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aum
  • |
  • 카페
  • |
  • 테이블
  • |
  • 메일
  • |
  • 카페앱 설치
 
카페정보
카페 프로필 이미지
가야불교산악회
카페 가입하기
 
 
 
카페 게시글
산사의 향기 스크랩 020_전남 화순군 도암면 운주사
無盡藏 추천 0 조회 36 12.03.22 14:37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무안 백련축제를 보고 운주사 가는길 전라도 말로 겁나게 사납디 사나운 나주에서 화순길 그것도 내가 좋아하는 오솔길로 다니다 보니 엄청난 산도 넘고 빙글빙글 돌기도해 훨씬 늦은 시간에 운주사에 도착하였다. 포근한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발길을 올리니 바로 일주문이 반긴다. 영구산(靈龜山) 운주사 라 써있는 일주문...왼지 시작부터 재미있는 그런 일이 벌어졌다. 왼지는 생각에 맏길 수밖에...오늘의 여행은 글 그대로 답사여행 같이 되어 버렸다. 그져 여행이라기 보다는 연꽃보러...그리고 운주사에 석불보러...이런 말이 어울릴 것같은 하루이다. 그래서 이제부터는 사진의 밑에 토만 달아놓고 간단한 코멘드만 쓰는 그런 형식으로 끝을 내야 될 것같다.

지나가며 찍은 사진들인데 무슨 말이 필요하겠어요. 천불산 다탑봉 운주사는 천불천탑으로 세간에 널리 알려져 있다. 우리 불교의 깊은 혼이 서린 운주사는 우리나라의 여느 사찰에서는 발견할 수 없는 특이한 형태의 불사를 한 불가사의한 신비를 간직하고 있다. 1481년에 편찬된 [동국여지승람]의 기록 ‘운주사 재천불산 사지좌우산척 석불석탑 각일천 우유석실 이석불 상배이좌(雲住寺 在天佛山 寺之左右山脊 石佛石塔 各一千 又有石室 二石佛 相背以坐)라는 유일한 기록이 있다. 이는 ‘운주사는 천불산에 있으며 절 좌우 산에 석불 석탑이 각 일천기씩 있고 두 석불이 서로 등을 대고 앉아있다’ 는 내용으로 보아 정말 그때까지만 하여도 석불 석탑이 일천기씩이

[운주사 일주문 입구쪽...]

실존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또한 조선조 인조 10년(1632)에 발간된 능주읍지에는 ‘운주사 재현남이십오리천불산좌우산협석불석탑 일천우유 석실이석불상배이좌(雲住寺 在縣南二十五里千佛山左右山峽石佛石塔 一千又有 石室二石佛相背而座)’ 운주사는 현의 남쪽 이십오리에 있으며 천불산 좌우 산 협곡에 석불 석탑이 일 천씩 있고 석실에 두 석불이 서로 등을 맞대고 앉아있다는 기록이 있는 걸로 봐서 일천씩의 석불 석탑이 있었던 게 분명하고 그 말미에 금폐(今廢) 라는 추기가 있어 정유재란으로 인해 소실 되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그 후 조사한 기록을 보면 석탑이 22기, 석불이 213기가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석탑 17기, 석불 80여기만 남아있어 역사 속에서 끝없이 유실되어온 뼈아픈 세월을 살아왔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1984년부터 1991년까지 전남대학교 박물관에서 네차례의 발굴조사와 두차례의 학술조사를 하였으나 창건시대와 창건세력, 조성 배경에 대한 구체적인 확증을 밝혀내지 못하여 운주사 천불천탑은 여전히 불가사의한 유적으로 남아있다. 고 운주사 홈에서 서술하고 있습니다.

[운주사 입구 좌측에 각나라 얼굴의 석불들이...]

[운주사 9층 석탑...]

운주사 초입에 있는 탑으로 높이 10.7m에 달하는 세장한 형태가 특징이다. 기단은 자연 암반을 그대로 사용한 점도 색다른데 암반을 상부만 방형으로 다듬어 탑을 앉혔다. 기단은 4단으로 조출하고 그 위에 초층 탑신을 바로 올렸다. 탑신석은 초층만 세장하고 2층 이상은 초층에 비해 체감율이 적은 편이다. 탑신과 옥개석은 9층을 형성하였고 그 위는 상륜부를 올려 마감하였다. 초층 탑신은 한 돌이 아니라 면석과 우주석으로 이루어졌고 얕게 탱주와 우주를 새겼다. 2층 탑신 이상은 모두 한 돌로 탑신석을 만들었고 표면에 동일한 무늬를 새겼다.

무늬는 마름모를 2중으로 한 곽을 만들고 그 안에 4엽의 꽃을 양각으로 새겼다. 옥개석은 9층 모두 네 귀퉁이 처마가 약간 위로 반전한 형태이며, 지붕돌 하부에 추녀와 방사선상으로 뻗어 나가는 직선 무늬를 새겼다. 양식적으로는 백제계 석탑과 상통하는 탑으로 탑신석과 옥개석에 새긴 문양은 물론 비례감 등에서도 유례가 드문 탑형이다.

[운주사 "가" 석불군의 부처님의 광명이란 석불군...]

가 석불군은 보물 796호인 9층석탑 동쪽 암벽에 위치하며, 좌상이 1분, 입상이 6분, 대좌 6개가 남아있다. 높이 약8m, 너비 약20m의 암벽 중앙에 좌상을 배치하고, 그 오른쪽에 입상 5분과 대좌 5개를 배치하였다. 석불좌상 뒤편에서는 발굴조사 시에 금동여래 입상과 금동보살상이 출토되었는데, 이는 현재 전남대학교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이 불상들은 한결같이 장방형의 판석을 이용한 듯 볼륨감이 없으며, 얼굴은 세로로 긴 타원형으로 눈썹과 코의 흔적만 보이며, 목에는 삼도를, 신체에는 선각의 옷주름을 묘사하였다.

[운주사 비로자나 부처님 코가 인상적...]

[아버지, 어머니, 자식들 부처...]

[운주사 입구에서 본 석탑과 석불군...]

[운주사 "나"석불군 크고작은 시장의 상인들같은 석불군...]

나 석불군은 가석불군에서 경내 쪽으로 10여 미터 떨어진 운주사 동쪽 산등성이의 암벽에 의치하며, 입상이 9분, 대좌가 10개가 남아 있다. 암벽은 높이가 약5m, 너비가 25m로 수평방향의 암결이 있으며, 하단은 많이 떨어내어져 있다. 중앙에 높이 4.75m의 대형입상을 중심으로 좌우에 7분의 협시불을 배열하였는데, 가석불군과 마찬가지로 판석을 이용한 듯 얕은 부조로 묘사되었다. 중앙 대형입상은 긴 귀와 코를 가진 세로로 긴 타원형에 얼굴에 머리에는 육계를 갖췄으며, 법의는 오른쪽 어깨를 드러낸 편단우견식으로 걸쳤다.

옷주름은 선각으로 왼쪽어깨에서 흘러내려 하체에서는 U자형으로 묘사되었는데, 법의가 몸에 밀착된 듯이 두 다리를 구분하는 수직선을 묘사하였다. 대좌는 복련의 연화를 조각한 연화대좌인데, 좌우 협시불의 대좌는 아무런 무늬가 없다.

[신라인의 모습을 닯은 석불...]

[광배를 갖춘 석불군...]

이 불상은 9층탑과 석조불감 사이에 위치하는데, 사다리꼴의 판석에 석불좌상이 고부조로 표현되어 있다. 얼굴은 원만한 긴 타원형으로 눈언저리보다 약간 높은 눈썹과 기다란 코, 두툼한 입술을 갖추었다. 머리와 이마의 구분선은 보이지 않은데, 미간에는 도드라진 백호를 묘사하고, 육계는 윗부분이 파손되었지만 높게 표현되었다. 짧은 목에는 삼도의 묘사가 보이지 않으며, 법의는 오른쪽 어깨를 드러낸 우견편단식으로 걸쳤는데, 옷주름은 왼쪽 어깨와 오른쪽 소매에만 사선으로 음각되었고,

옷에 가려진 손의 모습은 무릎 바로 위에서 명치 부분으로 모아지는 형태이다. 결가부좌한 다리는 오른발을 들어 얹은 길상좌이며, 다리에 온통 옷주름이 음각되어 있다. 광배는 사다리꼴 판석으로 상단 일부가 파손되었는데, 두광과 신광의 구분 없이 전체에 소용돌이 모양의 화염문을 표현하였다. 전남대학박물관에서 실시한 4차 발굴조사에서는 이 불상의 하부 유구를 조사하였는데, 주변에서 조선시대 기와편들이 출토되어 현재의 유구상태로는 목조 감실 같은 간이 건물이 조성되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석조불감과 칠층탑군...]

[운주사 석조불감...]

원반형 연화탑 남쪽 5m 지점에 자리한 불감으로 보물 제797호로 지정되었다. 재료는 화강석이며 높이 5.5m, 폭 5m이다. 기단 위에 방형 몸체를 올리고 그 위는 팔작지붕 형태를 만들었다. 불감 내부에는 앞뒤로 석불 2체를 앉혔는데 서로 등을 대고 앉아 있다. 일반적으로 불감은 불상을 모시기 위해 만든 집이나 방 형태의 공예적인 형태인데 운주사 석조불감은 외부에 조성된 특이한 예이다. 불감은 맨 밑에 4각의 평판석(平板石)으로 지대석(地臺石)을 깔고, 그 위로 4각 돌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석실을 조성하여 이를 받치게 하였으며,

석실 위로 팔작(八作)지붕 모양의 옥개석(屋蓋石)을 얹었다. 현재 석불 앞은 개방된 상태지만 원래는 석실 앞에 문을 달았었다. 문을 달았던 흔적이 뚜렷하게 남아 있다.

[운주사 석조불감 쌍배불좌상...]

내부에 봉안된 두 불상은 각각 남쪽과 북쪽을 향하고 있으며 여래좌상이다. 남쪽을 향한 불상은 전체높이 255㎝이다. 원만한 둥근 얼굴에 소발의 머리를 갖추었는데, 육계부분은 파손되었다. 가느다란 눈썹과 콧등은 파손되어 시멘트로 보수되어, 코는 길고 예리하게 표현되었으며, 목에 삼도(三道)가 음각되었다. 법의(法衣)는 양 어깨를 모두 감싼 통견식(通肩式)으로 걸쳤으며, 도식적인 옷주름을 간략히 표현하였다. 수인(手印)은 오른손을 배에 대고 왼손을 무릎위에 얹은 모습으로 손가락까지 묘사되었다.

다리는 오른발을 들어 얹은 결가부좌(結跏趺坐)의 형태로 길상좌에 속하며, 발바닥과 발가락을 제외한 다리부분에도 도식적인 옷자락이 표현되었다. 광배(光背)는 사다리꼴 형 판석에 두광과 신광 구분 없이 구불구불한 문양이 선각되어 있는데 화염문(火焰文)을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북쪽을 향한 불상은 전체높이 264㎝로 원반형 연화탑을 바라보고 있다. 전체적으로 남쪽을 향한 불상과 양식적으로 흡사하다. 얼굴은 원만한 둥근 얼굴에 가느다란 눈썹과 눈, 희미한 입을 갖추고, 귀는 형태만이 남아있고, 코는 시멘트로 보수되어 있다.

머리에는 육계가 없고, 목은 짧은데 삼도가 뚜렷이 묘사되었다. 법의는 통견으로 걸치고, 두 어깨에서 내려오는 옷주름이 가슴부분에 모아 쥔 두 손으로 흐르다가 결가부좌한 다리까지 신체 전면을 덮고 있다. 옷 속에 싸인 두 손은 가슴에 모아 지권인(智拳印)을 취한 것으로 보인다. 광배는 주형(舟形)의 판석에 위쪽이 가는 길쭉한 타원형으로 선각되었는데, 이것도 화염문의 표현으로 생각된다. 감실 안의 두 불상은 단순화되고 경직된 불상 양식과 도식적인 옷주름 표현 등으로 미루어 볼 때, 고려시대의 지방화된 불상 양식을 드러내고 있다.

[운주사 원형 다층석탑...]

탑의 독특한 형태로 인해 연화탑 또는 호떡탑으로 불린다. 원형 지대석 위에 원형에 가깝게 다듬은 기단을 놓았는데 상부는 앙련을 얕게 새긴 갑석을 덮었다. 갑석 위에 단면 원형을 다듬은 탑신석을 놓고 버섯처럼 외곽을 접은 옥개석을 올렸다. 현재 6층 옥개석까지 남아 있으나 비례로 볼 때 원래는 더 높았다고 생각된다. 기단은 한 돌로 만들지 않았는데 4매의 돌을 다듬어 조립하고 그 안은 잡석으로 채웠다. 탑신석에는 가로로 두 줄을 새겨 장식하고, 옥개석 바닥면에도 두 줄의 선을 얕게 음각하였다. 옥개석을 원반(圓盤) 모양으로 다듬은 이 탑은 우리나라 석탑 가운데 유례가 드문 형태를 갖추고 있다.

[운주사 종각과 경내...]

[운주사 대웅전...]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다포계 팔작집이다. 안에는 석가여래상을 비롯해서 1988년에 봉안된 후불탱화와 신중탱화 및 금고가 있다. 주존상 뒤편에는 후불탱화로 1994년에 조성한 영축산(靈鷲山)에서의 석가모니의 설법장면을 그린 영산회상도(靈山會上圖)를 봉안하였다. 장대석 기단 위에 역시 다듬은 원형 초석을 놓고 원형기둥을 세웠다. 기단에는 정면과 좌우 측면에 각각 1개소씩 계단을 두었으며 기단 바닥은 전돌로 깔았다. 전면 3칸은 4분합문을 달고 나머지 3면은 문짝 외에 판벽을 설치하였다.

고막이석에는 구멍을 뚫어 卍자를 새겨 통풍을 시키고 있다. 기둥 상부는 창방 위에 평방을 놓고 공포를 올렸다. 포는 외2출목, 내3출이며 주간에는 주간포를 2구씩 배열하였다. 외부 첨차는 교두형으로 다듬었고 살미는 앙서형으로 만들었고, 내부는 모두 교두형으로 다듬었으나 3출목 이상의 살미는 운궁형으로 치목하였다. 포벽에는 좌불 1구를 각각 그려 넣었다. 처마는 서까래 위에 부연을 쓴 겹처마이며 귀처마는 추녀와 사래를 걸고 선자연을 썼다. 지붕에는 한식기와를 올려 팔작지붕을 만들었는데 용마루 하단에 미출을 써서 장식적인 효과를 냈다.

[대웅전앞의 3층석탑...]

[운주사 범종각...]

사방 1칸의 단칸 건물로 익공계 모임지붕집이다. 장대석 기단 위에 다듬은 원형 초석을 놓고 원형기둥을 세웠다. 기둥 상부는 창방을 걸고 익공을 짰는데 이익공을 결구하였으며 주간에는 화반을 각 2구씩 두었다. 구조는 좌우로 대들보를 하나 걸고 대들보 한가운데 기둥을 세워 네 모서리에서 나온 추녀를 걸었다. 처마는 서까래 위에 부연을 건 겹처마로 구성하였다. 지붕은 한식기와를 올려 사모지붕을 만들었으며 지붕 정상부는 절병통을 올려 마가마하였다. 기와골 끝은 막새를 세웠고, 내림마루 끝에는 망와를 세웠다. 내부 천장에는 각 칸마다 용을 그려 넣었는데 흰색, 황색, 청색, 녹색으로 각각 구분하였다. 종각 외곽 하부에는 계자난간을 둘렀으며 전면만 가운데를 개방하여 드나들기 편하게 하였다. 종각 안에 걸려있는 기문에 따르면 불기 2538년 즉 1994년에 범종 불사를 추진하였다.

[운주사 대웅전 우측에 자리한 지장전...]

지장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장방형 평면으로 익공계 맞배집이다. 현존 전각은 최근 새로 지었다. 안에는 뒷벽에 붙여 3단의 불단을 ‘ㄷ’자 형으로 조성하여 존상을 봉안하였다. 가운데 지장보살상을 두고 그 좌우에 무독귀왕, 도명존자를 협시하고, 좌우에는 목조로 된 지장천불을 봉안하였다. 장대석 기단 위에 원형 초석을 놓고 원형기둥을 세웠다. 기둥 상부는 창방을 걸고 익공으로 짰는데 초익공이며 주간에는 소로를 받쳤다. 내부 가구는 5량가로 짰다. 앞뒤 기둥 위에 대들보를 걸고 그 위에 주두와 첨차형 부재를 놓고 종보를 올렸다. 종보 이상은 우물천장을 가설하여 구조를 확인할 수 없다. 천장은 우물반자를 썼는데 중도리를 기준으로 층단을 두었다.

[대웅전 뒤의 산신각...]

사방 1칸의 단칸 건물로 익공계 맞배집이다. 명부전 뒤편 산록에 자리 잡고 있다. 기단과 초석은 자연석을 사용하였다. 기둥은 원형기둥이며 상부에 창방을 결구하고 익공을 짰는데 초익공이다. 주간에는 소로를 장식하였다. 가구는 간결한 3량가로 대들보 위에 판대공을 세워 종도리를 받았다. 처마는 서까래만 쓴 홑처마이며 한식기와를 올려 맞배지붕을 만들었다. 기와골 끝은 막새를 쓰고 용마루와 내림마루는 기와를 쌓아 만든 후 끝은 망와를 세웠다. 지붕 좌우에는 풍판을 달지 않아 구조를 볼 수 있다. 전면에는 2분합문을 달고 다른 3면은 벽을 들였다. 처마 한가운데에 산신각이라 쓴 현판을 걸었다. 전각 내부에는 뒷벽 중방에 붙여서 선반을 지르고 뒷벽 한가운데에 산신탱을 걸었다.

[운주사 원형 구형탑...스님들의 공양그릇모양...]

[여래좌상앞에서 내려다본 경내...]

[운주사 "마"석불군 아비와엄마 아들.. 석불군...]

마불상군은 대웅전에서 공사바위 가는 길을 따라 북서쪽으로 약 20m 쯤 떨어진 암벽 남쪽에 위치하며, 좌상 2분, 불두 1분을 포함하여 입상 3분, 대좌 1개가 남아 있다. 이 불상군은 배열 상태가 상당히 흐트러져 있는데, 본래상태와 유사한 상태로 보이는 석불좌상을 중심으로 왼편에 소형의 석불좌상을, 오른편에 불두 1분과 입상의 불상 2분을 모셨다. 암벽은 높이 15m, 너비 20m로 마애여래좌상이 새겨진 암반과 연결되어 중앙부와 하단을 깎아 불상을 보호하기 위한 감실 형태를 이루고 있다. 감실 형태의 구조물 흔적으로 보이는 길이 14cm, 너비 8cm, 깊이 6cm의 구멍 4개가 좌우 상하단에 나 있다.

[운주사 부부아비상 석불...코를 누가 참....]

중앙 불좌상의 오른쪽에 있는 불입상 2분은 얼마 전까지 서로 어깨를 기대로 있어 ‘부부부처’라고 불렀는데, 대좌로 보아 원래의 상태가 아닌 것으로 추정되었는데, 현재는 따로 떨어져 모셔져 있다. 이 두 불입상 옆에는 불두가 하나 있는데, 눈썹과 코를 잘 다듬은 이 불두에는 중심에 수직으로 5개의 구멍이 뚫려있는데, 돌을 쪼개려는 채석구멍과 달리 뚫려있어 그 연유에 대해 궁금증을 유발시킨다.

[운주사 원형 명당탑, 영구산의 머리부분에...]

[운주사 마애여래좌상...]

남쪽을 행해 있는 마애불좌상은 대웅전에서 북쪽으로 약 50미터 떨어진 곳, 즉 운주사 불적과 일대의 풍경을 시원스레 관망할 수 있는 ‘공사바위’ 바로 아래 암벽에 새겨져 있다. 얕은 부조와 선각으로 새긴 마애불은 운주사 계곡 안의 모든 돌부처와 석탑과 칠성바위, 그리고 절로 들어오는 신도들을 한눈에 바라보고 있다. 균열로 인해 탈락이 심하나 암벽의 요철 부분을 그대로 살려 얕게 부조한 이 마애불은 타원형의 얼굴에 희미하게 눈과 입이 묘사되었고, 도드라진 긴 코와 긴 귀를 지녔다. 머리와 이마는 거의 없이 육계만이 두툼하게 솟아 있고, 목은 두툼하고 긴데 삼도가 선각되어 있다.

[공사바위에서 내려다본 운주사 전경...]

[운주사 마애여래상앞에 무릇이...]

[와불거처 오르는길목에 머슴부처가...]

시위불은 와불로 가는 산 정상 바로 아래 부분에 모셔져 있다. 와불을 지킨다하여 시위불 또는 머슴부처라 불리기도 한다. 조각이 뚜렷하지 않아 전체적으로 희미하지만, 얼굴은 갸름한 달걀형으로 머리에는 관모를 쓴 것처럼 단이 진 육계와 머리와 이마를 구분하여 표현하였다. 이마는 한 단 낮고 좁은데, 그 아래로 눈썹과 연결된 오똑한 코와 초생달형의 눈이 묘사되어 있다. 입은 희미하여 잘 알 수 없고, 귀는 이마 위에서부터 입 부근까지 길고 좁게 묘사하였으며, 볼은 도톰하다. 목에는 삼도가 표현되지 않았고, 법의는 오른쪽 어깨를 들어낸 우견편단식으로 보이나 왼쪽 어깨에는 옷주름이 묘사되지 않았다.

왼쪽 가슴에서 흘러내린 옷주름은 상체 전면을 휘감고, 하체에서는 양 다리를 구분하여 ‘U'자형으로 흐르다가 무릎아래에서 군의(裙衣)를 묘사한 듯 수직으로 흘러내린다. 수인은 오른팔을 들어 가슴에 대고 왼팔을 쭉 뻗어 왼쪽다리에 붙이고 있는데 시무외 여원인의 변형으로 추정된다. 암반위에 세워진 이 불상의 크기는 좌상의 와불 오른쪽에 길이 6m, 너비 95~115cm, 두께 68cm의 채석흔적과 유사한데, 와불 옆에서 떼어냈다는 구전상의 이야기와 대체로 부합되어, 와불 옆에서 떼어 낸 것으로 추정된다.

[운주사의 하이라이트 와불?...]

"운주사 서쪽산 능선에는 거대한 두 분의 와불(미완성석불)님이 누워있다. 조상 대대로 사람들은 "이 천번째 와불님이 일어나시는날 새로운 세상이 온다" 는 말을 전해왔다. 아마도 운주사 천불천탑은 우주법계에 계시는 부처님이 강림하시어 하화중생의 대 설법을 통한 불국정토의 이상세계가 열리기를 간절히 염원하는 마음으로 조성한 대불사가 아닐까한다." 라고 홈에 서술되어있다. 종교적인 것을 떠나서 생각해 보아도 정성에 역점을 둔 정신세계 만은 높이살 수가 있겠다.

[운주사의 미완성석불 이라는 와불...]

서쪽 계곡의 산 정상에 위치한 와불은 석불좌상과 입상이 나란히 누워 있어 ‘부부 와불’로 불리기도 하였다. 길이 12m, 너비 10m의 바위에 나란히 누워 있는 모습으로 조각된 이 불상은 일으켜 세우면 세상이 바뀌고 천년동안 태평성대가 계속된다고 하는 전설이 내려온다. 먼저 좌불을 살펴보면, 달걀형의 얼굴에 약간 도드라지게 표현한 눈썹과 코, 거칠게 조각된 긴 귀를 갖췄으며, 소발의 머리에는 육계가 표현되지 않았다. 육계는 다른 석재로 불상의 머리 오른쪽에 놓여져 있는데, 이를 두고 조선시대 억불정책의 일환으로 잘라낸 것이라는 견해도 있으나 아무런 증거가 없는 것으로, 그저 암반이 부족하여 취한 궁여지책으로 보인다.

[운주사 바 석불군...]

바 석불군은 운주사의 서쪽 산등성이 와불로 올라가는 길 중간에 있는 암벽 아래에 위치한다. 높이 5m, 너비 12m의 거대한 암반 위에는 석탑 2기가 모셔져 있고, 그 남쪽 측면에는 3× 4× 2m의 공간을 형성하여 암벽 감실을 조성하여 불좌상을 중심으로 좌불상 2분, 입불상 8분을 안치하였다. 이 외에도 이 암벽에는 높이 4m 지점에 지름 1m정도로 암벽이 다듬어진 흔적이 있어 이곳에 대형불상을 안치하려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중앙의 불좌상은 여타의 불상군보다 마모가 심하지 않아 얼굴에 눈, 코, 입의 이목구비가 드러나 있으며,

법의는 두 어깨를 감싸 덮는 통견식으로 착용하였다. 옷주름은 선각으로 띠를 이루었으며, 두 손은 모두 결가부좌한 무릎위에 얹었는데, 오른손은 손등을 위로, 왼손은 손바닥으로 위로하였다. 대좌는 방형의 연화대좌를 갖추었는데 좌우 협시불의 대좌는 장식이 없다.

[주차장쪽으로 나가면서 본 일주문...]

[압록에서 곡성가는길목에 멋진다리 (두마교)...]

[전구 색도 여러 가지로 변해 더욱 멋을.....]

항상 그렇지만 이번도 코리아템플 사이트에서 인용을 한 것이다. 내일 진도로 가기로 하였기에 해남쪽으로 가려하다 여행비를 아까는 의미에서 곡성으로 가서 하룻밤을 자고 떠나오기로 하였다. 이것이 문제가 되었었나? ... 아무튼 압록쪽으로 들어오다가 옛날다리를 보강한 철다리에 조명이비추어 멋진 광경이 연출되 그만 또 차를 세우고 말았다. 커다란 다리는 아니지만 이렇게 주민이나 관광객을 배려해 멋진 조명을 붙여준 것은 정말 고마운일이다. 얼마나 즐겁고 행복한 시간인가...지난번에도 지나가며 보았지만 정말 볼수록 예쁘고 또 앙증스러울정도로 고운 빛을 가진 작은 철다리...항상 이다리를 건너봐야겠다 하는 마음들이 생길 것이다. -<끝>-
 

 
다음검색
댓글
최신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