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儒學思想 및 傳統思想을 硏究, 承繼, 普及하고
現代化, 生活化하여 先賢의 崇高한 理念을 오늘에 되살리며
道德社會를 具現하는 靑壯年들의
2016年 3月
密陽地域 先賢 遺蹟 踏尋
글 배종찬
2016年 3月 27日
社團法人 博 約 會
大邱廣域市支會 靑壯年委員會
3月 密陽地域 先賢 遺蹟地 踏尋 日程
예정시간 |
답심지 |
주소 |
08:00 |
황금동 어린이 대공원 앞 집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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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30 |
惠山書院, 格齋 孫肇瑞 神道碑 |
산외면 다원1리길 17-18(다죽리 607) |
10:00 |
月淵亭 |
용평로 330-7(용평동 2-1) |
今是堂 |
활설동 582-1 | |
11:00 |
嶺南樓(조선 3대 누각) - 天眞宮, 阿娘祠, 石花 |
중앙로 324(내일동 40) |
12:00 |
점심식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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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30 |
退老里 驪州李氏 世居地 |
부북면 퇴로리 309 |
14:00 ~15:00 |
追遠齋, 佔畢齋 墓所, 호랑이묘 |
부북면 추원재길 58(제대리 701) |
禮林書院, 松溪 申季誠 閭表碑 |
부북면 예림서원로 128 (후사포리 179) | |
15:30 |
追遠齋(載寧 李氏 司宰令公 齋室) 慶德祠(載寧 李氏 始祖 李禹偁 祠堂) |
상남면 조음리 821-3(조음 2길 49) |
16:30~ (시간에 따라 답심지 조정) |
卞季良 碑閣 |
초동면 신호리 204-2 |
五峯書院 |
초동면 오방길 9-12 | |
魚變堂 |
무안면 연상리 394 | |
表忠碑와 弘濟寺, 무안리 향나무 |
무안면 무안리 903-2 | |
密陽官衙址, 七灘書院, 盤溪亭, 博淵亭, 表忠寺 表忠書院, 聚遠堂 曺光益 後孫 世居地 등 | ||
19:00 |
어린이 대공원 도착 |
식사 후 귀가 |
밀양시청 문화관광과 055-359-5632 밀양시 문화관광 안내 055-359-5646
3月 密陽 踏尋資料集 目次
3月 密陽地域 先賢 遺蹟地 踏尋 日程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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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月 密陽 踏尋資料集 目次 --------------------------------- |
3 | ||
密陽의 人物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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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春亭 卞季良 --------------------------------------- |
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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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
佔畢齋 金宗直 ------------------------------------- |
4 |
3. |
格齋 孫肇瑞 --------------------------------------- |
5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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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
慕堂 孫處訥 --------------------------------------- |
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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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
四溟堂 惟政 --------------------------------------- |
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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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
若山 金元鳳 --------------------------------------- |
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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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
尹世胄 ------------------------------------------- |
8 |
密陽의 主要 遺蹟 --------------------------------------- |
10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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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惠山書院 ------------------------------------------ |
10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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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月淵亭 ------------------------------------------- |
10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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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今是堂 ------------------------------------------- |
10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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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嶺南樓, 石花 -------------------------------------- |
1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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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退老里 驪州李氏 世居地 ------------------------------- |
12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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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追遠齋, 佔畢齋 墓所, 호랑이묘 -------------------------- |
12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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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禮林書院,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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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松溪 申季誠 閭表碑 ---------------------------------- |
13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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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追遠齋(載寧 李氏 司宰令公 齋室) ------------------------ |
13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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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慶德祠(載寧 李氏 始祖 李禹偁 祠堂) ----------------------- |
1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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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卞季良 碑閣 --------------------------------------- |
15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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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五峯書院 ----------------------------------------- |
15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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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魚變堂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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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表忠碑와 弘濟寺, 무안리 향나무 ------------------------- |
15 | |
‣ 무안리 향나무 -------------------------------------- |
16 | ||
‣ 表忠書院 ----------------------------------------- |
16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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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密陽 三浪津 後曹倉 遺址 -------------------------------- |
17 | |
‣ 密陽鄕校 ------------------------------------------ |
17 | ||
‣ 密陽 官衙址 ---------------------------------------- |
17 | ||
‣ 鵲院關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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密陽의 人物
1. 춘정 변계량(春亭 卞季良)
밀양인. 자는 거경(巨卿), 호는 춘정(春亭). 고려 우왕 11년에 17세로 등제하여 전교서(典校暑) 주박(主薄), 진덕박사(進德博士)를 역임하였다. 조선개국 후에 칭병(稱病) 불사(不仕)하다가 태조 5년(1396년)에 비로소 교서감승(校書監丞) 지제교(知製敎)로 나아갔다. 태종 8년(1408년)에 문관들을 친시(親試)하였는데 공이 장원으로 뽑혀 예조우참의(禮曹右參議) 겸 수문전직제학(修文殿直提學) 지제교(知製敎)로 특배되었다. 동 17년에 예문관 대제학 겸 대사성으로 숭배되고 다음해에는 우보객(右寶客)을 겸하고 다시 예조판서 겸 지경연춘추관사(知經筵春秋館事)로 옮겨졌다.세종때 집현전을 세우자 동 2년에 공이 그 대제학을 겸하게 되었으며 동 8년에 판우군도총제부사(判右軍都摠制府事) 겸 세자이사(世子貳師)로 승배되었다. 공(公)은 어려서부터 총명이 뛰어나고 호학불권(好學不倦)하였으며 정포은(鄭圃隱), 권양촌(權陽村)의 제문에서 수학하여 성리학에도 조예가 깊었다. 20여년간 대제학으로서 국초의 전장(典章) 문물(文物)에 공헌이 많았고, 중국과의 외교사명(外交辭命)을 전담하였다. 세종때 중국에 대한 금, 은의 세공을 영제(永除)케 된것도 공의 제진(製進)한 문자에 말미암은 바 컸다. 여러 차례 대, 소 과거의 고시관을 맡아 한결같이 지공 엄정하게 사류를 선발함으로써 고려 말기의 문란했던 과거제도를 이때 바로잡게 되었다. 공은 마음가짐이 견확(堅確)하여 강한 자를 두려워하지 않고 도량이 넓어 소절(小節)에 구애되지 않았으며, 흥학(興學), 천현(薦賢)으로써 자신의 임무를 삼았으니, 국초의 명사들이 공의 문에서 많이배출되었다. 유저로 [춘정집(春亭集)]이 널리 유포되어 있다
2. 점필재 김종직(佔畢齋 金宗直)
1431년(세종13)~1492년(성종23), 조선 세종때의 성리학자. 자는 계온 또는 효관. 호는 점필재. 벼슬은 형조판서를 지냈으며 본관은 선산. 시호는 문간, 문충. 밀양출신. 조선 세종 13년 6월 경자일 갑자시에 밀양부의 서쪽 대동리에서 태어났다. 지금의 부북면 제대리 추원재가 선생의 생가인데 그 뒤에 재사로 개조 중건한 것이다. 사예 김숙자 선생의 43세때 3남2녀의 막내로 태어났다. 선생이 태어나실 때 마을앞 냇물이 역류하고, 물맛이 달콤하게 변하여 감천이라 부르게 되었다. 1489년(성종20) 59세 때 자헌대부 형조판서 겸 지경연 홍문관제학 성균관사를 공정하게 처결하니 조정이 감복하였다. 가을에 병으로 사임코자하니 지중추부사로 자리를 옮겨 주었다. 성종의 은총이 심히 두터우니 시기하는 무리들이 많은지라 동래 온천에 목욕간다는 허락을 얻어 고향인 밀양으로 돌아왔다. 임금이 특별히 사관을 보내어 녹을 받으라 하였으나 재삼 사양하였다. 1520년(중종15) 원래 선생의 문집 초본이 20여군인데 연산군이 모두 불태우게 하였으나 이웃사람들이 불길 속에서 1~2권을 끄집어 낸것을 선생의 조카 강중진이 보관하고 있다가 무오사화가 지난 22년만인 이해에 여러 읍의 수령들이 모의하여 비로소 출판하게 되었다. 선생의 저서로는 총재관으로 동국여지승람 55권을 증수한데 이어 많은 시집과 점필재집, 이존록, 유두유록, 청구풍하, 오경석의, 동문수, 일선지, 당후일기, 경사도지, 선산지도 등이 있다. 선생이 살던 고향과 도학을 강론하던 곳에 사당을 세우고 봄, 가을로 관에서 제사를 지내도록 예조에서 보고하니 임금께서 윤허하사, 금산 경렴서원, 밀양 예림서원, 선산 금오서원, 함양 백연서원, 개령 덕림서원에 제향을 올리게 되었다. 그 뒤에 창건된 것으로 화순 해망서원, 고창 운곡서원에서도 위패를 모시게 되었다. 1866년(고종3) 가곡 도연재를 창건하였다. 선생을 위하여 향토(고령군)유림에서 계를 만들어 지은 것이다. 세상에 전해오기를 한훤당, 일두는 이학을 얻고, 매계, 탁영은 문장을 얻었으며, 허암 정희량은 수학을 얻고 이종준은 의서를 다하고, 박문은 시학을 얻고, 남효온, 홍유손은 처사의 흐름을 배웠으니 우리 동방에 300년간 심어 끼쳐온 공은 모두 선생으로 비롯하였다 한다.
경상남도 밀양 출신. 본관은 선산(善山). 자는 효관(孝盥)·계온(季昷), 호는 점필재(佔畢齋). 아버지는 사예숙자(叔滋)이고, 어머니는 밀양 박씨로 사재감정(司宰監正)홍신(弘信)의 딸이다.
정몽주와 길재의 학통을 계승하여 김굉필-조광조로 이어지는 조선시대 도학 정통의 중추적 역할을 하였다. 생전에 지은 「조의제문(弔義帝文)」은 무오사화가 일어나는 원인이 되었다.
3. 격재 손조서(格齋 孫肇瑞)
본관은 일직(一直). 자는 인보(引甫), 호는 면재(勉齋)·격재(格齋). 득수(得壽)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영유(永裕)이고, 아버지는 감찰을 지낸 관(寬)이며, 어머니는 김흡(金翕)의 딸이다. 학문과 시문의 대가로서 김종직(金宗直)과 친교가 있었고, 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 등의 제자를 두었다. 1432년(세종 14) 사마시에 합격하여 생원이 되고, 1435년(세종 17) 식년문과에 동진사(同進士)로 급제하였다. 그 해 예문관검열을 거쳐 집현전에 보직되었으며, 지봉산군사(知鳳山郡事)가 되었다.
1451년(문종 1)에 병조정랑을 지냈다. 1456년(세조 2)에 단종의 복위를 꾀하던 성삼문(成三問) 등이 살해되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 은둔, 호조참의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대구의 청호서원(靑湖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격재집(格齋集)』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손조서 [孫肇瑞]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4. 모당 손처눌(慕堂 孫處訥)
임진왜란에 창의한 학자. 호는 모당(慕堂). 휘는 처눌(處訥). 본관은 안동(安東). 격재(格齋) 손조서(孫肇瑞)의 6대손. 한강(寒岡) 정구(鄭逑)의 문인으로 50여년간 적통(嫡統)으로 이학(理學)을 모두 전수하였다. 임진왜란을 만나 대구 팔공산창의회맹(八公山倡義會盟)에서 의병장으로 추대되어 팔조현(八助峴)에서 적을 달성(達城) 아래까지 크게 쳐부수니 조유사(詔諭使) 김학봉(金鶴峰)선생이 "참된 의병장" 이라 높이 추중하였으며 그 뒤 인조 갑자년(1624)에 이괄섭(李适燮)과 함께 정묘호란에도 의병장으로 활약하여 많은 공적을 쌓았으나 모든 공훈은 관군에게 돌리고, 황폐해진 향교를 재건하였으며 살던 영모당(永慕堂)에서 문회(文會)를 크게 베풀고 학문을 일으키니 한때 이름높은 학자들이 선생의 문하에서 많이 배출되었다. 광해 경술년(1610)에 정인홍(鄭仁弘)이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퇴계(退溪) 이황(李滉) 두 선생을 문묘에 제사 지내게한 왕명에 대하여 저해함을 보고, 선생은 전국 유림을 대표하여 부정척사문(扶正斥邪文)을 지어 사림(士林)에 통고하는 한편 상소문을 올렸다. 그 중에 있는 "용군암주(庸君暗主)"라는 네글자로서 선생을 벌주기를 청하는 무리들이 있어 화가 몸에 미칠듯 하였으나 선생은 "옳지 못한 것은 하늘이 알 일"이라 하며 태연하였다. 숙종 갑술년(1694)에 사림(士林)에서 청호서원(靑湖書院)을 창건하였는데, 그 천장(薦狀)에 이르기를 "옛 글을 많이 읽고, 무리들을 모아 가르쳤으며, 사악한 말을 끊고 배척하여, 바른 맥(正脈)을 심었다"고 하였다. 저서로는 한강예설중찬(寒岡禮說重纂), 가례의절전서(家禮儀節傳書) 및 문집 3권이 있다. 서산서원(西山書院)과 대구 청호서원(靑湖書院)에서 받들어 오다가 1970년에 밀양 혜산서원(惠山書院)에 복원하였다
5. 사명당 유정(四溟堂 惟政)
본관은 풍천. 속명은 임응규(任應奎). 자는 이환(離幻), 호는 사명당(四溟堂) 또는 송운(松雲), 별호는 종봉(鍾峯). 법명은 유정(惟政). 경상남도 밀양 출신. 아버지는 수성(守成)이다. 임진왜란 때에 승병을 이끌고 전공을 세웠으며, 일본과의 외교 및 부국강병책에 의해 국가에 크게 기여하였다.
7세를 전후하여 『사략』을 배우고 13세 때 황여헌(黃汝獻)에게 『맹자』를 배웠다. 1558년(명종 13) 어머니가 죽고, 1559년 아버지가 죽자 김천 직지사(直指寺)로 출가하여 신묵(信默)의 제자가 되었다. 3년 뒤 승과(僧科)에 합격하자, 박순(朴淳),임제(林悌) 등의 유생들과 사귀었으며, 재상인 노수신(盧守愼)으로부터 『노자』, 『장자』, 『문자』, 『열자』와 시를 배웠다.
그 뒤 직지사의 주지를 지냈으며, 1575년(선조 8) 선종이 선종수사찰(禪宗首寺刹)인 봉은사(奉恩寺)의 주지로 천거하였으나 사양하고, 묘향산 보현사(普賢寺)의 휴정(休靜)을 찾아가서 도를 닦았다. 1578년부터 팔공산·금강산·청량산·태백산 등을 다니면서 선을 닦아, 1586년(선조 19) 옥천산 상동암(上東庵)에서 깨달음을 얻었다.
1589년 정여립(鄭汝立)의 역모사건에 연류되었다는 모함을 받았으나, 강릉의 유생들이 무죄를 항소하여 석방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 때, 유점사(楡岾寺) 인근 아홉 고을의 백성들을 구출하였다.
이 때 조정의 근왕문(勤王文)과 스승 휴정의 격문을 받고 의승병을 모아 순안으로 가서 휴정과 합류하였다. 그곳에서 의승도대장(義僧都大將)이 되어 승병 2,000명을 이끌고 평양성과 중화(中和) 사이의 길을 차단하여 평양성 탈환의 전초 역할을 담당하였다.
1593년 1월 평양성 탈환의 혈전에 참가하여 혁혁한 전공을 세웠고, 그 해 3월서울 근교의 삼각산 노원평(蘆原坪) 및 우관동 전투에서도 크게 전공을 세우자, 선조는 선교양종판사(禪敎兩宗判事)를 제수하였다.
그 뒤 전후 네 차례에 걸쳐 대표로 나아가 적진에서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와 회담을 가졌다. 제1차 회담(1594년 4월 13∼16일)·제2차 회담(1594년 7월 12∼16일)·제3차 회담(1594년 12월 23일)·제4차 회담(1597년 3월 18일)에서, 강화5조약으로 제시된 ‘천자와 결혼할 것, 조선 4도를 일본에 할양할 것, 전과 같이 교린 할 것, 왕자 1명을 일본에 영주하게 할 것, 조선의 대신·대관을 일본에 볼모로 보낼 것’ 등을 하나하나 논리적인 담판으로 물리쳤다.
제2차 회담 후, 선조에게 회담의 전말과 적의 동정 및 대처 방안을 내용으로 하는 「토적보민사소(討賊保民事疏)」를 올렸는데, 국민을 총동원하여 빈틈없는 작전을 세울 것, 적과 교린(交隣)하여 백성을 편안하게 하고 농업을 장려하는 동시에 민력(民力)을 무장할 것, 군수 무기를 준비할 것 등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
또한, 1595년에 올린 을미상소의 주요 내용은, 탐관오리들을 소탕할 것, 국세 회복을 위해 방어책을 세울 것, 인물 본위로 등용할 것, 군정(軍政)과 중농정책을 확립할 것, 산성을 수축하고 군량·마초·방어무기를 준비할 것, 승려도 국가 수비의 일익을 담당하게 할 것 등이다.
그가 수축한 산성은 팔공산성(八公山城)·금오산성(金烏山城)·용기산성(龍起山城)·악견산성(岳堅山城)·이숭산성(李崇山城, 또는 美崇山城)·부산성(釜山城) 및 남한산성 등이다. 군기 제조에도 힘을 기울여 활촉 등의 무기를 만들었고, 투항한 왜군 조총병을 비변사에 인도하여 화약 제조법과 조총 사용법을 가르치도록 하였다.
또한, 1594년 의령에 주둔하였을 때 군량을 모으기 위하여 각 사찰의 전답에 봄보리를 심도록 하였고, 산성 주위를 개간하여 정유재란이 끝날 때까지 군량미 4,000여 석을 비장하였다. 선조는 그의 공로를 인정하여 가선대부동지중추부사(嘉善大夫同知中樞府事)의 벼슬을 내렸다.
1604년 휴정의 부음을 받고 가던 중, 선조의 명으로 일본에 가서 성공적인 외교성과를 거두었고, 전란 때 잡혀간 3,000여 명의 동포를 데리고 1605년 4월에 귀국하였다. 같은 해 10월에 묘향산으로 들어가 휴정의 영전에 절하였다.
그 뒤 병을 얻어 해인사에서 요양하다가 1610년 8월 26일 설법하고 결가부좌한 채 입적하였다. 저서로는 문집인 『사명당대사집』 7권과 『분충서난록(奮忠紓難錄)』 1권 등이 있다.
제자들이 다비하여 홍제암(弘濟庵) 옆에 부도와 비를 세웠다. 밀양의 표충사(表忠祠), 묘향산의 수충사(酬忠祠)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자통홍제존자(慈通弘濟尊者)이다. 1997년 사명당기념사업회가 발족하여 학술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유정 [惟政]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6 약산 김원봉(若山 金元鳳)
호는 약산(若山)이다. 진국빈(陳國斌)·김한봉(金漢鳳)·최림(崔林)·이충(李冲)·천세덕(千世德) 등의 이름도 사용하였다. 서당에서 한문을 배운 다음 밀양공립보통학교·동화학교·서울의 중앙학교에서 공부하였다. 중국으로 망명하여 천진(天津)의 덕화학당(德華學堂), 남경(南京)의 금릉대학(金陵大學)에서 수학하였다. 1919년 11월 10일 길림에서 윤세주·한봉근·한봉인·김상윤 등 13명과 의열단(義烈團)을 조직하고 의백(義伯)에 추대되었다.
의열단 활동 중 밝혀진 것만 보더라도, 곽재기·이성우 등의 폭탄 밀양반입 의거(1920. 3~6), 박재혁의 부산경찰서 폭탄투척 의거(1920. 9), 최수봉의 밀양경찰서 폭탄투척 의거(1920. 12), 김익상의 종로경찰서 폭탄투척 의거(1921. 9), 김익상·이종암·오성륜의 타나카 기이치 일본육군대장 저격 의거(1922. 3), 김시현·남정각·유석현 등의 폭탄 국내 반입 의거(1923. 3), 김지섭의 동경 니주바시(이중교 二重橋)폭파의거(1924. 1), 구여순·오세덕 등의 국내폭동 의거(1924. 1), 일제밀정 김달하처단 의거(1925. 3), 고인덕·이종암·배중세 등의 '경북 의열단 의거'(1925. 11) 나석주의 동양척식주식회사·조선식산은행폭파 의거(1926. 12)를 꼽을 수 있다.
이 같은 의열단의 의열투쟁은 단장인 김원봉의 인간미와 헌신적인 리더십에서 우러나왔다. “김원봉은 굉장한 정열의 소유자였습니다. 동지들에 대해서도 굉장히 뜨거운 사람이었지요. 그는 자기가 만난 사람을 설복시키고 설득시켜 자기 동지로 만들겠다고 결심하면 며칠을 두고 싸워서라도 모든 정열을 쏟아서 뜻을 이뤘지요”라는 어느 독립운동가의 회상이나, “부하를 위해 재산을 능히 바치고도 아까와 하지 않고,” “때로 부하의 궁핍을 들으면, 자기가 입은 옷을 전당잡히는” 도량의 소유자였다는 일제기관의 평가가 이를 뒷받침한다.
1924년 1월의 중국 제1차 국공합작(國共合作) 성립 등을 배경으로, 의열단의 항일투쟁노선을 재점검하고, 전민족을 항일투쟁의 주도세력으로 이끌어 갈 독립운동의 간부를 양성하는 일이 시급함을 깨닫고, 황포군관학교(黃埔軍官學校)에 입교하여 근대적인 정치군사교육을 이수하고, 제4기로 졸업한 다음 중국군 장교로 임관하였다.
이후 광주(廣州)지역을 무대로 유월한국혁명동지회(留粤韓國革命同志會)를 조직하여, 한인독립운동세력의 협동과 단결을 위해 고심하였다. 그리고 중국 국공합작의 파국(1927. 4)→남창봉기(南昌蜂起, 1927. 8)→광주봉기(廣州蜂起, 1927. 12)로 이어지는 중국근대사를 체험하면서 그의 독립운동관과 혁명관은 한층 심화되었다.
1927년 북경(北京)에서 안광천과 제휴하여 레닌주의정치학교를 개설하고 청년간부를 양성하였고, 조선공산당재건동맹 결성에도 참여하였다. 1931년 만주사변이 일어나자, 남경으로 옮겨 의열단을 재정비하였다. 그리고는 1932년 11월 이래 한인독립운동세력의 협동·단결운동의 일환으로써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韓國對日戰線統一同盟) 결성 작업을 주도했다.
또 중국국민당정부와 제휴하여 1932년 10월이래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朝鮮革命軍事政治幹部學校)를 개설하여 1935년 말까지 세 차례에 걸쳐 120여 명의 ‘청년투사’를 양성하였다. 이들은 후일 조선의용대와 한국광복군의 핵심인물로 성장하였다.
1935년 7월 조선민족혁명당(朝鮮民族革命黨)을 창당하여, 김구와 더불어 중국관내지역을 무대로 한 한인독립운동의 지도자로 부상하였다. 1937년 7월 7일 중일전쟁이 일어난 뒤에는 조선민족혁명당·조선혁명자연맹·조선민족해방동맹 등 민족주의 좌파세력을 규합하여 조선민족전선연맹(朝鮮民族戰線聯盟)을 결성하였다.
또 중국국민당정부와 합작하여 강서성(江西省) 성자현(星子縣)에 있는 중국 육군군관학교 분교에서 한인청년 90여 명에게 정치·군사훈련을 시켜, 이들을 기반으로, 1938년 10월 10일 무한(武漢)에서 조선의용대(朝鮮義勇隊)를 결성하고 대장에 취임하였다.
이후 김원봉은 윤세주와 함께 조선의용대를 이끌고 중국군 ‘6개 전구(戰區), 남북 13개 성 전지(戰地)’를 누비며, 중국항일전쟁의 한 축으로 역할하였다. 1939년 7월에는 김구와 공동명의로 「동지·동포에게 고하는 글」을 발표하여, 한인세력의 통일과 단결을 촉구하였다. 이어서 사천성(四川省) 기강(綦江)에서 개최된 ‘한국혁명운동 통일7단체회의(약칭 ’7당통일회의‘ ) ’에 참가하였다.
1940년11월 조선의용대 확대간부회의에서 조선의용대의 중국화북지역으로의 이동을 결정하였다. 이후 1941년 여름에 이르기까지, 윤세주 등이 이끄는 조선의용대 주력은 황하(黃河)를 건너 화북지역으로 이동하였다. 일본군을 상대로 한 선전ㆍ심리전 등 소극적인 항일활동을 극복하고, 화북지역의 일본군 점령지역으로 가서 적극적으로 일본군과 싸우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조선의용대 본부 병력을 이끌고 중국국민당정부의 수도인 중경(重慶)에 남은 김원봉은 태평양전쟁의 격화, 국제 반파시즘 통일전선체제의 구축 등을 배경으로, 1942년 10월 대한민국임시정부에 합류하였고, 12월에는 한국광복군 부사령 겸 1지대장에 취임하였다. 1944년 5월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 군무부장에 취임하였다.
1945년 12월 2일 임정 국무위원 자격으로 귀국하여, 이후 각 정파의 통일ㆍ단결을 위해 힘썼다. 1946년 2월 민주주의민족전선 결성에 가담하여 공동의장에 추대되었다. 1948년 4월 남북제정당사회단체대표자회의(일명 남북협상)에 참석키 위해 월북하였다. 이후 북한정권에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국가검열상·노동상·최고인민위원회 상임위원회 부위원장 등으로 활동하다가, 1958년 말 숙청된 것으로 전한다
7. 윤세주(尹世胄)
경남 밀양(密陽) 사람이다.
1919년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밀양에서 대규모 시위를 주동하였으며, 독립신문 밀양지국을 운영하다가 일경에 체포되어 징역 1년 6월형을 받고 옥고를 치르고, 출옥 후 만주로 망명하였다.
그는 유하현 고산자(柳河縣孤山子)에서 신흥(新興)학교에 입학하여 군사훈련을 받았다. 1919년 11월 9일에 길림성 파호문(吉林省巴虎門) 밖의 화성여관(華盛旅館)에서 김원봉(金元鳳) 황상규(黃尙奎) 곽재기(郭在驥) 등과 조선독립 의열단(義烈團)을 조직하고 무장항일투쟁을 결의하였다. 그리고 그 제1차 목표로 일제 요인 암살과 총독부, 동양척식회사 등 주요기관을 폭파할 계획을 세우고 같은 해 연말 경 국내에 특파되었다. 그러나 부산과 밀양에 반입된 폭탄과 무기 등이 일경에게 발각되어, 선언문 등과 함께 압수되었으며, 이에 그는 동지들과 같이 체포되었다.
1921년 6월 21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7년형을 받고 다시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그는 민족문화사업에 참가하여 표면적으로는 중외(中外)일보 기자와 경남 주식회사 사장으로 일하다가 1932년 다시 남경(南京)으로 망명하였다. 이곳에서 조선민족혁명당 간부학교를 제1기생으로 수료하고, 정치철학 교관으로 근무하였으며, 1934년 3월에는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을 결성하게 됨에 그 집행위원에 선출되어 독립운동 전선의 통일을 기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또한 1935년 4월에는 낙양(洛陽)군관학교를 졸업한 군사 간부들에게 사회과학을 교육하는 교관으로도 활약하였다. 1936년 8월 민족혁명당이 창립되자 그는 중앙집행위원과 중앙상무위원 등으로 선출되어 독립운동에 앞장섰다. 1938년 10월 한구(漢口)에서 조선의용대(朝鮮義勇隊)가 조직되자, 그는 한문반 주편위원(韓文班主編委員)에 임명되어 기관지 「전고(戰鼓)」를 편찬 발행하였다.
1942년 5월 태항산(太行山)에서 마전반격전(麻田反擊戰)에 참전하였다가 동년 6월에 전사하여 태항산에 안장되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8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密陽의 主要 遺蹟
▶ 혜산서원(惠山書院)
산외면 다죽리 죽서(竹西)마을에 세거(世居)하는 일직(一直) 손씨(孫氏)의 5현(賢)을 받드는 서원으로 본래는 영조 29년(1753년)에 창건한 격재(格齋) 손조서(孫肇瑞 : 1412-?)의 서산서원(西山書院)이 있던 자리이다.
격재는 조선초기 단종의 왕위를 찬탈(簒奪)한 세조의 횡포에 분개하여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와 충의와 탁절(卓節)로서 두문불출(杜門不出)하며 오직 도학에만 전념한 학자인데 후일에 사림(士林)들의 추앙을 받아 이곳에 서원을 세웠으나 고종 5년(1868년) 서원철폐령(書院撤廢令)으로 훼철(毁撤)된후 그 집을 "서산고택(西山古宅)" 또는 철운재(徹雲齋)로 편액(扁額) 하였다.
1971년에 서원의 경역을 확장 정비하고 각지에 분산 봉안되었던 일직 손씨 명현 다섯분의 서원(書院)인 정평공(靖平公) 손홍량(孫洪亮 : 1287-1379)의 안동 타양서원(陀陽書院), 격재(格齋) 손조서(孫肇瑞)의 밀양 서산서원(西山書院), 모당(慕堂), 손처눌(孫處訥:1553-1634)의 대구 청호서원(靑湖書院), 문탄(聞灘) 손린(孫燐:1566-1628)의 대구 봉산서원(鳳山書院), 륜암(綸菴) 손우남(孫宇男 : 1564-1623)의 영천 입암서원(立巖書院)등 을 후손들의 세거지인 이곳으로 옮겨 복설(復設)하고 혜산서원(惠山書院)으로 중건한 것이다.
서원의 규모는 1,300여평의 대지위에 사우(祠宇), 강당(講堂), 동재(東齋), 서재(西齋), 상례문(尙禮門), 신문(神門), 중문(中門), 전사당(典祀堂), 신도비각(神道碑閣), 다원서당(茶院書堂), 이이정(怡怡亭), 고사(庫舍), 대문(大門)등 13동의 건물이 경역에 자리잡고 있다.
▶ 격재 손조서(格齋 孫肇瑞) ⇨ p5 참고
▶ 월연정(月淵亭)
월연정(月淵亭)은 본래 월영사(月影寺)가 있던 곳으로 월영연(月影淵)이라 하였습니다. 이 건물은 한림학사등 여러 요직을 지내다가 기묘사화를 예견하여 벼슬을 버리고 낙향한 월연 이태(月淵 李迨)선생이 중종20년(1520년)에 세운 정사(亭舍)로 처음에는 쌍경당(雙鏡堂)이라 편액(扁額)하였습니다. 그 후 임진왜란때 소실되었던 것을 영조33년(1757년)에 8대손인 월암(月菴) 이지복(李之復)이 쌍경당을 복원하였습니다.
월연정은 가장 좌측인 남쪽에 있으며, 동향을 하고 정면 5칸, 측면 2칸의 5량(樑)구조로 팔작지붕을 한 이익공계(二翼工系) 건물입니다. 가장 북측에 위치하고 제일 높은 언덕에 있는 월연대(月淵臺)는 남동향을 하고 있으며, 월연정 주위에 건립된 제헌(齊軒), 월연대등 모두 풍치 수려한 곳에 무리를 이루어 정자의 기능을 가지며, 놓여진 지형에 맞추어 모두 각기 다른 평면을 지니고 있어 흥미롭습니다.
▶ 금시당(今是堂)
금시당은 조선조 명종 때 좌승지에 올라 文翰과 學行으로 名望이 높았던 금시당 이광진 선생이 후진양성을 위해 건립한 別墅이다. 금시당 이광진(1513~1566)은 1540년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1546년에 별시 문과에 올랐다. 중앙과 지방에서 여러 관직을 지내던 금시당은 1565년에 낙향하였으며, 1566년 수개월의 역사 끝에 柏谷別業인 금시당을 경영하게 되는데, 금시당의 제호는 주인공이 산수와 전원에 낙을 부쳐 여생을 보낸다는 뜻으로 도연명의 귀거래사 내용 중 ‘覺今是而昨非’의 ‘今是’를 취한 것이다. 이에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온 오늘은 잘한 일이요. 벼슬살이에 얽매였던 지난날은 잘못이었음을 깨달았다’하여 「今是堂」이란 편액을 걸었다. 그러나 별서를 경영하여 채 1년이 가기 전인 8월, 54세의 일기로 별세하였다.
엄태건의 고려대학교 석사학위논문 『밀양 금시당(今是堂) 12경의 문화경관 해석』중에서...
▶ 영남루(嶺南樓)
• 영남루가 최초로 창건된 연대는 확실치 않으나 1365년(고려 공민왕 14년)에 그 전부터 있었던 작은 누각을 철거하고 규모를 크게하여 개창하였다고 하며, 현재의 건물은 1834년(순조 34년)에 실화로 불타버린 것을 1844년(헌종 10년)에 재건한 것으로 평양의 부벽루(浮碧樓)와 진주의 촉석루(矗石樓)와 함께 3대명루(名樓)로 일컬어지고 있다.
영남루는 응천강(凝川江)에 임한 절벽 위 경치 좋은 곳에 자리잡고 있는데 정면이 5칸이요, 측면이 4칸으로서 간격을 넓게 잡은 높다란 기둥을 사용하였으므로 누마루가 매우 높으며 그 규모가 웅장하다. 좌우에 날개처럼 부속건물이 있어서 층계로 연결된 침류당(枕流堂)이 서편에 있고, 능파당(陵波堂)이 동편에 이어져 있다. 누마루 주위에는 난간을 돌리고 기둥사이는 모두 개방하여 사방을 바라보며 좋은 경치를 감상할 수 있게 하였으며 공포(栱包)는 기둥 위에만 있고 그 사이사이에는 귀면(鬼面)을 나타낸 화반(花盤)을 하나씩 배치하였다.
안둘레의 높은 기둥위에 이중의 들보(樑)를 가설하고 주위의 외둘레 기둥들과는 퇴량(退樑)과 충량(衝樑)으로 연결하였는데, 그 가운데서 충량은 용의몸(龍身)을 조각하고 천장은 지붕밑이 그대로 보이는 연등천장이다. 주변에는 무봉사, 천진궁, 아랑각, 시립박물관, 삼문동수변공원, 추원재 등의 문화재가 산재해 있다.
• 낙동강의 지류인 밀양강변 절벽 위에 위치한 영남루는 깨끗한 밀양강과 조화를 이루고 있으며, 높은 누각에 올라 바라보는 주변의 경치 또한 수려하다. 특히 화려한 단청과 다양한 문양 조각이 한데 어우러진 누각에는 퇴계 이황, 목은 이색, 문익점 선생 등 당대의 명필가가의 시문 현판이 즐비하다. 그 중에서 1843년 당시 이인재 부사의 아들 이중석(11세)과 이현석(7세) 형제가 쓴 영남제일루와 영남루 현판은 관광객들의 탄성을 자아내게 할 뿐만 아니라 수많은 서예가들로부터 불가사의한 필력으로 지칭되고 있다. (밀양시청 홈페이지 밀양관광가이드북 ‘영남루’ 편)
◇ 영남루 현판 뜻 풀이
- 교남명루(嶠南名樓) : 문경새재 이남의 이름 높은 누각(경상북도를 통틀어 교남지방이라 함)
- 강좌웅부(江左雄府) : 낙동강 좌측의 아름다운(큰) 고을
- 용금루(湧金樓) : 높은 절벽에 우뚝 솟은 아름다운 누각
- 현창관(顯敞觀) : 영남루에 오르니 사방이 높고 넓게 나타난다는 뜻
- 강성여화(江城如畵) : 강과 밀양읍성이 한데 어울려 마치 그림과 같다.
◇ 석화(石花)
밀양읍 내일동 영남루 아래쪽에 있는 바위에 자연적으로 생긴 꽃모양의 무늬. 영남루에서 아랑사 쪽 길목 바위에 자연적으로 오래 세월을 걸쳐 빚어진 무늬가 마치 꽃모양과 같다고 하여 ‘석화(石花)’라고 이름 붙여졌다. 얼핏 보면 흙 같으나 흙이 아니고 어찌 보면 돌 같으나 돌도 아닌 아주 독특한 것인데, 그냥 둥글둥글한 것도 있고 모란이나 장미꽃을 닮은 것도 있어서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자연의 신비에 경탄하게 한다.(민족문화대백과사전)
▶ 퇴로리 여주이씨 세거지(退老里 驪州李氏 世居地)
퇴로 마을은 화악산 아래 자리 잡은 전통 한옥이 잘 보존되어 있는 쾌적한 농촌 마을로 마을 앞에는 가산 저수지, 뒤로는 대각정사 사찰과 여주이씨 재실인 삼은정 등이 소재하여 주변 경관이 아름다운 마을이다. 고가 11개동을 현대식으로 리모델링하여 한목민박을 체험할 수 있는 곳으로, 한식만들기 체험, 농촌 체험도 가능하다. 특히 퇴로마을 주민들이 직접 키운 콩으로 메주 만들기, 간장담그기 체험을 할 수 있다.
▶ 추원재(追遠齋)와 점필재 묘소(佔畢齋 墓所)
추원재는 조선 성리학의 初祖인 강호(江湖) 김숙자(金叔滋 1389-1456)가 처음 거처를 정하였고, 그의 아들 점필재 김종직(1431-1492)이 태어나 자라고 별세한 집이다. 이곳은 점필재 생각 뿐 아니라 그가 만년에 제자들과 토론하고 강학하던 쌍수정(雙樹亭)이 있었고, 뒷산은 점필재의 묘소가 있는 성지이다.
◇ 호랑이 무덤에 대한 전설
연산군 시절 이미 죽은 문충공 점필재 김종직 선생을 부관참시하는 참담한 일이 발생하자 어디선가 큰 호랑이가 나타나 흩어진 시신을 지키며 날마다 슬피 울었다. 그 후 문충공의 무덤이 현재 위치에 안장되자 호랑이도 따라와 무덤을 지키다가 결국 묘지 앞에서 죽어 있는 것을 마을 사람들이 발견하여 문충공 묘지 옆에다가 호랑이의 무덤을 만들었다고 한다.
▶ 예림서원(禮林書院)
예림서원은 영남유림의 종장(宗匠)인 점필재 김종직을 사숙(私淑)하던 후학들의 교육기관으로, 문충공 점필재 김종직 선생을 주벽(主壁)에, 오졸재 박한주 선생을 동벽, 처사송계 신계성 선생을 서벽에 배향하고 밀양유림에서 매년 춘추로 제향을 올리고 있다.예림서원의 공간 구성은 앞이 낮고 뒤가 높은 지형으로 전형적인 서원 배치 구조인 전학후묘(前學後廟)의 형식을 이루고 있다.
1567년(명종 22)에 지방 유림의 공의로 김종직(金宗直)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중동면 자씨산(慈氏山) 아래에 덕성서원(德城書院)을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1606년(선조 39)에 복원하였다. 1634년(인조 12) 지금의 밀양시 상남면 예림리로 이건하였고, 서원 명칭을 예림서원으로 바꾸었으며, 박한주(朴漢柱)와 신계성(申季誠)을 추가 배향(配享)하였다. 이후 1680년(숙종 6) 지금의 밀양시 부북면 후사포리로 다시 이건되어 보존되어 오고 있다.
1669년(현종 10)에 ‘예림’이라고 사액(賜額)되어 선현 배향과 지방 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였다. 1868년(고종 5)에 대원군의 서원 철폐로 훼철(毁撤)되었다가 1874년에 강당을 복구하고 예림재로 개편하였으며, 1921년 향중(鄕中: 향원들의 동아리)유림이 사우(祠宇) 유지(遺址)에 설단(設壇)하고 향사(享祀: 제사)를 실시해왔다.
1962년에 서재를 건립하고 1971년 정부 보조로 강당을 중수하였다. 1974년에 육덕사(育德祠)와 정양문을 복원하고, 1975년 복원 고유(告由: 큰 일이 있을 때 사당 또는 종묘에 고하는 일)를 거행하였으며, 1985년부터 대대적인 복원공사를 시작하여 1987년 완공하였다.
경내의 건물로는 3칸의 육덕사, 3칸의 강당, 각 3칸의 돈선재(敦善齋)와 직방재(直方齋), 2칸의 전사청(典祀廳), 몽양재(蒙養齋)·독서루(讀書樓)·삼문(三門)·고사(庫舍) 등이 있다.
묘우(廟宇)인 육덕사에는 김종직을 주벽(主壁)으로 양쪽에 박한주와 신계성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강당은 중앙의 마루와 양쪽 협실로 되어 있는데, 원내의 여러 행사와 유림의 회합 및 학문 강론 장소로 사용되고 있다. 돈선재와 직방재는 동재(東齋)와 서재(西齋)로, 수학하는 유생들이 거처하는 곳이며, 전사청은 향사(享祀: 제사) 때 제수(祭需)를 마련해 두는 곳이다.
이 서원은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79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매년 3월 상정(上丁: 첫 번째 丁日)과 9월 상정에 향사를 지내고 있으며, 제품(祭品: 제사 음식)은 4변(籩) 4두(豆)이며, 재산은 전답 5,500평, 대지 500평 등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예림서원 [禮林書院]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송계신계성여표비(松溪申季誠閭表碑)
여표비란 어떤 인물을 기념하고 드러내기 위하여 그가 살던 마을에 세우는 비석이다. 2006년 1월 12일 밀양시 문화재자료 제392호로 지정되었으며, 평산신씨 사부공파 종중에서 소유, 관리하고 있다. 비는 비신에 이수와 대석이 갖추어져 있다. 비신은 사암으로 제작하였으며 가로 80cm, 세로 187cm 규모이다. 비를 보호하고 있는 비각은 단층 목조 맞배지붕 형식이며, 정면과 측면 모두 1칸으로 되어 있다. 비문은 밀양부사를 지낸 김극일(金克一)이 지었다.
여표비는 신계성이 세상을 떠난 14년 뒤인 1576년에 처음 세웠으나, 임진왜란 때 파괴되어 다시 세웠으며, 1634년 중건하였다. 1756년 화재로 비각이 소실되면서 비석이 크게 훼손되자, 1765년에 8세손 신사일(申思一)의 주도로 비각과 비석을 다시 세웠다.
신계성은 자는 자함(子諴), 호는 송계(松溪), 본관은 평산이다. 박영(朴英)의 문인으로서, 조식(曺植)과 함께 경상우도의 실천적 선비정신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바른 행실을 지닌 군자로 추앙 받아 밀양의 예림서원(禮林書院)과 김해의 신산서원(新山書院)에 봉안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송계신계성여표비 [松溪申季誠閭表碑] (두산백과)
▶ 載寧李氏 追遠齋
추원재는 사재령공(휘 日善)의 묘재사(墓齋舍)이다.
<사재령묘표>
공의 휘는 일선(日善)이고 성은 이씨이다. 처음에는 월성을 본관으로 하다가 중간에 재령(載寧)으로 쓰게 되었으니, 연유는 고려 때 시중(侍中)벼슬을 지낸 휘 우칭(禹偁)이 채지를 하사받아 분봉되었기 때문이다. 공은 밀양의 서쪽 조음촌의 집에서 생장하셨는데 고려조에 벼슬하여 관직이 사재령(司宰令)에 이르렀으며 세상을 뜨자 조음산에 유좌묘향(酉坐卯向=정서쪽에서 정 동쪽방향)의 언덕에 장사 지냈다. 공의 생존 연월일 및 역임한 자급(資級)은 병화을 누차 겪어 가첩이 남아 있지 않아서 자세히 알 길이 없음으로 실로 안타까울 따름이다. 배위는 영인(令人)으로 李氏이며 묘소는 벽암산 손향(巽向=서쪽에서 동남으로 향한)의 언덕에 묘셨다.
공의 가계를 기술하면 위로 조부의 휘는 근인(根仁)이니 영동정(令同正)이시고 아버지의 휘는 소봉(小鳳)이니 보조공신 상장군(上將軍)이시며 어머니는 공민왕(恭愍王)의 따님이시다. 아래로는 6남을 두셨는데 맏은 신(申)이니 호가 계은(溪隱)이고 고려말에 벼슬을 하여 관직은 지평(持平)에 이르렀고 조선조 태종의 특명으로 정려(旌閭)를 세웠다. 다음은 술(戌)이니 벼슬이 사정(司正)이시고 다음은 축(丑)이니 생원(生員)이시다. 다음은 오(午)이니 증참의(贈參議)이고 호는 모은(茅隱)인데 고려말 두문동 72현중 한분으로 사림이 사당을 세워 제향하고 있다. 다음은 유(酉)인데 처사(處士)이고 다음은 인(寅)이다. 지평공은 ....중략.....증손이하가 수십여 분이 되고 또한 현달(賢達)한 분이 많으나 모두 경향 각지에 흩어져 살고 있어 오직 생원공 자손만이 대대로 고토(故土)르 지키면서 분묘을 매우 근실하게 수호하고 있었으니 아름다운 자손이라 할 만하다.
돌이켜 생각하면 사재령의 관직은 고려조에 있어서 청현극선(淸顯極選)의 자리인 만큼 공의 덕업과 행적은 두드러져서 일컬어 기록할 만한 일이 많이 있을 것이나 수 많은 병화와 시대의 변천으로 자료의 유실과 세대가 멀어 사적(史蹟)을 징빙할 만한 근거가 없어 실로 자손된 사람으로서 천고의 한일 따름이다, 그러나 여러 자제의 빛나는 행검에서 살펴보면 예천(醴泉)이 근원이 있음을 징험할 수 있다. 공의 무덤을 모신 사오백년이 흘렀는데도 비문(碑文)을 새기지 못하고 다만 이령묘(李令墓 = 배위의 지석)세 글자를 하나의 조각돌에 썼을 뿐이다. 그래서 1804년경 헌() 상은(尙殷) 광진(光振)등 후손들이 모여 의논하기를 『우리 선조의 자손이 여기저기 흩어져 살아 묘소를 알지 못하는 자가 많다. 만약 지금 묘소에 빗돌을 세워 표하는 방도를 도모하지 않다가 호겁(浩劫=세월이 오래됨의 뜻)을 지난 뒤에 어찌 다시 무덤의 위치를 알려줄 고로(故老)가 있는가』하고 염려하여 자손 중 상은(尙殷) 상엽(尙曄)국정(國楨)등이 역사(役事)를 주간하여 빗돌을 구비하고 해진(海振)이 세계(世系)와 관벌(官閥) 및 소목(昭穆)을 기록하여 비를 세우니 오늘에 이르렀다.
지금은 교통편이 용이하여 묘소를 참배하는 자손들의 수가 늘어났고 산하에는 추원재(追遠齋)가 있어 산소를 수호하는데 일조가 되고 있으나 선조의 위업을 현창(顯暢)하지 못하는 아쉬움이 있다.
갑자년 후손 광진(光振, 호= 盤窩) 이 찬(撰)하다.
▶ 載寧 李氏 密陽 景德祠
재령이씨의 시조이신 재령군(載寧君)의 묘소는 황해도 재령군 서어산(鋤於山)에 있으며 재령군재사가 있다고 하나 북한이라 확인할 수가 없다. 경상남도 합천읍의 경원서원(慶源書院)에서 제향하고 왔으나 1987년에 이곳 밀양의 조음리에 경덕사를 창건하여 위패를 모시고 매년 양력 5월 5일에 향사(享祀)을 거행하고 있다.
《載寧君 諱 禹偁 事蹟》
휘 우칭은 벼슬이 보조공신 문하시중으로 재령군에 봉하여 지니, 월성(경주)과 재령이 분관된 시초이다. 이 분의 묘는 재령군 서산 서남쪽 방향으로 자리하고 있다. 표암(瓢巖)공 휘 알평(謁平)이후 재령군의 먼 윗대 조 휘 거명(居明)은 벼슬이 소판(蘇判)이었고, 고조 휘 금서(金書)는 삼중공신 중원태수로 계림군(鷄林君)에 봉하여졌는데 신라 경순왕이 고려 태조의 딸인 낙랑공주를 아내로 맞이하여 딸을 낳았는데 그를 처로 삼았으니 이가 곧 신란궁(新鸞宮)부인 김씨이다. 증조 휘 윤홍(潤弘)은 문하시랑이었고 조부 휘 승훈(承訓)은 병정이었으며 아버지 휘 주복(周復)은 사간(司諫)이었다. 아들은 휘 창혁(昌赫)이다. 그후 여러세대는 잃어버려 전해지지 않고, 후 세대에 휘 원영(元英) 은 공부상서 이었고, 또 세대를 지나 휘 소봉(小鳳) 보조공신 상장군이 있었는데 공민왕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여 두 아들을 낳았으니 장자가 일상(日祥)이고 차자가 일선(日善)이다.
오호! 재령군의 고조 이상은 신라때에 진골(眞骨)왕족을 이루었고 조부 이하로는 고려조에 벼슬하여 위훈과 큰덕이 대대로 빛났음을 후대에 전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세대가 점차 멀어져 혹시 대대로 전해온 자취의 상세한 내용을 잃어버려 전하지 못한다면 어찌 후세 자손의 여한이 되지 않겠는가! 지금 역대 선조의 자취를 편찬하는 날에 성씨를 얻은 선조의 사적을 기록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므로 족보와 가첩에 근거하여 세계와 관작(官爵) 및 묘소를 간략하게 삼가 적으니 위와 같다.
후손 장호(長浩) 삼가 지음
▶ 변계량비각(卞季良碑閣)
요약경상남도 밀양시 초동면 신호리에 변씨 3부자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비석.
1983년 7월 20일 경상남도문화재자료 제27호로 지정되었다. 1946년 후손과 향림들이 건립하였다.
고려말에 판서(判書)를 지낸 변옥란과 그의 두 아들 춘당(春堂) 변중량, 춘정(春亭) 변계량의 행적을 기록한 유허비이다. 변춘정의 7대조인 진사공시에 이곳에 입향하여 대대로 관직이나 문장을 하였고 변계량의 출생지로 석비가 세워졌다.
[네이버 지식백과] 변계량비각 [卞季良碑閣] (두산백과)
▶ 오봉서원(五峯書院)
1780년(정조 5년)부터 세덕사(世德祠)에서 취원당 조광익(聚遠堂 曺光益, 1537∼1578)의 향사(享祀)를 올렸다. 1790년(정조 15년) 자손들이 소(疏)를 올려 선생의 증조 청백리 정우당 조치우 선생(淸白吏 淨友堂 曺致虞 先生, 1457∼1529)도 향사할 수 있도록 청하였으며, 그 다음해 함께 향사를 올리라는 윤허가 내렸다. 1795년에 밀양 사림(士林)들의 공의(公議)로 향사할 뜻을 태학(太學)에 통문하여 청효사(淸孝祠)라 현액하고 춘추로 향사하라는 답을 받았고, 그 다음해에 처음으로 격을 높여 오봉서원이라 하였다. 그러나 1868년 서원철폐령에 의해 훼철되었다. 그 후 후손들의 재숙을 위한 재실을 세워 오봉서당이라 칭하였고, 1988년 청효사를 다시 설립하여 그 전의 현판을 다시 붙이고 신문(神門)을 입덕문(立德門)이라 편액하였다. 1989년에는 위판을 봉안하고 오봉서원을 복원하였다. 1997년 노후한 강당과 정문을 철거하여 옛날의 모습대로 원위치에 중건하고 청효당(淸孝堂)을 실학당으로, 효우당(孝友堂)을 독지재(篤志齋)로 바꾸었으며, 정문을 숭유문(崇儒門)이라 현판하였다. 경상남도 밀양시 초동면 오방리 347번지에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오봉서원 [五峯書院] (두산백과)
▶ 어변당(魚變堂)
어변당은 조선초 장수였던 어변당 박곤(朴坤)장군이 무예와 학문을 닦던 곳이다. 박곤은 무과에 응시하여 초시, 복시, 전시를 거쳐 21세에 장원급제하였고, 세종 1년(1419년) 최윤덕 장군의 막하(幕下)로서 대마도정벌, 남해 왜구 토벌에 큰 공을 세운바 있다. 현재 중앙에는 충효사(忠孝祠)가 있고, 어변당앞에는 박곤이 만들었다는 연못인 적룡지(赤龍池)가 있다.
▶ 표충비(表忠碑)
경상남도 밀양시 부안면 무안리에 있는 임진왜란 당시 승병장이었던 사명대사(泗溟大師)의 충정심을 기리기 위하여 세워진 비.
표충사에서 동쪽으로 약 4㎞ 떨어진 곳에 있다. 현종(顯宗)은 임진왜란 때 공을 세운 서산대사(西山大師)·사명대사(泗溟大師)·영규대사(靈圭大師)의 충령을 표창하는 뜻으로 그 진영을 봉안하고 ‘表忠詞(표충사)’로 사액하였으며, 1738년(영조 14)에 사명대사의 5대 법손인 남붕조사(南鵬祖師)가 이를 중수하면서 표충비를 세웠으며, 지금은 단층 팔작지붕의 보호각 내에 서 있다.
비의 재질은 대리석이고, 규모는 전체 높이 4m, 탑신 높이 270㎝, 비 폭 96㎝, 두께 54.5㎝이다. 비 전면에는 송설대사비명(松雪大師碑銘)으로 시작하는 사명대사의 행장이, 후면에는 서산청허당휴정대사비명(西山淸虛堂休靜大師碑銘)으로 시작되는 서산대사의 행장이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좌측면에는 밀양영취산표충사사적비(密陽靈鷲山表忠詞事蹟碑)가 기록되어 있다. 비문은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를 지낸 이선현(李宣顯)이 지었고, 홍문관부제학(弘文館副提學) 김진상(金鎭商)이 썼으며,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유탁기(兪拓基)가 두전(頭篆)을 썼다.
비문 전면의 내용은 사명대사의 출가 행적과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키고, 선조로부터 8도 도총섭으로 임명된 내용, 카토 키요마사(加藤淸正)와의 담판 내용, 갑진년에 선조의 명을 받들어 국서를 가지고 일본에 건너가서 포로 3,000명을 데리고 온 사실 등으로 되어 있다.
사명대사의 우국충정이 지금까지도 이 비에 남아 있어 국가에 큰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땀을 흘린다는 속설이 전해지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표충비 [表忠碑]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무안리 향나무(지방기념물 제119호)
이 향나무는 송운대사영당비(松雲大師靈堂碑 : 일명 表忠碑)가 서 있는 밀양시 무안면 무안리 903-2번지 표충비각 경내에 있다. 측백나무과에 속하는 상록침엽수인데 나무 높이 1.5미터, 가슴높이 둘레 1.1미터이며, 樹冠의 모양은 녹색의 큰 나무 양산을 펼쳐 세워놓은 것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원래 향나무는 곧게 자라는 성질의 나무인데 원줄기를 자르고 옆가지를 八方으로 뻗게 하여 지금과 같은 나무모양으로 다듬고 가꾼 것이다. 이와 같은 모양의 향나무는 전국에서 이곳 밖에 없는데, 이 나무는 1738년 사명대사의 5대 法孫 泰虛堂 南鵬禪師께서 표충비를 이곳에 세우고 식수한 것이라 전하고 있다.
▶ 표충서원(表忠書院)
표충서원(表忠書院)은 본래 무안면 중산리 웅동의 현 대법사(大法寺)자리에 있던 표충사(表忠祠)가 그 시초였다. 표충사는 임진, 정유왜란때 구국의 큰 공을 세운 서산(西山), 송운(松雲), 기허(騎虛) 등 3대사의 위패와 영정를 모시고 향사하던 건물이었으나 조선말기에 관리 소홀로 퇴락하자 헌종 5년(1839) 정월에 영정사(靈井寺, 지금의 표충사) 주지인 월파당(月坡堂) 천유(天有)가 밀양부사 심의복(沈宜福)과 그의 아들인 순상(巡相) 심경택(沈敬擇)의 힘을 빌리고, 예조의 승인을 얻어 지금의 위치인 단장면 구천리 영정사(靈井寺) 경내로 옮기고 편액을 표충서원(表忠書院)이라 고쳐 걸었다. 표충사(表忠祠)를 영정사로 옮겨 온 것을 계기로 절의 이름도 표충사(表忠寺)로 고쳐 불렀다.
월파스님은 건물의 구성과 배치를 일반 서원과 같이 하였고, 향의(享儀)절차도 유교식으로 확정하여 지금까지 관례화되어 온 것이다. 조선시대 유교의 사학기관인 서원이 사찰 안에 위치하고, 향의 절차까지도 일반 서원과 같이 행하였다는 것은 매우 특이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매년 두 차례 즉 3 , 9월 상정일에 향사(享祀)를 올릴 때 승려가 아닌 관리(초헌관 밀양시장)가 행사를 주재한다는 것도 특징이다
고종 8년(1871)에 흥선대원군에 의한 “서원철폐령(書院撤廢令)”에 따라 훼철(毁撤)되었다가 고종 20년(1883) 사림의 요청으로 복원되었으며, 그후 팔상전(八相殿) 자리와 현 종무소(宗務所) 자리 등으로 수차례 이건되다가 근년에 들어서 현 유물관 부근에 자리잡게 되었다.
▶ 밀양 삼랑진 후조창 유지(密陽 三浪津 後曹倉 遺址)
지방에서 조곡(租穀)과 공물(貢物) 등을 수로(水路)를 통하여 서울로 운송하던 것을 조운(漕運)이라 한다. 밀양 삼랑진 후조창 유지는 신라시대부터 있었고, 조선조에 와서 상당한 발전이 있었다. 조운을 통하여 서울에 수송될 물품을 보관하는 창고가 곧 조창(漕倉)이지만 이러한 업무 외에도 인근 주현(州縣)의 조세(租稅)를 징수하는 업무가 있었다. 밀양의 납세조창(納稅漕倉)은 주로 석두창(石頭倉)에 해당되는데, 석두창에서는 경상좌도(慶尙左道) 주현(州縣)의 조세(租稅)를 징수하여 1천석(石)을 실을 수 있는 6척의 초마선(哨馬船)을 이용해서 해로(海路)를 통해 매년 2월에서 5월까지 4개월 동안 수송하였다.
영조 42년(1766)에 부사 김인대(府使 金仁大)가 삼랑진에 후조창인 삼랑창(三浪倉)을 증설하여 조선(漕船) 15척으로 밀양, 양산(梁算), 현풍(玄風), 창녕(昌寧), 영산(靈山), 울산(蔚山), 동래(東萊) 등 인근 7개 군현의 조세를 밀양부사 책임 하에 징수하여 서울로 수송, 영납(領納)하는 것은 제포만호(齊浦萬戶: 昌原만호를 말함)가 담당하였다. 삼랑창은 낙동강 연안 7읍의 조세를 조창에 수납하여 삼도수군통제영(三道水軍統制營)에 보내는 조곡(租穀)을 별도로 보관하는 통창이였다. 삼랑진읍 삼랑리 하부부락 일대가 후조창의 유지(遺址)이며, 통창골은 통창(統倉)의 소재지였다. 1945년 광복 직후까지도 차소(差所)와 창고 등 건물 일부가 남아 있었으나 지금은 모두 철거되어 민가가 들어섰다. 현재 “조창산등이”, “조창나루터”, “지점거리”, “선청(船廳)”, “통창골”과 같은 지명이 남아 있고, 부락 뒷편 고개마루에는 조창(漕倉)에 관계되었던 부사(府使), 관찰사(觀察使) 등 역대 관원들의 유애(遺愛), 선정(善政), 불망비(不忘碑)등 8좌가 상존해 있으나 보호각은 없어지고 현재는 비(碑)만 남아있다.
▶ 密陽鄕校
밀양향교는 안동과 더불어 영남의 2대 유향(二大儒鄕)이라 일컬어지며, 처음의 향교건물은 임진왜란 때 왜군들에 의해 소실되었고, 1602년에 부사 최기(崔沂)가 이곳으로 이전 중건하였습니다.
현재의 건물은 1821년(순조 21)에 부사 이현시에 의하여 중건된 건물로 대성전(大成殿),동무(東?),서무(西?),내삼문(內三門),명륜당(明倫堂),동재(東齋),서재(西齋),풍화루(風化樓) 등이 있습니다.
대성전에는 공자를 비롯한 5성(五聖)과 공자의 제자인 10철,송조 6현과 함께 우리나라 명현 18위를 배향하고 있습니다.
▶ 밀양관아지(密陽 官衙址)
지방 수령(守令)이 공무(公務)를 처리하던 곳을 관아(官衙)라 한다. 『밀주구지(密州舊誌)』에는 밀양의 관아에 대해 “아사내외 동서헌별실백여간임진왜란탕진무여 만력신해부사원유남중창(衙舍內外 東西軒別室百餘間壬辰倭亂蕩盡無餘萬曆辛亥府使元裕男重創)이라는 기록으로 보아 임진왜란으로 100여칸 규모의 관아가 모두 소실된 것으로 보이며, 그 후 1611년(만력 신해)에 와서 부사 원유남이 중창했음을 알 수 있다.
선조 25년(1592) 4월 임진왜란으로 관아가 모두 소실되자 선조 32년(1599)에 당시 부사 이영(李英)이 영남루 경내에 우선 초옥(草屋)을 세워 집무를 하다가 광해군 3년(1611)에 원유남(元遊藍) 부사가 부임하여 당초 터에 관아건물을 재건하였다.
관아의 중심 건물인 동헌(東軒)은 부사가 행정을 처리하던 곳으로 「근민헌(近民軒)」이라 불렀고, 동헌의 부속건물이라 할 수 있는 서헌(西軒)과 별실 등이 있었지만 자세한 용도는 알 수 가 없다. 다만『밀주징신록(密州徵信錄)』등에는 내동헌(內東軒)과 외서헌(外西軒) 건물이 별도로 있고, 내동헌은 부사 가족이 거처하던 곳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밖에 북별실(北別室), 책방(冊房: 梅竹堂), 주방(廚房), 창고 등의 많은 건물이 건축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611년 중건 후 조선말까지 300여년간 밀양부사가 집무하는 관아로 사용되어 왔으나 개별 건물의 규모와 위치 등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기록이 없어 확실하게 알 수 없다. 다만 조선후기에 동헌, 정청, 매죽당, 북별실, 내삼문 등이 정청 주위에 배치된 것으로 보이며, 이밖에 연훈당(延薰堂), 전월당(餞月堂), 신당(新堂) 등의 다양한 부속 건물들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말기인 고종 32년(1895)에 지방관제개편에 따라 군청(郡廳)으로 명칭이 바뀌었으며, 1927년에 밀양군청을 삼문동에 신축하여 옮겨 가서 관아 본래의 용도가 폐지되었다. 그 후 관아터는 구(舊)밀양읍사무소, 구(舊)밀양시청, 구(舊)내일동사무소의 청사 등으로 이용 되다가 2010년 4월 현재의 모습으로 관아를 복원하였다.
옛 관아에 속해있던 건물 중에 당호(堂號)가 확실히 남아 있는 건물을 살펴보면:
①매죽당(梅竹糖:책방):아사 별실의 하나로 부사의 비서 사무를 맡은 책방이 거쳐하던 건물이자, 부사의 자녀들이 독서하는 곳이기도 하였다. 임진왜란 이후에 중건한 당초의 건물은 허물어져 영조 51년(1775 년)에 부사 정존중(鄭存中)이 다시 세웠다가 한말에는 이곳을 부사의 집무실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②헐소(歇所): 관아 정문 밖에 인접해 있었는데, 부사에게 문안을 드리거나 공사의 일로 부사를 만날 사람 은 반드시 이곳을 통하여 성명을 밝히고 쉬면서 대기하는 장소로서 “헐숙소(歇宿所)” 또는 “헐소청(歇所廳)”이라 했다.
③응향문(凝香門) : 관아의 정문으로 중층 구조로 되어 있었으며, 2층에는 북을 매달아 놓고 조석(朝夕)으 로 문을 열고 닫을 때에 북을 울렸다고 한다.
▶ 작원관지(鵲院關址)
낙동강변의 절벽에 위치하여 부산 동래에서 한양에 이르기 위해서는 문경의 조령관과 함께 반드시 통과해야하는 교통 및 국방상의 2대 관문이었다. 임진왜란 때 밀양 박진장군이 300여명의 병졸로 소서행장이 이끄는 18,000여명의 왜적을 맞아 작원관의 천험적인 지리를 이용하여 치열한 혈전을 벌이다 중과부적으로 패배한 처절한 역사의 전적지로 지금도 항전의 고함소리가 들려 올 듯한 애닯고도 유서깊은 전적지이다.
◇ 참고 문헌
1. 밀양시청 문화관광 홈페이지
2. 밀양시청 문화관광 홈페이지 관광가이드북
3. 인터넷 두산 및 민족문화대백과사전
4. 고려대학교 석사학위논문 『밀양 금시당(今是堂) 12경의 문화경관 해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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