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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4;18-25. 나를 따르라는 처음과 나중의 은혜와 결단과 의미. 2024. 2. 18.
여러분, 오불관언(吾不關焉), 수수방관(袖手傍觀)이라는 사자성어가 있습니다. 강 건너 불구경한다는 뜻으로, 자기와는 상관없는 일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일에 관심이 없다는 태도일 때 사용하는 사자성어 입니다. 어떤 상황에서 해야 할 일에 전혀 관여하지 않고 그대로 내버려 두는 표현입니다. 요즘 사회에 양심의 상실과 열정과 긍지의 상실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우려를 합니다. 도와주려다 오히려 범인으로 몰리는 상황 때문에 이런 오불관언의 풍토가 점점 일반화되어 갑니다. 쓰러진 노인을 부축해 병원으로 데려갔다가 범인으로 몰리고, 사고 난 사람을 도와주다가 도와준 사람을 가해자로 여기는 일도 빈번합니다. 도와줘도 문제이고 모른척해도 문제가 됩니다. 또 어느 때는 너무 간섭과 관여하는 것 때문에 문제가 될 때도 있습니다. 나의 일이 아닌 다른 사람의 일이라면 신경을 쓰지 않고, 관여하지 않는 오불관언 사회와 무관심 때문에 세상이 각박합니다. 누가 이웃인지 관심이 없고, 오로지 나만을 생각하고 자신에게 이로운 것만을 추구하는 이기심이 하늘을 찌르고, 생각할 수 없는 일들이 발생되는 현실에 대하여 회의감이 들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관심과 표정과 공감이 없으면 너와 내가 동시에 외롭고, 또한 우리의 삶이 고독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서로 간에 관심을 가져주고 서로 도우며 상생의 삶을 살아갈 때에 서로에게 힘이 되고 용기가 솟고 활기찬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러면 서로에게 힘이 되고 용기가 나고 활기찬 삶과 상생의 삶을 위하여 어떻게 해야 될까요? 울타리라는 우리의 공동체 안에, 그 공동체가 어떤 유형이드지 그 울타리 안에 주님이 계시고 주님이 찾아오시고, 주님이 세우시면 됩니다. 주님 안에서 사랑과 관심이 주어지면 됩니다. 그런 면에서 이웃과 함께 호흡하고 사랑을 나누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의 공감이 있는, 그리고 주님이 우리 안에 계신 비전교회가 참으로 소망이 있습니다. 그렇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1. 본문의 내용입니다. 오늘 본문은 처음 갈릴리 바다에서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신 주님의 말씀과 배경입니다. 주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먼저 40일을 금식을 하신 것 때문에 사탄의 시험을 받게 됩니다. 3가지 시험을 받게 되시는데, 그 내용은 돌들이 떡덩이가 되게 하는 것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 내리라는 것과 더하여 시험을 하는 대상에게 엎드려 경배하면 천하의 만국과 영광을 주겠다고 합니다. 그런데 40일을 금식하신 예수님께서 이 세 가지의 시험의 내용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물리치시고 난 이후에 한 소식을 듣게 되는데 광야의 외치는 자의 소리와 주의 길을 예비한 세례 요한이 예루살렘에서 붙잡히게 되었습니다. 이 때부터 예수님의 본격적인 사역이 시작되었습니다. 4;17, 이 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이 때부터 복음을 전파하시면서 갈릴리 해변을 걸으셨습니다. 갈릴리 해변, 거기서 어부로 생활을 하는 베드로라고 하는 시몬과 안드레를 부르시고,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을 부르셨습니다. 이유는 나를 따르라는 예수님의 어떤 부르심과 어떤 소명 때문이었습니다. 22-25. 그들이 곧 배와 아버지를 버려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의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그의 소문이 온 수리아에 퍼진지라 사람들이 모든 앓는 자 곧 각종 병에 걸려서 고통을 당하는 자, 귀신 들린 자, 간질을 하는 자, 중풍병자들을 데려오니 그들을 고치시더라. 그런 상황 때문에 갈릴리와 데가볼리와 예루살렘과 유대와 요단 강 건너편에서 수많은 무리가 따르니라. 부름을 받은 이어부들이 배를 그 자리에 버려두고 부모를 떠나 예수님을 쫓았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예수님이 하시는 사역의 현장에 동참을 했습니다. 그 결과로 갈릴리와 데가볼리와 예루살렘과 유대와 요단 강 건너편에서 수많은 무리가 따르게 되었다는 내용이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사람들을 빛 가운데 거하도록 하십니까? 사람들을 제자로 부르셨습니다. 어떤 역할입니까? 18,19절을 보면, 예수님은 갈릴리 해변을 지나가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와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을 던지는 것을 보시고 그들에게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고 불고기를 잡는 어부가 아닌, 사람을 낚는 어부로 부르셨습니다. 21절, 다른 두 형제 곧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도 부르셨습니다. 이들은 모두 갈릴리에서 고기를 잡는 어부들입니다. 그런데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사람들이지만 먹고 살아야 하기 때문에 고기를 잡았습니다. 아름다운 갈릴리 호수에서의 고기를 잡는 어부의 생활은 아름답습니다. 등불을 환히 밝히고 그물로 고기를 잡는 낭만적 생활이었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적지 않은 연봉을 받으며, 화려하고 멋있는 건물 속에서 직장생활과 사업을 하는 것은 이 시대 누구나 다 원하는 삶입니다. 그러나 단지 먹고 살기 위하여 하는 일은 그 일이 무엇이든지, 1,2차 산업과 3차 산업과 사업이든지 근본적으로는 힘이 들고 피곤합니다. 왜냐하면 생사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문제 앞에서 예수님은 바로 이런 인생들을 빛 가운데 거하며, 하나님의 다스리심 가운데 살 수 있도록 부르셨습니다.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예수님에게 있는 그 무엇을 배우고 그 무엇을 본받는 제자가 되라는 말씀입니다. 삶의 우선순위가 바뀌어 지는 순간입니다. 여러분, 사람은 무엇을 배우든지 배운 대로 하고, 배운 대로 됩니다. 잘못된 사람 밑에서 잘못을 배운 사람은 같은 사람이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삶을 배울 때 예수님의 삶을 살게 됩니다. 모든 사람을 품는 사랑을 배우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예수님의 겸손을 배우고, 허물 많은 제자들을 끝까지 사랑하신 예수님의 인내와, 죄를 속죄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아카페의 사랑을 배웁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배울 때 그 인생은 질적으로 다른 사람이 됩니다. 겉모습은 다를 바 없는, 똑 같은 사람이지만, 근본적으로 사람의 영혼을 생각하는 인생이 되고, 빛이신 예수님을 통하여 영혼을 하나님 나라로 이끄는 인생이 됩니다. 여러분, 사람은 본래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랑을 받고, 사람을 사랑하고 사랑을 받는 삶을 살도록 지음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헬라어로 사람을 안드로포스라고 합니다. 위와 앞을 보는 사람입니다. 우리의 존재와 유전자 속에 이런 영적인 특성이 내재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어린아이를 키우고 보살피는 엄마나, 아이들을 가르치는 선생님들은 생의 기쁨과 만족이 다른 사람들 보다 크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런 삶을 모르고 갈릴리에서 천부적으로 살아가는 제자들에게 나를 따라 오라는 빛 가운데 불러주신 예수님의 음성과 부르심이 있습니다. 이 소명을 늘 기억하면 능히 자기 자신을 이기고, 생각하는 이상의 변화와 복을 받게 됩니다. 여러분, 신앙생활을 하는 동안 내면에 생기는 문제의 근본원인이 어디에 있을까요? 오직 한 가지 나를 따라 오라는 부르신 예수님의 음성과 소명을 듣지 않는 데에 있습니다. 빛과 다스리심 가운데 살도록 해 주는 주님의 음성과 나를 따라 오라는 주님의 말씀을 놓치는 데 있습니다. 여러분,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서, 여러 가지의 근심 걱정에 눌려있으십니까? 나를 따라 오라는 주님의 음성을 놓치고 배우는 마음을 놓친 것은 아닙니까? 주님이 내 인생을 인도하신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현실 문제 때문에 고민하는 것은 아닙니까? 사단이 주는 유혹의 음성을 듣고, 시험에 넘어진 것은 아닙니까? 이 시간, 나를 따라 오라하시는 주님의 음성과 소명을 새롭게 들으실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나보다 나를 더 잘 아시고 나보다 나를 더 책임져 주시는 그 주님의 음성과 소명에 나를 맡기시고, 따르며 배울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합니까? 20절, 부르셨을 때, 베드로와 안드레는 곧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좇았습니다. 22절, 야고보와 요한도 곧 배와 부친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좇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음성과 소명을 들었을 때 즉시 영접하고 순종을 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부르심은 하나님의 음성이고, 왕의 음성이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삶의 피곤함을 인정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때에 무거운 인생의 짐을 주님께 맡기는 삶을 시작되었고, 그 시작은 새로운 변화의 시작이었습니다. 체험과 배움의 시작이었습니다. 예수님에게서 빛과 생명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들의 삶과 환경이 어떤 것이었나요? 갈릴리 어부라는 천직이었습니다. 한계 속에 살아야만 하는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일어나 주님을 따랐을 때, 위대한 주님의 사람과 주님의 제자로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삶의 우선순위를 주님께 두고, 삶의 방향을 주님으로부터 배우고, 삶의 목적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획기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큰 빛과 위대한 능력 가운데 부르시고 소명을 주신,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는 말씀을 심령으로 영접할 수 있기를 그래서 삶의 우선순위와 방향과 목적이 확연하게 드러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2. 그러면 나를 따라 오게 말씀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무엇을 가르치셨나요? 처음의 부르심의 의미와 사역은 무엇인가요? 가르치시고 전파하시고 고치시는 그 무엇을 경험하게 하셨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3대 사역은 preaching, teaching, healing,입니다. 이것을 부르신 사람들에게 가르치셨고 체험하게 하셨습니다. 23절, 예수님은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시며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에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예수님이 메시야로 하신 무엇인가를 가르쳐주었습니다. 특별히 두루 다니신, 동사 perih/gen(페리아겐)의 의미는 누군가를 데리고 다닌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온 갈릴리 어디를 가시든지 앞에서 부르신 제자들을 데리고 다니셨습니다. 왜요? preaching, teaching, healing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는 그 자체로도 의미가 있지만, 배우고 체험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면 이 것이 무엇이며 왜 이렇게 하십니까?
2-1. 가르치시는 일입니다. 가르치시는 일은 토라인데 율법의 재해석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잘못 이해하며 해석하는 부분을 제대로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은 떡으로만 살 수 없고, 안드로포스인 사람이 사람답게 살려면 하나님의 입으로 나온 모든 말씀을 바로 아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아셨습니다. 그래서 가는 곳마다 저희 회당에서 성경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이 매듭이 되면서 5장부터 율법의 재해석과 치유와 복음이 나옵니다. 여러분, 바르게 깨닫게 해 주는 것은 삶과 신앙에 직결됩니다. 하나님과 나를 바로 알게 합니다. 사람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가르쳐 줍니다. 문제를 알게 하고, 문제를 해결할 지혜를 줍니다. 죄인인 것을 알고, 구원을 받습니다. 딤 후3:15-17.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말씀에 대한 바른 해석을 가르치셨는데, 이 가르침을 부르신 제자에게 배우고 경험하게 했습니다.
2-2. 복음 전파입니다. 복음을 전파하는 것은 주 예수를 믿어라.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는 메시지입니다. 사실 주님이 이 땅에 오신 핵심이고 결론입니다. 여러분, 아무리 가르침을 받을지라도 여전히 인생의 주권을 자신이 쥐고 있을 때 천국과 영원한 생명은 없습니다. 가르침을 통해서 하나님이시고, 왕이신 예수님의 음성에 순종하는 신앙인으로서 인생의 주권을 예수님께 맡기고, 인도하심을 받는 그래서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오게 하는 것입니다. 속죄의 십자가와 천국과 영원한 생명의 보증입니다. 왜 복음이 필요합니까? 죄인의 결국은 죽음이고 음부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친히 이 땅에 인카네이션하신 예수님이 복음입니다. 그 예수님만이 죽음의 문제와 영원한 생명과 하나님의 나라를 이뤃 수가 있습니다. 천국의 소망과 영원한 삶은 주님의 복음에 있습니다. 구원입니다.
2-3.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는 일입니다. 치유의 은사와 능력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을 보실 때에 말씀가운데 그 내면을 보셨습니다. 복음이 우선이지만 사람들의 현실 문제를 외면하지 않았습니다. 의술이 발달한 이 시대에서도 괴질과 같은 질병이 발생하면 사람들은 사망 권세에 시달리게 됩니다. 질병으로 인한 사망이 얼마나 심각합니까? 2천 년 전, 당시의 사람들은 각색 질병의 문제가 심각했기 때문에 예수님은 백성들의 심각한 현실 문제를 외면치 않았습니다. 현실적인 필요를 도와주셨는데 그 것이 healing이고 온전한 치료이었습니다. 사실 이런 현실의 문제는 매우 어려운 문제이었기 때문에 신앙과 믿음이 흔들렸습니다. 이런 현실의 짐과 문제를 예수님께로 가져올 때 기뻐하시고 치료하시고, 문제를 해결해 주셨습니다. 여러분, 주님의 은혜가 필요한 문제와 약함이 우리에게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도우심을 반드시 경험해야 하지 않습니까? 24절, 예수님의 소문이 온 수리아에 퍼지자, 사람들이 모든 앓는 자 곧 각색 병과 고통에 걸린 자, 귀신 들린 자, 간질하는 자, 중풍병자들을 데려오니 그들을 고치시니라. 고쳐주셨습니다. 부르신 제자들에게 이것을 직접 경험하고 체험하게 하셨습니다. 인생의 의미와 목적과 길을 알지 못하던 갈릴리의 젊은이들을 제자로 부르시고, 먹고 살기 위한 인생이 아니라 사람을 세우는 인생의 방향을 제시해 주셨습니다. 그들의 일생은 놀랍게 변화되었습니다. 가르치시며 전파하시며 고치시는 예수님의 모든 것을 배우고 체험하고 자신들의 능력으로 채웠습니다. 위대한 제자의 인생을 살았습니다. 예수님의 3대 사역을 경험하고 목도하고 배우고 체험하는 삶을 3년간 했습니다. 이 것이 처음 부르신 부름의 응답입니다.
3. 오늘 본문에는 나오지 않지만 처음 부르심과 관계가 깊은 나중 갈릴리의 부름입니다. 나중에 나를 따르라고 하신 소명의 의미와 내용입니다. 나중의 부르심은 요21;15-25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처음의 부르심과 나중의 부르심을 동시에 나타내는 주님의 말씀은 4 복음서 중에 요한복음에서만 등장을 합니다. 물론 구체적인 마지막 예수님의 위임명령은 각 복음서에 다 나옵니다만 처음처럼 부활 이후에 나를 따르라고 하는 주님의 부르심과 소명은 요한복음에만 나옵니다. 요21;18-19에 베드로에게 나를 따르라고 합니다. 여러분, 뚜렷한 목적과 목표가 없을 때, 그 같은 행보를 가리켜 방랑과 방황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방황의 시간이 길고 방랑의 거리가 멀수록 그 삶은 지치고 고달프게 됩니다. 왜냐하면 목적과 목표를 상실한 삶 속에서는 생의 참된 의미를 찾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의미 없는 삶의 반복은 생의 고갈이고 고통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사람은 분명한 목적과 목표를 지니고 있어야 합니다. 분명한 목표를 향한 삶만이 하루하루가 생의 보람으로 축적됩니다. 그러나 뚜렷한 목표를 갖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뚜렷하되 바른 목표를 세우는 것입니다. 목표가 바르지 못할 때 보람을 느낄 수는 있으나, 그것은 자신과 자신 주위 사람으로 귀결이 됩니다. 여러분, 부정한 일 위에 세워진 인생 목표는 분명하기는 하지만 바른 목표는 아닙니다. 그릇된 목표입니다. 그릇된 목표는 자신의 삶과 공동체를 파멸시킵니다. 그런데 문제가 되면, 어떻게 우리만의 일이냐고, 다른 사람도 다 그렇지 않느냐고, 억울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참됨과 그릇됨은 다수결에 의해 판가름이 아닙니다. 참됨과 그릇됨은 절대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릇됨은 흥하는 것 같으나 그 자체로 소멸되고, 참됨은 연한 순처럼 이지러질 것 같으나 필경은 굳게 영글게 됩니다. 따라서 삶이 참된 의미와 보람을 갖기 위해서는 분명할 뿐만 아니라 바른 목표이어야 합니다. 그 이유는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그리스도인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3년간 이런 경험 속에서 인생의 목표는 세웠고, 그 목표가 분명한데, 그러나 그 내용에 있어서 바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다시 갈릴리를 찾아 오셔서 다시 한 번 부르시고 다시 한 번 소명을 주고 다시 한 번 나를 따르라고 합니다. 제자들이 밤이 맞도록 공허하게 그물을 던졌던 갈릴리 바다, 그러나 새벽이 동터 오는 그 바닷가에서, 주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주님을 사랑한다 함은 주님의 양들을 구별 없이 치고 먹이는 구체적인 삶이어야 함을 또 다시 처음처럼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 그와 같은 삶은 원치 않는 때에 원치 않는 장소에서 원치 않는 방법으로 느닷없이 찾아오게 될 죽음과 죽음의 의미를 직시하며 살아가는 사람에게만 가능함과, 그런 사람의 삶과 죽음이 하나님께 영광 일수 있음을 깨우쳐 주셨습니다. 그런 연후에 주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3 년 전 갈릴리 바닷가에서 고기 잡던 베드로가 처음 주님을 뵙던 날, 주님께서 그날도 베드로에게 주님을 따라올 것을 명하셨습니다. 그 순간부터 베드로는 배와 그물은 물론이고, 가정까지 버려둔 채 3년 동안이나 밤낮으로 주님을 따라다녔습니다. 그런데도 3년이나 지난 지금 왜 주님께서는 또 다시 나를 따르라고 새삼스럽게 명령을 하실까요? 베드로가 지난 3년 동안 주님과 동행했던 이유는 처음의 부르심을 온전하게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일부분은 베드로의 욕망이었습니다. 자신의 두 눈으로 직접 확인했던 주님의 능력을 이용하여 자신의 욕망을 이루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서 지난 3년 동안 베드로의 몸은 비록 주님을 따라 다녔고, 가르침을 받고, 복음을 전파하고 치유를 배우고 경험했지만 베드로의 마음은 주님을 이리저리 멋대로 끌고 다니려 했습니다. 그 결과 자신의 생각과 상반되는 말씀을 하시는 예수님을 가로막았습니다. 마16:22, 베드로가 예수를 붙잡고 간하여 가로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일이 결코 주님께 미치지 아니 하리이다. 그 뿐이 아닙니다. 예수님 앞에서 누가 더 높은지를 놓고 제자들과 버릇없이 다툽니다. 눅22:24, 또 저희 사이에 그 중에 누가 크냐? 하는 다툼이 일어난지라. 또 예수님을 면전에서 세 번씩이나 부인하고 저주하였을 뿐만 아니라, 이 전날 밤에도 주님의 명령을 무시하고 밤새도록 그물을 던졌습니다만 아무 것도 얻지 못했습니다. 이런 내용은 주님께서 가르치시고 복음을 전파하고 치유를 하면서 배우고 경험했던 내용이 아닙니다. 주님에 대하여 스스로 주인이고, 선생으로 착각한 어이없는 일입니다. 지난 3년간 베드로의 몸이 주님을 따라 다녔지만 그 삶이 참될 수도, 진실 될 수도 없었던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모든 사실을 잘 알고 계시는 주님께서 복음서의 마지막 장 마지막 단락에서 다시 베드로에게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그냥 나를 따르라고 만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요21;18절에 네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고 말씀하신 이후에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두 팔을 벌리고 온 중심으로 주님을 따르라는 의미입니다. 그 중심이 진리이신 주님을 따를 때에 그 삶이 진리 안에서 참되고 바르게 가꾸어집니다. 그런데 여러분, 주님의 이 명령에 대한 베드로의 반응이 어떠합니까? 요21;20-21절에 베드로가 돌이켜 예수의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따르는 것을 보니 그는 만찬 석에서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주여 주를 파는 자가 누구 오니이까? 묻던 자러라. 이에 베드로가 그를 보고 예수께 여짜오되 주여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삽나이까?' 베드로의 오불관언이 아닙니다. 베드로의 수수방관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사랑하시는 제자는 사도 요한입니다. 주님으로부터 나를 따르라는 명령을 받은 베드로는 주님께 대답을 하는 대신 뒤를 돌아다보았습니다. 오불관언이 아니고 수수방관이 아닙니다. 관심을 가지고 개입합니다. 동료 요한을 발견보고 주님을 향하여 도리어 질문을 던졌습니다. 주여,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사람은 이렇습니다. 저 사람은? 저 사람도? 그런 사람인데, 나는? 그 순간에도 비교를 합니다. 왜요? 빠져나가기 위해서요. 여러분, 이런 동화 노래가 있습니다. 동그라미 그리려다 무심코 그린 얼굴 내 마음 따라 피어나던 하얀 그때 꿈을 풀잎에 연 이슬처럼 빛나던 눈동자 동그랗게, 동그랗게 맴돌다 가는 얼굴, 얼굴이란 노래의 가사입니다. 윤 연선이 1975년에 부른 노래입니다. 동그라미 그리려다 무심코 그린 얼굴. 여러분, 무슨 말입니까? 그 사람의 마음의 진실을 나타내는 것이죠!!!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그리고, 무엇을 마음에 두었는지? 그 사람의 진실을 말해 주는 것 아닙니까? 베드로가 지금 그렇습니다. 베드로의 진심과 마음이 드러나고 생각이 드러납니다. 다시 세우고 다시 부르고 다시 은혜를 베푸시는 그 순간에도 무심코 얼굴을 그립니다. 그러면 베드로의 진심이 무엇일까요? 이 질문은 왜 저에게만 따르라 명령하십니까? 왜 요한에게는 두 팔을 벌려 온 중심으로 주님을 따르라 명령하지 않으십니까? 보십시오, 온 세상 사람들이 다 하나님을 믿는다면서도 적당히 살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21;22절은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더라. 베드로의 진심에 나타난 베드로의 항변에 대한 주님의 답변은 주님께서 요한에게 무엇을 어떻게 하시든지 그것은 베드로와 상관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베드로가 온 중심으로 주님을 따라야 하는 것은 상대적이 아니라 절대적입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이 주님께 등을 돌린다 할지라도 너는 절대적으로 진리 되신 주님만을 따르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진리의 절대성은 상대화될 수 없습니다. 주님은 처음이나, 3년 동안이나, 그리고 지금도 부르시고 소명을 주시고, 은혜를 베푸시고, 능력을 주십니다. 바뀐 적이 없고, 떠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본심이 드러나고 얼굴을 그린 베드로 이었지만 오늘 요한복음 마지막장, 마지막 단락 이후에 베드로가 어떤 삶을 살게 됩니까? 앉은뱅이로 태어나 마흔 살이 되기까지 예루살렘 성전 미문에서 구걸하던 거지가 베드로에 의해 주님의 이름으로 치유 받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많은 사람들이 베드로가 전하는 복음에 귀를 기우립니다. 3000명, 5000명, 허다한 무리가 주께로 돌아옵니다. 그러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던 대제사장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이 다시는 예수의 이름으로 그 어떤 일도 행치 말 것을 엄하게 명했습니다. 만일 어길 경우 생명이 온전치 못할 것이라 위협했습니다. 다수결 원칙에 따르면 사도는 대제사장 측의 명령을 따라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그들의 명령을 행4;19-20에,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니. 사도행전의 시작과 동시에 이미 베드로는 진리이신 주님을 절대적으로 믿었습니다. 그래서 사도행전의 서막을 여는 주역이 됩니다. 베드로는 베드로전서 2;19-21절에 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오직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자신의 참 고백입니다. 절대적으로 따르는 것 때문에 고난을 당한다 할지라도, 조금도 개의치 않는 반석과도 같은 베드로의 모습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한 가지 베드로의 이야기를 더합니다. 정경인 성경 66권에는 없지만 복음과 관련하여 중요한 문서들을 따로 엮어서 외경이라고 분류해 놓았습니다, 보통 카토릭에서 사용을 합니다. 그 외경 속에 베드로행전이 있습니다. 베드로의 말년의 모습을 전해줍니다. 폭군 네로의 기독교 대 박해가 시작되었을 때, 베드로 역시 로마에 있었습니다. 로마정부가 베드로를 색출하는데 혈안이 되어 있을 때에 많은 사람들이 베드로에게 로마를 떠날 것을 권합니다. 베드로는 동료와 사람들의 권유를 받아들여 변장을 한 뒤에 도주를 합니다. 그런데 베드로 행전 35장이 그때의 상황을 `베드로가 성문에 다다랐을 때에 베드로는 주님께서 로마로 들어오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베드로가 주님을 향해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대답하셨습니다. 나는 다시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하여 로마로 들어간다. 베드로가 주님께 또 물었습니다. 주여, 주님께서 또 다시 십자가에 못 박히실 작정입니까? 그렇단다. 베드로야, 내가 또 십자가에 못 박힐 수밖에 없구나. 그때 베드로는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요21;18-19절의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다시 소명을 주시는 그 때에도 얼굴을 그렸던 베드로에게 말씀하신 주님의 말씀이 들렸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크게 기뻐하며 주님을 찬미하면서 로마로 되돌아갔습니다. 내가 십자가에 못 박힌다고 말씀하신 주님이 바로 베드로 자신에게 일어나야 할 일임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즉시 베드로는 로마로부터 도망치던 길에서 돌아섰습니다. 죽음의 길임을 알면서도 말입니다. 바로 이 부분에서 영감을 얻은 작가 생케비치가 쓴 소설이 그 유명한 `쿼바디스'입니다. 여러분, 무엇을 말씀해 줍니까? 그 동안 상대적으로 주님을 따랐던 베드로가, 갈릴리 바닷가에서 주님을 절대적으로 따르기 시작한 이래 중년을 거쳐 노년기에 이르기까지 그 삶이 흔들림 없이 지속되었습니다. 모를 때는 어쩔 수 없었지만, 어떤 경우에도 진리는 상대화 할 수 없고 절대적으로 수용해야 됨을 알게 된 베드로의 삶의 목적과 목표는 흔들릴 수가 없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다시 저와 여러분을 부르십니다. 나를 따르라!!! 그 주님의 음성과 부르심의 참다운 의미를 알고 베드로처럼 마지막까지 위대한 삶을 살아가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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