 먼저 눈에 띈 것은 큰 연못이었습니다. 연못은 자신이 사는 우물 보다 수 백 배 더 컸습니다. 연못으로 달려가 멋지게 다이빙을 하여 가로 질러 헤엄을 쳐 보았습니다. 연못이 얼마나 크던지 여러 번을 쉬어서 간신이 건넜습니다. 연못 둑으로 기어 올라가 보고 개구리는 더 놀랐습니다. 아니 이건 뭐야! 연못 너머에는 엄청나게 큰 호수가 있었습니다. 자기가 살던 우물 보다 수 만 배 더 컸습니다. 개구리는 입이 딱 벌어졌습니다. 어린 개구리는 큰 호수로 멋지게 다이빙을 했습니다. 끝이 안보였습니다. 개구리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자기가 그동안 넓은 세상이 있다는 것도 모른 채 얼마나 좁은 곳에서 살며 좁은 생각을 하며 살았는지 자신이 한심하기 까지 했습니다.
우물 안 개구리는 개구리뿐이 아닙니다.
애굽의 노예로 살던 때가 좋았다고 하며 모세를 원망하는 이스라엘이 우물 안 개구리 이고, 홍은동 홍제동 서대문에서만 옥닥 옥닥 하는 우리도 우물 안 개구리 입니다. 우리는 시야를 넓혀야 합니다. 그리고 멀리 넓게 높이 보아야 합니다.
만나만 준다고 불평하는 이스라엘[6]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노예로 살 때는 공짜로 생선, 오이, 멜론, 부추, 양파, 마늘들을 먹었는데 광야에서는 만나만 먹어서 정력이 쇠약해 졌다[6]고 하나님께 불평을 하고 이제는 고기 좀 먹게 해달라고 떼를 썼습니다.[4]
만나
하나님이 하늘에서 내려주시는 기적의 양식입니다.
시74:24 만나를 ‘하늘 양식’이라 했고 시105:40 에는 ‘하늘의 떡’이라고 했습니다. 만나의 모양은 깟씨와 진주 같고, 맷돌에 갈기도 하고 절구에 찧기도 하고 가마에 삶아 먹기도 하며 올리브기름에 튀겨 과자를 만들어 먹었습니다.[7,8] 밤에 이슬이 내릴 때에 만나도 내렸는데[9] 만나는 생명의 양식이요 성도가 받을 영원한 축복의 상징입니다. 만나의 축복을 받는 성도님을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만나만 먹어서 기운이 없다고 불평하는 이스라엘[10]
이스라엘 백성들이 만나만 먹어서 힘이 없고 기운이 없다고 각기 자기의 장막 문에서 울며 원망하는 말을 모세가 들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괘씸한 이스라엘을 향하여 진노하셨고 모세는 기분이 나빴습니다. [10]
이스라엘은 걸핏하면 원망을 하였습니다. 원망 병에 걸렸기 때문입니다. 원망과 불평은 자기의 신앙과 인격에 손상을 주고 듣는 이를 불쾌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시시한 일로 경망되게 원망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기분이 상한 모세의 푸념[12-15]
모세도 툭하면 원망하고 불평을 일삼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하기가 너무 힘이 들어서 하나님께 푸념을 하였습니다. [12-15] “하나님, 제가 이 백성을 낳았습니까? 어찌 이 백성을 젖먹이 기르듯 하라십니까? 이렇게 힘든 백성들을 제가 어떻게 약속의 땅으로 데리고 가겠습니까? 백성들이 고기가 먹고 싶다고 아우성인데 제가 어디서 고기를 얻어 먹이겠습니까? 이 백성을 혼자서는 인도할 수 없습니다. 저를 즉시 죽게 해서 이런 꼴을 보지 않게 해 주시는 것이 제게 은혜 베푸시는 것입니다. 어서 죽게 해 주세요.“ 모세도 너무 힘이 들어서 하나님께 눈물로 푸념을 하였습니다.
70인 지도자를 뽑으라고 하시는 하나님[16-17]
하나님은 모세에게 장로와 유사를 70명 뽑아 같이 동역하라고 하셨습니다. 네가 일을 할만한 사람을 뽑아 회막 문 앞에 같이 서 있으면 내가 그들에게도 성령으로 기름을 붓고 네가 질 짐을 나누어지게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갈라디아 6:2에도 짐을 서로 져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고 했습니다.
짐을 나누어지라고 지금도 하나님의 교회에는 장로 안수 집사 권사 서리집사 교사 성가대원 구역장 권찰 그리고 여러 봉사자들을 세웁니다.
그런데 문제는 짐을 제대로 지지 않는데 있습니다.
짐을 제대로 지는 책임 있는 직분자와 봉사자들이 되어서 교회를 부흥 성장시키기를 바랍니다.
이 목사의 기도
저도 지난 주 기도원에서 이 말씀을 묵상하며 교회 직분자들을 위해 기도하였습니다. “홍성 교회 모든 직분자들이 목회에 도움이 되고 힘이 되게 해 주옵소서. 믿음 있고 재력이 있고 헌신적이고 겸손한 사람을 더 많이 세워 주옵소서” 라고 기도했습니다. 응답해 주실 줄 믿습니다. 그리고 교회 건축을 위한 헌신자 100명을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100명이 1억씩 헌금하게 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 외에 2억 3억 5억 10억 20억을 드릴 하나님의 특별한 축복을 받은 헌신자를 일으켜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 4300평을 150억에 짓는데 하나님이 주신 재물을 하나님의 교회를 건축하는데 드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동역자를 일으켜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새 성전에 담을 소프트웨어를 준비할 동역자를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믿고 내려왔습니다. 아멘
하나님은 기대만큼 복을 주십니다.
좋은 일을 기대하면 좋은 일을 주십니다.
예수님은 네 믿음대로 되리라[마 9:29]고 하셨습니다. 이는 네가 기대한 만큼 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기대 수준을 높여야 합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입니다.[히 11:1] 믿음이란 높은 기대심을 가지는 것입니다.
좋은 일이 일어날 것을 기대하는 습관을 가지세요. 믿음과 큰 기대를 가지고 사업을 하세요. 그러면 크게 됩니다.
종신형을 받은 죄수 같이 자신을 감옥에 가두고 절망하지 마세요. 희망을 가지세요. 하나님을 믿고 더 좋은 미래를 기대하세요. 그러면 좋은 일이 일어납니다.
고기가 싫을 때 까지 먹여 주신 하나님[19-20]
만나만 먹어서 힘이 없다. 그 좋은 애굽을 왜 나왔던고, 라며 불평하는 이스라엘을 들으시고 하나님은 고기를 먹여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한 달간 코에서 누린내가 나도록 먹여주신다고 하셨습니다.
불가능을 말하는 모세[21-22]
모세는 이스라엘이 장정만 60만 명인데 하나님이 어떻게 온 백성에게 한 달 간 고기를 먹게 해 주시냐고 걱정하며 불가능함을 말했습니다. 양떼 소 떼를 잡고, 바다의 고기를 다 잡아도 이스라엘을 능히 먹이지 못한다고 모세는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손은 능 하시다[23]
여호와의 손이 짧아 졌느냐? 여호와의 능력이 모자라서 이스라엘에게 고기를 못 먹이겠느냐? 아니다. 나 여호와는 이스라엘을 먹일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메추라기를 내려주심[31-35]
만물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고기를 먹여주시는 장면입니다. '메추라기'철새 떼들은<출 16:13> 봄에 떼를 지어 중앙 아프라카에서부터 북상(北上)하여 앗시리아 쪽으로 이동합니다.
하나님은 동남풍으로 새 떼들을 이스라엘 진위로 몰아서 소나기처럼 떨어뜨리셨습니다.
백성들이 일어나 하루 종일, 밤새도록, 이튿날도 온종토록 메추라기를 거두었습니다. 적게 모은 자도 10호멜을 거두어 자기의 진 사면에 펼쳐 두었습니다.
메추라기가 진사면 32km 둘레에 떨어졌습니다.
1규빗 = 팔꿈치에서 중지까지의 길이
45cm x 2 =90cm 두께로 메추라기가 쌓였습니다.
1 호멜 = 고체양의 단위, 230리터
230리터 x 10 = 2300 리터 [230말]
하나님의 기적입니다.
탐욕 자는 죽음[33-34]
이스라엘 중에 너무나 탐욕을 낸 자들에게 하나님이 진노하사 심히 큰 재앙-심한 피부병이 내렸습니다.[33] 그래서 탐욕을 낸 사람들이 죽어 거기에 장사 지냈습니다.[34]
그래서 그곳 이름을 기브롯 핫다아와라-라 했습니다.
THE GRAVES OF CRAVING = 욕심쟁이들의 무덤 이라 했습니다.
모세의 좁은 생각
160 만 명이 한 달간 먹을 고기를 주시겠다고 할 때 모세는 현실적으로 불가능 하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능력을 잘 모르는 사람의 생각입니다. 이것은 오늘 하나님의 능력을 잘 모르는 우리의 생각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안된다는 부정적인 말을 합니다. 이런 생각을 고치시기 바랍니다.
토드의 생각
컴퓨터 소프트웨어에 능력이 있는 청년이었습니다. 그는 이 분야 벤쳐기업을 창업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금도 없고 급하게 결혼을 하여 가정을 꾸미고 아이까지 태어나 생활이 빠듯해 지자 그의 비전은 사라지고 월급은 많지 않지만 안정적인 직장을 다니게 되었습니다.
그때 토드의 실력과 벤쳐 기업을 창업하려는 것을 아는 친구가 유수한 IT 대기업의 소프트웨어를 개발할 기회가 생겼으니 함께 창업하자고 했습니다. 그때 토드는 “난 안될 것 같아. 그쪽 분야에 손 뗀지 오래되었어.” 친구가 자기 귀를 의심했습니다. ”토드, 제정신이야? 이것이 얼마나 좋은 기회인 줄 알아?“ ”아니야, 나는 현재에 만족해. 이대로 사는 게 나을 것 같아.” 토드는 친구의 제안을 거절했습니다. 그래서 친구는 혼자서 IT 벤처기업을 창업했습니다. 친구는 크게 성공해 엄청난 부와 명예를 얻었습니다. 토드는 후에 친구의 제안을 거절한 것을 후회했습니다.
현재에 안주한 나머지 인생의 중요한 기회를 놓치는 사람들이 토드 뿐 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이 새로운 세계를 보여 주시는데도 포기하는 사람이 의외로 많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외면하고 축복을 거절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마음을 열고 하나님이 하시는 대로 따라가면 될 것을 “나랑은 상관없는 일이야. 설마 그렇게 좋은 일이 나 같은 자에게 일어나겠어? 돈 버는 일을 왜 그가 나에게 주겠어! 아니야” 하면서 토드처럼 머리를 가로 젓는 사람이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작은 믿음으로 적은 기대를 가진 사람은 작은 복 밖에 받지 못합니다. 이것이 나의 작은 머리로 하나님의 능력을 재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제발 이러지 마세요. 하나님의 팔은 짧지 않습니다. 나의 짧은 가방 끈으로 하나님의 길고 튼튼한 가방 끈을 재지 마세요.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하늘 창고에 가득 선물을 쌓아놓고 계심을 믿으세요.
우물 안의 작은 개구리가 되지 마세요
작은 머리로 하나님의 능력을 잰 모세 같이 하지 마세요
나의 낮은 수준과 비좁은 생각의 틀을 깨세요.
조금 더 큰 꿈을 꾸세요. 한 발짝만 앞으로 나가세요.
개구리 같이 우물 밖을 보세요.
연못을 보고 호수를 보고 강을 보고 바다를 믿음의 눈으로 보세요.
하나님의 능력과 복을 거절하지 마세요
불신과 의심을 버리세요. 우리가 더 큰 복을 받아 더 잘 되고 하나님의 사랑과 영향력을 나타내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현재에 만족하지 마세요. 현실에 머물지 마세요.
나는 아버지 할아버지 보다 더 크게 잘 된다고 믿고 당당하게 나아가세요. 이것은 교만 아니라 믿음입니다.
필리스의 믿음과 꿈
16세에 임신을 하여 고등학교 다닐 수 없었다. 그녀의 꿈은 산산 조각이 났다. 그녀는 사회복지 시설에 들어가 아이를 낳고 가난과 절망감에 쌓여 나날을 살았다. 그러나 그녀는 하류인생을 거부했다. 그녀는 복지 시설에서 하나님을 만났다. “나는 하나님이 주신 복을 온전히 누리고 살 거야.”그녀는 하나님의 복을 기대하고 “ 나는 할 수 있다” 고 다짐했다. 하나님의 은혜로 그녀는 어느 학교 식당에서 식권 받는 일을 하였다. 최소 임금이었지만 감사했다. 그러나 그녀는 거기서 만족하지 않았다. 그녀는 꿈을 꾸었다. 일을 하면서 야간 고등학교에서 공부를 하여 고등학교 졸업장을 받았다. 그녀는 더 큰 꿈을 꾸었다. 4년간 공부하여 영예로운 대학 졸업장을 얻었다. 하지만 필리스의 꿈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내친 김에 그녀는 공부를 계속해 마침내 교육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녀는 더 이상 혜택을 받아야 하는 딱한 인생이 아니었다. 그녀는 마침내 교사가 되고 교장 선생님이 되었다. 그녀는 학생들에게 꿈을 주었다.
결론
지금도 하나님의 창고는 보화로 가득합니다. 이 보화를 달라고 하세요. 기도하고 기대하세요. 네 믿음대로 된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믿으세요. 작은 만족에서 벗어나세요. 과거의 영광을 능가하고 초월하세요. 큰 꿈을 꾸고 큰 비전을 품으세요. 하나님이 위대한 일을 행하실 수 있게끔 큰그릇을 준비하세요. 그래서 하나님의 크신 복을 받는 저와 온 성도들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