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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역사정책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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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스크랩 일본 해군의 찾아가는 기생집 서비스
마이피 추천 0 조회 204 15.12.13 02:31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일본 해군의 찾아가는 기생집 서비스



- 흔히 대한민국 광복의 기수, 무타구치 렌야(牟田口廉也)를 이야기할 때, 그가 임팔 작전 당시 뛰어난 재치와 행동으로 병사들의 사기를 높이고 전략 전술을 적제적소에 적용하여 부대 대부분을 홀랑 말아먹고 전쟁의 종식을 앞당김은 물론, 식민지배의 고통에서 한민족을 해방시키는데 크게 기여한 요소들은 셀 수도 없으나 그 중 대표작의 하나로 언급되는 것이 바로 기생집 에피소드다.


                          두둥~~~ 캬~~ 말이 필요없다..저 아우라를 보라..


- 그는 임팔 전선의 전황이 나빠지던 당시, 전선 지휘부 옆에다 청명장(?明?)이라는 기생집을 차린 뒤 무조건 오후 5시 땡~ 하면 업무 마치고 기생집에 들어가서 술 마시며 노느라 나오지도 않았다.
- 게다가 보급이 가뜩이나 어려운 가운데 본토에서 해군 함정의 호위를 받으면서까지 게이샤(藝者), 하녀, 요리사, 샤미센(三味線..일본 기생집에 자주 등장하는 삼선 기타 비스무리한 악기..) 연주자, 재봉사, 세탁부, 산부인과 및 비뇨기과 의사(-_-;;) 등 총 150여명과 다다미 방석, 병풍, 미닫이, 회석 소반 세트 같은 기생집용 집기들을 자신이 있는 전선 사령부로 수송했다.
- 가뜩이나 문제가 된 일본군의 보급 계획이 이로 인해 점점 엉망이 되었고 이는 아무리 생각해도 군을 사유화하여 일본군의 보급 계획을 파탄시키는, 광복군 스파이로써 아주 고급진 전략이라 말할 수 있다.


                            무타구치는 기생집을 아주 통째로 옮겨 놓았다...


- 게다가 이런 그의 고급진 전략들은 영국군에 고스란히 누설되었고 아주 획기적인 프로파간다의 소재가 되어 대형 확성기를 통해 전선의 부대에 낱낱이 보고되었으며 풀 뜯어먹으면서 이를 듣고 있던 일본군 병사들의 사기는 새삼 말해 무엇 하겠는가(어찌 이 양반을 독립 유공자 최고 반열에 올려놓지 않을 수 있을쏘냐..)
- 하지만 무타구치 선생의 이러한 비밀작전들은 단순히 그 자신만의 독단적 작전이었으므로 그 파급효과가 생각만큼 크지 않았고(게다가 그의 전과 면에서 그를 훨씬 상회하는 도미나가 교지(富永恭次) 선생이 있기에..) 지위가 그다지 높지 않아(육군 중장에 제 15 군 사령관밖에 못 되었다..상해 임정에서 좀 더 밀어줬어야..) 대단위 혹은, 조직적이지 못했기에 임팔 작전이라는 일회성에 그쳐 아쉬운 점이 많이 있다.
- 어쨌든 일본 육군에 잠입한 무타구치와 도미나가, 두 사람에 의한 기생집 작전은 비록 그 성과가 적지 않았으나 조금은 부족한 점이 많이 있고 좀 더 크게 터트릴 수 있었는데 하는 아쉬움 또한 적지 않다.


               부하들을 카미카제로 등 떠밀며 친히 술을 따라주는 도미나가 선생...


- 하지만 우리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또 다른 비밀 작전이 있었으니 바로 일본 해군에 대한 기생집 작전이 되시겠다.
- 코마츠(小松)는 1885년 8월 8일, 야마모토 코마츠(山本コマツ)가 요코스카(?須賀)의 호쿠샤세이쇼(白砂?松) 해안에 개업한 기생집으로(흔히 요정(料亭)이라고 하는...) 개업 초기에는 해안에서 해수욕을 즐긴 후에 목욕과 식사를 즐기는 일본식 료칸(旅館)이었지만 이후 일본이 해군력 증강에 올인하고, 청일 전쟁, 러일 전쟁을 거치면서 요코스카 진수부(?守府)의 기능이 확대되어 가면서 일본 해군의 고위 장교를 상대로 하는 기생집으로 변모하였다.


                                  짜라란~~~ 아직도 남아있다!!!


- 메이지 유신 이후, 창설된 지 얼마 안 된 일본 해군이 그 근거지 중 하나로 요코스카에 자리를 잡자 이전까지 촌동네 무지랭이(일본 육군은 초슈 번(長州藩, 지금의 야마구치 현 일대), 해군은 사츠마 번(薩摩藩, 지금의 가고시마 현 일대) 출신 촌놈들이 대가리가 되었다..)에서 일약 한 국가의 중추로 발돋움한 일본 해군 고위층 양아치들이 졸지에 국가적 스타 겸 명사가 되자 에헴거리며 돌아다니다 이 동네에서 나름 시설이 괜찮은 요시카와야(吉川屋)라는 여관을 애용했는데 이곳에서 일하던 야마모토 코마츠가 해군 고위층과 인맥을 쌓아 독립하여 코마츠라는 가게를 개업했다.
- 야마모토가 코마츠를 개업한 이유 중 하나에 해군 관계자로부터의 권유가 있었는데, 당시의 일본은 해군력 증강에 노력하고 자연히 해군의 근거지였던 요코스카에 있는 요정 코마츠는 덩달아 번성하게 되었다.



                      이 촌닭들이 하루 아침에 국가의 최상층을 차지했다...


- 청일 전쟁 이전에는 요코스카에 고급 음식점이나 요정 같은 곳이 거의 없었기에 코마츠는 독점적 지위를 누리며 번성하였고 청일 전쟁에 직후에는 전쟁에 참가한 후 요코스카로 귀환하는 함정 승무원들의 연회가 거의 매일 열리면서, 러일 전쟁 이후에는 일본 해군의 군비 확장이 계속되면서 코마츠는 연속 대박이 났다.
- 그러다가 1913년, 이곳 해안에 매립이 진행되어 해안선에 바로 접해 수려한 경치를 자랑하던 코마츠는 지리적 장점을 잃었고 결정적으로 제 1 차 세계 대전 후의 세계 공황의 영향, 그리고 공황에 의해 생활에 궁핍해진 요코스카 시내의 기생들이 처우 개선을 요구하며 파업을 일으키자 코마츠는 1918년, 휴업에 들어갔다.


                 청일 전쟁, 러일 전쟁으로 대박 났지만 대공황을 피해갈 순 없었다..


- 하지만 휴업기간은 얼마 되지 않았고 공황이고 뭐고 나랏돈 빼돌려 술 처먹는 일본 해군 고위층의 후원으로(당시 일본 해군 똥별들이 갈 데가 마땅치 않다며 재 개업을 원했다고..) 야마모토 코마츠는 매립된 해안가에 약 400평의 토지를 구입하고 1923년 요정 코마츠의 재건 공사를 시작했다(저렇게 밀어 준다는 데야 누구라도..이래서 나라 상대 장사는 경기를 타지 않는다는 게야..) 
- 1923년, 영업을 재개한 코마츠는 400평의 부지에 건평 175평에 1층에 7개, 이층에 3개, 총 10개의 객실을 갖춘 일본식 목조 건물이었으며 역시나 일본 해군 똥별들은 이런 약속은 어찌나 철썩 같이 잘 지키는 지, 코마츠를 양껏 밀어주었으며 요코스카 진수부 사령관, 연합함대 사령관 등 해군 고위 관계자들이 수시로 이용해 그들이 이용하는 고급 객실은 아예 따로 "장관부방(長官部屋..이것들은 사령관을 사령장관이라 한다..)“이라 호칭을 붙일 정도였다.


                 대가리들만 특별히 기생끼고 처자빠져 노는 장관부방..지랄을 한다..


- 이후 이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는 일일이 설명하지 않아도 눈에 훤히 보일 정도이니 입 아프게 따로 설명하지 않겠으며 이곳에서 국가공무원이자 박봉에 시달린다던 일본 해군 똥별들이 기생 끼고 술 처먹고 하는 돈은 도대체 어디서 나올까 하는 것만 잠깐 살펴보면,
- 일본 해군은 함정 건조와 관련해서 제작사로부터 리베이트 받아 처먹는 건 관례나 다름없었고 거기에 더해 나랏돈 빼먹는 것도 예사여서 일례로 1935년 12월, 야마모토 이소로쿠가 해군 항공 본부장에 임명되자 총무부장이던 구사카 류노스케(草鹿龍之介)가 야마모토를 위한 비자금과 접대비 때문에 고심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야마모토는 그런 것 필요 없다며 고민하지 말라고 했다....

- 면 오호~ 하겠지만 이 인간은 당연히 그럴 인간이 아니었고, 한다는 짓이 자신이 직접 해군성에 찾아가 500엔(당시 가격..만엔이면 도쿄에 집 한 채라고 하니..한 5,000만원 되려나?)을 받아왔다고 한다(캬캬캬캬캬캬..이것이 야마모토가 행한 부하 사랑이었다..부하를 고민스럽게 하지 말자!!)


           야마모토의 애인질, 기생질 밑천 대주느라 골머리가 아팠던 쿠사카 류노스케..


- 어쨌든 1941년 12월, 드디어 일본은 진주만 기습을 시작으로 태평양 전쟁을 일으켰고 그 직후, 일본 해군 제 4 함대 사령관 이노우에 시게요시(井上成美) 중장은 코마츠의 주인장 야마모토(2대째..)를 조용히 불렀다.
- 그는 이제 국가가 절체절명의 전쟁 상태에 돌입했으므로 앞으로 가게를 찾기가 힘들 것 같다..라는 말을 할 리가 만무했고 한다는 소리가 자신의 제 4 함대 사령부가 있는 트럭 제도에는 주재하는 상사 직원들이 가는 음식점밖에 없으니 자신의 격에 맞지 않으므로 트럭 제도에 지점을 내어줬으면 한다고 요청했다(똥별도 격이 있단다..-_-;;)


       사령부 근처에 쓰리 스타의 격에 맞는 기생집을 내주시오~~ 이노우에 시게요시..-_-;;


- 워낙에 일본 해군 똥별님들의 은총을 한 몸에 받고 있던 코마츠이기에 이런 요청을 뿌리칠 수 없었고 마침내 1942년 7월, 트럭 제도에 코마츠의 지점이 개점하게 되었다.
- 일본 해군 전진기지이자 라발울과 함께 양대 거점이던 트럭 제도에 해군 똥별 전용 요정이 생긴 1942년 7월은 미드웨이에서 일본 해군 항모 기동부대가 탈탈 털리며 작살이 난 직후였고 이제 과달카날이란 괴멸적 헬 게이트가 열리기 직전이었다(잘 하고 있다..)



             트럭 제도는 라바울과 더불어 일본 해군의 최대 거점 중 하나였다...


- 어쨌든, 코마츠 트럭 지점에는 처음에는 본토에서 20~30명, 후에 약 50~60명의 기생과, 요리사, 전용 미용사, 하인 등을 데려가 본토와 차별 없는 서비스를 제공했고 이런 고급 요정은 일반 사병이나 위관급 장교들이 드나들만한 곳이 결코 아니었으므로
- 이곳은 영관급 이상, 일본 해군의 고위 장교들을 위한 특화된 서비스(?)를 제공했으며 애초 제 4 함대 사령부가 있던 이곳엔 언제 또 소문은 들었는지 야마모토 이소로쿠가 과달카날 전선을 직접 지휘한다는 개구라와 함께 연함함대 사령부까지 몰고 들이닥침으로써 코마츠 트럭 지점도 본토와 마찬가지로 대박이 났다(손님이 드글드글..나라야 어찌되든, 병사들이야 죽든 말든...)
- 본토와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대박이 나자 그 다음으로 라바울에도 지점을 낼 예정이었지만, 이 사업계획은 전황의 악화로 인해 중단되었다(이 지랄하는데 전황이 나아지겠냐?)



  트럭에 기생집이 생겼단다~~~!! 트럭에 정박한 야마토와 무사시..그리고 야마모토와 떨거지들..


- 일본 해군의 고위 장교들에게 최전선까지 기생집을 제공하는, 전쟁사에 유래없는 획기적인 서비스는 무려 2년간 계속되었고 이런 고품격 서비스는 과달카날, 솔로몬, 타라와 등을 거치면서 이제 트럭 제도마저 기생끼고 띵가거릴 만큼 안전한 지역을 벗어나 최전선으로 변모시켰다(트럭 제도는 1차 대전 당시 독일령이었던 걸 일본이 집어삼킨 이후 내내 일본 해군의 태평양 근거지 노릇을 해 온 곳이었다..소위 일본 해군의 진주만..)
- 1944년 2월 17일, 미 해군의 마크 밋쳐 제독은 항모 엔터프라이즈 외 9척의 항모를 포함, 전함과 순양함 등 총 54척과 항공기 589기로 이루어진 대규모 항모 기동 부대를 이끌고 일본 해군의 거점, 트럭을 맹공격했다.


 
- 기생끼고 자빠져 놀다 얻어터진 이 공격으로 일본 해군은 순양함 3척, 구축함 4척, 수송선 5척, 상선 32척이 침몰하고 항공기 270기를 말아먹었으며 약 7,000명이 전사하는 대 피해를 입었고 이후 트럭 제도는 무력화되었다.
- 이후 미국의 개구리 뜀뛰기 전략으로 인해 고립되며 쓰잘데기 없어진 트럭 제도를 미군은 그냥 놔 뒀냐면, 그것도 아니어서 노느니 마당 쓴다고 심심치 않게 공습을 감행했고 1944년 3월 30일에는 코마츠 트럭 지점에 폭탄이 떨어져 건물이 완파되고 직원 중에 희생자가 나오며 가게는 폐점되었다.



            기생끼고 지랄하더니 아주 떡이 된다..코피 터지는 트럭 제도..


- 한편, 본토 요코스카에 있던 코마츠 본점은 패망 이후 이젠 진주해온 미군들을 위한 유흥장이 되었고 부지 내에 바비큐 파티를 위한 그릴, 바(Bar) 등을 갖추고 밴드를 넣어 연합군 병사들에게 만반의 서비스를 제공하는 장소로 탈바꿈하였다.
- 이렇게 손바닥 뒤집듯이 일본 해군 고위층들의 요정에서 미군을 위한 유흥장으로 영업을 재개한 코마츠에 한 가지 문제가 있었으니 바로 직원들이 영어를 전혀 구사할 수 없다는 것이었고 마침내 기생들과 직원들의 영어 교육을 위한 과외 선생이 초빙되었으니 바로, 제 4 함대 사령관을 거쳐 해군 차관을 지냈고 계급은 해군 대장에 빛나는 이노우에 시게요시(井上成美) 되시겠다지(지가 끼고놀던 기생들을 이젠 미군에게 갖다바치고 그녀들의 영어선생이 되었다..-_-;;)


             기생들에게 영어 가르치는 전직 해군 대장 이노우에 시게요시..-_-;;


- 이후 요코스카는 전후 미 해군뿐만 아니라 해상 자위대의 중요한 근거지가 되었고, 그런 요코스카의 유일한 요정으로 코마츠는 현재까지 남아있으며 지금은 요코스카 해상 자위대에서 널리 이용되고 있고 구 일본 해군의 전용 요정으로서 멋지구리한 전통을 아직 지키고 있다고 한다.
- 대충 보니 현재 저녁 식사비용이 1인당 만 엔(10만원)정도로, 일본 요정 치곤 과히 비싸지 않은 가격이니 혹시 이 근처에 들러 멋진 추억을 남기고 싶으신 분은 한번쯤 들러보시고 이를 권장하는 이유는 원하는 손님들에게 지배인이 아직 남아있는 과거 일본 해군 고위층이 써 놓은 족자를 보여주며 어쩌구저쩌구 친절하게 설명도 해주기 때문이다.


 
- 이 설명을 듣는 자리에서 마지막에 싱글벙글 웃으며 한국어로 “퍽이나 자랑스럽기도 하겠수..아리가또 고자이마스”라고 하는 걸 특히 권장한다(엄청 자랑스럽게 얘기한다능...참고로 본인이 해봤는데..못 알아먹음..ㅋㅋ)


 


<사진출처>

https://twitter.com/renya_mutaguchi
http://blogs.yahoo.co.jp/pocosuenaga/61450436.html
http://mainichi.jp/graph/2015/05/06/20150506k0000e040143000c/002.html
https://ja.wikipedia.org/wiki/トラック島空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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