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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의 기쁨을 누리자(롬 8:1-8)
할렐루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폭염과 찜통 더위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무더위를 피하여, 많은 사람들이 바다로 달려갔지만, 어떤 해수욕장은 바닷물이 너무 차가워, 물 속에 들어가지 못하는 곳이 있는가 하면, 어떤 곳은 해파리 떼가 너무 많이 출몰하여, 물 속에 들어가지 못하는 곳이 있다고 합니다. 폭염을 피하여, 시원한 바다로 갔지만, 바다의 시원함을 맛보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며칠 전, 목사님들을 만났는데, 서로 인사말이 “어떻게 살아. 잘 살고 있어.”라는 말이 대부분이었습니다. 폭염과 무더위 속에, 하루하루 버티어 나간다고 하는 것이 너무 힘들지만, 우리 인생사에, 어디 우리를 힘들게 하는 것이 폭염과 무더위뿐이겠습니까? 그런데, 이렇게 계속되는 폭염 속에서도, 특수를 누리고 있는 곳이 있다고 하는데, 바로 얼음 공장이라고 합니다. 당분간, 폭염의 기세가 수그러들지 않을 것으로 예고된 가운데, 더울수록 더 바빠지는 사람들의 땀방울도 늘어가고 있습니다.
제33회 파리 올림픽이 11일, 오늘 마치게 되었습니다. 우리나라는 금메달을 5개 정도 예상을 하고, 올림픽에 참석을 했는데, 13개나 획득했습니다. 역대 올림픽 가운데 가장 좋은 성적입니다만, 처음부터 전혀 생각하지 못한 결과일까요? 아니면, 목표를 낮게 설정한 것일까요? 우리 인생사를 보면, 전혀 생각하지 못한 결과를 맞이하게 될 때도 있습니다. 그리할지라도, 당황하거나 서두르지 말고, 목표를 향하여, 끝까지 달려가야 할 것입니다.
미국의 유명한 철학자인 산타아나는 “뼈아픈 과거를 기억할 줄 모르는 사람은 과거를 되풀이하게 된다. 슬기로운 사람은 경험 속에서 지혜를 배우고, 지혜로운 민족은 역사 속에서 교훈을 얻는다.”라고 말했습니다.
돌아오는 8월 15일, 79주년 광복절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8·15 광복은 우리 민족사에서, 결코 잊을 수 없는 날이며, 또한, 잊어서도 안될 우리 민족사에 영원히 기념되어야 할 날입니다. 그것은 우리 민족이 일제 36년간의 압제와 온갖 수난과 치욕의 굴레에서, 자유와 해방을 얻은 날이기 때문입니다. 8·15 해방의 날을 대대로 영원히 기념하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나라와 민족의 자유와 해방을 쟁취하기 위하여, 피 흘려 항쟁한 수많은 독립 투사들과 숨은 애국자들의 숭고한 희생이 헛되지 않도록, 대한민국의 모든 백성들이 참된 자유를 누리며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일제의 지배로부터 벗어난 지, 어느 덧 79년째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보면, 아직도 완전한 해방을 누리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79년이 지났기 때문에, 일본의 지배를 직접 경험하지 않는 사람들이, 경험한 사람들보다 더 많아졌음에도 불구하고, 그 지배와 압제로부터 완전하게 벗어나지 못하고, 그 그늘 아래에 놓여 있는 것만 같습니다. 언제쯤, 우리는 “친일이냐?”에서 벗어나, 모든 백성들이 손에 손을 잡고, 어울려, 완전한 해방과 자유를 누리며 살아갈 수 있을까요?
오늘은 “해방의 기쁨을 누리자”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1-2절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해방이 무엇입니까? 해방이란 속박하거나, 가두어 두었던 것을 풀어서, 자유롭게 하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해방은 자유로워지는 것입니다. 속박에서 벗어나는 것이요, 얽매인 것에서 풀어나는 것입니다. 정치적 억압으로부터, 정신적 구속으로부터, 경제적 속박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속박과 억압으로부터 벗어나, 사람답게 사는 것을 해방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1945년 8월 15일, 우리나라는 일본에 빼앗겼던 주권을 다시 찾았습니다. 해방되었습니다.
지금 우리는 그 해방의 기쁨을 즐기고 있습니까? 대한민국 모든 백성들이, 여야를 떠나, 보수와 진보를 떠나, 남녀노소, 함께 어울려, 그 해방의 기쁨을 누려야 하는데, 최근에 되어진 여러 가지 일들로 인하여, 해방의 기쁨을 함께 누리는 것이 아니라, 대립과 다툼이 더욱더 심해져가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여러분! 이스라엘은 애굽에서의 해방과 바벨론에서의 해방을 경험했습니다.
야곱은 그의 자녀들을 데리고, 가뭄과 기근을 피하여, 애굽으로 내려갔지만, 결과적으로, 그의 후손들은 430년 동안, 애굽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처음엔 자유의 몸이었지만, 총리로 있는 요셉의 가족이라는 이유로, 어쩌면, 특별 대우를 받으며 살 수 있었지만, 요셉이 죽고, 요셉을 알지 못하는 왕들이 등장하면서, 야곱의 후손들은 자유의 몸에서 종의 몸으로 신분이 바뀌었습니다. 그런 까닭에, 억압과 학대와 모진 고난을 당해야 했고, 마지막에는, 아들이 태어나면, 죽임을 당해야 하는 극한 핍박을 당해야만 했습니다. 고통과 아픔은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습니다. 죽지 못해, 사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사는 것은 사람답게 사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그들을 구해주셨습니다.
그들은 애굽에서 탈출했습니다. 해방되었습니다. 홍해를 건넜고, 광야에서 40년을 살았고, 마침내, 가나안 땅에 정착하여, 살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자유를 찾았습니다.
그렇게 가나안 땅에 정착하여, 자유의 삶을 살던 그들은 바벨론에 의하여, 그 자유를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북이스라엘은 앗수르에 의하여 멸망을 당하였고, 남유다마저도, 바벨론에 의하여 멸망을 당하였습니다. 예루살렘 성전도 파괴되었고, 백성들은 짐승처럼, 쇠사슬에 묶여, 바벨론에 끌려갔습니다. 그들은 머나먼, 바벨론 땅에서, 자유를 박탈당한 채, 포로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70년 동안, 말로 다할 수 없는 핍박과 고통을 당해야만 했습니다. 그들은 바벨론 강가에서, 예루살렘 성전을 생각하며, 기약없이, 돌아갈 날만을 기다렸습니다. 그러다가,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라”는 해방의 기쁜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바벨론으로 끌려갔던 사람들은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들은 자유의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기쁘고 행복했겠습니까?
애굽에서 종살이하다 홍해를 건넜던 사람들은 해방이 얼마나 감격스러운 것인가를 알았을 것입니다. 바벨론에 끌려가 노예 생활을 하다,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사람들은 해방과 자유의 삶이 얼마나 기쁘고 감격스러운가를 알았을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그러한 해방의 감격, 그 기쁨을 알고 있습니까? 그리고, 그 기쁨을 누리고 있습니까?
로마서 8:1-2절은 바울의 해방 선언문입니다. 특히, 2절을 보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라고 했습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롬 3:10),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롬 3:23)라고 말하며,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4)라고 몸부림치던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나를 해방하였다”라고 선언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나와 너, 우리”, 모두를 죄와 죽음에서 자유롭게 해주셨습니다. 해방시키셨습니다.
기도할 때마다, “알고 지은 죄, 모르고 지은 죄”라고 늘 고백하는 것처럼, 우리는 죄인입니다. 누구든지, 죄에 합당한 벌을 받아야 합니다. 피해 갈 수 없습니다.
정치권에서, 특검법을 계속 이야기하는데, 무엇 때문입니까? 잘못한 사람이 있다면, 그가 누가 되었건간에, 그에 합당한 벌을 받게 하자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정한 법이 있고, 그 법을 어겼을 경우, 그에 합당한 벌을 받아야 하는 것이 당연한 일입니다. 그 누구라 할지라도, 피해 갈 수 없습니다. 자기 스스로 죄 없다고 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내 멋대로 살 때가 많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자유를 함부로 사용할 때가 많습니다. 육신의 생각대로, 육신을 따라 살 때가 많습니다.
5절을 보면,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한다”라고 했고, 6절을 보면,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다”라고 했으며, 7절을 보면,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13절을 보면,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 전에는 말할 것도 없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육신의 생각을 따라, 내 멋대로 살아갈 때가 많습니다. 아주 단호하고 분명하게,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라고 했는데, 답답한 것은 인간은 그 누구를 막론하고, 자신의 힘이나 노력으로 죄를 없애거나, 해결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구약을 보면, 죄를 범한 사람은 짐승을 잡아 제사 드림으로, 죄를 사함받았습니다. 매번 죄를 범할 때마다, 반복해야 했습니다. 나 때문에, 죄 없는 짐승이 계속 죽어야 했습니다. 신약을 보면,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님을 가리켜,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히 9:12)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죄 많은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를 사해 주셨고,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죄사함 받고, 영생을 얻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이것을 가리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라고 말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믿으면, 누구든지 구원을 받습니다. 죄 사함을 받습니다. 죄로부터 해방을 얻게 됩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하게 하리라”(요 8:32) 예수님을 믿음으로, 우리는 자유를 누리며 살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죄에서 해방되고, 죽음에서 해방되고, 율법에서 해방되었습니다. 얼마나 놀랍고, 기쁘고, 감사한 일입니까?
훗날,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갈 5:1)라고 말했습니다.
자유은 위대한 것입니다. 그 자유가 내 것이 되었다고 하는 것은 감격적인 일입니다. 그러나, 그 자유를 잘못 사용하게 되면, 무질서와 혼란, 방종과 타락, 그리고, 자멸하고 맙니다. 비록 자유를 얻고, 해방 받았다고 할지라도, 날마다 그 자유가 방종이 되지 않도록, 자기 자신과 싸워야 합니다. 방심해서는 안됩니다.
지금 우리는 일제의 지배로부터 해방된 지, 79년이 지났습니다. 6·25 전쟁과 남북 분단의 아픔 속에서도, 한강의 기적을 이루었고, 수많은 탄압 속에서도 정치 민주화를 이루어 냈습니다. 우리나라의 음악, 영화와 드라마와 같은 여러 대중문화 요소가 전세계로 널리 퍼져나가, 해외 국가들에서 유행하게 되는 한류 열풍이 계속되어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우리 사회에서 “친일”이라는 단어가 매번 반복되어지는 것을 볼 때, 우리가 얻은 해방과 자유의 기쁨을 올바르게 사용하지 못하고 있는 것만 같아, 안타까운 마음입니다.
아직도, 그 지배로부터 벗어나지 못한 것일까요?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자유를 누리며, 떳떳하게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해방과 자유를 얻기 위하여, 우리 조상들이 얼마나 큰 희생을 했습니까? 독립 운동가들의 희생을 생각하면서, 해방의 기쁨을 누리며, 자유의 삶을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 “해방과 자유”, 여러분은 얼마만큼 자유하십니까? 얼마나 자유를 누리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지나간 과거를 잊어버려서는 안되겠지만, 과거의 그늘에 매여 있는 것도 안됩니다. 과거를 절대 잊어서는 안되겠지만, 그것에 매여 끌려다녀서도 안됩니다. 옛날에 매여 있는 것이 아니라, 내일을 향하여 달려가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하여, 죄에서 해방되어, 자유를 얻었습니다. 그렇게 얻은 자유가 방종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세상이 우리를 유혹하고 시험한다고 해도, 흔들려서는 안됩니다.
요셉은 형들의 미움을 받아, 애굽에 종으로 팔려갔습니다. 그 마음의 상처가 상당히 깊었을 것입니다. 복수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을 것입니다. 복수심에 사로잡혀, 얼마든지, 감정의 노예가 될 수 있었습니다. 보디발의 종으로 충성하다가,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배신감같은 것이 들었을 것입니다. 그 마음을 어떻게 헤아릴 수가 있겠습니까? 캄캄한 감옥에 갇혀, 매질을 당할 때마다, 복수하고픈 마음이 들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는 믿음을 지켰습니다. 복수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형들을 용서했습니다. 그들을 품었습니다. 그들에게 자유를 주었습니다.
다니엘은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그러나, 바벨론의 문화에 물들지 않았습니다. 그는 뜻을 정했습니다. 그는 끝까지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지켰습니다.
폭염과 무더위가 계속 기승을 부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제 경험상, 8월 15일이 지나면, 더위가 한풀 꺾이는 것을 보았습니다.
우리 사회는 보수와 진보, 여와 야, 나와 너로 나뉘어, 대립과 다툼이 멈추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번 8·15 광복절을 기점으로 하여, 모두가 하나가 되어, 함께 해방의 기쁨을, 자유의 기쁨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그렇기 위해서는 예수님 안에서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 8:32)라고 말씀하셨는데, 예수님이 바로 진리이십니다.
많은 것을 가졌다고 할지라도, 높은 자리에 있다고 해서 자유롭습니까?
재물과 권력은 자유를 보장해주지 못합니다. 오히려, 그것을 지키기 위하여, 자유를 내버려야 할 때가 많습니다. 참된 해방과 자유는 예수님 안에 있을 때 가능합니다.
베드로는 “너희는 자유가 있으나 그 자유로 악을 가리는 데 쓰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종과 같이 하라”(벧전 2:16)라고 말했습니다.
둘째 아들은 아버지 품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었습니다. 아버지의 뜻이 아니라, 자기 뜻대로 살고 싶었습니다. 가고 싶은 곳도 마음대로 가고, 하고 싶은 것도 가리지 않고 다 하고 싶었고, 먹고 싶은 것도 마음껏 먹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 집을 떠났습니다. 그에게 자유가 찾아왔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자유를 잘못 사용했습니다. 그는 실패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모든 것을 다 잃었습니다.
자유를 찾아 아버지 집을 떠났지만, 자유가 없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마침내, 그는 아버지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아버지 품 안에 있는 것이 자유를 억압당하는 삶이 아니라, 마음껏 자유를 누리며 사는 길임을 알아야 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 안에 있습니까? 하나님의 사랑 안에 머물러 있습니까?
믿음의 주가 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예수님을 알면 알수록, 우리는 자유의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죄에서 해방시키셨고, 우리에게 참 자유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이 시대에 물들지 않고, 변질되지 않는 참 자유를 누리는, 영적 해방의 기쁨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합니다.
주여, 십자가의 보혈로 우리를 구원하여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주님의 뜻을 행하며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주님 안에서 해방과 참 자유의 기쁨을 누리며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우리와 항상 함께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