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무공 최진립 묘비
비의 규모 : 4 8 × 1 0 8 × 1 7.6㎝
공의휘(諱)는 진립(震立)이요. 자(字)는 사건(士建)이며, 본관은경주이다. 아버지는 증 참판 신보(臣輔)이다. 정언 황정(黃玎)의 증손녀와 혼인해서 융경(隆慶) 무진년(戊辰年, 1568, 선조 원년)에 공을낳았다. 공의 나이10세에 참판공이 돌아가심에 상을치르는데 예를다하였다.
임진년(壬辰年, 1592, 선조 25)에 왜적이 경주지역에 들어오자 서생(書生)으로서 떨쳐일어나 무리를모아 적을물리쳤다. 갑오년(甲午年, 1594, 선조 27)에는 무과에 합격하였다. 정유년(丁酉年, 1597, 선조 30)에 서생포(西生浦)에서 왜적과 싸우던중 적의 탄환이 배에맞았고, 겨울에 도산(島山)을 공격 할때는탄환이뺨을 꿰뚫었으나 기운은 평소와다름없었다. 을사년(乙巳年, 1605, 선조38)에 선무공신(宣武功臣)에 책훈되어 훈련정(訓鍊正)을 제수받았다.
정미년(丁未年, 1607, 선조 40)에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의 도사(都事)를 지내고, 번진(藩鎭)을 여러번 맡으니 성읍(城邑)이 모두 깨끗해지고 간소하기가 씻은듯하였다. 경오년(庚午年, 1630, 인조 8년)에 공조참판에 발탁되었고, 병자년(丙子年, 1636, 인조 14)에는 공주 영장(營將)으로 옮겨갔다.
그때에 북적(北賊, 청나라)이 급하게 쳐내려와 임금의 가마가 남한산성으로행차하였다. 공은늙은몸으로서 군사를 거느리고 분연히 말하기를, “늙어서 장수를 맡지못한다면 능히죽음은맡을수있다”하고는 말을 달려 용인검천(儉川)에이르렀다. 적의 철갑기병이 풍우와 같았으나공은 나무를심어놓은듯 움직이지않았고, 활을쏘면 반드시 적을쓰러뜨렸다.
화살이다하여죽으니, 죽을때도제자리를 한치도 떠나지않았고 얼굴은 살아있는듯 하였다. 이사실이 알려져 증작(贈爵)하여 시호를 내리고청백리(淸白吏) 정려문을세웠다. 숙종조에는 사우(祠宇)에 숭렬(崇烈)이라는편액(扁額)을 하사하였다.
오호라! 하늘이국가를바르게다스려지게하는것은 지극하다.
국가에어려움이 있으면 반드시 인재를 내어 감당하게하니,
당시에는 인재를 활용하지못했다가 이때에 죽음으로써 삼강오륜(三綱五倫)의 소중함을 다하게했던 것이다.
공이평소에 쌓아올린것으로본다면 검천에서 죽은것은 때가늦은 것이다.
서생포에서 탄환을 맞아 한번죽었고, 도산에서 탄환을맞아 두번죽은것이다.
두번죽어서도 죽지 않은것은 세번째 죽어도 진실로 죽지않은것이 있게하려는 것이니, 오호 곧 도다!
언양 오지동(烏池洞) 묘향(卯向)에 장례하였다. 정부인 유씨(柳氏)는 공보다 먼저 죽어 경주부 북쪽 난원당(蘭原堂)에 장례하였다.
다섯아들을낳았으니, 동윤(東尹)은 사복시정(司僕寺正)이요, 동설(東說)은 통덕랑(通德郞)이요, 동량(東亮)은 현감(縣監)이요,
동길(東吉)은 승사랑(承仕郞)이요, 동경(東璟)은 승의랑(承議郞)이다.
명(銘)하여 가로되,
“이곳은 정무공의 의로운 혼백이 흙으로 돌아간곳이다.
정기가 산하로돌아갔으니 정기가 없는곳이없구나”하였으니 예조참판 오광운(吳光運)이 찬술하였다.
공의 증손 적기(迪基)가 오광운의 명(銘)을 얻어 걸려하다가 그의 글이 긴것을걱정해서 내게 줄여달라고부탁하였다.
내가 근심스럽게말하기를,
“정무공의 한몸은 모두 의(義)여서, 살아서는 청백(淸白)이요.
죽어서는 충렬(忠烈)이 온우주에 쌓였으니, 명(銘)을새기더라도 업적이 크거나 작아지지않는다.
하물며 묘지(墓誌)는 무덤에 묻었고 신도비(神道碑)는 사당에 걸었고, 실기(實紀)도 새겼으니, 묘갈이없더라도 무엇을 더 기다리겠느냐. 그러나 반드시 묘갈명을 새겨야한다면 이름만 적는 것으로 족할것이다. 어찌 대신해서 새길것인가”하였다.
적기가이르기를,
“관직(官職)과 포전(褒典)은 고칠수 없지만 문장만은 줄여달라”하기에내가사양하지못하고 손을씻고 붓을들었다.
이조정랑 정중기가 짓고, 홍문관교리 강박이쓰다.
갑신년(1764, 영조 40) 동짓달, 13일 현손, 경두. 종겸. 영보. 세움
울주군 언양읍반연리에있다.
-----------------------------------------------------------------------------------------------------------------------------------------------有明朝鮮國故忠臣贈兵曹判書貞武公崔先生之墓
公諱震立字士建慶州人考贈參判臣輔娶正言黃玎曾孫女以隆慶戊辰生公十歲持參判公喪盡禮壬辰倭迫州境起書生募衆膊之甲午登虎榜丁酉斫賊西生浦丸中臍冬擊島山倭丸洞頰氣楊楊如昔戊辰錄宣武功拜訓鍊正丁未由都摠都事歷典藩鎭城邑皆淸簡�如洗庚午擢工曹參判丙子遷公州營將時北賊急上駕次南漢公以老斥於帥奮曰老不任將能任死耳躍馬至龍仁儉川鐵騎如風雨公植立不動射必 賊矢盡而死死不離尺寸面如生事聞贈爵諡錄淸白旌門肅廟賜祠額崇烈嗚呼天之爲國家世道也至矣國家將有難必生是人而當之旣而國家不能盡其用於是使之 死以增夫倫綱之重若以公之素蓄積其死於儉川亦晩矣西生浦之丸公一死之矣島山之丸公再死之矣再死之不死 若將以有爲也三死之而眞不死者存嗚呼烈哉 葬彦陽烏池洞卯向貞夫人柳氏先公卒葬州北蘭原堂生五男東尹司僕寺正東說通德東亮縣監東吉承仕東璟承議銘曰 斯乃貞武公 毅魄之復于土者 若精氣則爲山爲河 無不在也 禮曹參判吳光運撰公曾孫�基得吳台銘 將揭之 患文多屬余改�余蹙然曰 貞武公一腔子都是義生淸白死忠烈磊磊亘宇宙 銘不足重輕 況誌者壙 神道碑揭祠實紀書又��廣布碣雖無奚待耶曼無知然必碣也延陵篆足矣何代�爲迪基謂官級褒典不可闡固要刪其文辭不獲遂�手筆削焉吏曹正郞鄭重器識弘文館校理姜樸書
崇禎三甲申至月十三日玄孫慶斗宗謙瑛瑨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