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금자리를 어지럽게 하시는 하나님
신명기 32 : 9 – 18
11절에 “독수리가 자기의 보금자리를 어지럽게 하며 자기의 새끼 위에 너풀거리며 그의 날개를 펴서 그의 새끼를 받으며 그의 날개 위에 그것을 업는 것 같이”라고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들이 광야 40년 동안 하나님께서 어떻게 도와주셨는가를 비유로 하신 말씀입니다.
독수리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상징하며 새끼는 이스라엘 자손들을 상징합니다. 그리고 독수리가 보금자리를 어지럽게 했다는 것은 구원받은 성도들의 고난을 의미합니다.
보금자리는 가장 안전하고 편안한 곳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여호와께서 애굽에서 불러낸 이스라엘 자손들을 안전하게 살 수 있도록 하지 않았습니다. 독수리가 보금자리를 어지럽게 하는 것처럼, 광야로 인도하시고 어느 민족도 당해 보지 않은 고된 삶을 살게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출애굽하여 40년을 광야에서 장막을 치고, 거두고 짊어지고 옮기며 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광야로 인도하시고 어느 민족들보다도 강한 민족으로 훈련을 시키셨습니다.
독수리의 보금자리는 폭포가 내리치는 낭떨어지 절벽 바위틈에 있습니다. 높은 폭포에서 쏟아지는 물에 새끼가 떨어지면 죽게 되는 매우 위험하고 무서운 곳입니다.
독수리는 새끼를 보금자리에서 편안하게 키우지 않고 밀어내어 낭떨어지로 떨어지게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들을 애굽에서 이끌어 내어 편안하게 살 수 있도록 하지 않고 사람이 살 수 없는 광야로 인도하시고, 장막을 치고, 걷고 옮기며 살게 하셨습니다.
광야는 사람이 살 수 없는 황무지요, 짐승이 부르짖는 무서운 곳입니다.(10) 애굽에서 나올 때 가져온 떡과 물도 다 떨어져 먹을 것도 구할 수 없을뿐 아니라 마실 물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모세를 원망하며 애굽으로 다시 돌아가자고 했습니다. 이로 인해 이스라엘 자손들은 두 무리로 나누어졌습니다.
본문에 ‘그들이’(5,16,17,21)란 복수형과 ‘그’라는 단수형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어떤 사람들이라고 했습니까? 5절에 ‘그들이 여호와를 향하여 악을 행하니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요, 흠이 있고 삐뚤어진 세대라’고 했습니다.
16절에는 ‘그들이 다른 신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일으킨 자’라고 했습니다. 17절에는 그들은 하나님께 제사하지 아니하고 귀신들에게 하였습니다. 21절은 그들이 하나님이 아닌 것으로 내 질투를 일으키며 허무한 것으로 내 진노를 일으켰습니다.
그들은 이방인이 아닙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불러내시고 홍해를 건너 광야를 지나 가나안으로 인도하시는 이스라엘 자손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들을 ‘나의 백성이 아닌 자’로 여기셨습니다.(21)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그들은 모세를 원망하며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했습니다. 그들을 광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는 반역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라고 하는 ‘그는’ 누구입니까? 보금자리를 어지럽게 하며 밀어내어 떨어지는 독수리 새끼로 비유한 이스라엘 자손들 중에 한 사람입니다.
독수리가 보금자리를 어지럽게 해서 떨어지는 새끼 위에 너풀거리며 그의 날개를 펴서 새끼를 받으며 그의 날개 위에 그를 업은 새끼는 여러 마리가 아닙니다. 떨어지는 한 마리 새끼를 어미가 날개로 업었다고 말씀했습니다.
이 말씀은 구속사적으로 매우 중요합니다. 여호와의 구원은 하나님께서 택하신 모든 백성들이지만 음밀하게 따지면 예수님께서 ‘나’ 한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많은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라고 하는 공동체의 믿음으로 우리를 구원하신 것이 아닙니다. 나의 믿음을 보시고 ‘나’를 구원하신 것입니다. 떨어지는 새끼를 날개를 펴서 받으며 업어 준 것처럼 구원은 개인적이라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10절에 “여호와께서 그를 황무지에서, 짐승이 부르짖는 광야에서 만나시고 호위하시며 보호하시며 자기의 눈동자 같이 지키셨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출애굽한 이스라엘 자손들을 인도하신 곳은 황무지이며, 짐승이 부르짖는 광야이었습니다. 보금자리를 어지럽게 해서 떨어지며, 아직 자라지도 않은 작은 날개로 퍼드덕거리며 떨어지는 새끼는 광야에서 살 수 없는 이스라엘 자손입니다.
보금자리에서 떨어지는 새끼를 자기의 눈동자 같이 지키는 독수리처럼, 황무지와 짐승이 부르짖는 위험한 광야를 여행하는 이스라엘 자손을 여호와께서 자기의 눈동자 같이 지켜주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악한 세상을 사는 성도들을 눈동자 같이 지켜보시고 위험할 때 그의 날개로 받아주시고 업어 주시는 분이심을 가르쳐 줍니다.
독수리가 이렇게 해서 새끼의 날개를 강하게 키워서 높은 하늘을 날 수 있는 독수리가 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독수리로 낫기 때문에 하늘 높이 날 수 있는 독수리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고된 훈련을 두려워 하는 새끼는 하늘을 날 수 없을 뿐 아니라 작은 짐승들에게 잡아 먹히게 됩니다.
유대인들이 세상에 많은 족속들 보다 강한 민족이 된 것은 하나님께서 이와 같은 훈련을 시켰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고 불평하고 원망하는 그들은 모두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죽었습니다.
모세에게 원망하고 돌로 치는 그들을 곧 여호와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입니다.(민14:11,27) 오늘 우리에게도 하나님께서 어려운 시험을 하십니다. 어려운 시험을 당할 때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은 매우 불행합니다. 하나님을 불평하고 원망하면 구원도 받지 못하게 됩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출애굽 할 때 육십만 삼천 오백오십(603,550) 명이었습니다. 그런데 광야 사십 년을 지나 모압까지 도착한 사람은 육십만 천칠백삼십(601,730) 명이었습니다.(출2:32, 민26:51)
광야 40년을 지나는 동안 아이를 낳고 키웠기 때문에 인구가 많이 늘어나야 하지만, 1,820명이 늘어났다는 것은, 여호와께 원망한 자들이 광야에서 모두 죽었기 때문입니다.(민15:32)
애굽에서 나와 홍해를 건너 광야에서 가나안으로 가는 이스라엘 자손들은 오늘의 교회에 성도들을 상징합니다. 교회에 다니며 하나님께 예배드리기 때문에 천국에 들어갈 것이라고 믿는 것은 착각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자 모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독수리가 보금자리를 어지럽게 하여 낭떨어지에 떨어지게 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성도에게 이겨내기 어려운 시험을 하십니다. 물이 빙빙 도는 곳으로 떨어지는 것처럼 눈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의 시험을 당할 때가 있습니다.
요셉은 아버지의 사랑을 받고 자랐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요셉의 보금자리를 어지럽게 하셨습니다. 요셉은 형들에게 팔려 애굽의 보디발의 집에 종이 되었습니다. 다시 보디발의 아내로부터 억울한 누명을 둘러쓰고 죄수가 되어 옥에 갇혔습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받던 요셉이 보디발의 집에 종이 된 것이나, 옥에 갇힌 것은 어린 요셉에게는 이겨내기 어려운 고난이었습니다. 마치 보금자리에서 떨어지는 독수리 새끼와 같은 요셉이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께서 요셉을 지켜보셨습니다. 마치 떨어지는 새끼를 어미가 날개를 펴서 받고 업어주는 것과 같이,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핫서 형통하게 하셨습니다.
요셉에게 13년은 매우 힘든 고난이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그와 같은 어려운 고난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요셉이 아버지의 사랑만 받고 살았다면 애굽의 총리가 될 수 없을 뿐 아니라 이름 없는 사람으로 살았을 것입니다.
독수리가 보금자리를 어지럽히지 않고, 새끼를 평안하게 자라게 했다면 그 새끼는 높은 하늘을 날지도 못할 뿐 아니라 작은 여우의 먹이가 되었을 것입니다.
이 말씀은 여호와로부터 택하심을 받은 우리에게는 구속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교훈이 됩니다.
몇 년 전에 조선일보 사회면에 ‘해외연수까지 다녀온 30대 여 고독사 ... 한없이 굶어’ 죽었다는 기사를 본 일이 있습니다. 부산의 모 대학을 졸업하고 중국 연수까지 다녀온 33세의 젊은 사람이 굶어 죽었다고 합니다.
죽은 지 7개월 만에 그의 모친이 발견하였는데, 냉장고는 텅 비었고, 먹을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이 굶어 죽었다고 합니다. 최고의 학벌을 가졌고 좋은 환경에 나고 자랐습니다.
그러나 자기 혼자 먹을 것도 책임지지 못하는 무능한 자였습니다. 어릴 때 부모의 사랑만 받고 조금도 어려움이나 고생을 하지 않고 자랐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을 광야로 인도하신 분은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애굽에서 가나안으로 가는 길은 홍해를 건너지 않고 블레셋 땅을 지나가면 걸어서 1주일 정도면 갈 수 있습니다. 남녀노소와 수많은 양떼와 소떼를 비롯한 큰 무리가 쉬어가며 가도 한두 달이면 가나안에 들어갈 수 있는 길로 하나님께서 인도하지 않았습니다.
아브람이 가나안에 흉년이 들어 애굽으로 내려갔다고 다시 돌아온 길이 있습니다. 아기 예수가 탄생하셨을 때 헤롯이 베들레헴에 두 살 아래의 사내를 죽였을 때, 요셉과 마리아가 아기 예수를 안고 애굽으로 피난했다가 돌아왔던 길이 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출애굽한 이스라엘 자손을 가까운 길로 인도하지 않으시고 홍해를 건너 광야로 인도하셨습니다. 마치 독수리가 보금자리를 어지럽게 하는 것처럼, 여호와께서 광야로 인도하신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편안하게 신앙생활할 수 있도록 하지 않으시고, 이겨내기 어려운 시험을 하십니다. 그런데 시험을 당했을 때 하나님을 원망하고 시험을 피하는 것은 매우 불행합니다.
광야에서 여호와 하나님을 원망한 그들은 광야에서 죽었을 뿐 아니라 여호와의 분노로 그들의 영혼까지 스올의 깊은 곳에 던지셨습니다.(22)
32장은 ‘모세의 노래’라고 하였습니다. 일본 사람들이 독도를 자기들의 땅이라고 주장하기 때문에 ‘독도는 우리 땅’이라는 노래를 부르게 해서 독도가 우리나라의 영토임을 알게 하는 것처럼, 모세도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노래를 부르게 한 것은 그들에게 매우 중요한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려운 고난을 받게 하시는 시험을 이겨낸 성도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죄사함과 구원을 받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는 날에 영원한 천국 보금자리에 들어가서 영원한 안식을 누리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서 예비하신 영원한 보금자리에 들어가서 영원히 주님과 함께 영생복락을 누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