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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자료는 제가 그 동안 제산선생의 문집과 제산 선생과 연관이 있는 분들의 문집에서 발최하여 제산선생과 그분들의 관계를 좀더 알고자 모아둔 자료입니다.
분량이 많고 번역이 되지 않았으나 뒷날 선생을 연구하는 사람들에게 다소나마
도움이 된다면 다행이 겠습니다. 장달수 배
자료의 정리는 선생과 한분한분의 자료를 함께 수록하였습니다
원문을 싣지 못한 부분은 별도 표시를 하였습니다.
제산선생 사우 문인 자료 집성
인동 장달수 편
김성탁(金聖鐸)1684년(숙종 10)∼1747년(영조 23).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의성. 자는 진백(振伯), 호는 제산(霽山).
아버지는 태중(泰重)이며, 어머니는 순천김씨로 호군 여만(如萬)의 딸이다. 어려서부터 문장에 통달하여 인근의 각광을 받았다.
1728년(영조 4) 이인좌(李麟佐)의 난 때에는 의병을 일으키고, 창의소(倡義所)에서 토역문(討逆文)을 각 지방의 유문(儒門)에 보내어 의병에 가담할 것을 적극 권하였다. 그 공로로 인하여 안핵사(按覈使)의 추천을 받아 참봉에 임명되었다.
1734년 어사 박문수(朴文秀)와 이조판서 조현명(趙顯命)의 추천으로 다시 참봉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그뒤 감진어사(監賑御史) 이종백(李宗伯)의 추천으로 사과(司果)에 기용되어 사축서별제(司畜署別提)를 역임하였다.
또한 상소하여 치국평천하의 도를 건의하고 왕도정치를 행할 것을 촉구하였다.
1735년 증광문과에 을과로 합격하여 사헌부지평이 되었고, 이어서 사간원정언·홍문관수찬 등을 역임하였다.
1737년 이현일(李玄逸)의 신원소(伸寃疏)를 올렸다가 왕의 노여움을 사서 정의(旌義)에 유배되었고, 그뒤 광양으로 이배되어 배소에서 죽었다. 문장가로 조정의 총애를 받았으며, 성리학에 조예가 깊었는데 이황(李滉)의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을 지지하였다.
저서로는 《제산문집》 16권이 있다.
김여만(金如萬) 1625(인조 3)~1711(숙종 37) 제산선생 외조부
본관은 순천(順天), 자는 회일(會一), 호는 기산(箕山) ·추담(秋潭).
允安의 손자이며, 基厚의 子이다. 宗叔父 允文에게 出系했다. 외조는 安東 權憑, 妻父는 安東 金希振이다. 再從兄 金如玉에게 배웠고, 李惟樟과 道義로 講磨했다. 鄕人들이 ‘山南二大老’라고 칭송하였다. 평생토록 벼슬길에 나가지 아니하고, 오직 ‘忠信篤敬’ 넉 자를 著力處로 삼았다. 후에 龍驤衛副護軍에 제수되었다. 저서로는 <箕山集>,<日曆>이 있다.
추담선생 문집
*與外孫金 聖鐸
自錦陽返庭否。人之生也。得贒師爲難。須十分勔勵也。汝年方強。汝志亦堅。無若汝外翁之老大徒悲傷也。大抵爲己工夫。不越乎日用常行之間。愼莫學一種梔蠟之輩。要入時眼好中去。是所望也。
*答兩孫 聖鐸 警鐸
久阻戀渴中見書。知侍况俱平。深以爲慰。此中拘於事勢。不得已妄起土木之役。而凡事茫然。百慮交鏑。此豈臨化所宜當耶可悶。聞其處亦有營築之役。當此極歉。何以爲之。慮慮無已。汝輩久未得見。戀思常切。而不能奮飛可歎。近來工夫。果有見得耶。文章餘事。竆達有命。須盡力於當爲之事而已。勿泛勿泛也。
김방걸(金邦杰) 1623년(인조 1)∼1695년(숙종 21).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의성. 자는 사흥(士興), 호는 지촌(芝村). 아버지는 시온(是榲)이다.
1660년(현종 1)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1675년 지평, 이듬해 정언을 거쳐 장령이 되어 이서(吏胥)들의 방납(防納)으로 인한 백성들의 피해를 상소하였다.
그 뒤 부수찬·수찬 등을 지내고 1689년 사간이 되었으나, 그해 인현왕후(仁顯王后) 민씨(閔氏)가 폐위되자 간관(諫官)으로 왕의 과오를 사전에 방지하지 못한 데 책임을 느껴 낙향했다.
이듬해 승지가 되었으며 1692년에 대사간, 이듬해 대사성을 지냈다.
1694년 당쟁에 의하여 동복(同福)으로 귀양갔으며 다음해에 유배지에서 병사하였다.
저서로는 《지촌문집》이 있다.
제산집
芝村壽席韻
門前車馬照靑春。爲賀高堂萬壽辰。白日絃歌開綺席。晴天花雨列嘉賓。
南山突兀遙登座。北斗闌干欲傍人。莫怪新詩和不得。由來健筆邁崐崘。杜詩曰。世傳閭丘筆。峻極邁崐崘。
이현일(李玄逸)1627년(인조 5)∼1704년(숙종 30).
본관은 재령(載寧). 자는 익승(翼昇), 호는 갈암(葛庵).
참봉 시명(時明)의 아들이며, 휘일(徽逸)의 아우이고, 어머니는 안동장씨(安東張氏)로 흥효(興孝)의 딸이다.
1646년(인조 24)과 1648년에 초시에 모두 합격하였으나 벼슬에 나아갈 뜻이 없어 복시를 단념하였다.
1652년(효종 3) 중형 휘일의 《홍범연의 洪範衍義》 편찬에 참여하였으며, 1666년(현종 7)에는 영남유생을 대표하여 송시열(宋時烈)의 기년예설(朞年禮說)을 비판하는 소를 올렸다.
1674년에 학행으로 명성이 높아지자 영릉참봉(寧陵參奉)에 천거되었으나 아버지의 상을 당하여 나아가지 않았다.
1676년(숙종 2)에 사직서참봉(社稷署參奉)에 제수되었으나 삼년상이 끝나지 않아 나아가지 않았다.
이듬해 장악원주부(掌樂院主簿), 이어 공조좌랑에 임명되었으나 상경하여 사은(謝恩)하고 곧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어 사헌부지평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1678년에 공조정랑·지평에 임명되었으며, 외척의 용사와 당쟁의 폐단 등을 논하였다.
1686년에는 《홍범연의》를 속성(續成)하였으며, 1689년 산림(山林)에게만 제수되는 사업(司業)에 임명되고, 이어 사헌부장령·공조참의에 임명되었으며, 이때 인현왕후(仁顯王后)폐비문제의 부당함을 지적하고 사직소를 올렸으나 윤허되지 않았다.
임술무옥의 신설(伸雪)을 건의하였고, 6월에는 산림유현(山林儒賢)의 벼슬인 좨주(祭酒)에 임명되어 경연(經筵)에 참석하였다. 이어 예조참판 겸 좨주·원자보양관(元子輔養官)에 제수되어 거듭 사임의 뜻을 표하였으나 윤허되지 않았다.
8월에는 겸직과 함께 대사헌에 올랐고, 9월에는 인현왕후를 위한 소를 올렸으나 왕의 윤허를 얻지 못하고 11월에는 분황(焚黃)을 이유로 고향으로 돌아갔다.
1690년 이조참판·세자시강원찬선에 임명되어 세자책례(世子册禮)에 참석하였고, 다시 대사헌·이조참판에 거듭 임명되었으나 그때마다 사직 상소를 내었다.
1692년에 다시 대사헌에 임명되었으며, 경신·임술 무옥의 신설을 건의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이어 병조참판·자헌대부(資憲大夫)·우참찬·이조판서에 연이어 임명되었다.
1694년 4월 인현왕후가 복위된 뒤 갑술환국 때 조사기(趙嗣基)를 신구하다가 함경도 홍원현으로 유배되었다. 다시 서인 안세징(安世徵)의 탄핵을 받아 종성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으며, 유배지에서 글을 가르치며 《수주관규록 愁州管窺錄》을 완성하였다.
1697년에 호남의 광양현으로 유배지가 바뀌었고, 1698년에 갈은리(葛隱里)로 이배되었으며, 1699년에는 방귀전리(放歸田里)의 명이 내렸다.
1700년에는 안동의 임하현 금소역(琴詔驛)에 이거하였다가, 여기에서 북쪽으로 조금 떨어진 금양(錦陽)에서 집을 짓고 제생(諸生)을 강학하였다.
1701년 인현왕후가 승하하자 석방명을 환수하였으나 압송되지는 않았다.
1704년에 인덕리(仁德里)로 이거하였다가 금소로 돌아와 금양에서 죽었다.
1710년에 죄명이 풀리고 이듬해 복관되었다가 환수되었다.
1718년 영해의 인산서원(仁山書院)에 제향되었으며, 1853년(철종 4)에 다시 복관되었다가 환수되었다.
1871년(고종 8)에 문경(文敬)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가 환수되었으며, 1909년에 관직과 시호가 모두 회복되었다.
영남학파(嶺南學派)의 거두로 이황(李滉)의 학통을 계승하여 이황의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을 지지하고 이이(李珥)의 학설을 반대하였다.
저서로는 《갈암집》과 편서로 《홍범연의》가 있다.
葛庵先生文集
書
*與金汝受,金振伯 聖鐸
卽惟窮寒。僉侍學匀勝。玄逸遇寒病蟄。窮寂殊甚。數日前。得用五來訪。方講說經義好聽。恨不與僉契共 之。卽聞僉契有陶淵之會。幸於歸路歷訪。與共此樂如何。聞鳴于入峽有日。或轉向彼中否。如對亦望與之偕也。
祭葛庵李先生文
維上之元年乙巳十一月二日丙申。先師葛庵李先生之柩車。自申石舊原。移次于內林新兆。奉襄之期。實在八日壬寅。前一日辛丑。門下後學孤子金聖鐸。銜哀致誠。謹具菲薄之奠。使子晉行。敢昭告于靈筵之下曰。嗚呼哀哉。人之生於世。得遇大賢眞儒而從之遊。豈非大幸哉。夫大賢眞儒。非世世出者也。曠遠者或屢千百歲。以屢千百歲一出之難。而吾之世適與之相遇。覿其顔範。聆其音旨。而列於門下士之末。此若非偶幸。豈可以望其必得者哉。三千之徒遇仲尼。萬章,陳臻,公孫丑之輩遇鄒孟。游,楊,謝,尹遇程。黃,陳,吳,蔡遇朱。此固尙矣無論已。若至我東方之士。得生於明,宣隆煕之際。上而及於陶山夫子之敎。下而出乎諸先生門下者。其幸又如何哉。先生以豪傑之才。奮興於東海之濱。倡起斯文。尋繹遺緖。以續夫諸先生相傳之道。而以達於陶山。其亦可謂大賢眞儒曠百歲而一出者。而小子晩生雖不獲及先生盛時。以久辱其敎誨。其登乎門牆。而進於函席。仰見其道德文章之盛。俯承乎禮樂詩書之敎。盖有年矣。則其視生乎吾後者之不可必其得遇者。斯亦幸矣。然小子以庚辰事先生。至甲申僅五歲。而先生見棄。自甲申至今。居然二十有二年。當時以丱角趨拜者。顚髮已種種矣。而先生之敎。日遠日忘。小子之業。日退日荒。又自思今之世。不復得如先生者而事之。則甲申以前五年之幸。何其短也。而從甲申至今。從今至于沒世。其不幸又何長也。雖然。此則小子之私耳。方先生之存其道。雖不幸畸於時。而其所以闡明正道。放斥淫辭。使假僞亂眞之學。詭經悖理之說。不得肆行。以幸我一世之人者。其功實大。自先生之沒。二十餘年之間。吾道晦而異端盛。正論熄而邪說熾。其流弊將至於㓕天理敗人紀。相率而趨長夜之界。而先生已遠矣。茫乎以竢後來之大賢眞儒以救之。而其近而百年。遠而千歲。未可知也。則斯世之不幸。豈不尤有大於小子者耶。嗚呼。小子旣自悲不幸。又哀世道之若是。其於今日之遷奉衣冠也。奔走執紼。臨壙以號。庶幾少伸上公下私之慟者。豈在他人後也。惟小子罪積不孝。禍及先考。方恤恤乎銜荼茹毒。委身苫塊之間。日者。謹据古人已行之事。一慟柩前而退。至於從諸賓客士林後。以相斬板之役。有所不敢於禮也。此則又小子不幸中之不幸耳。瞻望長痛。曷有其極。然小子竊猶有冀幸於心者。先生之言。載於遺集。先生之學。傳之賢子。小子倘得保延殘縷。不底死滅。則尙或有以講習餘訓。而不患其無所考質也。惟其昏愚之質未易變。頹懦之習未易化。日暮途遠。終於無聞。卒不免爲忝辱門下之歸是懼。惟先生其幸終有以陰相之哉。文不盡意。酒不親酹。區區哀誠。無所自效。孤負平生涕泣而已。嗚呼哀哉。
이완(李琓) 1650년(효종 1) ~ 1732년(영조 8)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수언(粹彦), 호는 구애(龜厓),
어려서 아버지를 잃고 큰형 선(瑄)에게 학문을 닦아 16, 17세에 이미 한시에 능했다.
갈암 이현일(李玄逸)의 문하에서 수업하였고, 향시에 2∼3차례 장원하였으나 격화되는 당쟁에 벼슬할 뜻을 버리고 평생을 학문에 정진하였다. 권두인(權斗寅), 권두경(權斗經), 이동완(李棟完)과 함께 교유하였는데 당시 사람들은 이들을 가리켜 천성사노(川城四老)라 일컬었다. 서사를 보다가 고인들의 아름다운 말과 착한 행실 중에 본받고 경계될 만한 것을 취해서 반드시 기록하고 법을 받았다. 그는 문장을 지을 때도 어렵고 기교한 말을 쓰지 않아서 쉽고 전아하면서도 법도가 있다는 평을 들었으며 성리학에 관한 논술을 많이 남겼다.
제산집
輓龜厓李文 琓
淳古之人我不見。若論今世有龜翁。穎川名德朗陵相。商雒高風綺里公。
聖代未聞三老禮。晩年還作一方宗。適來適去應無憾。蒼雪荷堂地下從。
김창석(金昌錫) 1652(효종 3)~1720(숙종 46)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천여(天與), 호는 월탄(月灘),
이기(履基)의 아들. 1687년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성균관에 있을 때 `재약(齋約) 6조`를 지었다. 1690년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부정자(承文院副正字)가 되고 겨울에 제원찰방(濟原察訪)으로 옮겨 청렴하고 정사(政事)에 부지런하여 칭송이 자자했다. 이듬해에 아계찰방(丫溪察訪)으로 옮겼다가 1692년에 박사(博士)가 되었다. 이어 전적(典籍)으로 승진한 후 곧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이 되었다. 그 후 부모가 연로하여 고향으로 돌아와서 `몽선각(夢仙閣)`을 짓고 부모를 평안히 모셨다. 이후 전라도사(全羅都事), 충청도사(忠淸都事), 강원도사(江原都事)에 제수되었으며, 특히 강원도사 부임시 『금강일록(金剛日錄)』을 지었다.
*祭族兄正言公 昌錫 文
嗚呼惟靈。子諒其德。英秀其資。孝弟爲根。文藝以飾。詞藻穎發。鮑逸庾新。草聖張顚。丹靑顧陸。三絶之譽。擅于當時。人誦瓊篇。家藏寶墨。旣有其具。乃榮其身。發軔名塗。歷敭淸顯。七翁龜老。是公同堂。一時聯翩。爲世所望。先風不墜。門戶有光。庶幾無彊。惠我子弟。胡天不吊。椓喪我家。去歲夏初。七公棄世。曾未幾月。公又至斯。風流霧消。文彩燼滅。家門何托。後生何依。如我愚芚。又何可仰。俛仰長慟。淚若河傾。嗚呼輞川一區。是公所卜。築亭臨水。名以夢仙。公卧其間。左松右竹。吟弄風月。遺興忘情。或揮草書。或拈畫筆。江山有主。物色生輝。如何一朝。人事異昔。樓臺寂寞。落花堆階。顧瞻徘徊。令我隕涕。嗚呼。公有側室。矢心靡他。不愛其生。自决以殉。其節之烈。其情之哀。今當葬公。歸骨山足。寔從其願。靈或有知。卽遠有時。靈車將發。一杯敬薦。萬古長辭。物薄情深。文不能盡。嗚呼哀哉。
김간(金侃)1653년(효종 4)∼1735년(영조 11).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사행(士行), 호는 죽봉(竹峯).
증조부는 니산현감 경조(慶祖). 아버지는 필신(弼臣)이며, 어머니는 예안이씨로 통덕랑 천표(天標)의 딸이다. 이유장(李惟樟)의 문인으로 1693년(숙종 19)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1701년 김장생(金長生)을 성묘(聖廟)에 배향하는 데 반대하는 상소를 올린 것으로 인하여 2년 동안 광양에 유배되었다.
1710년 58세로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에 들어갔다.
이듬해 황산찰방이 되어 선정을 베풀어 그가 떠난 뒤 송덕비가 세워졌다.
그뒤 이수익(李壽益)의 천거로 사재주부에 임명되었다가 예조좌랑·예조정랑이 되었다.
1728년(영조 4) 이인좌(李麟佐)의 난에 유승현(柳升鉉)을 장수로 삼아 의병을 일으켰다가 난리가 평정되어 파하였다.
그뒤 사예·병조정랑 등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았고, 1732년 품계가 통정대부에 오르고 호군(護軍)에 임명되었다가 바로 장례원판결사(掌隷院判決事)가 되었다. 권두경(權斗經)·이재(李載)·조덕린(趙德隣) 등과 교우를 맺었다.
1788년(정조 12) 이진동(李鎭東) 등이 이인좌의 난에 공을 세우고 포상받지 못한 31인의 치적을 상소할 때에 제일 앞에 놓였다. 낙연서원(洛淵書院)에 봉향되었다.
저서로는 《죽봉문집》 2책이 있다.
제산집
輓金判決事 侃
昔我榮歸日。方公病間初。衣冠堂上立。呼入檻前趍。色笑陽春煦。風標老鶴癯。謂應神所勞。當與化爲徒。但切高岡祝。寧知大運徂。弧南星彩晦。海上屋籌虛。不憗天何意。云亡國可吁。向來儒望重。晩節達尊俱。大耋嗟何有。重牢慶自殊。庭趍雙彩服。膝弄幾明珠。自是爲仁報。應由積善餘。優游送日月。瀟灑卧江湖。縱欠王朝養。猶堪鄕里模。老成今已喪。頹俗更誰扶。永念知憐厚。常慚拜見疎。音容如昨日。衣履已泉塗。久擬臨玄宅。其如乏素車。西門過未得。回首竹峯孤。
권두경(權斗經)1654년(효종 5)∼1725년(영조 1).
본관은 안동. 자는 천장(天章), 호는 창설재(蒼雪齋).
충정공(忠定公) 벌(橃)의 5세손으로 할아버지는 군자감정 석충(碩忠)이며, 아버지는 유(濡)이고, 어머니는 예안김씨(禮安金氏)이며, 처는 김시온(金是榲)의 딸이다.
이현일(李玄逸)의 문인으로 이재(李栽) 등과 교유하였다.
1679년(숙종 5)에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1689년 문학으로 천거되고, 1694년 학행으로 천거되어 태릉참봉(泰陵參奉)·사옹원봉사(司饔院奉事)·직장(直長)·종부시주부를 거쳐, 형조좌랑을 역임하였다.
1700년 봄 정랑(正郞)에 승진되었으나 곧 이어 영산현감(靈山縣監)으로 부임하여 풍속을 크게 교화시켰다.
1710년 문과에 급제, 성균관직강·전라도사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는 않았다.
그 뒤 사간원정언에 임명되었는데, 이때 흰 무지개가 해를 관통하는 이변이 있자, 사직 상소를 올려 시정(時政)의 잘못에 대해서 논하였다.
1717년 영남에서 1만여인의 유생들이 상소를 올릴 때 그 상소문을 기초하였다.
1721년 경종이 즉위하자 고산찰방(高山察訪)에 임명되었으나 얼마 뒤 귀향하였다.
1723년(경종 3) 홍문관부수찬이 되었다.
그 뒤 수찬이 되어 시정의 폐단을 논하는 상소를 올렸다. 문장이 뛰어났는데, 특히 시에 능하였다. 뿐만 아니라 산천의 형세, 인물의 출처(出處), 세대의 변혁, 동방군신(東方君臣)의 현부(賢否), 정치의 득실(得失) 등에도 예리한 안목이 있었다.
저서로는 《창설집》이 있고, 편서로는 《퇴계선생언행록 退溪先生言行錄》과 《도산급문제현록 陶山及門諸賢錄》이 있다.
제산집
*每歲四月。漁官監漁幸州。侵徵太濫。漁人多苦之。戊寅歲。蒼雪權先生爲漁官。淸而不苛。漁人爲立木碑于金浦鑿橋上。漁官碑。古無之。盖自權先生始云。遂感而爲之賦。
西湖四月集漁舟。錦帳郞官坐幸州。一自雪翁歸去後。滿江烟水不勝愁。
*謹次蒼雪齋楮谷三勝韻 幷序
寧海府治之西楮谷山中。有存齋先生棲息往來之地。曰雷澤,玉川,葛川。先生沒五十餘年。亭廢地荒。過客遊人。訪問舊蹟。將湮滅而莫之徵。迺者。先生之門人佳山權公。爲之慨然咨歎。就三勝。劖石揭名。以示永永。旣又卽亭之舊址。謀所以重建屋宇。噫。公之意。盖亦勤且至矣。於是。先生之從子密庵公。爲之記。蒼雪學士權公。賦詩四章。遠近名勝。屬而和者。殆成卷軸。其所以鋪述發揮者。亦可謂盛矣。聖鐸不敏。豈敢竊附諸公之次。犯續貂之譏。顧自以於先生。猶張繹思叔之於伯程夫子也。常恨不得逮先生時操几杖。以從於寂寞之濱。今於權公之擧。不勝高山景行之思。輒忘僭率。謹步雪爺韻。以道中心所感云爾。張繹。伊川門人。伊川涪陵歸後。始受學。未及登明道之門。而聖鐸始事葛庵先生。亦在先生光陽放歸之後。於存齋。後而不得建事。故竊引而自喩云。
兩水遙聞地轉雷。茅茨舊向石崖開。牕前漾淥靑龍卧。軒外明沙素雪堆。
人世幾回欽往跡。山阿猶自認荒臺。後生倍切梁摧痛。亭上春風未及陪。右雷澤亭
楮谷山中碧玉流。冥棲當日此優游。淙琤泉響疑瑤佩。錯落巖光訝列球。
風詠三春沂水樂。沿洄九曲武夷幽。眞源欲問憑何處。惟見晴沙下白鷗。右玉川
騰雲西麓翠屛環。葛水東流幾曲灣。藜杖向來時獨往。鸞驂此日倘重還。
難聞至訣臨川上。尙想幽吟倚石間。怊悵龍門同寂寞。百年空對舊江山。右葛川
名區誰復管幽淸。澗咽松號揔不平。悵望亭臺懷正學。蕭條丘壑緬高情。
海天明月空留照。山逕荒茅任自生。獨有當時門下客。劖巖修屋揭芳聲。
*追次蒼雪齋權公呈葛庵先生韻 幷序
纍人。自耽羅移配于光陽。就蟾江上居焉。權一甫以書來曰。晞陽。是先師遺躅所在。且有葛隱故事。庵南潭三韻。不可不追次。余以不記元韻。久之未果也。其後權表叔昌言。寫寄雪翁奉使晉昆時日錄中諸詩。其中有庵字元韻一絶及先生和韻。而再從兄汝脩氏適至。因與追次焉。
當年註易有遺庵。蘭佩胡爲大海南。知是里名非偶爾。故敎夫子滯江潭。
南岳今無舊小庵。百年遺敎掃東南。誰知楚澤傷心事。葛隱村前月照潭。
手引桄榔作寓庵。古來淸絶太湖南。郤慚憔悴行吟處。重過先生採芷潭。
*又次雪齋於昆陽棲鳳寺贈密翁韻
寥寥旅舘似禪房。天外歸蹤又瘴鄕。潮水到門知近海。篁林繞宅易斜陽。
殊方節序愁中變。故國江山夢裏長。戀闕思親無限意。行吟獨上白雲岡。村前山名白雲
*次雪齋次都丈遊山韻 二首
殊方誰與對靑眸。抱病孤吟澤畔遊。鯨海蒼茫雲出沒。蟾湖空闊月沈浮。
山前鼓角將軍鎭。江外笙歌太守樓。會得情親留十日。一床歡笑郤忘愁。
何處登高可騁眸。至今猶想雪翁遊。石門仙蹟孤雲遠。方丈淸標活盡浮。
湖水浸天澄似鏡。雲霞出海結成樓。那能駕得長風去。一躡遺蹤散客愁。淸。一作層。
*次蒼雪靑鶴洞韻 二首
人言靑鶴洞。幽絶路無緣。拔地千峯聳。橫空一木懸。
林間時見鹿。雲外但聞泉。可笑湘潭客。難追物外仙。
仙人騎鶴去。此地空有淵。佛日經千刦。香爐近九天。
樵童隔棧語。遊釋倚松眠。坐負名山債。孤吟一悵然。
*祭蒼雪齋權公文
嗚呼。古人有言。全者難得。以枚,馬之詞華。而學則未聞。以歆,雄之經術。而節有未卓。在古昔猶難於其選。况今日愈下而眇然。猗歟惟公。庶幾其全。夫以聰明英偉之資。周通宏博之識。立幟詩壘。則羽翼乎開元,大曆之家數。騁鑣文塲。則馳驟乎廬陵臨川之軌轍。窮經則不但主於章句訓詁。而能洞見夫義理之源頭。禔躬則匪徒事乎少廉曲謹。而必先立乎倫彝之大節。是雖其天賦超絶之才氣。有所殊者。亦可見世德師友之源流不可誣焉。盖忠定乙巳之大賢。而公爲之孫。葛翁近世之宗儒。而公遊其門。德行氣節。是公家之茶飯。格言至論。卽公身之佩服。是猶弘璧琬琰之美。而生於藍田。楩楠豫章之材。而就於匠石。况乎聲詩之道。習之於松谷之堂。文章之則。講之於荷塘之室。知音不求異代。而刻羽之調信其彌高。會文不出懿親。而聯芳之稿居然無敵。此所以大雅一振。而淫哇盡廢。淸文試用。則黼黻可期。墳典討論之工。有專門名家之所不逮。名行砥礪之實。匪愿人曲士之所敢幾。是故子弟仰其模範。鄕黨推爲領袖。操觚之士。得其片翰。而寶之如拱璧。問業之人。聆其緖論。而爽然若發覆。此殆所謂儒林之鉅人。廟堂之重器。夫豈但如一官之知效。一鄕之行比。嗚呼。天旣畁公以高世之才。而胡不幷畁之通顯之命。天又與公以出人之德。而胡不幷與之隆膴之仕。始低徊於郡邑。僅試割雞之牛刀。晩擢用於臺署。未效補衮之色絲。獨使章奏之間。讜議昭著。無奈朝廷之上。賢路嶔崎。丘園閱休致之年。天不遺老。邦國屬殄瘁之運。歲適在己。前輩之典刑絶矣。後生之帲幪撤矣。文風何所由而復振。儒敎何所賴而不墜。小人何畏而不敢爲非。君子何恃而樂與爲義。譬如大川涸渴而衆流無所歸宗。喬嶽崩摧而羣峯各自高峙。嗚呼。昔在丁酉。季氏短命。而東南之髦乂氣喪。粤在壬寅。叔氏捐館。而違近之儒紳心死。乃今不幸。公又至此。一家之金玉倂碎。滿堂之鸞鵠俱亡。豈天理之可知。嗟我懷之徒傷。聖鐸藐爾生晩。後公卅載。幸我大姑。爲公賢配。方公盛年。雖未周旋而辱敎。及公未耄。尙能因緣而獲私。不知不肖之軀。難覬於進取之道。輒以向上之業。謬期於提命之時。質雖未逮。意何敢忘。宿舂之道路匪遙。久曠時候。不孝之罪逆至重。仍遭巨創。苫塊殘命。猥蒙長者之記念。札牘哀訊。特先知舊之唁慰。銘鐫之感實深。拜稽之禮節敢緩。窀穸之事未畢。號訴之哀情莫遂。何期未踰旬月。遽啓手足。念斯世不可復得。縱長慟而何追。顧此生無以爲歸。倍孤蒙之堪惻。嘗聞持衰之人。不敢相吊。經訓固知其難越。雖然。好禮之家。亦或有行。公喪。吾何爲不哭。惟事故之多掣。亦憂戚之相迫。歲月屢更。人間之綫息雖延。墓草再宿。袖中之瓣香未薦。負平生知愛之厚恩。孤往年恤問之深眷。玆當企及之制甫闋。準擬匍匐之義自伸。而痘患之復梗。奈險途之難遵。漬綿而致其誠。終不得再拜而酹。緘辭而授之僕。聊以寓一哀而已。盖上爲公下爲私。蘇子哭敺之慟難盡。生有來逝有爲。傅公騎尾之靈不死。遙冀來格。北望泣涕。
蒼雪齋先生文集
書
答金振伯 聖鐸
天崩之慟。歲改愈新。罔極柰何。族孫之歸。獲接手翰。審侍省進學。茂迓川至之休。良用贊賀。七灘,月灘兩老相繼奄忽於一年之內。不但德門一時寥落。實關吾儕否運。衋然長慟。內翰兄情境尤可想也。尊堂叔子厚公雖沉屈鄕邦。名不出世路。淸通剛正。才德器識兼備。允爲 鄕評人望所歸。一家所倚仗。且其氣質必享耈壽。而遽至溘然。理之不可恃有如是邪。慟哉慟哉。此中從兄荷翁之喪。自係士類運氣之不淑。詎亶吾家私慟。眼看前輩典刑日漸凋零。後生文學志尙如左右者。指不多屈。吾人期望。匪直爲門戶之重而已。更願趁此好光陰。懋敏策勵。成德成材。使儒門一脉接續不墜。幸甚幸甚。李先生復官之命。實爲斯文大幸。第繳啓尙洶。令人苦痛。未知末梢竟如何也。書末之云。何假借之過也。此不過朋儕間有懷吐寫。以備採擇而已。豈足轉煩傍人聽聞而有此云云邪。
홍상민(洪相民) 1654(효종 5) 함창
본관 부계(缶溪). 자는 천경(天卿)
아버지는 홍여렴(洪汝濂). 생부는 목재 홍여하(洪汝河)
숙종(肅宗) 17년(1691) 생원시에 장원.
경종 3년 익위사익위.
제산집
*輓洪主簿 相民
名門左海缶林洪。耆舊南州有德公。家學應傳木齋老。遺風遠襲寓庵翁。
空聞激濁揚淸志。不見經邦撫世功。責沈如今文可續。新阡回首恨無竆。
장만걸(張萬杰) 1654(효종 5)∼1717(숙종 43)
본관은 인동(仁同). 자는 기언(器彦), 호는 행당(杏堂),
판서 안양공 말손(末孫)의 7대손으로 윤병(玧秉)의 아들이다. 장신(張璶)·장진(張瑱)으로부터 가학을 전수받고, 이동표(李東標)·이유장(李惟樟)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소과에 합격하였으나 더 이상 과업(科業)을 일삼지 않고, 예학(禮學)에 힘써 『비요집람(備要輯覽)』·『의례문답(疑禮問答)』·『가례익해(家禮翼解)』등을 저술하였으며, 서법(書法)에도 뛰어났다.
행당집
*제산선생에게 보낸 편지가 있다 (與金霽山振伯[聖鐸])
신필정(申弼貞) 1656년(효종 7)∼1729년(영조 5).
본관은 평산(平山). 자는 원백(元伯), 호는 병옹(病翁).
아버지는 후석(厚錫)이며 어머니는 무안박씨(務安朴氏)로 문도(文度)의 딸이다.
1687년(숙종 13) 천거로 후릉참봉(厚陵參奉)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이어서 경릉참봉(敬陵參奉)·황산도찰방(黃山道察訪)·장흥고주부(長興庫主簿)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1728년(영조 4) 이인좌(李麟佐)의 난이 일어났을 때 마침 그는 병중이어서 아들 사일(思日)에게 계략을 일러주어 의병을 모아 적의 남하를 막고 민심을 안정시켰다. 그는 영달에 뜻을 두지 않고 성리학에만 전심하였으며, 저서로 《훈몽역의 訓蒙易義》를 남겼다. 사헌부집의에 추증되었다.
제산집
輓申主簿 弼貞
養德林泉七十齡。東西行者式鴻亭。時危益負朝中望。齒耋猶觀座右銘。
出處終爲遠志草。存亡自應少微星。了翁責沈吾知免。曾拜龐牀挹典刑。
이재(李栽)1657년(효종 8)∼1730년(영조 6).
본관은 재령(載寧). 자는 유재(幼材), 호는 밀암(密庵).
아버지는 현일(玄逸)이며, 어머니는 무안박씨(務安朴氏)로 경력 늑(玏)의 딸이다.
어려서부터 작은아버지 휘일(徽逸)과 숭일(嵩逸)에게 배웠다. 아버지가 함경도 종성으로 유배되었을 때 따라가서 시봉하였고, 1700년(숙종 26) 유배에서 풀려나자 안동군 금수(錦水)에서 살았다.
벼슬은 주부에 이르렀으나 사직하고 오직 학문에만 몰두하여 성리학의 대가가 되었다. 그는 주리론(主理論)으로 영남학파를 이끌었으며 후진양성에 힘써 많은 문인을 배출하였다.
그의 이기(理氣)에 대한 견해는 태극(太極)에 동정(動靜)이 있어서 음양이 나뉘고 오행(五行)이 갖추어진다고 생각하고 오직 사람만이 그 빼어나고 영묘한 것을 얻었다고 생각하여 기의 작용을 기다리지 않고 이만으로도 일용동정(日用動靜)의 체용(體用)이 될만한 묘법을 갖추었다고 주장하였으며, 대개 이기란 이물(二物)인데 상리(相離)하지도 않고 상잡(相雜)하지도 않는 것으로서 이것을 나누어 둘이 되게 할 수도 없고 합하여 하나가 되게 할 수도 없다고 하였다.
1704년 정시한(丁時翰)의 은거지 법천우사(法泉寓舍)로 가서 이기사칠지변(理氣四七之辨)·건순오상지덕(健順五常之德)·인물품수지동이(人物稟受之同異)를 강론하였다.
그뒤 아버지가 쓰다가 완성하지 못하고 절필한 《홍범연의 洪範衍義》를 완성하였으며, 《성유록 聖喩錄》·《금수기문 錦水記聞》·《주서강록간보 朱書講錄刊補》·《안증전서 顔曾全書》·《주어요략 朱語要略》 등을 저술하였다.
그의 대표적 제자로는 이상정(李象靖)·이광정(李光靖)이 있다.
저서로는 《밀암문집》 25권 13책이 있다.
제산집
*次韻。呈李密庵。
華表何年白鶴歸。錦陽遺跡日依微。荒郊歲晩風烟冷。人宅禾生鳥雀肥。
此日玄亭還問字。當時絳帳幾摳衣。定知家學淵源在。星斗文章世所希。
*敬次錦陽草堂韻。呈李密庵。
雪擁茅齋夜色寒。半牕燈影照靑山。平生此會眞多幸。愧殺年來太等閒。
寥落衡門斷俗人。歲寒何處寓心眞。牕間一樹藏淸艶。分得先生座上春。
*謹次密庵韻
素計蹉跎淟汨間。靑春光景去無還。十年漫學屠龍枝。七日難成隱豹斑。
丈席趨陪誠自薄。衡門瞻望路非艱。古人遊學輕千里。孤陋如今足汗顔。
*次密庵韻 二首
勝日羣仙會。名區泗水臺。遠林殘暑退。永夜激湍哀。
興逸憑危檻。談淸引小杯。回看錦里隔。愁思若爲裁。
追到泗上院。已後遊巖臺。露氣橫江冷。秋聲入樹哀。
閒吟赤壁賦。頻把紫霞杯。未見藍輿枉。憑欄思莫裁。
*輓李密庵
天不斯文喪。先師子有賢。周詩鯉庭學。皇極蔡家傳。
一代南金重。千秋北斗懸。淵源今已矣。寥落錦江邊。
往日龍門址。仍家擬考亭。顔回居陋巷。楊子草玄經。
聖代徵遺逸。儒林仰典刑。凄凉精舍計。南谷暮山靑。
昔抱梁摧痛。從公且卅年。諄諄惟舊學。眷眷卽遺詮。
慟切盆猶覆。憂深鉢未傳。門牆今寂寞。何處更周旋。
*答李密庵書 丁酉
日前。伏承下札。迨深感悚。而無便尙稽仰答。罪恨多矣。卽日春和。伏惟靜中道體神相萬安。區區不任慰慕之至。聖鐸奉親粗遣。而一家喪變。荐出於數日之內。私門不幸。何可勝喩。渚宮梅花詩義。伏蒙考示。感荷之餘。不勝忻釋。鄙陋因此竊念。老先生當日。確守難進易退之節。未嘗以經世自任者。其殆有感於此書及詩之義。而今之君子。尤不可不省念於斯也。未知如此覷得不悖於本意否。但延平書中。使衰世之公子皆信厚。須如文王方得。一段文義。未甚分曉。私竊見解以爲文王變殷商之衰世。致公子振振之化。凡人之有爲於世者。能變風俗。如文王則善矣。不然。且須鞱晦自守。如龜山詩所云云可也。又未知此解。果不謬否。此外又因誦讀閱覽之際。多有所疑於心者。欲一躬進座下。從頌仰稟而未果。敢以別紙錄呈數條。幸因便敎示。如何。聖鐸於此。竊有感焉。古之學者。尋師取友。千里遊學。不則尙論古人。嘐嘐不已。盖眞知己之不足學之不可不講。故其不安於固陋。而取益於師友。如是其勤也。今有宗工鉅匠。適當吾世。而又門牆密邇。無躡屣宿舂之勞。迺視之以爲東家丘。而不一執經質難。倀倀然而行。蒙蒙然而處。終身自以爲是。而無聞以死。則豈不爲大愚而可哀者耶。聖鐸居常念此。非不愾然寤歎。而第恐躬無實踐。而口談性命。古人猶以爲能言之鸚鵡。况此身全沒於聲利窠臼中。與兒曹一例逐逐。而往往作不恒之心。飾不悱之說。以偸講學之名。而無所當於身心。則是何異狂易之人。終日胡道亂說。而偶爾出一善言者哉。不但上以欺長者。下以自欺。亦且召人之嗤罵不少矣。以此甘自歸於窾啓。而不敢有所云云矣。頃因進拜。猥辱敎勉以講討之業。感舊傷今。意甚切至。聖鐸雖不敏。寧無戚戚於中心者哉。退而思惟。竊自奮然以爲如此畏嫌退縮。畢竟何所底止。人之所以愚益愚陋益陋者。正坐此耳。將自今寧被無實之誚。而不欲自老於黮闇之域。凡有所疑晦。無大無小。若精若粗。輒以就正於高明之鑑。庶幾賴天之靈。開發其蒙蔀是圖。此誠有動於執事一言之惠也。不識執事倘恕其僭而不斥外之乎。書末所諭。其在謙光之美。固宜有此。然方今之世。如此等文字。非執事而誰秉筆哉。此非聖鐸阿好私言。乃公議所同。况闡揚先德。極其筆力。爲子孫者方感拜之不已。豈容而今更有別圖之理。不特鄙家父兄意如此。竊恐士林僉議。亦萬萬無他意。借令別圖。誰復肯督繩於大廈突兀之後哉。然人之眼目各異。隨手指摘。致令字句移易添刪。反有傷於本色。則誠不免有閔人意處。若乃勤命之事。决非衆議之所敢出也。如何如何。
稟目
論語師摯之始。關雎之亂註。亂。樂之卒章也。未知以關雎一篇。爲樂之亂乎。抑以關雎末章。爲亂乎。新安陳氏據國語所云以那爲首其輯之亂曰。自古在昔之語斷。以爲關雎之末章。此說未知是否。竊恐如此。則與史記所云以爲風始者。似相戾。盖史記之意。以全章爲亂。非但指末章也。且朱子亦曰。自關關雎鳩。至鍾鼓樂之。都是亂。當以朱子說爲正否。
三月不違仁章。日月至焉者。能造其域而不能久。則諸子之於仁。雖不能如顔子之久。當其日至月至之時。其心體瑩然無纖毫之累。果能如顔子不違時乎。
*答李密庵書
頃於新塘喪次。伏承下書。就審氣體愆和。區區仰慮。久而不釋。日前因令胤兄見訪。伏聞已就平復之境。忻慰之至。無任下誠。比日風氣稍和。伏惟神明所勞。道體益康。前書所稟。不量愚昧。縷縷煩溷。而迺蒙大君子不以爲無似。意欲引而置諸可敎之科。指迷牗惑。痛切勤摯。莊誦再三。不覺感愧交中。夫聖鐸。本愚魯下材。自頃山頹以來。益以汙下。浪過年時。今去四十只六歲耳。而未有咫聞半解可以免於聖人不足畏之戒者。區區所以訂義問難者。誠懼夫無聞以沒世也。若夫進此而爲大人之學。則聖鐸固愚魯。何敢望何敢望。然大匠不敎則已。敎則必以規矩。未嘗爲拙工改廢繩墨。則君子之敎人。豈有異於是乎。來敎之意。愚知其不我欺也。嗚呼。今之世學絶有間矣。博洽於記聞。修飾其言行者。夫豈無其人。然徒務於外。而未見有實得眞積之功。則斯之於爲學。不亦遠乎。若大誨所云。卽事卽物而精以擇之。隨時隨處而敬以存之者。誠千古之妙詮也。然洙泗洛閩諸聖賢家片言隻字。何莫非此道也。惟讀之者。鹵莽蔑裂。不得其要領。則正淮陰所謂此在兵法。顧諸君不察者耳。聖鐸蓬心牆面。幾多年于今。不意玆者。乃獲幸於先覺。奉聆其旨訣也。至於博物洽聞而以爲知。貌恭色莊而以爲行。令俗學聞之。足可以羞愧汗顔。怵惕反省。而其於儆愚陋也。尤不啻頂門上一針。此聖鐸所以旣感且愧而不能自已者也。科業奪志之戒。敢不書紳。而稟質旣懦弱。利欲又沈痼。平居非不知激昂自厲。及至臨利害遇得失。輒至於動其心喪其守。此爲大可懼耳。別紙批誨。逐條開示。極其明白。鄙滯之胷。頓覺釋然。近日又有疑晦處。別錄仰稟。更賜批示。如何。士之談經說學。猶農夫之理耒耟工匠之治器械。誠至敎也。使世人苟知此意。則惰農慵工。固足爲可笑。彼居肆服田者。夫何怪之有焉。然如聖鐸者。所謂手執耒耟。而未嘗一日載畞口談器械。而未嘗一朝作業者也。以此怕人嗤罵之念。恒在一邊。此亦未免齷齪結習而然否。伏自笑歎。因市便忙草拜候。只祝炎序之交。爲道自愛。
禀目
用起天地先
尊批所謂冲漠無眹。萬象已具之語。按本註。亦有之。今不容有疑。而鄙意竊獨以爲用者。流行未定之謂。體者。見成已定之名。如亥子之間。天地未判。而流行不已之妙用。已於此中起了。將來天開地闢。皆由是而肇焉。此所謂用起天地先也。及其旣判。則天爲天地爲地。而定體立矣。此所謂體在天地後也。且如生物形質未成。而資始發育之用。已先有焉。及夫流形之後。則各有成性而不可易。是卽所謂體也。至論易卦。其理尤明。卦爻未立之前。若非先有掛揲之用。如何得成八卦。六畫及卦畫旣立。則乾陽坤陰法象全具。而定體可見。是非所謂用在先體在後者乎。邵子體用之意。恐或如此。不必引體用一源之意。爲之解耳。或人所謂太極動而生陽。是用之起處云者。似不爲無理。未知如何。
尊德性而道問學
問目以此爲先行後知之證。而尊批以爲得之。鄙見竊謂中庸此段。盖以知行分輕重大小。故先言尊德性而後言道問學。非以爲學者工夫次第必先此而後彼也。若然則必先致廣大。然後始盡精微。必先極高明。然後始道中庸。是格物致知之功。反在誠意正心之後。豈聖賢垂訓之意乎。且下語之際。不曰然後而只道著而字便可見。其相須兩進。無先無後。如車之兩輪。鳥之兩翼。不可道一輪先動。一翼後奮也。此與小學,大學之有先後者。不可幷論。未知如何。
理發
尊批以爲是理之所發。竊謂四端。卽在中之理。自發見於外爾。若曰所發則是似若有以此發彼之意。下語得無未穩耶。盖理發云者。猶所謂太極動云耳。今若解之曰。太極之所動云爾。則其於意義。果無未安否。鄙意以爲去一所字。而改下理自發出之語。則似得其義。未知是否。何如。
栗谷曰云云
謹按無情義無造作六字。本是先儒論理字之語。今乃以此爲栗谷錯認之病。則恐未安。若曰。栗谷全以理。爲無情義無造作底物事。而不知其實爲萬化之樞紐根柢。故其言每如此云云。則語意似覺無欠。未知如何。
*答李密庵書 乙巳
去念後。伏承下問。具審伊時靜養氣體萬福。哀感且慰。無任下誠。卽日潦雨之餘。天氣晴朗。伏惟燕申益勝。尤切區區仰慕爾。聖鐸將老避痘。竄泊竆店。違離几筵。忽已踰月。情事痛迫。益復罔極。而老母寧日恒少。匕箸全卻。私心憂悶。尤何可喩。前書中見念之諭。敢不感拜以奉。但禀質素孱劣善羸。春夏尤甚。非特遭變來爲然。日者爲大事。有奔走之勞。形神偶瘁。遂使親舊見者。謬認以爲因哀致毁。至煩轉達。爲長者憂。實不知食飮興寢。故無異於平人。不待節哀。而忘哀之時自多。是誰欺。欺天而欺人。承領敎戒。不覺恧然汗顔。雪爺襄期定在廿九。云亡之慟。去益甚耳。輓紙頃到。此中玆以附呈。伏想更深悲咽也。聖鐸在變初。首蒙雪爺下問。未及仰答。而遽先易簀。區區哀誠。無由自致。竊欲於卽遠之辰。操數行文。因一家人行。遙致祭告。而未知其果如何也。前輩於分誼至重處。雖在喪中。亦有行之者。此其可據否乎。奠需。雖自喪家出用魚鱐無妨否。寓中無書冊攷證。或恐率意爲之。見譏議於士林齊會處。故敢此仰禀。伏乞俯賜指敎。金載基家。招魂葬事。探聞尙未行之云。想因下諭而止耳。
*與李密庵書 丙午
日間寒事陡緊。未審氣體如何。仰慕之至。不任哀誠。聖鐸奉老僅支。而亡弟寃窆。定在廿七。期限促迫。凡百茫然。痛苦愁閔。有不可容喩者。亡弟年少短命。其志業無足道稱。而區區私情。竊悲其平生篤好文史。兀兀忘飢寒。不汲汲於速化。且於言談擧措之際。動必稱先輩長德。於門下。尤所嚮慕。而不能已者。惜其卑下太甚。平居嘿嘿若無知解者然。以故雖一家人。罕有知其實者。不幸夭死。倏然若朝露風燭之無遺跡。此聖鐸等心所慟惜。愈久愈深者也。世間求輓之事。本非禮意。况此微末少年之喪。固不敢有溷於長者。而誠不忍其寃閉地下。沒沒無稱。旣已略有所懇於一家親戚及旁近知舊間。猥欲得座下一言之惠。以塞土中之悲。此實人情至痛所不獲已者。伏乞憐而哀之。辱賜哀誄。以副此迫切之懇。如何如何。連日奔走。末由進拜。罪恨徒切。謹奉白。
*與李密庵書 丁未
還頓以後。雖不得進拜。宜以書亟候動靜。而始汨憂患。後多奔走。迄莫之果。罪安敢辭。節届處暑。炎熱尙酷。伏未審尊體愆度近復何如。仰慕不任區區。聖鐸半載奔逬之餘。幸得撤寓。而老人氣力。寧日常少。閔煎閔煎。就外大父平生隱行潛德。有不可湮沒不傳者。而內外諸孫。不肖不敏。迄未能求一言於當世秉筆君子。居常愧惕。恐遂遷就。重爲他日無竆之罪悔也。月前內兄略記所記憶平日言行梗槩。屬聖鐸。使之叙次繕寫。以干于下執事。而聖鐸誠不敏。且素昧於叙述文字逕路。久未敢下筆。荏苒之間。已過屢月。不獲已謹已次第錄出。而內兄數月以來。重遭憂患。奔走醫藥。又有季舅家意外喪變。不得入來申懇。聖鐸又拘畏。末由替進仰溷。使舍弟。奉以告于執事者。殊不勝悚恨之至。仍竊伏念。外大父雖沈伏閭巷間。不得顯名於世。其才器德行。實有過人者。而世或莫之知也。此子孫所以深念大懼。必欲得作者之闡發之。庶幾垂示於永久。而顧今二三鉅公。凋落幾盡。獨執事與司諫趙丈爲一代襟領。立言之責。有不可辭者。然司諫丈遠在千里外。且聖鐸等所傾仰於門下者。尤有異於他名碩也。伏乞執事念契誼之重。略簡慢之咎。特垂採擇以文之。爲異日請銘求誌之地。則其爲恩賜。何可勝報。所當待內兄早晩入來。偕進仰懇。而彼中憂病苦未開霽。且於夏初。內兄已先布誠。想不至深訝。故爲此替煩。幷乞下諒。
*祭密庵李公文
嗚呼哀哉。哲人之生。盖不偶然。間世一出。一國一人。父子授受。連代繼起。求之古今。厥惟不易。楊烏未成。韓昶有媿。溫嗣不足。埜遠不類。其惟無憂。曰我先師。以公爲子。繼之述之。陶山遺緖。先師是承。公乃引之。不至墜荒。異說詖淫。先師是闢。公克守之。俾不充塞。西山有沈。文定有宏。靈芝踵瑞。景星重光。不出一家。不待百年。匪天所相。其孰使然。於惟我公。天賦聰明。自少讀書。縷解刃迎。天道之微。人事之顯。禮樂紛紜。經史千萬。公實探賾。包絡貫穿。鉅細靡遺。本末俱全。觀世學術。恒患踳駁。公襲前烈。謹守旨訣。主敬致知。不越準的。觀世文章。惟事藻飾。公以理勝。森其典則。折衷華實。尤長叙述。惟昔陶翁。節要朱書。世傳講錄。出自門徒。往往踈謬。反累師說。刊補之功。匪公誰克。事光前哲。人擬拱璧。亦越大全。近有釋義。考據雖博。精覈則未。是豈足傳。待公下筆。彌厥年歲。頗用精力。惜未脫藁。遺慨後學。嗚呼哀哉。惟天生賢。不拜畁時。以公文學。曾不少施。况自甲戌。世路險巇。大老擯斥。北塞南荒。公侍嚴程。脚血鬢霜。天恩暫霈。機穽猶紛。寃深覆盆。路絶叫閽。抱痛靡籲。若窮無歸。斂跡圭蓽。與世相違。樂彼錦水。先人舊躅。架有遺書。庭有新植。簞瓢屢空。溝壑不忘。家貧義肥。身窮道亨。聖人在上。側席明揚。好爵與縻。亦云遭逢。先誣未白。義有難進。固守東岡。甘我素分。年高德卲。成己成物。有來自遠。不倦誘掖。飮河果腹。人各有得。世道方頹。屹若靈光。壽豈不多。尙祝無彊。天不憗遺。奄啓手足。儒林氣索。蒼生望絶。嗚呼哀哉。念我小子。質本朽木。幸從先師。蒙被敎育。歲月未久。楹夢遽驚。冥途倀倀。孰示周行。賴有我公。承家秉拂。事若先師。屢倍丈席。公不我愚。惠我孔大。曰子無畫。先人所愛。爾性雖敏。爾功不篤。敏人鈍功。斯乃有得。又曰晦翁。有言可諗。南軒俊偉。東萊詳審。詳審固好。俊偉尤善。於汝發藥。學張宜勉。余拜敬受。期不墜失。性偏難克。伎倆猶昔。我則負公。公猶我眷。恢我志局。鞭我步倦。有時請益。不厭應酬。世人自用。暖暖姝姝。公恢其量。從善不吝。以余迷昧。亦許自盡。豈曰有知。實感好問。惟此一節。何處復見。使公遐壽。我猶庶幾。公今至斯。我安歸依。先師遺訣。不可復聞。君子令德。再覿無因。山頹之痛。前後若一。甲申餘淚。復灑今日。嗚呼哀哉。南山有谷。公所樂者。取義紫陽。擬築精舍。文成勸緣。世無法蓮。屋子未就。人事已遷。一丘蕭瑟。月慘風悲。不知精爽。倘來遊斯。日月有期。佳城載闢。素車來哭。奉奠以訣。薄物荒詞。曷盡衷臆。惟靈不昧。尙其歆格。
密菴先生文集
書
*答金振伯 聖鐸○壬辰
1712년. 金聖鐸에게 답한 편지이다. 장사지내기 전과 후의 복식 등에 관한 내용이다.
謬詢儀節。栽素昧禮學。賢所知也。決不敢强其所不知以爲知。賢旣以其私問。則亦不容終默。聊以所嘗聞諸父兄者。爲左右誦之。賢可自以意致之。毋或曰栽云爾也。蓋嘗聞之。斬衰練後有齊衰三年之喪。則葬前兩殯朔朢饋奠。當各服其服。接待賓客。居處出入則苴杖外。當專用齊衰之制。葬後以麻絰加練冠之上。以麻帶施於葛帶之下。苴杖當仍。故禮記服問 間傳小記等篇。略有這意思。試撿看如何。受弔一款。未有顯據。然揆以禮意。似當各服其服爲是。且旣已相向哭於前殯。則除入哭後殯者外。似無更哭於後殯門外之義。未知如何。尊叔舅哀丈。前喪服制已盡。則似不當以後喪衰服。入前殯几筵。嘗見退溪先生答鄭汝仁問目中。有可傍照處。可更參考也。書中二字。極令人駭汗。餘人以外面相假借者。不須言。其謂相信如吾振伯而猶然乎。非但不佞將貽譏取笑。惟左右亦難免失言之誚。千萬速改之是望。
*答金振伯 丁酉
1717년 金聖鐸에게 답한 편지이다. 학문의 大要는 窮理致知와 反躬踐實보다 앞서는 것이 없다며 선비의 자세에 관하여 논하고 있다.
辱復長牋。言遠意至。非愚昧所克堪當。感愧來幷。不容于心。栽少鄙滯無一能。重以患難憂慼。悲遑煎迫。有若失志喪性者然。所嘗耳剽於父兄師友間者。皆已頑然無復省錄。今又老病侵尋。精力消亡。自分終爲庸衆人而止。惟是一端彝性。終有不可得而泯者。且自先大父以來。暮年遷喬。不辭單露之苦者。實爲諸子孫周旋文獻之邦。得有觀感之益。洎先人歸自南方也。又幸得近仁里。與諸賢有從遊之好。庶幾這箇端緖。或有推明之會。曾未幾歲。先人棄諸孤。尊家適翁旋又不幸。不肖餘生。更誰依歸。往跡寖疎。殘蹤 如寄。有時追念舊好。未嘗不感涕。又惟聰明才識如吾振伯者。寔先人所期望。故向者見訪之日。偶進狂率之言。實出愛慕之意。非敢自謂身有所得。可推而及人也。乃振伯因此一言。推借過實。處之以先進。望之以借視聽。則其在微分。萬不近似。然亦念夫天生萬民。各有分職。士之談經說學。猶農夫之理耒耜工匠之治器械。自是職分所當爲。旣不可讓與別人。又不可一日廢而不修。其可徒以遜讓爲事衰晩自沮。不思其職之所在乎。今且試以其所嘗染指者言之。雖其汩沒章句訓詁之間。卒無高奇深渺之見。然竊 嘗聞之。學問大要。莫先於竆理以致其知。反躳以踐其實。所謂竆理者。豈博物洽聞之謂乎。卽事卽物。精以擇之而已。所謂反躳者。豈色莊貌恭之謂乎。隨時隨處。敬以存之而已。千古相傳。只是一箇塗轍。其言雖殊。其理則一。外此而言學者。非吾所謂學也。操存旣固。察理愈精。則蘊之爲德行。發之爲事業者。亦將舍此而何求哉。子思所謂愚必明柔必强。程子所謂持養須用敬進學在致知者。豈不信而有徵乎。嗟乎。士生斯世。不得不從事擧業。然其輕重內外之分。辨之不可不早。有宋羣賢姑不說。試以我東諸老先生 言之。其初孰不從科目中出。後來事業如許光大者。豈非以其輕重取舍之極。素定於內而然耶。今以振伯之才之識。又不能無意於此。特以科名所拘。不得專意爲病。又以或致人指點爲嫌難。是固有是。然程夫子不云乎。不患妨工。惟患奪志。志苟立矣。何患乎妨工。何畏乎人言。來書所謂寧被無實之誚。不欲自老於黮闇之中者。已超脫得七八分矣。持此志不變。亦何求而不得哉。惟我嶺中。自頃以來。賢澤已斬。儒言幾絶響。念之誠慨然。人固無志則已。如振伯旣有其志。又有其具。可不思所以充之乎。繼自今。毋忘切 磋之義。如來諭所及。則庶彼此交有所益。而不負宿昔相期之意。若垂老辦得此一著。雖流離竆厄之極。亦甘如飴矣。渚宮詩義。推說甚好。延平書意。亦似看得不錯。因此一事。講究到底。亦竆格之一事也。別紙所詢。足見思索之精。重孤盛意。摸索爲說。未知果不失本指否。如有未當。勿憚批回。前所控懇。未蒙開納。悚憫無已。
別紙
金聖鐸에게 답한 편지의 별지이다. 각 항목에 다음과 같이 답하고 있다. ① 《論語》에서 子産과 文仲을 優劣로써 논한 것은 아니다. ② ‘日月至焉’ 또한 밝고 얽매임 없는 모습이지만, ‘三月不違’와는 久速․生熟의 나뉨이 있다. ③ ‘關雎之亂’은 관저 終章을 의미한다. ④ ‘逝者如斯’의 ‘逝’는 흘러감을 의미하고 ‘斯’는 시냇물의 흐름을 가리킨다. ⑤ 子路가 나라를 다스림에 禮로써 하는 도리를 통달한다면 曾點의 氣象과 같을 것이다. ⑥ 공자가 司馬牛에게 ‘不憂不懼’라고 답한 것은 사사로움을 이기고 의로움을 배양하여 바름을 잃지 않게 하기 위해서이다. ⑦ 군자가 벼슬하는 것은 의로움을 행하는 것이다. ⑧ ‘自私’는 廓然大公하지 않음에 기인하고 ‘用智’는 物來順應할 수 없음에 기인하므로 〈定性書〉의 ‘自私用智’은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子産有君子之道四焉。以吳氏說觀之。文仲賢於子産乎。然則夫子何亟稱子産而屢貶文仲邪。
按張南軒論語說解臧文仲居蔡章。有曰世方以小慧爲知云云。朱夫子訂其非曰小慧。非所以言臧文仲。由是觀之。文仲之賢。不可少也。今以春秋傳考之。其格言甚多。吳氏豈無所見而云爾邪。夫子與文仲異世。尙論其失而屢貶之。與子産同時。親見其賢而亟稱之。非謂文仲無一長可取。子産却每事盡善。恐不可以此。有疑於優劣之論也。
日月至焉者。能造其域而不能久。則諸子之於仁。雖不能如顔子之久。當其日至月至時。其心體瑩然。無纖毫之累。果能如顔子不違時乎。張子過此 之此。何謂邪。
旣謂之至則霎時光景。必瑩然無累。但有久速生熟之分耳。如子路敝之而無憾。曾點舍瑟而作時。其氣象何如。欲識日月至焉之義。當於此等處識取。過此之此。正指勉勉循循處而言。蓋此關極辛苦。纔過此關。便要住不得。欲罷不能。譬如車推船浮。自無著力處。正猶易大傳所謂過此以往。未之或知云耳。
關雎之亂註。亂。樂之卒章也。蓋本史記關雎之亂。以爲風始之意。而陳氏以關雎卒章爲亂。
古人以詩被之鐘鼓管絃。而有始終條理。則關雎一 篇。爲樂之卒章。正猶終條理云爾。朱夫子本史記而爲之訓如此。陳新安所引國語。恐當自爲一說。後考朱子大全答曾景建書。論此甚詳。
逝者如斯章小註吳氏曰。逝者不指水。斯字方指水。鄙意逝者指川流之無竆。如斯者又贊歎川流之辭耳。吳說恐非本義。未知如何。
按朱夫子答門人之問曰。逝只訓往。斯字方指川流處。則吳說似不失本文正義。若如來說則求之文義。反有所未安。今且詳味集註之意則其曰天地之化。往者過來者續。無一息之停。乃道體之本然者。所謂 逝也。其曰可指而易見者。莫如川流。故於此發而示人者。所謂如斯也。豈不明白有段落乎。
若達却便是這氣象。所謂這氣象。是曾點氣象否。點有與天地同流氣象。則縱使子路達爲國以禮道理。果能遽有如許氣象耶。
天高地下。萬物散殊而禮制行。莫非自然底道理。子路只爲不達此自然底道理。故其志氣勇銳。未免有輕遽之失。使其達此道理時。其從容自然底氣象。當如何。堯舜氣象亦不過如此。所謂這氣象。非曾點氣象而何。
其兄悖惡。將有刑禍。則其弟自當憂懼。不容恝然無愁。夫子以不憂不懼告之者何也。抑牛或怵迫不得其常乎。
君子素憂患行乎憂患。牛於其兄。若恝然無憂懼之情則是疎之也。豈可乎哉。但當素位而行。無愧於心。不當以憂患怵迫。失其常性。故告之以此。使之勝私配義。不失其正而已。不曰仁者不憂勇者不懼乎。
君子之道。莫大於仕止出處。夫子於門人一言一行。無不警責而敎誨之。至許身於無君之季氏。委質於拒父之衛輒。則未嘗禁止者何也。
不仕無義。君子之仕。行其義也。昔潘恭叔疑子路之爲孔悝家臣。朱夫子答之曰。聖人不使人逃世避人以爲潔。故羣弟子多仕於亂世。然若子路冉求之徒。亦太不擇矣。以此推之。可以見聖人之心矣。程朱子未嘗要人廢擧者。意蓋如此。然程子曰仲尼之門。能不仕大夫之家者。閔子曾子數人而已。朱子責吳伯豐受諸司文字曰。豈有顔子而爲桓司馬家臣乎。此意又不可不知也。
定性書自私用智四字。葉註分作兩項說。鄙意似不必分說。蓋未有自私而不用智。亦未有用智而 不自私者。故下文曰自私用智之喜怒。未知如何。
朱夫子答門人自私用智之問曰。此書首尾。只是兩項。君子之學。莫若廓然而大公。物來而順應。自後許多說話。都只是二句意。今以此意推之。不能大公。故有自私之患。不能順應。故有用智之弊。艮其背者。欲其大公而以有爲應跡。所惡於智者。欲其順應而循物之自然也。其曰自私用智之喜怒者。雖若袞合說。然大公而未嘗無喜怒。順應而繫物不繫心則亦不害分說。葉註固多差處。此則說得是。恐不當一倂非斥也。如何如何
*答金振伯
吾子不以栽僭率。又辱嵬牋。屬意愈勤。善乎吾子誠有志於斯也。能如是。誰不欲以誠告吾子。栽雖駑甚。將繼此而遂言之。嗟呼。世之有志於學者固少。其或有志焉則又不過誇多騁辯以爲能而已。不復留意於身心性情之間。或高談性命而不知下學之方。或博通古今而全昧反身之道。自以爲學貫天人而操存蔑效。自以爲道接閩洛而克治未聞。使偏私日長。是非日紊。而莫之恤。惟其如是。故厥或得志則生於其心害於其事。遺毒餘烈。迄于數世而未已。世之人 見其然。遂以學相戒曰學之壞人心術如此。學之禍人家國如此。學之無益而有害如此。夫以人心日壞世道日非。忞忞紛紛。莫可如何者。實由於敎學不明。談者不此之慮。方且攻擊之不已。不亦可懼可憫矣乎。荀卿子之言曰古之學者。著乎心布乎體。形乎動靜而已。延平先生曰此道理全在日用處熟。朱子曰講了將來。踐履卽有歸宿。竊以爲有志於學者。莫若爲己務實。如欲爲己務實。莫要於是數語者。未知吾子以爲如何。凡事莫不有本。惟學爲甚。不先其本而能有成者。愚未之前聞也。今試從根本上提掇。闇然 有日章之實。則自然枝葉條暢。以之致志則思慮日益精明。以之反身則持守日益牢固。以之應事接物。無所處而不得其當。下之文字。發之言語。亦將沛然有餘裕。韓愈氏所謂仁義之人。其言藹如者。豈不信然乎。抑又有一說。人之魯鈍者每患遲滯。穎敏者或多放過。故朱子曰敏底用鈍底工夫始得。呂舍人亦言後生才性過人者不足畏。惟讀書尋思推究者爲可畏耳。今吾子旣穎敏過人。亦其涉獵者廣博。或於細心思量處。不曾耐煩理會來。故考古訂今。非不該洽。或少磨礱沈潤底氣象。亦或有差却本文正義處。 此則或恐非但文字言語之失而已。如何如何。自己全未有得力處。乃反攻人之病。有若能知方藥者然。誠可笑。然其言則皆古之遺也。吾子必樂聞之。故不辭其愚而盡言之。不以下體棄葑菲則未必不爲進修之一助也。別紙所詢。又此條陳。如有未當。乞須批敎。
別紙
《中庸》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논하고 있다. ① 〈中庸章句序〉에서 언급된 《輯略》은 石子重이 기록한 것 중 번잡한 것을 빼버린 것일 뿐, 《或問》이 반복적으로 論辨하여 취사한 것과는 다르다. ② 天과 人은 간격이 없으니, 一理로 서로 感한다. ③ 至靜時에는 다만 ‘能知覺’이 있을 뿐 ‘所知覺’은 아직 없으니, 坤卦의 純陰이지만 陽이 없을 수 없는 것에 비유한다면 옳지만 復卦의 하나의 陽이 이미 움직인 것에 비유한다면 옳지 않다. ④ 費隱章의 ‘費’와 ‘隱’은 形而上下로 나누어 말한 것이 아니다. ⑤ 遠代의 위패라 할지라도 昭穆에 따른다. ⑥ 物의 往來屈伸․榮悴開落 등은 모두 鬼神의 작용이니, 鬼神章으로써 道의 費隱함을 밝혔다. ⑦ 24장은 天道로써 誠明의 의미를 밝힌 것이다. ⑧ 《中庸》은 道體를 밝히고 있고 〈西銘〉은 仁體를 밝히고 있지만 그 理는 하나이다.
中庸序一二同志。未知爲誰。輯略世不多行。未及得見。未知但錄二程語否。抑附見己意否。其發明意義。與或問何如。
一二同志。未能的知爲誰。然今以朱子書觀之。其與南軒,東萊,西山及范伯崇,何叔京,林擇之諸人。論中庸說非一。疑或指此輯略。只就石子重所錄。刪其煩亂而已。非如或問反復論辨其取舍之意也。此書世多有之。近聞朱子遺書新自中原出來。凡朱子一生所編輯。皆在其中。此亦恨未及見耳。
天地自然之體。宜若無待而自位。而當治平之世則日月光華。六氣不戾。山川無崩渴之災。及其衰亂則薄蝕淫沴。冬雷夏霜。山摧地坼。是天地之大。而其消息常變。反有待於人者。果何理歟。
天人無間。一理相感。洪範五事。肅乂哲謀聖狂僭豫急蒙之異。而有雨暘燠寒風之時與不時者。皆此理也。其應不僭。若響應聲。古之人君。畏天之威。于時保之者此也。中和建極。以致位育之功。更有何疑。若如來喩則不幸而近於唐泥冥冥而有分別天人之失矣。
或問中論程子答蘇季明一段。以引復卦爲說爲非。竊詳程子答問。首末語脈頗分明。未見有以復卦爲比於靜時之意。而朱子之言如此何也。且旣以爲非。而編入近思錄者何邪。
蘇季明問答中。有曰無事時。耳須聞目須見。又曰靜中須有物始得。此數語皆極精當。而其曰耳無聞目無見。其曰靜時旣有知覺則怎生言靜。如復卦下面一畫便是動也。安得謂之靜。則前後不相對値。蓋出記錄之誤。故朱夫子辨之曰當至靜之時。但有能知覺者。而未有所知覺也。以爲坤卦純陰而不能無陽則可。以復之一陽已動爲比則未可也。其於未發已發界至處。可謂八字打開矣。朱子初年答南軒書及記論性答藁後。猶參用其說。後來答呂子約書及中庸或問。始分析如此。反復參究。可得其旨矣。且此是 河南旨訣。其可以一二句記誤。而不收入近思錄耶。
費隱章小註。或說形而下者爲費。形而上者爲隱。朱子曰形而下者甚廣。形而上者。實行乎其中。竊疑費字不當直云形而下。今且就人身言之。耳目手足。是形而下者也。耳當聰目當明手當恭足當重。隨其形體而則無不具者。乃費也。所以聰所以明所以恭所以重。非見聞所及者。乃隱也。今直以費爲形而下則恐未安。朱子不以或說爲非者何邪。
費隱固不當以形上形下言。賢者疑之是也。然若小 註中朱夫子答人之問則蓋亦因其說而點化出來。其曰形而下者甚廣。形而上者實行乎其中。無物不具。無處不有。故曰費。就其中形而上者。有非見聞所及。故曰隱。此其爲說。大煞明白。少無可疑。賢者於此不通看上下文義。直攙斷形而上者實行乎其中以上一截以爲疑。此則或恐是失照管處。幸更入思議如何。耳當聰目當明以下。推說得好。
祔必以班。尸必以孫。則帝王家祫祭時。畢陳祧主。見在子孫或至數十世。亦以昭穆之次推之。而昭常爲昭尸。穆常爲穆尸否。且每位各設一尸乎。抑 一尸兼數位否。趙氏悳有九尸七尸三尸之言。
後世尸法不行。今不敢質言。然祔旣以班。則雖遠代尸。必以昭穆。如祔祭之中一以上可知矣。各尸或兼尸。趙氏說其必有所據矣。
費隱章以後至問政章。大抵皆論人道之常。中間忽揷入鬼神一章。其義何居。天地間物事。莫非鬼神爲之體。而無形聲可見聞。則發明費隱之道。特地明白故邪。
來喩大槩得之。凡物之命於兩間者。往來屈伸。榮悴開落。盛衰消息。無非鬼神之所爲。是其爲體甚微。無 聲臭影響之可尋。而物不能遺之而獨立。則欲明道之費隱。莫切於此。故子思於此。推類以著之。又就鬼神全體中拈出祭祀之鬼神。以明其體物而不可遺之驗。使一節深於一節。此鬼神章所以揷入中間之義也。
二十四章言天道。而但以吉凶禍福之先知爲言者何也。竊謂此章不必把作緊要看如何。
記曰淸明在躬。志氣如神。有物將至。其兆必先。通書曰無欲故靜虛。虛則明明則通。聖人之所以先知者如此。發明誠明之意。孰要於此。
游定夫讀西銘曰。此中庸之理也。葉註外果無他意否。竊謂葉註猶有未盡者。蓋中庸始言天命之性。中散爲萬事。末言篤恭不顯之妙。而西銘亦首言天地之帥塞。中間又有許多規模工夫。末乃言存順沒寧。其首尾開合略相似。如此看如何。
中庸明道體。西銘言仁體。其指雖殊。其理則一。游氏之意似不出此。明道先生以爲求之言語之外者然也。葉註固未盡。來諭亦似牽合。未知如何。
夜間讀書。每患昏困。往往對卷眠倒。雖勉强提掇。終不能振發。徒覺其辛苦。當如此時。且置本業。或 諷詠古人詩句淸警可喜者及箴戒痛切之言。或披覽忠賢事蹟感動人處。以激發昏懶之氣。無妨否。
陳茂卿夙興夜寐箴曰。讀書之暇。間以游泳。發舒精神。休養情性。日暮人倦。昏氣易乘。齊莊整齊。振發精明。竊嘗以爲日用工夫。莫此爲要。王魯齋爲金華洞主。以此箴爲功令。其意甚好。試加之意如何。來諭所謂且置本業以下甚善。然易曰嚮晦入宴息。醫書曰三更不寐。血不歸心。夜久不寐。過自刻苦。亦恐非頤養之宜。
*答金振伯 戊戌
令弟婦之喪。彼此俱劇慘怛。久欲一書相吊。薄憂宂未果。何意辱問先及。感與愧幷。仍審侍奉悲疚之餘。重有枕爐之憂。雖已向安。不勝驚慮。栽扶衰力疾。哭死撫孤。傷心慘目。不言可想。撼頓歸來。殘瘁轉甚。昨以地主意外臨問之故。不免一番曳裾。殊非疎蹤所期。還可笑歎。東江猝漲。滯宿悅卿家。夕始還巢。惠札已留案。不覺煩襟稍豁。但每得來書。稱借過實。是爲蹜踖難安處也。近來益覺過情之爲可恥。方思拙修爲庶幾。而一二知舊間。愛而不知其惡者。往往以不 著之語相加。將使人狼狽後已。極令人窘憫。况譏誚之言。已從傍竊發乎。尤怕人尤怕人。相愛如振伯者千萬察此苦心。務以直諒相益。毋徒以奬飾爲事。幸甚幸甚。長夏光陰。都從愁寂中過。益覺懷人之苦。而盈盈一水間。無異千里隔。詩人所謂室邇人遐者。正爲今日道也。臨書又一悵然。
*答金振伯 丙午
謬詢疑節。素無的見。何敢以禮許人。况已有哀家見行之規。尤不敢開喙。而事同一家。旣難終默。且承有從先穩當之遺意。則請略陳瞽見。以備財擇可乎。按 儀禮喪服變制中。引檀弓練衣葛腰絰之文。疏曰練衣。練中衣也。正服不可變。後人因此遂不練正服。先輩多從其說。黃勉齋以不練正服。引經駁之。然今旣從疏說不練已久。更無可論。而旣葛首絰而獨不葛絰帶者。非但輕重失次。其於葛腰絰之文。安所施乎。若以間傳腰絰不除爲證。則是不知古人旣葬已葛絰。至是不復除。家禮從簡。無葬時受服之節。至小祥不復言者。其文未備處也。竊以爲變麻服葛。似合禮意。如何如何。絞帶變麻服布。禮有明文。好禮之家行之何妨。若以駭俗爲慮則惟在量處耳。葛旣阻雪難 採。則依代顈之義用熟麻。似無害矣。况備要已言之乎。旣變絰帶則絞帶之變。似在不言中矣。婦人截長裙。嘗見禮家當變服時。令一子弟指敎行者婢子。用剪刀略略裁節。別無倉卒難便事矣。如何如何。婦人之除絰帶服葛絞帶。自是通行之規。至於首絰不變則與向所謂男子不變麻絰者同。其無意義。竊以爲婦人亦不可不葛首絰。亦未知如何。
*答金振伯
癡坐竆廬。抑鬱無誰語。玆承哀札。滿紙縷縷。哀苦宛轉。怳若促膝談悰。旣感其不相鄙厭。又竊爲之悲戀 無已也。書來已數日。不審辰下侍奉孝履何似。栽年前非無父子分離之苦。猶能隨分遣日。今則愁居懾處。往往有不堪竆寂時。是亦莫非年力漸衰。强懷不能張弱念而然邪。書中見諭之意。固知出於哀痛罔極之至情。然念哀氣力。本自淸羸。吾儕尋常所共憂念。迺今創巨痛深。日就柴鑠於不自知覺之中。而虛嘔惡心。都是氣敗胃弱之致。哀雖不以爲意。傍觀者不亦凜然寒心乎。太夫人年紀已高。惟哀侍是倚。哀侍縱自輕。奈太夫人何。况孝之大者。在於謹疾衛身。嗣德承家。以終始其孝而已。固不在膠守常制。殘敗 氣力。或至毁滅而不悟也。自頃以來。相知如骨肉兄弟者。次第凋謝略盡。不肖殘喘。後死孤存。他日所倚信如哀侍者有幾人哉。向所以强進逆耳之言者。其情亦慽矣。哀以今人居喪之節。不得一如古人爲痛。是固出於純孝致哀之至。然風氣有厚薄。稟受有强弱。固難以一槩言。况古人亦有毁不滅性。喪有疾飮酒食肉之文乎。所貴乎讀書通經術者。爲能隨時處義。不至拘泥不通也。不然朱夫子與門弟居喪者言。何以有勉從權制之諭。退陶先生於其子瘧後奔母喪之初。何以有送脯助胃之訓邪。夫豈不義而曾子 言之乎。今雖以太夫人之命。不得不稍變喪食。然若一向哀傷。不能安心。亦恐心氣不平。脾胃不和。雖補無益也。肉丸或肉醬。旣無食肉之嫌。又有補養之益。而朱夫子已言之。是則尤不當嚴加揮斥。使內外供養之人。措手不得也。愛慕之至。語涉煩委。諒蒙恕察否。栽近煉臍治泄餘數旬。神氣尤昏苶無收拾。每當晝枕書而臥。半日或終日。其於硏究體驗上。茫然無復下手處。如得强輔。日夕相提掇。豈至頹廢若此之甚乎。自此雖拘忌不得數奉問。幸於讀禮之暇。不惜時賜鐫誨。以警昏惰。千萬千萬。
조덕린(趙德鄰)1658년(효종 9)∼1737년(영조 13).
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택인(宅仁), 호는 옥천(玉川).
군(頵)의 아들이다.
1677년(숙종 3) 사마시에 합격한 뒤 1691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설서·교리·사간 등을 역임하였다.
1725년(영조 1) 노론·소론의 당론이 거세지자 당쟁의 폐해를 논하는 10여조의 소를 올렸다가, 노론을 비난하는 내용이 있어 당쟁을 격화시킬 염려가 있다 하여 종성에 유배되었다.
70여세의 나이로 3년간의 적거(謫居)끝에 1727년 정미환국으로 소론이 집권하게 되자 유배에서 풀려 홍문관응교에 제수되었으나, 서울에 들어와 숙사(肅謝)한 다음 곧 고향으로 돌아갔다.
1728년 3월 이인좌(李麟佐)의 난이 일어나자 영남호소사(嶺南號召使)에 피임, 격문을 돌리고 일로(一路)의 의용병을 규합하여 대구에 내려갔으나 난이 평정되자 파병(罷兵)하였으며, 이 공로로 동부승지에 임용되고 경연(經筵)에 참석하였다. 얼마 뒤 병으로 사직하고 세상에의 뜻을 버린 채 다시 환향하여 학문에 몰두하자 원근에서 제자들이 모여들었다.
1736년 서원의 남설을 반대하는 소를 올리자, 1725년의 소와 연관되어 노론의 탄핵을 받고 제주로 유배가던 중 강진에서 죽었다.
저서로 《옥천문집 玉川文集》 18권이 있다.
제산집
*與趙玉川 德鄰 書 乙巳
聖鐸頓首再拜司諫文丈執事。伏以執事之始受玦也。親者躬餞。踈者書問。有力者助。有財者贐。非有要約徵發。而其咨嗟太息。奔走而爭先者。無間於地之遠近。趣之異同。若聖鐸者。於執事。分厚矣。居近矣。辱知辱愛。最深且厚矣。其於執事之行。雖窮約無財力以相助贐。時因北風。再拜奉一書。以效加餐之祝者。豈區區所敢一日忘哉。顧自以身處苫凷。創巨痛深。且未及蒙被下問。而徑先率情。隨衆人操簡牘。以溷於下執事。有所未安於禮意者。肆致因循歲月。以至于今。第往往因英之士友。扣問動靜。以慰下情而已。迺今不意獲荷記存千里垂慰。辭旨惻怛。哀感之外。又頗自幸。從今以往。可以得伸候問之私也。仍竊伏念。北海風霜。非尊年久滯之所。而經歲拘幽。賜環杳然。且承近來體氣。久失和平。仰深慕慮。耿耿不釋于心。然愷悌君子。神明所勞。又况定力有素。無入不自得。一時感觸。豈足以减涪陵髭髮耶。是祝是祝。按圖經。愁州。在咸關以北千里之外。與女眞接境壤界。魑魅之宅。豺虎之窟。自古儒賢風敎所未甞曁。而前後數十年間。葛庵李先生遷於是。今又執事居之。朝廷之所以待賢傑。則已甚矣。而北方人士其於遭遇。盖荐有幸焉。曾聞朱生楗者。從葛翁講學。稱北土之秀。未知今尙無恙。往來問字於門下。而他所接儒士。亦有能興起於李先生之敎者乎。君子之道。無遠近無榮辱。惟其所在。苟有可以惠利於人。則必眷眷焉。今執事之文章才學。雖不幸不試於世。而北人之所望於執事者。盖李先生之後一人焉耳。幸望勿鄙夷其人。且無過於撝謙。而有以作文雅之風於荒陋之鄕。則是豈獨爲北人幸。於李先生。亦有光焉。未知執事以爲如何。敢恃平日誼分之深與知愛之厚。忘其哀苦而僭率至此。悚仄悚仄。天道循環。霈澤有時。伏乞爲國自愛。
玉川先生文集
答金振伯 聖鐸
振谷一會。良夜淸話。浮世豈易得此。歸來充然。至今若有得也。况玆書委意惓惓及此。可知一般意味。尤用欣濯。更認侍外學履超勝。何緣再接芝宇。豁此蒙蔀耶。錦水逝去之後。意欲一弔遺孤。因踐佳約。而獲灑陶瓢之淸風。歸而寓之文字之間。以償晩生執鞭之慕。旣孤斯願。記文之託。亦此遷就。不知來春。得遂此計否耶。山中小廬。略有林壑之趣。而主人積習惰棄。惟日瞌睡。豈足當命名之意。幸左右時賜警策。不 至遠外。則是所望也。亦願及此暇日。懋進大業。厚養基本。以副時望。以慰見慕者之心。
권두기(權斗紀)1659년(효종 10)∼1722년(경종 2).
본관은 안동. 자는 숙장(叔章), 호는 청사(晴沙).
좌찬성 충재 벌(橃)의 5대손으로 아버지는 유(濡)이다.
1687년(숙종 13)에 사마시에 합격하여 생원이 되고,
1696년에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정자가 되었다.
1701년 예조좌랑을 지낸 뒤 잠시 사직하고 귀향하였다가 다시 해운판관(海運判官)을 지냈다.
1707년 정언을 거쳐 지평이 되어, 시사를 논하다가 파직, 유배된 수찬 김세흠(金世欽)의 억울함을 상소하였으나 왕의 노여움을 사 해남으로 귀양갔다.
1711년 유배에서 풀려나 다시 정언으로 복직되었다.
청사선생문집 (晴沙先生文集)이 있다
제산집. 청사집
輓權持平 斗紀
波浪西江久未平。寒亭一夜夢先驚。九原再結灘翁契。千里重傷雪老情。
白簡危言傳史筆。黃扉雅望負鄕評。莫言時事猶堪做。今日何人是國楨。
이협(李浹) 1663(현종 4)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열경(悅卿), 호는 동애(東厓).
이조판서 근곡 이관징(觀徵)의 아들. 식산 이만부의 숙부
미수 허목(許穆). 홍우원(洪宇遠)에게서 수학하였다.
일찍이 문예를 성취하였으며, 1689년(숙종 15) 생원·진사시에 모두 합격하였고, 특히 생원시에서는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같은 해 유생으로 대사헌 이현일(李玄逸)의 유임을 청하는 소를 올렸다.
벼슬은 사옹원봉사(司饔院奉事)에 그쳤다.
제산집
輓李侍直 浹
風儀自與衆人殊。好箇家門好丈夫。少日名聲傾太學。晩年蹤跡落南隅。
包荒度曠物無忤。急難義高人共趍。廊廟大材空逝沒。桂坊誰復進嘉謨。
得御由來二十年。更從賢器結交偏。常慚許討牀頭卷。幾荷分㪺松下泉。
白璧空悲埋宿草。靑山又見起新阡。遠遊千里違臨穴。孤負平生涕自漣。
서성구(徐聖耉)1663년(현종 4)∼1735년(영조 11).
본관은 달성(達城). 자는 희언(希彦), 호는 눌헌(訥軒) 또는 기암(寄菴).
숙(璹)의 아들이다.
1691년(숙종 17)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어려서부터 대자(大字)를 써서 이름이 났고 혼자서 학문에 힘써 크게 경지에 이르렀으며, 특히 초서(草書)에 능하여 일세에 독보적인 존재가 되었다.
원근의 선비들과 연결되어 서전(書牋)을 보내고 글씨를 배우려는 자가 문하에 모였다.
서예로 명성을 떨쳤을 뿐 아니라 역학(易學)에도 통달하고 노후에까지 학행을 쌓아 세상에 알려졌다.
저서로는 《학리도설 學理圖說》·《의례변 疑禮辨》 등이 있다.
訥軒文集
輓詞[金聖鐸] 제산집에는 미수록
憶昨承顔色。秋風竹隱堂。開尊當暮雨。留客擧深觴。
鴈塔芳名早。鷗沙晩契長。忽聞觀大化。回首欲霑裳。
이만부(李萬敷)1664년(현종 5)∼1732년(영조 8).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중서(仲舒), 호는 식산(息山).
아버지는 예조참판 옥(沃)이며, 어머니는 전주이씨(全州李氏)로 승지 동규(同揆)의 딸이다. 어려서부터 가학으로 학문을 전수받았고, 지취(志趣)가 고상하였으며, 정주학(程朱學)에 심취하였다.
1678년(숙종 4) 15세 때 송시열(宋時烈)의 극형을 주장하다가 탁남(濁南)에게 몰려 북청(北靑)에 유배된 아버지를 따라가 그곳에서 여러 해 동안 시봉하며 학문을 닦았다.
그뒤 아버지가 유배에서 풀려나 고향에 돌아왔으나 벼슬을 단념하고 오직 학문연구에 전념하였다. 그는 누대(累代)를 서울에서 살았으나 영남의 학자들과 친분이 있는 관계로 그곳에 이거(移居)하여 후진양성과 풍속교화에 힘쓰며 저술활동을 하였다.
1729년(영조 5) 학행(學行)으로 장릉참봉(長陵參奉)과 빙고별제(氷庫別提)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하였다.
그는 평소에 주염계(周濂溪)·정명도(程明道)·정이천(程伊川)·장횡거(張橫渠)·주자(朱子) 등 5현(賢)의 진상(眞像)을 벽에 걸고 존모하였으며, 이황(李滉)을 정주학의 적전(嫡傳)으로 존숭하였다. 따라서, 성리학적인 견해도 주리적(主理的)인 경향을 보인다.
만년에는 역학(易學)에 관해서도 깊이 연구하였다. 글씨에 뛰어났으며, 특히 고전팔분체(古篆八分體)에 일가를 이루었다.
저서로 문집인 《식산문집》 20책 외에 《역통 易統》 3권, 《대상편람 大象編覽》 1권, 《사서강목 四書講目》 4권, 《도동편 道東編》 9권, 《노여론 魯餘論》 1권 등이 있다.
제산집
*輓李息山 萬敷
芹谷風流邁二疏。博泉文彩配三蘇。承家節操簪纓最。盖世名聲父子俱。
邦國近來逢殄瘁。士林今日失師儒。堪嗟殿柱親題處。姓字虛勞聖眷紆。
封侯爭似識韓君。免作陳公責沈文。冰貯玉壺無點累。章分雲漢有奇紋。
幾年欲問楊雄字。他日空瞻董相墳。升室淸塵何處挹。獨留牕月影紛紛。
公以所居室如升樣。嘗謬屬記文於聖鐸。而聖鐸辭不敢爾。
聞說先生東首日。陽陽不亂若平時。冰輪托興看心事。剛德名孫見訓辭。
聲利塲頭能早判。死生關裏故無疑。獨憐海外孤鴻在。誰慰竆途大阮悲。
*與李息山書 癸巳
聖鐸拜。數十年來。學絶道喪。搢紳處士。罕有能言吾儒家言者。然窮巷布衣之士。或不見試於世。而抱負先聖賢書。枕藉諷詠者。故不絶響也。若其生富貴之家。膏粱聲色之動其欲。功名勢利之痼其心。而卽回頭轉脚於大雅君子者。道以追踵古則者。將十無一二焉。乃執事則不然。生於公卿之門。長於名利之場。卽所謂膏粱綺紈子弟也。而顧乃自幼少時。已絶意榮進。獨探古昔賢者之事業。文章爾雅。學問深邃。蔚然爲東南章甫首。遠近士談者。莫不知有天雲齋先生者。噫。數十年來。搢紳處士之爲吾儒家言者。乃於執事而見之矣。執事之文章。旣本之先大爺南谷先生。而其所從遊問學。乃又於葛庵李先生之門。夫先大爺文章。固一代之宗工鉅匠。而葛庵李先生之道學。又近世儒林之喬嶽也。卽聖鐸之於執事。其所傾慕而期望之者。豈特以脫紈袴蛻聲利。從事於流俗之所不爲而已哉。聖鐸窮巷之匹夫。年三十。猶不脫於名利窠臼中。而每一聞執事之風。輒不覺斂袵起敬。然搶楡之鷃。不敢與負天之翼相及。謹因書以布鄙懷。伏惟執事察焉。
*與李息山書 壬子
聖鐸自童子時。已聞執事負儒林重望。嚮風景仰。三十有餘年矣。商雒之與花山。相距不二百里。異乎風馬牛之不相及也。而未甞一日供灑掃之役於門下。顧因從者車馬入此土。偶然承拜。前後凡二焉。又皆悤悤。不得析舊疑請新益。此則聖鐸不敏之罪也。然日者之奉卒霎之頃。而執事之所以遇之拳拳不已也。溫乎其容。若將親而與之也。藹乎其言。若將收而敎之也。聖鐸退而感激自幸。以爲不肖之軀誠無所比數於人。而乃不爲大人君子之所棄遺。賜之顔色。而與之酬酢如此。是其鈍滯之質。猶不至於不可與共學。而或者有可敎者存乎。於是竊覬執事者不遄其歸。而少留東厓。則將齋沐洗心。乘間一進。從容信宿。晤言周旋。叩名理之微旨。拾大雅之緖論。以袪平生之固陋。而伸卅載之傾慕。實區區之誠也。玆者。伏聞執事整駕言旋。下懷莫遂。高風復遠。瞻望悵歎。惘惘若有失也。聖鐸仍竊伏念。比年以來。學絶道喪。儒林之間。卓然可爲斯文宗盟者。世或鮮其人焉。惟執事之文章學術。爲當世所推服。江以西士之考德問業者。莫不於執事乎是歸。則在今毅然以儒敎自任。上爲先賢。不絶其端緖。下爲羣蒙。不迷於趨向。非執事之責而誰。聖鐸汙不爲面腴。執事若不以愚言爲妄。則聖鐸雖不敏。請自此有所稟焉。溽暑政酷。伏乞爲道自愛。愼其驅馳。
息山先生續集
書
*答金振伯 聖鐸
萬敷敬復振伯道契。僕之知足下。不但得於士友之頌。而從弟在時。每言足下文行不已。及瘞渠也。始得見足下顔色。思其言。如見其人之感切。方悲衋卒卒。未有以少伸平素乖隔之恨。頃者。斯文之會。幸得數次之奉。然稠廣中。亦未盡傾瀉。至今恨恨。乃足下先辱書致慇懃。多是僕所欲道。而足下先之。揣得鄙拙 者。不作高明度外之物。感則深矣。惟禮太恭謙太過。下面期責太重。非僕之所堪承留。夫道契之義。自與世俗之惟以年齒者不同。韓退之柳子厚。亦能言之。今僕何敢當於足下乎。雖然。足下雅士也。固不爲此謾戲。葢如所謂言之者。將以勉之也。則僕當尤爲之感也。僕少也。有矯矯之志。所自期自重。惟恐其不高不大。百家谿谷。出入上下。狂走數十年。竟無所著。落竆而反求濯去浮雜。又專以平且實者爲務。而氣質虛薄。喪病相仍。不能力行。乍得旋失。年已老而無所聞。病益痼而無所成。時自反顧初心。未嘗不靦顔泚 顙。而洛下少日朋友。凋落已盡。南來後李幼材,申元伯二公者。愛我特厚。分而書則得其箴言。合而晤則觀其德機。尙庶幾藉其提挈。而免爲下品之歸矣。奈何天之無意於善人。而二公次第仙去。益覺斯世踽踽。若瞽人瞎馬。不能以自循塗轍。傷痛之懷。豈但交遊之私而已。竊惟念如得强輔。不相遐棄。時加點檢資益。猶可望秉燭之功。少收桑楡之景也。足下生於禮法之家。處乎鄒魯之鄕。有其地矣。溫雅謙恭。氣淸而材敏。有其資矣。遊於嶽老父子。而服其敎。親有道矣。文理淵博。識解精明。亦學有所得矣。向所求於人 者。舍足下而誰。此所以未見而慕。旣見而喜。得書敎尤喜。拳拳而不自已者。足下其有意乎。書末所敎。將肯與之往復。僕雖老病無似。敢不策勉以從事下風哉。噫。世級已降。敎化頹弛。以詩賦爲極功。科第爲大業。巧中名利。則稱爲名勝。廉潔自守。則視作庸調。以致人志操日鄙。風習大亂。若無親切自得。義理精通。踐履牢實。千萬人吾往之意。難乎免於頹波之中。甚可恨矣。此中學者有數人。可與共學。而其久遠可望者。亦未易。先輩遺風已邈。吾道之孤。未有甚於此時。惟吾足下。益奮邁往。以副吾儕之望。是垂死區區之 願。自餘書何能盡。
*與李君直金振伯
敬問僉靜養履。玆旱暘衛裕。進修益光乎。數十年往來貴鄕。每患緯繣。今因有事斯文。文會甚盛。警欬一席。參聞緖餘。索居鈍滯之人。其幸孰大於是。惟歸途値潦漲。越涉重江。屢阽危怖。中暑頹頓。全無况趣。何足爲朋友道也。刊事刻得幾板而了斷有期耶。仄聞宣城追發通告文字。向者六士旣歸。而復有此者。遙度所未能及。其無梗事之慮乎。僕於其時。晩忝末席。病未究竟卒業。而此是蒼,密二公所講定鋪置者。霎 見。且吾議論不敢到。雖然。愚慮反覆。尙耿耿有不能自已者。敢陳於尊契實際之下。幸垂察焉。大抵古今書。莫不有類例。今通錄一書。方之於古。則與程門之遺書,外書。朱門之語類類者也。其附刊。旣刊之年譜。似無所據。密翁所以證援於理學錄者。未見其的。想其意必兼門人錄而言之。而卷首旣取月川所撰總錄。雖無年譜。及門諸公之淵源宗統。亦有在矣。况其門人錄。殊欠該備。不得爲完書。而入梓所不及乎。以此言之。當日李寢郞之質疑於密翁者。不可謂無見。而宣城所謂愼重一言。不論其所由。亦不可全廢。未 知僉意以爲如何。且此書皆裒聚後人所記。則雖微言小箚。其有語及老先生者。不可有遺。况門人親問而親記乎。心經釋疑言語文字。固不無牴牾處。而出於艮齋之手。與記善錄無異也。若採其問答之屬義理工夫而成論議者。稍刪正收錄。則漏遺之歎。取舍之嫌。庶幾不存。其他先輩追述之言。亦莫盛於老先生。偶考數條錄呈。此外諸家文字。亦必有可取者。恐不可草草也。昔刊程集也。南軒諸公。力主胡本。其所差誤不過文句小疵。而朱子縷縷辨正。不少苟徇。我東刊景賢錄也。退陶南冥。俱有所傳錄。惟恐率略。而 至於寒岡。又爲之續補。由是觀之。此書不可謂無遺恨。而蒼,密二公。已作古人。撫卷愴悢。實有難作之感也。然天下之義理無竆。尊德編摩。不可不審。而二公心事公平正大。以益加斟酌。似必有待於後死。而不徒以自樹不容爲務也。今難分附各門。則寧於卷下總名。以補遺錄之凡例中。記此追錄之意。而至於年譜。斷然置之。亦未知如何。此亦講論一事。有懷不敢隱。朱先生所謂儻蒙矜恕。不錄其過而留聽焉者。深有望於僉尊耳。
하덕망(河德望) 1664(현종 5)
본관은 진주(晋州). 자는 섬경(瞻卿). 호는 양정재(養正齋)
사헌부 지평 역임
字瞻卿號養正齋又號光影亭雪牕澈子顯宗甲辰生早從事學問性理諸書無不精透文章典雅筆法勁健兼通六藝親病血指注口幾絶而甦竟享八耋親沒廢功令業▼(殹/金)池種蓮築亭其上優遊自樂一切世間名利泊如也監司閔應洙以遺逸啓聞御史朴文秀知事金在魯筵奏公學問行誼上卽下南臺召命時公已歿上聞之不勝慨惜其葬也士友相與之吊曰鄕先生歿矣吾黨何所依仰門人弟子爲之服者甚衆乙丑相臣又筵白吏曹承傳 贈司憲府持平有遺集(養正齋集)
제산집
輓河處士 德望
頭流山下古多賢。謙老遺風綽有傳。靜坐一生穿膝榻。幽居數畝賞心蓮。
高標不受塵埃染。令德終膺福壽全。聖代蒲輪還寂寞。飄然去作玉京仙。
公是襄陽舊處士。安溪還與鹿門同。閒中日月書千卷。靜裏丘園樹萬松。
苦節自甘咬菜味。韶顔不借煉丹功。如今懿範尋何處。獨拜牀前愧卧龍。
恩譴南來近德鄕。公評耳熟六年強。楊春家世敦親懿。石奮兒孫習義方。
游藝端嚴傳額法。硏精牢落富胷藏。誰能繼作先賢傳。闡得幽光永不亡。
蒼黃昔日見星行。猥荷藍輿路次迎。銜恤未遑陪一語。瞻儀猶得慰平生。
但聞松柏春長茂。誰道龍蛇夢忽驚。跡滯江潭違執紼。傷心終負瓣香誠。
황수일(黃壽一)1666년(현종 7)∼1725년(영조 1).
본관은 창원(昌原). 자는 용오(用五), 호는 용강(龍岡).
증조부는 주부(主簿) 황언주(黃彦柱)이다. 어려서 부모를 잃고 혼자 각고면려하였으나, 송독(誦讀)하는 것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벼슬에 나가는 것에 뜻을 두지 않고, 경서에 침잠하였으며, 이남령(李南嶺)의 문인이 되었다. 우담(愚潭) 정시한(丁時翰)과 왕래하였으며, 고산(孤山) 이유장(李維樟)과 교유하며 더욱 절차탁마를 하였다. 특히 예제(禮制)에 밝았으며 세간의 이록이나 부귀에는 관심이 없었으며, 그의 모든 처신은 예법에서 나왔다. 중년이후에 집안이 몰락하여 왕왕 끼니를 거르기도 하였지만, 처하는 데에 전혀 흔들림이 없었다. 유집 몇 권이 있다.
龍岡先生文集
*答金振伯[聖鐸壬午]
前書未復、而又承情問、非眷厚、何能及此、三復以還、愧與感交集、第審色憂非細、貢慮無任、第誠感不誣、匪久、當收勿藥之喜矣。[壽一]自春稍、村有痘患、擧家奔竄、塊然守舍、細碎身親、以玆向來鑽古紙事業、亦難收拾、泛泛悠悠、虛送好光陰、此生可憐、積雨新霽、秋入郊墟、志士增感、幽人發省、正於此時、第未知淸懷雅量、發嘐嘐向上第幾層耶。竊覸吾尊天賦不貧、更願大其心、篤其志、母或安於小成、如何如何、作成之方、唯師門在邇、何患就正之無所、愛慕之深、期待不淺、卒發狂言、幸擇蒭蕘、如[壽一]者、非不知爲仁在己、而推與別人、自安暴棄、誠可笑也。亦可哀也。
유현시(柳顯時)1667년(현종 8)∼1752년(영조 28).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달부(達夫), 호는 호와(壺窩).
아버지는 계휘(啓輝)이며, 어머니는 진성이씨(眞城李氏)로 조영(朝英)의 딸이다.
향시에서 장원하고 45세 때 생원시에 장원하였으나 대과를 포기하고 후진교육에 힘썼는데, 66세에 안동부의 추천으로 안동부내 도훈장(都訓長)이 되었다.
1749년(영조 25) 수직으로 동지중추부사가 되었다.
만년에 《심경 心經》과 《근사록》을 연구하였다. 이재(李栽)와 태극에 대한 토론을 벌여 그에게 인정받았으며, 김성탁(金聖鐸)으로부터는 소동파(蘇東坡)에게 비견할만한 재주가 있다는 칭찬을 들었다.
저서로는 《호와유고》 2권이 있다.
제산집
丁未。寓瓢谷。四月十日夜。宗姪善伯 敏行,柳達夫 顯時,柳允卿 升鉉。及余小飮溪上。族姪宇漢,兒子晉行。樂行初名。末至。以朱文公朗然淸夜月明時之句。分韻。得月字。
南溪多樹木。薄暮淸風發。吾宗適無事。扶杖度深樾。
臨溪對綠酒。座客盡華髮。而我躡羣賢。笑談愧唐突。
柳林忽暝色。飛絮暫明沒。擧杯飮未已。復照松間月。
相顧意歡適。不覺醉兀兀。人生百年內。此樂未宜忽。
同志易睽達。佳節共消歇。山蔬與匏樽。不須嫌蒼卒。明朝酒醒後。月落思慌惚。
*瓠窩記 柳公顯時齋號
岐之西有村。曰璞谷。一名瓠谷。谷之中有窩。曰瓠窩。窩卽上舍柳公所居室也。柳公賢而有文章。晩補太學生。人方以楩柟豫章期公。而公乃以瓠扁其窩。讀書其中。人之見者。莫不疑之。求其義而不得。不佞聖鐸。於公爲戚末。而又忝同辛卯司馬。辱知愛最深。間嘗詣公居。公引入窩中。從頌談文史。語間。忽笑指壁上謂曰。子盍爲我作瓠窩記乎。聖鐸謝不敢。因請曰敢問瓠之義。何居。公曰。古人之稱瓠也多矣。有曰無口瓠。有曰繫而不食之瓠。有曰瓠落無所容之瓠。且里名瓠也。吾於是四者。有取焉。聖鐸唯唯而退。旣而惟之。異哉。公之以瓠名窩也。果然哉。人之見而疑之也。夫無口瓠。以無能稱也。不食之瓠。以不用設也。公旣賢而文。懷利器以竢時。則公雖不伐其能。公之能固多矣。而鵬之翼。驥之蹄。鴻鴈之羽。乘長風。騁九軌。漸雲逵而翺翔。可持左契以必也。則公固將有用於世者。而非沒沒蓬蒿間。老死一隅者也。卽無口不食之義。於公奚當哉。且公以里名乎。則里之名。一爲璞谷。璞乃玉之在石中者。而士之懷寶不市者類之。公何不取璞以爲號。而乃以瓠乎。是三者。皆非公名窩意也。然則公其有感於瓠落之瓠乎。夫物量不齊。大小殊用。大之不可使小用也。猶小之不可使大用也。千尋之木。百圍之材。可以爲棟梁。而不可以爲扂楔。其用大也。騏驥驊騮有千里之足。而責捕鼠。則不如狸狌。其能殊也。故聖人有言曰。君子可大受。而不可小用也。古之魁閎俊偉之士。往往以無所用。棄於世者。豈不以此也歟。然是豈其人之果無用哉。世之用材者。拙於用大爾。今夫五石之瓠。其大呺然。其腹廓然。而以之爲瓢。則不合。以之盛水漿。則不能擧。宜乎惠子之爲無所用而掊之也。然爲之大樽。而浮于江湖。則其爲用之大。莫是瓠若也。噫。非漆園之大觀。孰知其用哉。公之以瓠名窩者。意盖在此。吾然後知公之所感者深矣。知公之所取者大矣。雖然。聖鐸請爲公進一言。可乎。古人之於齋名。或以物或以事。物取其象。事取其義。象以體諸身。義以會諸心。使吾之德。無愧於齋之名。齋之名。允合於吾之德。然後其揭壁而懸楣者。始不爲虛設。而不忝爲主人其中矣。今公旣以瓠名窩。而且有感於莊氏之所稱乎。則盍思所以體其象會其義乎。體象之道。在廓其量。會義之道。在廣其學。學廣而無不通。量廓而無不容。則其發爲文章。施爲事業者。雖小試不合。而將大受而有裕矣。夫然後可以作中河之瓠。辦千金之功。而商川之舟楫。可幷也。若不幸而世不用我。則亦當慕箕山之棄瓢。甘陋巷之簞瓢。不戚戚不汲汲。斷壺實烹瓠葉而食之。與田夫野老。相忘於瓠谷之中。是豈不誠瓠窩主人哉。因爲之歌曰。瓠之谷。窈而不僻。君子之宅。瓠之宮。虛而有容。君子之衷。旣歌而復記其說。以質于公。
오삼달(吳三達) 1667(현종8 정미)~1744(영조 20 갑자)
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달부(達夫). 호는 취은당(醉隱堂)
조부는 진사 섭(涉)이고, 아버지는 이주(以周)
동생 경탁의 장인
*求道谷蓮堂。次主人丈 吳三達 韻。
半畝塘新闢。三間屋不奢。當軒低密樹。夾水映繁花。
境僻人喧斷。林深石徑斜。古來棲隱樂。何必德公家。
*輓求道谷吳丈
高哉日月山。屹立東北疆。所鍾多奇偉。名村豈足當。吳氏宅其下。奕世載淳懿。落落醉隱公。實禀淸淑氣。骨相異凡衆。襟度亦恢恢。蔚然廊廟姿。不合老蒿萊。公車三十載。時命奈不偶。攜家入山中。遠慕鹿門叟。高堂臨淸池。美酒盈華樽。自稱醉鄕老。宛如柴桑村。當時二三賢。聞風時往還。賦詠兼叙述。文字映楣間。英陽耆舊中。風流公獨全。矦伯艶高名。干旄數翩翩。八耋乘大化。五福無一缺。子姓繁且秀。餘慶應未歇。獨念豫章質。委棄堪歎傷。搜賢及巖藪。此道久已亡。而我世通家。先契曾莫逆。餘愛及不肖。幾許陪樽杓。哀哀靑溪阡。前後荷公德。寸心獨銘感。欲報愧無力。愚昧觸罪罟。十年斥荒州。東望祝無彊。奄忽隔明幽。凄凉島阜上。草宿已三歲。緘辭寓深痛。一字當百涕。
정만양(鄭萬陽)1664년(현종 5)∼1730년(영조 6). 永川 출신.
본관은 오천(烏川: 迎日). 자는 경순(景醇), 호는 훈수(塤叟)·기암(企菴)·정재(定齋).
아버지는 생원 석주(碩胄)이며, 어머니는 의성김씨(義城金氏)로 방렬(邦烈)의 딸이다.
종조부 시연(時衍)과 이현일(李玄逸)의 문하에서 아우 규양(葵陽)과 함께 수학하였는데, 경사(經史)는 물론, 성리학·예학·천문·지리·역학·경제·정치·율려(律呂)·과제(科制) 등에 이르기까지 두루 정통하였으며, 당시 사람들이 이들을 옛날 정호(程顥)·정이(程頤) 형제와 같다고 하였다.
퇴계학에 몰두하면서 윤증(尹拯)·정제두(鄭齊斗)·정시한(丁時翰)·이형상(李衡祥) 등과도 학술토론과 서신왕복이 많았으며, 학파를 초월하여 학문의 진수를 탐구하였다.
1724년(경종 4) 순릉참봉(順陵參奉)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1728년(영조 4) 이인좌(李麟佐)의 난 때 여러 고을에 격문을 돌려 의병 수백명을 모아 아우 규양으로 하여금 의병장을 삼고 규율을 모두 갖추었는데, 관군이 토평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해산하였다.
이남산(尼南山) 밑에 옥간정(玉磵亭)·육유재(六有齋)·태고와(太古窩, 慕古軒)·진수재(進修齋) 등을 짓고 향단(香檀)과 청죽(靑竹)을 심어 선경 속에서 후진양성에 전념하는 한편, 향음주례(鄕飲酒禮)와 투호(投壺)의 의식을 거행하기도 하였다.
학설은 이황(李滉)의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을 학론의 사상적 핵심으로 삼아 이(理)는 본연이요, 기(氣)는 성절(性節)로서 이는 허무공적(虛無空寂)이 아닌 만물을 생성하는 우주의 근원이요, 기는 칠정(七情)에서 나뉘어 용(用)이 수반되는 기질성(氣質性)으로 분리하니, 이는 곧 주(主)요, 기는 곧 자(資)라 정의하였다.
훈과 지는 피리에 속하는 악기 이름으로, 형은 훈을 불고 아우는 지를 불어 서로 조화된 음률을 이룬다는 뜻에서 아우 규양과 함께 〈훈지악보 塤篪樂譜〉를 지었으며, 모든 저술을 대부분 같이하여 〈곤지록 困知錄〉·〈이기집설 理氣輯說〉·〈가례차의 家禮箚疑)·〈개장비요 改葬備要〉·〈의례통고 疑禮通攷〉·〈상지록 尙知錄〉·〈심경질의보유 心經質疑補遺〉·〈계몽해의 啓蒙解疑〉·〈외국지 外國誌〉·〈산거일기 山居日記〉 등을 남겼다.
문장이 전아(典雅)하고 순실(醇實)하며, 글씨에도 전서(篆書)가 핍진하였다.
사헌부지평에 추증되었으며, 영천의 횡계서원(橫溪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훈지문집》 62권이 있다.
제산집
祭表兄鄭塤叟 萬陽 文
嗚呼哀哉。自公厭世。歲月再易。學者失依。公私痛切。苟嘗知慕。靡不用情。或酹于墓。或吊于堂。余獨何人。終始兩闕。內外弟兄。匪䟽伊戚。矧厥景仰。星斗于天。道里豈遙。宿不三旃。由葬至祥。胡不一哭。奠不在物。綿雞匪薄。胡不薦誠。以逮几筵。有懷終默。有哀莫宣。人所不忍。我獨忍之。縱云有掣。孰信我辭。嗚呼哀哉。先哲一遠。儒敎不明。衆盲模象。羣聵尋聲。不有豪傑。孰振大方。美哉古川。圃老舊鄕。遙遙姓裔。兄弟者出。河南伯叔。武夷靜默。天賦旣卓。家敎亦至。申國正獻。罔專其懿。世人遑遑。利名是逐。公蚤不屑。獨探聖學。菀彼普賢。有溪名橫。潔淸紺寒。可濯我纓。公曰叔兮。盍往考槃。誅茅縛屋。碩人之寬。庵曰太古。亭曰玉澗。世累無攖。理義猶豢。塤唱箎和。有講有述。樂以終老。窮不爲慽。溪山寄興。經籍玩心。古人此語。公可承堪。道旣積躬。善亦及人。有來自遠。執經盈門。隨材成就。頗有達者。河汾講學。復千載下。嗚呼哀哉。公於人倫。篤厚懇惻。家政無間。九族以睦。世人偸薄。忘其自出。公則盡誠。不替肇卒。享祭必助。吊慶必及。事舅如母。禮無或觖。嗟公此事。在古亦稀。我若不言。人鮮克知。嗚呼哀哉。自頃以來。道爲世裂。各立標榜。互設畛域。暖暖姝姝。習一先生。公疾其然。坦懷無妨。惟學是求。不避指目。衆詬焱起。智者亦惑。久而未定。名亦日盛。氓隷頌德。矦伯起敬。荐被除命。沒登薦書。有美必彰。其亦信諸。嗚呼哀哉。方公無恙。吾道猶旺。密翁在北。法門相望。士林有柢。小子有陶。嗚呼庚戌。百六是遭。兩賢之喪。間以一月。斯文若綫。幾何不絶。尙賴箎翁。巋若靈光。扶傾振墜。惠我後生。胡天不遺。又遽易簀。歲僅兩朞。不遠祥日。日觀仙掌。次第摧剝。山河寂寥。士類何托。念我平生。不數承顔。每期從容。款聽諄諄。誠乏嚮德。荏苒時月。今焉已矣。痛懷曷及。抱經靡訂。有疑靡質。日暮途遠。倀倀獨立。靈筵雖撤。禫月未除。及今追酹。禮或可許。緘詞寓哀。物薄情深。英靈不昧。庶鑑我心。嗚呼哀哉。
정규양(鄭葵陽)1667년(현종 8)∼1732년(영조 8). 영천(永川) 출신.
본관은 오천(烏川: 迎日). 자는 숙향(叔向), 호는 지수(篪叟).
아버지는 생원 석주(碩胄)이며, 어머니는 의성김씨(義城金氏)로 방렬(邦烈)의 딸이다.
제산선생의 고종 형
종조부 시연(時衍)과 이현일(李玄逸)의 문하에서 형 만양(萬陽)과 함께 수학하였고, 경사(經史)는 물론 성리학·예학·천문·지리·역학·정치·경제·율려(律呂)·과제(科制) 등에 두루 정통하였다.
당시 사림들이 옛날 주돈이(周敦頤)문하의 정호(程顥)·정이(程頤)형제와 비유하였다. 퇴계학에 전념하면서도 이형상(李衡祥)·윤증(尹拯)·정제두(鄭齊斗)·정시한(丁時翰) 등과도 학술토론을 전개하였고, 학파를 초월하여 학문의 진수를 탐구하였다.
1714년(숙종 40) 학행으로 천거되어 현릉참봉(顯陵參奉)에 제수되었으나 사퇴하였다.
1728년(영조 4) 이인좌(李麟佐)의 난 때 형 만양과 함께 경상북도 일대에 격문을 돌려 향병 수백명을 모아 의병장에 추대되어 규율을 모두 갖추었는데, 관군이 토평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해산하였다.
그뒤 이남산(尼南山) 밑에 육유재(六有齋)·진수재(進修齋)·옥간정(玉磵亭)·태고와(太古窩, 慕古軒) 등을 짓고 향단(香檀)과 청죽(靑竹)을 심어 선경 속에서 후진양성에 심혈을 기울이는 한편, 향음주례(鄕飲酒禮)와 투호(投壺)의 의식을 거행하기도 하였다.
학설은 이황(李滉)의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을 학론의 사상적 핵심으로 삼아 이(理)는 주(主)요, 기(氣)는 자(資)라 정의하여 형 만양의 논리와 일치하였다.
형제간의 우애를 기리기 위하여 형 만양과 함께 〈훈지악보 塤篪樂譜〉를 지었으며, 모든 저술을 대부분 같이하여 《심경질의 心經質疑》·《치도의설 治道擬說》·《의례통고 疑禮通攷》·《개장비요 改葬備要》·《경학연원도 敬學淵源圖》·《상의치심단 上醫治心丹》·《선천심법도 先天心法圖》·《대학차록 大學箚錄》 등 외에도 많은 저서를 남겼다.
영천의 횡계서원(橫溪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훈지문집》 62권이 있다.
제산집
*輓表兄鄭箎叟 葵陽
鄭康成姓圃翁鄕。吾道東南在一方。塤唱箎酬聲遠大。河汾講說謾洋洋。
節齋雖逝九峯存。南道儒林尙有尊。今日又驚梁木壞。羣蒙從此向誰門。
六有齋邊玉澗鳴。瑤琴一曲紫陽聲。秖今吟弄尋何處。依舊風淸與月明。
名高謗集亦何傷。矦伯聞風迭薦揚。可惜聖君空注意。東南已晦德星光。
伊川昔日狀明道。欲識伊川不外斯。我謂先生無可狀。塤翁狀裏已詳之。
平生景仰斗山如。况復尊闈是我姑。追思半世登門再。堪愧當年程允夫。
雲山不阻羽翰來。開誨諄諄當面陪。春中手牘遲裁謝。追送靈筵劇愴哀。
去年十月在京師。不及先生卽遠期。鄕國歸來仍阻哭。春風垂淚寫哀詞。
*答鄭箎叟書
自憂患以來。棄家奔逬。已四五朔矣。所至輒杜門深居。不敢與外人接。雖近地親戚知舊間。不得聞消息。動經數月。况數百里之遠乎。邈然相望。日積紆鬱而已。四五日前。自雨谷家中。傳到二月二十六日所賜書。忙手坼緘。奉讀再三。滿紙縷縷。無異於面承誨諭也。傾感之至。不任區區。仍伏審彼時道體有相。尤極仰慰。厥后春已盡夏且半矣。未審旱炎。靜中賾養復何如。日月飄迅。伯氏兄祥期不遠。感念人事之變。悼怛若新喪家。能無他撓礙。將行事於殯宮耶。三霜之內。瓣香躬奠。乃心所蓄。而運氣不幸如此。深恐其前道路未及開通。使不敏者。抱終身莫追之恨也。錦水几筵。倐焉已撤。平日尊仰之私。又不勝愴感也。聖鐸奉老久寓。粗幸無事。精粗本末之說。來敎所謂前輩所論。旣有異同。則此等大是非。何敢容易下語者。誠有以見謙冲退托之盛意。其視幺麽闇劣。率爾開喙。不自知其陷於僭妄之誅者。其淺深厚薄何如也。反己追省。悚愧良深。然旣已請敎。不敢不究其說。來敎曰。未見古人有以精粗本末分屬理氣者。又曰。纔說精便是形而下者。此固然矣。然以淺見論之。古人雖曰理無精粗。此特就理而言。理之所寓。不分精粗而無不在云爾。若以理對氣而言。則理不得不謂之精。以氣對理而言。則氣不得不謂之粗。故朱子甞曰。理精一故純。氣粗 缺 故雜。此其分屬之一明證也。又按太極圖說後論中。論冲漠無眹。萬象昭然。而曰是豈漫無精粗先後之可論哉。語類中。又論此一段曰。是這一箇事。便只是這一箇道理。精粗一貫。元無兩樣。其所謂精者。非指其冲漠無眹者乎。所謂粗者。非指其萬象昭然者乎。且以太極圖論之。冲漠無眹。非太極而何。萬象昭然。非陰陽五行萬事而何。此又精粗分屬之一證也。至於本末。則通書理性命章曰。五殊二實。二本則一。朱子解之曰。自其末以緣本。則五行之異。本二氣之實。二氣之實。又本一理之極。自其本而之末。則一理之實而萬物分之。以爲體此。則不待推說。而以太極爲本。以二五爲末者。大煞分明。安得謂古人未有以精粗本末。分屬理氣者乎。又甞見眞西山之說曰。天下未有無理之器。無器之理。精粗本末。初不相離。此其分屬理氣者。又不啻八字打開也。來敎又曰。若如熊註。則精粗各爲精粗。本末各爲本末。截然有殊。不可謂無彼此也。是恐不然。太極理也。陰陽氣也。理氣决是二物。而不可相雜。故以精粗本末。分而言之。然氣之動者謂之陽。而其動也卽太極之動也。氣之靜者謂之陰。而其靜也卽太極之靜也。陰陽本自太極而生。而太極又未甞離乎陰陽。則安可不謂之無彼此也。道與器。雖有上下之分。而程子謂之道亦器器亦道者。亦此義也。鄙陋於此。適有所考。故私竊有契於愚老之說。而未免聽瑩於葛翁,沙,栗之論也。近日偶閱退陶先生言行通錄。其中勿庵錄一條。正有此段問答。曰精與本。太極也。粗與末。陰陽也。固如此看。然凡天下事物。皆當通看。精粗本末。皆太極之所爲云。上半卽愚老之見。下半卻與沙栗葛翁之見同。後學不知所適從。然竊意上半說出本意。下半則泛就活看處言之。觀其所謂當通看一語。可知矣。來敎中。又引大學衆物之表裏精粗。以爲就事物上言。而理在其中。是亦然矣。然或問論格致處。有曰。天下之事物。各有所以然之故。與其所當然之則。所謂理也。人莫不知而或不能使其精粗隱顯。究極無餘云云。玉溪盧氏曰。粗也顯也。所當然之則也。精也隱也。所以然之故也。卽此觀之。雖就理而言。亦可以分精粗本末矣。聖賢之言。各有地頭。有不可以一槩斷之也。密翁少時。甞主此解。而葛庵先生。以爲是當。未知於明見以爲如何。明德之訓。所示答權潤語。恐得其義。但所謂心之美稱及與心字大同小異云者。無乃主張心字太過否。言心則性情固統攝在其中。然本體之虛靈者。固心也。而有時而昏蔽者。亦心也。豈可直以心當明德乎。必於虛靈之中。萬理明瑩。無時而昏昧。然後可謂之明德。必如章句所謂人之所得乎天以下二十字。然後可以爲明德之訓。故愚甞竊謂明德不可專以心言。亦不可偏以性言。孟子所謂良心本心仁義之心。此卽大學明德之謂也。如何如何。所得二字。以德言之訓。可謂約而盡矣。凡此妄論。皆出於道聽之餘。無一心得之見。極以粗率爲愧。伏乞勿以爲不足敎。紕繆處一一批示。以開蒙蔀。千萬切仰。
이만(李槾)1669년(현종 10)∼1734년(영조 10).
본관은 재령(載寧). 자는 군직(君直), 호는 고재(顧齋).
아버지는 통덕랑 융일(隆逸)이며, 어머니는 광산김씨(光山金氏)로 초(礎)의 딸이다.
작은아버지 현일(玄逸)에게 학문을 익히면서 권해(權瑎)·손덕승(孫德升) 등 당시의 대유들과 더불어 고경(古經)을 강론하였다.
일찍이 아버지와 형의 권유로 과장(科場)에 출입하여 향시에는 거듭 합격하였으나 매번 대과에 가서 뜻을 이루지 못하자, 마침내 세무(世務)에 뜻을 버리고 안동 묵동(墨洞)에 작은 집 한채를 짓고 거기에 기거하면서 때때로 산수도 즐기면서 독서로 지냈다.
만년에 이르러 날로 쇠퇴하여가는 안동의 학풍을 다시 진작시키기 위하여 관찰사 조현명(趙顯命)의 주선으로 훈적지임(訓迪之任)을 맡아 학령(學令)을 마련해서 흥학(興學)에 힘썼다.
이로 인하여 1734년에 영희전참봉(永禧殿參奉)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그는 예학에 밝아 예(禮)에 있어 의문(儀文)이나 제도에 급급함을 물리치고, 고의(古義)를 준수하면서도 시의에 맞는 새로운 예론을 세워 인근의 수용에 응하여 이름을 날렸다.
특히, 관방(關防)과 군무(軍務)에도 남다른 식견을 가져 임진·병자 양란 때 탄금대(彈琴臺)와 남한산성 등에서 패전하게 된 까닭을 명쾌히 지적하기도 하였으며, 또 죽령과 조령에다 산성을 쌓고 진영(鎭營)을 세워 병농(兵農)을 겸하게 하면 국방에 더욱 실익이 있음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저서로는 《고재문집》 10권이 있다.
제산집
*答李顧齋 槾 書 壬子
伏承下札。兼有別紙之誨。盥手擎讀。欣感交幷。况審至熱。靜養道體有相。區區下懷。不任慰釋。聖鐸。老人連有小小愆節。身家亦苦濕痰凝滯之證。種種私閔。絜矩章說。前日所稟。非敢自謂有所窺見。而然從來屢承砭誨。以聖鐸每多含糊藏縮。不肯大開口論說。爲病故偶因所疑。罄盡胷臆。不自覺其僭率謬妄。時時思之。慚愧悚惕。尤以長者所以見處者終如何。不釋於心。今承下諭。雖以唐突濫猥。峻加砭斥。亦不忍置之於不可敎之地。開釋指示。不啻耳提而面命。迺知曠度虛受。不倦於誨人。如此惶悚之餘。益深感激。來諭旣如是詳悉該博。所引先儒諸說。不一其證援。妄謬於此。其何敢復容喙乎。所當玩而復之。以竢其省悟於他日。而膠滯之見。猶有一二未釋然者。必欲再取稟正。至於無疑而後已。怙終之罪。有所不暇避也。但旣不及熟復盛敎之首末。倉卒請益。尤涉率爾。明日雖獲拜於府中稠廣中。亦難從頌辨稟。當竢後日。得以盡所欲言。幸不以緩對爲罪耶。
*答李顧齋書
再昨暮。虎溪人奉敎牘而至。以院村痘患之熄。不滿兩旬。故經宿而後。始盥手坼緘。玩而復之者再三。瞻仰之餘。欣感無量。况審履玆炎節。閒居道體神相冲謐。尤慰不任區區。聖鐸親癠尙欠全安。寓舍隣比。又有潛遘之患。欲移動而無可往處。私閔私閔。東厓丈書。謹悉其意。盖不易其擔當得此事。而巡相所以眷眷至此者。尤不偶然也。當初雪翁之裒輯是書也。用盡多少精力。積十數年而後成之。使先輩善觀善言之隻字片簡。埋沒於塵蠧中者。搜剔無遺。而大賢之言行鉅細。出處本末。與夫服食起居之節。威儀容止之則。一開卷而瞭然。宛然如目擊而親炙之。則是編之有功於斯文。爲如何哉。幸而繡梓之論。發於今日。主張得其人。官司助其力。誠不可失之幾會。而凡爲人士者。所當奔走而共圖之者。則此豈可使東厓丈獨賢而已乎。如執事之望尊言重。深識遠慮。固宜隨事商量。協心規畫。期於底績而後已。至於編中所錄。其大體凡例。已經當日裁正。極其秤量。在今固無可疑。亦不可移動。若其條件文字之間。安知尙不無未盡勘覈。而容有可議者乎。是書不入梓則已。一經剞劂則當流布於一國。傳示於後世。必須字校句勘。梳頭洗面。盡其善致其精。而無毫髮可指之疵。然後後之君子可以無餘憾。而前人之事業。益完全矣。然則是豈可諉之於已成之編。而不一勘過。徑先鋟梓。使異日好議論者。容其妄動喙吻。洗垢而索瘢乎。此則執事尤當自任。亟取本冊。從頭繙閱。苟一字一語。有未安處。則告于雪翁子弟。通于厓丈及二三同志。極意反復。歸于至當。迺後繕寫入梓。豈非愼重道理而忠於前輩者乎。頃見宣城李寢郞與人書。及此事而言。其中有消詳去取之條。此間一二之見。亦不無數條。然疑處盖義理無窮。人之眼目各不同。不可以已經前人之手。而斷然不容人議論也。權表叔及一甫諸人。雖以改動爲慮。勤勤致意於厓丈然其所慮者。亦在於前所謂大體凡例耳。至於些少釐正處。必不硜硜然固守一隅也。朱夫子於二程全書,伊洛淵源錄,上蔡語錄等書。旣裒聚而叙次之。又讎校其訛謬。以傳於世。君子之於斯文事。其眷眷盖如此。則執事於此。其可以退讓推托爲事而已乎。東厓之有望於執事者。實爲此也。惟執事思之。聖鐸昨以此意。略及於厓丈。厓丈亦不以爲非。故敢以溷於下執事。不知者以爲妄率也。獨覽而勿煩人。是仰是仰。
*答李顧齋書 癸丑
比者。旱炎頗酷。令人無蘇意。昨夕。幸驟雨沾注。暫洗魃虐。伏惟江齋淸爽。道體益勝。區區嚮慕之私。不任慰釋。所諭種樹蒔花耘瓜去草。政是閒中一樂事。頤神養性之功。未必不於這裏有得。固非他人玩物喪志。自適以爲高而已者所可比擬。而猶且以閒漫汨董。費卻好光景爲懼。其隨時點撿。隨事警省。不以年高德卲。而少有自恕之意。槩可想見瞻仰欽歎之餘。竊自反而增愧耳。頃書所稟疑條。唐突甚矣。乃於其中。有一二頷可之示。執事虛受之度。則固盛矣。顧此妄謬。豈敢當此褒飾。還用蹙然。第天命之性。合理氣爲心二段。未契盛意。更煩開釋。所當濯舊來新。期有以曉然於指意之所歸。而屢日玩繹。蔽惑滋甚。此必愚昧鈍滯之性。未易領悟而然。尤媿尤媿。然旣有所疑。不敢仍默。更敷矇瞹之見。以求明晢之敎。伏乞恕其愚僭而少垂察焉。夫命之爲義兼理與氣。而聖賢之言。各有所主。讀者亦當各就其地頭。而究其指趣耳。其不宜參互而混幷之也明矣。何者。天之生物。二氣五行。紛綸交錯。而賦形成質。有昏明淸濁之分。有短長厚薄之差者。命之主於氣者也。元亨利貞之理。賦於形氣之中。而爲仁義禮智之德者。命之主於理者也。雖主於理。而理必有所乘之氣。雖主於氣。而氣必有所載之理。故天道流行。造化發育之際。理氣混合。若不可分開。然其脉絡之相貫。首尾之相連。則固各有別而不可以相雜矣。試就中庸此句而論之。天卽一團渾然底理。是理也乘氣流行而賦於人物。是謂之命。人物各得其所賦之理以爲健順五常之德。是謂之性。然則在天在人。雖有性命之異名。而其理則豈不同條而共貫哉。此子思所以洞見本原而專就理之一字上。昭揭於篇首。以明此道之循乎性。此性之本乎天命爾。何嘗雜氣而爲言乎。故程子曰。天所賦爲命。物所受爲性。張子曰。天授於人則爲命。人受於天則爲性。夫天之所賦授卽人物之所受。則是乃一串貫物事。夫豈有在天爲氣。而在人爲理者乎。章句天以陰陽五行以下三句。固以氣言。然是不過言天之所以生人物。人物之所以生形質者。皆由於陰陽五行之流行。而其所以正釋命字之義。則在於理亦賦焉一句。其下又曰。人物之生。各得其所賦之理。以爲性云云。所謂所賦之理。卽擧命字而申言之。則其以命字屬於理而不屬於氣者。不亦較著矣乎。章句之訓旣然矣。而或問所論尤分曉。曰天之所以命乎人者。是則人之所以爲性也。又曰。天之所以賦與萬物而不能自已者。命也。吾之得乎是命以生。而莫非全體者。性也。夫天之所以命乎人者。卽人之所以爲性。吾之所得乎天而爲性者。卽天之所賦於我者。則是固一理而已。何必曰命字帶得氣字意思。而遂以氣當之乎。且謂陰陽五行四字。實應命字。愚意竊以爲命者。乃道之流行不已者。而陰陽五行。卽其流行之具也。恐不可以陰陽五行。專屬於命。况中庸之義。乃專言理而不干氣事者乎。大傳所謂繼善成性云者。固與中庸此句。同一語意。然愚之竊所未安於尊敎者。執事以繼字當命字。以爲言氣之證。故愚以爲繼之者善一句。可當命字。不可但以繼字當之。且繼之成之。雖屬乎氣。而所謂善所謂性。實屬乎理。則善卽天理之乘氣而流行者。性卽天理之具於形氣中者。若但以繼字當命字。而謂之氣。至於人物稟性之後。方始謂之理。則其脉絡不相貫。首尾不相連。而天人之判而爲二也。甚矣。此愚之所以未能曉然者。豈果以天命之性。謂不同於繼善成性之說而曰。此言氣彼言理乎。或恐執事者。有所未察於淺陋之本意也。然來諭中引程,朱子及退溪,葛庵兩先生說。以爲大傳所云云。主意在理而不在氣。子思之言。實祖此而專言理也。愚於是。乃知高明之見。本非不柝於理氣之際。而於鄙言。亦非逈然不相入者。乃於末段。復反之曰。天命之命字。以氣言者。非無稽之說也。是其前後首末之敎。不幾於自相矛盾乎。或問性命於朱子。朱子曰。氣不可謂之性命。但性命因此而立耳。北溪陳氏曰。命一字有二義。有以理言者。有以氣言者。如天命之謂性。五十知天命。窮理盡性。至於命。此等命字。皆是專指理而言。及來敎所引朱子說天命之性。雖氣包在中。若云兼言氣。則說率性之道不去云者。莫不大煞明白。眞有得於子思子主理言命之意。而執事之必於命字下。注之以以氣言三字者。其於義理。如何。其於先賢之說。如何。幸深思而明敎之。至於合理氣。爲心之理。不可將作性字看者。尤所未曉。夫性者。何謂也。非人生所稟之天理乎。人旣得是理。又得氣之精爽而爲虛靈知覺之心。則性外固無心。心外固無性。其混合無間。猶所謂一陰一陽之謂道。天生烝民。有物有則者。豈先有非性之理。與氣相合以爲心。而此心旣成之後。乃有四德之性。特具於其中。有若四塊物。自外來貯於器中者然哉。夫心之所以爲一身之主萬事之原者。以其所以爲心之理者。有四德故也。若無四德之性。不可以爲心。故曰盡其心者。知其性也。使四德之性。果非爲心之理。而別有所謂打成一物之理。則何以曰知性而盡心耶。誠以此性之外。更無爲心之理。故知得此性者。乃所以盡其心也。今來諭曰。此理雖無二塗。而凝成一物之後。自爲一物之理。不可復剔其理於凝合之中。拽轉來作性也。又曰。心是有些形跡。合理氣自成一物。而統仁義禮智之性。不可剔出打成一物之理。來作五常之性也。是顯然以爲心之理作一理。又以五常之性作一理。而虛靈知覺之體。顧無以異於肝肺胃腎之各成一物。各具一理者矣。其視心字。不亦太狹小了。而性之在心。一如寄贅。與爲心之理。相對而爲主客。則未知此心之所以敷施發用者。是果本於打成一物之理乎。抑由於所具五常之性乎。心之體謂之性。心之用謂之情。而情之惻隱羞惡辭讓是非喜怒哀懼愛惡欲。莫非自性而發動者。則心之所以爲體用者。皆客之所爲也。彼打成一物之理而爲之主者。果何狀而何爲也。孟子曰。存乎人者。仁義之心。又曰。惻隱之心。仁也。羞惡之心。義也。恭敬之心。禮也。是非之心。智也。夫仁義禮智。卽性也。而必以心字襯貼說去。使之爲一。而不欲其相離。是知心者性之器。性者心之理。豈有凝成一物後。自爲一物之理。而與五常之性。不相干涉之理乎。又按程子之說曰。心如穀種。其生之性。仁也。夫穀種之所以爲穀種。以其有生之性也。若曰。穀種自有穀種之理。而其生之性。又別一理。不可喚作穀種之理云爾。則其可乎哉。故愚以爲合理氣之理字。卽五常之性之謂也。不可別而二之。而謂心自心性自性也。張子曰。合虛與氣。有性之名。合性與知覺。有心之名。性。卽理也。知覺。卽氣也。則張子固以合理氣之理字。作性字看矣。其果不可指心之理。而喚做性乎。聖鐸竊恐執事欲致辨於心性之界限。而推之太過。使二者。分離乖隔。不合不一。而不知名言之差。其弊將至於懸空說性。莽蕩無交涉矣。如何如何。聖鐸於此。非敢自以爲知。特於盛敎之下。有所憤悱而不得已者也。伏乞執事不惜痛加辨析。以卒其惠。幸甚。重午前。若無大拘碍。萬謀一進。此計若果。則可得面稟。以盡其愚。書辭猥瀆。字畫麤胡。悚仄悚仄。
*答李顧齋書
前月晦。虎院人來。致所惠長牋。盥手奉讀。仰認誨諭之盛意。感戢靡量。第於其時。方以老人疾患。煎迫度日。至于今未定。故不卽仰答。罪悚深矣。比日久旱得雨。秋凉乍動。伏惟江上益淸爽。道體增勝。區區下誠。不任慰慕之至。且於日前。伏覩官家所送示朝紙。可見公議之所鬱。終必有伸。而中孚九二之義。於是尤可驗矣。賀幸千萬。但如聖鐸之愚。平生無一善狀。而虛名上欺。誤恩荐加。糠粃在前之愧。已深於前日。而薰蕕幷進之譏。又且不免於今。使聖朝明揚之盛典。反爲混淆猥雜之歸。是則士林之所羞恥。而私分之所慚懼也。仍竊伏念。朝廷之意。似不但已。匪久當有授職勸駕之事。則未知去就之間。盛筭何所决定。如聖鐸者。固不敢妄議於君子行藏之義。而顧以迷昧之識。猝當非常之命。茫然莫知所以措躬。倘蒙執事者推平日辱愛之眷。不惜指敎以素講之餘策。則何感如之。何幸如之。是所日夕企仰者。辨誨兩紙。丁寧諄復又如此。至於心說。則又似以鄙見。爲不甚乖舛。而有略相頷可之意。大君子虛中無我之德。可謂盛矣。歎服歎服。然反復來諭。不但心說卽天命之說。其指趣所歸。亦不至大相懸隔。而其所以不同者有二。執事則每以立天之道陰與陽一句。爲話頭曰。言天者必以氣。言理則命字。當以氣言而不可以理言。聖鐸則以爲子思之言。主理不主氣。命字之義。雖氣包在其中。而所主者旣是理。則不可以氣而專言之。此其不同之一也。執事則以繼善之繼字當命字。而据通書中旁注氣字於繼字之下。及丘氏說。降衷之降。天命之命。卽繼字之義者。以爲命字言氣之證。聖鐸則以爲降字繼字。雖屬乎氣。而衷也善也。卽指理而言。則不但降與繼。爲命字之義。衷字善字。實天命之骨子。周子所以旁注氣字於繼字下者。固無議爲。而丘氏之以繼之者善。謂同於天命之性。而以繼字。當命之義。則其將又以善字。當性之義乎。是不明夫在天在人。其理雖一。而善與性字義界限。不能無天人之殊也。淺料於此。尋常所未安者。而執事以爲辨析精切。鑿鑿中窾。此其不同之二也。大抵命字泛論之。則可以兼理氣言。而偏言之。則有當屬之理者。有當屬之氣者。中庸此一句。卽所謂當屬之理者也。何則。以其所主者理。而不主於氣。非謂其元無氣而獨有理也。以執事所引朱子諸說觀之。其曰天命之性。只是主理。而纔說命則氣亦在其間。曰天命之性。是專言理。雖氣包在其中。說理義較多。此其所謂兼理氣言者。而其所主則在於理也。其曰。旣有天命。須是有氣質。曰天命之性。不雜氣質而言。若云兼言氣。則說率性之道不去。此則又似以天命專屬理一邊。而與氣質各自爲一物也。此與執事之專以氣字。旁注命字之下者。其同異得失何如也。或問於朱子曰。性命如何分別。曰。性是以其已定者而言。命是以其流行者而言。命便是水恁地流底。性便是將椀盛得來。大椀盛得多。小椀盛得小。淨潔椀盛得淸。汙漫椀盛得濁。朱子說止此。以此言之。水雖有流動盛椀之異。而其爲水則一也。性命雖有已定流行之異。而其爲理則一也。豈可以在天流行底謂之氣。而獨以在人已定底謂之理乎。且理不流行。則氣安得以自運乎。是故。從古聖賢之言命。率多以理言之。而獨於所謂昏明淸濁厚薄長短之命。始謂之氣耳。然則執事之以在天之命。專屬於氣。在人之性。獨屬於理者。殆與朱子若先儒之言異矣。愚之所謂脉絡不相貫。首尾不相連。天與人判而爲二者。莫無可思而不可以遽斥否。若夫以元亨利貞之德。於穆不已之命。皆謂之言氣而不言理者。皆鄙陋之所疑。而非卽今所禀之本指。故不暇究請。至於孟子之言性。比大傳踈略云者。朱子之意。特以孟子只就人生稟受後成之者性一截爲言。而不去上面一截一陰一陽之謂道以下流行賦與處統言之。故曰不曾推原源頭云爾。非特爲其不言人物之有異也。且孟子甞以犬牛與人之性不同爲言。則豈甞獨論人身中純粹之性。而不言人物稟賦之殊耶。竊恐執事者。欲引以爲在天言氣之證。而未暇究夫朱子之本意也。如何如何。前書答鄙書中。天之生物。二氣五行 止 命之主於理者一段處。所謂或以氣化而賦於凡品。或以理命而賦於聖賢。使賢智賦得仁義禮智之性。衆生稟受昏濁短薄之氣云者。與鄙書所稟者。大相逕庭。聖鐸雖蒙學淺識。豈敢創出如許無倫之說。以溷先生長者之鑑乎。或恐高明於鄙書。略不留意垂察。而不能盡乎淺陋之辭意也。伏望更取鄙書。特爲照勘。且許還擲。使妄謬得以自考。苟有如尊敎所駁者。謹當肉袒負荊。請伏妄言之罪於門下。心說則兩紙所諭。大抵皆明白該悉。使小子之惑。稍覺開通。至於所謂心裏自具五性之理。非必取他臟之理。而兼統之也者。尤爲要約。敢不就此玩繹。以爲異日請益之地乎。然鄙意猶以爲以五常分配五臟者。自是一義。若夫所謂心者。乃人之所稟陰陽五行靈明神秀之氣。而爲一身之主宰者。非但如他臟之獨稟一氣而爲一物者比。故其升降出入。雖不外乎方寸之中。而其包涵衆理。該括萬事。則肝肺脾腎耳目百體之理。何莫非這箇中所具者也。是豈可以五行分配之故。而卻謂心之氣火。心之理禮。與金木水土之氣。仁義智信之理。本不相干。而特以其光明發揚底物事。故可以旁包兼總於他臟耶。此則執事已知其不然。而猶復云云者。盖恐學者偏主五行分配之說。則其言之流弊。未必不至於此故。敢以此架疊之說。更質於座下耳。所諭心之爲物。果有四方之各色及五臟稟氣不稟理之疑。高明之所未瑩。鄙陋何敢容喙。然旣蒙謬詢。敢以率爾爲嫌。而不獻疑以求訂乎。朱子所謂心如界方。一面靑一面赤一面白一面黑者。以心之爲體。包藏仁義禮智之理。而其用之流行。四通五達。無所隔閡云爾。非眞以爲心之形狀。果有靑赤白黑四方之色也。且天下之理不出五行。則七情之分配五臟固也。而氣之所在。理無不在。則豈有稟氣而不稟理之理乎。肝有肝之理。肺有肺之理。脾有脾之理。腎有腎之理。而特其全體大用之總腦處。不外乎心。此心之所以爲大。而理之所以無所不體也。今若以心具五性之故。而疑他臟之不稟五性。則恐或近於執一之論。如何如何。末段所示。與令姪酬酢之語。恐令姪誤聽而誤達之也。令姪來此時。適語及於此。以爲尊叔父丈以分配之說爲主。而言肝屬仁。心屬禮。肺屬義。腎屬智。則仁義禮智。非心中本具之理。特以心臟屬火。火乃光明發動之物。故心於肝肺腎之理。自然兼總而旁通。若然則仁不包四德。而禮卻包仁義智。又朱子之訓仁義。不當云心之德心之制。而當云肝之德肺之制也云云。此外無所謂肝包心肺腎之語。且夫肝包心肺腎云者。於高明之說。不相對値。聖鐸何故爲此無義無味之言。以犯妄謬之罪乎。然鄙陋所論。皆是摸索說去。非有一分實見得處。而敢與大人先生抗顔率口。有若頡頏務勝者然。僭妄之罪。無所逃遁。伏乞諒恕。少留省覽焉。
*祭顧齋李公文
維歲次乙卯四月辛丑朔十五日乙卯。卽近故振谷先生李公卽遠之辰也。侍生金聖鐸。適有京都觀光之役。不得以素車從賓客之後。使再從孫始亨。奉薧魚之奠。謹告于靈筵之下曰。嗚呼哀哉。天之生公於世道交喪之際。而留公於羣賢旣沒之後。付公以薖軸考槃之山水。而假公以優遊閒暇之日月者。盖若有意焉。卒乃位不得早縻。而竟止於一命。壽不及大筭。而僅踰於六耋。進不能行諸當世。退不能傳之後學。抑何理歟。鳴呼。哲人之存亡。運也。斯文之興喪。命也。喬嶽旣頹。羣峯誰仰。梁木其壞。衆榱何望。此吾黨之士所以涕泣而相吊。慨然致惑於天道之未定也。嗚呼。不佞鯫生。於當世大人長德。委己而敬事之者。不止一二。其所心誠仰服。而自知其學而未能者。於公有三事焉。讀書則灝噩之經。中和之傳。口誦心思。不但於明牕棐几之下。而雖逆旅行邁之際。寢食言談之間。未嘗不咿唔而呻喟。至於玩伊洛之全書。繹紫陽之遺訓。則其貫穿瀜會。有若躬造其門屛而親承其旨意。此其不可能者一也。行己則人皆趢趚而從俗。公則坦蕩而遂志。世情之所共謂迂闊。而不悖於古誼。則不以爲嫌。物議之所指爲打乖。而無愧於吾心。則不以爲忌。此其不可能者二也。待人則一言之得。稱之不啻若自其口出。一事之善。好之不啻若由其身行。惓惓乎其扶世誨人之意。恢恢乎其聽言從善之誠。此其不可能者三也。嗚呼。此雖由於天賦之質美。問學之功至。亦豈非家學淵源之所自。聖鐸幼而闇劣。晩益鈍滯。旣先師之棄我。又密翁之傾逝。擿埴乎昏冥之途。若遠駕之無所稅。幸我公之見憐。意欲以善而相及。盖前後數十年之間。其所以眷我而愛我者。不可以旣之於筆舌。我則事之如父兄。公欲忘年而托契。我則瞻仰之彌高。公必自卑而誘致。警我以讀書之爛熟。勉我以立志之不局。疑必許我以反復。理必容我以商榷。得侍則諄諄娓娓。莫非心性理氣之訓。賜書則隻字片簡。皆是飭勵奬勸之說。雖其資稟庸下。志氣卑陋。卒未能奉承而周旋。而賴公之扶持提挈。而袪胷次之鄙吝。豁心田之茅塞者。殆不容屈指而更僕。謂受賜之永久。何厭世之斯亟。慟莫暇於爲世。寔撫躬而深怛。嗚呼。洛江之上。有谷曰振。公卜築於其間。理玉溪之餘韻。每以書而招我。我未能乎源源。間徒步而往從。猥出迎乎山門。坐我以其石壇。供我以其沼芹。醉我以德容。飽我以格言。盖一日之款。一宿之晤。亦不覺其充然而有得。顧嚮德之無誠。又事故之相掣。曾未得從容於旬月之間。以飫公不倦之誨。而奉公無斁之意。何數月之貽阻。奄人事之不可恃。方西駕之初旋。已東首而考終。承凶聞而痛哭。曷余懷之有窮。想山齋之巋然。花木鬱鬱其依舊。主人不在兮巖扉寂寞。忍經過之可又。念此身愚不自晦兮。久矣欺世而盜名。旣誤恩之難堪。又方事乎趨營。寔狼狽之可憂。孰爲余而喚醒。聞卽遠之有期。屬我行之已啓。違臨穴而一慟。負平生之知愛。修薄具以替奠兮。聊寓哀於一杯。倘英靈之不昧兮。庶我衷之鑑哉。嗚呼哀哉。
顧齋先生文集
*虎溪洞主柳達夫[顯時]見招。同金振伯[聖鐸]諸人徃赴。留欵數日。臨罷。聊賦一絶。奉呈求和
廬阜間關喚友聲。谷中幽鳥亦飛鳴。南爲大志吾何望 短翮空憐滯棘荊
*與金振伯[辛亥]
一頓之地。勞勤玊趾訪逮於山林竆谷之中。匪篤念不㤀。何能至是。言不足宣謝。但有感刻耳。不審。還奠以後。侍承氣候。連亭吉康。爲之馳跂不已。槾山裏獨坐。馴致固陋。甚有合商量處。幸得相㫴。而又不得從容講說。古人有曠世相感。吾輩幷生一世。每做交臂之失。甚可歎也。如槾老矣。歲月侵尋。留得人間世者。能幾時。欲及未化之前。親勝已用覩一分之益擬。俟新穀登塲。相要於中間。執書論覆。獻其所疑。未知左右不以爲迃否。第念世裏人事。拈一放一苦。不諧恊見。今旱魃之灾殆使田畝無收只此爻象又難做好懷事也。如何如何。惟冀進德立誠。以副眞禱。
*答金振伯[癸丑]
㐲承手書。存錄凭審。獻歲以來。太碩人諐度日向安。順進德修業之功。亦有時敏之效。區區向慰之心。不比凡平。槾添齒以來。日成醜老。日用云爲。不離乎三家村裏漢。節度只自憐歎而已。大抵隨事。此心常照管者。卽此學若與此心不相照管。則雖是善事。猶未免俗間事。此似易而實難爲工。鄙見如此。未知。此言不悖於理否。永陽鄭聘君家請挽。素昧詩律。故代以行文。亦蕪拙不能布宣令德。如有錯誤處。幸朘斤正。復以見敎。其他求挽者率以是道應之。甚媿自做無當之文。取笑於儕流也。
*與金振伯[聖鐸]
乖違顔色。累經蓂葉。每山中月色皎然。未嘗不起想也。窮隂急景寒令甚嚴。㐲惟侍學珍衛景福。槾日間雖不敢廢數墨之功。而氣質依前無變。見處亦未能脫。然有了悟思得吾人雅勑之容。精敏之識。以自扶策得去。而苦被憂冗牽挐。亦未克容昜。遂此衷曲時爲喟然而已。適與虎溪洞主。論中庸戒懼章。不合有些。徃復文字。未知鄙說果不戾於經㫖否也。敢將彼此書藁仰呈。切祈批判以示可否。
*與金振伯
阻奉顔色。蓂葉已五轉矣。眷焉之懷。日夕彌襟。時欲率意命駕。宿畱稳話。兼叙㡬處人事。今年炎暑。特地非常病衰氣力。不任觸冒行役。苦俟凉風乍動。以酧此宿逋。已作十分凖擬矣。忽聞尊新膺除命肅謝之行。日子已近。暑氣一味熇赩如此。末由徃去摻別。然心㫌常馳徃。不能自㝎。槾廢老矣。無復它念。思與吾同心之人。徃還相從。以輸冩暮境衷曲。而允卿遠宦北塞鴈書無凭。今尊又入京師前期未昜。老抱作惡。自倍恒品也。古人云做官奪人志。此則戒不知學之人。未成德之士。或動心於喜怒愛惡之私。或役志於建功立名之間。而本心之德。當然之則。有不能精察而力行之。徃徃失己離道而不厭於衆望。見譏於後世矣。如吾人一生林下。讀書學不可謂不精。半世行身寡尤。德不可謂不成。又况一命之官。所管無多。有何設施之可言哉。然而仕宦發軔。實源於此亦君子加意勑慮處也。末俗好㸃撿問學之士。居今之世。爲今之士。固當鞱晦以避道氣之名。然此事實如飮食裘葛。豈嘗聞飮食裘葛避人之㸃撿。而不食不衣者哉。日用云爲。雖有過人之行。若與此德相忘。則只是天資之暗合耳。於尊德問學之功。不相襯貼。孟子所謂行不著習不察。張子所謂心若忘之。則只是俗事者。恐不可不入思議也。見慕之至。敢發彺瞽之言。幸寬其愚妄之誅。而反有以辱教之也。墨洞向右邊去逾一小麓。更占一墅。主案有情。左右交合。自作一洞天。大江溶溶流入。几席之下。眼底奇翫。應接不暇。比舊庄。儘不干事。時時獨徃。輒盡日㤀歸。擬以來月經營小屋子。徃棲盤礴倦遊。他日或賜光賁。則當斸筍燒蕨供話數晝夜。使澗戶山扄。帶得賢者之芳躅。如何如何。
*答金振伯
屬者共㝛山庄。仍又偕之。東坡可謂從頌矣。而只隨人醻酢閒漫話言。初未及偲切緊着身己事。似此相接有何所益吾輩不及古人者。雖非一端。而此一事亦爲不及之一病源也。觀朱先生與一時交友相警責者。如何也。未相見時。徃復戒勉。無所隱諱。旣見溫繹所疑者。愈益加切。惟如此。而後可謂爲己之學。可冀有朋友之助也。吾人想獨自時節存省之功。未嘗須臾不在於學。而及其接人。而相熟相同無以甚異於人者。實出於卑牧之意。其爲謙光之美。則至矣。而若一味以此爲悅。則亦恐有害於大中至正之道也。此事如飮食裘葛。飮食裘葛。豈可嫌人非笑。而就暗地裏喫著耶。願尊養浩配義。不沮不懼。使內外交修。言行相副。則豈但師友淵源。有所發明。亦可扶接得。此箇道脉不至斷絶於嶠之南矣如槾者鼎器已弊無以鍊得丹成然尙頼鞭策之力不欲全作無聞之人尊幸憐而不棄時加鐫誨母以我一日之長而難相違觸也如何如何
*與金振伯
錦水覿面問何如未嘗交一款話歸來山庒心事累墜數日而不能去懷謹問日來侍承起居何如適間疑警見趁淸霽否日望虎溪痘氣開廓奉邀文斾相與從容於水光山色之中不意鬼物揶揄做出此梗使不得邇淸溫之色以袪鈍滞之思悵歎如何如何陶山言行錄李天祥諸兄會於三溪讎校訖功專人還舊帙於鄙所。約會東厓及左右。亦許不佞追躡。俊遊此會。不可差池。若有未盡是正處。以來後人指摘其肯曰在家不知。且左右未動者。弟亦何敢獨任左肱。而蹩躠於莊嶽之間㦲。聞東厓簡通于三溪。移定會所于鄕校。且言府中淨帖未痘者。頂踵相接。雖則云然府中是煩劇之地。未痘之人安安入處。似非畏愼之道也。西岳松棚蒼綠。遮隔城巿。且有顧瞻玩賞之樂。昔人講討次輯之事。必於閒曠之處。寒泉明招故事可徵也。吾輩雖不及古人。行解萬萬。此一事獨不追古人。而從之耶。此間僻未得逹此曲折於東厓。彼中想有因緣徃來之便。報道此意如何。絜矩好惡之辨。此非敢爲好已勝也。惟如此執意看過。傳文章句之意。可得通貫。若如來諭及不佞前說者。多與先儒之說相戾。且如雲峯胡氏其學精切。北溪之後未見其比。幸虛心究察。勿以先入爲主也。別紙辨禀任筆信口。言辭未免鶻突雖恃包借之私。旋恐得罪於君子人也。巡相累索左右論辨。向已送副。前此就巡相抵。兄書中略有所辨破。謾奉致思之地。
*答金振伯
前日往復疑義間。嘗覿靣相呈。而彼此猶未爛熳同歸古人有言。尺素論心有愈靣語。玆復畢陳鄙見。朘須㪅賜證駁。使膠滯之見怳然有悟。千萬千萬。或有問於朱子曰。天命之謂性。只是主理。纔說命。則氣亦在其問矣非氣。則何以爲人物。理亦何所受。答曰極是極是。子思且就總會處言。此處最好看。又曰孟子說性全是理。若中庸天命之謂性。已是兼人物而言。又曰天所賦爲命。物所受爲性。賦者氣也。受者性也。又曰天命之謂性。是全言理。雖氣包在其中。說理義較多。若兼言氣。則說率性之道不去。又曰如有天命之性。則便有氣質。又曰天命如君之命令。又曰命是吿劄之類。又曰旣有天命。須是有氣質。又曰理難看。但就氣上看。如看元亨利貞。是也。合是數說而觀之。則天命之命字。帶得氣字來。而其向朘歸㝛。則在性字上。故曰說理義較多。然命字是形化以前事也。道一而已矣。而隨事立稱。故在天則必就氣言理。而其所以然者。各以其著見者言之。在天則陰陽成象。是著見者也。在人則仁義成德。是著見者也。其所立稱者雖異。而理未嘗不同也。且中庸推原源頭禀賦處言之。與孟子之剔出言之者。末流雖同。而上靣一截所包不同。朱子所謂孟子言性。不曾推原源頭。比大傳言性䟱略者。此也大抵天命之性。就人身中指出。所賦之理。則卽純粹至善之性也。就稟賦處言之。則有人物之異氣。東陽許氏所謂氣有通塞之不同。而氣是載理之具。故章句先言氣以成形。而後言理亦賦焉者。此也。今謂天命之性。謂兼氣質。則非常醜差。正朱子所謂在所不答者。若謂天命之命。以其在天不是說人性上事。故帶得氣字者。亦有其說。建安丘氏曰繼之者善。帝降之衷。天命之性。所謂降所謂命。卽繼字之義。雲峯胡氏曰易曰繼之者善。成之者性。子思之論。本於此。新安陳氏曰成湯所謂降衷。子思所謂天命之性。是也。朱子旣曰繼以氣言。而丘氏又以中庸命字當繼字。三子者之中。辨析尤爲精切。今以所見。與不佞同之。故幷蒙收司連坐之律。然詳究丘氏易中註解諸說。頗鑿鑿中窽。恐未可容昜壓倒也。朱子曰論本原。則有是理。然後有氣。論稟賦。則有是氣。而後理隨。以具中庸天命之性。論人物稟賦。故章句有陰陽五行之說。近世學者因此。又謂朱子本以理與氣合者言性。爲是說者。未察命字性字本意。而輕爲之說者也。至於心之爲物。貫幽明通有無統性情該萬化。固不可與肝肺腎五臓。同條而共貫。然物類旣異。其理各一。以木火圡金水言之。木在地爲木。在時主春。在五臓爲肝。火在地爲火。在時主夏。在五臓爲心。金在地爲金。在時主秋。在五臓爲肺。水在地爲水在時主冬。在五臓爲腎。然則在人木之神。當屬肝。火之神當屬心。金之神當屬肺。水之神當屬腎。所謂神卽仁義禮智之意思。而求其配屬。不於肝心肺腎。而於何乎。五行各專其一。而水行有二義。故水在歲。有終元始元之事。在方位。有龜又有蛇。在時有夜子時。在智。旣是其是而又非其非。在臓有左右腎。其他五臓之色味音聲。莫不各有所屬。分域各異。脉絡相通。雖不如心臓之具得五行之理。潛天潛地。包括萬化。亦不可全指肝肺腎。諉謂如空殻子。如手足臍膝之無所知覺也。或有問於朱子曰。五行在人爲五臓。心却具得五行之理。以心虛靈故然否。曰心緣是箇光明發動底物。所以具得許多道理。又曰肝肺五臓之心。却是實有物。若今學者所論操存舍亾之心則自是神明不測。故五臓之心受病。則可用藥補之。這箇心非菖蒲茯苓所可補也。又問心不是這一塊物事。此特其樞紐耳。曰不然。此非心也。乃心之神明升降之舍耳。人有病心。乃其舎不寧也。凣五臓皆然。今以此說推之。則肝肺腎是木金水神所寓之舍。而洛閩諸賢之論心。每曰性是心所有之理。心便是理所會之地。心以性爲體。又曰心如界方。一面靑一面赤。一面白一面黑。靑屬東方。仁也。赤屬南方。禮也。白屬西方。義也。黑屬北方。智也。若以仁義禮智爲皆出於心。而無與於肝肺腎者。何也蓋嘗思之。心之爲物。理與氣合有虛靈知覺之體用。肝肺腎之理。咸統於心。正如周家冡宰之幷列六卿。而實總百職。向所謂靑赤白黑之喩。實五臓之色。而皆屬之心者。以心能管攝五臓之理。五臓之色。亦莫非心之所統。故盡屬之心。而不復言其脉絡之所自耶。朱子曰。心恰似那藏。相似除了經函㸃燈。四方八面。皆如此光粲。又曰如箇藏四方八面光明皎潔。如佛家所謂六窓中有一猴這邊呌也。應可見此心之靈爲一身主。而五常百行。皆在所統也。又以洪範貌言視聽思驗之。曰澤水。曰散木曰楊火。曰収金。曰通圡。五臓各有恭從明聰睿肅又哲。謀聖之工夫。效驗修養家。以七情分配於五臓。五臓非全沒知思。而嘗觀醫書有云。心爲君主之官。而神明之所出。然爲物所感。則易動。動則五臓之係相連於心。五臓之病先于心。所以聖人只是敎人収心養心云。然則仁義禮智之配屬。雖有所自而聽命於心官。固也。先儒所未言底。直於手分中摸索爲說。必不中理。幸賜鐫誨。槾追白。旣作元書後。濯去舊見。㪅來新意。復引來敎而紬繹鄙說。果是舛誤。蓋天下之物。無一物不具五行之理。則五臓亦各具五行之理。而肝肺腎旣無虛靈知覺之稟。故雖有其理。而不能具寂感之體用。心則理氣合成。虛靈知覺而爲一身之主宰。故所具五性之理。體用兼該。未發而其體寂。已發而其用通。蓋心自具五性之體用。初非統肝肺腎之理。而爲心之全體大用也。倘非贒者反復不置。何以有此省覺感幸之心。不可以筆尖旣之也。答金振伯仁阻爲鬱。不審日間德履何如。辭不就徵謹。已奉悉而措辭如何。歸㝛又於何處乎。幸密以見示此不敢泄耳。來辨㴱感指迷之盛意。而猶不自量嘖有煩瀆。幸恕宥而垂覽焉。大學或問曰。天道流行發育萬物。而得其正。且通者爲人。朱子語類曰。天地那裏說我特地要生箇聖贒也。到那裏洽相湊著生聖贒。若天之有意耳。中庸章句曰。天以陰陽五行。化生萬物。氣以成形。而理亦賦焉。人物之生各。得其所賦之理云云。嘗卽其說而參互紬繹。於穆不已之天運於無形。而未嘗有主理主氣之分。故所以爲說者。只言所生之物。隨其所値。而未嘗有使使之意。今見喩曰。天之生物二氣五行紛綸交錯。而賦形成質。有昏明淸濁之分。短長厚薄之差者。命之主於氣者也。元亨利貞之理賦於形氣之中。而爲仁義禮智之德者。命之主於理者也。雖主於理。而必有所乘之氣。雖主於氣。而必有所載之理云云。其曰主理。曰主氣云者。語意若似天之命物。有主理底時節。有主氣底時節。而賦與豐嗇。有使使之意明者意裏。又慮理氣之分柝太過。下一轉語曰。雖主理而止所載之理。以足前言之偏。而理氣各有主張之意。依舊自在也。夫聖人有心。故以其情順萬物。而有理氣互發之時。天地不宰。故一氣運於寘漠之中。而機緘自爾也何。嘗有主理主氣之分乎。所謂鼓萬物。而不與聖人同憂者。是也。恐高明本意不如此。而語意不完。起人疑惑乎。抑賤謬錯認文理生疑於不當疑之地耶。朱子曰。若不用明破。只恁地存養。將去自然有到處。若欲立言示訓。須契勘敎子細。或意高明於此。㪅畱意如何。天命之說。寧置之㤀言。以待賤謬蒙心稍開觀如何耳。至於五臓分配五行之說。得蒙頂針之賜。使鈍根之資。得有領悟區區感荷。言蓋不足以形容。繼此不以不敏爲可棄。辱與之反覆。則其幸又如何。
*答金振伯[甲寅]
歲裏㐲承臘月廾五日出書。緣在山墅。發春始得開讀。從審彼時消息。卽今歲換矣。㐲惟壽堂氣體益享康寧。省下道履懋敏日章。區區向慰。不寧新歲例賀而已。槾新年所得。只是魗老二字。一命之職。已是過分。而當宁眷注。莚臣啓逹。至使不佞追躡俊武。竊恐杇骨餒魚。反敗鍋羹。用此縮恧。近已討便。控訴吏曹。若得所願。則惟思収拾桑楡之工。以追古人所謂報不報之恩耳。明間去渭陽省舅。歷修數處人事。旬時上八山庄畱數日。舍車而徒。沿江穿山。進叩仙扉。未前㐲希珍毖。
*答金振伯
前月廾間。㐲承翰敎。山裏坐鮮與人接。迄未栽謝。倘蒙思恕否。春序漸䦨。仁風扇和。㐲惟此時壽堂康豫兄弟歡侍琴瑟靜嘉。而朝晝所爲。又無愧於俯仰。爲之一羡而一慰也。槾身世常在林寄中。耳目別無相接。心累不待驅除。而自减分數江山。又有以爽我神精。而理地不至。昏窒所助。似亦不少。近緣主舍者無糊口之資。兒輩以僕不耐其小仁之心。减食飮以及人。爲有妨於老人煎迫。令下來就養於渠。年老氣衰。任其作弄。自山翁而爲野翁。鬱鬱不可堪。因思少日志意。狂踈妄有濟人利物之心。此心未副到老益窄。至于今時。不能長活手下一二人性命。時以自哂耳。
*答金振伯
日委訪。迨玆感荷。未相見間。常思有多少就質事。旣見不過打討閑話而止。㸃撿來吾輩實無日用密察功夫。故致得似此慢些子。㴱可懼歎。卽日中夏。㐲惟味道增祉。槾日前遭弟婦之喪。老弟常懷忡悒。哀姪嘈嘈殯宮。繞耳觸目。解能傷心。山墅景物方濃。而懷事如許。不得盡意把玩耳。徂玆黌堂講會之日。被城主援止。而憂患所迫不免决起。未得與聞講論。次第旋用悵恨。偶忝溪院任席院事板蕩。朱先生有言。料理錢榖。亦莫非爲己之事。非不欲經心。而自無殺活手段。將來凡幹只先有司而已。不欲太無端俟割収黃雲柬。請一二同志。爲講古書一部計。竊料來赴之人不過城東一偏地。或招不廣之非議乎。臨時持稟是計。
*答金振伯
自吾兄遂初之後。合先奉候。而偶此數月來。病孱倍尤未及遂衷。存書先之。佩荷之餘。旋切罪悔。因審執御在行。神相懽侍萬福。又以爲慰也。㐲聞自上有三接之異數。必有嘉言嘉猷。沃悅聖衷者。林下竆經正好今日。要用足以慰滿士林之望。下交賤劣。其。爲欣賀。倍萬恒情。㴱欲起躬扳叙。熟聞進御諸節。而不惟病軀。怕寒難動。家中將有不腆禮幹卒卒無暇。姑俟發春。始遂此懷。
조시광(趙是光) 1669년(현종 10)∼1740년(영조 16). 영양(英陽)
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계만(戒萬)이고, 호는 주강(柱江).
부친 충무위(忠武衛) 조영(趙潁)과 모친 판관(判官) 권확(權穫)의 딸 안동권씨(安東權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갈암(葛庵) 이현일(李玄逸)·밀암(密庵) 이재(李栽)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711년(숙종 37) 식년시 생원 3등 40위로 합격하였지만, 벼슬길에 대한 뜻을 접고 더 이상 과거에 응시하지 않았다. 이후 고향에서 학문 연구와 후학 양성에 전념하였다.
제산(霽山) 김성탁(金聖鐸)·정재(定齋) 정만양(鄭萬陽) 등과 교유하며 학문을 토론하였다.
시문집 《주강문집(柱江文集)》 3권 2책이 있는데, 1875년(고종 12)에 후손 조병철(趙秉轍)·조병시(趙秉時) 등이 편집하여 간행하였다. 서(書)는 대부분 스승 이재에게 보낸 것으로, 경전(經典)과 주서(朱書)에 나온 제의(祭儀)에 관해 묻는 내용들이다. 3권에 수록된 〈봉선의식(奉先儀式)〉은 한양조씨(漢陽趙氏)의 제례규범(祭禮規範)을 19개 항목으로 나눈 뒤, 자세히 서술하고 정리한 글로 조선 후기 사회상 및 가정의례 연구에 도움을 주는 자료이다. 주강문집 (柱江文集)
柱江文集
*次金振伯[聖鐸]韻
松榻風高月影疎、故人時送鯉中書。柱江勝席頻要子、雲谷淸篇或和余。
猥托深交舟共郭、每歆高義榻留徐。知音更奏峨洋曲、白首襟期願若初。
*憶金振伯在謫作相思曲三闋
峨洋一曲玉徽寒、月夜思君不忍彈。千里南荒魂夢斷、三湘無雁寄書難。[右一闋正律]
鶴髮門閭淚不乾、遊子天涯幾日還。烏鳥有情西景短、天意分明早賜環。[右二闋檀律]
絃絃掩抑楚聲多、逐客江南消息何。目極鄕關路難越、且加餐飯安太和。[右三闋吳體]
*答金振伯
椒洞別後久不嗣音,雲樹迢迢方切紆鬱,此際書來說盡肝膈,有若親聆音旨於合堂同席.而但書中擬議非倫,此誠僕之所欲請於左右者,而反使執事先之,愧汗不知所以貢答也。就審侍體愆和知,有陽翟之行,而竊惟誠孝純備神明感應,勿藥之慶計日可收矣。是庸慰仰是光奉老依遣幸外何煩,所謂江軒雜詠出於無聊中一事而偶入崇聽,此乃不自知覆瓿之爲可,而欲求斥正而轉達之也。古人云苦吟五字句費盡一生心者,乃此漢題目.而尙欲以弊箒昜人之金,幸望俯賜瓊報以資珍玩,使此一區江山頓生顔色如何.所謂柱江云者,一大盤石屹立江中,高可三四丈,上可以坐五六人,俯臨其下游魚可數.方春和景明巖壁皆花,頗有冠童嘯咏之樂此弟之所得專而自號者也。鶻巖云者側立江畔鸛鶴時集或思淸月白之夜磔磔於雲霄間者也。至若仙臺夜月松壇暮雪,中峯晩雲,靈寺曉鍾琶潭觀漲,蓮池賞花云者合爲八景,而以余之愚猶得而名焉者也。執事想不得詳然,異日先壠之行不過增十里之役,可以賞之矣。
*與金振伯
出獄而海出,海而陸莫非天地生成之德從前遭變, 顚末不必提說,而半年栲椋之下得全性命萬里駭退之中尙免漂泊、豈不爲親知者之所相率以賀者耶.秋晩南荒風土異北,不審血泣中纍履何居,竊惟處困愈亨君子攸貴,幸勿自沮益勵所守,安其飮啖善其調攝,上以慰千里外慈闈,下以副儕友區區之望,曩者得見七嗚呼歌,想是兄在濟時作也。令人執紙嗟唏一字一涕第,念不平之鳴,固是窮愁之人有不能自己,然悽辭苦語謾自攪撓心曲,不無斲喪眞元,是可應也。況當此世操戈執椎隙候傍何者甚多, 吟哦之際有傷煩之弊,則吹毫之輩或造非情之謗, 是不可不愼,是則不待耄言而高明已熟料之矣。然相愛之至不容默默,幸諒之如何是光七十殘齡奇疾間之廢蟄窮廬,不敢窺洞門外者已有年矣。有患相問固是汲汲不暇者而其在福堂時則義有所不敢越海之後便不得憑每自悵望興懷而已.今聞今胤之來,使兒輩馳佳問之,仍此寄音滿腔懷緖非秃奴所可旣也。白日照忱鷄幡可期握手重懽、豈無其日乎。惟是之祝.
채팽윤(蔡彭胤)1669년(현종 10)∼1731년(영조 7).
본관은 평강(平康). 자는 중기(仲耆), 호는 희암(希菴)·은와(恩窩).
현감 시상(時祥)의 아들이다.
1687년(숙종 13) 진사가 되고, 1689년 증광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여 검열을 지낸 뒤 그해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다. 그때 숙종의 명에 의하여 오칠언(五七言)·십운율시(十韻律詩)를 지어 후일 나라를 빛낼 인재라는 찬사와 함께 사온(賜醞)의 영예를 입었다.
그뒤에도 호당(湖堂)에 선임된 자들과 은대(銀臺)에 나아가 시부를 지어 포상을 받았으며, 그가 금중(禁中)에 노닐 때면 언제나 숙종이 보낸 내시가 뒤따라다니며 그가 읊은 시를 몰래 베껴 바로 숙종에게 올리게 하리만큼 시명(詩名)을 날렸다.
1691년 세자시강원의 벼슬을 거쳐 1694년 정언(正言)에 있으면서 홍문록(弘文錄)에 올랐으나, 이이(李珥)·성혼(成渾)의 문묘출향(文廟黜享)을 주장한 이현령(李玄齡)의 상소에 참여하였다 하여 삭제되었다.
그 뒤 벼슬에서 물러나 제자들에게 학문을 강론하며 지내다가 1724년 영조의 즉위로 승지에 제수되고, 이듬해 도승지·대사간을 거쳐 예문관제학에 임명되어 감시장시관(柑試掌試官)이 되었으나 성균관 유생들이 전날 양현(兩賢)의 모독과 관계되었다 하여 응거(應擧)를 거부, 교체되는 파란을 겪었으며, 1730년(영조 6) 병조참판·동지의금부사·부제학을 역임하였다.
저서로는 《희암집》 29권이 있고, 《소대풍요 昭代風謠》를 편집하였다.
*謝蔡參判 彭胤 書 庚戌
聖鐸再拜。竊伏竆鄕。望當世名公貴人。不啻蓬弱。不知賤名何以得徹崇聽。有此降屈垂問之光寵也。感悚之至。不知所以爲喩。宜卽趨進拜謝。車塵杳然。末由遂忱。恨仰何極。
이영(李栐) 1670(현종 11)∼1735(영조 31)
본관은 재령(載寧). 자는 사직(士直), 호는 후계(后溪),
융일(隆一)의 아들. 갈암 이현일의 조카.
숙부 항재(恒齋) 이숭일(李嵩逸)에게 사사하였고, 당시 장서가로 유명했던 成文夏(1638~1727)의 사위가 되어, 처가에 소장된 經傳, 史記, 百家의 책을 탐독하며 더욱 그 문사를 닦았다. 평생 벼슬을 하지 않고 은거하며 학업에 정진하였다
제산집
輓李士直 栐
東南儒學說公門。詩禮文章可考論。怊悵比來天喪甚。不知誰復泝淵源。
振谷先生已九泉。草堂寥落鎖寒烟。公今繼逝吾安仰。悵望山門欲暮天。
少學屠龍非所好。晩耽羲易絶韋編。秖今眞訣尋何處。庭草蕭蕭冷月邊。
矦伯干旄不及門。褐衣懷寶老竆村。一時顯晦何須說。知我者希道更尊。
蘭摧幽谷玉埋塵。秋日荒原斧屋新。惟有遯坡溪上月。淸光彷彿見精神。
*與李士直書 癸丑
違拜經年。候問亦簡。殊非居常嚮德之意。罪歎實深。卽日新秋尙熱。伏惟靜養道體萬福。振谷丈自上眷禮非常。匪久亦當有縻爵之典。士林與有光寵。賀幸無已。但萬萬愚拙如鯫生者。亦混幷其間。而以文丈之老成德學。未免逸遺之歎。尙可謂公論之不泯乎。然含章抱珍。謙冲不露。使當世莫得以尋窺。苟非所養之深厚。而觀象玩占之有得。何以能然。益自愧平生。不避近名之嫌。以至今日狼狽者。誠淺之爲丈夫也。自夏間。連以親癠煎灼。迄用未定。而千萬夢外。有此節拍。惶蹙憂悶。無地措躬。昨始呈書本府。略陳千不敢萬不敢之意。而未知末稍復如何耳。從來猥以不敏。辱知辱愛。不在人後。伏想聞此。必爲之閔然動念。幸乞勿以冷暖之義置之。而一爲指敎。使愚昧者。不至茫無所歸著。如何。曾伏聞執事數年來。杜門讀易。日有程課。以尊暮之年。無異初學之勤劬者然。令人歎仰。不覺竪起頹懶也。仍竊仰惟韋編屢絶之餘。必有默契於三聖之遺旨者。欲一執經座下。叩問緖餘。而恨未易得耳。聖鐸近不自量。敢有所反復於振谷函丈者。伏計已入於高明之旁照。未知盛意以爲如何。鄙陋本無毫髮見識。乃與先生長者。辨難不舍。極知僭妄。但鈍滯膠固。不敢強所未透以至此耳。幸願幷賜誨諭。以牖昏惑。苟有所曉然者。豈敢終始執謬不回耶。秋間。欲更拜振谷丈於江齋。因可轉拜床下。未知此計不差池否。
후계집
* 松石禪房次金振伯[聖鐸]贈韻
* 제산선생에게 보낸 편지와 답장이 후계집에 6편 있다
答金振伯[丁未]. 與金振伯[丁未]. 答金振伯[癸丑].答金振伯[癸丑]
與金振伯[甲寅]. 與金振伯[乙卯]
권구(權榘)1672년(현종 13)∼1749년(영조 25).
본관은 안동. 자는 방숙(方叔), 호는 병곡(屛谷).
아버지는 선교랑(宣敎郞) 증(憕)이며, 어머니는 풍산유씨(豊山柳氏)로 현감 원지(元之)의 딸이다.
이현일(李玄逸)의 문인으로, 일찍이 과거를 단념하고 유학의 전통을 지키면서 학문연구와 후진교육에 전념하였다. 그가 살던 향리 안동 족적동(足積洞)에서 사창(社倉)을 열어 흉년에 빈민들을 구제하였으며, 향약을 실시하여 고을에 미풍양속을 일으켰다.
1728년(영조 4) 이인좌(李麟佐)의 난으로 영남에 파견된 안무사(按撫使) 박사수(朴師洙)에 의하여 적당에 가담할 우려가 있다 하여 서울로 압송되었으나, 그의 인품에 감동을 받은 영조의 특지(特旨)로 곧 석방되었다.
그는 경학(經學)·예설(禮說)·성리학을 깊이 연구하여, 이기설에는 이황(李滉)의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을 전적으로 지지하였다.
기타 천문·역수(曆數)·역학(易學)·사기(史記) 등에도 매우 조예가 깊어 〈경의취정록 經義就正錄〉·〈독역쇄의 讀易𤨏義〉·〈기형주해 璣衡註解〉·〈여사휘찬의의 麗史彙纂疑義〉 등을 잡저로 남겼으며, 그밖에도 옛날 명훈(名訓)을 한글로 번역한 《내정편 內政篇》이 있다.
저서로는 《병곡집》 10권 5책이 전한다.
제산집
*與權屛谷方叔 榘 書 戊申
當初危迫之境。心骨尙寒。不須復提說。而倉卒死生之變。神色洋洋。辨對不亂。至於上感天聰。下暴丹忱。得蒙希世渥恩。有以見素養堅定之力。此豈但爲德門私幸而已。亦足使遠邇儒冠。爲之增氣。且有榮焉。然若非聖明好生之德。與天地幷。何以有此。此則又社稷生民之幸也。兇徒伏法殆盡。方域底平。而吾文又生還。仰而抃俯而賀。外此而傳說紛紛者。不欲掛諸口吻也。竊聽風傳行聲已久。而稅駕之報尙寂然。鬱慮更深。續聞歸轅到忠原。爲與令二胤偕返。以此遲遲。未知二胤兄。今已解脫而返。定無撓否。歸時道塗間關。到日門闌溢慶。不問可以想見。第未審險艱備甞之餘。體氣能不損减否。是爲區區之慮耳。錦水先生。意外承除命。已以老病外。又有情跡不安。實狀。呈辭東銓。未知自上處分又如何。然大抵去就甚難便耳。聖鐸奉老粗遣。若得行旆還稅的信。當掃萬進拜。但家無驢馬。借乘又難。遲速恐未可預必。方出數舍地。當信宿而歸。恐未間有便。草此留付晴峯寡家。以爲因便傳達地。
*答權方叔書 甲子
昨年七月所賜書。今六月。始自晉陽傳到。其所來歷。可謂的實。而濡滯之久。尙至於此。遠地音信。其可望其源源相屬乎。可歎可歎。比年來銜痛抱恨。情地迫切。念不及他。加之以時氣乖戾。竄身巖竇。凜凜度日。然有時懷仰高風。不覺悒悒神馳。每欲以一紙付之鄕便。以候動靜而未之果也。迺蒙長者不遺之惠。遠辱存問。若是眷眷。奉讀再三。感歎彌日。卽日秋序已暮。霜風戒寒。不審靜養道體。連享康勝否。千里嚮慕。不任區區。聖鐸一違几筵。再歸無路。邈在天涯。奄過三霜。而頑命未絶。尙此苟活。不孝之罪。窮天之痛。求之人世。孰復如是。且於數年之間。避痘避癘。備甞艱危。命之窮厄。可謂極矣。然此則已知其無可奈何。而不甚爲意也。惟是犬馬之齒。恰周一甲子。疾病彌痼。凋殘益甚。時於呻吟之隙。無以度日。漫取架上書卷。以爲遮眼消遣之地。則眼花眩瞀。神精疲倦。不過一二紙。卽投卷就枕。情况若此。復有何生人意趣耶。示諭縷縷。令人感慨。一自錦里寂寞之後。此學絶講。微言緖論。幾於烟沈燼滅。誠可憂歎。然平常私竊以爲同門先進中。獨執事者。問學高明。操履純粹。足以爲後生之儀範。庶幾師門遺韻。有賴而不墜。而顧此癡獃湔劣。不能自脫於名利之欲。所徇者流俗。所趨者紛華。一未能以已分內所當講者。仰質於座下。及此顚沛流落。回顧平生。茫然如醉夢中人。可駭可恠者。不一而足。於是欲自奮勵。以爲收拾桑楡之計。則不但齒髮如許。有補過不及之歎。所當叩擊而就正。如吾丈者。又遠隔屢百里外。拘係之蹤。無由致身於講席之末。徒自寤寐慨歎而已。今乃不待稟請。先賜指敎如此之諄切。噫。微執事之愛我深。不我遐棄。何以至此。感極感極。若夫所謂大學之爲階梯。中庸之爲總腦。周易之爲本源。誠至論也。聖鐸居常讀書。鹵莽滅裂。不能潛心硏究。只是依倣訓詁。略解文義而止。如易經之深奧。固不敢與議。至於庸,學。則盖甞屢次誦讀矣。章句或問之所開示。如彼其竭盡無餘蘊。而猶有所未盡透徹處。况可望推測於註解之外乎。曾讀中庸時。但以程夫子所云。始言一理。中散爲萬事。末復合爲一理者。爲大綱領。而以章句所分四大節。究其意脉而已。此外未甞致思也。今諭之以章句或問之於全篇大意。有引而不發者。恨不得執書請益以聽精詣之論也。道里若不遠。則雖不得躬詣門下。亦當乞借所著文字。以爲玩索之地。而邈矣不敢妄有請也。嗚呼。其將終於迷惑而止耶。執事者。旣憐其愚蒙。而勸令讀中庸。則敢請以精思妙契之一二。設爲條目而俯詢之。許令供對。以觀其得失而終敎之。如何如何。若因此而或有一斑之見。則莫非執事賜也。伏願執事。更加垂憐焉。
屛谷先生文集
詩
*寄金振伯 聖鐸
孤臣謫路又晞陽。懷舊何堪感淚滂。正憶玉龍幽洞裏。水丘林木帶餘香。
*次金振伯 聖鐸 謫行韻
忽憶吾君在網羅。回頭相望隔天涯。厭看暮峀孤飛鴈。愁對寒江屹起波。
遠樹春光吟外滿。空樑月色夢中多。還思處困能亨義。禍亂徒然柰我何。
*寄金振伯
潛陽始奮一聲䨓。前路分明次第開。陟岵情懷須自慰。萊堂行見綵衣陪。
書
*答金振伯 聖鐸○癸巳
頃間。與謹甫頗得從容。每話何嘗不語及於兄耶。且聞兄患瘧彌留。固宜有一書相問。性嬾筆硯。又緣憂病汩沒。闕然若相忘者。方歉然不釋。反承先施之問。雖荷不遺。豈無愧恨。因審大暄。侍餘鍊况淸宜。所苦亦稍間歇。慰瀉不可 言。來書中數段語。非可以施於弟者。雖是振伯愛之深而不知其惡。且出於激勸之意。獨不爲傍觀者所齒冷乎。於是乎吾振伯。亦未免失言矣。地隔數舍。敍吐若此之難。始知古人千里命駕者。實爲難續之雅致。臨紙只覺浩歎而已。
*答金振伯 癸丑
首夏歷路。墜及問存書。深感。尙闕然不報。能不致訝。卽者向寒。歡侍外道履平穩否。一念常懸懸也。頃者恩除。亦出公議。然進退之間。實有難處者。相愛如榘者。自不能不關慮。向今稍有結殺。可幸。但聽於相傳之口。且觀頭勢。恐難終守東岡之陂。寒煖在己。非岸觀者可知。而一出一處。 亦當度時量力。有素定之計。然後就此上頭。不無略加推變之道。想精義之見。已必有成筭矣。
*答金振伯 辛酉
秋間令胤之行。獲承復書。千里消息。有若夢寐。其後節序又換。未審卽此至寒。體履興寢支安否。每一念到哀邊。不覺魂骨欲銷。然素患難行乎患難。聖訓昭然。今日所自勉者。此外豈有他道理耶。晦齋江界時所遭。哀所自知。延平持以自比之訓。更須體念如何。竆沍盛冬。亦有風和日暖底時。一聲天雷。安知其必無耶。潛思暗祝。惟此而已。榘私家不幸。老婦六月初。遽不起疾。窆葬亦已了畢。晩暮身世。一倍悲凉。然死生常理。略已講解。亦自不無得力處。任之 而已。苦意悲思。不必提起。略附數字。以代面目。
*與金振伯 壬戌
音聞阻隔。常深戀憀之思。風傳時至。還惹不佳之懷。欲置之相忘之域。而一念依然復起。人固有情奈何。不審卽此寒節。孝履支遣否。今年癘疫。八路同然云。其處果能保安。無畏忌憂慮之患耶。日月易得。外除忽已扗近。哀痛罔極。尙復何堪。過意節抑。深思聖人不孝之戒。千萬至望。榘衰病悲悴之狀。無可言者。適此運氣不好。伊湖芋洞武夷三益。次第殞沒。其餘一家及遠近親知。喪慘相仍。一年之間。殆至十數。顧此踽踽孤影。前途亦且幾何。而海內蕭條。身世益復荒凉。不但死生之悲而已。每念錦水從游之樂。昭 然若前日事。而滄桑人世。萬事悲凉。撫念長痛。寧有一分生世意况耶。愁居竆寂中。無以遣日。試就庸學易三書。早晩閒看。往復數次。有若寸鉤釣鼇。尺木登天。自知初不干我事。然壁隙間餘光末輝。有時似若依俙窺覘者。而鼎器毁破。神精散落。纔傳數紙。忽復茫然。不免隨手箚記。以備遺忘。今至數三篇。狂妄僭率。固可罪。且必爲傍人笑囮。然若得如哀在此。相與參證。得蒙鐫砭之益。或不無一分開悟處。而擧目傾耳。千里杳然。離情別恨之外。此尤慨然也。大抵自農工商賈。以至百家衆技。莫不各有其事。而亦莫不有古人遺方。爲其事而不以其方。可乎。士者所以主爲人之事。而四書六經其方。然大學其階梯也。中庸其總腦 也。周易其本源也。若不始之以大學。使蹊逕不亂。會之以二書。使義理昭著。則其所謂學者。徒爲口耳之末習。假使姿醇質美。有意向善者。能依樣古人之言。十分無差謬。不過是一箇死法。而終無以應事務。間有智慮才幹。存心世務者。能辦立事功。震耀一時。亦不出私智俗見。而必有以流後弊。若其臨大變處大事。則亦且無本可據。顚倒苟且。不至傷義敗事者幾希。此所謂劫之以不測則亂者。故君子之學。必欲沿流溯源。開關啓鍵。有以自得於中而後已者。此也。榘才性本甚虛弱昏滯。兼以身病。且汩世故。虛過半生。到今不但年齡已暮。前途不遠。又自昨年來。有健忘之症。一言半句。領會不得。更何可言耶。如哀。雖在罔極中。 旣有前功。比榘年歲稍下。才分相絶。若以讀禮之暇。從容玩繹。推尋其路脈。咀嚼其膏腴。抑恐不無所得也。但易則非歲年工夫所可得力。且暮年精力。有難包羅究索。或專意於中庸否。大抵中庸一篇。分章立節。各有主意。然前後相仍。首尾相應。自成一箇統屬。與凡他經傳隨時隨事。各說一義者。自不同。且如章句及或問。各就其章。發明其言語所指。文義所歸。曲暢旁通。更無餘蘊。然至其全篇大義。則間間提起。引而不發。使讀者有以融會貫通而自得之。讀之之法。要當尋究脈絡。以挈其裘領。然後又當各極其趣也。平生愚心拙計。盡歸虛地。將爲無聞之鬼。不量朽木本自難雕。猶有暮年悲慨之懷。而亦無回頭開口處。發此 狂言。或不加訶責否。自餘苦懷情思。都在默會。
*與金振伯 乙丑
多少情懷。非筆可旣。亦不待於言也。蒼黃奔迫之餘。果能無事安泊。而其後亦已數月。居止稍定。而履候亦連獲順迪否。經歷之久。必有隨遇自安之道。然時時念及。不覺使人心緖憫鬱也。榘前喪以後。又連遭末子婦及寡居長女喪。晩暮情境可想。而前患眩暈健忘之症。日甚一日。尋常酬酢之間。亦且八顚九倒。其他尙復可言。萬事無一關心。固當任之。而回念往事。猶不能無慨然者。惟有一念常往來於吾振伯。其亦想像此懷否。儻得涪州氣力。使一脈餘波。不至全然斷滅。豈不爲師門之幸耶。便因難遇。筆硯亦 且廢棄。書問相通。尙不如意。臨紙尤覺依然。
*與金振伯 庚戌
甥姪至。因審淸秋歡侍外翫養佳勝。瞻慰幷切。新除。足見公論不泯。豈勝欣賀。聞命卽赴。 分義固然。前頭去就久速。想已有定筭也。久阻瞻溯之餘。又成遠別。甚覺悵惘。行史過近。病伏中未果出路左拚別。此恨又何如。惟願攝爾威儀。珍重自愛。以副吾儕慕向之意。
권덕수(權德秀) 1672년(현종 13)∼1759년(영조 35).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윤재(潤哉), 호는 포헌(逋軒).
아버지는 진원(震元)이며, 어머니는 예안김씨로 종발(宗渤)의 딸이다. 열여섯 살에 권두인(權斗寅)의 문하에서 글을 배웠다.
1690년(숙종 16) 향시에 합격하고, 동당시(東堂試)에 응시하려 했는데 족형 구소(鳩巢) 가 시관(試官)이었으므로 피혐(避嫌)하여 단념하고 말았다.
1728년(영조 4) 이인좌(李麟佐)의 난이 일어나자 향중에 격문을 돌려 의병을 일으켰고, 포로가 된 도적이 횡설수설하는 바람에 무함(誣陷)을 입었으나, 영조가 애매한 줄을 알고 관찰사 박문수(朴文秀)에게 타일러 무사하게 하였다.
1757년에 수직(壽職)으로 통정대부중추부사에 제수되었다. 초년에 제자백가를 두루 섭렵하여 천문·지리·수학까지도 매우 조예가 깊었으나, 중년 이후로는 오로지 주자학에 전념하였고, 특히 《중용》과 《대학》을 평생의 지침서로 삼았다.
저서로는 《몽구 蒙求》와 《포헌집》 5권이 있다.
逋軒先生文集 제산집
*祭金霽山 聖鐸 文
嗚呼哀哉。蔡昔舂陵。子又光陽。師門之故。皆沒遐荒。彼時雲谷。講席依常。四字哭柩。尙覺悲凉。如何關塞。旣飽風霜。畢竟神棲。劫灰飄颺。以今視古。一倍慘傷。中宵撫膺。憶君涕滂。天賦竗質。得師益章。文足煥猷。利用賓王。宮花入對。寵錫圭璋。引置論思。盛以玉堂。周行色動。駭機潛張。一鳴何辜。所惡生瘡。黃扉乍啓。白日回光。過海全生。移陸望鄕。憐其有喪。許以歸襄。聖慮徘徊。玉音遠揚。風伯未訟。霈澤難望。日斜鵩入。霄暮鳳藏。嗟嗟吾友。玉潔蘭香。妙齡學道。忠孝貫腸。生三致一。所在敢忘。忠寃莫白。直道爲殃。早知如此。初合消詳。常調致身。賢轍猶僵。曷若山林。進止不妨。空懷未展。有朋無良。恩暇一面。悲喜叵量。銀山不缺。石腸猶剛。屛營路側。執手遠將。丁寧一語。眷言西方。始也帷幄。終豈粃糠。行矣善飯。時亦未央。瞻望行塵。竚立霑裳。一往不復。人事遽忙。命數終始。亦猶康莊。是非賢否。孰詰彼蒼。寵辱俄驚。如夢一塲。居心無愧。君子允臧。豹虎遺斑。蕙杜傳芳。今之仲默。行出儕行。血脚嚴程。扶櫬瞿塘。孝思維則。家學自彊。君其不盡。有此阿郞。我獨人猗。末路倀倀。二三兄弟。次第云亡。黃間壯七。腦脂遮眶。屛迹幽人。長病卧床。百年無幾。萬事亡羊。將來直筆。誰洗靑箱。悠悠我懷。語不敢長。靈如知我。擧此一觴。
書
*答金霽山 聖鐸
榮還久矣。迄未獻一狀以賀。道左出候之計。亦且違繣。第極歉歎。頃者貶翰先施。風誼珍重。時在石門。政對故人。鷦鷃集于藪澤。鵬翼已翔寥廓。爲之感悵無已。因循稽謝。方愧不敏。卽聞慈闈密縫。游子戒程。君親俱重。去留想難。而旣已致身。宜盡匪躳之節。况今聖人在上。保合大和。恩眷非常。擢置言地。豈不盡心無隱。思所以報塞萬一。其他榮悴得失。有不足計。然而古人所謂九萬里風安稅駕。雲鴻今悔不早飛者。區區未嘗不奉念於左右也。向者屛翁之來。語及私義未伸。一倍惋傷。眼中吾儕存者無幾。又皆摧殘。意竆路絶。今日所望於吾兄。實非淺淺。如得可言之會。何關早晩。恨未得一番鼎坐。奉盡消商耳。
*與金霽山
海外全生。莫非天恩。益想君子素位。無入不得。第未知積月廷尉之餘。又涉萬里風濤。不瑕有傷否。伏聞大碩人自九月以後。平心釋慮。日進匙箸。以待早晩歸日云。此實情舊所共讚歎。不容已也。幸兄益務珍愛。要以學力自勝。以答慈念。如何如何。古人所遭如穌齋十八年珍島。隔離雙親。豈非李延平所謂持以自比處耶。區區所祝。惟此而已。絶域紡絃。其苦可想。而平居者亦各自困。無計捄他。收合略少。拭汗表忱。歉歎何極。
신익황(申益愰)1672년(현종 13)∼1722년(경종 2).
본관은 평산(平山). 자는 명중(明仲), 호는 극재(克齋).
아버지는 수사 명전(命全)이며 그의 조상은 원래 개성에서 살다가 중간에 서울로 옮기고, 5대조 때 경상북도 인동으로 옮겼다.
학행으로 인하여 37세 때 천거되어 경기전참봉(慶基殿參奉)에 제수되었으나 병을 이유로 사퇴하였다.
또, 46세 때에는 천거에 의하여 의영고주부(義盈庫主簿)가 되었으나 왕에게 나아가 사은(謝恩)하고 바로 돌아왔다. 그의 학문은 이현일(李玄逸)에게서 크게 영향을 받았다.
27세 되던 해 5월에 이현일을 광양의 배소로 찾아본 것을 시초로, 여러 차례 면대하여 가르침을 받기도 하고, 전후 열 차례의 서면 질의를 통한 학문적인 문의가 있었다.
이들 질문과 토의의 내용은 유학 전반에 걸쳐 광범하게 행해졌으나, 특히 문제삼은 것은 당시 학계의 주요관심사였던 이(理)와 기(氣), 사단(四端)과 칠정(七情), 인심(人心)과 도심(道心)의 문제였다. 이현일을 만나기 이전의 그는 이들 문제에 대하여 이황(李滉)의 설보다는 이이(李珥)의 설에 기울어져 있었다.
그러나 이현일과의 학문적 교섭을 통하여 점차 이황·이이의 사상을 동등한 차원에서 인정하려는 과정을 거치게 되고, 거기에서 더욱 철저한 논의를 거쳐 마침내 확연히 이이를 버리고 이황의 견지를 찬성하게 되었다.
그가 학문적으로 교유한 사람으로는 권두인(權斗寅)·권두경(權斗經)·이재(李栽)·정사신(丁思愼)·권중도(權重道) 등 당시 영남의 대표적인 유학자들이었다.
사헌부대사헌에 추증되었다
제산집
*輓申克齋 益愰
師門當日拒詖功。協贊推明有我公。卓立頹波扶道敎。竆探理窟振儒風。
藩禽乍誡天地翼。河伯將觀海若宮。惆悵十年虛此計。謾憑哀誄寫余衷。
박이상(朴履相) 1672(현종 13)
본관은 무안(務安). 자는 신로(莘老). 호는 만송(晩松)
아버지는 박서(朴湑)
숙종(肅宗) 36년(1710) 생원시 합격
晩松遺稿가 있다
제산집
*答朴莘老 履相 書
春末家便。伏承元正初九日惠,書。滿幅縷縷。無異對面誨諭。迨今感荷不已。信後。月日屢更。謹問初炎。尊體動止何如。道途阻脩。末由以時承音。但有一念瞻仰而已。畸兄之不淑。豈但係德門禍厄。實由吾黨運氣之不幸。愷悌之德。淸介之操。博雅之識。敏麗之才。求之今世。不易復得。此固遠近士友所共嗟惜。而如纍人者。平生情義。無間骨肉。風雨雞鳴之意。尤見於死生竆厄之日。而奄忽之間。幽明永隔。此亦纍人命竆。喪此良友。不得久資麗澤之益也。痛歎如之何。伏惟一家親懿之厚。其所倚仗。不輕而重。而意外禍變。遽至於此。傷慟悼惜之懷。安得不如書中所云耶。奉讀未竟。不覺悲涕之欲墜也。纍人出陸到此。實荷如天之惠渥。而去親尙遠。歸日無期。今逢大霈之辰。猶未免爲負霜之草。每念古人日迫西山之語。方寸爲之摧斷。且餘厄未盡。前冬遭姑氏喪。今春又哭從兄。三載之間。至親變故若此。悲痛情事。又何可容喩耶。所居。果是師門遺躅所在。而罪戾蹤跡。有玷無光。俯仰傷感之餘。未嘗不慚恨。於仁山之事也。謬命文字之役。前日暴陳情實。而未蒙採察。今乃復有此勤敎。不勝惶蹙之至。纍人若復以非其人辭謝。則必且不得命。請以古賢所已行者稟之。朱子於慶元之末。但有僞學黨禁而已。未嘗遭斥逐刑禍之厄。而凡於文字之請。輒以時義之不可。固辭而不敢當。夫以大賢地位。猶尙如此。而况幺麽一僇人。負犯至重。姓名方在吏議中。其何敢抗顔無忌。泚筆於莫重之地。以重其罪咎乎。且於吾丈爲先之誠。亦恐非重其事之道也。如何如何。若必不計其人之可否。而強使之代斲。則敢請且待罪名之稍輕。畏約之稍定。然後徐徐而命之。則雖不敢當。敢不勉以奉承乎。此非諉托之言。實出赤心。幸賜諒察。如何。畸翁遺文。在纍人所者有若干簡牘耳。篇什則無多。但患難之日。箱篋所藏。盡爲邏卒所搜取。未知尙有餘存否耳。當令兒輩從容點撿。隨所有錄呈是計。
*答朴莘老書 壬戌
歲初。伏承下問。手擎讀。感悚無量。且審彼時動靜甚詳。極以爲慰。而新年消息。末由承聞。伏未知際此春和。靜養體氣。復如何。邈焉嚮遡。不任下忱。聖鐸遠離几筵。苟延喘息。奄倏之頃。練期已過。北望叫號。伸痛無地。人子罔極情界。孰有如是者乎。且以痘忌。不免爲性命保全之計。投泊竆山。靡定處所。而新春節物。觸目生悲。六歲飮瘴。疾病交侵。此莫非罪惡無竆。見惡神天。使之備嘗險艱爾。痛歎奈何。謬屬文字。以人言之。固萬萬非其任。而况負罪流竄。重之以憂故。其於私義。尤有所不敢承當者。第念長者之前後勤敎。不止一再。一切固辭。殊涉未安。故敢因所寄狀草。略加裁節。以爲墓誌如所命。而銘則是韻語。非有喪者之所敢爲。故前人在憂中。亦有爲人作誌碣。而闕銘者。且韓文碑誌中。亦或有無銘者。故叙文之末以係曰代銘。此亦古有其體。未知於尊意如何。拙匠代斲。疵痕百出。固不足怪。而此等文字。所貴簡約。今乃千有餘字。雖欲極意刪潤。而卒未能也。此固决不可用。徒欲仰副長者之誠。故只以草本仰呈。以聽去取。萬一不至棄斥。則從後繕寫以呈。未晩。此紙還擲。如何。書末泉下爲期之諭。奉讀未畢。不覺黯然傷心。吾丈春秋雖高。氣力猶康健。方以無彊之壽仰祝。何爲遽有此言也。所不可知者。罪人蒲柳之質。罹此百憂。摧殘隕剝之餘。理難得全。恐或不復得承顔。是可歎也。
*계해년 6월에 박이상(朴履相)에 박이상(朴履相)이보낸 간찰(簡札).
省式。平生積惡。殃及無辜。一旬之內。孫曾父子。相繼殞沒。天乎鬼乎。胡寧忍此。世間不無靑年傾逝者。亦有膝下逆理之痛。而如弟所遭。振古所無。支維人世。老而不死。竟作旡後絶嗣之人。天地間不孝罪人。孰有如弟者哉。惟欲速化無知。而惡喘未絶。苟延時月。而言而食。尙有生意。誰謂木石頑哉。日月不淹。寃祥忽迫。追惟昨年。物邑依舊。而哀哀我孫。一去不返。音容日昧。形跡漸邈。莭莭摧割。肝腸寸斷。尙復忍何喩忍何喩。豈料家禍至此酷慘。而渠賦命。亦如是奇薄。行年卄七{永}。無生世蹤跡。而爲無主之鬼耶。亶由此窮凶極惡之人。久視人間。使渠父子非命而就盡。一息未絶之前。此痛寧有弛觧時耶。萬事已矣。更無所望。奈何奈何。㐲蒙尊慈遠賜慰問。開絾展玩。哀感良深。仍審炎熱謫裡。起居連迪。區區欣慰。不任遠忱。苐援琴匝月。切切之哀。自割之痛。去而益新。矧惟天涯幽。蟄不得拜奠於几筵之前。那奉讀來書。尤令人殞涕。弟慘禍以來。形売徒存。了無一分情况。兼憂患沒頭。夙宵焦煎。只恨命物之不即勦絶耳。渠死後幸有遺腹而得男。天若悔禍。保養成立。則日後之望。惟在於此。而自産後即嬰咳。喘鼻塞之症。迄今九朔。而猶未快愈。目今所見。若不支保。種種慘憐之狀。難以茟舌盡。旣時患閱歲經年。永無止熄之期。一境之內。處處熾蔓。且多死亡之患。不以鄙村稍凈弛慮。常自危懍度日耳。連年凶歉之餘。麥荒太甚。我生之後所未見也。前頭延活。萬無其䇿。將未兌餓斃。而倉糴之捧。急於星火。匪久又作囚械之鬼。堪可憫憐。未知湖中等邑。與此稍勝。而謫中調度。亦無窘憫之患耶。遠外馳想。只切空慮而已。萬萬心不守宅。迷荒中呼倩艱草。語無偸次。觀此可想弟近日情狀耳。只冀氣度從長平善。用副迷望。朝暮之人更奉無期。臨紙哽塞。双淚自下。兄亦諒此。而悲不自勝矣。㐲惟前者搆送墓誌。承欽成仰。慘變之後。心神迷荒。不得思繹展玩。雖累周看審。寧復有進退添刪之事耶。碣銘請於朴幸令。而未及推來矣。今聞作慮。極可歎恨。兄下照謹荅狀。癸亥六月初六日。願死服人。朴履相久式。金校理匪所下吏荅狀上
*의성김씨 제산종택 신묘년 3월에 박이상이 보낸 편지
이해 제산선생이 진사시에 합격한 것을 축하하는 내용
卽伏惟和煦。省下僉等啓處萬相。仰慰區區。不任下沈。令胤僉兄。科事俱得。狀捷妙手嵬占。已極奇幸。而重侍具慶之下。有此莫大之慶。親知之賀。尙難容喩。矧惟僉丈慰悅之情。其有涯極耶。然聞榮到在還。伏想慶溢。門閭遠近。聳觀相悅之情。益用欣羨之至。此中族弟懸望之餘。未免落暮而歸。衰門之例也。▩......▩前患▩▩抉袪未▩......▩故如許奉拜無期。伏低冲悵。只祝各自許重用副區區。伏惟僉等照。謹賀狀。辛卯三月十日。朴履相頓首。豊山人說。今年秋七月。天大雨二日。東北江大溢。豊縣南有柒林。柒林卽東北江下流之浦。距江水若干步。豊之氓有家之者。不知其姓名。氓之居於是林有年矣。雖甚潦水。未嘗及林。氓之家未嘗知水患焉。至是水大至。漸林之外。同隣居者。走扣門。大呼曰。水至矣。盖去諸。氓笑不應。久之曰。是林也。而水至焉。卽海且屋矣。頃之水及扉來。一寸深。隣人又急扣曰。水迫矣。盖去諸。氓又笑而不起曰。是林也。而水迫焉。卽天且改闢矣。隣人無以復告。卽襁其子急走以避。氓笑隣人之怯也。隣人未及出林。而氓之居。水已三四尺矣。隣人比至。縣水已壞氓之家矣。氓於是始大驚倉黃。率妻子欲走。水已深。不可走。遂跳身躋屋上。大呼人來救己。而已無及矣。俄而水益盛沒家。氓與其妻子。不知屍處。聞韶金生聞而歎曰。謹甚矣。氓之愚也。水迫而不能知。人告而不能避。以柒林爲固。而卒死於柒林。甚矣。氓之愚也。雖然世之如氓之愚者。抑何限哉。安其居而不知危。昧其禍而不知防捍。人之良規而不知從之者。皆氓之愚也。吾嘗以是推之。凡富貴而據要津寄紫陌者。以要津紫陌爲安。而不知宦海之風波。朝夕而渰沒之人。非不告禍非不迫。而不知爲之戒。而卒流竄以死者。卽柒林之氓也。據山谿之固阻江河之險。以爲子孫萬世不拔之業。而不知敵之人。甲已迫於門。良臣非不規也。戔(淺의오류)水非不潰也。而不知從。且畏以至於覆國沼宮。而爲天下笑者。亦柒林之氓也。雖然氓之愚。愚以一身者也。士大夫之愚。愚以一家者也。至於人君之愚。以天下社稷愚者也。其愚愈大者。其禍愈廣。可不戒哉。氓之事。豊人金昞臣云。辛卯中秋下溪書。憂樂說。人之有憂樂。猶天之有雨暘也。自有天卽有雨暘。而憂樂之於人。亦與之俱生。憂不能常憂。而憂盡則樂。樂不能常樂。而樂極則憂。猶雨不能常雨。而暘不能常暘也。噫。人之生。旣有是憂樂。而憂樂之來。相代而不已。則人固不可以無憂樂。而當等所以處憂樂之道。然人情於樂。則雖千日之樂。不知其厭。而憂不能堪一日之憂。不知其厭者。易於淫而有荒亡之失。不能堪者。易於仿而有忿懟之過。二者之難制。大校相似。而君子修身之道。舍二者。何所用力哉。余於二者。俱不得其正。而以偏重言之憂爲甚憂。何者。余氣拘而性躁。氣拘故不敢放。而於樂不能極。性躁故不能寬。而於憂不得忍。是故余荒亡之失則不多。而忿懟之過則日積。此吾所以尤難於受容者也。古人曰。克己須湜。性偏難克。受克將去。吾之所當先克者。非憂耶。雖然孟子曰。生於憂患。而死於安樂。是樂之禍。甚於憂也。吾年近三十。恒受樂憂患。患域而▩▩▩最罕最罕。故少樂之失而恒受。故多憂之禍。若見樂事。如憂之多。則安知樂之失反有甚於憂之禍。如是則豈可極思受憂之道。而不受樂之思乎。受樂憂之道。先儒曰。憂事至則和而理。憂(樂의오류)事至則靜而理。作憂樂說。
김세용(金世鏞) 1673(현종 14)~1742(영조 18)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명우(鳴宇). 호는 이호(伊湖).
아버지는 좌랑 학배(學培)이며, 어머니는 개성고씨(開城高氏)로 선무랑 이절(爾節)의 딸이다. 김태중(金台重), 이현일(李玄逸), 이재(李栽)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김성탁(金聖鐸)과 도의교를 맺었다. 평생을 처사로서 지냈으며, 만년에 이덕촌(伊德村)의 임천수석(林泉水石) 간을 노닐며 학문에 침잠하고 자제문생들을 가르쳤다.
*謹次適庵集中韻。呈族兄伊湖公。世鏞○幷序
先師適庵先生遺卷。密翁刪定之後。未及序次讎校。置之簏箱中有年。今年冬。族兄伊湖公來寓川上。爲率先師二子及不佞聖鐸。取新舊兩帙。釐其篇目。勘其譌謬。間或追補其闕遺者。於是稍可繕寫以藏弆。嗚呼。師門可謂有人矣。一日。次集中芒字韻。以寓感。
密翁刪正辨毫芒。重得吾兄任闡揚。好向名山藏十襲。早須努力定鉛黃。
宋子京進唐書奏。久披緗帙。粗定鉛黃。
*述懷呈伊湖兄
我生古人後。不及見古人。父師早見背。直諒多喪淪。踽踽尋古道。茫茫歎迷津。賦性乏強矯。安能免緇磷。悠悠處濁世。混混隨俗塵。今年會疾疫。扶老遷居頻。始從泗水上。來泊伊湖濱。伊湖氣淸淑。里居風俗淳。嘗聞雲川公。於焉奉昏晨。百年我復爾。古今同苦辛。主人宗盟舊。風流先輩倫。後先同門學。皓首情益親。喜我來比隣。延我露誠眞。詩書爲我列。義理爲我陳。亹亹講前聞。令我耳目新。况復憂乏匱。往往分米薪。孤陋荷提掖。流寓得所因。誓言百年內。征邁共兟兟。富貴非所慕。貧賤豈足顰。但令同心在。樂哉可終身。兩家有子孫。此道永無湮。
*輓伊湖兄
錦水源流淸且漣。父師遺業雅能傳。居家制行先根本。接物開心謝幅邊。
門戶有扶梁木重。湖山終老德星懸。如今不耐云亡慟。舊德前言幷索然。
前後師門志業同。白頭隣幷水西東。視公先輩愚何望。畜我天倫愛未竆。
萬死風波猶厭厭。七旬人世太悤悤。可憐金石平生意。無路歸披宿草中。
往歲蒙恩奔母喪。公時來唁爲悲傷。談言步履雖微减。風彩神精尙未亡。
至痛在中懷未抒。嚴程有限別還忙。故鄕今日堪凄斷。更惜賢孫命不長。
*答伊湖兄書
臨當越海。家弟追到。驚喜惝怳中。又伏見手筆。披讀再三。感暢欣慰。何啻得隔世音信耶。仍審冬令。靜中體候康勝。尤不任慰慕之至。信後又踰半月。伏未知起居若眷集諸節。如何。旋用鬱慮不已。族弟牢狴殘命。得有今日。莫非天恩。感泣之外。夫復何言。但出獄之後。陸走千里。海路又千里。而栫棘之所在。耽羅極南。我國地界盡於此。北望家鄕。雲海杳然。老慈臨年。屢月貽戚。而終未得一慰閭望。坐此竆涯。消息安否。末由以時承聞。人子不孝之罪。孰有如弟者乎。痛心摧傷。欲抑不得。奈何奈何。書中勉戒之諭。不勝感佩。前賢格言。非不講讀於平日。而旣乏素養。所遭境界。又是人理所難遣處。雖欲以古君子素患之義。自勉而企及。何可得耶。但旣到竆處。無可奈何。不敢以身之困厄。地之險遠。過爲戚戚以自損性命。而重傷親念。秖得任之而已。惟是見識昏謬。不度時義。一出妄言。萬事瓦裂。上負先師敎育之恩。下孤同門諸老之望。而仁山毁祠之禍。由我餉之。念及于此。恨不斃死於桁楊之下也。痛泣何已。歸拜無期。臨書益增悒悒。
*答伊湖兄書 己未
下示變禮。以弟蒙昧。何足煩遠詢。况練祥退行之節。旣有問解可據。至於祥後明日之行祔。初忌之殺禮略設。所示皆得宜。弟何敢更贅他說乎。因此竊有所禀。祥後行祔。雖是今世士夫家通行者。吾家自先故以來。亦未之有改。然卒哭而祔。卽元聖所制之禮。孔子雖善殷之練而祔。而猶從周。朱子亦著之於家禮。定爲不易之節。及他所論。多以大祥而祔爲不可。盖以卒哭而祔爲常。則雖或有故。退行於練後。或大祥後。猶有餘地。若必於大祥行之。則或値有故。不知當行於何日。几筵旣撤。時月屢過。而新主不得祔廟。則豈非大欠闕大未安處乎。先代所嘗行者。後人固難輕變。然事有不得已。而於禮有明白可據者。則先輩亦未嘗膠守一轍。區區於此。不量淺陋。每有所不安於心者。欲一禀訂而未果也。今因下示。敢此縷縷。幸望試加思量。明以敎我。以開迷惑之見。如何。
*
伊湖文集
*聞族弟敬伯[聖欽]振伯[聖鐸]設講會于陶淵。次其韻。奉寄。
西林物色古猶今。經過邇來幾愴心。木葉飄飄亭獨立。江聲隱隱境罙深。
白紛其奈竆廬恨。絳帳空思丈席臨。珍重二君修舊緒。一回嘉奬一悲吟。
*答族弟振伯
昨自春峽歸憊卧殆不興。忽得手滋。披復以還。便覺心開目明。仍喜侍奉起定淸勝。鏞半歲經營。馳進酉谷。而文丈令公。適向浮石。落莫甚矣。歷盡無限艱險。更無前進之勢。竟悵惘而歸。一宿淸凉。縱觀諸勝。塵襟頓覺洗去。轉到丹砂。與陵署甥。偕至陶山玩月巖栖。夜分乃罷。今行辦了此一事。亦云幸矣。賁趾年譜校勘。一嘗質之錦水。柳達夫亦有所評隲。略成頭緒。擬與高明。㪅加商確。然後出手是計耳。方伯書中辭意。旣如彼。公之踧踖。宐矣。紙牋還送事。嘗攷士相見禮。賓執贄見主。主受而還之。葢周公執贄還贄之義也。揆以事體。恐無不可也。但尊者有賜。賤者不敢辤。則未知方伯之意。以爲如何耳。谷川疑禮。亦嘗聞之。而其顚倒失序。旣如來諭。則幸須一一勘正。以就是當如何。此無書冊可撿。五先生禮說及問解等書。早晚一投。以爲寓目之地。如何。節要。尊閣塵案有年。而懶未披盡。今被索。幷櫝還珠。愧恨。餘匪乆面剖。
*與振伯
阻水不通。乆矣。不審侍餘服屨何似。别提除命。昨始聞知。天眷至此。合爲門戸光寵。然亦不敢爲公賀者。古人不云乎。得人主一奬。得宰相一譽。非可喜。而便可憂。此不可不念也。飮水寒温。非他人所與知。然愛慕之至。陳此瞽言。未知公意以爲如何。分義所在。宜不竢駕。而聞畿痘甚張。行止何以决定。無由涉漲與聞盛筭。若西行有期。就别爲料。
*與振伯
旣往。不說得。生出圓扉。莫非天恩。感祝之外。夫復何言。末梢行遣。在所不免。而嶺海嚴程。思之呃塞。然素患行患。講之有素。任之而已。亦將如之何哉。惟是離違老親。固人情所不可堪。然自古人臣之遭此患者。豈公一人而己。老先生答盧伊齋書中。說盡處患之道。公必領會而服行之矣。讀聖賢書。政是今日受用處。何嘗有一毫戚戚底意思耶。况天日在上。傾否復亨。知在不遠。以是。日夜惟心禱耳
*答振伯
十月初八日書。得接於臘月半後。遠地事。良可慨也。伊後歲改。春且半。不審居夷成趣。體力何似。海曲水土。人情物態。亦復何如。愛慕憂慮。葢未嘗須臾弛然。平日。已知操屨恬靜。持守謙謹。不以利害得喪動其心。而第有陟屺不可堪忍處。亦將處之以無可奈何。而日與仲默。溫理舊業。以義理相怡悅。則聖明在上。天道有好還之日。惟願益篤進修之工。務恢久大之䂓。使師門音旨。終有所發明。未必不得之於此。而勝昔髭髪。可驗於異日。此吾儕所共拱而俟也。冬間痘發。川前振叔。侍奉移寓。河上體力。雖間有不寧節。旋卽向安。誠孝所格固應如是。爲之奉慰無任。宗君已作泉下人。門運不幸。一至此哉。自此闔族。無所倚重。痛割之情。不但平生情愛而已。在外聞知。悲悼當倍萬。奈何鏞今春以來。衰謝特甚。見無疾痛處。形骸頓覺癃瘁。似此而能爲人世幾時客耶。爲其無聊時。以書遮眼。而一紙未了。便已㤀失。掩卷自傷。只切竆廬之歎而己。餘遠毛不能盡旣。惟在默亮。
*與振伯
六月承書。僃審當夏支宐。中間吐㵼。不過是炎濕例祟。旣已向安。想日蘇健矣。日前。進侯尊闈。情神氣力。比年前。無一毫减損。移陸之奇。適到相對。攅喜而歸耳。鏞憒憒無一事可聞於遠地者。從姪婦。奄不起疾。慘痛何言。重以小孫前年喪婦。其練期已過。祥日在初九。而旣在重喪。葬前多有變節。幸便回考撿示及如何。問解云重喪未葬。不敢行練祥二祭。旣顈之後。擇日行練祭。又次月擇日。行祥事。謹當依此行之否。祥之明祔祭。亦可行之否。初忌之日。欲略設饌具單獻無祝行之。而亦未知如何。餘惟朘自愛加餐。
김민행(金敏行) 1673(현종 14) ~ 1734(영조 13)
본관은 의성(義城) 자 선백(善伯)
증보부는 방열. 조부는 여중. 아버지는 지탁(之鐸)
*丁未。寓瓢谷。四月十日夜。宗姪善伯 敏行,柳達夫 顯時,柳允卿 升鉉。及余小飮溪上。族姪宇漢,兒子晉行。樂行初名。末至。以朱文公朗然淸夜月明時之句。分韻。得月字。
南溪多樹木。薄暮淸風發。吾宗適無事。扶杖度深樾。
臨溪對綠酒。座客盡華髮。而我躡羣賢。笑談愧唐突。
柳林忽暝色。飛絮暫明沒。擧杯飮未已。復照松間月。
相顧意歡適。不覺醉兀兀。人生百年內。此樂未宜忽。
同志易睽達。佳節共消歇。山蔬與匏樽。不須嫌蒼卒。明朝酒醒後。月落思慌惚。
*輓宗姪善伯
落落吾宗老。人稱間世才。文章還自伐。膏火暗相催。
患難貽憂戚。存亡劇痛欸。吾身今已活。那得報泉臺。
追憶蒼黃日。難禁涕淚垂。生離徒自恨。死別豈曾思。
宗祀非無托。門戶恐不持。新阡已宿草。天末杳歸期。
情義平生自有殊。幽明此日可嗚呼。應知煎迫仍傷損。不獨沈綿遂謝徂。
萬里吾能存白首。百年誰復過黃壚。風流意氣長埋沒。回首空山淚滿裾。
牢獄三宵入夢來。此時君已隔泉臺。分明只認平生面。冥漠終成萬古哀。
凶訃道中三月過。孤囚海外幾時回。百年歡笑空悲涕。長憶牀前舊酒杯。
배행검(裵行儉)1673년(현종 14)∼1752년(영조 28).
본관은 흥해(興海). 자는 수약(守約), 호는 삼여당(三餘堂)·오수(梧叟).
검교장군(檢校將軍) 배경분(裵景分)의 후손으로, 고조는 금역당(琴易堂) 배용길(裵龍吉), 증조는 배택전(裵澤全), 조부는 배흥주(裵興胄)이다. 부친 배면(裵冕)과 모친 박현(朴絢)의 딸 밀양박씨(密陽朴氏) 사이에서 2남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동생으로 배행건(裵行健)이 있다. 부인은 정문흥(鄭文興)의 딸 서원정씨(西原鄭氏)이다.
타고난 성품이 순수하고 높은 도량과 기상을 지녔다. 효심이 지극하고 형제간의 우애가 돈독하였다.
남석기(南碩耆)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교유한 인물로는 권덕수(權德秀)·이상만(李椙曼)·이광정(李光庭) 등이 있다. 마을의 큰 학자들로부터 박학함과 고상한 논리에 대한 칭송을 들었다.
1731년(영조 7) 경상도관찰사(慶尙道觀察使) 풍원군(豊原君) 조현명(趙顯命)이 구계서원(龜溪書院) 훈장을 시키자 이광정에게 사양하였으며, 효자 이창엽(李昌葉)·권도인(權道仁)·이정보(李廷輔) 등의 효행이 세상에 전해지지 않음을 걱정하며 그들의 행록(行錄)을 지어주기도 하였다.
슬하에 3남 1녀를 두었는데, 장남은 가선대부(嘉善大夫) 배강(裵絳)이고, 그 외에 배항(裵▣)·배집(裵▣)을 두었다.
묘는 경상북도 봉화군(奉化郡) 명호면(明湖面)에 있다. 사후에 가선대부(嘉善大夫) 호조참판겸동지의금부사오위도총부부총관(戶曹參判兼同知義禁府事五衛都摠府副摠管)에 증직되었다.
유고로 《삼유당문집(三餘堂文集)》이 전한다.
三餘堂文集
*與金霽山振伯 乙卯
自聞執事榮還, 彈冠之喜, 不在他人之後, 衰病喪慼, 廢却人事, 尙未奉一賀, 昨因堂姪歷軒下歸, 得省餘起居之詳, 又聆整豸冠將啓途, 敢誦庭爭酬造化之句, 以仰祝而已. 就先祖臨淵公有伸卞事, 事在久遠,子孫微弱, 不能效陳萬年爲其先暴白之擧矣. 往時蒼雪翁爲作啓草, 且言若有入對時, 當力請得褒崇之典, 今焉已矣. 聞執事慨然有哀之之意, 豈勝感幸. 倘於筵席從容之地, 若因語及此土風俗古今人物, 或可敷陳先祖得, 宗系草本, 及欽賜蟒龍衣事首尾大略, 則數百年草野沈鬱之冤, 庶或伸暴其萬一於九天之下矣, 爲子孫者, 擢髮粉骨之感, 當復如何. 蓋時非求伸, 事涉希恩, 故不敢發口於人, 今追思雪翁之言, 重感執事之意, 事蹟二件奉呈, 考覽後, 力賜周章, 千萬幸甚. 自餘辰君爲此委進, 詳在口達. 伏祝行李珍重.
*與金振伯 戊午
萬事前定, 一疏何由. 雷霆震地, 始罹桁楊之困, 鯨海接天, 終見木道之順, 神明所扶, 孝力可驗, 第惟春深, 北堂倚閭望切, 路賖南荒, 定省久曠, 離家去國之愁, 異常人遷謫之悲. 惜乎, 當日在廷之大人, 未及以孝理之說, 感動天聽, 如唐朝之牛平章也. 然念素位而行, 無入而不自得, 執事平日講之熟矣. 歐陽母云儉薄所以處患難, 汝其安之, 吾亦安矣, 伏想太夫人之於執事, 亦然矣. 福堂諸什, 得見於播詠間, 無幾微怨尤之形, 而孝友之思, 溢於辭表, 眞得詩人性情之正, 諷來愴然也. 轉聞渡海後, 體履向完, 曷勝慰幸. 繼聞移汝之命, 聖敎出尋常萬, 萬恩波如海, 想感淚自隕, 況家鄕漸邇, 道路無礙, 親闈安問以時, 而得於理少安, 未知幾日到底所. 溟浪出沒之餘, 素履如何. 僦居亦寬廣否. 葛翁昔年自北遷南, 未幾解歸, 今此繼移, 似非偶然, 俯仰間, 必多感愴之懷矣. 仁院 撤享, 斯文之厄, 豊原君再疏, 可爲他日申辨之資, 是爲幸耳. 玉川翁以乞言之年, 未免涪州之行, 忽返西山之櫬, 吾道之窮, 一何至此. 晦翁所謂氣運所使, 豈咎章子厚者, 不意復見於聖明之世也. 前此東厓 丈鏡堂主人相繼逝去, 山南自此無耆德矣. 慟哉慟哉. 南州頗有謫居之勝, 亦必有意中親舊, 足以破牢騷, 而不知文士之往來質問, 有如潮州之趙德者耶. 岑寂中, 日加涵養之工, 益懋久大之業, 豈非執事玉成處耶. 昌黎雪堂自潮海而文章益高, 此今日士友之望於執事者然, 執事豈久於吟江籬, 而賦囚山乎. 區區之望, 佇見髭髮之勝, 昔令胤侍傍相對, 從容講誨, 比之家居更省接應, 所業日有精進, 東坡子所謂貧兒暴富者, 不足多也. 行儉衰老日甚, 子以 ( 行健小名)春末遭庶子喪, 悲念以度日, 恨不得携一筇, 探智異, 就累所, 慰羈旅, 因與徜徉於玉龍之勝也. 鄕變想已聞知, 不欲煩說耳. 多少懷匪一禿可旣. 餘祝爲道自愛, 以副仰德.
이익필(李益馝) 1674년(현종 15)∼1751년(영조 27).
본관은 전의(全義). 자는 문원(聞遠), 호는 하옹(霞翁).
어려서부터 골격이 특수하고 기이하며 성격이 호탕하여 귀신의 허실과 유무를 알기 위하여 늦은 밤에 사당을 지켜보기도 하였다.
1703년(숙종 29) 무과로 등과하였다.
1728년(영조 4) 이인좌(李麟佐)가 난을 일으키자 도순무사 오명항(吳命恒)과 함께 금위우별장(禁衛右別將)에 제수되어 토벌에 임하게 되었다. 토벌시 양 난 이후 계속된 태평세월로 인하여 병사들이 적진으로 나아가려 하지 않자 항상 선봉에 나서서 독전하였다.
특히, 죽산전투(竹山戰鬪)에서는 금위좌별장 이수량(李遂良)과 더불어 용맹하게 싸워 난을 평정하였다. 그 공적으로 분충효의병기협모보사공신(奮忠效義炳幾協謨保社功臣) 3등에 녹훈되고 전양군(全陽君)에 봉하여졌다.
그뒤 전라병사를 거쳐 1730년 평안병사 등을 역임하였다. 사후에 병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양무(襄武)이다. 전양군은 여헌 장현광의 외증손자이다
*全陽君 李益馝。聞纍人移配絶島。有感吟一絶。步其韻。因便寄呈。
萍浮蹤跡又南瀛。誰識孤臣血泣情。莫把古人枉相擬。此身全是坐虛名。
이광정(李光庭) 1674년(현종 15)∼1756년(영조 32).
본관은 원주(原州). 자는 천상(天祥), 호는 눌은(訥隱).
1696년(숙종 22) 진사가 되었으며, 영조 때에 참봉·감역·세마를 제수하였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조현명(趙顯命)이 경상도관찰사로 있을 때 지방에 학문과 교화를 일으키고자 많은 선비를 뽑았는데 그를 스승으로 모셔 안동부훈도장(安東府訓都長)으로 삼았다.
조정에서 효렴(孝廉)을 천거하라 하였을 때 조현명이 그를 문학과 행의(行誼)가 산남(山南)의 제일이라고 천거하였고, 뒤에 김재로(金在魯)가 영백(嶺伯)으로서 조정에 들어가 또 천거하여 후릉참봉(厚陵參奉)을 제수하였는데, 서경덕(徐敬德)과 성수침(成守琛)이 그 자리를 사양하였음을 알고 병을 핑계로 물러났다.
그뒤 장릉참봉(莊陵參奉)을 제수받았지만 끝내 사양하였다. 당시 재상이던 조영국(趙榮國)은 그가 문장과 학술에 중망이 있었음에도 여러 차례의 관직 제수를 사양하고 산림에 묻혀 후학을 교수한 점을 높이 평가하여 6품직 하사를 건의하여 왕의 허락을 얻었다.
영남 문원(文苑)의 모범이며 세교(世敎)를 떨쳤던 인물로 전해온다.
저서로는 《눌은문집》·《칠공자전 七公子傳》이 있다.
제산집
*與李訥翁天祥書 癸丑
亢旱彌酷。伏惟文丈靜候起居神相增福。區區瞻慰之至。聖鐸奉親如昨。他無可言。前月盛覆。示諭勤至。令人聳感。今又得勸諭齋儒書。玩而復之。其所以推說經學文章與夫應擧之業。相爲本末。學優則識進。識進則文亦就。傍習科工。沛乎其有餘裕云者。可謂的確有根據之論。而旣以責於人。又反以自勉。娓娓數百言。盖莫非前哲遺訓。非今世君子語也。甚盛甚盛。夫以執事文章之高古。見識之該通。趣操之修潔。爲後生所嚮望。非一日矣。今當統領振作之任。所以引誘指導者。不屑屑於世俗所趣。而毅然欲同歸於儒者之道又如此。則夫爲士者。孰不感激興起。執事於是乎爲無愧於鄕人之所推擧。而又將不負廵相之所委重矣。當今之世。儒敎墜地。上之所以取乎下。下之所以應乎上者。非科擧。無事也。古之作人育才之法。寥寥久未聞焉。則廵相今日之擧。可不謂空谷跫音乎。執事前書所謂天欲相斯文而啓發其衷者。或者庶幾焉。且夫君子行其所學。何必立乎朝廷。在一鄕而爲一鄕子弟。敎養成就。以臻彬彬之盛。亦君子之所樂也。惟執事勿以囂囂浮議自沮。益思勉勵。期於有始有終。以卒承賢方伯至意。實區區之望也。聖鐸不敏。不足當一面。且其私勢難便者非一二。而重違執事敎戒。至今抗顔供職。顧以無躬行之實。而所以董率之者。又不能如方。人不信從。玩愒日甚。誠可愧歎。然私心竊有所欲貢愚者。一面之內。其粗解文字者。皆從事製述。其入講案者。多未離蒙學。朔望試講。雖不敢廢。而所講不過一卷半卷。又往往矇不識文義。殊有閔人意處。而所謂製述之儒。又以一朔三題。爲一大工夫。不復念及於科擧外工夫。如是循習。究竟何所益乎。又何以考其人所造深淺乎。鄙意欲望執事於科題之外。又取經傳及伊洛家言中義理肯綮處。或古今人物賢否事變得失。以爲之題。略如疑義樣。俾各盡所見以對。則亦可以使學者。不得長汨於擧業。而知有所用心處也。如何如何。朔題自校中分布之際。常患遲緩。或於過月半後得見。故三首之外。更不暇及於他。亦望今後。前期出送。且於校下人處。督過以分布稽時之罪。如何。營關內。使齋儒十五人。往試於公都會。翼日。隨所業試之。取其優者。入於樂育齋云。而鄙家子弟。皆未疫。不得赴試。家豚方往三溪。可以進拜承敎矣。鹿門新卜。令人起想。使聖鐸有數畝田於其間。豈不欲從之。而趢趚者未易辦得。是爲愧恨。然天旱如此。早晩必有流轉之患。安知仙區一半不爲我菟裘耶。末由拜罄所懷。臨書紆鬱。
*答李天祥書 己未
自罪逐來。遠近親舊書問。前後數十百幅。而獨無執事者一字之惠。固不敢有所憾焉。而以平日傾慕之私。身在窮道。望德音不啻如金玉。故自不能無耿耿於中者。且自惟念愚昧妄率。旣不用長者先見之戒。又不量目前時勢之可否。躬蹈禍機。幾於僇死。上不免爲負國之臣。下不免爲忘親之子。而又嫁禍師門。致有不忍言之變。公私罪犯。其不見絶於當世之君子。不可知。於是而執事之問。久而寂然。安得不蹙然而惶惑哉。用是略以此意。及於酉谷書末。以卜執事之意。果何如也。歲初。因家便。伏承去歲至月所賜書。滿紙慰諭警誨之言。盖猶有宿昔之餘眷。而又承諭以越中時。因客商遠寄書若詩於海島屢千里之外。其所不遺而存恤之者。不但不在人後。而用意之勤摯。則又有加焉。乃始知此身猶不爲斯文長德所鄙棄。而或在寬恕之科。且感且幸。如死草之得華風也。顧以書到旣晩。鄕便亦稀。迄未能一抒鳴謝之忱。是爲愧悚爾。獻歲發春。星鳥正中。不審此時。靜養德履起居如何。遙切嚮慕。不任區區之誠。纍人事莫非滄浪自取。復何言哉。聖德好生。旣待之以不死。又不令久處惡地。有此移配之特典。罪大恩重。隍隕感激。不覺血涕之潛滋也。此地果是先師之涪陵也。纍人所僦居。在一洞數百步許。而四十餘年之間。風俗大變。當時事。無人肯相道者。儒冠氓庶之親及見聞者。又多老死。往跡遺塵。茫乎其無所訪問。獨有一老屋尙在。相傳是當日所寓。而主人已非矣。堂室亦多頹毁。俯仰今昨。秖增傷感而已。且此身旣貽累門牆。而又夷猶於此。彌增玷辱。亦可慚恨。然尙庶幾憑攀嚮象。有以托羹牆之慕。又其山水淸絶。執事之所嘗遊歷者。岳陽方丈之間。有鄭先生,韓錄事之遺躅。而天王諸峯秀色。若在簷楹間。雖以蹤跡拘禁。不敢涉境外一步地。故尙未能縱一葦溯流而上。覽湘原之斑竹。撫雙溪之仙蹟。然有時扶杖登高。遊目騁懷。則亦足以暢敍幽情。消遣世累。此亦聖朝之恩賜也。雖終老於此。死葬於此。於分幸矣。於願足矣。有何恨焉。而所不能忍於心者。以九耋老母在堂。疾患連綿。而違離三載。反面無期。每誦日廹西山之語。未嘗不痛泣欲盡耳。且患難之後。僅兩期耳。而至親半爲鬼錄。往年哭宗姪內兄。前年哭姑氏。今又哭從兄喪。心腸摧斷。淚目無乾。雖有賞心勝境。羅列眼前。寧復有一分意况。暇及於遊覽耶。加之出陸之日。偶患惡泄。經涉六七朔。本以癃殘之軀摧敗之餘。幾不能抵敵。形容換脫。鬚髮日變。時得知舊相勉之書。謬引昔賢髭勝之事。不覺自笑而汗顔耳。以此杜門深卧。忽忽以度時月。時或有旁近士友來問者。而率非平生故舊。又難得可與晤語者。尤以畏約戒懼之甚。凡應接言語之際。不得坦懷去畛。未免拘束隔礙。執事於此數者。亦可以知此纍之心樂乎否也。涉難智明。困窮熟仁。此自君子有志業者之事。纍人何敢望焉。然纍人雖懦劣。亦不敢以一時隕穫。廢然自棄。竊欲趁此未死之前。收拾舊聞。補復前非。以庶幾古人桑楡之業。而精力頹敝。目視昏花。白晝對卷。不辨字畫。只得借明於眼鏡。披閱數板。而夜則眼鏡亦不能爲之助。直頹然就枕而已。如此其可答上天玉汝之責。而副君子愛人之盛意乎。讀易之誨。前旣不能從事。今已後矣。不可追矣。然亡羊補牢。猶可以備後患。七年之病。畜三年之艾。亦或有及。誠願洗心滌慮。期以未盡之餘日。究此一事。萬一賴天之靈。其於觀變玩占之道。窺得其一斑。則或可以免大過於方來。而非但神精之消亡如前所云云。荒陬中士人家。少畜書籍者。欲求四子詩書。而亦不易得。奈何奈何。然早晩當委已着工。以不負盛敎之勤。而異日幸得返歸鄕里。敢不就座下叩訂其所疑乎。纍人本無似。又重以罪廢。不足辱長者之勉。而執事之眷眷如此。纍人誠感佩不敢忘。又不敢自外於知愛之下。竊有所貢焉。執事之文章德學。不但爲一鄕之所推服。纍人南來。凡所接士友。苟語及執事。則其想望如泰山北斗。執事雖深藏遠遁。不欲與世相交。而上之朝廷。必不肯捨。下之士林亦將惟執事之是歸。執事其將何以當此責任哉。實不可以終掩。名不可以終避。愚恐鹿門一區。終非執事固守高卧之地也。執事春秋雖高。靜養有素。聰明精力。視纍人較十歲以下者。不啻倍之。願執事更就古聖賢書。益加硏窮。精義入神。以爲措諸事業。開導後學之地。而勿復以詩文宿習。分其功力。以副遠近想望者之心。如何如何。且君子出處。何常惟義之歸。不必以德公申屠爲準。而自托於南華老仙之遺風矣。執事方責我以不能知時識機。閉藏宴息。而纍人之效愚於執事者。相反若是。執事見之。必局局然大笑之矣。然執事書意。似倚於遯跡長往之一邊。而恐有乖於見慕之徒之意。故敢此縷縷。悚仄悚仄。越中見懷兩詩。淸婉高古。非中唐以下手段。牢騷中。得此珍惠。光寵大矣。但愧纍人不敢當詞中屬意之厚耳。萬萬非遠紙可盡。惟祝自愛崇深。以慰瞻仰。
*答李天祥書 戊午
日前家便。得拜十月廿三日惠書。滿紙細字。縷縷備悉。間有策勵警誨之語。奉讀感歎。不能自已。書中欲竢深冬入山中。計今杖屨已在泉聲岳色中矣。伏惟頤神養性。德履康健。茅棟已成。棲息漸穩。明窻棐几。俗塵不及。其果端坐讀易。以究四聖之遺旨耶。退陶先生所謂山當益遠。水當益深。書當益有味。貧當益可樂者。執事其得之矣。千里嚮慕之餘。不勝往從末由之歎也。纍人六七月間。爲瘴濕所重傷。不但泄候添劇。神氣昏倦。支體萎弱。殆不能堪敵。自冬生後。暫有生意。然病勢已沈痼矣。眞元已消鑠矣。恐不復蘇健如平日。而月前。又聞老人重患劇疾之報。煎迫憂鬱。無以爲心。雖欲親近書冊。諷聖賢之遺訓。以副長者惓惓之至意。其可得乎。兒子亦到此以來。所事者。醫藥飮食而已。全廢文字工夫。可歎可愧。渠所謂洛建學問。西京文章之語。特少年率爾之對。學問固當宗洛建西京之文。豈後世所可易學乎。且爲洛建之學者。必不屑爲楊馬之文章。以文章爲事。而又欲爲學問。則亦不免失本末之序。長者。特取其狂簡。而不暇點檢其失。然要非可賞之言。今於久遠之後。猶有所記念。而有此奬許期望之諭。殊可感悚也。但渠年紀已晩。而年來放廢至此。區區翰墨之業。亦無以酬其志。况進於此者乎。恐虛辱長者之知愛耳。海外時。無聊太甚。欲得數卷書。遮眼以遣日。而島中少士族。畜書者絶無。求經書史記若先賢文集而不可得。不得已從濟牧。借尤集一帙。悤悤一閱過。盖其卷帙浩穰。有非衰瘁精力所能領得其一二。其文章學術之宏大該洽。儘一壯觀。足令人破其寂寞牢騷之懷。然每至於黨同伐異。論議偏駁。及指擿文忠,文貞二金先生。不遺餘力。直書名諱。略不假借處。未嘗不怫然而廢卷。何暇爲其所浸淫而不自知覺乎。長者之戒誠厚矣。然恐辱愛之深。或出於過慮也。但其中論邦禮文字及攻斥尼驪兩尹書札。有欲考其曲折終始者。故錄取其大略以來。不知者得無以此爲尊崇其賢耶。前書所禀詩文事。竊以執事於今負山斗之望於南中士林。可謂責重而任大矣。或恐詩篇閒漫之工。有妨於久大之事業。故敢有所云云。而請其少節之耳。若其大文字。發潛闡幽。鐫金石而垂後來者。昔賢之所不得已也。况方今文道衰微。秉筆者絶少。執事何可辭其責乎。纍人之言。非爲是而發也。鄙宗孫字說。其已屬筆否。渠之仰溷。意非偶然。且渠才性。不無有望於將來。幸敷衍其義以訓迪之。則渠於長者之言。必不敢褻而棄之。且執事念亡友。施及其子之誼在此。望須勿孤其請。如何。惠寄詩什。素昧韻語者。有不敢容議。而諷詠數四。渢渢乎有風雅之遺韻。怳若坐我於鹿門山水間。望其蒼蒼之色。聽其泱泱之聲。不知此身落在海南頭千里之外也。賴是而得數日適消遣其牢落之緖。老兄之爲賜。不旣大矣乎。第欲使纍人和且記焉。則政所謂鄰女之效顰。佛頭之著糞。纍人何敢焉。顧盛意不可全孤。謹以二篇。和八章。八絶。和十六絶。陋拙甚矣。豈足久溷淸案。一覽俯會其意而已。卽投之水中。勿令他人看也。越中所寄詩中。眠傳二句。追示感幸。歲且盡矣。惟祝靜候益享淸福。慰此遠誠。
*答李天祥書 癸亥
還配後兩歲之間。時因兒輩往來。略探大槩消息。以慰瞻仰。而一紙候問之儀。闕然以迄于今。每自愧誠薄而已。昨歲臘間。伏承秋末所惠書。所以愍勞勉戒者。出於眷眷之意。又得石泉酬唱之什及伊湖哀詩。篇中。必提及此窮纍。苟非長者篤於故舊之高義出尋常數層。何以至此。僕僕感拜之外。無以爲喩。書出後已有屢月。歲亦改矣。不審靜中體氣何如。所示屢經毒痾。曾所未聞。不勝驚歎。然神相愷悌。德履日休。邂逅感觸。自不能久爲患矣。是所慰祝。閒中著書講業之樂。必有人不得以窺測者。恨無路拾緖餘耳。聖鐸殘喘酷罰。理不生全。而頑然苟延。忍於異域孤囚中。遽見三霜之畢。窮天罔極之痛。豈言說所可盡訴者。只自痛心欲死而已。前年春。避痘竄伏。至冬又爲癘氣所逼。托身於嵌巖中一廢庵。風雪嵐瘴所交侵。有不可一日居。而捨之無可往者。窮苦多難。疾病又種種。雖欲强自策勵。以副長者勸勉之至意。其如神精氣血。减損無餘。劣劣無以自力何哉。今犬馬齒已滿六十矣。環顧平生。無一善狀。六七年流滯江潭。亦可謂天所玉汝之歲月。而於古人所做得事業。終不能生意於萬一。其將與浮苴泛梗。泯然同歸而已。每得相愛間責望之語。不覺憮然而長歎也。仍竊惟念。近來世與道交喪。先輩遺風緖業。或幾於絶響。獨執事學術文章。爲當世所歸仰。後生子弟接引成就之責。宜無他屬者。幸勿以撝謙爲事。益留意於成己成物之道。使一方才志之士。得有所風勵而興起焉。如何如何。竊見所賜豚兒書。其論一甫景文往復之說。可謂切實著明。使人不迷於趨向。歎服歎服。但石泉秋雨聯句。固知出於翰墨遊戲。正古人所謂至足餘溢爲奇怪者。而或恐暮境精力。非少壯比。况此鬪奇逞技。又詩人之末事。韓,孟所爲。亦少年氣豪時漫浪者耳。宜非大雅君子所數數焉者。何必枉費神思。以妨修辭立誠之大業耶。荷敎戒之辱。無以相報。敢效區區如此。妄率甚矣。倘垂恕諒否。若不以爲謬妄。此意。亦令一甫知之如何。
訥隱先生文集
*二樂樓聯句 제산집에는 미수록
丹丘神仙窟。江山二樂樓。天祥 雨餘天氣淸。月明江水流。子龍
萍水四海士。邂逅卽勝遊。季良 談屑散淸夜。塵襟滌新秋。振伯
脫略謝拘撿。澹蕩喜淸幽。天祥 妙因固有時。佳會若相謀。子龍
天時送炎令。遊興卸輕舟。季良 淸露滴高樹。微烟瞹遠丘。振伯
波光鎔渾白。蟲聲閙何求。天祥 有樂卽知魚。忘機自近鷗。子龍
冥心混物我。得句且淹留。季良 長吟退老詩。誰復龜翁儔。振伯
爛柯有餘想。芳芷空汀洲。天祥 前遊已杳杳。舊跡空悠悠。子龍
此會可無記。好詩爲相酬。季良 明朝羽化橋。不耐分袂愁。振伯
*與金振伯 聖鐸
山居閴寂。不接外間聲息。振餘之亡。未及叙誄。又未以一言奉慰。徒深悲哽。冬間。從者虛枉弊居。尤以坐失晤叙之便爲恨。卽想西笑有日。遠途撼頓之餘。起居何似。天恩隆赫。又此科目。不能爲避名之地。而適資崇進之階。兄之自處。想已有定筭。而局外向念。猶自不淺。凡百素位。惟以低一頭退一步。爲安身地。外至者。似自不能爲患矣。弟病寄窮山。無他撓。只緣窩舍未及粧完。頗勞心力。可笑無事生事也。峽裏花事正殷。偶爲遊興所牽。携一老伴。倘佯海嶺之間。再昨。到南上舍達卿家信宿。今日復向陟界深山之中。待還定。殆費六七日。老病筋力。憊惙殊甚。又是無事 生事也。惟祝榮還及時。以慰栢悅之私。
*與金振伯
丹丘解携。迨切依依。聞歸路出川城。與知舊穩討。恨不能共之也。卽候秋高。侍學俱勝。天眷敻異。霜銜解脫無路。近間更有催還之命否。分義似不當一向退伏。未知騶騎以何日登程。向慮不已。弟觸冒撼頓。宿疾乘劇。肅謝到任。纔四日而歸。其狼狽可想。入京病蟄泮村。未暇作參尋人事。洛中物議。寂無所得。而或因嶺官來訪。聞時論多咎兄坐而圖遞。不如上來看勢。辭免而歸。此言未知的中義理。而亦似練熟世情。辭章婉切可喜。而或病其有綱而無條。委曲處多而剴切處少。親愛間。亦恨兄不爲極意團 練。而臨時草草以致人言。此亦相厚人情。未知高明亦曾悔之否。千萬益自愼毖。且一陳昌言以解洛下之惑。弟之一行。極是意外。園陵與江華相望。江海至窮僻處。近處無士友。醫藥絶乏。老病者自難久留。偶閱先生案。見聽松,花潭二老皆除此官。謝而不起。爲吟一絶。二老高標不可攀。白頭孤直愧生顔。明朝挂席東南去。江海秋風滿袖寒。翼日。卽乘潮皷枻入京。與叔通道北壁。宿浮石而歸。兄必欲知弟歸意故具此。幸勿煩人眼目。路困未蘇。伏枕叫苦。聞兄行在邇。因鄕堂便。撥昏暫候。不究。
*與金振伯
往事不必追提。自聞撤圍。日望登陸。寂爾數月。憂慮倍深。 秋中始聞已抵光陽。神勞有相。喜而後可知也。伊時適入鹿門山窩。不與外人相接。不得付一書迎候。耿着心腑。不翅食物之不下也。出山。得接兄抵昌言書。怳若更承笑晤。其致訝亦是情深故耳。然弟豈不深致念者。惟衰病閒懶。不能討便致問。此爲可罪耳。宿患頓去。已同平人。飮食起居。不至有愆。乃幸之至。若小小外感。隨攝卽已者。不足深慮矣。古人言人不涉難則智不明。困窮拂鬱。能熟人之仁。吾人素患行患。外至者。自當不入於靈㙜。惟益加鞱養。杜門靜攝。感祝天恩之外。及此閒暇。日親經書。大肆力於古人之事業。見日益高。守日益堅。行日益篤。使旣墜之緖。不至沒沒無傳。則今日之不幸。未必不爲玉成地也。光是 先師所嘗居住。弟嘗一至蟾上。土人猶說僑寓處。蟾津想相去不遠。遺塵往跡。爲今日釀感之顔。而兄之居住於此者。事又奇也。禍福之至。自有命物者處分。固不容人力於其間。而曰言遜。曰默足以容。此豈隨俗媕婀之云邪。盖有不得已而爲閉藏宴息之時。弟前日不欲兄應擧出身。勸讀一部羲經者。盖憂兄名太重。爲造物者所忌故爾。弟自無識。其言不足槪。而適足爲今日恨。然兄豈不識此義。命數之至。莫之如何者。然君子不可徒委於命而不盡己分上。切祝早晩。將六十四卦。觀玩消息。不待揲蓍定卦。而吉凶悔吝。昭著目前。以兄聦明思敏。何遽讓古之知時識幾之君子邪。如弟不足有無於此世。而年來日益衰憊。精不 儲舊書。眼不辨細字。只當如此而死。而知舊凋零。傍無强輔相責勉。闒焉昏倒。作尸居餘氣。又不喜紛擾。欲遂因樹依巖。送了餘生。而新搆未完。姑還故棲。俟春和凍解。當復入處此計入手。耳當益聾。目當益瞽。溪山益淸絶。却輸蒙莊第一篇矣。蟾江之上。有雙溪石門孤雲遺跡。而靑鶴洞亦不遠。有時乘閒作物外遊。眞是奇特。倘非天恩。瀛洲方丈之觀。未必容易入手。退之所謂翦翮送籠中。使觀百鳥翔者。却不偶然。又况古之君子多得力於羈愁困窮之中。兄精力未至甚衰。賢胤志業。當復長進。父子相携。究竟遠大事業。雖望雲之思。陟屺之悲。有難以自寬者。而距故天亦不甚遠。音信相往來。足以爲慰。天日在上。孝理之 下。又豈不繼有霈澤邪。幸益加珍毖。眼昏艱字。所懷不能一一。戊午日南至。光庭頓首。
越中時適逢客商。自言入耽羅。不能煩及他。略叙寒暄。付二詩去矣。却輸洪喬書意。不記錄二詩于此。詩見第三卷鵲噪篇。
*與金振伯
春初季心還。獲臘月所復書。兼辱和諸作。圭復諷誦。怳若致身座側。親聆泠泠之音。不覺嶺海之間闊也。秋盡冬生。好音寂然。矯首馳神。只勞忉怛。不審望雲懷思。何以自遣。素患行患。固知無入而不自得。只此一病。想無以自解。奈何奈何。弟春間入鹿窩。秋夕始還。在彼雖無所得。坐臥起 居。只在山光泉聲之中。不知世間爻象。亦足以消遣病狀。出山數月。將息不能如意。前月重添寒疾。洽滿數旬。乍得减漸。而口味尙未回。厭食益甚。衰境精力。如何其不澌削無餘。山中看易經。默誦數十遍。素所窒滯者。少似悟解。歸後輒復亡失。與不讀無異。始知先輩乾乾夕惕。在老時尤加警者以此。而少時失學。爲老大之患。雖欲抖擻收拾。全不成模樣。吾兄少十歲日月。又早有志。今使之困阨羈愁。不能自聊者。意天之所欲玉于成者在此。幸十分勉進。深以墜緖爲念。退甫想無他撓。衰老之懷。年强者尤宜置念。而此中諸少友。或不無可望。但盡爲科業所撓奪。全不肯下手擔當。退甫却免此汩。如何用工。想九峰精到之學。似 長進於西山居住之時也。南方山水。長入夢想。雖欲重理杖屐。探討方丈秋勝。而對淸儀舒鬱結。亦末之何也。忽聞昌言。單騎啓行。不覺神與俱往。而病思昏塞。掛漏不究。惟祝毖嗇。加意餐飯。進修益健。
*與金振伯
自經大病。神精銷亡。忽忽善忘。且緣僻居。未遇的便。音問亦不嗣。已有年矣。每逢近處知舊。語及兄邊。未嘗不悵然意索。忽此退甫歷訪。以久離鯉庭爲憫。挈家來託於酉谷。爲侍湯餌。此是人情切至處。他人雖不敢言。而此後便聞。想益闊。尤用悵黯。近來時氣異常。寒暖不適。至今春和時節。猶有風日兢凌之時。不審海上氣候如何。退甫言連有 疲頓之節。不能如意看書。調度有時不給。天之窮阨吾兄。一至此邪。想其平居有以自遣。外物不足以撓吾至樂。而親知之憂念。未嘗須臾少釋也。弟近年尤甚衰憊。雖肌肉不甚消脫。而精力遁喪。日甚一日。却又爲虛名所困。遠近士友不量非分。强督以所不能。不能及時酬應。則恠責隨之。此等汗漫之役。何干於自家分內。而却爲作撓。無暇遮眼之工。吾兄聞之。得不嗟然憫笑邪。近日尤無以自處。海耕之計。亦未易入手。而親舊或勸以姑占近境。冬間往見春陽蘿溪下流小洞。欲縛草屋數間。而此亦非貧漢容易得就。還覺多事。可笑。洛耗漠然傳聞。虹變疊出。自上减膳。疏理寃獄云。日望有好音而不得。今世無公論至此。奈 何奈何。所欲言非止一二。而甚忙不究。想在默會中耳。幸望加意節宣。勉進藥餌。以慰遠念。不宣。
권만두(權萬斗)1674년(현종 15)∼1753년(영조 29).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용경(用卿), 호는 지족당(知足堂).
아버지는 생원 중재(重載)이다.
1711년(숙종 37) 생원이 되고, 1714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공조정랑이 되고, 사관(史官)으로서 경연관을 겸했다.
1725년 장수현감이 되어 굶주린 백성들을 구제하고 부역을 감하는 등의 선정을 베풀었다. 사임한 뒤 고향에서 후진을 양성하는 한편, 유생들과 함께 《사례절요서 四禮節要書》를 짓고, 《영해읍지 寧海邑誌》를 편찬하였다.
저서로는 《지족당집》이 전한다.
知足堂文集
書
與金振伯 聖鐸○乙卯
頃因便遞聞兄遭友于之慟。繼而有襃贈之榮。合致一書。以修吊慶之禮。而聞命駕在道。有意未遂者久矣。卽惟榮旆返侍。益膺休福。一啓長程。眷擬隆重。親知慶幸。容有旣耶。但位望愈重。去就愈難。想高明自有素所决定。然相愛之深。不能不爲之奉慮也。海上一行。似不可已。而竊念左右行止。有不得自由者。未知何日可紓此蘊否也。
*與金振伯 戊午
向來圓扉一出。亦云萬幸。而九耋慈闈之下。海外絶島之行。是豈人理之所堪。自古忠贒之遭罹此厄者亦多矣。見於文字之間。猶爲之惕然傷心。况親見於平生知愛者耶。素患行患。寧有他慮。第炎海瘴霧。値夏尤甚。更不審向後起居一味珍健否。固知島中風俗貿貿。雖無可語。喬榟相對。日夕論討。自有融然會意之樂。而不知楚囚之爲悲也。惟鄕信之聞。勢難源源。不得無瞻雲之思。然竊嘗聞之往來便中。太碩人氣力一向康寧。是乃誠孝暗格之致也。幸處之坦然。以待宥還之日。如何如何。萬斗十載家食。世情轉疎。而日下事變。愈聞愈奇。萋斐者依然得志。沉屈者不得昭雪。似非昇平氣象。自聞吾兄之遷。益堅柴桑之志。每馳仰舊僚。旋覺不平于中耳。幸望爲道自愛。副此遐禱。
김명석(金命錫) 1675년(숙종 1)∼1762년(영조 38).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여수(汝修), 호는 우계(雨溪),
아버지는 태중(台重)이며, 어머니는 남양홍씨(南陽洪氏)로 극(克)의 딸이다.
갈암 이현일(李玄逸)의 문하에서 학문을 배웠다. 1728년(영조 4) 이인좌(李麟佐)의 난을 평정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1756년 수직(壽職)으로 첨지중추부사가 되었다. 그는 두보(杜甫)와 도잠(陶潛)의 시를 매우 좋아하였으며, 벗과 함께 황산기로회(黃山耆老會)를 만들어 서로 시를 주고 받았다. 선조인 극일(克一)·용(涌)·시온(是榲) 등의 유풍을 받아 향운(響韻)과 격률(格律)이 독창적이었으며, 황산기로회(黃山耆老會)에서 시를 읊고 술을 마시면서 난정(蘭亭)의 왕희지(王羲之)를 본받았다.
평소 두보(杜甫)와 도연명(陶淵明)을 좋아하였을 뿐만 아니라 격률(格律)과 향률(響韻)에 능하여 당시 시로 이름을 떨치던 강좌(江左) 권만(權萬)·청천(靑泉) 신유한(申維翰) 등으로부터 칭송을 들었다.
유고로 문생(門生)들이 편찬한 《우계문집(雨溪文集)》이 전한다.
제산집
*次雨溪兄 命錫 感題密翁遺墟韻
天喪斯文我已知。羣疑未析失靈龜。空懷一脉相傳日。誰信千秋必反時。
自古通泉傷往跡。秖今同谷感遺辭。但敎弟子尋端緖。何用區區謾作悲。
*陶淵講會。次雨溪兄韻。
苦意誠心久可傳。遺書欲啓感懷先。儀文豈是供虛具。事業要須及盛年。丈席無人慚後死。家門有托賴諸賢。從容杯酒慇懃語。坐到春宵月半天。
*次韻。呈雨溪兄。幷序
酒肆會飮。追思甚不雅。若令後生效尤。馴致高陽酒徒之風。則是吾輩啓之也。方以爲愧懼。此際投示瓊韻。其致意於流蕩之戒者。可謂深切而有味也。敢忘率爾攀步以呈。可令胤君。附諸盛什之末。使後生輩。知吾輩今日之意耶。
偶學靑蓮遊酒肆。還慚杜子細論文。由來名敎吾家事。此意當令後輩存。下句。一作風流放曠非吾事。名敎由來樂地存。
*寓居無聊中。思前冬與伊湖兄父子。有講說吟酬之樂。此來邈然若千里。不覺悵然。爲賦一絶。
泗水相連伊水流。美人宛在水西頭。春風日日佳期晼。獨採汀蘭不耐愁。
*次韻陶淵十絶。呈雨溪兄。
靑山中斷石門橫。一道飛流萬轂聲。莫放餘波朝北海。先人遺恨未曾平。斷山懸瀑
山前山後水泓深。當日高齋俯碧潯。寒鏡秖今依舊面。百年猶認靜中心。重淵止水
滿眼瓊林與玉巒。山童莫說是奇觀。要看門外松千尺。勁節亭亭獨耐寒。長松霽雪
仙區不見俗人尋。一片閒雲獨在林。莫道無心空出峀。時來會作旱天霖。絶壁孤雲
寒齋推枕罷遊仙。落月猶懸遠樹邊。最愛西山庵裏磬。此時風送數聲傳。西庵晨磬
漁人出浦不知歸。遙見篝燈隔水輝。會待夜深收網罟。閒歌一曲卧笞磯。北渚漁燈
玉作澄潭金作沙。沙頭月出素縑斜。若非雪後山陰路。應是瑤臺王母家。金沙月夜
秋來楓樹最繁華。不用名園百種花。自有天然紅錦障。世人空羡石崇家。錦水秋光
鷺宿層巖百尺危。還隨巖影沒淪漪。月裏驚人移別處。夜深漁父下灘時。巖顚宿鷺
蘭若迢迢一徑微。斜陽僧趁暮鐘歸。洞門初入深難見。穿過林頭是衲衣。一作木末迢迢一徑微。飄然錫杖小庵歸。遙看落日靑山半。惟有孤雲逐衲衣。○木末歸僧
*魚龍臺。次雨溪兄韻。
千里逢迎處。高臺眺望心。天寒飛鷺少。江凍蟄龍深。
去國身多病。懷賢跡已沈。徘徊生感慨。愁倚暮山陰。
*雨溪兄次柳柳州韻見示。次之。
千里音書兩杳然。那知顔面對竆邊。風波歷盡逢今夜。涕淚相看說去年。
萬事分明由大運。孤臣終始荷皇天。壺傾燭盡因無寐。坐對江村起曉烟。
*次雨溪兄客舘賦懷韻
周遭斷麓勢如城。咫尺東南是大瀛。江外山河連故國。枕邊笳鼓起新營。
一身遠謫慈親老。萬死寬恩聖主明。流到此中猶可幸。何須慽慽抱羈情。
*次雨溪卧溪二兄留別韻
湖南三月瘴雲生。江浦悲風雜雨聲。征馬今朝當別路。斷鴻何處送哀鳴。
百年已是同衰境。千里難期復此行。閭望幾時猶未慰。故山休說負幽盟。
*雨溪兄於吾家梅花下。有懷賦一絶。寄示。次韻。送呈。
南鄕二月百花開。遙憶牕前一小梅。莫恨春風無主管。東隣時有老仙來。
*答雨溪兄書 丁巳
牢獄之日。未卜此生更奉德音。天恩罔極。性命獲全。浮海之際。得承簡幅詩帖之惠。是豈始料所及。驚感惝怳。如獲隔世消息。就審體氣連安。仰慰已深。而泗上酬唱之樂。令牢騷之人。不覺北望悵悒。未知何日。蒙恩歸鄕。獲從淸塵之後。如往時也。弟自速殃禍。上爲國家之罪人。下爲老母不孝之子。而又不免貽累於師門。仁山慘目之擧。由我而至此。痛恨之餘。無顔面自立於人世間也。奈何。臨年鶴髮。餘景無幾。而六朔違離。又作萬里遠別。倚閭之望。終不得一慰。人子情理。豈可堪忍。慰親之道。惟望兄侍之善辭寬譬耳。萬萬非書可旣。
雨溪文集
*泛舟五老峯下。次再從弟振伯韻三絶。
石坐黃昏候月來。雲中人語隔江臺。船頭亂酌元無主。且可從心各喚杯。
輕雲薄霧暗相欺。今日仙遊月不知。舟下廣灘呼素女。及時淸影散江湄。
尋眞一路引花宮。燈影參差亂樹中。且待明朝竆絶頂。開襟萬里御長風。
*虎溪洞主柳山陰 聖和。邀李顧齋 及余與振伯同會。臨歸攜酒。強挽船遊。口占。
笑別廬山下晩洲。淸和佳節泛仙舟。三杯濁酒多情味。欲發重成半日遊。
*振伯草堂。詠晩梅。
開幷桃花未覺嫌。澹然相對月明簷。看渠亦一春風樹。淸豔疎香自不凡。
*振伯宅。與權表叔昌言 謩。用泗濱韻各賦。
先契風流遠。餘生隔夜臺。逢場宵繼日。心事喜兼哀。
撫蹟頻開卷。排愁數擧杯。明朝離別後。懷抱若爲裁。
*留贈振伯
客裏流光到鬢邊。夜深燈火白山前。異鄕心事逢元日。滄海離愁屬暮年。
臘氣已從殘雪退。陽和欲待曉風旋。遙看北斗添佳色。明日天門禮玉仙。
*挽振伯
玄都觀裏草煙微。一樹衰桃帶夕暉。千里美人消息斷。滿天風雨夢依依。
旅魂招斷白雲岡。楓葉蕭蕭海氣蒼。一帶蟾湖天不限。露歌凄咽棹歌長。
孤臣血淚泣追愆。南北承恩十一年。想得九原回首處。終南山色五雲邊。
謫居猶得近瀟湘。岸草汀花足佩纕。此地芝蘭多委折。願君無復泣馨香。蟾津近地有瀟湘之號
蛾眉猶自妒殘紅。誰道江梅此有䕺。百尺登樓非爾願。吹噓只得殿西風。
天心漠漠我無知。日索筳篿問吉期。每道歸期丁卯是。歸時不及未歸時。
漲水滔天不見涯。孤舟一葉遠乘危。舟人莫怨風濤急。何處人間無嶮巇。
一片丹旌雲水隈。野亭山榭亦含哀。親朋此夕來相待。難把靈芝酒一杯。
*祭振伯文 丁卯
六旬弟兄之樂。於斯畢矣。千里歸來之望。今已絶矣。已而已而。而又何說。瓊琚玉佩之文。蘭蕙冰檗之質。惟一心而戒懼。何罪戾之自速。後學望君之嘉惠。先師托君以絶學。文不墜而在玆。何一朝而奄忽。嗚呼。溫潤之德性。淸粹之容儀。今不可以復得。柰此不死孤存。倀倀然靡所適已焉哉。天實爲之。嗟余懷其曷極。擧一杯而長號。想亦有感於冥漠。
書
*與再從弟振伯 戊午
隔歲平信乍到。移配恩命繼至。適値前年罔措之日。禍福之無常有如此。北望稽首。瞻天感祝。未知金吾以何日渡海。歸時風路助順否。康海間痘氣鴟張云。道路無梗。又未可知。以此深慮。光陽風土雖惡。前聞先師所處葛隱村。瘴氣稍輕。旣到當就此村泊。想必有桑海之感矣。此中縣里寓所。保無他憂。匙箸起居之節。比君在家時無損。豈非神佑耶。宗君祥月已迫。悲緖益深。前年聞君有出獄之堦。吟得一絶。有冥府古來無赦法。一樽相對待何年之句。今君旣出陸而長逝者。無一回之期。柰何。我則老矣。非弱馬殘僮所能致身。然猶欲以七月朢後發行。旱餘長霖。又可慮也。
*答振伯 己未
敬伯歸。見手書。備審調候比前稍勝。頗慰遠慮。第恨其往也。阻水不得付一字耳。伊後况味更何如。三春將盡。遙想情事鬱抑。命近方卜居泗院之傍。老殘營事。實非所堪。而勢不得已。君若遄歸。果成松石之計。則蘇長公所謂談笑卧江湖之樂。吾輩當繼之。是庸爲祝。前年春寓泗上。不勝離思。有暮年滄海別。春日遠江心之句。因以懷惡。篇未及成。今年又寓泗上。分韻作十絶。離思比前年十倍苦也。欲錄呈。而恐益君愁寂之懷。故不果耳。
*答振伯
胤姪歸。獲承手滋。憑審伊時起居甚詳。炎生後瘴霧不加熾。而調况更何如。命閒居中校閱藥峯集。有訛處。且用古事處甚多。初看疑晦難曉。得韻玉知其來歷然後。始信引據停當。動合法度。而未考處尙多。將謀求古書集衆思。爲一修整計。若非高明臨決。不敢自信。姑竢後日耳。剛兒不至浪過。因其偶發之說。宇晉兩姪。互相爭辯。不肯相下。吾聞而笑之。作一律及小序以示意。未知渠輩以爲如何也。因令詮達左右。以博寂寥中一粲。視至後爲賜斤敎。以爲千里面目也。
임화세(任華世) 1675년(숙종 1)∼1731년(영조 7).
본관은 풍천(豊川). 자는 실혜(實兮), 호는 시옹(是翁).
진사 인중(仁重)의 아들이다.
1699년(숙종 25)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문한관(文翰官)을 거쳐 예조정랑에 이르렀다.
그는 풍의(風儀)가 준엄하고 지조가 굳어 권세가의 출입이 없었다고 하며, 시문에 능하고 필법에 조예가 있었다고 한다.
저서로는 《시옹집》이 있다.
是庵先生文集
*挽[校理金聖鐸 霽山] 제산집 미수록
東都號冀北。英妙獨稱公。名旣明經著。官應拾芥同。
郞潛身已老。志屈道還窮。玉樹埋何處。靑山四尺崇。
김하구(金夏九) 1676(숙종 2)∼1762
본관은 수안(遂安). 자는 정보(鼎甫), 호는 추암(楸菴),
세희(世熙)의 아들이며 영덕(盈德)사람이다. 그는 어릴적부터 글재주가 있어 문장동자(文章童子)로 불렸다. 1702년(숙종 28) 사마시에 합격하고 1719년 문과에 급제하였다. 1723년(경종 3) 대학관(大學官)에서 청암도찰방(靑岩道察訪)이 되고 1728년(영조 4) 이인좌(李麟佐)의 난에 창의(倡義)하여 안무사(按撫使)의 막하에서 종군하였다. 1729년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을 거쳐 감찰(監察)이 되고 이듬해 병조좌랑(兵曹佐郞)에서 해남현감(海南縣監)이 되어 『여씨향약백록동규(呂氏鄕約白鹿洞規)』를 따라 향약을 실시하였다. 같은 해 모함을 받아 유배되었다가 3년 뒤에 풀려났으나 그 뒤 벼슬길에 발을 끊고 추나무 밑에 집을 짓고 추암(楸菴)이라 자호(自號)하며 거문고로 여생을 보냈다. 1759년 수직(壽職)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랐다.
楸菴集
*送金振伯 聖鐸 棄官還鄕
聖主搜巖穴。幽人謝桂枝。寧知趨陛日。飜是返山時。
一壑非要爽。千金不涉危。綺風擁去路。應滿錦囊詩
*仲春花山士友李上舍天祥 光庭,金參奉振伯,李兄方卿 廷一,金上舍士能 光國 諸名勝十餘人。自虎溪道院。汎舟廬江。各賡退陶老先生濯纓潭汎月韻。其樂可知。方卿錄示座中詩十七篇。令人神爽色飛。窅然若李郭仙舟矣。輒繼其聲以寄。
虎溪山水入詩淸。隱若軒牕刮眼明。玉屑飛雲羣傑會。蘭橈載酒大江橫。
萬松院靜眞仙窟。三笑亭高不俗情。領略春波無際興。渚鷗翔舞櫂歌聲。
박태무(朴泰茂) 1677(숙종 3)∼1756(영조 32)
본관은 태안(泰安), 자는 춘경(春卿), 호는 서계(西溪),
아버지는 창윤(昌潤)이며 진주(晉州)에서 살았다. 선생은 19세에 향시에 장원했으나 주시관이 마침 공과 아는 사이라 시권이 돌아오자 불사르고 성시에 응하지 않았다. 이 해에 서계서당(西溪書堂)을 짓고 날마다 강독을 일삼아 벼슬길에 뜻이 없었으나 부친의 권유에 따라 30세 이후에 다시 과거에 응하기로 하여 43세에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52세 때 역모가 일어나자 가재를 기울여 수백석의 양곡을 군량으로 헌납하고 집안의 젊은이 100여명을 모아 난의 평정에 힘썼다. 그 공로를 관찰사가 조정에 상신하여 포상하려 했으나 선생이 굳이 사양했고, 박문수(朴文秀)와 이종성(李宗城)이 선생의 특행을 조정에 올렸다. 80세의 장수를 누렸으나 수직(壽職)마저 사양했다.
서계집
*輓金霽山振伯 聖鐸
嗚咽蟾江鳴不平 南州士子送先生 三年泣血殊方慟 千里招魂故國行
從古忠賢皆厄會 當今世界孰公評 天如旣定人何敢 所恃吾王日月明
이언환(李彦煥) 1678(숙종 4)~1748(영조 24)
본관은 재령(載寧) 자는 여빈(汝彬). 호는 묵와(墨窩)
제산집
*答李汝彬 彥煥 書 戊午
自出海登陸。道路不甚遼邈。則瞻仰之懷。又有倍切焉者。此際辱書遠及。辭意良勤。已極感荷。而且審徂玆靜養德履有相。區區欣慰。尤不自勝。日間寒序益甚。謹問起居凡百。復如何。旋用遡仰不已。聖鐸殘命苟全。得至於此。此莫非聖上好生之德。感泣之私。烏可勝言。此地卽師門遺躅之所在。而四十年後。纍蹤適復來到。俯仰愴感之外。尤有所忸。然痛恨於心者矣。咸,晉士友。固多來訪者。而率皆悤悤酬酢而已。從頌信宿。晤語傾倒者絶少。其人之確實可成就者。豈可一見而知之哉。設有其人誘掖引進之責。豈如聖鐸空疎爲世大僇者所敢唐突哉。此非故爲撝謙其實狀然也。豈老兄見愛之過。而不知其陋。有此過分之責勉耶。聖鐸以爲老兄養靜山林。德學俱優。政宜以其所得之緖餘。開導後進。有所興起而振作。使法門餘韻。不至墜絶。是老兄責也。乃不自居。而謬望於千萬不近似之人。豈誠心相與之道哉。因來諭眷眷。而貢愚如此。幸諒之也。見卿兄喪事。豈但爲德鄕運氣之所關而已。實是吾黨士友之不幸。痛惜之懷。久而不已也。聖鐸病泄四朔。眞元日耗。形神齒髮。衰謝特甚。良可憐閔。惟以家信往來之路。不比溟海以南。近間再聞老人消息。弟兒輩相繼來見爲自慰耳。奉拜未易。徒切瞻悵。惟望因風時惠德音。以警昏惰。千萬千萬。
황도익(黃道翼) 1678년(숙종 4)~ 1743년(영조 19)
본관은 창원(昌原) 자는 익재(翼哉). 호는 이계(夷溪)
이계집에는 제산 선생이 지은 제문이 있으나 제산집에는 미수록
제산집
*答黃翼哉 道翼 書 癸丑
一自頃年賢器枉顧而去。書問兩阻。遂歷數歲。未嘗不南望悵然。近者。同縣親舊。往莅貴郡。可以付一紙。候問動靜。而汨沒憂冗。懶廢書疏。方以闕然深媿。不敏不謂高明猥自貶屈。先賜長牋。陳義高遠。敎告諄悉。皆古君子相與之道。非今世人楮牘上語。奉讀再三。爲之感歎彌日。但所以屬意於不佞者。太不近似。是爲愧赧不敢當。卽日歲換春生。伏惟豈弟君子茂納新休。學履益勝。區區抃賀之至。聖鐸奉老迎新。喜懼交切。又自近日有憂病之撓。意緖全沒。而向來朝家非常之命。迄此未收。自揣分量。實無毫髮可堪。又恐四方觀聽。指點唾罵。必有純盜虛聲之誚。以此俯仰慚怍。不敢赴命。前冬。已略具情實。陳列州司。以爲轉聞之地。此乃窘蹙不得已之勢。夫豈有去就之義之可論哉。承諭之及。不覺汗顔。近來儒林不幸。斯文一二宗伯。凋落殆盡。後生小子無所歸嚮。而道德仁義之說。或幾乎不可復聞矣。不佞私竊憂歎。以爲天之將絶斯學也則已矣。不然者。以吾南人士之盛。先輩遺風餘澤。猶有存者。豈至若是寥寥。曾無一人專心致志於此事者哉。於是望足下於數百里之外。欲聞其進德修業之功。以爲策懶求益之資者。不啻飢渴之於飮食。乃今讀足下之書。求足下之所以用心。知足下於此學。盖有俛焉孶孶而惟恐不及者。若循此以往。以至於富有日新之域。則此箇端緖。庶幾有賴而不墜矣。而其推己及人之效。鄙陋亦將與有幸焉。歎服之餘。更願足下之加勉也。聖鐸懦夫也。立志不強。爲學蔑裂。日用云爲。有出於閭里凡庶人之下者。而旣無嚴師畏友之益。又有冗務撓奪之害。悠悠汎汎。虛老歲月。五十之年。忽焉已過一矣。每念孔聖無聞之戒。武矦枯落之歎。輒自憮然太息。若無以復見於當世見愛之君子。而又於平日不知聲聞過情之可恥。輾轉增虛。以至於上欺朝廷。前頭將不免大狼狽。此誠有識之人所共閔而憐之者。不料以足下之高明。又有眷念之素。而乃不爲之警策指示。反隨俗之齒牙也。至於辱詢數條。尤非蒙昧所敢與。豈足下故爲退托。專務引誘。以啓講論之端乎。不然。足下之所爲。何異借視聽於盲聾乎。惶感之深。不知所以爲對也。然先哲有言。爲士而論學。猶農夫之談耕。商賈之論貨。則雖以淺陋之見。應答於盛諭之下。似未爲大罪。况因此以求敎。萬一有所開覺於商確之餘。則豈非愚者之一大幸耶。末由奉覿。只祝益懋崇深。以慰遐想。
*答黃翼哉書 癸亥
令胤旣冐寒遠訪。長者。又辱賜以書。慰存勉諭之意。溢於楮墨。奉讀再三。不勝感戢。第伏承春夏間。荐遭喪慘。令人驚怛無已。惟是襄窆悲疚之餘。德履起居神相珍衛。區區積慕之誠。稍得慰釋。人家禍變。有時若此。平素定力。足以理遣。想不以一時哀慽。有損於尊年頤養之道。私心所慰祝者。尤在於是耳。纍人半年僑寓。備嘗危苦。還棲以來。殘喘僅支。而時序推遷。讎月又近。終天至痛。罔由少洩。秖自北望。摧心而已。奈何奈何。古之賢人君子。進德修業之功。固多得力於流離竆厄之中。然此豈淺劣愚下者所敢自擬也哉。牢騷畏約。惴惴焉無以保朝夕。而疾病又仍之。目視昏暗。神精銷亡。尋常遮眼書卷。亦廢閣久矣。寧有一分心力。可及於古人之緖餘者乎。執事者見愛之深。不察其庸謬之實狀。有此諄諄之誨。至擧大賢事業以詔之。讀未終行。不覺愧生於中。顔變於外也。然一端秉彝。猶有未盡泯滅者。環顧平生。實有無聞之恥。倘得與執事者。往來從遊。以襲芝蘭之薰。則或庶幾扶樹開發。分寸進益。而拘係蹤跡。無由致身於門屛。執事者亦倦遊矣。夤緣邂逅之便。漠不可得。豈謂十年神交。終不免交臂相失之歎哉。惟願高明。益懋緝煕之工。年高德卲之餘。推其所得於己者。時惠規益。使此癃廢枯落者。有所警發而知愧。則此亦長者愛人以德之賜也。是仰是仰。謬命文字。雖使纍人在平地上此等重大之役。萬不可冒昧承當。况今罪逐至此。爲世棄捐。尤何敢偃然屬辭比事。以累尊先淸德之傳。而重此身妄僭之罪乎。况所示家狀。已無不盡。異日秉筆者。按蹟考實於此足矣。何必使拙者代斲。終歸於不可用乎。且以執事者不匱之孝。顯親之誠言之。所宜擇其人而命之。而今乃強委於千萬不近之人。恐非重其事之道。百爾思量。惟當百拜以辭。而竊復惟念。長者以晩契之厚。有此屬托。辭意懇至。令人感動。令胤遠來。面諭之勤又如此。有不可以私分之不堪。終始違拒以負孝子慈孫之意。故不得已姑留來狀。以爲從容撰次。仰聽取舍之地。然其無恥而不知量則甚矣。悚仄悚仄。餘伏祝歲寒。燕養益勝。
김대(金岱) 1679(숙종 5)
본관은 부안(扶安). 자는 사종(士宗). 아버지는 김석창(金錫昌)
숙종(肅宗) 43년(1717) 문과급제.
숙종 44 가주서. 경종 1년 성균관학정. 경종 2년 전적. 겸춘추. 양덕현감
영조 6년 어천찰방.
제산집
*答金士宗 岱 書 癸丑
積年違拜之餘。忽承下問札。謹審春和。尊體起居萬福。驚感欣慰。不任下誠。聖鐸粗自蒙免。惟是老人無寧日。一家多憂慽。憒憒無餘况耳。承諭。伏知言行錄改刊之議方張。迺不以前事爲咎。許令來會參聽緖論。其鄭重詳審含垢博採之意。可謂盛矣。聖鐸雖碌碌。亦豈敢以舊嫌自阻。不欲趨下風而覩盛擧哉。但聖鐸於前日事。雖愚無識。知不能爲乘鴈之有無。而亦嘗以一二參涉之故。大得罪於貴鄕士林。至于近日通文而極矣。而鄙滯之性。昏蔽已甚。其於嚴斥申諭之下。終未有以渙然覺悟者。今若不復自量。重違尊命而妄進焉。不但爲鄒魯諸君子之所羞。抑恐奉令承敎之際。萬一復有所妄發。而不相唯諾者。則豈不重其罪而益其過乎。此聖鐸所以欲進而不敢者也。然來敎所謂廣探先輩定論。有可徵信者及諸賢所錄見漏於元本者。以爲釐正添入之計。則此誠幸矣。若加之以廣詢精勘。卒歸於十分盡善之地。而使四方後世。莫得以疵議。則又豈非幸之大者耶。聖鐸雖固陋褊狹。豈敢終始爲勝心所使。而不爲之回惑乎。此實聖鐸所拱而竢也。區區愚衷。惟執事察之。
권상일(權相一) 1679년(숙종 5)∼1759년(영조 35).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태중(台仲), 호는 청대(淸臺).
상주의 근암리(近嵒里)에서 출생했다.
아버지는 증이조판서 심(深)이며, 어머니는 경주이씨로 부사 달의(達意)의 딸이다. 학문을 일찍 깨우쳐 20세에 옛사람들의 독서하는 법과 수신하는 방법을 모아 〈학지록 學知錄〉을 저술하였다.
1710년(숙종 36)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부정자가 되었으며, 1715년 저작·전적·직강 등을 역임하고, 1720년 예조좌랑을 지냈다.
1722년(경종 2) 병조좌랑을 지내고, 1727년(영조 3)에는 만경현령이 되어 이듬해 일어난 이인좌(李麟佐)의 난을 사전에 탐지하여 영문에 보고하고, 난을 토벌하여 공을 세웠다.
1731년 영암군수와 사헌부장령을 지내고, 1733년 양산군수·군자감정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같은해 《퇴계언행록 退溪言行錄》을 교열하여 간행하고, 이듬해 상소하여 민폐근절책과 관기숙정방안을 건의했다. 홍문관의 계청에 의하여 경연에 참석하여 소신을 진술했다.
그해 울산부사가 되어 춘추관편수관을 겸임하고, 구강서원(鷗江書院)을 창립하여 학문을 진흥시켰으며, 공씨에게 군역을 면제하는 등 선치를 하였다.
1741년 시강원필선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고, 1745년 봉상시정, 이듬해 사헌부헌납·사간원사성·사헌부집의·동부승지·형조참의 등을 역임하고, 1748년 우부승지로 물러났다.
뒤에 대사간·판결사(判決事)·홍문관부제학·한성좌윤·지중추부사·대사헌 등을 역임하고 기로소에 들어갔다. 이황(李滉)을 사숙하여 〈사칠설 四七說〉을 지어 이(理)와 기(氣)를 완전히 둘로 분리하고, 이는 본연의 성이며 기는 기질의 성이라고 주장했다.
저서로는 《청대집》 18권, 《초학지남 初學指南》·《관서근사록집해 觀書近思錄集解》·《소대비고 昭代備考》·《가범 家範》·《역대사초상목 歷代史抄常目》과 《일기 日記》 30여권이 있다.
시호는 희정(僖靖)이다. 죽림정사(竹林精舍)·근암서원(近嵒書院)에 향사되었다.
제산집
*輓詞[權相一]
璇霄雨露玉堂仙。編管蛇山十一年。格外洪恩頻欲釋。朝端公議亦含憐。
澤畔寥寥人獨醒。幽愁千古續騷經。扁舟遠泝洛江水。旅櫬今過白石亭。
光陽千里作君鄕。何事孤魂歸路。四壁圖書猶舊樣。滿園松菊尙餘光。
유승현(柳升鉉)1680년(숙종 6)∼1746년(영조 22).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윤경(允卿), 호는 용와(慵窩).
아버지는 봉시(奉時)이며, 어머니는 아주신씨(鵝洲申氏)로 통덕랑 이징(以徵)의 딸이다.
1719년(숙종 45) 증광회시에 병과로 급제, 예조좌랑과 정랑을 역임하다가 곧 벼슬을 버리고 귀향하여 박곡〔瓢谷〕이라는 곳에서 지냈다.
1728년(영조 4) 이인좌(李麟佐)의 난이 일어나 그 여파가 영남에 미치자 격문을 내어 의병을 일으켜 출동하려 할 때 관군에 의하여 역적이 잡혔다는 전갈을 받고 해산하였다.
1729년 다시 병조정랑이 되고, 사헌부장령을 거쳐 종성부사가 되었다.
그 뒤 장례원판결사와 영해부사를 역임하고, 1745년 공조참의가 되었다.
1746년 풍기군수가 되어 임지에 도착하였을 때 흉년이 극심한 것을 보고 곧 상관에게로 달려가 구황책(救荒策)을 건의하고 돌아와 임소에서 죽었다.
죽은 뒤에 이조참판에 추증되었다.
저서로는 《용와집》 4권 2책이 있다.
제산집
*丁未。寓瓢谷。四月十日夜。宗姪善伯 敏行,柳達夫 顯時,柳允卿 升鉉。及余小飮溪上。族姪宇漢,兒子晉行。樂行初名。末至。以朱文公朗然淸夜月明時之句。分韻。得月字。
南溪多樹木。薄暮淸風發。吾宗適無事。扶杖度深樾。
臨溪對綠酒。座客盡華髮。而我躡羣賢。笑談愧唐突。
柳林忽暝色。飛絮暫明沒。擧杯飮未已。復照松間月。
相顧意歡適。不覺醉兀兀。人生百年內。此樂未宜忽。
同志易睽達。佳節共消歇。山蔬與匏樽。不須嫌蒼卒。明朝酒醒後。月落思慌惚。
*送柳允卿赴召入京 二絶
春風馹騎向長安。頭上峩峩豸角冠。聞說聖君虛佇久。幾時封事報恩還。
君去春山我獨遊。可堪隨處想風流。名塗莫作遲留計。早掛歸颿漢水頭。
*送柳允卿之任鍾城
鍾城北路號䧺州。太守新分聖主憂。王跡千年窰穴在。胡山六月雪冰留。
勳猷尙想籌邊傑。治行應追賣劒矦。惟是豆江明月夜。故園回首隔同遊。
*送柳允卿之任鍾城序
北關一路。卽聖朝豐沛之鄕。而鍾城。乃六鎭之一也。地邊胡。爲關防重藩。非忠信威望有經遠之慮者。莫宜居之。是以朝廷選太守。常重於內地郡邑。秩比中大夫。賜緋衣銀魚以寵之。然府治在渤海上。距京都二千二百有餘里。自南方而往者。踰五嶺經鬼門關。至豆滿江而止。地旣絶域。又多風苦寒。六月山雪不消。人民謠俗。被服飮食。與戎虜不同者幾希。而商胡往來通市。一或失禦。輒憑凌慢肆。若豨突然。故凡仕稍有倚藉。率避不往。其往者。皆名士之不偶時。而無先後扳聯之勢於朝者也。柳矦允卿甫。釋褐屢歲。不離卽署。棄官歸田園有年。今年春。以司憲府掌令。起家赴召。中道而遞。未幾又拜宗簿正。將趨肅。而有鍾城之命。其行也。人或賀其陞秩。或慰其遠宦。矦旣不以人之賀爲喜。又不以人之慰爲戚。出門別妻子。無惘惘可憐之色。觀其意。毅然若將徇國忘家。不擇險夷爲去就者。而其忠忱遠慮。隱然有古人風。庶幾可以愼固封守。鎭服民夷。不負聖上所以委任保障之意。余於是歎而賢之曰。爲仕者。無遠近無內外無難易。唯隨所處而盡其職。不以榮辱利害累其中。然後可以爲人臣事君之道。彼舍遠而就近。規內而辭外。避難而處易者。利而已私而已。非忠於君國者所忍爲。是乃柳矦之羞也。且余有所感矣。大丈夫窮則已。旣達而立乎人之本朝。不得處人主帷幄中。朝夕論思。陳堯舜之道。則無寧分銅虎竹使符。專制一大鎭。或興儒敎。化其樸鄙之俗。如文翁之在蜀。或講武略。使敵人破膽。如小范之在陝西。豈非幼學壯行者之志願事功哉。吾聞國初。有金公宗瑞。開拓六鎭。功烈偉然。無愧麗之尹瓘。而近世有葛庵李先生。謫居是州。講道學。州之士。往往奮興。若朱楗其傑然者也。矦若有志文武之事。則請禮朱生。若韓文公之於趙德。以帥州人。而詢故老按圖記。求金公施設之方。則幾矣。柳矦其勉乎哉。柳矦於余。有兄弟之分。臨行要一言以贈。故爲之序。勉以大義。不敢效兒女子作惜別語者。恐爲柳矦所笑也。繼以唐律一篇。詩見詩卷。
*泗院會瓢溪柳令公。見念竆纍首爲唐律二篇。以致嗟悶之意。在座諸公。咸各和步。錄在一紙。因便遠寄。竆途愁鬱中。不勝驚感。謹次送呈。以謝諸公戀戀之眷云。
空疎叨渥聖明辰。罪大甘投瘴海濱。報國初心慚日月。戀親孤夢感昏晨。
竆途謾憶追隨地。勝集還憐放逐臣。滿紙蛟珠來異域。一廻吟過一傷神。
*用賓歸賦三絶。寄呈枕澗令公。
江林斜日喜跫然。玉樹臨門是惠連。更得臨川書一幅。客中懽慰最今年。
江潭憔悴歲頻遒。枕上時時夢舊遊。遙憶神山臺上老。不知誰與作風流。
風波一涉始知危。怕向人間說是非。惟有故人心尙爾。歲寒丘壑願同歸。
*次韻。卻寄枕澗亭令公。
邈矣鄕山阻且綿。長時畏約坐針氈。江潭每愧逢漁父。方丈無緣訪羽仙。
靑歲交朋誰耐久。白頭情誼子逾堅。可憐同病空相憶。惟願音書數寄傳。
*涪溪朱處士 楗。和余贈柳矦允卿詩。千里相寄。意甚勤厚。用其韻以謝。
自聞君子在荒州。卅載長懷未見憂。楚産縱違中國學。涪陵曾得大賢留。
芝蘭室隔緣雲嶺。金玉音傳賴柳矦。北極南天終異域。此生那得一從遊。
*答柳允卿書 庚申
自患難以來。不遺相問之勤。莫如令兄兄弟。使我慰寂減愁。作數日悅者。亦莫如令兄兄弟書。而昨年夏秋後。久不得一字見及。固知僉兄各有所碍而然。非以江湖相忘處之者。而每一鄕便之來。輒問書束中。有瓢溪書否。及知其無也。則中心悵然。如有所失。故頃答宇姪書中。聊發戲言。此乃所以欲激之而冀德音之惠爾。豈眞實語哉。小豚來。獲拜手畢若兩絶詩。再三披復。頓覺愁鬱蕩盡。夫如是。安得不介介於尺紙之久阻耶。就審新春。令候起居康迪。眷集亦佳吉。奉深慰幸。不任區區。纍人非不自愛。奈病根深痼何。三載泄痢。彊壯者之所不能堪。况此衰晩殘悴者乎。精銷神脫。常若在烟霧中。書卷遮眼。亦廢已久矣。他復何論。飮酒一盞而醉。不但氣損而然。亦緣防愼水土。節飮已久。故遂與不善飮者同歸。若終始如此。則可以追補從前顚狂之失。還自爲幸也。所誦少陵句語。不覺悵然興懷。此身歸日。杳然無期。一罇細論之樂。固不敢望。惟冀鱗羽不斷。慰此瞻仰之懷耳。兩絶諷詠。感暢之餘。不敢無謝。草草步韻以呈。或可以資一笑耶。相思幾月阻音塵。千里書來問逐臣。縱有萱堂無恙語。其如猶作未歸人。故人詩札百朋如。天末羈愁八九除。前日妄言聊戲耳。世間寧有漆膠疎。
*答柳允卿書
前月初三。送昌言表叔之歸。今月初八。又送內弟時天。黯然之懷方未定。而用賓兄又至。此皆前日有言相訪。而不至者三年矣。比來付之謾語。置不復企待。而兩月之內。皆如約而來。乃知親戚故舊之義。誠實不相忘如此。其早晩遲速。特勢使之然爾。纍人之認爲謾語。而不能望誠者。還可愧也。術者言今冬。當有喜事。豈爲見此三人者兆耶。感歎感歎。仍拜令兄手墨。滿幅辭意。眞切感慨。所恨不得送一隻眼三寸舌者。尤知其念我之深至此。眞所謂次面爾。豈可以尋常一簡牘視之哉。况審比來。閒居守靜。氣况淸迪。尤令遠懷十分慰浣。但回甲之示。不覺發一長吁也。靑春遊從之樂。依然若昨日事。而六十甲子。兄旣已周。弟亦只隔三歲。人生祇爾世間。富貴榮名。不過太虛中一浮雲。而此身胡爲妄出世路。罹此困厄。不得與平生惠好。相從於北陌南阡也。可歎可愧。聖鐸自今年秋初。不復注泄。此是三載苦證。而幸得減歇。餘外小小者。亦何足云耶。第年紀已暮。而久處瘴鄕。毛血精神。日覺衰減。眼昏尤甚。正晝不能分大字。齒牙雖不脫落。而食物咀嚼之際。不堪酸痛。頭髮禿已久矣。鬚髭亦五分白。其一老人容狀。蓋無所不具矣。然年迫六耋者。不衰何爲。此則理勢宜爾。惟是離親垂五載。而一落天陬。杳無歸期。其將奈何奈何。用賓來路。遇寒感駄病到此。其意尤感。而留此三數日。所噉食不甚減退。且大巫見小巫。神氣益旺。詩篇成軸。使病纍酬和不暇。然賴此而大有所慰暢。良幸良幸。若使令兄鼎足而坐。其樂又當如何。此等圓滿好事。决非竆人所能得。亦不敢深恨也。以唱酬餘興。謹屬意於吾兄。漫成三絶。別紙寫呈。或可遠領此懷耶。賓兄以歲盡遽歸。不敢苦挽。奉別之際。懷緖更不可耐。惟祝送迎增祉。令候益健。廿簡之惠。情貺良感。但恨太短長語。恐不得盡宣也。呵呵。
*答柳允卿書 癸亥
春間。因宇姪書。知令兄罷官歸卧。儻來得失。固不足賀唁。而惟是宿患更發。神觀憊損云。區區瞻仰之誠。不勝憂歎。卽因家便。獲承手書。驚倒披玩。感暢無已。第審痞滯之證。迄未向安。千里憂仰。豈勝忉怛。然見今置几榻於淸凉境界中。無向時簿領之勞。有溪山玩樂之趣。休養攝理之久。自當勿藥有喜。是祝是祝。纍人冥頑不死。奄過三霜於此。終天罔極之痛。曷容言喩。且自前冬。避癘山谷。備嘗艱危。四月中。始還舊舍。粗得無事。竆途漂寄之蹤。有此亦幸也。時患以來。跫音斷絶。殊不堪寂寞。自春夏後。間有相來尋者。稍可暢叙幽鬱。至於講討之益。人或不能無意。而自愧非其人。丌上黃卷。亦可隨分披閱。而奈眼暗神昏不能自強何。惟思同志如執事者。對牀晤語。間以吟弄。則庶幾可以盪滌塵滓。消遣羈愁。而此則邈不可得矣。奈何。明府下車之後。鄕里稍靖。可爲一府賀也。葛庵集請見。亦是好意。但集中論理氣處。恐不無惹起嫌怒。若已納上。異時正字兄因進見。試探官意之如何後。書煩及之爲望。聞韶前倅之存問近仲及收葛翁筆蹟於先賢遺墨之間。誠是異事。世間公道之不可誣有如此者。然因此而有萬一幾幸之望。則恐無是理也。理學通錄重刊之擧。雖有先輩鄭重之論。似無害於事理。比諸湮沒而不傳。則其損益大相遠矣。而人之偏執好異論如此。殊甚閔人意也。然聖鐸則懲羹於宣城者。况此罪戾廢逐。何敢濫及士林間事。此語切爲秘之。無使重得罪也。幸甚幸甚。萬萬書不能盡。
*答柳允卿書 甲子
玆者家便。令書入手。其爲驚感欣暢。豈尋常比耶。况審徂玆潦暑。令體神相珍衛。舊患滯證。亦不復發動。千里慰仰。尤何可任。纍人殘病之軀。經歷無前暑雨。濕蒸堙鬱。理應大憊。而幸三夏之間。無一日之病。誠是恠事。但神精筋力。逐歲減退。有時手卷遮眼。不過數紙。而輒爲睡魔所困。居然拋冊而頹仆於枕席。且於日前。作小出入。鞍馬餘憊至三日乃已。仍思在鄕時。見家門及鄕黨壽耈之人。雖七十八十。其步履輕健。耳目聰明。爲如何而今纔周甲。衰薾耗弊乃如此。是豈久長於斯世者耶。死生命也。不足爲悲。但恐未死之前。終不得歸省父母丘墓。又不得與二三親知如令兄輩。握手從遊。如平生時也。然此亦無可奈何。惟欲收拾桑楡之景。讀書收心。以補復已往之愆。而精力短乏。亦無由自強。嗟乎其如此而終歸於澌盡矣。竆途感慨之意。豈但爲楚客悲秋而已。曾聞一甫著工於中庸。有所論著。又見其一詩。自謂讀蔡西山律呂新書。心竊歎尙。今又知令兄潛心於易經及啓蒙書。與淳伯有講討之樂。平常每以二兄爲文士中翹楚。而私心所敬服於兄者。又在於忠信篤厚耳。不謂衰晩之境。乃能究心大業。俛焉日有孜孜。不知老之將至。又如此也。呻吟頹廢中。得此消息。不覺心開氣聳。若將自奮於其間。而旋復自悲。流落遐荒。相望邈然。雖欲掇拾其緖餘。以自補益。其路無由焉耳。幸望勿以炳燭爲無功。益加玩繹之工。期於融會貫通。而又以其所得之餘。不惜遠及。以爲喚聾抉瞙之資。如何。啓蒙及新書。聖鐸罪逐來。盖亦嘗一再繙閱。而疑晦居多。皆未及卒業而止。若得如淳伯者。爲旬日之會。則可得叩聞其大槩。而奈不可得何。聞兄近擬兵議及孟山,濟州。今雖未蒙點。早晩必起家需時。恐一部韋編。未及三絶。而束之高閣爾。好笑好笑。餘懷非書可盡。
* 용와(慵窩) 선생이 제산선생에게 보낸 간찰
省式。八月自洛而歸。歸後不多日。聞伯胤情契。有千里趍庭之行。病汨未及須付一字書。不惟此心。歉缺[대두1]哀亦必訝之矣。徂玆季胤君之還。槩來公累中。哀候支持稍慰。相戀之懷。而近來癘氣。到處復肆。未知所住傍近。或無熾發之憂耶。弟白首旅䆠。固非可堪。而伊時有不得已之事勢。然痁作行陸。留五六朔而歸。惟以身不添病爲幸。而門內大小喪慽連仍。伯從兄第二男。又於前月末喪逝。非但渠之身命恈慘。從父衰年疚懷。尤愍然耳。德門喪禍。亦荐疊。殆不可一二提慰。而伊湖丈。已於數昨。作泉下人已矣。何處復得來此等偉人也。老境懷抱覺索愁。想遠地傷疚之情。益難堪抑矣。字甥以其祖父母山所。爲他家所毁之故。猝擧遂庴。大事力薄。幾不克襄。僅以完畢。實爲多幸。湖伯或曾有面雅耶。旣是少論名流。性又醇和云。冀有一分顧籍之事。而亦何可必耶。在洛之日。或聞朝中之言。則雖白頭之論私。相酬酌之際。多有爲哀寃之者云。而至於停啓一事。視以奏人之◘謄傳故經。畧不顧念時世景像。可以黙想。謂之奈何。一二大官。或不無乘間陳達之意云。而率趑趄不果。正所謂哀之命也。不哀之命也。第當曉命於伋窘而已耶。近以家間癘憂之煥發。來接於陽村。急聞有歸。便暫此寄音。多少懷。不能究宣。伏惟哀下照。疏上。壬戌十月十五日。弟柳升鉉省式。家弟適出。不在家。未得修書耳。金校理累中哀前。疏上。壬戌十月十五日。
주건(朱楗) 종성(鍾城) 출신
호는 배계(涪溪) 학문과 행실이 뛰어났다
제산집
*涪溪朱處士 楗。和余贈柳矦允卿詩。千里相寄。意甚勤厚。用其韻以謝。
自聞君子在荒州。卅載長懷未見憂。楚産縱違中國學。涪陵曾得大賢留。
芝蘭室隔緣雲嶺。金玉音傳賴柳矦。北極南天終異域。此生那得一從遊。
*答朱處士書 庚戌
朱楗에게 답한 편지이다. 30년 전에 이현일 선생으로부터 북방에 朱아무개라는 호걸스런 선비가 있다는 말은 듣고 그 동안 한 번도 만나지 못했는데, 이제야 편지로 통하게 되었다고 하였다. 그간의 감회를 적은 것이다.
聖鐸拜。聖鐸於庚辰歲。方丱角而受論語於先師門下。至夫子稱達者。質直而好義。察言而觀色。慮以下人。先師卽擧執事姓名而曰。斯人也其庶幾斯言乎。彼雖北方之産。而生質之美。嗜學之篤。東南學者。未必能過之。所謂豪傑之士也。聖鐸由是。心竊慕嚮之。冀或於一生。賴天之幸。得接君子光儀。而自庚辰以來逾三十年。而一識之願。終不得遂焉。卽又竊欲一因北風。奉尺素道中誠。而仍得長者珍重之敎。以自慰釋也。旋復自念。鄙陋無稱。名不出閭里。而執事在數千里外。豈能知我之爲何人。乃於一朝。卒然以名姓聞於將命者。則得不爲率爾而駭遠人之觀聽乎。以此自疑。徘徊不能果。獨其平日傾仰之懷。則有耿耿於中者。故贈柳矦序中。爲略及之。是乃勉柳矦以延禮賢者。以倡北方人士。如韓文公之得趙德於潮州爾。不謂柳矦之以拙語。浼執事高眼。而辱先賜敎於夢寐之外也。夫以執事之處北海。聖鐸之在南方。風馬牛之不相及。則三十年願見而不得者固也。至於區區嚮往之誠。如此其久且專。而鱗羽之往來。一紙修敬。不爲無托。而若又終不能果。則豈非平生之不幸哉。然則柳矦之爲階主。拙序之爲紹介。而使執事與聖鐸。得以相通問於今日者。似若有數存焉。且感且喜。不知所喩。第來書得見在五月之晦。而貴州人之來柳矦家者。旋歸已有日。故不卽修復。闕然以至于今。悚恨悚恨。卽日孟冬戒寒。謹問尊體動靜何似。伏惟味道講學。神相益勝。聖鐸竊惟念。自世敎衰。民不興於行。科擧詞章之外。知有此學者鮮矣。而執事生於荒絶之域。無中土文獻之傳。而能自知樹立。奮發興起。從事於所謂儒者之學。旣又得大人先生從之遊。被時雨之化。行誼之高。見識之博。有大過於人者。而自先師之南歸。執事不以索居自廢。一以師敎自勉。年老而志愈篤。身竆而學益進。卓然爲儒林之秀。而使北方學者。知有我先師之學。則先師之門可謂有人。而聖鐸之所聞於丈席者益信。嗚呼。先師之棄後學數十年矣。平日及門之英。或可以發明遺旨者。今已零謝殆盡。傳家述事之賢如密庵公者。纔又厭世。微言圮絶。斯文無托。於是而千里期望於執事者。尤不淺淺。惟執事益復努力。卒究大業。毋負先師奬許之遺意也。如聖鐸材質駑下。志氣懦弱。山頹之後。益以放廢。犬馬之齒。已迫五十。而無一可稱之狀。終爲師門罪人而已。不知執事者於何見欺。而推借之過實。至於如此也。奉讀未竟。愧汗浹背。然聖鐸亦本非無意此事者。特以上失師訓。旁無彊輔。理不能勝私。志不能率氣。而至於此爾。若蒙執事者終不遐棄。嗣惠德音。使懶廢者。有所警惕而不敢肆。則豈非執事賜耶。是則不佞所深願也。奉拜無期。臨紙於邑。餘祝爲道自愛。用副遠誠。
박용상(朴龍相) 1680(숙종 6)∼1739 (영조 15)
본관은 무안(務安). 자는 현경(見卿), 초묭은 단상(端相), 호는 기헌(畸軒),
`기헌`은 『장자(莊子)』의 "기어인 불기어천(畸於人 不畸於天)"에 착안한 것이다. 이재(李栽)의문하에서 배웠다. 1721에 사마시에 합격하였으나, 더 이상 과거에 뜻을 두지 않았다. 이광정(李光庭), 김성탁(金聖鐸), 권만(權萬), 권상일(權相一) 등과 교유하며 교의를 강론하였다
제산집
*雨後東泮。與朴見卿 龍相,權一甫 萬。同賦。
飛花落絮傡漫空。雨霽長安四月風。白岳雲開雙闕起。靑門樹暗一溝通。
歸舟尙繫南湖外。客味偏酸太學中。遙憶故山新種竹。淸陰日滿小牆東。
*次朴見卿十二章韻 幷序
朴上舍見卿。用權一甫於三溪書院。同李季實酬唱四絶韻。演成十二章。分寄一甫,季實及余各四章。且要依律步和。余素昧詩家語。特感辱贈厚意。忘拙效顰。先呈見卿案下。季實,一甫處。續當奉寄求正。
甕牖前頭草樹幽。索居無復舊風流。那能化作雙黃鵠。一擧回翔覽九州。
一別歸來陋巷幽。東南西北阻名流。如今卻羡羈遊日。共泛烟波到幸州。
聞君高卧石泉幽。一棹無由遡峽流。回想昔年爲客處。秖應明月滿巴州。
別後黃鸝啼夏木。何來白鴈落山門。慇懃一十二章語。半是竆愁傷我魂。
故人相望龜城北。消息經春不到門。誰報三溪酬唱語。一回回首一銷魂。
節序重回遊璧水。離愁尙憶出都門。如何地邇人還遠。江北江南共斷魂。
敏捷詩篇早出羣。晩來繽佩綴蘭芬。莫將日月愁中過。且復潛心六藝文。
雅量堪容我輩羣。淸詞亦足振葩芬。勸君更進騷壇步。努力千秋不朽文。
良駟元超冀野羣。天香獨播藝林芬。願收湖海陳龍氣。莫學俳優司馬文。
憶在京塵多苦顔。邇來心地稍虛閒。看君結契烟霞句。幽興飄飄入海山。
憂病三春少解顔。藥爐茶鼎未曾閒。不知葛社相思夢。能度橫天鶴駕山。
離索堪憎此醜顔。高飛鳥盡去雲閒。平生謾說神交語。此日還成對敬山。
*畸軒朴見卿。見臘梅。用朴懷英 廷杰 贈別韻。見寄。步和以呈。三首
空山歲暮憶同人。輾轉寒齋爲及晨。每歎孔門論益友。那從孟氏接芳隣。深情已許通金石。信誓何煩質鬼神。但願西風頻寄問。莫敎時月曠音塵。
隴頭孤樹伴高人。風致西湖宛隔晨。誰遣玉妃來侍側。堪誇雪子接爲隣。影斜卧榻應無夢。香透吟脾合有神。共是歲寒相保意。何妨折贈散襟塵。
歲寒長憶素心人。愁聽雞鳴風雨晨。三逕幾望羊仲友。百錢難買呂僧隣。江梅發後應勞夢。嶺雪飛時卻愴神。千載山陰王子棹。秪今誰復續淸塵。蔣元卿開三逕。裘仲羊仲。與之遊。○宋季雅市宅呂僧珍側曰。千萬買宅。百萬買隣。
*次南隴朴見卿見寄韻。卻寄。
少日徵追不道難。秖今衰暮若爲歡。浮名已壞來韁絆。病體仍愁跨馬鞍。
嶺路崢嶸天共遠。風霜搖落歲行闌。故人珍重投瓊律。敢作尋常句語看。
*答朴見卿書 壬子
去臘惠書及詩。銘誦在心。何日忘之。卽日春序恰半。氣候和適。遠惟侍省服履。對時增重。梅兄不聞消息久矣。卽今淸艶雖謝。老榦新葉。想亦可愛。春來復得幾許吟弄也。前來惠詩。珍玩無斁。其時卽有拙和二篇。而今已非其時矣。追浼高眼。卻無意味。當以卽事別構以謝。而愁寓中無心力可及。來美。又不可不報。故不得已以前稿錄呈。幸一笑而置之。弇詩所謂狐父里。聖鐸亦未詳其出處。曾見列子。狐父里之人。大抵皆盜云。豈用是語耶。果爾則其指斥當世太薄。恐非君子之言也。夜郞王。漢書西南夷傳。漢使至夜郞等國。其國王問曰。我孰與漢大也。盖夜郞夷國之小者。而妄自尊大。不知漢天子之不可及也。此亦譏侮當世文章家如鹿門,荊川諸子而云爾。痘火之熄。未可以時月期。欲圖前冬數日之晤。亦豈易得耶。臨紙悵然。
*答朴見卿書 戊午
竆厄以來。辱親舊間書問。不啻數十百紙。其惻念嗟閔之意。溢於辭表者。孰有如來敎者乎。奉讀感歎。殆欲下數行淚矣。仍審比來。閒居靜養。酣飫經史。陶寫性情之功。日以益深。千里嚮仰之餘。極令人慰釋。第書出於去臘初旬。于今已改歲易時矣。未知起居况味復何如。聖鐸愚昧妄率。觸犯大僇。幸賴聖上好生。流宥到此。但有感泣。復何尤怨。獨以蒼黃之日。老母病在床褥。背負出訣。謾以詭辭寬譬。悤悤拜辭而行。一入犴狴。重以死生之憂。及此遠逐。又增望思之恨。荏苒之間。別日已匝一年。而罪名殊重。恩霈難冀。歸侍遲速。渺然莫之卜。且以海路危險。消息相聞。動經六七朔。爲子不孝。未有如聖鐸者。情界迫切。亦未有如聖鐸者。有時抑鬱之極。心肝寸斷。神魂飛越。雖欲以古人處患難之道自勉。而不可得。奈何。况仁山之禍。嫁之者聖鐸。宗姪之奄忽。促之。者聖鐸。念及于此。直欲溘然而無知也。至於一身禍福。已付之於命。而此來有居處之安便。無調度之窘闕。土俗雖陋。亦不至於猜嫌。州伯素未有雅分。而數以米饌。相周。得此亦可以度日矣。若使無母子違離之苦。則雖畢命於此。埋骨漢挐山側。亦何恨哉。感老兄相念之勤。縷屬至此。老兄見之。想亦爲之抆淚也。荒陬固鮮士類。而率皆以弓馬射獵爲事業。讀書攻文藝者。盖未之見焉。况進於此者乎。書冊又絶貴。通史及四書。亦未有藏置者。不免轉請於州伯。得校藏若干冊。爲朝夕遮眼地。而心所願見者。亦未得焉。奈何。陽山之區弘。潮州之趙德。固不可得見。而境內無浮屠等。彷彿太顚者。亦莫之得也。信乎命之竆也。鄙作諸詩。皆出於竆愁無聊中。非有意於敲推也。不足塵高眼。而孰傳而致之。以煩俯和之勤也。示帖所惠諸篇。不但詞句雅麗。其愍惻竆途之故交。有足以感涕者。拜擎以還。珍謝何已。朋友之義。死生榮辱。不相背負。不廢存問足矣。何必如陳君之朱博。坡老之巢翁。然後爲至哉。來諭之意。當以見念特甚。而然還可愧歎。來詩不暇悉和。且率用鄙韻。故用最末所次沈隱矦詩韻。草次以呈。錄在別紙。幸與汝興,性兼元老諸兄。輪看如何。
박사상(朴師相)
본관은 무안(務安) 자는 원로(元老). 호는 죽포(竹浦)
무의공 박의장의 현손
아버지는 서(湑). 어머니는 재령이씨는 정묵재(靜默齋) 이상일(李尙逸)의 딸이다.
*答朴元老 師相,德老 鄰相 書。(주) 인상은 사상의 동생이다
平生故人如吾兄者。雖於平常在家時得問字。猶不勝傾倒。况此流落竆愁中耶。滿紙辭意。旣憐其所遭之憯毒。又慮其所守之隕穫。且慰且勉。縷縷不止。又不以其不肖。而以古人之所以處患難者勖之。以受變成材之事。望之。至矣厚矣。吾二兄之待於我也。顧無以奉承。何哉。感拜之餘。繼之以媿騂也。書發時起居狀。已欣審矣。而厥後徂春涉夏。未知邇來僉靜履復何如。今年饑歉。貴境又尤酷云。知仲之貧久矣。其能免范丹之甑塵耶。不以己之空匱爲憂。而乃爲數千里外竆途之交。致念於飢寒。其厚意又何可忘也。纍人事本末。僉兄旣以備悉之矣。栫棘以來。父子幸免疾患。寢處食飮。皆如常。而島中姑無痘火之相逼。放臣得此。於分亦過矣。古所謂到處是君恩者。豈漫設語耶。仁山之變。亦非纍人。何以至此。罪戾之身。禍無所不及。他日賴天之幸。縱得返鄕國。將何面目。以見東州之士林乎。痛心痛心。凡百况味。略及於畸翁,浦老許書中。可取視也。年前。兄自海南歸。談靈巖月出山之奇秀。恨不得一見。今行掠過其下。仰視千峯。聳出雲表。如劒戟森列。信乎奇哉。此亦非天恩也耶。到康津之日。尹姓士人多來見。皆孤山翁之門後生也。登船之際。諸尹收米斛贐之。其義氣亦不偶然也。元兄旣遊於康海之間。故漫及之。所住門前。卽大海。大海以南。不屬我國地界。當是吳楚江浙之地。有時引領縱目。便覺有乘桴浮海之思。卽此可想此纍牢騷之意象矣。萬萬書不盡言。都在默念中。惟祈各自保重。以慰遐想。
*與朴元老書 丙寅
入島後。問船路所通。則云此中船往往至盈寧平蔚。盈寧平蔚之船。亦有時而到此。意謂唐城道洞。去海稍間。商船往來。或不及偵探。吾兄新寓。密邇竹山。不患無寄聲之便矣。今十一日夕。此中船呈書封。卽仲氏丈及季氏兄書耳。獨無兄一字。始慮之相左如此。殊令人訝惑。然兄豈忘我者。恐適他出。或移寓。而不値此便爾。歲前起居。因兩書謹已欣審。而伊後歲改有日。遠惟茂納新休。益復康健矣。纍人十年南鄕。衰病已甚。而罪戾至重。又有此絶島之配。此皆命也。奈何。島在古今島之南。忠武公鏖賊。英風壯烈。彷彿若存。而纍人所住門前。卽大海。東南漭然無際。雲水相接之外。衆島點綴交羅。望之依然若畫圖中。雖岳陽洞庭之大觀。未必過此。正騷人豪客之所宜遊者。兄曾於金海南之在海南也。匹馬南遊。歸詑月出山之勝。今雖老矣。聞氣力之健。無異壯年。倘可復爲少年之遊耶。奇竆之人。不勝愁寂。發此不敢望之虛說。兄必覽之而大笑矣。萍蹤無止泊之日。一握相笑。不知在何時。作書到此。不覺神飛魂越。所懷不盡。惟祝起居連勝。此船回時。毋惜金玉之音。以豁羈抱。
계해년(1743) 9월에 박인상이 광양 배소로 제산 선생에게 보낸 편지
逖矣相見。無涯千里。面目猶在扵尺牘上宛對。而由我無書。兄亦無之。厥咎誰執。自訟巨心之罪耳。秋序巳盡。薄寒中人。不審荐棘中饋寢何如。三年危綴之餘。幸免毀■之病。豈非神明之所扶護耶。遥慰且遡。不任區區。弟三數年之间。门內禍孽。何所不有哭子之淚未乾。又見従孫児。傾逝之慘痛。惜之懐已不可言。而此两児者。頗有才學。门戶之倚望。實不淺尠。而相繼酷沒。奄忽至此。家運敗矣。萬事已矣。奈何奈何。餘禍未殄。徳弟喪耦扵前冬。今夏居晦。又失其配。此實人家不單之禍。而餘外児少。札夭之變。種種不絶如是。而寕有在世况耶。弟亦未兑潜遘之患。出入鬼關。幾死堇生。阅数月而復起為人。然一自經癘之後。髮蒼蒼而視茫茫。飢而寒衰老之病。又従而痼之。此生扵世。良可苦㦲。竹寓昨秋因病撤歸。海山風景。都付之鷗鷺千群。而自家江湖之約返歸虗。奪還可笑也。闻有率春相會之事。固知形勢不得不已。而客土生涯。必多艱苦之獘。為之奉念不已。徃年弟書中。有鄭文獻公築室蟾津之語。兄荅以無是事。頗有看書不審之譏矣。近觀儒先録文獻公行狀。則狀中有服阕。不見妻子。即出门去。遊遍智異山。見晋山岳陽洞。愛之。卛妻子築室于蟾津之口。種竹蒔梅。盖將老焉云云。未知晋山與岳陽洞。在於何處。而今亦有其名耶。後便示及。㐲望。餘萬非茟舌可旣。闻便呼草。惟冀千萬自愛。以副遠望。不宣。㐲惟下察。謹候狀上。癸亥九月二十五日弟師相頓金校理匪所入納。光陽反浦朴弟候狀。■■謹封。
달수(주) 1739년 정월 박인상이 광양 배소로 제산 선생에게 보낸 편지
聞兄離蛟窟住蟾津已久。合當爲一書以慰。而討便未易有亦坐忙未能也。常以爲心上恨乃者得見抵懋哉。書且有紙尾之問。滿紙辭語。令人不覺釀涕。因諳兄注泄之症不甚輕細。必是涉層濤犯瘴霧。不習水土之致。其爲慮念不敢少弛于中也。向後歲次春生不審尤調候旅。况何似光陽。自是葛翁之涪州。而昔年吾所經歷處也。問道暫時人。雖不知土風之如何。而頃見令胤書。則民俗亦不至。獰悍水味且甘洌云。其視在島中相去遠矣。感祝君恩。當復如何。而胤誠孝。豈非有以致之耶。弟遭家啄喪之運。畸軒族兄遽爾傾逝。痛哭痛哭。尙忍何喩。此兄年來衰謝。特甚齒牙盡脫。肥肉暗鑠。不無私心殷憂然精神筋力。猶不知大損。常以是爲恃矣。豈意背上一小疽。竟奪吾斯速耶。狷介之行。博雅之識。今不可以復見矣。至於遠近出入朋酒聚集。每相與并鏕聨轡有所恃。而無恐今其已矣。奈何奈何。有疑而誰與諮諉有事。而誰與嬉遊節節思惟心肝。欲折一息未絶之前。寧有暫忘之時耶。痛矣痛矣。悲夫悲夫。自此兄沒後。忽忽無在世之。况與懋哉。相對語及流涕。如兄遠者。又不可以易見。則弟獨何心。能不悲哉。又况兼之以饑饉。加之以疾病。窮之一字。爲吾平生之憂。方其窮時。亦有忍不得處。未知何時。能入忍到熟時。自好境界耶。惟以兄弟三人。姑無大段疾病。相與爲慰耳。川前消息陸續相聞。大碩人氣體尙無恙。匙箸惟輕云。爲吾兄攅賀不已。而近聞以痘患未免。搬移之撓云。惟是之慮耳。前日獄中詩。曾已草和。而前便忙未書呈者也。今始錄之矣。覽而繩削之幸矣。今來兄憚畸翁沈隱候詩。次䪨讀之。感涕自零。心欲和送。以道余悲。而忙拙今姑未也。當竢後便耳。元塘岳丈去秋。以天年下世。初冬已經。襄奉生順死安。實無所感。而廬次旣無一子。身上又失天爵。是可悲耳。餘懷萬萬。紙窄不究。惟冀千萬保重。以副區區之望。不宣伏惟兄情照。拜候狀上。己未正月十三日。弟師相。頓。
김덕오(金德五)1680년(숙종 6)∼1748년(영조 24). 영해(寧海) 출신.
본관은 수안(遂安). 자는 성겸(性兼), 호는 치헌(癡軒).
아버지는 부호군(副護軍) 진화(振華)이며, 어머니는 웅천주씨(熊川朱氏)로 후정(後挺)의 딸이다.
1723년(경종 3)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으나 과거공부를 단념하고, 이색(李穡)의 옛 집터에다 치헌(癡軒)이라는 집을 짓고 그 속에서 학문탐구에 심혈을 기울였다.
《주역》을 즐겨 읽어 그 묘리를 깨달았으며, 수학(數學)에도 조예가 깊었다.
저서로는 《기연의변 朞演疑辨》·《사학의변 四學疑辨》·《기주연법 朞註演法》·《치헌집》 등이 있다.
제산집
*答金聖兼 德五 書 丙辰
經年違拜。望風馳慕也深矣。不意玆者。委惠手翰。敎告諄悉。奉領鐫感。不容言謝。就審卽日霜寒。靜候珍福。又有池園花竹之樂。足以頤神養性。世間芬華榮辱。不得爲靈臺之累。慰沃欣暢之餘。恨不能從遊其間。豁此滿襟塵土也。聖鐸奉親之下。粗此遣免。而一絆名韁。便作觸藩之羝羊。誤恩仍疊。進退狼狽。虛聲惹灾。謗議溢世。畢竟恐不免爲親舊之憂。自歎奈何。貴編朞註演法。奉借數年。尙未完璧。其不敏誠爲可愧。但曆數之學。非鈍根昏鑑所可容易窺測。况高明之說張皇幽眇。獨觀造化之原。往往與先儒定論。較其是非得失於千載之下。則其間設或有過推之病。牴牾之失。使他人之素不知門戶者觀之。實有望洋無竆之歎。竊不自量其衰鈍闇劣。敢欲不限年時。留置塵案。時時繙閱究索。從頭徹尾。庶幾積功之餘。或有管蠡之見。則不但於蒙陋有益。其於高明一大事業。亦似不無毫髮補助。此所以屢被責還。而至今淹留者也。今書中。深以示朴自悔閱歷人眼。罪聖鐸。區區於此。不勝悚汗之至。不敢更乞仍留。謹此奉還。自此些少理會覷得者。無復可據以推廣。終於茫昧而已。正所謂如入阿閃國者。恨歎奈何。然鄙意竊以爲老兄旣於此事。用功深得力多。不可中道而輟。必須更攀年歲。工夫於已思索處。益致其精核於已論著處。益加其修潤。使古今曆家之法。前後儒賢之論。是非得失了然。各有著落。然後乃爲成書而無瑕隙之可議矣。如何如何。敢恃知愛之意。妄言及此。罪悚罪悚。謬索數行語。固不敢辭。但未及窺一斑。而冊子已去手。雖欲承命。將何所揣測以爲言耶。儻於他日。爲完整不刊之編。然後又不鄙而見借。則敢不忘陋效一語耶。趙令丈就理不多日。卽蒙恩宥而還。何莫非聖上仁明之德耶。且聞其氣力神觀。不以寒程撼頓有所變改。偉哉。足令士類增氣也。
癡軒先生文集
詩
*次朴見卿韻。贈金振伯 聖鐸。
山水孤絃獨自知。幸將焦尾遇鍾期。玄談要玩風䨓象。細酌非耽月露詩。
庖刃善操吾豈得。郢斤神運子能爲。若敎大鞴噓鎔火。査鑛猶將百鍊追。
振伯有朞註演法訂正之請。故及之。
*次金振伯在大理時韻。卻寄。
一繫蕤林律屢更。寸腸孤夜尺釭明。鷄人唱曉誰相報。鴈子乘秋獨自鳴。
鈴鐸廵時心益苦。漏鐘催處氣難平。仁賢困厄非今獨。然後高名北斗撗。
*用前韻。悼畸友三章。並寄光陽謫所。振伯亦述此懷。故和付。
師道當年薄命悲。昔人心事驗今時。靑樓十二留深誓。白髮三千誤宿期。
綺樹春姸君忍訣。紈扇秋怨妾空持。南陽哭送新阡日。更向湖天問所思。
衰白餘生觸處悲。那堪樑月夢驚時。芝眉對若前身契。竹牖開無此世期。
齷齪每忻追駿步。駏驉可耐失蛩持。知音海內惟君在。幸爲存亡寄遠思。
甲子泥塗未暇悲。精神惟在講磨時。撐船卻欲中流泛。炳燭渾忘大暮期。
理義鉤深新意發。牋書輸歀美論持。從今耳伴無人喚。只有床頭揜卷思。
*輓 金霽山振伯 문집에 미수록
往在旃蒙歲。邦家慶得髦。簪花襯黼座。奎藻燦璿毫。擢授鑾坡秩。超陞栢府曹。
寵榮稀史簡。光彩動京壕。秖見霑洪霈。誰知觸巨䬞。漢幡寃欲訴。唐網罪難逃。
筆犯䨓霆震。身危鼎鑊膏。恩威飜咫尺。好惡變瘡毛。緝出虛文織。繩來峻典鏖。
指蒼辭聽直。誓皦守看牢。霍諝猶伸黨。范滂豈祭臯。旣摧瞿灧楫。更涉汨濤。
啼作桓山別。吟成楚澤騷。倚閭慈望斷。陟岵孝思熬。惠貸終天訣。哀奔擗地號。
北邙纔宿草。南嶠忽悲颾。可惜哲人萎。徒增志士慅。林宗私慟切。宋王獨愁綢。
櫟社材雖散。蘭房契早叨。行防承世範。文藝脫凡胞。美質寧雕琢。謙姿寔晦韜。
器珍周廟贊。禮賁浚郊旄。自放江鷗性。焉窺岐鳳巢。良扁蟠木取。巧冶零金掏。
陋撰忘煩碎。嵬論極細搔。附籤惟恐漏。連牘肯嫌勞。密積程工厚。精開眼目高。
心機無滯礙。手法若椎敲。郢匠風斤運。吳剛月斧操。抱鉛羞我鈍。拖滓許君淘。
賢路俄顚沛。朋情劇憯忉。十年苦離索。千里隔篷篙。幸覬茅重拔。方翹杞再包。
覆盆嗟閟照。傾盖衋遲遭。渭樹回樑夢。滄桑化梵泡。幾時資倚藉。何處伴英豪。
寂寞竆途暮。凄凉晩計拋。病違徐孺笈。淚濕杜陵袍。
書
*答金振伯
秋杪。傳聞兄遭鴒原之慽。窀穸甫畢。黽勉赴召。此二事其在知舊。固宜以書慰賀之不暇。而每苦作事鈍滯。遠近吊慶。率歸因循停閣。方此自訟之際。伏承辱復長牋。情悃溢幅。披讀以還。感愧交並。况審初寒。兄省下服履膺時冲適。何等慰豁。僕索居竆閭。孤陋日甚。每有及門求益之願。而數舍之地。杳隔弱水。日夕懸係。何嘗不在左右耶。間者一二林下之士登名薦剡。而未聞束帛戔戔之繼。意謂當世之求士者只是備文應數而無其實矣。廼者吾兄臯鳴旣徹。谷香難秘。新命復下。超參六品之斑。恩眷荐降。特蒙三接之榮。此是初進之士曾所罕聞。不易得之異數。以兄謙虛退讓之心。安得不蹙踖靡容。求厥善後之策於素相愛慕者邪。雖然。吾兄之學。充養有素。足以行之於世。而其在進退辭受之間。必有前定而不跲者矣。尙何俯詢於蒭蕘也。來喩。意寄勤縟。責勔周至。眞是愛我之藥石。弟雖不敏。豈不知象數之學不切身心。而無益於己分上事業哉。但以爲士生斯世。有可願者三。而其一在天。其二在我。在天者。雖不可以力致。在我者。隨其才分力量而求之。則何患不得。惟其賦生之初。品劑已定。卑不能抗而高。狹不能張而廣。鈍者。失於固滯。銳者。過於凌躐。尙奇異者。淪於跪僻。務平坦者。流於陳腐。其能推尋正脉。脫出常科。以塞夫受中以生之責。以辨夫不朽永久之業者有幾哉。此所以欲爲儒學則未窺其門墻。欲爲詞學則未得其蹊逕。而其在我可願者。俱歸臧穀之亡羊。此皆弟已試之伎倆。旣不能得之於彼。又未免失之於此。倀倀歲月。虛度光陰。點檢平生。終是悾悾癡豈漢而不過爲天地間一棄物。此所以平居慨然發憤忘食。思欲專精於一技藝。致知於一事物。雖非切實爲己之學。而幸免於全無知覺之歸者。是其志也。偶緣攻鑽之暇。略窺朞璿之法。源頭乍濬。派流甚。纔得其門。關鎖重重。一阻扃璿。擠叩不已。洞開而後已。夫以炳燭之年。而作此無用之事誠知有妨於實着工程。而第念三可願者。旣歸於虛套。則與其悠悠而卒無一得。無寧局見偏長之猶爲我有也。况玆一事。初非吾儒家不相干涉底物事。圖書卦爻之變。陰陽造化之妙。皆在其中。故孔子取以爲揲扐之法。朱子用以著啓蒙之說。老先生又因而作傳疑之辨。以是推之。則亦是古聖賢支流餘裔。而其於後學開迷之方。亦不爲無助。及其精力稍存。幸得透破。則信所謂爲之猶賢乎已也。豈敢有一毫自是而外此無求之心哉。來諭中移向身心。以爲切近之學。則其於正法眞訣。必有精進而深造之者。此正知舊間策礪相規之誼。敢不佩服以奉良規。然而迷途未復。熟處難忘。更於兩書中。拈出胡玉齋說及趙尹通分納子可疑之法。以爲質問之資。極知僭率無所逃罪。而竊覸枝谷已極詳悉。識見精深。超絶等夷。如使迷蒙欲質所疑。則舍斯其誰哉。玆敢不計謬妄。別紙錄呈。若使鄙見不合高明。則投畀水火。勿爲宣露。不至見笑於當世具眼者。此實相信之誼。如以爲萬一可敎而更欲開諭。則繼今以往。不但十返無厭而已。前呈冊子。此是未成之書。不足久凂淸案。且其所論又多差誤處。幸乞隨便還癡。則近所得易學中先天太極蓍策卦氣分配諸法。並有圖及附說。自謂所見比前稍進。如不爲鄙而有意辱覽。徐當繕寫更呈。伏惟恕其狂僭而幸敎之。
*與金振伯
昨歲都下之別。翛已再變寒暑。耳目無復有好音容。一念懸仰。何啻如向來阻絶者比也。秋序已盡。伏惟退養彩侍之餘。溫理味况。一向珍衛。日間聞有勸駕之命。聖眷隆重。不知何以塞望。而知舊拭目者。亦且傾企不淺矣。旋聞尊兄守不相孟晉之戒。委曲周旋。竟保丘園之樂。爲左右計。可謂得寗武之不可及。而其於爲國者。獨無空虛之歎哉。趙中書令丈當初被逮之日。凡我嶺士孰不凜然寒心。惕然傷念。而天鑑孔昭。卒蒙原宥。聖恩罔極。已無可言。而八耋筋力。處困愈亨。是誠神明之所扶持。其爲嶺林之幸。當復如何。弟一嘗虀塩之苦。無復功令之念。杜門靜居。惟以池園花竹爲樂。而但於己分上程界益疎闊。此由無彊輔與爲之左右者耳。孤陋之歎日深。奈何。前去冊子。初不意久凂淸案。而但念此生慮事不密。已犯示朴之戒。居然三載。自速世笑。此雖愚下踈漏之罪。而以相愛者言之。不宜使此等不入世眼文字。遲留轉輾。閱歷人眼目。坐成譏誚之資而已。所望尊兄以嵬眼大觀。曲賜假借。不欲棄絶。則數行文字足生卷上顔色。此不類上虞公參同契。得晦庵而愈顯者乎。如以爲一字之費。重於千金。則弟亦不敢以木瓜之投。望以瓊琚之報。回便還癡。副此區區。切望切望。所呈枝谷丈卞答說。實出於說出前人所不敢說。故初欲聞雌黃之論。而尙寂皁白。或未知記史者忘置未傳而落在亂紙中邪。亦望搜出巾箱。並爲還擲功望。餘祝學履以序珍重。
*與金振伯
向來禍變已事。尙忍道哉。從古賢達處難罹厄顚沛危厲者何限。而寵辱之變。斯須立至。則豈復有如吾兄者哉。方其上損神之日。誰敢有褰裳赴濟者。而豐原再疏。獨有一櫓撑船之力。雖古之霍諝。不是過也。所恃天日高懸。覆盆幽枉。必無不照之理。而禍色稍沮之後。更有島置之命。較看當初氣像。稍可謂末减之科。而瞿灧餘檣。再犯十里鯨濤。縱使白刃可蹈者處之。安保其果無驚悖餘念也。然吾兄平日讀古人書。其於涪州舍達之義。講之有素。謂將履險而若坦。處困而愈亨矣。旣而得大理桁楊中三四小絶讀之。繼又得謫路湖嶺外短長諸詠讀之。露出衷腔。不尙葩藻。藹然可愛。泫然欲涕。可見平昔精爽不以困衡摧剝而有所損。本分天和。不以愁惱悲戚而有所撼。此誠知舊慰念處也。但日迫西山。朝暮門閭之恨。則固是至情之最難裁寬者。不知何以自力而能免於桓山啼別之苦也。嘗聞君子順變之道。必取古人遭地最所難耐者。持以自譬。則可見其得力處。吾兄不必遠据故事。看取晦齋集中望雲諸詠及祭墓遺文。則可知老先生心緖前後一轍。於是乎益守素患之戒而更加溫理進修之工。則其親切工夫。不但如嚮時左酬右應忙裏草草理會時也。儻所謂憂戚玉成。非指此耶。相愛之望於左右。只此一事。而謫限遲速。自有命物者處分。不必浪作無益之悲。反貽惟憂之念也。弟之作此長語。豈但貌面之情。從前往復累紙文字襲藏巾衍者。每於念頭搜出玩復。如對面晤。不知何時更作此事。以償夫未了之恨邪。感嗟之餘。繼以哽噎。牢騷諸韻。誠非拙訥者所可續貂。而自揆情分。無以爲報。玆忘布鼓之嫌。敢效佛頭之擲。或可爲寂裏禦睡之資。而猶足代空谷之跫音邪。多小情懷。寄此一幅。惟祝珍重自愛。勉加餐飯。
권중도(權重道)1680년(숙종 6)∼1722년(경종 2).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여행(汝行), 호는 퇴암(退庵).
규(逵)의 6대손으로, 도첨의정승(都僉議政丞) 한공(漢功)의 후예이다.
아버지는 덕휘(德輝)이며, 어머니는 장수황씨(長水黃氏)로 호(皞)의 딸이다.
1697년(숙종 23) 이현일(李玄逸)이 관북(關北)에서 희양(晞陽)으로 이배(移配)되어오자, 그의 문하에 들어가 처음에는 《논어》를 배우고, 이어 다른 경전을 배워 궁리수신(窮理修身)의 실무를 알아서 실천하도록 하여, 교도를 받은 지 수년 만에 학업에 대성하였다.
그 뒤 이현일이 유배에서 풀려나 향리로 돌아간 뒤에도 5백리 길을 자주 왕래하며 《중용》과 《대학》의 부주(附註) 가운데 모르는 것을 묻는 등 경서와 예학에 관하여 계속 연찬하였으며, 금양(錦陽)에 살고 있던 이현일의 아들 재(栽)를 찾아가 문장을 강화(講話)하여 더욱 정진하였다.
성리학에서도 사단칠정을 연구함에 있어 이황의 학문을 근원으로 하되, 천인성명(天人性命)의 원질을 추본(推本)하여 의심스러운 것은 반드시 실행과 고증을 통하여 분명히 밝힘으로써 성리학 발전에 많은 업적을 남겼다.
그는 본래 정치에는 뜻이 없어 관로에는 나가지 않았고, 오직 학문연마와 후진양성에 진력하였으며, 특히 거경(居敬)을 생활신조로 위기지학(爲己之學)을 닦고, 성리학을 깊이 궁구하여 그 방면의 저술을 많이 남겼다.
그의 이기에 관한 견해는 이현일·이재 부자의 학통을 이어받아 주리론적인 입장을 취하였다. 이만부(李萬敷)는 그의 이기설을 읽고 평하기를 “가히 영남유종(嶺南儒宗)이라 할만하다.”고 하였다.
저서에는 《퇴암집》 3책과 편저에는 《금양기선록 錦陽記善錄》·《노산자경록 蘆山自警錄》·《낙민언경록 洛閔言敬錄》 등이 있다.
제산집. 퇴암집
*輓權汝行 重道
錦水門牆昔鑽攻。從君磋切起頹慵。當時共勉烏頭力。此日偏傷馬鬣封。
南國高名留敎鐸。西林舊跡泣寒蛬。山河別恨仍千古。欲寫哀詞淚滿胷。
*退庵散稿序
昔我葛庵李先生之講道於錦陽也。遠近學者。坌集門下。其自南方來者若而人。而晉陽曹公德甫,檜山金公德三,丹丘權君汝行,密城安君國華。尤稱篤志善學。且其從遊往來。有首尾最久。然於文學。又必推汝行。咸自以不及。甲申。先生棄後學。學者各散歸。往往忘其舊學。而淪於俗習者多。獨四公在南方。確然守師訓不變。相與切磋琢磨。其學有進而無退。南方之人。多敬信之。未幾。汝行不幸先沒。曹公金公又繼逝。余於汝行及金公。各爲輓誄以哀之。後十餘年。余得罪于朝。戊午。自耽羅移配晞陽。汝行之長子衡平叔。不遠百里。徒步來問。自是。歲必一再至焉。又以其先稿若干卷。奉以示余。余謹受而讀之。甚矣。其求道之切。尊師之篤也。有是哉。其志行之高潔。而言論之愨實也。余之知汝行於平日者。猶淺乎其未盡也。盖觀其與申克齋,黃龍岡往復書。則其於性情理氣之分。可謂不背於師旨矣。觀其所輯洛閩言敬錄,蘆山自警錄。則其於存心養性誠身克己之道。可謂得其方矣。觀其所爲錦陽記善錄。則其於師門之德行言動。可謂熟察而善言。而所以寓夫羹牆之慕者至矣。若其他詩文雜著。又有以見其襟懷趣尙之拔於流俗。而其結茅蘆峯之下。名之以退庵。則盖將藏修游息。退然自守。誦先師之遺書。講先師之餘敎。以終其身。以淑一方之學者。其意盖亦遠矣。其見敬信於人。豈虛哉。惜乎。天不假年。不克遂其志也。余以無似。忝在同門之列。而自師友凋喪。志業荒墜。年紀頹暮。今又以罪廢逐流離。惴惴焉將無以自拔。思欲得直諒多聞之人以自輔。而汝行已矣。不可以復得。則撫覽遺文。尤有所感痛不已者焉。平叔於是。以契分之厚。要余一言以叙之。余雖不文。義不可辭。而顧以在畏約中。鄭重者有年。平叔之請益勤。而意益切。余重違其孝思。乃敢抆淚而書之。上之十六年庚申秋九月某日。聞韶金聖鐸。序。
송명기(宋命基)1680년(숙종 6)∼1755년(영조 31).
본관은 야성(冶城). 자는 정부(定夫), 호는 매헌(梅軒).
아헌(啞軒) 송원기(宋遠器: 1548∼1615)의 후손(後孫)이고, 아버지는 송희(宋熙)이다.
어릴 때부터 학문에 전념하여 1727년(영조 3)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벼슬에는 뜻이 없었고 선배 유학자들과 함께 성리(性理)의 이론을 추구하는 데 몰두하였다. 특히 서헌(恕軒) 이세형(李世珩)과 '인심도심(人心道心)'과 '사단칠론(四端七論)'을 토론하고 연구하였으며, 《퇴계서절요(退溪書節要)》를 저술하였다. 학행과 덕업으로 세인들의 추중(推重)을 받았다.
아들 남촌(南村) 송이석(宋履錫)과 더불어 칠곡(漆谷)의 매양서원(梅陽書院)에 배향되었다.
저술로 《매헌선생문집(梅軒先生文集)》이 있다.
제산집
*答宋定夫 命基 書 甲寅
意外。寵問遠及。披讀數四。如對眞面。况審比來暵炎。侍履萬珍。區區慰暢。又豈尋常比耶。聖鐸近來老人少寧。日孥眷憂病。隨屬不絶。閔歎可勝。令孫秀才。才性穎敏。志尙甚嘉。但家庭之下。自足濡染典訓。否則得人爲依歸。以達材成器。而顧此庸陋所先者年紀而已。乃不遠數百里而來。以質疑問文字爲事。愚漢之不量抗顔。固不足道。其於賢父兄爲子弟之道。豈非謬計耶。以此愧懼。不知所以仰承盛意也。
김시형(金始炯)1681년(숙종 7)∼1750년(영조 26).
본관은 강릉(江陵). 자는 계장(季章).
아버지는 봉사(奉事) 홍주(弘柱)이다.
1713년(숙종 39) 성균관생으로서 김장생(金長生)의 문묘종사(文廟從祀)를 위해 권당(捲堂)을 주동했다 하여 정거(停擧)당하였다.
1717년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1722년(경종 2) 정언이 되고, 이어서 문학·지평을 거쳐, 1727년(영조 3)에 다시 정언이 된 뒤 헌납·집의 등을 역임하였다.
1728년 호서·호남 지방의 안무사 겸 순찰어사가 되어 이인좌(李麟佐)의 난으로 소란해진 이 지역의 민심수습을 위하여 노력하였다.
1730년 동부승지가 되었으며, 이어서 참찬관·충청도관찰사·승지 등을 거쳐, 1732년 경상도관찰사가 되어 특히 교학(敎學)의 진흥을 위하여 힘썼다.
1734년 대사간·예조참판·대사헌, 이듬해 승지·황해도관찰사, 1736년 호조참판 등을 역임하고, 그해에 동지부사(冬至副使)로 청나라에 갔다가 이듬해 귀국하여 도승지가 되었다.
1738년 형조판서·좌참찬을 역임한 뒤 이어서 호조판서·병조판서·판의금부사를 거쳐 1744년 평안도관찰사로 나갔다가 돌아와 이듬해 다시 판의금부사가 되었으며, 그뒤 판돈령부사·병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시호는 효헌(孝獻)이다.
*答金方伯 始炯 書
聖鐸再拜。孟秋尙熱。伏惟廵相台候動止萬福。日者。伏承閤下所賜書敎一通及謄示聖諭一本。拜擎展讀。恭審聖上因李御史誤薦之言。以臣聖鐸。付軍職。仍命閤下。依漢家州郡勸駕事。起送臣聖鐸及本府處士李槾,尙州司果成爾鴻。閤下於是仰體聖意。有此勸諭之擧。若以聖鐸。爲有近似於繡衣所達之萬一者。而辭語過重。責望非倫。至以東岡固守之節。君子出處之義見擬。聖鐸廢書伏地。惶駭慚懼。若墜於淵谷之中。聖鐸伏聞非常之禮。必待非常之人。聖鐸何人也。此禮何禮也。聖鐸少嘗讀史。漢朝盖以此待茂才異行博聞有道術者。而自唐宋以下。盖絶無而慬有焉。則苟非其人。上不可以舛施。下不敢以妄承也决矣。今者。當聖上求賢如不及之日。特擧非常曠絶之規。以爲籲俊致士之地。而不加之於其人。顧乃謬及於如聖鐸萬萬無似之人。嗚呼。誰以聖鐸。欺前後方伯若繡衣諸公。而方伯繡衣之臣。又何爲不問其虛實。不察其賢否。而率爾薦聞。以誤我聖上聰明至此也。夫名者。實之賓也。無實而得名。謂之盜。其爲可恥有甚於穿窬。一才一藝之名。猶不可盜。况敢盜學識行誼之名乎。以此而安於心。則是自欺也。以此而播於人。則是欺人也。以此而聞於朝廷。達於君父之聽。則是欺天也。自欺。猶可說也。欺人不可爲也。欺人猶可忍也。欺天不可敢也。今以幺麽匹士。敢竊學行之虛譽。以至於欺人而欺天。卒使聖上。降此不敢當之諭。而閤下之所以見敎者。又萬萬過越。聖鐸於是。罪且不暇逃。其敢以榮進爲意乎。且閤下欲知聖鐸之實狀乎。少而駑怯。長而碌趚。學不能通一經。才不能措一事。行不能比一鄕。而家貧親老。從事科業。出入場屋。垂四十年而亦不成。則無所短長之實。可見於此矣。以故鄕里之人。不過待之以科臼中老措大。聖鐸之自處。亦不過閭里間庸衆人。則夫豈有萬分之一可以當聖上簡在之心。而堪此非常之寵命也哉。若使聖鐸。徒知分義之不敢慢。召命之不可稽。而不自量已。冒昧以進。則是以穿窬爲不恥。君父爲敢欺。天下之惡。莫大於此。聖上安用如此之臣。以辱朝廷之名器。閤下安用如此之人。以答聖上之至意哉。此聖鐸所以俯仰慚怍。夙夜兢惶。寧伏違慢之誅。而不敢承恩命者也。聖鐸情實本末旣如此。而又有迫切之私。不得不布聞者。聖鐸有老母。今年七十六。素多疾病。常在床褥。自今夏以來。又添注泄牽引等證。轉側須人。氣息綿劣。人子之情。不忍遠離。此於聖朝孝理之下。尤宜在所矜察。伏乞閤下留意於覈實之道。垂仁於推孝之地。區區情勢。特賜省覽。俾得少逭欺盜之大戾。而不奪母子之私情。千萬幸甚。聖鐸初欲呈書節下。以冀狀聞。旋恐事體未安。故乃敢就本府。陳暴實狀。以爲轉報營門。帖移該院之地。此意幷乞諒察。
*答金方伯書
不自意伏承下書。謹審沍寒。台候起居萬福。惶感之餘。慰仰無任區區。聖鐸伏蒙盛庇。將母粗免。惟是向來不敢當之恩命。至今惶愧踧踖。無所容措。頃者。已以鄙陋實狀。陳暴於勸諭之下。謂宜蒙被照察。不復提掇。俾得少安微分。而迺今台諭。又如是眷眷。閤下所以奉承聖意。禮下賤士之義固盛矣。顧此萬萬無似。尤何以承當也。聖鐸非敢妄竊撝謙之名。半世科場。不恥乾沒。晩被除命。亦無不承。其不能久於供職者。爲老母在堂。不勝烏鳥之情耳。初豈有重內輕外之操。養高自適之意。而今此所蒙。自揣分量。實所難堪。聖鐸雖欲冒進。其於有識者嗤點。何。此前日所以縷縷控煩者也。玆蒙不遺。使之呈狀本府。敢不惟命是承。適有採薪之憂。胡草仰復。罪悚罪悚。歲寒。伏乞爲國自愛。
*答金方伯書
意外。伏承下札。謹審竆寒。台候起居萬福。惶感之餘。不任欣慰之至。聖鐸老母宿患。當寒倍苦。私情煎迫。豈容言喩。日者。謹奉台敎。呈書本府。方悚惕以俟轉報後處分矣。玆承狀聞有日。竊幸鄙陋不敢當之情實。庶幾少暴於朝廷之上。得以暫逭欺盜之罪。而伏見所示擧條卑賤姓名。又煩諸卿宰大人。謬加提掇。以至再溷天聽。使向來非常之命。迄無收還之期。而閤下敦勉之諭。又及於實狀備陳之餘。徇省分量。萬倍惶愧。不知所以措躬也。然閤下之明。已燭聖鐸之爲人。决不至循虛聲。不究其實而一向假借之。以爲朝廷羞如前數公之爲也。區區賤悃。惟是之恃。伏乞閤下特垂閔察焉。歲且除矣。伏祝爲國自愛。茂納新休。
김광국(金光國) 1682(숙종 8)
본관 광산(光山). 자는 사능(士能).
아버지는 통덕랑 김익(金榏)
숙종(肅宗) 31년(1705) 진사시 입격
제산집
*金士能 光國 來訪。適當中秋節。與雨溪,卧溪 聖欽 二兄善餘弟及晉兒正姪。玩月重九峯下巖臺上。呼韻各賦。
濁酒狂歌對素秋。萬松林外一江流。良朋好月今宵幷。那得片舟泝遠洲。
김광국(金光國) 1682(숙종 8)~1775(영조 51)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대관(大觀), 호는 육인재(六忍齋)이다.
권두인(權斗寅)·권두경(權斗經) 등을 선배로 섬겼고, 이광정(李光庭)·권만(權萬) 등과 도의교를 맺었다. 1705년 진사시 합격, 1735년 문과에 급제하였다.그는 선현의 종사 문제에 깊은 관심을 보였으며, 벼슬을 그만두고는 경사(經史)를 궁구하였다. 또한 애민의식의 발로로 흉년에 대한 대비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주장을 펴기도 하였다.
六忍齋文集
*金振伯[聖鐸]擢第。應㮄日。自上特令引對。賜詩以寵之。一時榮耀。和者甚衆。遂步御韻以賀。
龍樓呼上戴花人。天渥堪誇寳墨新。何似邇英延接日。只將蓮燭導詞臣。
平生林下讀書人。契合方當聖化新。從此君民有重寄。莫敎專美古良臣。
김성흠(金聖欽) 1682(숙종 8)~1757(영조 33)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경백(敬伯), 호는 와계(臥溪).
시온(是榲)의 증손이며, 귀중(龜重)의 아들이다. 숙부 방조(邦照)에게 出系했고,
어머니 재령이씨는 이표(李杓)딸이다.
妻父는 全州 李棟完·鵝洲 申賁錫·固城 李萬材이다. 李棟完·李玄逸에게 수학하였으며, 1711년(숙종 37)에 司馬兩試에 합격하였다. 그러나 출세에 뜻이 없어 향리로 돌아와 林泉에서 독서하면서 보냈다. 스승 이현일의 伸寃疏에 疏首가 되었고, 1728년 이인좌의 난 때 창의하였다. 저서로는 <臥溪集>이 있다.
제산집
*金士能 光國 來訪。適當中秋節。與雨溪,卧溪 聖欽 二兄善餘弟及晉兒正姪。玩月重九峯下巖臺上。呼韻各賦。
濁酒狂歌對素秋。萬松林外一江流。良朋好月今宵幷。那得片舟泝遠洲。
*次雨溪卧溪二兄留別韻
湖南三月瘴雲生。江浦悲風雜雨聲。征馬今朝當別路。斷鴻何處送哀鳴。
百年已是同衰境。千里難期復此行。閭望幾時猶未慰。故山休說負幽盟。
이복환(李復煥)1682년(숙종 8)∼1727(영조 3).
본관은 재령(載寧). 초명은 지유(之煣), 자는 여강(汝强) 내경(來卿), 호는 노계(魯溪)
조부는 이현일(李玄逸)이고, 부친은 통덕랑(通德郞) 이천(李梴)이다.
9세에 어머니를 여의고 어렵게 자랐으나 서책을 멀리하지 않았다. 그는 “학문의 도(道)는, 욕심을 제거하고 천리를 회복하는 데 있다”하였다.
저서로 《금수기문(錦水記聞)》과 《칠촌문답(七村問答)》을 남겼으며, 시문집으로 《노계선생문집(魯溪先生文集)》이 있다.
魯溪先生文集
*與金振伯聖鐸
爲問蒸炎, 侍學何如. 家禮大小宗之疑, 歸家試取朱子大全考之, 其答董叔重書曰, 宗子有公子之宗, 有大宗有小宗云云. 其曰公子之宗, 卽諸侯之妾子, 而家禮所謂有小宗而無大宗者也. 其曰大宗, 卽世子之母弟, 而家禮所謂次適爲別子者也. 其曰小宗, 卽別子之衆子, 而家禮所謂別子若有庶子者也. 以此意義, 求之於大傳以下之文, 似無上下矛盾之疑, 獨於膝魯之證, 猶不能無疑. 然大全又曰, 若其間有適子, 則衆兄弟宗之爲大宗云云, 然則諸別子雖各爲大宗之祖, 而猶於兄弟之中, 推其長者爲大宗, 故膝謂魯爲宗國也耶. 此外理會不得, 幸乞批回.
안명하(安命夏) 1682(숙종 8)∼1752(영조 28)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국화(國華), 호는 송와(松窩),
19세에 갈암(葛菴) 이현일(李玄逸)의 문하에 들어가 대학. 논어. 중용. 서명(西銘).
옥산강의(玉山講義) 등을 배웠다. 시를 읊조리며 자적했으며 성리학 공부와 후진양성에 노력했다.
제산집
*答安國華 命夏 書 乙丑
入島數日。兄之所惠書。出於九月廿八日者。追到於至月之初。竆荒寂寞中。得奉同人金玉之音。其爲驚感。豈異時承訊之比耶。且縷縷見諭。無異覿面披討。玩繹屢日。不能釋手。惟以海道旣遠。且阻鱗羽之往來。比陸地倍闊踈。故迄未奉復。是爲歉歎。卽日歲且除矣。謹問信後竆陰。靜養德履。連享平吉否。前者枉顧之行。屢次戒轄。而輒爲魔兒所戱。使纍人。不得奉君子談讌於蟾湖之上。以豁鄙滯。而釋牢騷信。竆途之人。雖一塲好事。亦分不當得。浩歎何已。纍人十年流落。又配絶島。此豈但罪犯之至重。抑亦命途之畸竆也。不敢有毫髮怨尤意。祇以古人所謂知其無可奈何而安之者。自勉而已。但自數年來。氣血益衰。眼目愈昏。不能自力看書。舊聞都喪。新得何論。頹惰放逸。胷次日覺汙濁。有時反顧慚怍。思得彊輔如老兄者。朝夕與處。以資警益。則庶幾有所灑濯磨礪。以收一分桑楡之功。而其如邈乎不可得何。在己者如此。誰肯逐臭而來。縱令誤來。其何能成就得一箇半箇耶。承諭愧汗愧汗。但所與相厚者。晉陽南國鵬。山陰姜德望。二人。雖資才不甚敏穎。而志尙頗篤。將來或似有可望者。而皆短命死矣。甚可痛惜。老兄旣辱俯叩。故漫及之。不必煩於人聽也。寵示盛作諸篇。愁寂中時一披對諷詠。慰暢良多。萬萬非遠書可旣。惟祝迓新增祉。德業益茂。以慰瞻仰。
*送安國華歸密城序
凡士之有志者。有知自修。而不知爲學以成之者。有知爲學以成之。而不知就有道而正焉者。苟徒知自修而不知爲學以成之。則是洪氏所謂質勝而野。朱夫子所謂無以考聖賢之成法。識事理之當然。而所行或出於私意者。其有成也難矣。徒知學而成之。而不知就有道而正焉。則是尹和靖所謂未免有差。而揚,墨之所以學仁義而無君父者也。其至於離正也亦易矣。是以自古聖賢。未嘗不以自修爲務。而又未嘗不學焉而就有道以正者也。安君國華。密城人也。天資仁孝。自少有志於學。每病世之爲學者。徒以科第爲貴。而文辭爲賢。能自力修身。旁讀書史。而以未得賢師友而從遊爲恨矣。粤在己卯。聞我先生蒙天恩。自北而南。乃私自欣然趨拜於其門。承誨出入者盖有日矣。去年春。先生放歸于此地。與遠近學者講道。安君又不遠數百里。負笈來謁。自春及夏。受業不怠。若君者。眞可謂能自修而知爲學。能爲學而知就有道而正焉者也。今者君之來已過三月。而鄕音踈矣。定省曠矣。君不禁北堂之思。乃告于先生別儕友。而旋歸于密城。余送之江頭。執手而言曰。君歸養萱闈。情之喜者也。遠離丈席。情之悲者也。其喜其悲。皆情之當也。而吾於君。有所恨焉。昔陳仲擧有言曰。旬月之間。不見黃生。則鄙吝之萌。復存乎心。仲擧賢人也。旬月不久也。猶有此歎。况如我之愚魯。不敢比古人之萬一。自此日之別。與君不相見。將涉幾旬月也。而鄙吝之萌于心。將不知其幾何也耶。嗟乎。惜別之懷。言之無益。惟願君從此以往。益孶孶勉力。其於撿身飭行。固不容少懈。而學問思辨之功。亦不可使間斷也。是乃先生之所嘗語君者。而君之所親承者也。君其服膺勿失。惟日不足。上不負先生之訓誨。下以副吾儕之所望也。相愛之至。敢以此告之。誠知其不自量也。惟君不以人觀言。勖哉勉哉。辛巳淸和下浣。同門友金聖鐸。序。
박정걸(朴廷杰) 1683(숙종 9)∼1746(영조 22)
본관은 무안(務安). 자는 회영(懷英), 호는 남포(南浦),
아버지는 하상(夏相)이다. 일찍부터 학문에 뜻을 두어 이현일(李玄逸)과 그 아들 이재(李栽)를 사사하여 학업을 쌓았으니 판서 오시복(吳始復)이 덕기(德器)라고 칭찬하였다. 과거에 뜻을 두지 않고 오직 학문에만 힘써서 김성탁(金聖鐸)과 기암 박관선(畸庵 朴觀善)과 친교하였다. 성리학의 깊은 뜻을 강구하고 향리의 후진을 지도하여 교화에 힘썼으며 효우의 특행이 있었다.
제산집
*奉次懷英韻。留別座中諸益。
底事同遊滯海門。無端十日未回轅。百年膠漆逢良友。千古丹靑講聖言。
歸夢謾尋江上宅。客愁聊對雨中樽。懸知別後相思處。花落空庭月滿軒。
*畸軒朴見卿。見臘梅。用朴懷英 廷杰 贈別韻。見寄。步和以呈。三首
空山歲暮憶同人。輾轉寒齋爲及晨。每歎孔門論益友。那從孟氏接芳隣。
深情已許通金石。信誓何煩質鬼神。但願西風頻寄問。莫敎時月曠音塵。
隴頭孤樹伴高人。風致西湖宛隔晨。誰遣玉妃來侍側。堪誇雪子接爲隣。
影斜卧榻應無夢。香透吟脾合有神。共是歲寒相保意。何妨折贈散襟塵。
歲寒長憶素心人。愁聽雞鳴風雨晨。三逕幾望羊仲友。百錢難買呂僧隣。
江梅發後應勞夢。嶺雪飛時卻愴神。千載山陰王子棹。秪今誰復續淸塵。
蔣元卿開三逕。裘仲羊仲。與之遊。○宋季雅市宅呂僧珍側曰。千萬買宅。百萬買隣。
*京城旅館。次朴懷英,權一甫長律。二篇
甲第朱門似海深。操竽不可况操琴。由來白雪元高調。今世皇華摠俗音。
共是倦遊嫌紫陌。誰將薄宦負靑岑。會須攜手歸東洛。流水聲中得子心。
憐君落拓氣猶豪。高翥騷壇一羽毛。病渴馬卿空白首。詩竆杜老秖靑袍。
浮榮不是干吾事。大雅終須賴爾曹。江左一編驚俗眼。怳如河伯望洋濤。
*南隴,南浦二兄。用沈隱侯贈別韻。見寄。長律步謝。
天涯淪落已堪悲。况復衰年異少時。難得一樽邀好客。若爲千里赴佳期。魂如彈雀驚無定。心似風旌颺不持。自是人生非鹿豕。且將詩札慰遙思。
*答朴懷英書 戊午
鄕便中。承兄去臘十八日惠書。書出後。歲時已改易矣。不審比來。體氣何似。仰慮無已。平生遊從。孰非故人。而自顧鄙拙辱知愛特深者。殆無出於吾兄右者。患難以來。不敢以問死生念竆阨。望於人人而獨於德門二三情舊。或意其不相遺置也。書中見念深切。嗟愍憂歎。出於悃愊。始信鄙料不爽。奉讀以還。不覺感涕沾襟。纍人不量時諱。妄干大僇。上負聖主不世之眷。下挑師門莫大之禍。而又令八耋老母。重致憂傷。睽離阻闊。以至於此。桁楊之日。遺體毁傷。不得全歸於他日。生三大義。一時隳喪。嗟乎聖鐸之罪。可謂上通於天矣。然而得全首領。止於囚棘。毫鬚何莫非好生之聖德也耶。到此之後。僦屋稍寬。土人不相猜嫌。又賴親舊相救之力。及耽羅伯周餽之惠。五六人口。姑不至闕食。每念古之放臣遷客。得安穩如此者無多。若使親年不至於日迫西山。而無大海之阻隔。消息安否。以時相聞。則雖如盧伊齋之十九年於珍島。亦何大慽爲也。顧此情界之痛迫。又古之放逐臣者。所未有也。平日欠素養功力。而猝當無限苦惱。雖欲以古君子行患之道。自勉於心。以副相愛者勉戒之意。而不可得。韓文公所謂強懷張不滿者。誠知言哉。惠及和詩諸篇。辭意俱可感涕。汨於書札。酬答未暇和呈。只次沈隱矦詩韻一篇。送呈畸翁許。幸同照也。
이항배(李恒培) 1683(숙종 9) 영주 출신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계실(季實)
조부는 진사 이태익(李台翊). 아버지는 이명익(李命翊)
숙종(肅宗) 40년(1714) 진사기 합격.
제산집
*次權一甫西江待舟韻 時余先至金陵送舟。邀見卿,季實,一甫三君。
風靜西洲水緩流。故人江上爲誰留。滄波極目佳期晩。應向潮頭問小舟。
*次朴見卿十二章韻 幷序
朴上舍見卿。用權一甫於三溪書院。同李季實酬唱四絶韻。演成十二章。分寄一甫,季實及余各四章。且要依律步和。余素昧詩家語。特感辱贈厚意。忘拙效顰。先呈見卿案下。季實,一甫處。續當奉寄求正。
甕牖前頭草樹幽。索居無復舊風流。那能化作雙黃鵠。一擧回翔覽九州。
一別歸來陋巷幽。東南西北阻名流。如今卻羡羈遊日。共泛烟波到幸州。
聞君高卧石泉幽。一棹無由遡峽流。回想昔年爲客處。秖應明月滿巴州。
別後黃鸝啼夏木。何來白鴈落山門。慇懃一十二章語。半是竆愁傷我魂。
故人相望龜城北。消息經春不到門。誰報三溪酬唱語。一回回首一銷魂。
節序重回遊璧水。離愁尙憶出都門。如何地邇人還遠。江北江南共斷魂。
敏捷詩篇早出羣。晩來繽佩綴蘭芬。莫將日月愁中過。且復潛心六藝文。
雅量堪容我輩羣。淸詞亦足振葩芬。勸君更進騷壇步。努力千秋不朽文。
良駟元超冀野羣。天香獨播藝林芬。願收湖海陳龍氣。莫學俳優司馬文。
김시빈(金始鑌)1684년(숙종 10)∼1729년(영조 5). 영천(榮川) 출신.
본관은 함창(咸昌). 자는 휴백(休伯), 호는 백남(白南).
아버지는 통덕랑 정휘(鼎輝)이다.
1702년(숙종 28) 생원시에 합격하고, 그해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필선을 거쳐 1724년(영조 즉위) 장령이 되어 영조의 탕평책을 두둔하다 오히려 화근이 되어 명천군수로 좌천되었다.
1728년 이인좌(李麟佐)의 반란이 영남 지방으로 확대되자 채성윤(蔡成胤)의 천거로 영남의 요충을 방비하는 데 적합한 인물로 뽑혀 울산부사가 되었다. 그곳에 부임하여 폐습을 과감히 개선하는 등 선정을 베풀다가 임지에서 죽었다.
제산집
*輓金休伯 始鑌
玉署金閨步武長。風塵滄海一麾。可憐未就歸田賦。五袴歌殘薤露傷。
*與金休伯書 甲辰
孟夏漸熱。伏惟仕履起居對序增福。諭及李上舍井休氏所屬事。自省輕淺。不敢當不敢當。夫以剡溪公高風峻節。驚動一世。身雖不幸。而扶社稷樹倫彝之功。卓乎其不可誣。國家旣有褒贈之典。士林又擧尸祝之儀。而當世名德秉筆君子。亦將播之歌詠。載之誌傳。使剡溪公聲光義烈。赫赫流於千萬世。奚又贅夫鄕曲浮沈無名位一措大之言乎。聖鐸少時。盖嘗讀其疏文。私竊以爲陳柬,歐陽徹。不得專美於古。如使蕪辭。有一分有無於張大之計。而不爲當世士所笑。則聖鐸豈敢猥托謙挹。不道其中心所感者。顧以無毫髮增重而秖足累耳。是以逡廵不敢承命。幸望高明以此意。爲謝李上舍。但念李上舍於聖鐸。未嘗有一日雅計。或高明爲李上舍泛索之。則又不必相煩也。聞剡溪之弟李處士瀷氏。文學行誼。爲京洛間大儒云。未知高明。亦嘗有舊否。
김시빈(金始鑌)1684년(숙종 10)∼1729년(영조 5). 영천(榮川) 출신.
본관은 함창(咸昌). 자는 휴백(休伯), 호는 백남(白南).
석달(碩達)의 아들이다.
정만양(鄭萬陽)·정규양(鄭葵陽)형제 및 이형상(李衡祥)의 문인으로, 경사에 통달하고 전고(典故)와 예제(禮制)에 밝았다.
1727년(영조 3) 생원으로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731년 승정원주서가 되고, 이어 결성현감(結城縣監)으로 나가 이도(吏道)를 바로잡고 《여씨향약 呂氏鄕約》에 의거하여 향속의 순화에 노력하였다. 사간원정언을 거쳐 1753년 사헌부지평이 되고, 뒤에 형조참의에 이르렀다.
이인좌(李麟佐)의 난 이후 조정에서 영남인사를 정권에서 소외시키자 연명상소를 하여 그 시정을 진정한 바 있다.
저서로 《매산집》이 있고, 편저로는 《포은속집 圃隱續集》·《가례집요 家禮輯要》·《주서절요집해 朱書節要集解》가 있다.
제산집
*與鄭道翁 重器 書 壬子
自執事出爲時用。相望益落落。中間盖嘗聞一再由還。亦無由攀拜。每切瞻嚮而已。卽日秋序欲暮。天氣淸冷。伏惟卯申之餘。體氣康迪。千里慰遡不任區區。吾黨不幸。塤叟兄再期未畢。而箎叟兄又遽違世。斯文百六。不謂至此之甚。自今如聖鐸孤陋者。無所歸依而自淑。其爲悲慟。詎但內外兄弟之私情已哉。遠惟平日父事。恩義至重。啓足之際。未及親承傳付之訣。客裏承訃。驚痛倍常。何以堪任也。聖鐸奉老流寓。洽過半歲。月前。纔得還奠。而門親隣舊。半爲異物。又於閏月。姪子將冠者遘癘而死。慘怛情界。豈勝言喩。聞執事與道中兄。進塗之初。聖眷特殊。朝中屬望。亦不淺。下交傾慕之私。不覺欣悅。然退陶先生之所以戒鄭子中者。不可不念也。如何如何。相愛之至。猥誦及此。悚仄悚仄。由行又在何間。橫溪襄事時。或得來會否。自此法門端緖延紹之責。舍執事若道中。而復誰望乎。惟益加自愛。懋勉大業。
정중기(鄭重器)1685년(숙종 11)∼1757년(영조 33).
본관은 영일(迎日). 자는 도옹(道翁), 호는 매산(梅山).
석달(碩達)의 아들이다.
정만양(鄭萬陽)·정규양(鄭葵陽)형제 및 이형상(李衡祥)의 문인으로, 경사에 통달하고 전고(典故)와 예제(禮制)에 밝았다.
1727년(영조 3) 생원으로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731년 승정원주서가 되고, 이어 결성현감(結城縣監)으로 나가 이도(吏道)를 바로잡고 《여씨향약 呂氏鄕約》에 의거하여 향속의 순화에 노력하였다. 사간원정언을 거쳐 1753년 사헌부지평이 되고, 뒤에 형조참의에 이르렀다.
이인좌(李麟佐)의 난 이후 조정에서 영남인사를 정권에서 소외시키자 연명상소를 하여 그 시정을 진정한 바 있다.
저서로 《매산집》이 있고, 편저로는 《포은속집 圃隱續集》·《가례집요 家禮輯要》·《주서절요집해 朱書節要集解》가 있다.
祭文[鄭重器]
嗚呼哀哉。天胡賦兄以美質。而不假以遐壽。胡又畀之以不世之榮。而反繼之以非常之禍耶。使其學旣優而未試。使其才將展而還挫。此所以同志之士。失聲而長號。雖其未識面者。亦莫不齎咨而涕洟者也。嗚呼。兄以藥翁瓢老之餘休。鍾河嶽圭璧之秀氣。溫乎若蘭蕙之芬菲。瑩然如氷玉之明粹。幼而從事文房。蒐獵乎書史。長而摳衣丈席。泝洄其淵源。叩扃鐍而硏賾精微。循繩墨而立定脚跟。惟其識之博而行之篤。至於文詞之贍麗。筆翰之精妙。是兄之餘事。果見鶴唳之上聞。乃有㫌招之沓至。淸問乍罷於宣室。祥雲更奏於金榜。豈獨兄爲親養而屈哉。葢亦不欲處山林之名。而以常調自放也。天顔溢喜於得人。宸篇寵錫乎來汝。擢置臺省之邇班。優納皁囊之苦語。欲備乎經席顧問。又進之玉署論思。是必能輔聖德而賁治道。衆皆謂得天人響合之期。豈料辭免之一章。反惹築磕之駭機。惟先師覆盆至寃。宜門徒擧幡以報。胡爲貝錦乎萋斐。樂擠人於擭罟。桁楊酷而不撓。瘴海惡而愈憺。在兄一事之義。顧何憾哉。彼讒人者。噫噫亦甚矣。尙荷聖鑑之垂憐。竚降金鷄之恩宥。若得返故里而自便。可以引後學而成就。誰謂凶問之遽至。竟使此望而未副。櫬舟返而沉浮。江水爲之嗚咽。此豈章子厚所爲哉。實吾嶺運氣之闕齾。嗚呼。余本無似。兄不鄙夷。自弱冠而始交。曁老大而相隨。結金蘭同心之契。荷蓬麻相資之益。雖以山川之阻。罕接顔範。每於簡牘之來。輒露肝膈。及夫南遷多年。丕圖鵩舍一過。第緣哭子而添病。無由跨鞍而涉遐。况又山居僻而鴈使絶。音聞亦不得以嗣續。只冀賜環之有日。更得盍簪而論學。嗟乎人事之難必。已矣冥途之永隔。遺經將誰與之講明。至理將誰與之辨論。山水之絃。從此絶矣。自不覺號慟於寢門。始料迎柩於江汜。其奈後時於偵矚。因而病魔交障。尙闕几筵一哭。今當喪筭之將畢。又膏素車而還停。玆敢緘辭寄酹。以道此悲恨。惟明靈尙有以鑑聽也耶。嗚呼哀哉。
김경석(金慶錫) 1686(숙종 12) ~ 1760(영조 36)
본관은 의성(義城) 자 선여(善餘)
고조부는 운천. 조부는 기(炁). 아버지는 태중(台重)
제산집
*夏日雨谷草堂。同善餘 慶錫 分韻。得人字。
幽居近寂寞。四隣多吟呻。閉門動一旬。無人枉車輪。婆娑草樹間。鬱鬱懷同人。忽聞屐齒聲。君自雲溪濱。呼童啓南牕。持箒拂牀塵。欣然一笑坐。使我雙眉伸。淸談間調謔。款款吐情眞。盤中進豆粥。妻子愧家貧。知君意淳素。不必生嫌嗔。人生貴相樂。豈問甘與辛。世情日危險。吾道恐緇磷。茅堂靜且寬。靑山亦可親。願言乘淸風。時時來往頻。
*答再從弟善餘書 戊午
一自患難以來。去親戚鄕黨。忽已一年。有時興懷。何人不思。獨於善餘。念自幼少時。至于老大。詼調談謔。同出入起居。酒食遊戱。未嘗不相徵逐。如蚷蛩之不能相捨者。有異於諸兄弟者焉。故思之切而欲見之甚。視諸兄弟。尤有加焉。每獨自語于心曰。安得致善餘吾側。相對諧笑歌吟如前日。以破吾寂寞牢騷之懷。旣又思念吾與善餘。相見必以謔言相加。無相敬之意。故親密則甚矣。而慢褻之過。亦多矣。我有言或可採。而善餘聽之。若過耳之風。善餘有善言。我亦不甚留意焉。此古人所謂戱謔最害事。而橫渠先生所以作砭愚也。又安得見善餘。以此相戒猛省。而亟改之乎。今於便中。得善餘長牋。讀之。叙阻闊問羈竆外。滿紙張皇娓娓不已者。皆勉我以操危慮深。動心忍性。不以一時得喪榮辱累其心之語也。辭氣正當。意致深厚。有君子愛人以德之義。朋友忠告善導之風。而絶無曩時浮濫坦率之習氣。令人不覺斂袵而起歎也。吾之所欲相告戒省改者。善餘已改之矣。變化氣質。最是難事。舊習尤難猝革。而善餘於此。能脫捨三十年深痼之病如此。善餘可謂天下之大勇矣。吾於善餘有愧焉。然善餘言雖如此。實或不然。他日相見。言談擧動之間。有未盡袪其宿證者。則是善餘今日之能言。乃飛鳥之鸚鵡。走獸之猩猩耳。善餘豈其然乎。且善餘前日。每作一篇文字。雖有好處。其中必有一二句乳臭兒口氣。今來書首尾屢百言。條暢圓活。未見有欠觖踈漏處。豈善餘於年歲之間。大用力於書冊上耶。何其與前日頓異也。願善餘自此。勿爲閒出入。勿以周羅事爲伎倆。堅坐靜處。讀取數十卷經史。以廣其見識。以充其才分。使先叔父鍾愛期望之意。不墮於虛地如何。君旣勉我以善言。我豈可不以善言相報乎。善餘思之也。但善餘以小兒女飢寒之憂爲累。至引顔子以自比况。此則過矣。顔子只有一簞瓢而亦不免屢空。其時顔無繇在堂。菽水之供。尙且有闕乏時。然亦不至於改其樂。豈以二三兒女之啼號。爲戚戚。奔走覓債求糶。如今日之汲汲乎。然此不可易言。先哲所謂竆須是忍。忍到熟時方好者。眞格言也。善餘其能忍之否耶。纍從罪重命釁。蒙霈未易。不知幾時當得歸覲。西山日迫。氣息奄奄而邈焉瞻望。消息亦不得源源。此懷痛迫。其誰知之。雖欲副善餘相勉之厚意。恐不可得也。奈何奈何。仙山願遊之示。宜乎聽者之駭心。以善餘氣力。豈可辦得也。來詩頗好。而眷眷不忘之意。又可感也。艱次催字身字韻錄呈。與行彥同視也。
*答善餘書
遠地。一字猶可感。况長牋屢數十行。辭意勤勤眷眷。有可感者。有可服者。又有可太息者乎。每於無聊時。發而讀之。輒令人意思豁然。忘其寂寞竆苦之狀。已而復慨然瞻望。恨不得對眞面目。開懷晤語如平昔爲也。卽日秋暮氣冷。不審靜居况味如何。纍從之撤圍移配。出於聖上特恩。北向感泣之外。不容復云云。第到此後。家信尙不至。親候安否。無由得聞。日夕憂鬱之懷。有倍於在海外時爾。且身病往復。寢食俱不安。一月之間。形神斗覺凋耗。頷髭鬢髮。日添三兩莖白者。時聞落木蕭瑟。又有志士悲秋之感。嗟乎此懷。誰可與語者。於是時。尤不能不興懷於吾善餘也。書中語不暇悉復。然旣曰本心之明。猶有所未泯。又知這箇中有恰好道理。而傲慢坦率之習。知其爲病。修辭立誠之訓。知其可佩。則其於收檢身心之道。亦庶幾矣。自是而反求。則悠悠出入。自有所不暇。閒靜時節。卽是而可得。何必自甘爲棄物。而長抱羞愧於眞儒學士之前乎。五十之年虛過固可惜。而前頭歲月。亦不甚促迫。正宜汲汲厲志。日親書冊。忍竆餓簡出入。以收桑楡之功。而副平日父師之望可也。不當以秋風老鶴無冲霄之氣自諉。而又虛度了方來之日月也。此皆吾所未能而感吾弟之美意。僭有所云云。殊甚可愧。然不以下體而棄葑菲。則是區區之願也。今年凶歉。甚於前年。貧家何以爲生。可閔可歎。然無恒産而有恒心。惟士爲能。常使志節激昂。不以十口飢餓之患。而陷於苟賤卑汙之域則善矣。志士不忘在溝壑及竆視其所不爲兩語。爲左右誦之。而亦以自勉焉。未知如何。
*送族弟善餘從學密庵序
古人有言曰。人之學也。不志其大。雖多亦奚以爲。夫學有大人之學。有小人之學。大人之學。義理經術之學也。小人之學。章句詞章之學也。從事於義理經術者。不徒裕於己。而亦有以及於人。從事於章句詞章者。己且不裕。而可以及於人乎。夫自身心性情之近。遠而至於齊家治國平天下。自灑掃應對之微。大而至於窮神知化。本末兼擧。體用咸周。此所謂義理經術之學也。其視尋章摘句。屑屑以纂組爲工者。其大小不亦遠乎。世衰道微。先王之敎不行。士之志於大者盖寡。而爲詞章章句之學者皆是。甚者則又拾掇陳腐之餘。務爲聲律對偶之文。以規取科第。幸而中一夫之目。則志滿氣得。自以爲平生一大事已了。橫行閭里。以誇耀於婦女兒童之目。其不得者。又摧沮戚嗟。若秋草之遇霜焉。而不知恥。於是而有一人稍有志於所謂大人之學者。則羣聚而笑之。或譏以釣名。或詆以行怪。甚或目之以雜術。使不得比列於人。噫。士生斯世。其自立亦難矣。然此非獨笑者之妄爾。亦爲學者之過也。何者。今之學者。務外而不務內。求名而不求實。其號爲自守者。必爲崖異迂僻之行。而不趨於平實。號爲通博者。或竊先儒已陳之說。以文其言。論天人性命之理。無不信口騰舌。而考其行。則反不如彼詞章科目之人者多矣。是固無以異於昏夜穿窬之盜。而猶欲以學者自處。則彼之笑之者。亦奚足怪哉。余之再從弟慶錫。亦有志者也。去年冬。以親命從梧臺李丈學。讀鄒書及大學或問等書。今年冬。又以命赴函席。晨則告別。余扣其篋。卽近思錄數卷。將以是往質焉。余謂李丈。乃葛庵先生之子也。文章學問。最得其家傳。則其於大人之學。必熟講而有得焉。而近思錄又周程張諸先生之格言至論。而紫陽朱夫子及東萊呂先生。相與編次者也。天命之微。人事之顯。格致誠正之方。修齊治平之要。俱在於是。此卽所謂大人之學也。士而無志則已。士而有志於大。則非是書何讀。而非李丈誰從而講之。今君之所從學及其所讀。皆是也。吾復何言哉。吾之所欲言者。惟篤志而不懈。立脚而不撓。先以近思二字。爲學問之要法。而無務外求名之失。始不爲世俗之所變易。而終見信於世俗之人。以無負父師之望。而卒爲大人焉。則幸矣。余科臼中人也。曩者。亦嘗從葛庵先生。蒙敎督之恩甚至。而志懦氣弱。不能自奮。至于山頹之後。益以汙下。無覬於少進。其終爲小人之歸。而得罪於師門也昭昭矣。今於君之行。不能無愧且羡焉。君歸之日。若以其書紳之餘及之。則余雖頹懶。亦庶乎其有警。戊子陽月下浣。序。
이인환(李寅煥)1686(숙종 12)∼1732(영조 8).
본관은 재령(載寧). 자는 도중(鞱仲). 호는 농와(聾窩).
밀암 이재이(李栽) 의 第3子.
제산 김성탁(金聖鐸). 강좌 권만(權萬) 등과 교유.
옥천 조덕린(趙德鄰) 으로부터 가학을 잘 계승한다는 평을 받았다.
行狀은 대산 이상정(李象靖) 撰
제산집
輓李韜仲
我作哀歌送故人。故人何之之九泉。九泉之路何茫茫。自古去者無一旋。嗟嗟此別永訣耳。令我惻惻傷歎起。故人自是大家人。葛翁之孫密翁子。我昔丱角拜先師。請說錦陽全盛時。凾丈巍然星斗表。諸公列侍鸞鵠姿。滿庭少年摠瑜珥。就中韜仲頗俊異。行年與我較二歲。駑駘不敢望騏驥。尙記先師賞識言。此兒他日成偉器。喬嶽一摧羣玉碎。忍見法門値衰敗。西山遺緖在九峯。絳帳再闢遺墟東。維時韜仲獨在傍。幹蠱持家繄誰功。父沒尤見孝子行。撰德裒文條列定。愧我拙斲無重輕。枉承屬托負至誠。顔回屢空操瓢簞。孝章多憂豈永年。三載勝喪若有扶。一疾溘然朝露先。妻子孤村守破屋。一女又聞隨風燭。雙劒同歸萬事畢。悲風慘憺號松柏。大賢家世竟悽凉。錦陽自此長寂寞。嗚呼錦陽寂寞何須說。哀彼靑孀黃口無所托。
박사수(朴師洙)1686년(숙종 12)∼1739년(영조 15).
본관은 반남(潘南). 호는 내헌(耐軒)·내재(耐齋).
대사헌 필명(弼明)의 아들이다.
1714년(숙종 40) 생원으로 참봉이 되고, 1723년(경종 3) 증광문과에 장원급제하여, 1727년(영조 3) 승지가 되었으며, 그 이듬해 대사성이 되었다.
그뒤 다시 대사헌·영남안무사(嶺南安撫使)·대사간을 거쳐 판결사(判決事)가 되었는데, 이때 영조의 명을 받아 송인명(宋寅明)과 함께 신임사화의 전말을 밝힌 《감란록 勘亂錄》 찬수의 명을 받았다.
그는 왕의 뜻에 따라 송인명과 함께 탕평책을 주도하여갔다. 뒤에 그는 당인이라고 하여 《감란록》 찬수의 일을 사직하고, 대신 조현명(趙顯命)을 중용할 것을 청하였다.
1731년 황해도관찰사 이후 평안도관찰사와 1738년 예문관제학을 거쳐 호조판서를 역임하였다. 우참찬으로 재직하던 중 죽었다.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그림에도 뛰어난 재주를 보였으며, 특히 죽화(竹畵)에 능하였다.
시호는 문헌(文憲)이다.
제산집
*答朴判書 師洙 書 癸丑
曠歲違拜。瞻詠靡歇。卽日秋淸。伏惟廵宣台候起居萬福。春初。伏蒙遠垂記問。玆又意表。荐承耑札辱訊。惠以十笏陳玄。海西距嶺南千餘里。苟非閤下高義不遺舊民。尙置比數中。其何以眷眷至此。顧碌碌愚賤。無有以堪承厚意者。拜受感激之餘。還切悚愧耳。聖鐸將母粗遣。寔荷遠庇。惟是自上誤聽繡衣之言。令道臣勸駕南士二三人者。而如聖鐸萬萬無似。亦忝其中。惶慚隕越。罔知攸措。方呈書本府。陳暴不敢當之實。未知將來竟復如何耳。政遠末由承敎。伏紙增慕。歲暮天寒。伏乞爲國自愛。
권만(權萬)1688년(숙종 14)∼1749년(영조 25).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일보(一甫), 호는 강좌(江左). 아버지는 두굉(斗紘)이다.
1721년(경종 1) 사마시에 합격하였고, 1725년(영조 1)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728년 정자로 재직시 이인좌(李麟佐)의 난이 일어나자 의병장 유승현(柳升鉉)을 도와서 반역을 꾀한 무리들을 진압하는 데 공을 세웠다.
1746년 병조좌랑으로 문과중시에 을과로 급제하였고, 병조정랑이 되었다. 정조 때 창의의 공으로 이조참의에 추증되었다.
저서에 《강좌집》이 있다.
0 제산집
*雨後東泮。與朴見卿 龍相,權一甫 萬。同賦。
飛花落絮傡漫空。雨霽長安四月風。白岳雲開雙闕起。靑門樹暗一溝通。
歸舟尙繫南湖外。客味偏酸太學中。遙憶故山新種竹。淸陰日滿小牆東。
*一甫以余將向金陵。作送別詩。見卿,季實。亦次之。余步其韻。留別。
楊花渡口掛雲㠶。賈客蘭槳首尾含。芳草色連郊外路。早潮痕上水中巖。
飄颻轉覺鄕心苦。浩蕩渾忘世味醎。安得數君同此去。臨江賖酒典春衫。
*伏閤三日。終不得呈疏。一甫作七言律。以道其憤慨之懷。余步其韻。
一封天閤欲誰因。進退虛勞趁卯申。將謂聖朝無蔽塞。寧知血悃阻昭伸。
忠言兩疏留遺草。公議千秋待後人。爲報銀臺諸內史。陰崖何處不陽春。
*京城旅館。次朴懷英,權一甫長律。二篇
甲第朱門似海深。操竽不可况操琴。由來白雪元高調。今世皇華摠俗音。
共是倦遊嫌紫陌。誰將薄宦負靑岑。會須攜手歸東洛。流水聲中得子心。
憐君落拓氣猶豪。高翥騷壇一羽毛。病渴馬卿空白首。詩竆杜老秖靑袍。
浮榮不是干吾事。大雅終須賴爾曹。江左一編驚俗眼。怳如河伯望洋濤。
*次權一甫西江待舟韻 時余先至金陵送舟。邀見卿,季實,一甫三君。
風靜西洲水緩流。故人江上爲誰留。滄波極目佳期晩。應向潮頭問小舟。
*次韻。寄權一甫。
仙郞直宿近天河。漢署猶遲玉輦過。雨灑禁城秋色淨。月高宮樹露華多。
官聯已卜儀鴻漸。文彩爭看列宿羅。獨有江潭枯槁客。十年相憶阻風波。
*一甫聞余曾擬於廬江上作亭。而名之曰攬秀。爲賦一絶以寄懷。余又次之。二絶
天涯長對海山靑。楚客竆愁鬱未醒。可笑廬江準擬計。幾時歸去結茅亭。
匡廬山色夢中靑。忽得新詩病眼醒。火急報君先結社。他時分我一孤亭。
*答權一甫書 戊午
將出海之際。已料親舊中。必有吾兄若允卿兄問字。獨未卜從者之在京在鄕也。及登岸。長牋果入手。滿紙討悉。有若覿面承款。感慰忻暢。何可容言耶。卽日秋氣稍冷。謹問侍下起居如何。坐榻在百柄芙蕖上。淸香滿身。而膝一張瑤琴。對月揮絃以自娛。世間復有何樂。可代此者乎。千里興懷。只自悵悒而已。纍人今日所蒙。實是夢寐所未到。伏讀疏决時孝理爲治之聖敎。不覺中心感激。涕淚暗流。雖使纍臣子孫世世隕結。豈足以仰報萬一也耶。六月晦日撤圍。去月初二發行。待風十餘日。以十二登船。十四夜出陸。而瘴海危喘。觸傷熱濕。水穀兩道。或秘或泄。絶粒委頓於康海之間。又十許日。廿六。始力疾前進。晦日達配所。餘證蟬聯。至今往復。形神換脫。較海外時益甚。苦閔苦閔。老人手書。諭之以感祝天恩之意。骨肉親戚。無不以賀語相貽。此纍意况此時當如何。而但聞臺章峻發。連啓不止云。此亦意料中事。飄飄蹤跡。不知終何所止泊。然凡百已付之於命。奈何奈何。初到本縣城中。問近古謫居人。則吏輩言玉龍山下葛厓洞。有尹正言所居處 尹卽孤山 云。而師門謫居時事則不知也。盖吏輩皆非舊故人。不及見丙丁間事。而尹老則凡所到處。必有亭榭布置之跡。故雖遠而尙流傳之耶。所謂葛厓。卽葛隱之互稱。而未知其誰爲本號也。聖鐸初欲居玉龍洞。人亦有勸之者。及聞主倅及吏輩之言。則皆以爲玉龍水土。雖勝於邑中。而猶不如蟾津。且客裏資活之路。大不及蟾津云。盖玉龍在縣北二十五里。蟾津在縣東北六十里。而鄕便往來遠近。較七八十里。不得已舍玉龍而來蟾津。蟾津。卽岳陽下流也。江山亦勝絶。魚稻之饒。足可支遣。而水泉不甚惡。又聞此中人言。則上洞有李判書謫居之舍尙在焉。盖於丁丑年中來寓云云。未知師門自玉龍又移居于此耶。果爾則尤爲幸甚。但此身貽累師門。來託遺芬之所。適足爲羞辱。私心痛恨。不但俛仰之感而已。玉龍自此去。有一條山路。僅容徒行可三十里。病狀若快愈。則欲圖一往撫玩遺躅。而姑未卜早晩。耳庵,南潭元韻。聖鐸不記起。雖欲續步。而難於作語也。後日若賜書。未可錄示耶。邑宰姓名崔晠云。而以武人。故不甚以色目相外耳。風土豈島中比。但無士夫可晤語者。或有來訪者。皆晉陽人矣。姑射仙人之水不濕火不焦。雖不敢望。去年爲瀛州山下客。今年爲方丈境中人。亦可謂有宿世仙分者耶。好笑好笑。書中勉諭意固厚矣。然表率鄕人。扶救世道。自有其人。豈爲世大僇者所敢當耶。鄕變不勝駭然。來諭皆正當之論。然如纍人者。何敢發一口。干與於其間哉。餘書不能盡。
休官家食。誠爲快適。猶望趁此閒靜時日。毋但留精於琴詩篆籕之間。而益加肆力於承前啓後之業。如何。狼狽竆途者。非所敢言。而慕用素至。不覺發外。幸諒之也。岳陽卽面號。而其中舊有岳陽樓。今廢。又有所謂洞庭湖。而今爲乾澤。又有君山瀟湘之名。而瀟湘水源。有斑竹云。此甚異也。兄昔年嘗東踰楡嶺。縱遊於東海上。此雖無眉老遺蹟。亦有葛爺徽躅。未可一來遊耶。若不能爲。作一歌行送之。無聊時欲一諷詠。以敵洞庭秋色耳。湘江上。又有姑蘇臺,寒山寺云耳。月初許正字德稱。攜丹,晉士友若干人。往遊於雙溪神興之間。歸路歷訪。誦其所爲詩一律一絶。今漫錄呈其一絶。君山西畔岳陽樓。海外茫茫更九州。最恨湘溪流不盡。楓林長帶古今愁。
*答權一甫書 癸亥
春夏來。鄕信固闊踈。縱時一有之。彼中又益遠。無緣收得近耗。每切瞻歎而已。今於家便中。獲承三月三日書。末後。又有燈夕追告者。披復以還。暢此幽鬱多矣。感戢感戢。第審以喘急胃短等證。起居欠安。年來閒居養靜。外患之所不入。而乃有此疾患。何也。愛慕之誠。貢慮殊不淺。書出後。恰踰兩朔。未審炎節。靜履若眷集。復如何。纍人命頑不死。遽闋服制。殊方節物。忽已屢變。終天罔極之懷。逐時增深。奈何奈何。前書鄙說。非敢爲景文左袒。亦非謂學者不讀經書。而專用力於程朱書也。區區淺見以爲以道理本體言之。則固有源而後有流。以學者求道之序。則古人不曰沿流而泝源乎。不然。程夫子何不以易,詩,書,春秋。爲初學入德之門。而曰。先大學。次論孟。次中庸。而後讀六經也。朱,呂二夫子。何爲裒輯周程張文字。纂近思錄。以爲四子之階梯也。退陶老先生之節要朱書也。亦曰。聖人之敎。詩,書,禮,樂皆在。而程,朱稱述。以論語爲最切。然今人之於論語。但務誦說。而不以求道爲心者。爲利所誘奪也。則使學者。感發興起。而從事於眞知實踐者。舍朱書。何以哉。由是而旁通直上。泝伊洛而達洙泗。無往而不可云云。古語曰。衆言殽亂折諸聖。又曰。不敢自信而信其師。夫程,朱,呂三夫子及我退陶先生。非聖賢之徒乎。後學之所當折衷而尊信者。非三夫子若退陶先生乎。其爲學者。指示門路次第若是其分明。而今足下乃曰。先讀六經。次讀四子。又曰。學問之道。不必先看洛閩書。是何與程,朱,退陶之訓。大相戾也。洛江梢工之喩。浩瀚縱橫。令人眩掉。而不知所以爲對。然亦有所不然者。居於太白,潢池者。固順流而達于金海。本在金海者。欲求洛水之源。則不得不自龍塘而上泝。未知以何術。舍下流而超然驟到於穿川鹿門之上也。恐無是理也。以道學擬之。生知安行之聖。卽居在潢池者類也。生來坐在源頭上。順水而行。沛然自在。固其勢也。自中人以下。皆居在金海者類也。不涉其流。則不得其源。觀津河豐以上。固有淺狹多石。不易行舟者。然亦在其人立志之如何。苟有意於必竆源頭。則雖淺揭深厲。分寸沿泝。何不可之有。又何不能達之足慮耶。順流者。猶有褰裳捃挑之辛苦。則泝流者。獨不可喫耐此辛苦耶。若其無志。則遇險絶處。畫而不進。順流泝流者等耳。何擇之有。大凡讀書爲學。先其易而後其難。始於明白而入於深奧。則門路不差而工夫簡省。若不屑程朱平易明切文字。而直取上古灝噩簡奧之書。率意輕讀。則雖白首兀兀。唇腐齒落。吾恐其於句讀文義。亦有所不通。况進於此者乎。是故。漢魏以來。諸儒從事專門之學者。如梁丘,王弼之於易。公羊,穀梁之於春秋。毛,鄭之於詩。夏矦之於尙書。用力亦勤矣。無論其道理。卽其文理語句。往往誤讀而錯解者。不止一二。得洛閩諸夫子之出。然後六經四子之旨。煥然復明。今之學者。若無諸賢注解。則雖欲讀經。得乎。由此言之。濂洛諸書。豈可以爲末後之事。而不汲汲讀之乎。但不可舍四子。而先讀此也。景文之意。亦豈出於此耶。若左右本意。爲末世文辭之煩絮。而欲挽回典誥爾雅之風。則鄙陋有不敢容議。至以爲學問之道。必如此而後。爲得其序。則恐先後倒置。階級錯謬。此子游末也本之則亡之言。所以見非於卜子者也。願足下。幸勿以死自矢。廓開城柵。延納芻蕘之言。以爲求助之地。如何如何。景文爲人。誠今世所不易得。學問見識。已非我輩人。將來進步。未可量也。幸兄時時往復討論。以輔其仁。亦資其相長之益。是區區之望也。韓,王,曾文字勸讀之意甚厚。然聖鐸實非其人。前頭有何收用。此正足下任也。幸勿推諉於他人。而益肆其力。如何。朱全集覽。决非昏謬孤陋所可容手者。今欲付呈。而又値陰雨之日。恐有沾濕之患。故又未果。早晩兒子還歸。可得追付耶。多少所懷。雖百幅牋。亦難盡攄。姑此呼倩不能一。
*答權一甫書 甲子
前後鄕便。遠近親舊書非不多。尤於兄書。心目爲之開豁。而自前夏以來。情問一不至。觖望之甚。或慮前日鄙書辭語唐突。有所觸忤也。欲一書以卜盛意之如何。而每緣酬答浩穰。含意不遂者久矣。前月兒子之行。忽承惠牘。滿紙縷縷無纖芥之嫌。而皆出於眷念之至意。乃知君子包荒容受之度果如此。而鄙陋之妄料爲可愧也。卽日春序已闌。陰雨頻數。謹問此時。省餘起居如何。區區瞻仰之誠。不能須臾弛歇也。纍人病殘悲苦之狀。固無足言。而罪戾危喘。頑不溘死。生年甲子。居然一周。回顧平生。有何足道。往者。旣不可追。來者。又無以補復。終不免爲荒江一竆死之鬼耳。浩歎奈何。家累之來會。勢出於不獲已。而前冬宗孫之來。賴其所資錢。買得荒田數畞。躳自課僮僕借人力。墾作水田。今可種稻。若使雨露不愆。秋成有望。則雖老婦供饁餉。兒輩操耒耟。亦竆人之分。何歎之有。但恐竆途百事。率多不如意。斗水壺漿。亦自有分安。保其前頭。不爲魔兒所敗壞也耶。六經朱書之辨。來諭所謂學問不外乎六經。四子及六經註解。皆程朱之言。若眞用力於六經四子。則雖不讀朱書。而朱書便在是云者。皆至論也。而繼之曰。何必讀汪尙書,留承相,臺端詹帥往復書而後。謂之讀朱書哉。此其語意。似若以朱書義理。止於此數書所論而已。不知天命人事之精粗本末。學問先後緩急之序。無不具於一書之中。而其開示也明白而易曉。其論辨也詳密而無憾。使學者。感發之速而易得其門路也。比之六經四子之簡奧深眇。其功效有不同者。以老兄之聰明才識。又嘗涉獵大全節要等。首尾於此。豈有所不察者。特高明之所主而爲論者。在於文章。樂經書之古雅。而以朱書爲後世繁冗之文。不肯留意俯讀。故苟爲此言以禦人爾。若景文之論。又專主於義理。而不屑屑於文章。則宜乎與高明所執。每言而相違也。如賤陋固知兩家之論。卒未易同歸。故頃答景文書。以爲此論異於儒釋之辨。不必苦口角勝。有損於和敬遜讓之道。景文又移兵於我曰。文章之流弊。不下於釋氏之害。而一再爭衡之餘。便欲鞱戈偃旗。堅壁退保。則恐有以擁兵逗撓。議其罪者。纍人本不足與論於其間。又有所不敢者存。而偶一開口。東敗於齊。西困於秦。是乃自取。尙誰咎哉。然景文所執。終不可勝。老兄亦且斂兵。勿與之爭。如何。來諭云。近世學者。爛習朱解者。成就勝於漢之諸君子者。有幾人哉。此誠然矣。然世之爲文者。自童稚之日。讀易詩書。至于白首。而其能爲先秦以上文章者。亦幾人也。我東方自文昌以後。以至於今。以文名家者。不勝僂指。然有一人能追配於朱夫子文章者耶。以義理言之。則朱書之於學者。易於得力。如景文所言。以文章言之。雖讀六經四子古文。非可容易爲也。纍人不願景文從事於古文。惟願高明且留意於節要十編也。聞高明近有著作。論四七理氣。此雖未易言。竊願一賜錄示。以開平生迷惑也。又聞老兄近爲下鄕士友。作一石刻文字。鹿門亟稱其有法度。李公燮。亦以爲當今金石之文。惟一甫其人云。近世文章亦幾於不振。何幸今得吾子也。聖鐸於文章。直是盲聾之於聲律丹靑。然亦願一得玩焉。未可因便令侍史錄示之耶。
*答權一甫書
松石齋舍僧。持家書而至。得拜兄在虎院中所賜書及廬江泛月諸詩篇。兒子書中。又云承欵於院齋及水閣寺。種種欣快。無異覿面輸寫。使天涯牢落之懷。頓覺豁然。但廬江之遊。昔年從鹿門翁。果有此樂。而俯仰十年之間。已成陳迹。今聞足下與深之光天輩。又作此遊。而與退陶先生濯纓之遊。適同其月日。風流興致。唱酬詩什。比吾輩之遊。事事俱勝。恨此身落在荒陬。不得同如許盛遊也。爲之悵然。久之信後已踰數旬。伏惟解釋院任。歸臥山中。省餘燕養之趣。益復閒適矣。士安章陵之拜。令人拍悅。然渠則從當以大科進。恨無由讓而上之耳。呵呵。纍人三月中。再經吐瀉。衰殘氣力。易陷難復。而見今齒痛往復。食物漸不得如意。右邊腰脾之痛。本是積年所患。而比來尤覺益苦。坐臥行步。皆有所不便。至於眼目昏暗。精神健忘。一日甚似一日。以此忽忽無久長之意。時時諷孔文擧長寢萬事畢之句。蘇子瞻生老病死符到當行之語。以自遣耳。然人生受命於天。本與草木禽獸有異。而循省平生。無一事可以少稱最靈之名。此爲可愧可悲耳。景文許往復事。聖鐸之所云云於景文者。非謂兄之曠度。有所芥蔕於景文直截之論也。但在遠者。未及知兩家往復罷休已久。只憑傳聞及兄與景文前後見辱長牋。認以爲爭論尙爾。遂不無過慮。盖自古論議之間。常始乎和而卒於激者。往往有之。此多由兩家子弟門生之各有所尊。各主所受。輾轉乖張而然。是不可不念也。且如兩公所爭。本不用多言。以文章言之。則六經古而朱書今。爲文章者。孰不以六經爲主乎。兄之論是也。以義理言之。則六經簡奧而難曉。朱書明白而易入。古人不曰善學者。如攻堅木。先其易而後其難乎。景文所執。恐未可爲非也。若以文章義理之輕重。比而論之。則義理重而文章輕。二公之論。其初固各有所主。而歸趣是非。亦不難辨。彼此不必苦相猗角。故有所云耳。理氣說。亦因景文書而知之。景文豈孟浪者耶。兄何諱秘之至此也。發於景文者。不欲以示於聖鐸。豈兄之交誼有淺深而然耶。聖鐸本狹中。於此不能無介介耳。兄每以聖鐸筆翰著署之拙。鄙斥之。人生榮辱竆通。自有大數存焉。豈區區一署名之巧拙。所能致然哉。果爾則兄之地位身名。已極乎隆貴大亨之域矣。何止一郞潛而已耶。好笑好笑。此則戲爾。聖鐸實欲改之。而終末能協意。奈何。兄試爲改送。則敢不承用耶。泛月律絶。忘拙和呈。而從忙遽中出。益彰其陋。第觀其意可也。
*答權一甫書
秋晩江潭。氣候憀慄。悄坐空館。無人晤語。但聞蘆葦篁竹之間。寒聲蕭瑟。懷鄕慕徒。百感棼興。欲自遣而不可得。此際。辱書入手。縷縷諭告。無異對面披抒。大滌我愁寂之懷。故人之爲賜多矣。敢不拜嘉。且審比來。堂候康寧。齋居讀易。趣味靜專。慰仰之餘。又深歎尙。下交相從數十年。每歎兄才稟超絶。氣宇豪爽。非流輩可及。而第於吾儒家事。不肯數數然爲之慨惜者。非一日矣。今於晩暮之境。乃能回頭轉脚。留意於聖經賢傳。以探討理氣本源爲事。此豈人人之所可及哉。古之文章之士。方盛壯時。志氣非不偉然。及其衰也。不頹然自廢。則或不免流入於道釋。如兄之斂華趨實。沿流遡源。年雖邁而志益勵。盖古所罕聞也。頃見允卿令書。自言方讀易經及啓蒙書。雖未能通曉。而頗有味云。聖鐸心竊喜幸若有得然。今又聞兄究心大業如此。夫以二兄之聰明篤實。苟無意於此則已。若少加意焉。其進也豈可以暮大局之哉。吾黨實與有幸焉。嗟乎。流落荒廢者。不幸而不得從二兄後。拾掇其緖餘也。中庸疑義。理會儘詳密。見解儘超詣。讀書如此。然後可以有得。此又非鹵莽滅裂膠固膚淺者所敢與也。乃欲以是欲俯詢於蒙陋如聖鐸者。則恐兄謙虛之太過。而非所以求講論之益也。然鄙意竊瞷兄才太高氣太銳。究索太過。其於章句或問。少沈潛厭飫之味。而微有別立己見之意。區區更願賢者於蒼雪先生謹守成說之訓。服膺而勿忘也。如何如何。然聖鐸之此言。以兄之英發俊邁。或不肯遜志。而近於智者之過。故過慮而云云爾。非欲學者讀書而全不致疑也。讀書有疑。必有箚記。以爲講討之資。古人之所嘗爲者。幸兄勿以鄙說因噎而廢食也。兒子以不逮之見。重違見示之意。有所反復。可謂僭率矣。然其所以爲說一遵章句或問之本義。而不敢違。故幸無大病敗。然其間亦豈無紕繆處耶。兄之所推借太過。非渠所敢當也。聖鐸近來神精益消亡。眼昏且甚。細字不耐久看。盛錄略綽一閱後。不復致意詳讀。故今便不敢效愚見。容竢後日耳。
*答權一甫書 乙丑
新年以來。鄕便一再還往。而每苦酬復。繁委精力。有不及一字附候。闕然至今。居恒歉歎。月前家兒之來。手畢遠辱。縷縷見諭之意。令人暢豁感戢。何可量耶。徂玆色憂。曾所未審。今承翔櫛復初。侍懽佳吉。不勝慰賀。纍人自添一齒。衰朽益甚。氣血精神。殆無以異於七耋以上人。頹惰放倒之極。無復彊勉收拾之望。此生將如此而止耳。浩歎奈何。中庸疑義。高明獨見。超出常情。固非賤陋所敢容議。然旣蒙投示。義有所不敢自外者。且爲因此求敎之地。略效妄見於各條之下。而當初只於片紙。信筆胡寫而已。兩子病且奔走。傍無倩手。久未移錄。故迄未得送呈。今因來敎。始爲寫呈。而卒卒未及再勘。其間無論義理文字。言語亦必有生硬不成樣處。照覽後更賜裁諭。以爲反復之階。如何。讀易箚疑。亦甚欲奉玩。早晩不靳惠示。則何幸何幸。但此中無易傳。恐無所据以究明者所疑之如何。然經文及本義在焉。必賜一投。使昧者得有所開發。切望切望。聲韻考正序文。兒子錄來。得以奉讀。而聖鐸於音律。素所昧昧。三四讀。茫然不得其端緖。恨不得致身坐側。扣問其大略也。所謂考正上下卷。若得奉覽。則或幸有以窺見其一斑。而未知左右肯出手中否耳。和古詩十九首。意寄深遠。詞句亦逼古可諷。而往往使羈旅竆阨之人。感慨歔唏。不忍屢讀。若左右。可謂深於詩者矣。餘神氣倦困。艱草不盡所懷。惟祝當暑自愛。益加韋編之功。
別紙 論中庸疑義
第一條。夏葛冬裘。隨時而異其服。以一歲言之。則葛不可用於冬。裘不可用於夏。似非常久不易之道。而要其久而言之。則夏之必葛。冬之必裘。豈非萬古不可易者乎。以此推之。則湯武放伐之擧。爲時中而不可易者。可知。旣不可易則是乃平常之道也。
第三條。子思專言天命之理。而章句兼言形氣。使人知天之生物理氣妙合而凝。未有無氣之理。亦未有無理之氣。天旣以陰陽五行之氣。成人物之形。則形氣之中。莫不有理具焉。是豈非天之所賦之理乎。故曰。氣以成形。而理亦賦焉。而字亦字下得甚精。恐不可易。木齋所謂理便具者。固善矣。而但於命字之意。似不相貼。家兒之論似得之。
第四條。此條所疑。見得極精。或問曰。天命之性。萬理具焉。喜怒哀樂。各有攸當。方其未發。渾然在中。此則以在中之理而言也。今但曰。喜怒哀樂。渾然在中。則語意不若或問之完備。誠有可疑者。高明所謂喜怒哀樂。情也。纔說此便不是性。惡可說渾然在中耶者。可謂深透性情之界限矣。歎服歎服。然其曰。渾然在中者。亦喜怒哀樂未發之意。讀者以或問之意。活看可也。若以其有些可疑。而直斥以爲非朱子說。則恐未免率爾之責。如何如何。
第五條。朱子所謂戒愼恐懼。不須說得太過者。特以爲學者持敬工夫。只是略略收拾。不令心放出而已。若將戒愼恐懼四字。認得過重。用力太過。則恐未免拘束之病故云爾。非謂聖人與天同德。無事於大煞操存之意也。如何如何。其他家兒說。或可見擇耶。
第六條。呂游楊之說。其可取者。朱子於或問中。已稱之。若其失經旨。而爲朱子所非者。後學姑舍之。而篤信朱子可也。何必多愛雜取。而終歸於擇不精之病歟。
第八條。愚以爲中庸首章。有三節。首言天之降衷。道之循性。聖人立極之事也。次言由敎而入者。如此而後。可以不離於道而復其性也。末一節又申明上兩節之意。盖中者。卽天命之性也。和者。率性之道也。而致中則戒懼之極功。致和則謹獨之極功。至於天地位萬物育。則致中致和之效驗也。高明所謂到位育時。聖人學者所造一般者。固是矣。然學問之功。至於位育。則是亦聖人。何必以聖人學者分言之哉。所引顔子博約一語。於此似不襯貼。
第十條。鶴峯論栗谷語。見於何處。後書示及也。小人之無忌憚者。乃是索性爲惡者。而只以氣質偏駁。見理不明。認非爲是。執拗必勝。爲小人之無忌憚。則其論小人也。不亦太恕乎。君子而未能盡中庸之道者。自夷惠之聖。亦有所不免。今以君子之處不得中者。爲無忌憚。其待君子也。不亦太苛乎。盖君子之所以爲君子。以其有敬愼遜讓之德也。若無忌憚。則何以爲君子。是亦小人而已矣。行踈知透。如曾點之類。是也。然其知處終不如顔子所知之實。故未免有狂簡之病。况自恃資才。居今而欲反古。自高而卑人者。不但行處踈。知處亦未透之故也。此卽王介甫之徒也。尙可謂君子人乎。然謂其弊有甚於無忌憚之小人。則亦恐有茅翁有激之過矣。
第十二條。心猶火也。火之熾也。其焰或直上。或旁出。以其直上旁出之異。而謂之二火可乎。心之或爲人或爲道。何以異於是。心之能察能守。猶所謂屈伸在臂。反覆惟手者。而佛氏所謂以心觀心。猶以臂使臂。以手使手之類也。豈可比而同之哉。至於必使之使字。乃語勢承接之際。輕輕地下得者。非如察字守字之緊要也。又何必致疑乎。心者。人之所以主乎一身以下。卽朱子觀心說。在大全雜著中。詳考此說。則高明所疑。可以釋矣。然高明於此。非不見得者。特欲設疑。以試人所見之如何。區區愚見。想已爲良遂摠知處矣。
第十八條。訥翁所謂中庸,周易爲表裏之書者。愚所未詳。若以義理論之。則六經四子。誰不可謂之表裏。今獨以中庸與易。爲表裏者。未知所指之如何。然觀其以事皆得中。與免於刑戮。相對言之。而遂以爲表裏。則其所謂得中者。恐亦不過以謹厚愿愨。循守塗轍。不爲矯激危峻之行。爲中耳。此豈聖人所謂中庸之道哉。且中庸道理之極致。苟非竆理盡性。無一毫人欲之私。而優入聖域者。不能事皆得中。豈可但以熟讀之功而遽能是哉。周易。聖人所以順性命之理。盡陰陽之變。而示開物成務之道也。豈但止於遇變而免刑戮哉。且免於刑戮。有二說。明乎吉凶消長之理。進退存亡之道。隨時變易。以從道義。而自然不底於凶咎者。君子之貞也。若有心於趨利避害。而苟爲保身之計。則是小人之事也。故朱子於大雅明哲保身之義。解之曰。保身盖順理以守身。非趨利避害。而偸以全軀之謂也。而其論楊雄。所謂明哲煌煌。旁燭無彊。遜于不虞。以保天命者。盖深非而痛斥之。則此又學者之所當明審於心術隱微之間。而不可專以遇變免刑。爲易之道也。且以夫子之聖。至於耳順之後。猶有假我數年。卒以學易。可以無大過之歎。而其讀之也。至於韋編三絶。則以凡人中下之資。雖竆一生之力。專精致力。猶患不能盡究其精微。而今曰兼取而玩占。則其所以用功者。豈不亦草草之甚乎。尙何望其覘得一斑乎。以訥翁之高識。必不爲此見解。恐或出於一時偶然之語。而左右引之也。妄見所及。不敢不陳。如對此丈。試以奉稟。如何。
第十九條。高明則以近世學者。先看朱書。便能於經旨。略見大意。爲可懼。而愚則以爲朱先生於經書。費盡一生精力。開示後學。無復餘蘊。而學者不能潛心力究以求其旨意。下者鹵莽滅裂。不得其門戶。高者橫騖別驅。創出新奇。反失其正意。爲大懼。未知高明以爲如何。
第十二條。柳州與呂道州論中書。未及見。而其祭呂溫文。有曰。幼雖好學。晩未聞道。洎乎獲友君子。乃知適於中庸。而爲道不謬云云。旣曰適於中庸。而呂,柳二人不免爲小人之歸。則或問云云之說。亦可知矣。
第二十四條。高明每以學者之於經。略得大意。無心得之功。爲看朱解之過。豈與景文論朱書之本色。往往透露處耶。然學者之無得。而踐履不及於古人者。此自學者不善讀朱書之致。豈因朱解之詳盡而然哉。且以呂矦諸子之英才。遊於二程之門。親受其旨訣。而其於經旨差謬。往往如彼。若使今之學者。不得見朱子之解。則將擧世盲瞽矣。又安得見其大意乎。雖不能心得而能得其大意。不至於呂矦諸子之錯看者。豈非朱解詳盡之功耶。
第二十六條。如申徒狄,於陵仲子之徒。豈非所謂刻意尙行。驚世駭俗者耶。此卽過中之行。而君子之所不必行者也。
第二十七條。兩端之說。朱子以呂楊爲優者。以其所謂執兩端而權其輕重。以取中者。比之程子之說爲優爾。若朱子之意。以或問言之。亦未見其以過爲一端。不及爲一端。而執此兩端以用中也。觀衆論不同之際。止有以知夫無過不及之在此。而在所當行一段。則其意與章句無異同。家兒亦未及察此。而云呂,楊兩端之說。或問因之耳。經書之義。至朱子而後大明。程,張諸賢。往往不免有失照管處。程子此說。朱子旣載之或問。而不以爲記誤。則今何必曲爲諱之耶。
第二十九條。中庸不可能。程,朱則以爲人所不能及之義。而游,楊二公。則以爲中庸之道。當行其所無事。不當有能而有爲也。此豈非老,佛空無之緖餘乎。不待見其全文。而亦可知其語意之異於程朱矣。但游氏所謂其斯以爲舜。則絶學無爲者。果未詳其旨義耳。
第三十條。子路於君子之四強。雖未能及。而夫子盖嘗許之以升堂。則今以爲僅得爲北方之強者。無乃太低看乎。若以下方所云學問未盡醇。氣質未盡變稱之。則斯爲當矣。
第三十四條。德者。得也。人之所得於天而屬乎善者。皆可謂之德。則勇亦豈非性中之德乎。以人性之大綱言之。則雖不過仁義禮智。而以造道成德之事言之。則非智不能知。非仁不能行。非勇不能強。聖賢立言。各有所主。何足疑乎。書稱湯之德曰。天錫勇智。豈可以此謂湯不足於仁義禮耶。第二十章曰。知恥近乎勇。以此推之。則勇於五德中。近於義者似矣。而不必屑屑分配也。且勇雖性之德。而比五德則似兼氣質之性矣。如何如何。
第三十七條。忠者。盡己之謂。恕者。推己之謂。所謂推者。卽推其盡於己者。而及於人。是待己待人皆一也。豈非所謂不相離者乎。若以忠爲十分事。以恕爲一二分事。則其所謂恕者。非推己之謂。而待己待人二道也。以此看忠恕之義。則安得無惑於不相離之說乎。高明旣以十分責人。爲非忠恕不相離之義。而又曰。看朱子非忠不能之說。然後悟得忠恕相須之義。愚未知盡吾之所當爲。而以是及人者。與施諸己而不願。亦勿施於人者。果有異乎。施人之恕。非忠不能。則盡己而推之。以十分責人者。豈非所謂非忠不能者乎。高明之說。上下不相應。豈偶失照管耶。抑愚見未及歟。其曰。如以孔子所謂某未能者及人而勿責是恕也一語。則又似近於或問中所譏以父君兄友爲絶句者之誤。而其所謂恕者。將不免矦氏所云使天下皆無父子君臣之譏矣。此固高明初見之失。然亦不可不卞故云爾。
第三十八九條。旣曰恕只可施於人。不可施於己。又曰。竆阨之不能理遣者。以理排抑。而委諸命。近於恕。是又恕己之謂也。何矛盾之若此也。若夫所謂恕己。則百事無一是。及夫忠之極處是誠。恕之極處是仁云者。皆至論也。
第四十一條。此一條推說亦好矣。然孔子所謂四未能者。盖以責人之心責己而欲盡其道耳。如所謂以己之所未能者責人及所謂以是恕己而又以恕人者。皆非本文之義也。何必駕說至此哉。且恕字以如己之心爲義。則其不可施於己者。高明已言之。而猶曰恕己而恕人。竊恐未安。
第四十六條。所疑不順乎親之順。與父母順矣之順不同。見得甚精。然爲子者能順於父母。則父母順之矣。要其歸則一也。或問中。以呂說爲詳實。而於其引不順乎親之語。無勘正之論者。其亦以此也歟。順卽安樂之意。此等處。恐不必過爲分別。如何。順是安之之義。而樂記曰。樂則安。以此言之。樂字於順義。未見其侵過一位也。樂則有心。順則無事之意。愚未能領會。
第四十七條。祭祀之鬼神。卽與天地造化之屈伸。一氣耳。陳氏所謂就無所不包之鬼神中。拈出祭祀之鬼神者正說得。使天下之人一節。未見其非是。而高明則疑人鬼之與造化之屈伸不同。而以其說祭祀事於此章爲硬。家兒則疑陳氏之以陰陽屈伸。爲一般鬼神。以祭祀者。爲一般鬼神。而謂之無理。皆過矣。使字。學者要思得之。非言說所能盡也。
第四十九條。一童子墜木。而廟主脫櫝事。若實有之。則儘恠異矣。世間如此等。不可以常理推知者。往往有之。要非竆理之至。何以信得及耶。然孔子不語怪。朱子亦曰。鬼神死生之理。定不如世俗所見。然又有其事昭昭。不可以理推者。此等處。且莫要理會。聖賢猶且云云。則以學者凡下之見。何必勞費精神於不可測知之事耶。少差則浸浸入於誕妄之域矣。如何。
第五十一條。此上條所論。可謂得謝氏所云。以爲有亦不可。以爲無亦不可之意。而且曰。爲此詩者。眞得視不見。聽不聞。體物不遺之情狀。其於鬼神之洋洋。如在之理。若有會也。而反有疑於前一節使字之義。何也。且於下段以人物之鬼。謂非陰陽屈伸之鬼。則又似於鬼神之理。猶有未及了然者。可怪可怪。但以屈伸二字求之。則知所謂鬼神者。無大小一也。
第五十二條。此條所疑。非但解釋文義有未安。以文王之無心於伐商爲無憂。則武王乃有心而伐君者耶。天與人歸。不得已而伐之。武王何嘗有一毫經營伐紂之憂哉。家兒則以高明此解謂之新奇。而聖鐸則深惜其好奇立異之過一至於此也。
第五十六條。室有東西廂曰廟。無廂而有室曰寢。而寢在廟之後。複廟者。或問小註。所謂上下重屋者。其義自明。何必以後寢前廟幷之。而謂複廟耶。若然則謂之前後重屋可矣。何必下上下字耶。且後寢前廟上下同然。何以曰天子之複廟重檐。諸矦亦不得爲耶。太廟及羣廟。各有門垣。而又於其外牆宇四周。羣廟在其內。故曰外爲都宮。
第五十七條。天子七廟。諸矦五廟者。常數也。商之三宗。周之世室。非常數也。周之九廟。幷文武世室而云爾。豈可以此而陞諸矦之廟爲七耶。且古者天子有世室。而諸矦則無之。獨魯有文武世室。似爲僭禮耳。我國士夫之祭四代。以古禮言之。則固似爲僭。然同堂異室之制。異於隨世各廟。而干祫及其高祖。亦古禮之所許。故程子以義起之。而家禮因之。我國士大夫之祭四代以此。然國朝五禮儀。士大夫不過祭三代。故退陶先生以前。士大夫往往祭三代。今則擧國無不祭及四代者。豈以諸賢講明家禮之效歟。天子世室。不在七廟之常數。則私家不遷之位。亦世室之類。旅軒所謂不遷之位。何可幷數於祭四代之數者。似爲確論。沙溪所謂因不遷位。而奉高祖位於別室者。有不敢知也。
第六十條。旣謂之社。則祭地可知。而所謂里中社。祭後。以其飮食。爲之燕樂。故陳平爲宰。而分肉食耳。
第六十一條。天理人道。一也。知人道。便是知天理。知天理。便是知人道。若如高明之說。則孔子只云思事親。不可以不知人而已。何必又云思知人。不可以不知天。有若先後次第之可分乎。高明之病。每在於喜立新意見。故往往有此等見解。此朱子之所深戒者。幸望遜志退步。專心玩索於朱子之訓。而切勿爲橫騖別驅之意。如何如何。古今才智之士。其失多在於此。竊爲高明惜之。
*答權一甫書 丙寅
家兒來。旣承至月廿二日所惠長牋。又於子婦諺書封中。得小牘追寄者。前後見念不遺之意。可謂至矣。奉讀感歎。不能釋手爾。彼時侍省諸節。固已欣審。而伊後歲月已換。不審承懽起居若眷集諸致復如何。想惟迓新蔓福。遙慰無任。纍人此行。固非意外。罪戾奇竆之人。何所不有。但絶島。異於陸地。鄕路倍覺杳然。兩子之外。雖至親。有不能率意相尋者。而一弟年衰多病。相會無期。嚴程之日。妻子分離。至今寓泊於中途。眞東坡所謂一家分作四處住者。人之竆厄。畢竟至此。還可笑歎。所幸。天恩罔極。不至復作海外孤囚。此島雖四面皆海。風土姑不覺甚惡。民俗雖貿貿。亦不悍戾。若使身無疾病。調度不至艱乏。則亦可以隨緣自遣。而所閔者。海路阻絶。陸地未易相通。島中則絶無人士可與語者。獨一二謫客及流寓之人在。然負罪者有相從之嫌。寓人亦幾混於島人。誰復與披襟破寂者。日夕只與兒子及隨來學童二三輩。兀兀相對而已。兄諒此况味苦樂。果如何。况乍到適逢新歲。孤露之感。羈旅之抱。遲暮衰落之懷。一倂來萃。而去臘過讎日。此月又先忌。客中情事之罔極。尤復如何。兄後書中。以聖鐸之寄子婦書辭太淡。不詳島中凡百爲訝。試略言之。島距康津邑治九十里中間。有所謂馬巖津,古今津。皆人語不相聞處。必爇火後可以喚舟。而少風則危不可涉。島之西北。卽古今島。東南。卽靑山島。而莞島則在島之西南間。三面海與山相間重阻。而獨東一面。茫然遠開。雲水之外。但見大小島嶼錯落點綴。一如畫圖中。眞無邊之勝觀也。每出門頫望。便覺胷次浩蕩。但恨不得左右鉅手模寫。以敵其勝耳。島人言。春夏間。東南風起。則海濤粘天。聲如萬鼓砰磕。咫尺語不相通云。今姑不知其然。而令人已覺愁亂。海氛瘴濕之毒。亦可推度。此非老境抱疾者所可堪耐。然若不如此則國家豈使重罪處之哉。秖得死生任之而已。相望邈然。此後一字德音。亦難必期。臨書黯然。惟祈侍奉自愛。慰此遠誠。
0 江左先生文集
*留別金敬伯 聖欽,振伯 聖鐸。兼示昌言 謩,成甫 萬 二弟。
先師葛庵先生棄承學。已十有八年。而官銜還給之命。累降累沮。當宁卽位之初。特命復官。又爲黨人所尼。金敬伯振伯以當日及門之賢。受南中長德諸公之戒。緘章西上。二弟昌言,成甫實與之俱。盖將以暴己巳而辨甲戌也。不佞有疾徑歸。逆旅分張。意緖黯然。遂以近體一律留別。
先師本意在扶倫。二䟽忠謨質鬼神。玷玉蒼蠅敺不得。照盆白日見何因。
諸賢自盡生三義。聖主方推視一仁。應識此行伸積欝。歸時花暖嶺中春。
*送金振伯歸川前
靑巖四月晩花馡。水綠沙明白鷺飛。千古河南三絶在。瑤琴一曲送君歸。
*巖亭。送別金振伯趍肅丹城之命。
春風五馬去朝京。病裏彈冠貢禹情。不久春坊求正士。肯敎章紱滯江城。
鳧舃何時發漢京。終南淸渭有餘情。割雞不害牛刀用。佇見絃歌化武城。
西辭明主出秦京。日暮烏林反哺情。穩擧板輿綰左綬。古來榮養貴專城。
*金振伯登第後。上親製詩一絶以榮之。誠曠世恩遇也。謹賡二絶奉賀。
天門引入戴花人。宣賜奎章寶墨新。當世王褒應有頌。爭言聖主得賢臣。
慶溢天東由一人。周邦雖舊命維新。擧觴敬爲朝廷。賀賀得春坊勸講臣。
*沈丈東野家。訪金振伯。振伯請賦卽事。
靑門沙徑幾回來。賢主佳賓茗水杯。滿院香風吹不斷。獨憐牕外有殘梅。
振伯請暇歸覲。以詩贈別。
朝辭明主出彤闈。夢裏陶淵指日歸。晩迹難憑紅藥步。遐心偏引碧蘿衣。
仙游峽口黃魚上。處士碑前白路+鳥飛。 滿袖淸風挽不住。 故山回首思依依。
*直院月夜。有懷金振伯。
雲豕前宵去渡河。晩來風雨颯然過。天街月色中秋逈。禁籞更聲午夜多。南土連年無菽粟。故人何處避矰羅。歸鴻杳杳碧空盡。回首蟾江生素波。
書
*與金振伯
校中十日之會。雖在敵愾靡盬之中。同堂甚喜。別後覺有多少戀懷。天氣凄凜。屋上生霜。此時侍省餘學履何似。錦陽超除。枝谷特原。天恩罔極。直欲排閶闔自謝。顧無路耳。昌言欲趁五月七日。前往貴所。弟亦約與偕進。受伯父稿序引於錦里。仍與僉契爲陶淵打魚之會。未知無魔障否。
*與金振伯
日昨。得朴見卿書。始知從者入海纔還。宿昔。言弟送示來書。其中半以下。檢擧鄙人處非一再。披翫若對。豈勝傾慰。第審有侍率搬寓之撓。是深奉慮。錦哀眼眚非偶發。雖聞已用草木之滋。然以不安之心。强忍作輟。何能責效耶。但聞狀草斷整。托屬得人。此可以安心而少紓其目力。何幸如之。來書以此事奉托。非專出於韜哀。而越咎鄙人兄弟。在執事自欿之意。無恠其愍然有不敢當之憂。然其在于今。知此老如執事。能言此老事如執事者。有幾人哉。如是而先發分謗之語可乎。願執事從早草定。使大君子德美有所考信。則斯文之幸也。八風之喩。令人大呵。然恐或未諒本意也。僕平生果從八風騰露處作家計。故儘有許多尤悔。及其閱歷世變。鼻吸釅醋。則其磊磊落落之氣。已减得八九分。而稍稍有殘風向陽之意。此古人佩韋之意。而若執事則大是雍容醞藉人。以如是姿地。少帶得激昴奮發底意。則於究遠業承大事。大段有力。所以欲撥而置之於高明爽皚之域。非欲使之措身立脚於僕向日所立八風騰露無依據之地也。如此說則亦不害爲執事佩弦之美。而執事不此之思。何處得八風字。對待殘風字爲說。汲汲於理會科斗而無一毫翕受底意思。君子亦如是乎。且僕向日之言。欲令從者爲孔淵之遊。而或慮其不能勇决。所以將殘風向陽等說。爲激發之地。而從者被世累纏繞。不能自拔。則乃欲掩護淟汨。不曾就事論事。却把安身立命處爲說。是在僕爲問種樹而得養生之說。幸則有之。執事之意。無或近於口給耶。昔者竊聞之。仁者樂山。智者樂水。是以仲尼有農山之觀。元晦,欽夫有天柱之遊。夫農山可以望吳門。天柱可以俯湖海。則非不嵬然爲八風騰露之地。而觀水觀山。不害爲助發仁智之一端。則聖賢亦爲之。何嘗作八風騰露事看耶。早晩幸一遊孔淵。登蓮花瞰東溟。則僕雖不足爲農山之回。而亦足爲天柱之林。擇之也。聞方伯造門執禮而去。此時此事。實非偶然。但聞廟堂諸公。過聞執事之名。或比之管葛。好事者傳相倡說。此則非好消息也。執事文雅修飭。實非流輩所可及。而重厚崇深。不及先輩。使執事不幸遭向時先輩嚮用之會。則其力量規模。恐不及先輩數等。敢願益加工程於開物成務之地。無使名實不相副。則朋友之幸也。然自聞方伯參尋之報。爲執事者反覆揣量。則殘風向陽。不害爲今日安身立命之地耶。戱言實談。參互間發。想爲之一笑也。
*與金振伯
萬家禍罔極。叔母奄忽不淑於仲父中祥之夕。哀慟摧裂。尙復何言。卽者。胤君來致慰問之語。哀感無已。况審太碩人體候近獲康寧。小車乘春。相羊自適於廬阜花石之間。極令人馳神。萬海鷰身世。來尋舊巢。感目之事非一。而昌言一春愁懾之中。畢竟折其孫孩。所係之重。傷惜之情。豈凡殤所可幷言耶。韜仲妻兒捲入海上。自此一哀無可洩之地。秋來。欲趁其墳草未宿。操文一酹。然亦何可必耶。密翁遺集。訥丈非不致力。而終不若有主人提起。近仲雖難遠來。宜以書訴其情事。請速整頓爲有力。如有聞韶便。以此書諭近仲如何。宣城風色。至於火書之說出而極矣。聞道百便欲突過先輩。將厓,鶴以下諸儒謹記之書。率意刪沒。毫無顧忌。如萬棄物。亦有時拊枕。况任世道之責。抱世道之憂者。宜如何爲心也。長牋緣紙乏。今將本稿付去。覽後還擲如何。書末幷錄二詩。此亦昔年所作。與此牋之意相似。有違前書言詩俱戒之意。還用愧汗。
*與金振伯
碇開舟已發。此去何時來。萬頃滄波去却回。夜半掛席聲。此心難自裁。此歌者自歌耳。而昌言言前夏花府時。左右已聆此愀然。此先心而定命也。今夏揭厲之夢。漫不省悟。黃柑之夢。是從者責橘柚鄕之兆。而此不善解。遂失握送之便於一日之間。前後相負。實愧秦城七旬之義。尙復何喩。在鄕時。季通歸自海上。送書於僕。日昨入城。從子成所得從者到泊後家書。中間坼封。極知不可。欲知過海凡耗。未免率爾犯手。心畫宛然無異平日。獨無一言半辭及於身上。是爲悁懣耳。近能行不須人否。島中無痘患否。素患之道。非所仰勉。而此爲切憂。欲以藥料送備不虞。而乍到不能拮据。僅以砂糖辰砂裹呈。藏以待用如何。下鄕後兩馬連斃。不能往哭川前。然聞太碩人處之裕如。謂早晩相見。在吾加餐匙箸。比前頗健。益令人感歎耳。島中無書籍。何以度日也。朝著如前。上候平安。此外細鎖。非逐客所宜聞。玆略之。
*答金振伯
大旱之年。例有䟽决。霓望旣切。此禱暗至。而䟽决之例。自有差等。亦不料其恩移越例。處以內地也。沛典纔下。甘霖捷應。歡聲遍野。士林同抃。况高堂感祝之心哉。去晦。傳姪自府遞齎致四月十三日書。並示出陸之報。披書三復。忽不知越絶之恨。誠欲奮飛相會於登之日而不可得也。狎吏當以月初入海。南風正長。船路方駛。一帆過海。直瞬息間事。以今而思前詞所謂萬頃滄波去却回者。亦吉讖先兆也。下陸果在何日。見到後况味何如。水土風俗。視濟島何如。粼近守宰有可以聊賴者否。退甫書言康海間多痘。經過之際。政有觸犯之慮。然姑射仙人。沉水不滋。入火不焦。區區伯强。豈足爲灾耶。晞陽是師門播馥之地。葛隱一區。有蹔寓不偶之句。從者棲息之所。想不離玉龍洞一壑。其遇境嘯詠之際。恐不可無庵南潭三䪨之續和也。但念晞陽距鄕里。直五六百里。全釋淹速。又未可預料。首路夷猶。知有尙遠庭闈之歎。然處地旣非絶島之比。罪名又與在棘時有間。恩許歸養。特次第事。想亦有以自寬也。聞從者在島之日。太碩人猶親匙箸。謂子母重逢。在吾健飯。况今情境視曩差降。自愛之道。想亦有方。願從者亦努力强餐。益親書冊。以副慈闈之望友朋之期如何。縱不能進用於時。表率鄕鄰。救得一分世道。非高明加意處耶。萬再送旬狀。期於必遞。十年屛廢之蹤。得蒙朝廷記念。再入脩門。累覲耿光。三載三調。粗伸分義。若復盤桓。易致灾咎。所以决意休官。退伏巖廬。鳴琴嗅荷。庶幸無尤。不意鄕象潰裂。憂虞溢目。流丸未定。未遇甌臾。苦事苦事。千萬書何能悉。惟希珍重。
*與金振伯
中秋書。月前始傳到。滿紙辭意。不啻若相對穩討。忽不知山川之隔道途之遠。何令人傾慰也。旋聞有河魚之灾。退甫倉皇趨覲。傳者又言所苦非一時邂逅之症。似是瘴毒爲祟。馳念之切。日有憂歎。前書捨龍取蟾之意。勢固然矣。且得岳陽寒山形勝之詳。使人飄飄乎有荊南越中想。雖無盛速。實有一鞭往從之意。而前年喪馬者再。無計致身。年來又杜門簡出。便作坐偶。無遐擧遠遊之意。甚矣其衰退不能振也。德稱詩姸圓可愛。甚欲次䪨奉贈。而非猝乍可辦。至於長篇大作。非手分所可能。平生又未嘗一遊其地。雖欲下筆。無以狀得其形勝。奈何。間從兒姪輩。得高明所爲詩。如六噫等作。甚有作家聲。想於岳樓登賞之餘。必有感物之興。如范希文所云。早晩不惜投示咳唾之餘如何。廢却吟詠。亦自不惡。然自古流落之人。多吟蘭詠杜之什。爲消憂遣興之資。特不爲怨詞足矣。况歌頭徹雲。得愛君美題目。子瞻所以有汝州之移也。若有意爲此則不可。至於處江湖而憂君自發於聲音韻律之間者。又何可一切不爲也。瀛洲方丈宿世仙緣等語。足見高明氣分未全低處。如僕者平生有毗盧峯想。而昨年見擬關幕之首。却輸籌別人。則不可謂之有仙緣。若於高明在蟾之日。得佐湖幕。庶有一晤之階。而在人者又何敢希覬耶。書末勉勵之語。誠感不遺之盛意。但此鼎器已破。無收拾盛住之望。恐終爲小人之歸。貽羞於朋友。奈何。日昨些有不愜於心者。使一僮抱琴。袖携國語一兩冊。步往孤山。與訥翁語。晝則講魯語齊語若干編。夜靜人散。鼓平調數闋。訥翁亦不以迕意。昨日爲祭月浦翁。罷還耳。朴見卿哀詩。無足送浼。其起語云停琴發長喟。喟罷淚如雨。會心無一事。身世日孤踽。憶昔癸卯春。我輩京口聚。醞藉有川翁。之子特高古。其下歷叙金浦舟行時事及久別之恨。末云或流爲孤囚。或化歸鬼簿。結語忘之耳。此詩草本。不記納處。不能謄副。可恨。聞調度極窘。而此亦家家匱乏。無出力相周之望。可歎。墜露落英。自是湘上人活計。亦奈何。
*答金振伯
七月書。披翫已十回。顧無由更接音書也。秋序向盡。行吟中起居何如。川庭向有胃氣之症。旋卽平復。豈非天佑耶。此中月前。掩宗子之坎。萬事已矣。鄕鄰長老知此子者。頗有誄文以哀之。執事雖在牢愁中。幸無惜數語塞悲也。來書出於旣望之翊。豈於書發前夕。作泛舟之遊否乎。想亦有望美人天一方之句。恨不能得見也。茁浦丈言左右戒勿向僕道洞庭如杯君山如丸。但道所見勝似所聞。是左右欲使僕牽動湖山千里之興。作天涯團會之資。其語則可笑。其意則可感而又可悲也。但僕出無驢馬。秋來又病右臂。左脅不便運動。已無鞍馬出入之望。雖使洞庭君山不讓巴陵。亦沒奈何矣。似聞朝著一變。未的事端所由。人得人失。無關我事。左揆再昨年。雖不能力爲左右地。亦未見有時宰待子瞻意。放還之期。自此愈似杳然。每讀來書萍蹤無止泊之期。對西景心折等語。爲之愍然。
*答金振伯
得書。爲一喟然。天涯變服。已非人理之所堪。况再昨爲卽吉之日。其號呼莫逮之痛。尤宜如何也。今年癘疫交熾。金仲鴻,金得輿之歾。俱係不幸。至於金顯甫父子之同日殞命。直欲籲天而不可得。此豈但德門之所關而已哉。恬靜博雅。謹守前烈。求之嶺中。豈復有此父子耶。惜哉惜哉。與景文向來交書。鄙意本爲文章繁絮之弊而發。欲令一世英材如景文及賢胤退甫等輩。先用力於六經四子。以立其根基然後。方看洛閩諸書。以達其歸趣而已。若夫問學上次第。豈如僕流放者所敢妄論耶。然學問之道。亦不必先從洛閩書入頭。何則。先從洛閩。雖無門路差誤之患。於思索工夫。太似任便。必也先讀六經。次讀四子。凡有疑義。以己意反復窮究。閱歷許多辛苦不快事。然後始取程朱書。以證吾說之同異得失。方是實見得而體驗有力矣。僕近閱中庸。到鬼神章以下無中庸語意處。忽不知此書之爲中庸。且於訓詁之間。若有不能盡當於心者。反復數回。有稍稍覺悟處。而其終不能覺悟。亦多有之。及取或問書參考然後。前之疑者十去八九。信乎朱書之不可不看。然先看中庸。後看或問。次序固然。今之學子往往先或問而後中庸而可乎哉。夫六經四子源也。洛閩關建其派流也。從源達派。似難而實易。泝派窮源。似易而實難。今人皆泝流而逆上矣。以洛江梢工言之。掛帆金海龍塘之口。順風泝上。斂楫整梔。歌笑中流。不多日。到尙州大津。自謂無難及。檜洞以上。湍益駛而水益不盛。則已落帆持楫。左右撑過。轉懽作愁。河豐以上。多石而不可舟。則已便回棹矣。况石浦穿川黃池發源之地哉。僕嘗聞造舟者之言。寫材於黃池。左右山水淺則箇箇浮下。褰裳持捧。碍則捃挑。備閱無限辛苦。歷穿川鹿門之險。過夫麓眠。則已束筏鱗屬而下。到宣城上下。便刳剖成舟。待水浮下。水盛舟駛。不擧帆而自有沛然之勢。特遇灣曲。用楫略棹而中流自在。達之金海而無難。何則。順水也。今僕旣不能褰裳穿川。又不能掛帆龍塘。凡江水橫帶處。僅窺一二。而皆凌躐而得之耳。是以景文輕我。援枹賈勇。有一戰遂有之志。天王雖甚衰微。其言則順。特不能命將出師耳。向者嘗求助退甫。勉以桓文之事。而退甫不肯。今高明又却爲景文助勢。寡助多助。亦因材之理如此耳。訥門難易之說誠確論。然此亦就方進自畫者所占地位而論之耳。若直下不得不措。人一己百之工。則難者豈不能到易底境界。而蕭瑀之馬。一向蹇躗。末由追躡阮于之塵。則一進一退。終亦止於商賜而已。奈何。僕之前書。欲使從者讀韓碑王,曾文。正以前頭有受用處而言。如僕者雖倒誦此等書。盡得其體裁。何用焉。景文非但文章贍逸。其言論風旨。决非流俗。昔年嘗向我鍼砭病處。能箚得心術隱微之會。使人發汗沾背。是他於心學上有實工而然。非騰口之言也。僕於景文。其愛重欽服如此。今書所云回棹梢工。非指景文。實汎論俗弊之語。蕭,阮,商,賜之歎。亦恨其不能追躡而發。非欲以蔑裂之工。突過頂上而然也。
*答金振伯
昨年重午書。至今稽復。愧愧甚甚。卽日行吟中况味何如。八年湖外。又見降生之年攝提重回。能不悵然以感也耶。且念賢內子往從之後。似不免有接濟之撓。心地淸凉。恐不如在天際孤庵時也。天旣使吾兄作一頭陀。備甞無限苦行。而乃接引婦人。作維摩室解禪之天女何也。爲一喟然。聞退甫以旬後往侍。以定省之暇。雇田作農。爲奉養二親計。恐非失計耶。中古以前。凡責逐之士。官給粮料。蘇齋珍島之日。地主受柄臣旨。凌窘備至。以粟換米。而猶不廢給糧。未知此法廢於何時。而至使士大夫子弟躬執犂鋤也。可歎。前書累數千言。義理明白。辭采爛然。反復諷玩。足令昏者有開發之意。其中中人以下。皆在金海者。一轉語尤切而有味。敢不服膺焉。但僕之初意以爲才俊如李景文者。其於朱書用工已深。更取六經四子。熟讀而有得焉。則爲文章。尤似簡切而免煩猥之弊。以學問言之。亦不外於六經四子云爾。是其意欲先六經而後朱書。非以朱書爲不可讀。而景文大煞費力。致令此說流入於高明之耳。示以入德之次第。曰朱書當先讀。賜則有之。非所以諒本情也。梁王公糓毛鄭夏侯之云。似矣而有不然者。之數子者。出於程朱之前。各以其說談經。故固不能無舛錯傅會之失。然近世學者爛習朱解者。其成就勝似數君子者。有幾人哉。六經非朱書。而其註解皆程朱之言也。學者若眞用力於六經四子。則雖不讀朱書。而朱書便在是耳。何必讀汪尙書,劉丞相,臺端,詹帥所往復書而後。謂之讀朱書哉。納欵之餘。又發拗言。高明將視我以榻下之孫皓矣。呵呵。曹幼淸事蹟。係是先亭故事。後更咨示。亦一事耶。
*答金振伯
五月初吉書後。連見退甫書。可知胃氣已回。腰脾齦齶等症。節次就平。慰仰不已。但前書中所引孔蘇二公語。何其悽惋之甚。與晦翁答儲行之書中語意象不侔也。景文要見高明答此間書甚切。故因便送示其答書。深服其文贍義正耳。春間閱中庸。有所疑碍。輒箚記。將以送質座下。夏裏虎溪之行。先以示退甫要砭勘。渠果一一批示。其見解甚精。後輩中有此等人物。眞是可畏。但此無心得於渠說。但見其是當。未覺其紕繆。故不敢有所違覆。今又因渠索還。並其珠櫝而還之。是渠意欲呈似鯉庭。故請幷送鄙說。盖無鄙說則於渠說。或似有領會不得處故耳。非敢以兩說訟得失而然也。近又讀易。亦隨見箚錄。未及脫藳。早晩當續呈請敎也。理氣說。是景文枉聽。如有之。豈敢相秘耶。
*答金振伯
此際退甫見訪。詢得春來動靜之詳。一慰一唏。春分已過。日氣一向凄陰。遙想洞庭君山之間。濁浪排空。無景明佳色。其何以度日也。中庸疑義。聞有辨破文字。今番何不錄寄也。讀易箚疑。書在休紙。上經數十卦說。散失殆盡。今不能錄奉請敎。日後當補記送去也。八則陽生說。甞聞朴丈天柱氏語。知錦陽先生有所爲說。而文集不載此說。座下果記其大槩耶。雖無前聞。幸自爲說相示如何。訥翁則依總目中六十四卦圖說去。謂少陰在八陽上面。是陽生之證也。淳伯及景文。却以訥門之說爲不可。景文依河圖三八木在陽方者爲說。此則恐非恰當之論。如何如何。年來有若干著述書在小冊者。縱不能遠以奉浼。退甫來時。甚欲勘定。而渠有眼疾。不喜看文字。不能一一取質。可歎。知渠謄出數件文字袖去。可資閒中一粲耶。聞朝家軫灾。分遣審使於八路。謫客䟽放。亦節目中一事耶。僻居無聞。堪可鬱鬱。
*與金振伯
六月於石亭。得四月十七日書二封。又得疑義覆示者。披復再三。怳如親聆音旨。忽不知山川之阻道途之遠。何等欣瀉。萬素患腹暑。每夏輒作。五月初。趙友弘燁以其先澗松翁集至。遂同訥爺入文山之小庵。未卒業而移棲石泉。六月中旬。始得究竟。繼而諸兄弟以爲先祖十年日記。先父兄盖嘗留意傳謄而不遑。失今不圖。後難整頓。遂刻期移書。請訥丈讐校。又於性理羣書。大學衍義。朱子大全。春秋胡傳左傳等書。紙頭卷面。得考疑互證文字。逐一傳書。亦不下數冊。合而編之則可得六七冊。早晩擬自溪院鋟梓。而不但事力不逮。今之世與曩時不同。玆事之成。未保其無齗齗之口。只得凈書一件。藏之舊篋。第請訥翁作跋語。切願高明亦爲一語以張之也。此事直至秋夕方了。訥翁以旣望始還舊廬。此老操几百餘日。益見其氣象和厚。心事平易。柔中有剛。雖和不流。其眼目旣大而且精。求之古昔。實寡其倫。但僕坐在春風四閱月。躁戾之質不化。正所謂下愚不移者。媿媿。似此多事。疑義所覆敎者。捲置一邊。不能再繹。今不記其說話何如。而湯武平常之云。近於科儒揣末答問之例。如此爲說。無乃太昆侖欠界分耶。庸,易表裏之說。訥翁之意。以爲士君子得力於中庸。而取六十四卦。觀變玩占。語默不妄。則庶幾寡過云爾。至於刑僇之說。亦有意而發。非謂易之道僅足以免於刑僇之云也。此外多少。當俟再閱後續報計耳。八則陽生。來書上欵說好矣。而其引揲蓍法。恐非本旨。訥翁亦以爲欠似襯貼。因萬敦請草出小說。方忙不能書呈耳。葛庵集。每略綽看過。故未見其載八則陽生說。高明所云。豈草本在眼而云然耶。聲䪨非吾儒急務。何必遠浼崇聽。暑月攷校之役。頗費心力。前症闖發。跨秋愈甚。其苦可言。然炳燭殘工。不宜間斷。待新糓登塲。擬携周禮。請學於訥門。盖周禮大海也。巨浸之中。無物不有。誠天下壯觀也。三十四十之年。何故不窺其涯涘。屬此白首殘年。始刮昏眵而欲涉其流。其亦可笑而可哀也。退甫中庸說。曾懇並送。今却秘之何也。後便送示之意俯及也。
황정(黃晸)1689년(숙종 15)∼1752년(영조 28).
본관은 장수(長水). 자는 양보(陽甫). 예조참판 이장(爾章)의 아들이다.
1717년(숙종 43) 진사가 되고, 1719년 춘당대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723년(경종 3) 정자·지평이 되고, 같은 해 진위사(陳慰使)의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1724년 정언, 1730년(영조 6) 수찬·교리·동부승지를 역임하였다. 의주부윤에 이르러서는 변방의 병영을 다시 정비하여 방비를 굳건히 하였으며, 그뒤 우부승지·병조참지·예조참의를 거쳐, 1739년 대사간이 되었다.
그 뒤 안동부사로 부임하여 유학을 크게 진흥시켰고, 1749년 호조참판에 올라 동지 겸 사은부사(冬至兼謝恩副使)로 다시 청나라에 다녀왔다.
이듬해 해서기보균세사(海西畿輔均稅使)가 되어 몸소 배를 타고 다니며 어염(魚鹽)과 배를 살피면서 세금을 고르게 부과하여 두 지방의 세입(稅入)이 줄어들어 위로부터 질책을 들었으나 원망하는 백성이 없었다.
그뒤 형조참판에 전임하여 부총관을 겸임하였다.
1751년 함경도에 큰 흉년이 들자 조정에서 염근(廉謹)한 그를 관찰사로 추천하여 병마절도사·수군절도사·순찰사를 겸하게 하였다. 함경도에 부임한 그는 경상도의 곡식을 실어다 빈민을 구제하고, 농기구와 소〔牛〕 등을 나누어주며 농경을 장려하여 북방의 백성들이 떠도는 것을 막고, 이도(吏道)를 쇄신하다가 임지에서 죽었다.
북방의 잦은 기근과 유망민(流亡民) 때문에 고심하던 영조는 그를 함경도관찰사로 임명하고는 시름을 놓았다 한다.
제산집
*司馬會。次韻。奉呈黃明府 晸。
峴首輕裘返。爭吟太守行。光華修稧席。平易近民情。
愛日臨歌扇。仁風入酒觥。今辰如不醉。何以樂昇平。
김진하(金振河) 1689(숙종 15) ~ 1756(영조 32)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대숙(大叔)
조부는 태중(台重). 아버지는 정석(鼎錫)
*聞族姪大收 振河 上來
同宗誰不見念深。感爾偏多卹難心。顔遠一詩知有激。柳州當日謾沾襟。
남국주(南國柱)1690년(숙종 16)∼1759년(영조 35). 영해(寧海)
본관은 영양(英陽), 자는 하중(廈中), 호는 봉주(鳳洲).
조부는 남상소(南尙召)이고, 부친 남필명(南弼明)과 모친 전적(典籍) 정요천(鄭堯天)의 딸 동래정씨(東萊鄭氏) 사이에서 6남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형 남국섬(南國暹)과 동생 남국문(南國文)·남국성(南國成)·남국광(南國光)·남국규(南國珪)이 있다.
재능이 뛰어나 20세에 이미 시로써 이름을 날렸다. 일찍이 과거에 대한 뜻을 접고 평생 배운 것을 몸소 실천하는 학문에 힘썼다. 또 제자백가서(諸子百家書)는 물론 《주역》과 예학 등에 통달하였다.
현재 영덕군 창수면(蒼水面) 봉주정사(鳳洲精舍)에 재실(齋室)이 있다.
유고로 시문집인 《봉주집(鳳洲集)》이 전하는데, 주목할 작품으로 우리나라 유학자들 가운데 안향(安珦)을 비롯해 문묘에 배향된 우리나라 유학자들에 대해 지은 찬 〈동방종사제선생찬(東方從祀諸先生贊)〉과 주역의 원리와 체계를 기본적으로 정리한 〈역범통록(易範通錄)〉·〈발몽도해(發蒙圖解)〉·〈가례총설(家禮叢說)〉 등이 있다.
봉주집(鳳洲集)
*和金振伯[聖鐸]韻。寄光陽謫所。
圜門長夜數殘㪅。耿耿孤燈照悃明。賈鵩空愁單閼歲。椘纍謾賦攝提貞。
霜飛燕獄寃何極。日暮齊閭怨不平。天鑑孔昭應有感。白雲含恨嶺邊橫。
圜門生出向耽羅。鷁路茫茫海一涯。勝昔涪髭安舍達。仗忠淮楫任風波。
南來家信秋鴻斷。北去羇愁夜夢多。田里放還知有日。量移恩渥喜如何。
晞陽路上雨霏霏。却念先師淚一揮。昨歲呈琅嗟未曝。今辰受玦悵安歸。
空憐鸚鵡懷西返。肯學鷓鴣愁北飛。遙想白雲頻八朘。也應魂夢繞慈闈。
*與金振伯
明時泣玦。自古有之。而左右遭罹。尢令人短氣。居夷節度。必有定力。而其在知舊之誼。未嘗不爲兄危之。旋聞聖主知兄無罪。特下出陸之命。自此。親闈消息。想以時通問。爲之一慰而一嘻之也。况此地乃葛翁所棲寓處。俯仰遺躅。想必有感慨興思者矣。千萬努力自愛。一任舍達惟以古人所以處此者處之。吾兄學力。正要此處受用。又何待區區奉勉也。窃想不以自外至者。累其靈臺。日用之間。多有所論著。頃因士友間。得見瓊什。把玩不能釋手。謹步其韻。漫錄以呈。幸愽愁寂中一粲邪。
권모(權謩) 1690(숙종 16)~1751(영조 27)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창언(昌言) 호는 랑건헌(琅玕軒)
창설재(蒼雪齋) 권두경(權斗經)의 아들
*次表叔權琅玕翁 謩 沿途口占 二絶
晞陽南過晉康州。漲海連天嶺路悠。誰道鄕關千里遠。君今匹馬慰羈愁。
篁林初夜斷人喧。畢昴當簷江路昏。童僕忽驚門外語。故園親戚此竆村。
*病中送琅玕翁遊頭流 六絶
文殊山脉接頭流。山下高人作勝遊。靑鶴洞中無限景。歸來正好一囊收。
誰識蟾江病客愁。年年方丈送人遊。精神不與形骸縶。飛上天王第一頭。
孤雲遺蹟在雙溪。靑鶴高標拂日西。他時會償仙山債。到處先將姓字題。
峰頭冠玉鄭先生。物外逃名錄事亭。遺躅秖今誰不敬。一編相感最南冥。
儒林雪老戊寅遊。傑句爭高方丈頭。今日風流賢子在。名山會見續編留。
湖上蘭舟雙櫓柔。波頭日月尙千秋。花開舊宅今安在。惟有雙溪響碧流。右次鄭先生韻。
*次南雲擧韻。贈琅玕翁。
羈懷黯黯轉難平。行子明朝又北征。千里故園何日到。白雲東望倍傷情。
*答權昌言書 壬戌
家伻來到。又承問札。眷念不置之意。實深哀感。且審起居諸致均勝。是爲仰慰。聖鐸頑喘尙延。而哀苦益甚。病瘁又極。閔憐奈何。所謂蘇老氣節。大挫於十九年珍島者。未知指何事而云也。前輩何人有此論也。孤陋寡聞。堪可愧也。然蘇老事。不可知。自知則甚明。本無可挫之氣節。又有何加意處耶。前書所云。直以見今時勢。有不可以年歲間冀幸者。故竊追援以自寬爾。非有得於委命處順之道也。承諭令人愧悚。釣堤石門。果如所示。則眞可謂遯世藏名者所棲息處。開闢以來。慳秘之地。何以爲執事父子得也。其亦有數存耶。流落狼狽之蹤。無復有意於世路矣。苟使得脫拘縶。則誠願入萬山深僻世塵不及處。釣採以終身。而顧此竆命。將不免終爲白雲山下一編氓。雖欲爲金馬洞主之僕隷。亦不可得。况可望返故里。隨漁舟往尋桃源境界耶。只自浩歎而已。
*與權昌言別紙 癸丑
通錄。實吾東方不可無之書。先雪齋先生所以用十數年之精力。搜剔遺逸。編摩成帙。分門比類。有本有末。使大賢一動靜一語默。燕申咳唾。服食杖屨之節。一開卷瞭然宛然。不知隔數百歲之遠者。其功可謂勤矣。其惠我後學。可謂大矣。廵相所謂東方論語。誠至論也哉。成書已久。人事有變。而鋟布之擧。迄未聞焉。獨於年前。京中有此議。而執事之不送本帙。其爲慮誠愼密而長遠也。聖鐸之忝任虎院也。執事嘗以是屬勉。而聖鐸不能奉行者。非但有畏事之病。亦以一二論議。爲本院鄭重故也。不謂今者廵相發此功德之心。東厓復有主張之意。凡百規畫。已有頭緖。此實天誘其衷。以張斯文。先先生之功。自此益彰明而無所不及矣。甚盛甚幸。第愚意有不得不仰稟者。頃者執事之答東厓丈書也。深以不知者妄出意見。或有所毁動移易爲慮。此誠至當之論。夫以先先生之聰明廣博精密詳審。積幾年功力。而成是書。加之以密翁若諸先輩之磨礲潤色。參之以四方人士之一得片長。其叙次本末條例分合之間。斟酌極其精。裁整盡其宜。則後生淺見。不惟不敢議。亦不得以議之也。然義理無竆。人各有見。以程子之易傳。出於七十之後。而象占卦義。猶有待於後賢之手。朱子之於大學啓蒙。盡一生精力。乃夫子自道而誠意之訓。改正於易簀之日。考變占中一二條。猶不免苑洛陶山之疑。則雖大賢已成之書。容或有一字二字見漏於梳洗之中。無足異也。今此通錄大體凡例。固無以容喙。若夫條件文字語句微瑣之處。安知尙不無偶失照勘者乎。聖鐸年前。因見李希顔錦水取正之帙。疑一條與上文意不相蒙而誤合爲一。言於希顔。又以告於執事。未知尙省記否。近日取錦水所留草本。與鳴于兄共閱。亦不無數處可疑。第未知正本如何爾。又見希顔與其內弟金翼溟書。亦言其中有消詳去取之條。此必有所見而云爾。且執事所慮毁動移易者。卽向所謂大體凡例耳。至於些少合釐正處。亦豈肯固守前本。而不容人疑議也。夫一條件之未盡勘正。一語句之未盡修潤。若無甚害於事。而其於成書。未必不爲大圭弘璧之一瑕纇也。况一入鋟梓。流布甚廣。又且傳於久遠。萬一異日。有有眼目好議論者。妄相指摘於其間。則豈不爲今日之遺恨乎。先先生平日虛心廣度。集衆思察邇言。後生之所欲學而未能者。而今已後矣。區區所疑。無復可以就質。則在今留意於繼述之道。恢聽於衆多之論。一字一句之未安。莫不秤量修改。使東方不可無之書。歸於盡善無可議之地。豈非孝子增餙先美之一大節耶。以此而望於執事者。非獨聖鐸一人而已。未知執事以爲如何。不量輕淺。妄言及此。悚仄悚仄。
*答權昌言書 丙寅
去十月望間書。承拜於入島之初。今又因長兒來。伏奉至月廿二日下問。縷縷示諭。無非眷念至意。奉讀再三。欣感交切。信後歲改。未審體氣茂膺平泰之慶否。邈焉遐遡。無由以時承信。下誠紆鬱。逢新益切。聖鐸身命已竆。罪名且重。今日絶島之行。無足異也。况八年晞陽。飽喫魚稻者。莫非聖明不允臺章之德。而今之得免過海而加棘者。亦惟聖主天覆之仁。白首孤臣。感泣罔極。雖於此畢命。亦何恨哉。所示加罪之際。得配此島。都承宣有力云者。未知果然。而或云出於首相之陳達。果爾則誠是意外。亦可感也。然院啓雖停。而出島之幸。何敢妄希也。數處稽疑。雖由於見念之迫切。然某之禱亦久矣。日者之說。何足準信乎。蒼天在上。秖得安心竢命而已。自到配之後。姑無疾病。長兒以元日來泊。父子相依度日。而學童數人在側。足以供使喚。不甚牢騷。島中風土。亦不甚惡。水味頗好。比耽羅固遠勝。島人言。庚子辛丑間。樓巖鄭相。栫棘于此。以爲海島之善。莫如此島。朝家若知此。則當不令重罪人居之云。此言固不過。然島人又云。秋冬則氣候無異陸地。而春夏。瘴濕非常。又東南風起時。海島如崩山捲地。咫尺人語。不相聞。氣象可怖。若爾則是果放臣逐客之所宜居也。衰病孱瘁者。未知將何堪敵。而畢竟無如之何矣。餘只祝對序增重。以慰遠誠。
*祭文[權謩]
陶山輟響。錦水設科。弘規樂育。攀化者多。猗君弱齡。聞道最早。精言奧義。入耳便悟。超詣之見。篤信之功。不待憤啓。已自融通。豈惟師承。家學是傳。外翁積德。孕出多賢。適庵啓迪。太翁純深。胎光襞美。緹躳繕心。葢君爲學。在平易地。旣孝旣友。曰仁曰義。發爲文章。辭達理勝。沛乎長江。一注千頃。行孚于家。聲著于鄕。迺升膠庠。迺登剡章。俄又大闡。奎章寵錫。纔及唱臚。擢置憲職。歸榮萱闈。花簪豸角。衆口咸慶。君爲兢惕。聖眷至渥。臣敢不死。薇垣玉署。剴切其奏。蛇歲之事。追惟魄裭。有不忍提。亦不敢言。仁天好生。處以曲全。再入鯨海。十年蟾津。先師舊舘。剩馥遺塵。理或前定。事非偶然。復尋墜緖。父子溫理。舂陵往事。未必專美。獨有至慟。與文元似。四載違養。千里歸葬。尙不毁滅。終保性命。素操方驗。義問彌彰。所不能者。漲海嵐瘴。有集于舍。奈彼天廢。文之將喪。邦其殄瘁。嗚呼哀哉。顧我於君。齒差先後。序爲叔姪。義兼師友。君不我愚。每加接引。斯文有事。鮮不追趁。白牛擧幡。同我排雲。玄鼠刊錄。屬君掃塵。自君投荒。落落相戀。于歲庚申。我訪澤畔。晝則對榻。夜與交跖。三旬爛熳。益敦無斁。我北言旋。送至津渡。河梁之別。千古同疚。追思如夢。萬事陳迹。寃深戴盆。天定何日。所賴令子。克紹遺矩。文學行誼。見推儕類。庶或陰相。俾究遠業。琴祥遽迫。我來再哭。一觴永訣。披瀝肝肺。君如不昧。起聽我語。
조현명(趙顯命) 1690년(숙종 16)∼1752년(영조 28).
본관은 풍양(豊壤). 자는 치회(稚晦), 호는 귀록(歸鹿)·녹옹(鹿翁).
도사(都事) 인수(仁壽)의 아들이다.
1713년(숙종 39) 진사가 되고 1719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검열을 거쳐 1721년(경종 1) 연잉군(延礽君: 뒤의 영조)이 왕세제로 책봉되자 겸설서(兼說書)로서 세제보호론을 주창, 소론의 핍박으로 곤경에 처하여 있던 왕세제보호에 힘썼다.
영조 즉위 후 용강현령, 지평·교리를 역임하고 1728년(영조 4) 이인좌(李麟佐)의 난이 발생하자 사로도순무사(四路都巡撫使) 오명항(吳命恒)의 종사관으로 종군, 난이 진압된 뒤 그 공으로 분무공신(奮武功臣) 3등에 녹훈, 풍원군(豊原君)에 책봉되었으며, 이후 대사헌·도승지를 거쳐 1730년 경상도관찰사로 나가 영남의 남인을 무마하고 기민(饑民)의 구제에 진력하였다.
이어 전라도관찰사를 지낸 뒤 1734년 공조참판이 되면서부터 어영대장·부제학, 이조·병조·호조판서 등의 요직을 두루 역임하고 1740년 경신처분 직후 왕의 특별배려로 우의정에 발탁되고 뒤이어 좌의정에 승진하였다.
이때 문란한 양역행정의 체계화를 위한 기초작업으로서 군액(軍額) 및 군역부담자 실제수의 파악에 착수, 이를 1748년 《양역실총 良役實總》으로 간행하게 하였다.
1750년 영의정에 올라 균역법의 제정을 총괄하고 감필에 따른 그 대책 마련에 부심하였으나 대사간 민백상(閔百祥)의 탄핵을 받아 영돈령부사로 물러났다.
조문명·송인명(宋寅明)과 함께 영조조 전반기의 완론세력을 중심으로 한 이른바 노소탕평을 주도하였던 정치가이면서, 한편 민폐의 근본이 양역에 있다 하여 군문·군액의 감축, 양역재정의 통일, 어염세의 국고환수, 결포제실시 등을 그 개선책으로 제시한 경세가이기도 하였다.
당색을 초월하여 진신(縉紳) 사이에 교유가 넓었는데 김재로(金在魯)·송인영·박문수(朴文秀) 등과 특히 친밀하였다.
저서로는 《귀록집》이 있고, 《해동가요》에 시조 1수가 전하고 있다. 시호는 충효(忠孝)이다.
제산집
*答豐原君 趙顯命 書
聖鐸再拜。聖鐸竆鄕賤品。庸陋醜拙。實無毫髮可取。又於明公閤下。地分懸隔。未嘗聞姓名於記室。不謂閤下按道之初。降屈威尊。辱賜書問。且有廵到時臨顧之敎。眷念非常。卑謙太過。奉讀未終。惶汗竟趾。蹙然不知所以措躬也。古之賢公卿大夫。固有下士者矣。然未有如閤下今日之爲者。使聖鐸。果有閭里之稱儒士之行。猶且逡廵踧踖而不敢當也。况其庸陋醜拙。無一可取如上所陳者乎。此不過聖鐸於當世一二名公。偶有遭際之幸。不知其不肖。而謬爲之吹噓。至使閤下之明。亦爲虛聲所欺。以至此耳。夫盜名欺世。於行莫醜。於罪莫大。聖鐸之以名欺人甚矣。欺衆人。尙不敢。况敢欺大人君子者乎。萬一異日獲遂望履之願。而明鑑之下。實狀暴露。則豈但鯫生欺眩之罪。有不勝誅。亦恐閤下位德之尊。不免有輕身以先匹夫之悔矣。惶恧之深。敢此布白。言非假餙。誠出肝膈。伏乞閤下特垂鑑察。繼今以往。但待之以閭巷一豎儒。勿復以非分難堪之寵。枉施於不當施之地。千萬千萬。下惠紙筆牋幅。尤極惶蹙。禮。大夫有賜於士。卻之不恭。固當拜受。而但敎之曰。謹行古人執贄之禮。夫執贄。固古者大夫士相見之禮。而乃卑賤者之所以事尊貴。非尊貴者之所以施於卑賤也。聖鐸若不度禮義。冐昧受之。則在閤下。有過恭近辱之嫌。在聖鐸。有愚僭忘分之罪。以此伏念數日。終有所不安於私心者。故不敢祇受。伏惟閤下勿以爲異。而重加諒察焉。僭率覼縷。惶恐俟罪。
*答豐原君書
日昨陳謝。干冒威尊。自惟慢倨之罪。宜在誅斥之科。而乃蒙閤下大度包荒。匪怒伊敎。辱書再降。恭謙有加。伏讀惶感。彌增踧踖。就伏審秋凉。神相台候動靜益勝。區區下情。曷任瞻慰。聖鐸獲荷恩庇。粗保圭蓽。但下惠之物。聖鐸雖不敏。豈不聞尊者之賜。卻之爲不恭哉。誠不敢以不肖之身。承大君子過恭之禮也。不意中誠未達。不聽還納。其在微分。惶蹙尤甚。然以矦伯之尊。而眷眷於一介之士。至於如此。是特所施者非其人耳。若不於聖鐸。而於其可施之人。則閤下下士之義。誠近世之所未聞也。聖鐸雖千不近萬不敢。豈可復顧猥僭之嫌。而不成閤下之盛美乎。玆敢再拜祇受。佩服光寵。伏惟閤下察此不得已之情實。勿復以非分之禮加之。使聖鐸。得免於士友之譏誚。千萬幸甚。
*答豐原君書
孟冬稍寒。伏惟廵宣台候神相萬福。前月十六日下書。在聖鐸西行後。未卽承領。及歸。迺始拜而讀之。其所以眷眷不鄙之意。視前益隆。不知愚陋有何足取。而前後所蒙被若是濫踰也。感激之餘。且惶且愧。莫知所以措其躬也。聖鐸本科場一腐儒。擧業亦空踈。最出流輩下。老死竆巷。乃其分也。不意今者。齋官謬恩。及於賤品。人雖至愚。豈不自知。環顧平素。實無毫髮行能可以見取於人。而秖緣虛名誤播。上欺朝廷。以至於此。跼蹐慚恐。如負罪戾。去就之義。如聖鐸者。何敢以霽潦寒暖自期哉。特以分義所在。不敢偃蹇。聞命卽行。祇肅闕下。而辭家之日。老母有疾。不離床褥。貪一身之榮。而遠違病親之養。情理已有所不忍。及入城之後。目見痘患熾張。又聞陵所近地。亦頗不淨。聖鐸素不經此患。冒危留滯。有凜於心。故不得已呈遞而歸。此誠私情私勢。俱有所迫而然。有何行藏之可論哉。尊諭之下。但覺愧汗沾背而已。末端下詢。有以見大君子謙虛好問。不遺芻蕘之盛德。傳曰。不在其位。不謀其政。而君大夫問而告者。則古之君子。亦有所屑爲也。聖鐸雖不敏。苟有咫聞管見可以仰副虛襟者。安敢故爲隱默。以負閤下勤眷之意乎。誠以自少鄙鈍闇劣。百事都不通曉。至於當世之務。尤所蒙昧。雖欲敷心腹出意見。以復盛問。其將如之何哉。閤下他日。或親見拙陋之實狀。則可信其不足與議於事務上。而今日所以逡廵不能對者。非敢有所自外而然也。雖然。聖鐸竊聽於道路之輿誦。閤下公而明。廉而有威。公則無私。明則不蔽。廉則自治嚴。有威則下不敢慢。循此四者。而終始不替焉。則是乃王通所謂正身以統下者。而爲政之大本立矣。其於觀風宣化。隨時措置也。何有。感恩之深。不敢終無一言。猥陳瞽說如此。愚妄之罪無所可逃。伏惟察其情而垂恕焉。
*答豐原君書
久不承動靜。瞻慕方勤。不意伏承下書。謹審歲暮竆陰。廵宣台候起居對時萬福。惶感之餘。不勝欣抃。聖鐸將母僅遣。寔荷尊庇。私竊感幸。第書中道體二字。於愚下小人。千萬不倫。不但私心愧怍。無地措躬。使傍觀者。亦指點而竊笑之。前兩書。備陳庸陋實狀。謂宜已入於鑑燭中。見待以碌碌尋常之漢。而今所蒙稱謂又如此猥濫。人豈不自知。誠欲削面竄地。絶影深逃。不復得欺世盜名之罪。而不可得也。此實小生衷臆中眞切不餙之言。伏乞閤下自今以往。但以一老措大待之。俾安愚分。千萬幸甚。
*答豐原君書 辛亥
前者。伏以干旄枉屈。非區區愚分所敢承當。不勝感悚之忱。輒以書自伸。以達躬謝不得之恨。非敢望更煩記室。猥辱還答也。不意盛眷未已。寵翰復枉。拜擎跪讀。感惕彌深。况以聖鐸有老母。分以閩薑異味。不知踈賤何以獲此爲親餽者。義不敢不承。謹再拜受之。然於私心。實有所未安者。是用踧踖。比日旱炎冞酷。伏惟台候起居神相增福。瞻慰之至。曷任下誠。炎氣日殷。伏乞爲國自愛。
別紙
近講太極圖說。朱子解剝圖體中。有曰。五行一陰陽。五殊二實。無餘欠也。陰陽一太極。精粗本末。無彼此也云云。性理羣書熊氏註。以精與本屬太極。粗與末屬陰陽。或以爲氣有精粗本末。而理則不可以精粗本末言。熊氏說非是。愚見則以爲聖賢之言各有地頭。無一定之本。理雖不可以精粗本末言。然此則必以四字分屬於太極陰陽。然後爲得其文義。不然則所謂精粗本末無彼此者。於陰陽一太極之解。闊踈無著落。熊說未見其爲非。後見愚伏集。同春擧此爲問。而引栗谷亦以熊說爲非。以爲太極之理。貫通於無精無粗無本末之中云云。愚伏答以熊氏註固多錯解處。而此則必如熊說。於文義爲貼云。未知閤下於此。曾如何看讀也。伏乞指敎。以破未决之疑。千萬。
*答豐原君書
月前上覆。自知猥僭。方悚息俟罪之際。因府遞。伏承今十三日下書及別紙辨誨二幅。惶感之餘。還復自幸。鄙陋不敏。尙見錄於收敎之末也。第此府。痘患極熾。書滯火焰中。久素有拘畏。不敢到卽承坼。以此未免復稽修謝。悚仄悚仄。卽日陽德肇復。伏惟神相台候福履來綏。區區下誠。不任抃賀之至。聖鐸老母以痰嗽之證。彌留屢日。私情煎迫。有不可勝喩者。精粗本末。無彼此之訓。所示諸家論辨及閤下開釋之意。雖極詳悉。蒙蔀之識。猶有所未盡曉然者。故復以謬說仰瀆。而息山問目兩條。亦以蠡測所得者。附呈下方。伏乞辱垂省覽。而更賜開曉。以發此昏滯之胷。幸甚。抑聖鐸於閤下書末之敎。深有感焉。閤下貴人也。功名事業。旣可以自足。王事民隱。又有所不遑。而乃能遜志敏求。學如不及。其於聖賢之訓。百家之言。旣已探討而講貫之矣。又不足而旁求廣採。以多而問於寡。以賢智而問於愚不肖。如此其懇懇也。如聖鐸草茅閒居之身。無世故之撓奪。有不足之當勉。抱負墳籍。杜門講讀。以無負爲士之名。乃其分也。顧以鈍根下材。懶不自力。悠悠半世。甘自暴棄。卽今犬馬之齒。迫於五十。而卒不免爲閭巷無聞之人。賴天之靈。幸遇我閤下過蒙祓濯誘掖之恩。乃以平生所不敢開口於鄕黨朋友間者。仰首靦面。頡頏反覆。有若素所從事者然。人之無恥。復有甚於此者乎。是宜反躬揣量。默默守拙。以不學愚芚之一棄物自處。而獨感閤下眷眷之意。不能自已。今又以至愚極陋之見。敢有所間於前輩大儒之論。此則不但自省惶蹙而已。抑恐當世之君子。有見討以僭妄不識分者。豈不大可懼哉。更望閤下憐其愚而略其咎。獨覽而勿煩人。又有以終敎之。使得爲茂叔之初平。千萬懇仰。餘只祝宣化之暇。益務崇深。
別紙
精粗本末。無彼此之說。尤庵謂以太極陰陽對擧。而爲精粗本末。則所謂太極者。豈不汙雜乎。此誠的論也。又曰。朱先生旣於二五之精。以氣言之。而於此復以精字。屬之太極。則上下精字。自相抵捂。亦可謂援證之明覈矣。然愚意竊以爲聖賢之言。各有地頭。理固不可以精粗本末言。而亦有以精粗本末爲言者。尤庵問目中所引朱子說。固曰妙用言其理。又曰妙用言其精。是朱子已以精言理。而尤庵於此。旣曰以理爲精者。對陰陽之粗跡而言。則太極獨不可對陰陽之粗而謂之精乎。熊氏所謂太極爲精陰陽爲粗者。未可以非之也。又按朱子太極圖說後論。有曰。道體之全。渾然一致。而精粗本末。內外賓主之分。粲然於其中。又於其下。論體用一源顯微無間之說曰。是豈漫無精粗先後之可論哉。是盖以至微之理謂之精。至著之象謂之粗。則太極非至微之理乎。陰陽非至著之象乎。朱子之以精粗分言理氣者。於此又可證矣。而通書理性命章曰。五殊二實。二本則一。朱子解之曰。自其末以緣本。則五行之異。本二氣之實。二氣之實。又本一理之極。自其本而之末。則一理之實。而萬物分之以爲體。此一段。卽五行一陰陽。陰陽一太極之意。而以太極爲本。以陰陽五行爲末。則熊氏之本末分屬。亦豈無所據乎。眞西山曰。天下未有無理之器。無器之理。卽器以求之。則理在其中。精粗本末。初不相離。此亦以理爲精與本。以氣爲粗與末者。較然明甚。此愚生所以不敢致疑於熊氏之註。而栗谷,沙溪,尤庵之說。不能無惑者也。此中近世先覺之論。亦有與沙,栗同者。而私心竊有所不安。及見愚伏集以熊說爲是。然後乃始有以自信。今得玄石辨說又如此。夫愚伏玄石。亦豈不知熊註之多穿鑿。而至於此解。則求之文義語脉。固爲穩貼。證之通書及朱子西山諸說。亦有可據。其可賺連而一體非之乎。且尤庵以五殊二實。無餘欠者。謂陰陽於五行。無所虧欠而具足。此亦恐非本文之意也。所謂無餘欠者。言分而爲五。而非有欠。合而爲二。而非有餘。此卽陳北溪之言。而見於性理大全小註中。尤庵恐未及照撿也。玄石所謂陰陽粗末之道。太極精本之本然者。下語似不平穩。尤庵謂之未安者。是矣。若夫尤庵所謂二五之精。旣以氣言之。則不當復以精字屬太極者。又有一說。聖賢之言一字而兩用之者。不止一二。如太極圖說中。神發知矣之神。以氣言之。而通書中神妙萬物之神。以理言之。一神字而可以通用於理氣。則一精字而或言理或言氣者。亦何不可之有。盖獨擧二五而言之。則二五之氣不二不雜者謂之精。而以太極相對而言。則陰陽固爲粗。太極固爲精。其所指而言之者。各有攸當。夫豈有所抵捂乎。精粗本末之論。旣然矣。而獨閤下所諭陰陽。氣也。太極。理也。理與氣。不可強名一物而謂之無彼此者。其有見於理氣不相雜之妙。而剖析於毫釐之間者。可謂至精而無可間然矣。然徐而究之。則所謂無彼此者。乃是發明太極陰陽之混合無間。不可分而二之也。豈眞以爲一物而元無彼此之殊乎。張子曰。心也性也天也。一理也。其實心與性。豈可謂一物。而以其混合不可分。故謂之一耳。朱子所謂無彼此者。亦恐如此。且以太極爲精爲本。陰陽爲粗爲末。則其截然不可亂之分。已是大煞明白。無彼此一句。特明其爲一而二二而一之義也。有何大未安乎。若曰太極於陰陽之精粗本末。無彼此云爾。則無論其於上下語脉。有所不倫。而朱夫子解剝圖體之際。下語用字一一相貼。未嘗汎論贅說。故五行一陰陽則曰。五殊二實。無餘欠也。上句言五行陰陽。而下句言一之義。太極本無極則曰。上天之載無聲臭也。上句言太極。下句言無極。上下句句莫不皆然。則陰陽一太極之解。何獨不然。而汎說精粗本末乎。且上句獨言陰陽。而不言太極。則下句所謂無彼此者。果何謂也。必須以精與本。屬太極。粗與末。屬陰陽。然後語有下落。意相襯貼。而無彼此之意。亦有所指而分明矣。按通書動靜章一節。正論此段而曰。五行陰陽。陰陽太極。朱子解之曰。此卽所謂五行一陰陽。陰陽一太極者。此又去箇一字。而直以五行爲陰陽。陰陽爲太極。則豈非所謂陰陽太極無彼此者乎。黃勉齋曰。天道是理。陰陽五行是氣。分而言之。則理自理氣自氣。而合而言之。則氣卽是理。程子曰。形而上爲道。形而下爲器。須著如此說。器亦道道亦器。此又非陰陽太極無彼此之證乎。濂洛以下諸賢之說可考而質者。若此類甚多。則熊氏此解。可謂得朱子之本意。而不可謂之不是。閤下所謂生硬不倫之甚者。愚未見其爲然。此必蒙蔽昏惑。有所未達而然。伏乞復惠詳敎。俾得通曉如何。聖鐸竊伏念。講論義理。非一人私言。非一家私計。乃是天下萬古公共底事。故雖前輩名儒之言。而義所未安。則不可曲意苟徇。雖芻蕘鄙夫之說。而理有可取。則不可忽而不擇。是以朱先生一生服膺兩程之訓。而小有不合處。則必爲之摘抉辨正。排擊王,蘇之學。而其言之近於道者。汲汲收入於集註之中。至於勉齋之於晦庵。其尊事篤信爲何如。而陰陽穉盛之說及論語集註中未安處。不肯阿其所好。而論辨不置。此聖賢之公心也。末學妄庸。何敢援以自喩。而於諸大儒之說。未能曉然有悟。則回互遷就。強其所不然。實非公心直道。而亦閤下之所惡也。玆敢不揆僭越。抗辨至此。非敢自是淺見。實欲效愚而求敎也。伏惟閤下原諒。而不之罪也。
思有忽地發出底。又有尋索省記底。而意則志之經營往來主張要恁地者。是也。忽地發出底思。雖謂之先於意似矣。而尋索省記底思。又似在意後。然陳安卿曰。思慮之類。皆意之屬也。然則思與意一而二。二而一。有不可以先後言者。退溪答許美叔志意先後之問曰。志意。本非相終始相首尾者。安得以強分先後耶。志意之先後。旣不可強分。則思與意之先後。亦何必強分哉。鄙見如此。閤下以爲如何。
五行之生。各一其性。朱子於解剝圖體也。曰氣殊質異。各一其性。其解圖說也。曰五行之生。隨其氣質。而所稟不同。所謂各一其性也。今卽此而究之。則五行之性。謂之氣質之性。可也。謂之本然之性。亦可也。何也。金之性非木之性。水之性非火之性。實由於氣質之不同。而就其中。眞實具足。而不相假借。不相凌奪。則莫非太極之全體。自其隨氣質。各自不同而言。則爲氣質之性。自其太極之全體。無不具足而言。則爲本然之性。譬如天上雨落。或爲井泉之水。或爲溝渠之水。或爲行潦之水。大小淸濁各不同。而其水則同是天上之雨。五行之性。何以異於是哉。朱夫子答徐子融書曰。謂枯槁之物。只有氣質之性。而無本然之性。此語可笑。盖由不知氣質之性。只是此性墮在氣質中。故隨氣質而自爲一性。周子所謂各一其性者。向使元無本然之性。則此氣質之性。又從何處得來耶。退溪答李宏仲書曰。性非有二。只是不雜乎氣質而言。則爲本然之性。就氣質而言。則爲氣質之性。今認作二性看誤矣。又答李公浩書曰。行於天者謂之氣。具於地者謂之質。氣質中必有所以然之理。是性也。潤下炎上等。是氣質之性。然非別有一性。只是理在氣中。而爲此物之性。則不能不隨其氣而有異。所以各一其性。此政是論太極圖此段。而語意尤詳備。熟玩此兩賢之說。則可以知五行之性矣。伏惟閤下與息山往復者。已有歸宿之論。而不得奉玩。乃以粗淺之見。依傍先儒之言。模索爲說。率爾請敎。僭妄之罪。尤所難逃。敢乞日後。或賜回敎。未可以兩家往復文字。命下吏謄示。以開蒙蔀耶。
*與豐原君別紙
精粗本末無彼此之說。自前輩大儒。其是非不一久矣。而才識之通明。知見之正當如閤下者。猶以僭率爲懼。有不敢容易開喙之諭。則况如聖鐸之至愚極陋。初無管蠡窺測。而可以與於此乎。自讀台敎。始覺前日妄發之罪。雖欲悔之。而已不可及。但有羞愧悚汗而已。然愚賤之見。猶有一說。夫後生之於前輩。不有其正論。而欲爲凌跨之計。則斯誠謬悖可誅也。不然而理有所未明。言有所未定。疑晦不可以不辨。蒙蔽不可以不袪。則雖性道之微奧。安得不講說。雖先儒之所論。安得不反復乎。猥僭之咎。狂妄之譏。有所不得以避也。是用復因台敎。敢有所道。非敢求多而好勝也。實欲效愚而求益也。惟閤下容而裁之。台敎曰。自無極而太極。至四時行焉。是自上說下來。明一本而萬殊也。自五行一陰陽。至太極本無極。是自下推上去。說萬殊而一本也。故朱子解之曰云云。此諭甚的確。前日鄙說本意。亦不外乎此也。夫太極。卽圖體之第一圈也。陰陽。卽第二圈也。五行。卽第三圈也。太極自爲一圈。陰陽自爲一圈。五行又自爲一圈。疑若各爲一物。而不見其渾然一體之妙。故周子於圖說。旣自上分開說下來。後卻反本而自下推上去。曰云云。則已不啻大煞分明。而朱夫子猶恐學者之或有未達。於是以圖說。合圖體而解剝之曰云云。其意盖謂五行之圈。與陰陽之圈雖異。而其實則水金陰也。火木陽也。土則陰陽之冲氣也。分而爲五殊而非有欠。合而爲二實而非有餘。則此所謂五行一陰陽也。陰陽之圈。與太極之圈雖異。而其實則陽者。太極之動也。陰者。太極之靜也。太極不離乎陰陽。而陰陽不外乎太極。上面圈底。卽下面圈底。下面圈底。卽上面圈底。有混合之妙。而無彼此之殊。則此所謂陰陽一太極也。至於無極。則不必別作圈子。太極之無形狀無方所無聲臭者。卽是無極之謂也。故周子於此不用一字。而下本字。朱子亦不釋本字之義。而只釋無極之義。盖本字。其義虛。一字。其意實。不可比而同之也。今閤下敎之曰。若以言一之語脉律之。則亦當言本字之義。竊恐閤下有所不察於周子所用兩字。有虛實之不同也。若夫精粗本末之分屬理氣。先儒說不止一二。前書已槩擧焉。今不敢更煩。然亦不必引他說。以爲證。卽此朱子說。而有以知其然矣。何者其解剝圖體也。下語用字。至精至約。無一句一字。汎論而旁及者。則何獨於此說出圖說之所不言。而備論陰陽之精粗本末乎。必以精與本。屬太極。粗與末。屬陰陽。以無彼此爲一字之義。然後乃爲直解陰陽一太極之句。而辭不散漫。語實緊著矣。盖朱子此解一如經書訓誥之體。上擧圖說之文。下釋所擧之句義。故曰五行一陰陽者。謂五殊二實。無餘欠也。陰陽一太極者。謂精粗本末。無彼此也。太極本無極者。謂上天之載無聲臭也云云。則精粗本末。豈非分屬於太極陰陽。而無彼此。豈非釋一字者乎。若曰。陰陽之精粗本末。太極無所不在云爾。則汎論陰陽太極。固可如此說。律之以此。解上下句之例。有所不倫。况獨言陰陽之精粗本末。不及於太極。而乃曰無彼此。則其文勢語意。豈不闕齾而隱晦乎。朱子解釋文義之法。决不如是。伏乞閤下試更加之意。就此作訓詁體細看。如何如何。抑來敎有曰。理氣雖混融無間。終不可打作一物。此則至論也。近世如羅整庵,徐花潭。以理氣爲一物。致有認氣爲理之病。閤下之言所當表而出之。以詔後學之論理氣者。歎服歎服。仰恃知照。妄率至此。千萬恕察焉。
*答豐原君書 壬子
數日前伏蒙前月廿八日所賜書問及種種垂惠。拜受感激。繼以惶蹙。而未及仰致謝意。因陶山通錄校正事。隨一鄕諸老後。來到府底。伏聞營閣七八十間。意外見灾。敎書若寵賜鎧冑等物。亦不免燒燼。驚愕吁歎。久不能釋。且審蒼黃危迫之境。不止一二而至於書冊及前後編撰文字無一存者。聞來尤不勝慨恨。卽日旱炎愈酷。不審台候動靜。復何如。區區下誠不任慕慮之至。聖鐸將母粗免。惟是撤寓杳然。生受轉甚。奈何。別紙辨誨。謹悉指意。但自往復以來。可謂兩盡底蘊。而爛熳同歸。終似不易。此必愚昧闇劣。未能透悟於明敎之下。殊可愧恨。旣蒙不倦之誨。亦當更竭愚慮。以竟端緖而紛擾中。悤悤未暇及。謹當從頌遂忱。然近爲李丈移兵來攻。果如下諭滕之間齊楚。在閤下擬之非倫。而若聖鐸之寡弱。不止爲五十里之孱國而已。閤下之威靈。不啻三楚之大。而李丈兵甲之富。亦不下臨淄之戶三七二十一萬卒。區區敝賦。何敢與大邦抗哉。畢竟恐不免事齊事楚之歸爾。閤下旣辱與之雅謔。不敏亦敢忘分至此。還極未安。餘俟歸巢。一罄鄙懷。
*答豐原君書 癸丑
自承閤下出按湖臬。相望益覺杳然。一紙候問。末由以時自伸。不但區區瞻仰之懷。無以自任。德音見惠。比往時稍疎闊。數月之間。胷中鄙吝之積。不啻如丘山。則未嘗不遡南風而悒悒。匪意忽伏承遠惠手墨。披玩再三。無異承顔色接誨晤。感篆欣暢。不知山河之間阻也。第伏審受命於賊變民竆之際。不免以區處賑救。爲夙夜之憂。爲之仰念不已。然南道鎖鑰之責。非閤下無可任者。而平日學問之功。政於此處有用。何必閒居靜討。然後爲學。蒙恩受知之厚。所祝望於執事者。不得不出於尋常也。聖鐸夏秋來。老母疾患蟬聯。憂遑煎灼。全沒况味。此際自上因本道監賑御史李公誤薦。與尙州成徵士爾鴻。同付軍職。李處士槾。亦令除職。而下諭于道伯。俾之依漢家州郡勸駕之例。敦勉起送。方伯令公。以書勸諭。所以責望之語。太不近情。揆以微分。千萬不敢當。古今天下。寧有如此可笑可愧之事乎。此莫非聖鐸平生。不知盜名欺世之恥。馴至於此境。亦緣閤下見愛之過。不知其惡。年前狀辭及筵對。謬爲稱說。全沒實狀。輾轉承襲。畢竟有此狼狽。古人以知己。爲重於感恩。閤下前後見念之恩。固感激不知所報。而但謂之知己則恐未也。故聖鐸不敢恨李御史。而憾執事者之愛我未盡也。方以不敢趨命之意。答方伯。又呈書于本府。以爲辭免之計。未知高明之見以爲如何。南溪集。初夏始自全陽君許。運致元集。而汨沒憂患。不得遍閱首尾。然以其講學論禮。大槩言之。雖淺見。亦知其爲大儒文字矣。且尼,懷師友之間。忠厚惻怛之意。藹然可見。四七理氣之辨。所執不偏。此又可歎服。但一二論禮大關。有鄙見所不及者。恨不得面稟耳。旣承尙論之敎。故妄言及此。悚仄悚仄。拜見無期。臨書冲悵。
*答豐原君書 甲寅
匪意。伏承台下覆及辱問兩紙。謹審初炎台體萬安。仰感且慰。無任遠誠。聖鐸老母痰患日甚。煎迫以度。他餘碌碌。不足仰煩。先祖遺事。得蒙披覽。又加以稱揚之諭。子孫私情。感激無量。遯跡鞱光之人。沒世之後。得爲一二名公大人所賞識。使苦心潛德。不至泯泯無述焉。亦幸矣。何敢必覬其盡聞於朝廷哉。勸學事。前月旬間。城主一聚選士設講。此後未知能復不撤否也。路遠末由趨拜。臨書悵仰。
*答豐原君書 乙卯
伏承台翰。見敎以起自草澤。蒙不世之恩。不宜無端退歸。以一疏陳情。兼論君德時務。可爲報答之一道。誠荷見念之深。然竊伏念。區區情勢。已因筵臣替達。親承許歸之聖敎。愚衷耿耿。亦已忘僭。略陳於聖問之下。若復以疏辭上溷。則似不無煩瀆猥越之嫌。且以至愚極陋之人。效顰於古人所爲。則恐或資人之嗤笑。以是不敢承命。伏惟諒察焉。悚仄悚仄。
歸鹿集
*答金振伯書
精粗本末之說。自是性命造化。至微妙處。本非蒙學淺識所敢容易開喙者。而第於盛問之下。適有先輩論卞可資觀覽者。故聊厼奉似以備裁擇。且於理氣。雖混融無間。終不可打作一物處。偶有管測。故略爲附陳。盖非有考據。不過出於臆度。而要欲請敎於君子而已。非敢妄爲立說。以抗先輩是非之爭。然僭率之罪。焉所逃也。盛諭論卞至詳。考據淹博。奉讀數四。浩浩乎莫可涯際。山林靜修之地。蓄積之深厚。理固宜然。欽歎欽歎。所援諸說。此無書冊可考據條對。獨聖賢之言。各有地頭之敎。誠爲的當。夫義理微奧。百家紛紜。文字雖同。而使用或別。句語雖近。而旨意或殊。若不就立言地頭。求其主意之所在。同異得失之卞。不可定矣。老兄誠以爲啚說此段主意。是說得何㨾道理耶。若是說陰陽太極混合無間之意。則熊說是矣。不然則熊說非矣。試以啚說反復紬繹。則自無極而太極。至四時行焉。是自上說下來。明一本而萬殊也。自五行一陰陽。至太極本無極。是自下推上去。說萬殊而一本也。故朱子解之曰。五行具。則造化發育之具。無不備矣。故又卽此而推本之。以明其渾然一軆。莫非無極之妙。而無極之妙。未甞不各具於一物之中。以此觀之。則此段地頭主意所在。居然可知矣。濂溪之意。不過卽夫陰陽動靜之中。推明其物物各具之大本。而朱子亦只發明此意而已。未便說到理氣分合境界。而今却以無彼無此混合無間之意添足之。則不亦剩乎。若曰啚說本意如此云厼。則其下無極之眞。二五之精。妙合而凝之說。無乃近於架疊耶。啚說之意旣明。則註說之意可見。註說之意旣見。則熊說之是非。恐不待多言而可卞矣。如是剖判。則所援諸說之同異。亦必各有地頭主意之所在矣。來敎以爲太極於精粗本末。無彼此云尒。則上下語脉。有所不倫。又以爲五行一陰陽。則上句言陰陽五行。下句言一之義。太極本無極。則上句言太極。下句言無極。若以上句言陰陽五行。下句言一之語脉律之。則太極本無極。上句當言無極太極。下句當言本之義。而上句獨言太極。下句不言本字之義。其不倫甚矣。而於此則不以爲病。於彼則獨以爲病者。何也。要之。語脉雖不倫。而安於義理。則斯可矣。何必䂓䂓於文句語脉之間也。至於論卞鄙說處。若曰所謂無彼此者。亦言其混合無間之意。非以理氣爲一物云尒。則固自無妨。而無間與無彼此。下語有輕重。謂之無間則可也。而謂之無彼此則終涉未安。所援諸說。恐皆說得無間之意。非以爲無彼此。依然相似之一物也。其中通書動靜章。陰陽太極云者。亦所以卽陰陽。而推原大本。如上所云而已。豈直以陰陽。喚做太極。如來敎云云耶。若然則太極失其純粹之軆。而成一汨童不直。如尤菴所謂汚雜而已矣。鄙見如此。幸更明敎。以破迷惑焉。
*答金振伯書
顯命妄有疑於章句者。耿耿數十年。終不能自解。幸荷老兄憫其昏愚。特與開曉。逐段卞說。殆無餘蘊。而猶慮夫蒙蔀之難祛也。則又敎之以濯舊來新之妙訣。使之倚閣前疑。虗心玩繹。以求其旨意之所歸。其意甚勤。自惟不敏。何以獲此於賢者。旣幸且感。遂將經文章句及來諭。反復尋究者十數日。終未見有渙然氷釋者。眞箇有智無智。不啻三十里之較而已。慚憤之極。殆欲忘寢食也。第於盛諭。旣不能無疑。則含胡苟從。理所未安。玆又條禀焉。來敎以爲又引者謂前旣統論同好惡之意。於此又以財貨。發明同好惡之意。前旣統論。此又發明云爾。則又引之義。可以粗通矣。然南山兩詩。汎言同好惡之理。財貨則拈出好惡中一事。以實兩詩之意。汎言與拈出。大小旣異。論理與指事。軆面又別。而財貨處。能絜矩不能絜矩七箇字。來自南山兩詩章句中。對配爲說。有若彼以好惡而能絜矩不能絜矩。此以財貨而能絜矩不能絜矩者然。夫以朱子註解之精密。而於此不略與分曉。如來諭。前旣統論之云者。何也。來敎以爲秦誓以下。以用人極言好惡公私之別。而兩詩之意。於是益明。夫南山兩詩。實承上段覆解絜矩之意。統論好惡公私之得失。而其下卽言財貨用人兩件事。其所以重言複說。丁寧反復者。無論財貨用人。皆所以極言好惡公私之別。而南山兩詩之意。在在皆明。若如來諭之云。則是好惡公私之別。初不極言於財貨處。而必待提出用人。然後始極言之。南山兩詩之意。初不益明於財貨處。而必待提出用人。然後始益明矣。經文之義。其果然乎。來敎以爲朱子註解之法。隨其本文。而未甞汎下一字。好惡字。實於用人尤襯切。故獨言於用人。而不言於財貨者。盖有以也。夫爭民施奪。民之所惡也。散財得民。民之所好也。好惡二字。何甞不襯切於財貨乎。來諭固已云。財貨。人所同欲。有欲專之心。則是不與民同好惡也。老兄之意。亦未甞以財貨。謂不襯切於好惡矣。而今却言好惡字。尤襯切於用人者。何也。章句與經文。旣以好惡字之襯切於用人。故獨言於用人。而後之人強以意通該於財貨。可乎。朱子註解之法固嚴。然字訓之外。凡係通論大義。或經文意不足處。輒以己意點綴而添補之。雖以大學一部言之。明明德註曰。因其所發而遂明之。正心章註曰。必察乎此。而敬以直之。所謂因其發察此敬直等字。曾有彷彿於經文者乎。苟可以發明經旨。則不嫌以言外之意。說出經文所無之文字。何獨於此。以好惡字之不見於財貨處。而偏言於用人耶。若於惡人之所好段下章句。通上財貨條而言曰。自先謹乎德以下至此。以財貨用人。申言好惡公私之極。以明上文所引南山有㙜節南山之意云爾。則豈不四亭八當。歷落分明。使讀者。曉然易知。免有許多疑難。而必以秦誓以下用人一事。偏屬於南山兩詩。好惡之意。致令後之學者。艱辛覔出互發之意於言語之外者。何也。至於章末云云。老兄之說得愈精。而顯命之疑惑滋甚。來敎以爲財貨用人。皆可以同好惡言之。而一章所論。尤致詳於財貨。故特加不專其利四字。而所謂不專其利者。通貫於用人。夫與民同好惡五字。旣可以包該財貨用人兩事而言之。則此已足矣。何用添却不專其利四字。以疊屋上之屋乎。致詳者。固在於財貨。而歸重則實在於用人。以其致詳而特加四字。則獨不可以歸重而又加幾箇字耶。且經文非不以南山兩詩。包該財貨用人之意。而又以先謹乎德以下。秦誓以下諸段。縷縷說財貨用人之事。而不厭其繁絮。則何獨於章末註。別爲簡省。單以好惡字。包說兩者。而特以致詳之故。添下四字。以爲長一脚短一脚。參差不齊之文法乎。且以不專其利四字。兼貫用人而爲言。則親賢二字。亦可以包得樂利之意。而旣曰親賢。又曰樂利。以爲重複之說。何也。盖以文勢語脉求之。其曰務在云者。所以揔括同好惡不專利而起頭也。其曰皆推廣云者。所以承接同好惡不專利而關結也。其曰親賢樂利。各得其所云者。以親賢爲同好惡之效。以樂利爲不專利之效。而各得之各字。正所以對皆推廣之皆字也。其段段對擧。字字雙配。有若桐葉之分。而老兄嫌於經文之矛盾。故不得已以與民同好惡之句。謂包該財貨用人。嫌於不專其利四字之爲剩語。故不得已謂章內致詳於財貨。故特加四字。猶患其文句軆裁之參差也。故又以爲通貫用人。而言其爲說。可謂極於精密。而恐或不免爲牽强新巧之歸耳。經文之意。則斷斷如彼。章句之意。斷斷如此。是必有其說。而無乃後學鹵莽。本自錯看經文意。而强欲求合於章句。故爲說愈多而愈不合耶。明敎之下。猶有不能釋然者。又未免唐突至此。僭妄固甚矣。然倘蒙仁者寬恕。終有以敎之。俾有大寐之覺。則實愚者之幸也。
*答金振伯書
朱子之幾於聖。而釋曾子之旨。其言必無一毫訛謬。可以俟百世而不惑。三尺童之所知。則今日所爭不待一言。而可知其得失之所在矣。顧以昏蔽之性。有疑而不能自祛。從而質之於師友。而又未見有怡然渙然之境。甚矣。其昏之至而蔽之固也。顯命之前後卞質。足下之反覆指誨。不啻皆屢千言。而終不能有以相入。畢竟只管各踏磨驢之故跡而已。則誠不如姑且已之。退而俛焉。以俟濯舊來新之有日。而第來諭諸條。所以致詰者。不無與顯命本意相戾者。則不得不更此條陳。以聽明敎焉。來敎以爲先謹乎德以下一節。無一好惡字。而謂同好惡之意在其中。章句則以其不言好惡字。而謂之戾於經文。此愚之所未曉也。顯命何甞專以章句不言好惡字爲病乎。夫好惡。旣曰総腦。財貨。旣曰條目。則総腦與條目。大小輕重。固自不侔。而章句於好惡條曰。能絜矩不能絜矩。於財貨條亦曰。能絜矩不能絜矩。而加之以又因二字。其語勢文法。雙貫對配。依然兩隻眼目。惡在夫総腦條目之別乎。顯命之疑。其戾於經文。正在於此。非但爲好惡字有無而然也。來敎又以爲秦誓以下。其言好惡字。凡幾處耶。經文則不以其累言而謂之偏屬於用人。章句則以其言好惡字而謂之偏屬。謂之不合經文。此又愚之所未曉也。顯命何甞但以章句言好惡字。而謂之偏屬乎。夫南山兩詩之包該財貨用人兩條而爲総腦。財貨用人之不出南山兩詩範圍而爲條目。足下與顯命。無異議者。而章句曰。秦誓以下至此。皆以申言好惡公私之極。以明上文所引南山有㙜節南山之意。其語勢文法。單提獨拈。依然隻立長脚。惡在夫好惡之包該兩條。而兩條之不出兩詩範圍之意也。顯命之疑。正在於以明上文所引以下數句。不專以偏言好惡字而然也。以言乎南山兩詩章句。則以総腦之大。而下同於條目之細矣。以言乎先謹乎德以下章句。則以條目之細。而上配於総腦之大矣。以言乎秦誓以下章句。則用人一事。本當與財貨。待對爲條目。與之同囿於南山兩詩好惡之中。而好惡則單管用人。用人則偏屬好惡。譬若一母兩子。而一子抱在懷中。一子棄在膜外者然。凡此數者。皆顯命所深感也。來敎又以爲絜矩二字。只見於章首。而章句段段提說。以補其不足之意者。與明明德註及正心章註。何以異哉。顯命之引此兩註爲說者。無他。足下前書以爲朱子註解之法。一隨本文。未甞泛下一字。而經文財貨條。無一好惡字。故章句從而解之。不加好惡字。鄙意欲就此卞破。遂引明德正心兩註。以明其點綴添補之意。盖諸經章句。如此類甚多。足下所引段段提說絜矩字者。亦其一也。夫經文所無之絜矩字。而亦可以段段提說。則財貨所無之好惡字。獨不可以特地提說。以補其不足之意者。何也。來敎又以爲好善惡惡。比之財貨之好惡。尤直截明白。故經文言用人之道。而不下他語。直用好惡者。盖以此也。經文之言好惡如是勤渠。則章句惡可避經文所言之好惡字。而改用他說乎。夫以君子之心言之。則善惡之好惡。重於財貨之好惡。以衆人之心言之。則財貨之好惡。重於善惡之好惡。其輕重淺深。雖各不同。要之。皆人心之所發。而天下之同情。豈有在善惡則直截明白。在財貨則不直截明白之理。而作經者。亦豈有所左右取舍於其間也。且夫顯命之意。非以章句之不避經文。改用他說爲病。但以財貨用人兩條所共包攝之好惡。而用人一邊。獨得以專之。爲可疑如上所陳焉耳。來敎之云。未知何據而發也。足下所以爲說者甚多。而論其要旨。不過互相通貫。互相包涵。非必以好惡。專屬於用人。而無與於財貨也數句耳。從外面汎觀之。則豈不誠然也。然他餘勿論。足下試言以明上文所引南山有㙜節南山之意十五箇字。通貫於何處。而包涵乎那底耶。其獨占地界。牢着關鍵。只許管攝乎用人。而不容帶附於財貨也。豈不大煞分明乎。申言之申字。又字復字之意也。前旣以南山兩詩統言好惡。又以財貨用人。申言公私之極云爾。則不亦可乎。財貨條雖無好惡字。好惡之意。實在其中。何害其爲申言也。至於章末註。來敎所謂乃是一直連串底語。非雙峙對立底句者。無乃以中間下一而字故耶。是則誠似然矣。然同好惡三字。若非專屬用人。而揭作一章総腦。如經文之說。兩詩則其下以用人財貨雙擧而對說。然後方成軆段。而只擧財貨一邊。則豈不偏枯乎。財貨用人。孰非平天下之要務。而獨於財貨。致其丁寧者。何也。皆推廣之皆字。亦將下落於何處耶。親賢樂利四字。固自傳三章出來。而所以承財貨用人。以明其爲治平之效者也。若曰。不相干涉於用賢不專利之意。則其汎然不襯貼。散漫無精彩。甚矣。朱子註解之法。果若是乎。顯命非敢強卞求勝。心有所疑。終不能苟然唯諾。復此薾縷。惟明者。憐而終敎之也。日者。李院長有書自云。於此看得新意。具別幅以投。兼示所遺足下書。足下於其間。想已往復。不知高見以爲如何。顯命答書。略與卞論。其下却云。執事移鋒於振伯矣。鄙欲坐觀成敗。爲從違計。滕之間齊楚。不得不然。足下覽斯。當爲之捧腹耳。
精粗本末之說。更將本文與諸儒先卞說。細加究勘。則二說恐似皆通。而亦似各有病處。何則。栗谷之意。盖曰太極。動靜而分陰陽。陰陽。變合而生五行。卽夫陰陽五行而觀之。則其名目態色。有許多般㨾。而推其本。則乃一箇太極。無不通貫於陰陽五行精粗本末之中云爾。看得如此。則其義未甞不通。然以文勢求之。則五殊二實。旣以陰陽對擧而結之。以無餘欠。以明一之義。其承接關鎖。極其齊整。而却於下句。不以陰陽太極。對擧爲說。以精粗本末。盡屬之陰陽者。終似未安。不曰無不在。而必曰無彼此者。亦似無意味。此則栗說之所以通。而亦不無病處者然也。熊氏之意。盖曰太極。理也。陰陽五行。氣也。卽夫理氣而論之。則理也者。爲精爲本。氣也者。爲粗爲末。而五行。本陰陽之變合也。陰陽。本太極之動靜也。理與氣。混瀜一團。無有彼此之間云尒。看得如此。則其義亦未甞不通。求之文勢。對偶開闔。極爲齊整。然重在妙合無間之意。而其中截之不可亂之分。則無甚區別。終有看作一物之嫌。此則熊說之所以通。而亦不無病處者然也。執此兩端而叩之。則彼此各有長短。各有得失。以蒙末之識。實難取舍於其間。姑且兩存。以俟他日知見稍有長進後决之。或似未晩耶。
疏
叙命後。乞退論金聖鐸䟽。
伏以臣負罪至重。幸逭嚴誅。屛伏窮廬。泣血訟愆。不意職牒旋還。叙命繼下。勳秩如故。寵渥維新。夫以臣受恩之厚。而慚負殿下。非一二事。舊愆新罪。宜死毋宥。顧聖度天大。旣有以涵貸之。又從以拂拭之。臣是何人。罪愈積而恩愈隆至此哉。臣誠惶恐感激。莫知所以自措也。念臣向來所被人言中。下欵數字之目。實爲湛滅之案。臣驚痛之極。急於籲寃。前後兩䟽。只就此卞訟。至於上欵試塲事。盖不暇詳悉矣。到今處分已定。事端旣宿。何敢更爲追提。以益其煩屑之罪也。第臣伏見㙜臣合辭之啓。則若有區別於其間。而專欲歸罪於大臣。臣於此。已不能無愧於心。而及見同事數臣之䟽。過爲自解之計。此又臣之所羞爲也。不得不略陳伊日事狀。以窃附於古人無隱之義焉。始李顯弼之文出。其言固多誣訐。而或意其爲狂妄不愛死者。所爲試爲別置。然其中兩條。有干涉臣身。於心甚不安。且其文旣違科格。亦似有挾雜詭遇之計。故果於合考之際。畧言其不可取。則大臣以爲所謂兩條。本非贊譽之言。抄宮人之說。關於吾事。而吾亦不以爲嫌。則君豈獨以此爲嫌也。况此或草野狂生。妄欲盡言者。則吾輩之自下沮抑。無乃不可乎。臣聞大臣之言。不覺瞿然。窃更思之。陸贄之言曰。言者之狂誣。明我之能恕也。此文之狂誣。亦甚矣。豈非所以彰聖上廣大包容之德耶。今若取之。而聖上談笑而處之。則彼則歸於妄人。而爲聖德之光大矣。故臣遂改前見。而首先從之。諸試官亦或以數語難之。然未有肯擔當力爭者。故遂至於入選矣。其時委折大槩如斯。臣始雖畧爲爭難。末乃先他人而從之。則助成大臣之罪者。臣也。臺啓之強爲區別。專以大臣爲的者。豈臣私義之所敢安也。盖臣甞窃以爲言路者。國家興亡之所係也。故前後筵對章奏之間。未甞不以遜逆從違之訓。烏鳶鳳凰之諭。眷眷誦說。聖明想必記有之矣。况近來士氣銷沮。言路全塞。甚至於遇灾求言之下。擧一國而無一人應之者。此宲千古有國之所無也。臣以是慨然。寤寐憂歎。常願殿下一日爲涓金買骨之擧。以來千里之足也。故此心。隨事觸發。遂至於選取格外之文。而矇不覺其自陷於罪戾。原其本意。豈有他哉。斷斷欲聖德之增光也。言路之恢張也。而畢竟不惟不能光聖德而恢言路。乃反生出一塲紛挐。落下數級世道。此其罪豈萬戮所能贖也。誅流竄殛。固所甘心。而言者之言。則從而媒孽於本事之外。至於將校敺打䟽伩之說而極矣。其爲計必欲以臣一門百口。推納於水火坑坎而後已。倘非殿下明照而仁覆之。則臣之無幸久矣。以所負之罪。則慚愧懊悔之無窮。以所被之恩。則感泣頌祝之靡極。恩命之下。卽日趍肅。以叩謝萬一。豈非分義情禮之所當然也。惟是最後白尙鼎之䟽。旣有禁令。臣不敢索言。然人而得此聲。至再而至三矣。此豈人理所可忍。而尙可以復齒於橫目之列耶。彼固不足責。若使臣早自决退於朴奎文之言。則㣧命之招。何自而生。又能决退於胤命之後。則尙鼎之䟽。何自而出也。莫非臣迷眛貪戀。自有以致此。而死無以見父兄於地下。言念及此。痛不欲生。寧復有一分榮進之念。而去就之足論也。伏願聖明哀臣憐臣。卽許放退臣身。使之優游田野。俾全軀命。以卒天地生成之澤焉。抑臣罪名纔勘。情地尙艱。宲非開口言事之時。而况且以薦進嶺人被譴。則尤何敢以嶺人事。有所論列也。然此關國家刑政大軆。而旣有所懷。豈忍以微嫌細故爲拘。而不一陳於明主之前也。金聖鐸以妄言。將至於死。是其自取。固不足惜。然其宲則玄逸。乃根本也。聖鐸。乃枝葉也。根本之玄逸。死於牗下。枝葉之聖鐸。斃於桁楊。則其於本末輕重之倫。果何如也。况朝廷初不以逆律勘玄逸。而以護逆責聖鐸。不幾近於罔民者乎。先朝與當宁事体。雖曰不同。玄逸與聖鐸。輕重不亦有間乎。必欲以護逆誅聖鐸。則追行拏籍於玄逸而後可也。不然則金石之典。自有次序。護逆之律。不可徑施於聖鐸也明矣。至於先天之說。亦豈有別般隱情可以限死鞫問者。而朝廷之名論太勝。王獄之議讞失平。惜乎。殿下之庭。曾無一箇張釋之者耶。國有事則曰是曰非。可否相濟。自三代已然。今則一夫唱之。萬人同聲。在外則或憂其過中。入對則皆言其可殺。心口異行。忍能面謾。間有一二傅生之論。而旋復沮縮。不能自遂。何其不武也。幺麽一聖鐸之生死不足言。今日士大夫䂓模氣象。一至於此。臣不勝寒心也。臣非不知一言出口。而必有以得罪名義駈臣者。然臣若知而不言。則是上負殿下也。下負臣心也。是可忍也。玆敢冐萬死。附陳於辭本之末。伏乞聖明更加三思而審處之。以光好生之德。仍治臣出位妄言之罪。以爲狂僭者之戒焉。臣無任云云。
김복하(金福河) 1690(숙종 16)~1762(영조 38)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청지(清之)
고조부는 개호 시주(是柱). 조부는 사당(士達). 아버지는 세석(世錫)
*答族姪淸之 福河,元伯 白河,羲瑞 受河 書。甲子
歲暮鄕思。政爾難聊。此際便中。獲奉僉札。披感如對。甚慰客懷。信後歲改。遠惟僉起居迓新益勝。纍人纔過讎日。又逢新歲。感痛之懷。豈有涯極耶。又况流落八年。生年甲子。忽焉已周。竆途身世。復何可望。只自悲歎而已。雲亭重修。能辦數十年所未遑者。僉盛意勤力。甚可尙也。但記文謬屬於如我不近者。雖不得終辭。而有血指之愧。然自知其决不可用。况蒙陋無識於先故事實。謬戾如此者乎。可慚可懼。今依雨溪兄所條示。改定以送。而鄙文素有支蔓之病。今玆添補之後。益覺繁冗。以此而爲揭示之資。則豈不辱斯亭。而累僉君之盛擧乎。鄙意莫如改圖之爲得也。且拙文貽笑已多。又欲以拙筆增其醜乎。胤君夢弼書法。少年中無可比者。何必他求。不然則善餘可矣。又不得已則雖晉兒。亦可以承乏矣。舍此數者。而必欲使老拙書之。則是欲彰吾之拙也。且板之長短廣狹。在遠何以酌量。來示云不過如此牘之長。所謂此牘者。以僉書幅長而云爾耶。抑所謄送拙藁紙之長耶。皆難懸揣。雖欲書亦不可妄試。况萬不敢當乎。
박문수(朴文秀)1691년(숙종 17)∼1756년(영조 32).
본관은 고령(高靈). 자는 성보(成甫), 호는 기은(耆隱).
이조판서 장원(長遠)의 증손이고, 세마(洗馬) 선(銑)의 손자로, 영은군(靈恩君) 항한(恒漢)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공조참판 이세필(李世弼)의 딸이다.
1723년(경종 3)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로 급제하여 예문관검열(藝文館檢閱)로 뽑혔고, 이듬해 세자시강원설서(世子侍講院說書)·병조정랑에 올랐다가 1724년(영조 즉위) 노론이 집권할 때 삭직되었다.
1727년 정미환국으로 소론이 기용되자 사서(司書)에 등용되었으며, 영남암행어사로 나가 부정한 관리들을 적발하였고, 이듬해 이인좌(李麟佐)의 난이 일어나자 사로도순문사(四路都巡問使) 오명항(吳命恒)의 종사관으로 출전, 전공을 세워 경상도관찰사에 발탁되었으며, 분무공신(奮武功臣) 2등에 책록되고 영성군(靈城君)에 봉하여졌다. 같은해 도당록(都堂錄)에 들었다.
1730년 대사성·대사간·도승지를 역임하였으며, 충청도에 암행어사로 나아가 기민(饑民)의 구제에 힘썼다.
1732년 선혜청당상(宣惠廳堂上)이 되었고, 1734년 예조참판으로 재직중에 진주사(陳奏使)의 부사(副使)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그 뒤 호조참판을 거쳐, 1737년 도승지를 역임한 뒤 병조판서가 되었다.
이듬해 다시 동지사(冬至使)로 청나라에 다녀왔으나 앞서 안동서원을 철폐시킨 일로 탄핵을 받아 풍덕부사로 좌천당하였다.
1739년 함경도관찰사가 되었고, 1741년 어영대장(御營大將)을 역임하였으며, 함경도에 진휼사(賑恤使)로 나아가 경상도의 곡식 1만섬을 실어다 기민을 구제하여 송덕비가 세워졌다.
다음해 병조판서로 재직시 지리적 여건으로 봉군(烽軍)의 충원이 어려운 북도(北道)에 각 지방에 정배(定配)된 봉무사(烽武士)로서 변통할 것을 주청하여 이를 시행하게 하였다.
1743년 경기도관찰사가 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아 이듬해 황해도수군절도사로 좌천되었다.
1745년 어영대장에 재임되었으며, 1749년 호조판서로 재직시 국가에서 대내(大內)의 당우(堂宇)를 3년에 한번씩 수리할 때 책임관으로서 역대 어느 관료보다도 일을 잘 처리하였다는 역사적인 교훈을 남기기도 하였다.
1750년 수어사(守禦使)를 역임한 뒤 영남균세사(嶺南均稅使)를 거쳐, 지성균관사(知成均館事)·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세손사부(世孫師傅) 등을 지냈고, 1751년 예조판서가 되었다.
1752년 왕세손이 죽자 내의원제조(內醫院提調)로 책임을 추궁당하여 제주에 안치되었다.
이듬해 풀려나와 우참찬에 올랐다. 정치적으로 소론에 속하였으며, 영조대의 탕평책(蕩平策)이 실시될 때 명문벌열(名門閥閱) 중심의 인사정책에서 벗어날 것을 주장하고, 4색(四色)의 인재를 고루 등용하는 탕평의 실(實)을 강조하였다.
특히, 군정(軍政)과 세정(稅政)에 밝아 당시 국정의 개혁논의에 중요한 몫을 다하였다.
1749년 영조에게 주청하여 다른 신하들과 함께 《탁지정례 度支定例》를 출판하였는데, 이것은 《각전각궁공상정례 各殿各宮供上定例》 6권, 《국혼정례 國婚定例》 2권, 《각사정례 各司定例》 12권, 《상방정례 尙方定例》 3권을 합한 것이다.
글씨로는 안성의 《오명항토적송공비 吳命恒討賊頌功碑》가 전한다.
한편, 설화로서 그가 암행어사로 활약하였던 행적이 많이 전해지고 있다.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충헌(忠憲)이다.
제산집
*答靈城君 朴文秀 書
不意專人垂問。惶感之至。不知所喩。仍伏審孟夏。台候起居萬福。極慰瞻仰之誠。下送冊子。盛問之下。豈敢慢不應命。而孤陋鄙鈍。交遊旣寡。聞見亦窄。不足與議於人物之論也。且聖鐸私心。有所不敢者。閤下還朝之日。必當路秉軸。今所下問。意者或出於古人夾帒疏賢之意。則薦人是何等重事。而圭蓽滓賤之人。乃敢容議於其間耶。若不自揣量。而重違尊命。強其所不知。敢有所題品論列。則豈不於南道之士爲一大羞恥。而僭妄猥越之譏。又將何以自解乎。此聖鐸所以雖得罪於尊嚴之下。而不敢副盛意者也。伏惟閤下察此情實。而恕其愚昧。千萬幸甚。
김경온(金景溫) 1691년(숙종 17)-1734년(영조 10)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광보(光甫), 호는 단사(丹砂).
아버지는 여건(汝鍵).
1726년(영조 2)에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학행으로 參奉에 천거되었다.
저서는 <丹砂集>이 있다.
*與金光甫 景溫 書
兄之再西。勢所不已。厥後。聞京痘益熾。奉念不淺。比因溪上便。知兄棄官浩然而歸。令人甚快。幸冰江雪巘。萬境俱絶。而於明牕棐几下。日與希顔同人。相對討論。逈想風味。有欲從末由之歎。此時體况。不問可審其超勝。慰仰慰仰。定山丈。意外被人困惱。投紱决歸。不勝慨然。世人於此丈。其不藉如此。他尙何說哉。然在我無愧。不足介介爾。聖鐸近來憂慽相仍。有觸寒奔走之撓。不得一日偃息於蝸廬中。甚可閔也。家兒亦欲暫遊陶山。想乘暇一進候。都在俯叩。
하대명(河大明) 1691(숙종 17)
본관은 진주(晋州). 자는 진숙(晉叔). 호는 한계(寒溪)
양정재(養正齋) 덕망(德望)의 아들.
字晉叔號寒溪養正齋德望子肅宗辛未生聰慧過人文章典雅又以筆法名於世弱冠連捷鄕解程文六軆無不用工明習禮學遠近就質與三從弟愧窩大觀得晉陽巨擘河有二大之名李息山萬敷金霽山聖鐸李參議萬育皆與之相從講磨有遺稿
제산집
*答河晉叔 大明 書 己未
卽玆匪意。忽承委伻書問。滿幅見念之眷良厚。何感如之。第伏審色憂尙爾。又有膝下憂患。爲之仰慮滿萬。纍人。宿證近來似漸差可。而積憊未易蘇。跬步動作。輒覺損陷。此固殘瘁者常例。然亦一苦閔處。奈何。謙齋先生遺集。刪定則何敢。惟以一二妄見。略有標識處。而其中大家合商量者。在於年譜。不敢以矇眛之識。獨自下手初頭數章外。更未得勘詳。欲待早晩與老兄若寬夫兄相面時。爲貢愚計。而久留塵案。遷就時日。爲未安耳。謬屬文字。前旣吐盡情實。以老兄之鑑裁。何其不諒人一至於此。設令纍人或可以承當此役。方在罪囚中。世所嫌忌。且因鄕書。聞京洛論議尙峻。大霈之下。亦難冀幸云。如此蹤跡。何敢偃然自同平人。貽辱於先賢莫重文卷乎。其爲可羞。不但所謂佛頭之糞而已。幸老兄俯諒此漢私悃。不但由於自量已分。而實有所不得已者也。無已則有一焉。且待此漢得比平人。而賴天之靈。或有所進於他日。然後強而責之。則雖不敢當。其敢不承。但恐俟河之淸。未易其期。而重大文字。有後時之悔也。如何。遊山錄。病中纔得數廵閱覽。卧遊之趣。似有勝於穿弊筇屐者之勞倦也。兄之爲賜可謂厚矣。且文字看看可愛。玆敢不諒陋拙。謹依前命。有所云云。而兄曾有更遊蟾江之意。欲待其時覿面親呈。今不敢奉還。幸勿咎也。
寒溪遺稿
*答金霽山振伯 聖鐸
一入蘭室幸襲馨德衣帶間餘香久而未沫不圖辱書䟺後而至滿紙辭意瀉出衷悃顧此鄙拙何以得大君子眷厚若是其勤摯也政如無藉而承拱玉氷塞長河寒事必倍伏惟將攝中起居天迪亨泰胤哥其已返面而萱堂康和消息亦得聞知耶區區仰溯夙霄靡弭大明憂戚以來老親連牙腫脚疼之患委頃床褥轉側須人煎灼之懷何可盡喩日者獲接春風於窮陰閑塞之中向來塵肚頓覺▩然而▩來▩蔽也▩淸思反不如十寒之一曝良可嘆也宗友聖則頃向僑軒留住幾日而講論何書恨不得置身於其間以聽緖論也所敎兩集四卷僅以覓呈而頭流錄鄙俚沒實不合高眼然不敢終隱於老兄俟其脫稿以賭羈愁中一笑耳近聞痘疾熾於江岸至近之地雖未的知然而其在自重之道不可不愼幸詳爲探聽罕接外人如何只祝自愛加護以慰瞻仰 出古蹟中
류광렴(柳光濂) 1692(숙종 18)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숙명(叔明). 호는 임은(林隱)
묘갈 정재 찬
제산집
*送柳叔明 光濂 移寓
早把心期指歲寒。臨歧寧獨願加餐。靑山靜處無塵事。努力詩書爛熳看。
*류광렴이 제산종택에 보낸 간찰이 15편 있다.
유신적(柳信迪)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성오(省吾). 아들은 동암(東巖) 류장원(柳長源)
제산집
*輓柳省吾 信廸
左右試勿歎。聽我歌此詞。完山盛門閥。源流浩瀰瀰。近代驪州公。淸白邁等夷。至今所臨郡。父老口爲碑。惟君有豐資。堂構老不虧。淳淳儘忠孝。輕薄懷忸怩。匪獨內行修。亦能富文辭。神駒步驟遠。佳木拔地奇。美器藉先休。福履當如期。如何盛壯日。奄忽入泉逵。生作布衣士。死無承事兒。寂寂誦經堂。凉凉繐帷披。物理不可測。人命誰所尸。高堂迫頹景。寒閨泣孀嫠。問天天不語。叩地地爲悲。淸晨薤歌發。靈車逝安之。去此平生居。托彼蔓草虆。冥冥厚夜中。獨卧誰相知。重叟有孤魂。可以相追隨。
하서룡(河瑞龍) 1692(숙종 18) 상주
본관 진주(晋州). 자는 성칙(聖則). 아버지는 하자곤(河自崑)
경종(景宗) 1년(1721) 생원 2등 1위로 입격
*次河進士聖則 瑞龍 韻
蓬藋跫然喜足音。病中驚起罷愁心。十年離闊顔皆變。千里逢迎意共深。
旅榻論襟殘月落。高臺騁望夕陽沉。君今又向菁川去。不耐寒雲滿路陰。
유관현(柳觀鉉) 1692년(숙종 18)∼1764년(영조 40).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용빈(用賓), 호는 양파(陽坡).
아버지는 봉시(奉時)이며, 어머니는 아주신씨(鵝州申氏)로 통덕랑 이징(以徵)의 딸이다. 형 승현(升鉉)에게 수학하였다.
1735년(영조 11) 증광문과에 급제, 사헌부감찰이 되었다. 형 승현이 외직으로 나갔다가 죽자 벼슬을 버리고 하향하였다.
1753년 경성판관에 등용되어 사간·필선 등을 역임하고 벼슬에서 물러났다. 뒤에 장령과 형조참의 등이 제수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경성판관으로 있을 때 초하루와 보름의 점고에 빠진 남정(男丁)들로부터 받는 세금과 무세(巫稅)로 바치는 포(布)를 감면해주는 등 많은 치적을 남겼으며, 흉년에 1,000여석의 양곡으로 기민(飢民)을 구제하였다.
또,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시강관(侍講官)으로 있을 때 〈역도촬요 易圖撮要〉를 만들어 세자에게 《주역》을 가르쳤다.
저서로는 《양파집》 2권이 있다.
제산집
*柳正字用賓 觀鉉 爲問纍人。方季冬極寒。自花山故鄕。至極南海上晞陽之蟾湖。爲日凡一十有四。道塗六七百里。其義高。其情厚。其間關亦至矣。此當求之古人。今世未易得也。其發行之日。過川上。拜我老母而來。仍以老母之意。述一絶以示之。奉讀。不勝感懷。謹次之。
一作天涯禦魅人。慈闈久隔誨諄諄。感君歸路升堂拜。消息憑聞倍愴神。
*又用一絶。以謝遠訪之意。
冰雪關山道路難。故人千里到江干。別來懷抱何須說。且共杯樽數日歡。
*纍人前答用賓兄書。詑方丈之勝。欲其爲名山之遊。一來相訪矣。今幸命駕而至。而其意專爲問窮途故人。不肯作選勝之行。余語次頗譏之。用賓以一律自解。余用其韻。重致調戲云。
久詑頭流勝。今看跋涉來。輕舟宜往遡。中道卻旋迴。
不畏山靈誚。應嫌物色猜。知吾歸日遠。謾說共登臺
*方丈。南紀之名山也。與金剛,漢挐。幷稱爲三神山。距此不二舍。一帆可入洞天。用賓可往而不往。余欲往而不得。遂用前韻。以示慨恨之意。
瀛洲昔近住。方丈又移來。不乏仙區分。非關俗駕迴。
孤蹤長絆縶。衆目奈嫌猜。咫尺三神洞。空懷學士臺。瀛洲。漢挐別號。三神洞學士臺。在方丈山內。學士。卽崔致遠。
*連夜對話。頓忘羈懷。吟呈一絶。
門前車馬故鄕人。千里慇懃問苦辛。樽酒壁燈連夜話。不知流落瘴江濱。
*前夜。兒子誦李牧隱長律一首。至末聯爾自不歸歸便得。自傷欲歸而不得。遂用其韻。追叙患難首尾。以示用賓兄。
孤臣昔放漢挐初。六朔圓扉萬死餘。漲海鯨波三日過。異鄕蠻俗一年居。天恩特徙晞陽縣。賢躅猶存葛隱廬。多謝故人來訪意。洛江何日共樵漁。
*用賓兄贈迷兒詩。稱許過重。可愧而獨念患難以來。其呼號奔走之狀。有可傷心者。玆以實事步韻以謝。
憶昔蒼黃日。相隨獨此兒。極憐長啜泣。誰謂竟扶持。
跋涉關河熟。淹留土俗知。微渠調護力。吾豈到今玆。
*次用賓兄留別韻
南土三年謫。親朋五日歸。舊遊如爾少。絶域似人稀。
更酌離杯勸。無將摻手揮。驪駒聲欲動。搔首獨長欷。似人。見莊子謂似故鄕之人。
*用賓歸賦三絶。寄呈枕澗令公。
江林斜日喜跫然。玉樹臨門是惠連。更得臨川書一幅。客中懽慰最今年。
江潭憔悴歲頻遒。枕上時時夢舊遊。遙憶神山臺上老。不知誰與作風流。
風波一涉始知危。怕向人間說是非。惟有故人心尙爾。歲寒丘壑願同歸。
*答柳用賓書 戊午
阻鄕信。七箇月矣。思親憶弟之外。爲平日遊從之好。未嘗不起懷於雲樹之間也。家信此際適至。獲承兄遠惠情墨。眷念不忘之意。溢於牘面。驚感之極。不知所喩。書發已有月。未知邇間。起居復何如。旋切遠遡之忱。聖鐸到此以來。已涉三時。而脚部差完。父子姑無他疾。舘主不相猜嫌。凡百闕乏。往往有賴。但三夏之月。瘴霧無日不塞云。姑不知其爲甚。而此非殘瘁之氣所可堪也。然此身已付之造物翁。獨以思親日苦。爲難忍耳。西山父子之喩。何其比擬非倫而期望過重也。豚固不敢希九峯。其父尤不足爲西山之牛馬走。豈兄見愛之深。故不覺其駟不及舌耶。又况荒陬中無書冊。欲得四書二經。而不可得。往往父子嗒默相對。如兩軀石人而已。鄙韻不足煩諸人眼。凡眼猶不足浼。况高眼乎。且犴狴中作。尤不當煩傳少年輩。率爾播誦。以至於遠及海鄕。極爲不安。然兄旣見之。則以兄之贍敏。一瞬間。足可俯和。何不以一二篇寄來。慰此牢騷耶。伯氏令兄送詩二篇。想兄之念我。不及伯氏故然也。可呵。
*答柳用賓書
出陸之日。承拜情札。其感如何。而兒歸病未奉覆。想有以恕之耶。卽玆秋凉。伏惟靜履起居增相。瞻慰不任區區。聖鐸此行。豈夢寐所到者。旣離瘴海。稍近北土。縱不得歸拜慈顔。亦可以承聞消息。感戴天恩。但有血涕而已。但越海之際。重傷暑濕。在途又添撼頓。注泄之證。經月未已。客裏吟呷。苦狀備至。夜卧不能寐。但聞秋聲憀慄。衰髮爲之日白。憐歎奈何。昨夕強疾拓牕。對月獨坐。思親憶弟之外。又興懷於往時從遊之樂。而山河邈然。末由得之。只自悵然就枕而已。未知僉兄亦同此懷也耶。此地有方丈。兄所知也。又有岳陽樓,洞庭湖,君山,湘江之號。兄亦嘗聞之耶。巴陵岳州。不啻萬里。兄雖欲觀。必不可得。若能攀旬月之力。涉六七百里。則可見其似者。於兄豈不爲平生一大勝事耶。然兄恐不能辦。此弟之此言。得無近於馬耳之東風耶。好笑好笑。餘非遠紙可盡。
*祭文[柳觀鉉]
猗歟名門。世有聞人。篤生夫子。天稟絶倫。氷襟雪操。玉溫金剛。芻豢義理。菽粟文章。芝蘭播馥。蓮桂蜚英。蘊韜經綸。怵惕恩榮。欲遯而貞。何眷之隆。將進而跲。胡命之蹇。范庭慈敎。程涪易傳。天日未覩。鵩鳥告灾。哲人其萎。士氣沮摧。斯文誰托。後生何依。公與吾兄。異姓天倫。契誼旣深。臭味相憐。夤緣附托。公不我棄。追隨後塵。目染心醉。明時附驥。永擬矜式。世事缺陷。嶺海綿邈。白猿季冬。我訪蟾津。握手相看。隔世之顔。酒以導歡。詩以叙悲。十宵聯枕。未忍言歸。離袂將把。凶訃遽傳。伊日景色。傷心忍言。衰成之日。痛哭而別。歸葬一行。纍容再接。王憲有限。公不少淹。天涯地角。毋玉爾音。邇來數歲。問訊頗闊。余豈敢忘。世故多掣。嗟吾無狀。獲戾神祇。昨年春末。喪我伯氏。公以書問。慰諭勤懇。殄瘁之悲。阻闊之恨。稱道歎惜。寫出情曲。私心哀感。執書以泣。吾兄懿範。不可泯沒。知己信筆。莫我公若。不得公銘。無以壽傳。那知未幾。公又九原。和春斂跡。祥日韜光。萬事已矣。奈何乎公。西山旣逝。尙有仲默。善述有兒。公庶無慽。懷不可究。言不可長。不昧英靈。歆我情觴。
양파집
*訪金振伯[聖鐸]蟾津謫所[己未○以下蟾津唱和錄]
*挽金霽山振伯
*與金霽山[戊午]
*與金霽山
*與金霽山
*祭金霽山文[丁卯]
이복환(李復煥) 1692(숙종18~ 1727(영조 3)
본관은 재령(載寧). 자는 내경(來卿), 호는 노계(魯溪).
갈암 이현일(李玄逸)의 손자. 숙부 밀암 이재 문인
그는 일찍부터 태극도와 4 ‧ 7 이기설을 진력하여 연구하고 정밀이 분석하여 일가견을 이루었다.
제산집
校會爲李汝剛 復煥 返葬。移知舊書。丁未
伏惟秋凉。僉尊起居萬福。就煩錦水李密翁所遭。僉尊其各聞知否。春夏以來。喪威荐酷。行路爲涕。而至如李友汝剛甫。志行文學。不但稱其爲先生子孫而已。實是吾儕之所共推服者。而不幸短命。客殞於玉山數百里外。法門之偏割。善人之無祿。良可痛傷。卽今時月換易。已經五朔。而本家竆甚。無路返櫬。孤子之呼天靡訴。密翁之暮境傷心。尤令人於邑而哽塞也。某等竊以爲凡民有喪。匍匐救之。古之道也。今夫四海九州之人。猝然相遇。人非可愛。義不素厚。而苟有橫屍道路。無以爲葬。則莫不惻然。而思所以濟之。况以士林所宗仰之家。吾黨相愛重之人。而溘然他鄕。力不能歸葬。則凡在姻親知舊之列者。其忍恝焉而不爲之動心乎。古人有捐廩於貧交。付麥舟於故人之喪。而東坡於李廌方叔。爲哀其四喪未擧。旣遺之以絹。又作哀詩。而遍告於素相知者。使之各出財力以助其葬。則仁人義士之於故舊。其篤厚如此。某等心竊慨然於斯。敢因黌堂齊會之日。折簡奉告。冀有以協力相助。未知僉尊盛意以爲如何。斗粟一金之微。不妨其爲資救之道。而返客土之柩。窆淺土之喪。可以慰亡友之魂。紓密老之哀矣。伏願僉尊重加惻諒焉。
하서룡(河瑞龍) 1692(숙종 18) 상주 출신
본관은 진주(晋州), 자는 성칙(聖則)
아버지는 하자곤(河自崑). 경종(景宗) 1년(1721) 생원시 합격
제산집
*答河聖則書 丁未
人生而爲中表兄弟。可謂至親密戚。而不但道途云遠。相望落落。中間所罹禍變。彼此略相似。至於今日。顚毛種種。而迄未奉一日之款。赫牘存問。亦數十年不一及。此豈人情所宜然哉。每念之。不覺悵然而興歎矣。往在苫凷。乃蒙俯賜慰問。今又長牋遠辱。滿紙縷縷。無異合堂同席而語。感認眷意。不知所以爲謝。况審西轅纔旋。又渡江東遊。苟非萱闈氣力康寧。坦然無繫絆。何以辦此。爲之欣慰滿萬。聖鐸頑命苟延。企及之制。忽焉已畢。亡弟初朞。次第又過。俯仰天地。號痛莫逮。且老母自秋冬來。無數日安寧。今以胷腹之疾。委頓枕褥。私情閔迫。尤不可勝言。聖鐸於左右。雖未得一覯。嘗從士友間。稔聞左右文詞才氣。爲江西之英妙。不但終爲塲屋中一巨擘而已。乃今因書辭。得左右爲人尤詳。善哉。其志意之高遠而言論之不卑俗也。夫人患無其志。苟有志乎。雖鈍根下愚。尙可奮發磨礪。而有以自立。况如左右才雋器美。而其所自期待不沒沒又如此。則於以沈潛典訓。遡洄淵源。卒究古人不朽之業。而不負洪匀賦與之性。亮不爲難矣。奉讀盛誨。不勝歎服。但其中推借不佞。太不近似。令人忸顔汗背。欲竄地而不得。左右於不佞。旣有戚親情義。必不以衷曲所不然。而外爲虛辭溢語。以相侮弄也。當以生不識面。未及悉其鄙陋之狀。而親知中愛而不知其惡者。或過爲之延譽。以及於左右之聽。故左右謬認爲實。然而有此千萬不倫之諭。是不佞欺人。而左右爲人所欺爾。不佞雖甚癡騃。何敢晏然自居而不知恥乎。嗟乎。左右欲知不佞眞面目耶。少也。盖亦不無微尙。而質薄而材下。志懦而氣昏。上不敢希君子之學。下不能索性。爲擧子業。悠悠汎汎。虛老歲月。將不免同歸下流。無聞以沒世。來書所謂自分固陋已無可爲者。在左右固爲撝謙之過。而施之不佞。則眞著題語耳。幸左右察此情實。勿復錯料過推。以犯一言不智之譏也。雖然。蓬以麻直。玉以石攻。不佞雖已自廢。倘或賴天之幸。與左右早晩相聚。得以上下其論。而各貢其所疑。豈不彼此交有益乎。而行路阻脩。人間多故。合幷之期。杳爾難圖。今聞車馬八百里之內。而又不得奉展。瞻望高風。不任悵恨之至。此中有李密翁先生者。卽當世之宗工巨儒。而其從弟李君直丈兄弟及靑城權潤哉丈,豐山權方叔丈。盖皆士林之傑然者也。左右誠有志於學。不可不一來從遊。未知左右肯有意於此乎。深切企望。金陵數月之遊。其慰我舅氏思多矣。承示。卻恨不得同之耳。潭上可作書郵。幸因風便。時惠德音。以起頹懦。
이수연(李守淵)1693년(숙종 19)∼1748년(영조 24).
본관은 진보(眞寶). 자는 희안(希顔), 호는 청벽(靑壁).
퇴계 이황(李滉)의 6세손으로, 실(實)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의성김씨로 원외랑(員外郞) 학배(學培)의 딸이다.
가학을 이어받아 학문을 닦았으며, 1723년(경종 3) 생원시에 합격하여 1727년(영조 3) 음보(蔭補)로 후릉참봉(厚陵參奉)에 임명되고, 그뒤 동몽교관(童蒙敎官)을 지냈다.
1747년 익위사익찬(翊衛司翊贊)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예학(禮學)과 이기설(理氣說)에 밝았으며, 시문에도 능하였다.
죽은 뒤 관찰사 남태량(南泰良)의 상주(上奏)로 정려되고, 《국조명신록》에 기록되었다.
그는 퇴계 이황의 학문을 정리하여 《퇴계선생속집》을 편찬하였다.
저서로는 《청벽집》 4권과 《도산급문제현록 陶山及門諸賢錄》·《도산지 陶山誌》 등이 있다.
擬與李而靜 守淵 書
聖鐸再拜。仲夏黌舍之臨。得一宵聯枕而後。遂成阻隔。彼此因士林往還文字。一再附名外。不能以一字私相吐抒。每一念之。未嘗不歉焉若有負也。卽日秋氣陰冷。伏惟靜養學味有相。瞻慰之至。曷任區區。聖鐸今年星運不好。流離轉徙。愁居攝處者。半歲餘矣。又不能杜門守拙。仄跡士友間。卒乃重被口語。旋遘家禍。姪子夭殤。舍仲屢經癘疾。而聖鐸亦於夏秋之交。有採薪之憂。沈綿兩朔。僅以獲蘇。今又以親癠。未遑櫛沐。况味憒憒若此。豈足爲閒居靜便者浼聞耶。通錄事。轉相乖激。此豈獨爲敝鄕不幸而已。於魯邦諸君子。亦恐非美事也。聖鐸與足下。不幸而入於交和對壘中。雖曰情實無他。亦豈能坦然無疑阻乎。然聖鐸之心。則實不然。他日雖與國均,樂春諸人。相對歡然如平昔。未覺其有變也。况於足下愛我厚知我深者乎。然未知足下之心。亦能如我否也。且聞足下云。吾於某。不能無疑恠。是足下之怒我罪我。雖不如他人之甚。而謂之坦然無疑阻。則果未也。於斯時也。而恃平日知愛之厚。欲效其肝膈中語。則得不爲傍觀者所笑。而益增貴鄕人士之怒乎。然區區愚衷。終有所不能自已者。何也。昔程子書胡本之錯。不過以沿爲泝。以姪爲猶子等閒漫數字而已。朱子之於張,劉二公。攻之不遺力。責之不少恕。南軒至以怒髮衝冠等語。譏其言之太過。然未聞張,劉二公。以是貳於朱子。亦未聞朱子因是而遂絶二公也。盖義理所在。所見不同。則所當極言痛辨。辭氣之間。雖或過於峻激而無傷也。往復之際。雖至於煩瀆支離而無咎也惟以一毫私意。一點血氣。參錯於其間。則爲未可。今此貴鄕所爭諸條。其關係不止如朱,張所論程子書字義之可否。則貴鄕君子。心有所疑。爭之固可也。爭之而不合。則極論之亦可也。而但必欲使敝鄕。強其心之所不然。而一惟貴鄕之命是從。則不可也。夫我之不能使人爲我。猶人之不能使我爲人。若每言而人莫余違。則自古安有是非可否之爭。且一再不合。而不要其終。遽爾誅斥。汲汲然討罪之如不及。則自古亦安有始參差而異序。卒爛熳而同歸之美哉。是殆不免私意血氣之所累。義理何由明。而可否是非何由定乎。此聖鐸所以忘其固陋。不恤其疑阻。欲一以私。反復於足下。以究竟士林未結之公案者。非徒逞己見務己勝而已。盖將盡吾之意竭吾之論。以求明者指迷之賜也。願足下以朱張二賢之心。聽之可乎。夫責鄕所執言以爲敝鄕之罪者。凡六條。足下高明之見。亦終始以爲不可耶。足下旣有淵源之所漸。又潛心此學之日久。見識之精博。非儕類所可及。乃於此數條。執之如此其確。爭之如此其力。此必有見得是守得正者。而聖鐸等固陋蔽惑。不能有所喩也。雖然。人各有見。敝鄕於此。亦豈全然無所執乎。亦豈徒爲權學士地。而不念其有所未安於老先生言行也哉。盖年譜之附於文集。而又編於是錄。其謂之架疊也似矣。然伊川年譜。旣錄於遺書之下。而又載於淵源錄。朱子年譜。旣作一部書。特行於世。而又載於實紀理學等書者。何也。寒岡禮說中。不入家禮。固有所見。而性理大全。則不止家禮。如通書,經世書,皇極篇,律呂新書等諸書。莫不編入。前後君子之論。曾不以爲煩猥者。又何也。然則雪翁之編年譜於此。其有所据明甚。而凡例中所謂言行出處類編詳矣。又据年譜。考校歲月。又更詳核云者。又自有深意。此敝鄕之不敢拔去者也。前集註解。謂之閒漫文字。而不必載錄云者。亦近矣。然朱子語類中。論古人詩句。而或爲之解說其義。或評品其巧拙者。不勝其多。後之編稡者。不以爲閒漫。而悉收無遺。至於老,莊,列異端之書。吾儒所宜禁絶。而其文義句讀。前人解未盡者。朱子亦多論釋。而語類莫不載焉。未聞有以爲不緊而欲去之者。則雪翁之錄前集解。其可謂無所倣乎。况凡例中。所謂精言妙解有益後學云者。盖亦見其有所感於心。而今因此役。一再繙看。其中有關世敎涉義理勸善而諷惡者。亦自不少。則是豈可不錄乎。此敝鄕之不敢刪沒者也。門弟子所記。固有一言一事。而各記其所聞者。然其或上語同而下語異。或下句同而上句異。其於先生言行。要皆有所發明。而不可以偏棄。則雖多至四五條。盡錄何妨。惟上下語句無一異同者。求之錄中。未之見焉。則雪翁其果無所見而泛錄乎。貴鄕文諭中。動必引論孟及程朱語錄。今以論孟考之。無論其一言而重出者。卽指同而文少異者。如論語之不患人之不己知。凡幾見。孟子之不受祿不見諸矦等語。凡幾出而朱子或以爲聖人丁寧之旨可見。或以爲合而觀之其說乃盡。未嘗以其繁複而爲嫌也。至於程朱子語錄。則若此類尤多。載於東見錄者。又載於入關錄。見於李端伯師說者。又見於劉元承手編。而可學錄,必大錄,賀孫錄,人傑錄。其複出者何限。然朱子之編遺書外書也。旣錄此。又錄彼。池饒二州之刊語類也。不以彼而遺此。然則古來編書之法。烏可謂無此體例乎。此又敝鄕之不敢承命於貴鄕者也。若夫堂后日記中。立社本意。先生考出替達之事。略見於秋淵錄。而其考某書達某說。未之傳焉。雪翁特引郊特牲。以注其下。而貴鄕僉議必欲刪去之。聖鐸等亦未始牢執以爲不可。然以其實論之。生於千載之下。欲討千載上典禮。舍六經四書。無可考信。而易彖象十翼中。不及社。儀禮。不論社。春秋書郊社。而主褒貶善惡。不言其義。周禮大司徒封人。掌設社稷。而所載者法制而已。詩之方社不暮。迺立冢土。書之不用命。戮于社。乃社于新邑。論語之此章。孟子之變置社稷。中庸之郊社之禮。其言各有所指。而本意則未嘗及焉。獨禮記中。言社稷處非一。而求其說本意最詳明者。盖莫如郊特牲。則欲就六經四書而考立社之義者。豈可遺郊特牲而求諸他書乎。下此而論社稷者。莫備於白虎通。然此乃漢儒班固等所纂。雜引經傳及尙書亡篇,春秋援神契諸書。而其於本意。亦無甚發明。則先生所考出。其必不舍六經最詳明之說。而反取後世駁雜之傳記也明矣。雪翁補註。盖亦有以焉。豈徒爲示己見哉。然以爲門人諸錄中所不傳者。後人不必補而欲去之。亦可矣。惟以爲未安於先生。則吾不知也。先生天資近道。自十二歲時。已知事之是者爲理。則秋錄所謂十七歲。始知有此學而有企向之心者。固若可駭。然足下以此學。爲小子之學耶。抑以爲大人之學耶。如果以爲大人之學。則孔子之大聖而曰。吾十有五而志于學。明道之大賢。而其弟伊川先生。述行狀曰。十歲能爲詩賦。十二三時。如老成人。至十五六。聞汝南周茂叔論道。遂厭科擧之業。慨然有求道之志。而未知其要。出入於老釋者十年。反求諸六經而後得之。然則明道之知此學。盖在二十歲後。而不害爲孟子後一人。橫渠則十八。因謁范文正。始知讀中庸。猶不免求諸釋老書。至嘉祐初。見兩程於洛陽。論道學之要。乃始渙然自信。盡棄異學而醇如也。是時。橫渠年已三十矣。其知此學。可謂甚晩。然其門人呂與叔。以此具載之狀中。而不以爲嫌。至於朱子。則五歲。入小學。八歲。通孝經。沙上畫八卦。問天與日所附。皆十歲以前事。則其天賦聰明爲如何。而行狀乃曰。少長。厲志聖賢之學。其曰少長。則盖指十五歲以後矣。年譜則又曰。先生學靡常師。出入經傳。汎濫釋老者有年。及見延平。始悟異學之非。讀聖賢之書。覺得有味。朱子之見延平。在紹興癸酉。則其專意此學。卽在二十四歲矣。然則秋錄所謂知此學者。卽謂其如孔子之志于學。明道之得於六經。橫渠之棄異學而醇如。朱子之悟異學之非而味聖賢之語耳。而先生之知之而企向之。乃在十七歲。則比孔聖雖後一二歲。而視程,張,朱三夫子。亦已蚤矣。其於先生。何病之有。且其所錄。不泛論十七八。而特稱十七歲。不曰已知。而曰始知。則是或先生自言入道之年如此。而秋淵因而詳記之耶。未可知也。然則此亦豈可容易去之乎。若夫性字之說義理大原頭。不厭其詳。請極論之。性固理也。不可以雜氣言。貴鄕君子之論。足以救末學認氣爲性之弊。鄙等於此。非敢有異同。但堂后日記中。此一二句文字義理。本自無病。乃貴鄕君子讀之不仔細耳。夫所謂氣以爲形者。言人受天地之氣。以爲形也。其下乃曰。理具於其中者。卽所謂性也。則此言形氣中。所具之理。乃性也云爾。所謂其中之其字。卽指形氣而言也。天生烝民。有物有則。物者。形氣也。則者。性也。天下未有無理之氣。亦未有無氣之理。則指其形氣中所具之理。而謂之性者。豈有一毫帶氣論性之嫌乎。所謂本然之性者。亦不過就氣質中。剔發其純善之理而言也。其實非氣質之外。別有本然之性。懸空獨立也。猶太極圖上面一圈。只就陰陽圈中。挑出其無極之眞而言也。其實非陰陽之外。別有太極之理。兀然特存也。若如貴鄕之論。則是無天地而獨有太極。無人物而獨有性。天下。豈有此理耶。朱子曰。性只是理。然無那氣質。則此理沒安頓處。又曰。氣不可謂之性命。但性命。因此而立耳。又曰。氣質之性。便只是這箇天地之性。卻從那裏。過此。皆指形氣中理。而謂之性之證也。又有一段。與此正相似者。曰天地之所以生物者。理也。其生物者。氣 天氣 與質 地質 也。人物。得是氣質以成形。而其理之在是者。則謂之性也。此其文勢語意。果有異乎否也。今以器盛粢。以櫝貯玉。而爲之說曰。簠簋以爲器。而穀在其中者。卽所謂粢也。文梓以爲櫝。而寶在其中者。卽所謂玉也。雖三尺童。皆知粢之爲粢。而玉之爲玉也。此與所謂氣以爲形。而理具其中者。性也者。何以異也。而貴鄕君子。乃獨以爲帶氣論性。是攻人之說器中之穀而謂之粢者曰。何以幷簠簋爲粢也。說櫝中之寶而謂之玉者曰。何以幷文梓爲玉也。其可乎哉。且貴鄕君子。以敝鄕回諭中。有所謂性者。以此理之墮在氣質中而得名云者。謂悖於理。大加非斥曰。僉尊讀。書數十年。只會得氣質之性耶。又曰。信斯言也。天地中間。從古至今。人生稟受之性。直是氣爲之主。而無所事於理矣。其辭氣峻厲。譏諷深切。使人慚愧悚蹙。有不敢復開口者。然聖鐸等。亦豈都無所據而敢云爾耶。區區強辨。不足以溷聽。請復引聖賢之說以證之。朱子曰。人生而靜以上。卽是人物未生之時。不可謂性。纔謂之性。便是人生以後。此理墮在形氣之中。不全是性之本體。然其本體。又未嘗外此。要人卽此而見得其不雜於此者耳。又曰。纔說性字。便是以人所受而言。此理便與氣合了。但直指其性。則於氣中。又須見得別是一物始得。又曰。若論本原。卽有理然後有氣。若論稟賦。則有是氣而後理隨以具。故有是氣則有是理。無是氣則無是理。又曰。性者。渾然天理而已。纔說性時。則已帶氣矣。所謂離了陰陽。更無道。此中最宜分別。試使足下。平心以觀朱子此數款語。果與堂后所記之意。有毫髮差殊乎。敝鄕文字中。所謂此理墮在氣質中。而有性之名者。果爲無稽之說耶。且非惟朱子之說爲然也。推而上之。張子雖論天地之性。而又曰。合虛與氣。有性之名。程子雖云性卽理也。而又曰。論性不論氣。不備。二之則不是。孟子雖爲告子之流。以知覺食色爲性之弊。而力言極本竆源之性。然猶曰。形色。天性也。是豈眞以形色爲性也哉。盖以形色中所具之理。謂之性也。又曰。犬牛與人之性不同。若以原頭處言。則人與物同稟一理。豈有不同。而由其氣質各殊。故所賦之理。亦不同。然則孟子亦何嘗遺形氣而獨論性乎。至孔子則又直曰。一陰一陽之謂道。繼之者善。成之者性也。而朱子解之曰。繼之者善。氣之方行而未著於物也。成之者性。氣之結成一物也。又曰。繼之成之。是器。善與性。是道。此其言理在器中。爲性之意。尤爲明白矣。推而下之。其曰。天地之性。實不離乎氣質之中。人之生。不成只空得箇理。須有箇形骸。方載得此理者。北溪陳氏之說也。其曰。人生以前。不喚做性。旣生以後。方喚做性。便衮在氣質中者。雙峯饒氏之說也。其曰。性之不能離乎氣。猶水之不能離乎土者。西山眞氏之說也。臨川吳氏。則又加詳焉。曰孟子道性善。是就氣質中。挑出其本然天理而言。又曰。張子所謂形而後有氣質之性。善反之。則天地之性存焉者。最分曉。而觀者不能解其言。將謂性有兩種。不知天地之性氣質之性。兩性字。只是一般。非有兩等性也。夫自孔子而下至宋諸儒。莫不就氣中。指其所具之理而謂之性。欲令人於其不相離處。見其不相雜而已。曷嘗有獨言性而不言氣者乎。亦曷嘗有謂本然之性離了氣質。而獨存者乎。使貴鄕君子觀此諸聖賢之說。亦將謂只會得氣質之性耶。又將以此謂天地之間。人生所稟之性。直氣爲之主。而無所事於理者耶。非惟前世聖賢之說爲然也。惟先生之言。亦多有如此者。答李公浩論五行之性曰。行於天者。是氣。具於地者。是質。氣質中。必有所以然之理。是性也。答奇明彥書曰。天地之性。固專指理。不知此際。只有理。還無氣乎。天下未有無氣之理。則非只有理。又曰。論性而理在氣中。答李宏仲書曰。性非有二。只是不雜乎氣質而言。則爲本然之性。就氣質而言。則爲氣質之性。今認作二性看。誤矣。足下又試看先生此數語。與堂后所記。有何大相遠也。其亦將謂之只論氣質一邊耶。先生又答禹景善別紙曰。朱子釋天命之性處。先言以陰陽五行。化生萬物。氣以成形。而理亦賦焉。盖理不能獨行。故將說理處。先說氣。其意非以氣爲理。而衮作一片說也。若見先說陰陽五行。而謂天命之性。兼氣說。是全失朱子本意。愚亦以爲人見堂后所記。先說氣以成形。乃謂理具其中。所謂性也者。帶氣說。是全失先生本意。今質之以先聖賢之言。參之以先生之訓。堂后所記。果謬乎不謬乎。性之爲性。其果不以此理之墮在氣質中而名之乎。聖鐸竊料貴鄕君子。必於心統性情中圖。見其獨言性之本然。情之善一邊。而有此云云。然卻不思下圖。又就氣質之性而言之。先生所爲說具載圖下。極其分明。可考而知也。由此觀之。心統性情之性。在中圖。則爲本然之性。而所謂本然者。未嘗不在乎氣質之中。在下圖。則爲氣質之性。而所謂氣質者。未嘗不具乎本然之理也。若如貴鄕之論。則是只存中圖而廢下圖。然後爲庶幾焉。雖存中圖。亦必改圖傍分註所謂就氣稟中。指出本性八字。然後爲無病。此豈先生立圖之意哉。不但此圖。以天命圖觀之。則受天地陰陽之氣。以爲頭圓足方之形。而仁義禮智之性。具於其中者。不啻八字打開。願足下試取心統性情上中下三圖及天命新舊圖。而更加硏究。又於聖鐸之所引聖賢之說及老先生之言反復參訂。則可知堂后所記之無甚乖謬。而其必欲白而圈之。或黑之者。有所未之思也。如何如何。年譜中刪十許字。非必以其語爲有病而刪之也。紀事纂言之體。務從簡約。不必盡載本文。况此段自上。只問心之所以統性情之義。非問性情二字之訓也。而心者。合理氣云云以下。備言統性情之義。則卽所謂性也以下十數語。雖無之可也。故刪之而就約也歟。年譜中如此處甚多。若以其刪之而遂疑其語之有病。則如天命圖後說。心無體用辨。六條疏等所刪處。率十之五六。此亦以其有病而刪之歟。昔朱子病世之學春秋者。多鑿說。引漢末盜發霍光壻范明友奴冢。奴猶活。說霍光家事。而爲學者言曰。今如此穿鑿。恐一朝有於地中。得夫子家奴出來。說夫子當時之意不如此爾。愚亦恐柳先生家奴一朝自地中出。說柳先生當日刪節之意不如此。未知貴鄕君子。將何以解說耶。且此段之病。果在卽性也。一轉語而若去此句。粹然無病。則異日先生。以筵中所對爲未洽而改定以示奇高峯也。但當刪此一二句而已。何必盡改一段乎。然則其所謂未洽者。亦以其於心統性情之義。有不分曉爾。非必以此一語爲未洽也。况氣爲形而理具其中八字。旣存而不刪。則所謂理具其中者。非性而何。果是性也。則卽所謂性也一句。存之有何病痛。而去之何獨粹然無病也。西厓之刪之也。以雖刪此一句。而性字之義。自在其中也。貴鄕之論。必欲使理具其中四字。別爲一物。而不欲以性字當之。是貴鄕君子看年譜。亦不仔細耳。如是而不知自反。乃反責人之挾了勝心。不細入思量。可乎。總而論之。編年譜。欲其於先生言行出處本末。按歲月盡其詳也。錄前集解。欲其見大賢精鑑博識。雖於文詞詩句之末。亦皆深造妙達。發註家之所未發。而其推說之際。餘味之無竆。則又足以使人興起也。一言一事。而或不免重錄者。欲使人於其文少異語少別處。各求其旨義之所歸也。郊特牲之補註。使後學之欲知立社本意者。不迷於考檢也。錄十七歲而知此學者。欲令後世知先生於童子時已知聖學之正路。而無他歧之惑也。錄心統性情之說者。欲使學者。知人之性雖不雜於形氣。而實不離乎形氣之中也。以愚所見。貴鄕所爭以爲乖謬而未安於先生者。皆爲有功於斯文而爲惠於後學也。且貴鄕君子以文集之無序。行狀之未成。爲此錄不可輕刊之一大證。此又可疑之甚。天下古今之書。莫尊於六經四書。而伊川序易。胡文定序春秋。朱子序詩序庸學。蔡九峯序書。賈公彥序周禮。陳澔序禮記。下此而爲後學所尊尙者。宜莫如濂,洛,關,閩。而朱子序通書及遺書外書。伊川之子端中序伊川文集。胡五峯序正蒙。明儒序朱子大全。節要之尊重。無遜於大全。而無論先生弁卷之文。黃錦溪印于星州而爲之跋。奇高峯亦跋定州本。豈以其書之尊而不可爲序跋乎。以行狀言。則明道,橫渠,晦庵。皆有狀。獨伊川無狀。然此則以伊川。嘗自謂我狀明道之行。我之道與明道同。後之欲知我者。求諸此文可也云。故門人不別爲狀。其可以伊川之無狀。爲高於明道,晦庵也哉。然則先生文集之無序。行狀之未成。恐是一時未遑之事。於斯文。實爲欠觖處爾。其不可以此而爲今日證援也。若其所謂記錄之誤。程,朱門人之所不免。諸賢所錄。安保其無一處可疑一毫未盡云者。誠是矣。貴鄕君子以此而泛論之。則敝鄕之人。亦何敢必其無可疑與未盡而爭之久執之堅哉。惟以所謂六條爲譌舛。則甚不可。以不刪此六條。爲吾黨之罪斯文之羞。則大不安。幸足下一以公平之意。從容覽察。覈其是非。如有鄙說乖舛處。更加駁示。千萬幸甚。
정옥(鄭玉)1694년(숙종 20)∼1760년(영조 36).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자성(子成), 호는 우천(牛川).
서원부원군(西原府院君) 좌의정 탁(琢)의 5대손으로, 동지중추부사 석제(碩濟)의 아들이다.
권두경(權斗經)의 문인으로 어려서부터 담대하고 기지가 있었다.
1725년(영조 1) 진사가 되고 1727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지평을 거쳐 대간이 되었는데, 시무(時務)를 조리 있게 고하며 이해에 좌우됨이 없이 간언하여 영조의 특별한 신임을 받았으며, 1759년 좌승지에 올랐다가 황해도관찰사로 부임, 임지에서 죽었다. 청렴하여 백성의 존경을 받았다. 우천선생문집(牛川先生文集)이 있다
제산집
*答鄭子成 玉 書 甲寅
積歲阻奉。忽得惠書。驚感何量。且審冬寒。驅馳原隰。起居珍衛。區區傾仰之私。又不任慰幸。聖鐸比遭家禍。小弟夭歿。奉老情地。倍萬悲痛。方慘悴無人世况味。而不意虛名欺世。誤恩仍疊。至於向日三接之禮。尤非愚賤微分所敢承當者。惶蹙隕越。無地措躬。且以城中痘患。未免呈還。曾不一月。又蒙僕簿除命。恩數彌隆。愧懼彌深。而痘忌未淨。更難冒進。不得已在家呈辭。分義不安。去而愈甚。方此踧踖戰兢。不敢寧處。而左右顧乃未究情實。反以不樂仕進等語。枉相假借。申之以勸勉之諭。左右之意。則誠可感矣。謂之相知則未也。慚悚慚悚。
*答鄭子成書 己未
出獄之日。荷送言贐墨之惠。雖在扶曳蒼黃中。鐫感則深矣。顧以不得面別。耿耿於中矣。匪意伏奉惠書。且審徂玆動靜。何等感慰。纍人罪戾深重。謂當埋骨蠻鄕。而不自意出陸到此。天恩可謂罔極。感泣之外。復何云云。惟以遠隔老母。歲且三易。而西景漸迫。反面無期。爲私情痛迫耳。且至親凋落。凶報相繼。賤疾經年呻喟度日。這箇情况。寧復暇及於溫理舊業耶。每承相愛間責勉之語。不覺汗顔而愧中也。吾兄年紀尙富。聰明未衰。而逸步暫蹶。閒居無事。正好趁此暇日。究心於古賢哲士之遺。則將來復起。爲當世用。不但爲朝著間一名士而已。則豈不令吾嶺吐氣而竆途故人。亦豈不與有榮焉。此實纍人之所望也。餘懷書何能盡。只祝侍奉增慶。
牛川先生文集
*與金振伯聖鐸
伏聞,高名一出榜中,朝野拭目,晝接恩遇,曠絶千古,使一世聲利場人,始知科目中,亦有吾儒法門,其有光於聖朝,而有補於世敎大矣,甚盛甚盛,伏,想榮還有日,懽侍起居膺福,玉頃到巖亭與一甫戚,諸人相賀,仍約以聯轡,踵門同慶,於彩服稱觴之日,老人宿病,近復彌苦,勢難離側,莫之遂計,此亦數也,第切瞻悵,敢將尺書,替伸萬一,今榜仁鄕諸彦拔茅,得人之多,足爲國家賀,爲儕友賀,如金源仲,未及榮還,旋遭重制,爲之驚愕不已,
*與金振伯
日前因邸報,伏聞行駕翩然入城肅謝,繼而有晉接之命,伏想,養德山林,初登前席,必以平日所得於心者,仰副聖上虛佇之念,而爲薦紳所觀瞻,其有光吾嶺,尤大矣,但念,雅趣不樂仕宦洛下,且有忌火政未免,因此求退,然朝家若處之以常調蔭銜,仍欲出入經筵,以備顧問,則義難有決然遄去者,此亦近來待士之一例,伏未知何以處之耶,古人於仕久止速之間,由道據德行之所安,其出也,非由勸勉,其去也,不可挽留,竊想,有冷煖之所斟酌,而非他人可能與議矣,玉久此遠遊,苦未脫,去不得,與李舟汝追隨徵逐,共聽緖論於旅榻閑靜之間,此亦一身關係不少,奈何前頭,竢覆審幹,當歸路入京,庶可從容承拜,切計切計,溪上李丈,復職可慰,亦有越次輪對之命,可見天眷不偶矣,
*與金振伯
臺職卽遆,庶副林下閑養之願,而竊恐匪久,更復不免且聞洛下,人言辭疏附進數語,扶得吾嶺已摧之士氣,其有補於世敎大矣,恨此僻居,未得奉讀原本,
이만용(李萬容) 1694(숙종 20)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휴언(休彦).
조부는 이조판서 근곡 관징(觀徵). 아버지는 이협(李浹)
형은 이만령(李萬齡). 동생은 이만굉(李萬宏). 이만정(李萬定).
제산집
*與李休彥 萬容,仁仲 萬宏 書。己未
久不奉書。瞻歎徒切。日昨家便。因兒書。知禫制已闋。不勝愴然。伏惟僉孝思不以外除而有匱。哀慕莫追之痛。何以堪處。卽日炎暑漸進。不審大夫人氣體如何。侍下僉履亦何似。遙切慕慮。不任區區。纍人病狀。比前稍勝。而竆途百艱。轉益難聊。奈何。惟以鄕信之來。得聞老人平報爲慰。然三歲閭望之苦。又不得少慰於大霈之辰。爲子不孝。一至於此。只自痛心而已。纍人自三十一歲。猥辱先尊丈知遇之恩。首尾二十餘年間。眷愛之心。有加無衰。而私心嚮慕之誠。亦未嘗一日而有間也。豈料三霜之內。終不得一酹於筵几之下。而漠然若平生踈逖之人哉。世間事有出於情理意慮之表者。往往如此。嗟乎悲哉。春半以後。鄕便久斷。替慰之忱。亦未克遂。僉兄豈或俯諒而矜恕也耶。八朔呻吟。形身俱瘁。髮白齒墮。全沒好况。乃知涪髭勝昔。誠大賢事。非末學所敢妄希而勉及也。還可笑歎。
이유원(李猷遠) 1695(숙종 21)∼1773(영조 49)
본관은 재령(載寧). 자는 굉보(宏甫), 호는 냉천(冷泉),
어려서 종조부(從祖父)인 이재(李栽)에게 배워 장래가 촉망되었지만, 약관(弱冠)의 나이에 부모가 구몰(具沒)하고 가세가 크게 기울었다. 그러나 어려운 환경을 극복하고 학문에 진력하고 위선사업(爲先事業)에 힘썼다.
*次李欽夫 猷遠 留別韻 幷序
李友欽夫。爲問纍人。自丹丘。跋涉六七百里。至南海上晞陽之蟾津。其意甚勤。有古人之風。留五日晤語頗欵。撫念今昔。繼之以愴然也。臨別。以七言近體二首及追步老先生兩絶韻。留贈。纍人病不能盡和。爲次長律一韻。以抒別懷云。
三載孤吟澤畔行。覆盆無路覩天明。葛村故宅依賢躅。蠻海長塗感友情。
五夜客心悲且喜。幾時天道缺還盈。他鄕送別無竆意。欲和新詩句不成。
*答李欽夫書 癸亥
鄕信之來。獲奉春末所惠書。披復驚感。不啻尋常。卽日秋晩霜冷。不審僉學履起居如何。纍人頑喘苟延。喪制之畢。忽已屢月。終天罔極之痛。無復少洩之期。直欲溘然無知。而不可得。奈何奈何。如纍人流落竆途。年且六十。衰朽凋落。固無可論。欽夫足下。年紀較後一甲。加以靜養之力。又何爲而有緣愁白髮之歎也。向來少壯遊從之人。太半爲鬼錄所占。幸而存者。其衰老又如此。而涯角杳然。無由及此桑楡之餘景。隨時招攜娛樂如平時。歎息如之何如之何。洪範衍義中注䟽之備載。雖有先儒采輯之舊例。然間或有繁蔓重複合商量處。故前於遠臨之日。僭有所云云。今承就權丈處。相議刪節去取之間。想無不盡。旣以爲幸。又恨不得參聽餘論也。
김도흠(金道欽) 1695(숙종 21) ~ 1756(영조 32)
본관은 의성(義城). 자 행언(行彦). 호 월봉(月峰)
조부는 방찬. 아버지는 항중(恒重)
次再從弟行彦 道欽 韻。卻寄。
九載淹殊域。三春憶故園。消愁傾竹葉。扶病斸苓根。
困厄皆臣罪。生全摠聖恩。還慚惠連弟。千里賦招魂。
令弟能相憶。淸詩爲寄來。眞同夢池草。何啻贈江梅。
故國山川遠。他鄕歲月催。丹心猶未折。誰識楚臣哀。
김세릉(金世錂)1696(숙종 22)∼1753(영조 29).
본관 의성(義城). 초명은 세주(世鑄). 자는 미중(美仲 初字 愚仲). 호는 성재(省齋).
하중(夏重)의 아들. 외조는 漢陽 趙德培. 妻父는 漢陽 趙是剛. 李栽 門人. 筆法에 능함. 일찍이 과거를 단념하고 族兄 金世鏞과 학문을 강론함. 저서:『省齋集』
「墓碣銘」(柳致明 撰)
*次美仲韻。卻寄。
晩歲功名誤此生。如何不學老農耕。十年瘴海兼衰疾。千里關河隔弟兄。
經傳舊聞嗟已喪。箕表遺業愧無成。願君努力詩書敎。莫使寥寥講誦聲。
이 장(李槳)1696(숙종 22)∼1737(영조 13).
본관 전주(全州). 자는 숙통(叔通). 호는 호산(毫山).
조부는 선(瑄). 아버지는 인부(仁溥).
1719년(숙종 45) 생원시 합격, 1723년(경종 3) 문과 급제.
兵曹正郞 역임. 문장에 뛰어났음.
저서: 호산집(毫山集). 行狀 강좌 권만(權萬) 撰
제산집
*過基川。馬上口呼。要李叔通 槳 和韻。
朝發三溪上漢京。基川落日客愁生。若非同志相攜去。難慰離親遠役情。
*登竹嶺。次叔通韻。
淸晨立馬竹關頭。眼底茫茫七十州。共是思親遊子意。白雲東望不勝愁。
이태환(李台煥) 1697(숙종 23)~1774(영조 50)
본관은 재렬(載寧), 자는 공섭(公燮), 호는 성헌(惺軒).
은(檼)의 第4子이다.
1733년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1738년에 서원철폐령이 있자 任事者로 추대되었는데, 의리로 논쟁해야지 多士들을 거느리고 힘으로 해서는 안된다고 하면서 거절하였다. 안동부사의 초빙으로 안동훈장, 향교와 서원의 원장을 역임하면서 정주학을 강론하였다. 金聖鐸과 金樂行과 우의가 두터웠으며, 李象靖과 李猷遠과도 교유하였다.
저서는 <惺軒集>이 있다.
제산집
*答李公燮 台煥,景儀 鳳煥 書。
竆途流落之人。猥荷平生舊要如二兄者收拾而記錄之。遠辱書問。辭意勤款。此自二兄高風厚誼。顧此竆纍。其何以堪承哉。且感且愧。不知攸謝。書出二月中旬。計今已易三朔矣。未審僉兄懋學外。起居眷集均勝。如書中所報否。千里嚮遡。不任忉忉。纍人不自審量。妄觸時諱。以至於此。其得全首領。天也亦聖恩也。復何云云耶。牢狴之日。貽老母無限憂念。及此流落。又隔堂闈於數千里之外。半歲之間。消息不一相及。自古放臣逐客。不止一二。亦有離親遠謫者。而親年之篤老。道路之遠惡。患厄之酷慘。豈有如纍人所遭者乎。况仁山之禍。由我而嫁之。宗姪之逝。由我而促焉。俯仰天地。此恨此痛。將無時可釋。雖使古之有達觀定力者。當此情界。亦未必其恬晏而處之也。况如聖鐸之怯弱懦孱者。安能免摧銷戚促之累耶。僉兄之所勉戒。意厚矣。情摯矣。寧不知感。而奈不足以奉承何。秖自愧歎而已。病脚今已能步。寢食亦如平常。但腰痛方苦。坐臥皆不安。獨直身而跪則稍可堪。無乃二豎者。憎我之惰慢。而欲納之於收斂撿束之域耶。但持敬工夫。若是辛苦不快活。則誠難下手矣。好笑好笑。每於燮兄。好相調諧。故舊習不覺露於信筆之際。甚愧明誠夫子之東銘語也。萬萬書何能悉。惟祝各懋崇深。勉思繼述。以慰遐想。
*贈李公燮序
余聞東海上。故稱多奇士。然地遐僻。鄰鼉魚。土風謠俗。或貿貿焉。明萬曆間。有縣監安陵李公。以文學顯于時。退而淑其鄕。詩書之敎始行。至其子石溪公及其孫存齋,葛庵諸先生出。而明道學。蔚然爲儒林所宗。則嶺海之間。彬彬大變。與鄒魯間儒風相埒。餘澤未遠。世出賢髦。後生之秀者。吾友公燮其人也。余自弱冠。往來海上。與公燮伯氏韜彦定交。公燮時爲兒嬉戲。穎脫不凡。吾固已目屬之。已而韜彦不幸早夭。其後公燮日益長。有俊才。力學爲文詞。余旣悲韜彦短命。不得成其器業。而其目屬公燮愈甚。情義相與。骨肉無間也。丙申夏。公燮娶吾宗姪之女。歲再三來。來或踰月而歸。余時時造其館。同居處調謔。間抽古聖賢書。討論其微奧。確乎其辨之不惑也。操筆硏。與之習擧子業。燁乎其詞句不陋也。又尙論古今人物。志業高下。文章汙隆之等。渺然有高世俗之見。余於是心竊畏且慕焉。非但目屬之而已。嗚呼。公燮固質美而才俊。然使其家世。無大人先生講詩禮以遺敎者。又焉能耳目開達如是哉。韓子所謂能守其家業者。公燮其殆庶幾矣乎。雖然公燮其將以是爲自足而已耶。抑猶求進益也。吾聞朋友輔仁責善。人必求備。古之道也。余幸忝居下交。請效一言之益可乎。孔子曰。君子不重則不威。學則不固。又曰。辭達而已矣。孟子曰。君子先立乎其大者。公燮於斯三言。盖已誦而習之矣。其果能服膺焉爾乎。余竊覸公燮。氣或銳而不足於凝靜。文或奇而不入於雅馴。志意雖亢。而遠大之基或未立也。公燮以是三者。日省乎其身。而從事於前所稱三訓。然後是可謂眞能世其家者。公燮以爲如何。聖鐸少駑劣。志行藝業。俱不逮公燮遠甚。而齒獨過之。將不免無聞以老死。則其不暇責人。而且自責矣。然間者。聖鐸嘗拜公燮之尊府大人於碧溪上。以聖鐸之從公燮遊。眷待之甚厚。且以山石攻玉之義。望我於公燮也。余謝不敢。然于心載之不敢忘。今因其歸覲。爲文以勖之。戊戌暮春之某甲。金聖鐸振伯。序。
*祭文[李台煥]
昔我叔祖。倡道東南。有來如雲。攀化平林。公時在丱。亟去摳衣。聖賢經傳。理義淵微。言下便會。有唯無疑。叔祖賞之。曰道有歸。正路坦坦。爾車已脂。一推斯轉。而無我爲。山樑遽頹。歷幾年斯。謦欬雖遠。鞭繩不弛。識路疾驅。旣量擔子。葢公爲人。天資穎發。如玉溫潤。如氷瀅澈。自與道近。重以自彊。嗜善劇炙。見惡逾湯。耻言人過。羞道已長。古六籍言。亦旣汗漫。當年未究。昔人所患。一味畬菑。悉去硏鑽。其畜旣富。其出無竆。其爲文章。煥燁舂容。相世大家。每說先秦。以若氣力。一蹴可臻。卻怕空言。無補實地。要做理到。不屑俳類。推此以觀。可知所存。鶴書累降。鵬翼晩鶱。初登郞署。繼擢臺司。眷倚方隆。進途如砥。彼何人斯。誣及師門。匪不度時。聊訟我寃。構成罪案。若仇相報。五月圜土。十年瘴雨。夫豈章子。吾道之厄。惠飯猶飽。涪髭勝昔。始信君子。無入不得。履困行患。知益玉成。謂待賜環。再振聲明。白日未回。厚夜忽冥。臯于異域。言返故山。嗟哉仲默。扶櫬欒欒。行路尙涕。矧我同人。道極理顚。天胡不仁。顧余辱知。越在踉蹡。及忝宗楣。尤荷耿光。余固唐突。公折輩行。翰墨相將。時復雌黃。其樂孔云。所趨兩忘。那意中間。邈矣參商。秖今天上。但瞻尾箕。悠哉此恨。曷有竆期。顧瞻舊舘。何禍之酷。兩世惸嫠。田田晝哭。倍我私慟。想公潛傷。單盃草具。來奠儀床。尊靈降格。監我衷膓。
송이석(宋履錫)1698년(숙종 24)∼1782년(정조 6).
본관은 야성(冶城). 자는 백유(伯綏), 호는 남촌(南村).
아버지는 생원 명기(命基)이며, 어머니는 성주이씨(星州李氏)로 달신(達新)의 딸이다.
1721년(경종 1)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나 성시(省試)에는 뜻을 두지 않고 오직 향리에서 성현의 학문을 익히는 것을 일생의 업으로 삼고 지냈다.
만년에는 수도산(修道山) 무흘정사(武屹精舍)의 장서각(藏書閣)에 머물면서 그곳에 수장된 정구(鄭逑)의 수택장서(手澤藏書)를 읽는 한편, 그 중에서 본받을만한 요언(要言)만 뽑아서 《무흘서각초록 武屹書閣抄錄》 2권을 편저하기도 하였다.
그는 특히 《노론 魯論》을 중히 여겼고, 《퇴서절요 退書節要》 7책을 비롯하여 《심경》과 《퇴도언행록 退陶言行錄》 등 숱한 선인의 글을 수사(手寫)하는 데 일생을 바쳤다.
저서로는 《무흘서각초록》 2권과 《남촌문집》 7권 등이 있다.
*贈宋伯綏 履錫 序
有人於此。坐不能離席。而勉他人以千里之行。則人必大笑之矣。然使其言。果有益於人。則彼之聽之者。豈可以其自爲之輕而廢之哉。余以愚妄得罪於時。自耽羅海島中。移配晞陽。其明年夏。友人宋上舍伯綏。不遠數百里。攜其子學濂。來訪余于蟾湖之上。留五日別去。請一言以爲贈。夫贈言。仁者事也。余固不敢當。矧余方竄逐流離。年紀且暮。呼吸瘴毒。疾病倦困。宿志舊業。幾盡荒廢。其於道也。不但如不能離席者之比。將不免爲日究汙下之歸。而伯綏以盛彊之年。有邁往之氣。旣博觀羣書。而掇其精華。發爲文辭者。駸駸乎欲追古作者遺武。又嘗耽究六籍。旁及於濂洛關閩之書。則其志又若不止於文藝之末而已。譬之行道者。其亦可謂乘堅御良。槖囊其餬糧。而發軔乎衢路者矣。不行則已。苟行矣。其於致千里也。何有於是。而余乃呫呫焉效相勖之言。則不幾於以蟹跪之縮。而憂駿步之怠乎。是誠可笑也。然伯綏求益者也。於人之言。當觀其得失。而采擇焉。不當復論其人之如何。則吾其可以言乎。夫爲學之道。太上立志。其次功力。而才與氣爲下。功力不篤。雖有才氣。不能磨礪而成就之。立志不高。雖致其功力。而所就者卑且近。不能極其才氣之所至。故古之立事功成德業者。其大小高下。未有不由夫其志者也。今伯綏之才氣過於人。而其用力於文學也。亦已勤矣。抑未知伯綏之志大而遠乎。小而近乎。其能不以第一等讓與別人。而以古賢人君子之道。爲必可師乎。志於千里者。必致千里。志於百里者。必致百里。若夫志於莽蒼者。終於莽蒼而已行矣。伯綏厲而之志。懋而之工。則雖愚且魯。猶可以變化而進於道也。况其有過人之才氣者乎。若使伯綏。以古賢人。爲不可幾及。而退而與流俗人。佼佼焉自足而止。則是猶行道者之厭千里之遠。而廢然中道而返者也。雖或至于八九百里。其不能千里。則與坐不離席者同歸矣。古語曰。行百里者。半九十。此至言也。伯綏勉之哉。
하대관(河大觀) 1698(숙종 24)
본관은 진주(진주). 자는 관부(寬夫). 호는 괴와(愧窩)
겸제(謙齋) 하홍도(弘度)의 증손.
제산선생에게 증조부 하홍도의 문집 교정을 청하여 교정이 완료되고 제산선생이
문집 서문을 찬하였다.
字寬夫號愧窩謙齋弘度曾孫肅宗戊寅生篤志力學行誼純備博通古今硏究微奧雄辭健筆鳴於一世與李息山萬敷金霽山聖鐸爲道義交甞修晉陽續誌未及脫藳所著有愧窩集六卷
유태제(柳台齊) 1699(숙종 25)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현보(鉉甫). 호는 나은(蘿隱)
아버지는 유상재(柳尙載). 영조(英祖) 2년(1726) 생원시 입격.
*與柳鉉甫 台齊。同行上鳥嶺關。口占兩絶。
鳥嶺關前逢雨雪。呼僮秣馬待雞鳴。天寒遠道難如此。賴有同人慰客情。
嶺路迢迢曉月寒。長松落雪撲征鞍。峯頭立馬紅雲起。曙色初分主屹關。
김경한(金經漢) 1699(숙종 25)~1756(영조 32)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이장(以章)
고조부는 표은. 증조부는 지촌. 조부는 원중(遠重). 아버지는 명흠(命欽)
*答再從姪經漢書
竆冬雪寒。千里來訪。雖出於一家情意之厚。亦豈人人之所易能耶。令人感歎。而江頭一別之後。五日款晤之樂。還似一夢塲。悵惘之懷。至今猶未已也。且念匹馬行色。屢處迤歷。冰路驅馳。必多間關。方以不得還稅後消息。爲紆鬱矣。晉兒來。得接手畢。披復之間。若復對語。且知無撓歸侍。驚倒暢慰。豈可以筆尖旣耶。書後歲改。未審重侍患候加减如何。眷集凡百。均得平善否。此中新年况味。一如歲前。而感時悲苦之懷。益難自勝。不但客中添齒爲可歎而已。爭卵山陰兩處慰狀之換封。可笑。精神憒憒如此。其能久乎。非君之善辭自當。吾且不免譏誚矣。所惠芥子多感。但前日得魚無芥。而不得鱠。今旣得芥。又無魚可鱠。雖食味間少事。亦難望其圓滿。可笑。
황후간(黃後榦) 1700(숙종 26)
본관은 창원(昌原). 자는 이직(爾直). 호는 이봉(夷峰)
제산 문인.
제산집
*答黃爾直 後榦 書 甲寅
聖鐸拜復。往歲左顧。厚意難忘。客冬惠書。尤感不遺。卽玆新春。遠惟侍省學履納祐增勝。區區瞻嚮之餘。曷任慰祝。聖鐸將老餞迎。喜懼交切。又自近日憂病叢集。撓惱百端。奈何奈何。始者見賢者之面。聽賢者之言。知賢者資稟志尙之懿。愛敬之心。固已深矣。乃今書辭陳義又高。將欲從事於主敬致知之訓。以無負師門手札相勉之意。不勝歎尙。賢者旣有其質。又有其志。又得聞爲學旨訣如此。循是以往。勉勉不已。則賢者之進於道也。夫孰能禦之。設於愼言愼行之間。或有疑殆。而不安於心者。亦不出家庭。而可以朝夕取正。乃猶以爲未也。而不憚馳書於五六百里之遠。求助於空空無聞之人。賢者之意則盛矣。顧此愚陋其何以承當耶。聖鐸於賢者。旣有傾盖之雅。以賢者之明。其猶有未悉者存乎。聖鐸自少不無所聞於父兄師友間者。而立志不篤。悠泛自廢。奄過了五十光陰。雖虛聲誤播。上欺朝廷。至有今日不敢當之恩命。而其實則一黔州驢耳。方且杜門山樊。斂跡守拙。以求自免於欺天欺人之罪而不可得不謂賢者。又從而枉加推借。有若以聞道之先後相處者然。是賢者過於愛人。而使聖鐸益重其盜名之恥也。悚蹙之至。汗下竟趾。然朋友講磨之道。所由來尙矣。不可以己之不敢而自絶於相長之地。故敢因來敎。竊效區區。夫爲學之道。固不出來書所謂主敬致知四字。而主敬之要。心經盡之矣。致知之方。大學第五章或問。詳之矣。學者苟能主敬以立其本。致知以博其用。則希聖希賢之功。不待他求。而卽在是矣。惟願賢者。以實心加實工。勿以世俗毁譽榮辱。動其心。又勿爲異衆驚世之行。以自標置。密密自修。寸寸向前。使敬至於專一。知極於貫通。則學之能事畢矣。而充實光輝之域。可馴致也。鄙人道聽途說。無一實得。而妄率及此。眞所謂能言之鸚鵡。不足道也。惟賢者勿以人廢其言也。書面稱謂。是何名也。愧駭之甚。欲持書還納而不能。果此後如有不遐之意。切勿以此更施。以供傍觀者之嗤笑。不者。自今以後。不敢復通侍史之問矣。千萬諒察。辱詢諸條。尤非愚昧所及。別紙錄呈。求敎。未安處反復幸甚。
別紙
謹按。心經人心惟危 止 允執厥中。舜之說。人心道心。皆就已發處言 止 而不及靜時存養之工歟。
來諭固然。然子思子於中庸首章。以戒愼不睹恐懼不聞。爲未發時存養工夫。盖存養於未發之前者愈密。則省察於已發之後者愈精。此意不可不知也。
朱子曰。或生於形氣之私。形是耳目口鼻四肢之屬。而釋義云。形。形質。質字之義。未曉。
質字。有兩義。曰資質之質。曰形質之質。資質之質。以人之所稟粹駁而言也。形質之質。卽來諭所謂耳目口鼻之屬也。
西山眞氏曰。仁義禮智之理。皆根於性。所謂道心也。仁義禮智。只是性也。止 若以道心直以爲仁義禮智之性。則必不曰原於性命。
看得甚精。可尙可尙。但眞西山。亦豈不知仁義禮智之爲性也。特主道心而言。以明其爲仁義禮智之心耳。孟子曰。惻隱之心。仁也。止 是非之心。智也。仁義禮智。性也。四端。情也。而孟子以四端之心。爲仁義禮智者。是豈不知性情之分哉。盖聖賢之言各有地頭。不可立定一例而疑之也。如何。
程子曰。主一則旣不之東 止 只是內。此言主一則心不走作在中在內之意歟。又曰。將敬以直內。涵養此意。此意未曉。
中字之義。以不偏倚而言。內字之義。以不走作而言。此意盖指敬以直內而言。當時語錄。多有如此者。非謂將敬以直內。而涵養此心也。
伊川先生曰。天地儲精。得五行之秀者爲人。只言儲精。而不言無極之眞者。何也。釋義所謂言精而無極之眞在其中者。未詳。
聖賢立言。各有地頭。程子只就人生稟受處說起。異於濂溪之論理氣大源頭處。故不言無極。然爲人之下。卽曰其本也眞而靜。所謂眞者。豈非人心所具無極之眞歟。且有氣必有理。則言精而無極之眞在其中者。何疑之有。
天命之謂性章。朱子曰。人雖不知止而過於此者。己獨知之而著見明顯。若是其甚者。何歟。
己之所知。與人之所知。無彼此之別。己旣知之。則人雖不知。而一念善惡之機。豈不昭然明甚乎。况以琴中殺聲等事驗之。則隱微幽暗中所爲之事。實有著見而不可掩者。甚可畏也。
朱子又曰。旣常戒懼而於此尤加謹焉。觀常字尤字之義。則戒愼恐懼。非但靜時存養之工。似乎通貫動靜。
戒愼恐懼爲統體工夫。已見於朱子答胡季隨書矣。
朱子曰。善觀者。卻於已發之際觀之。未知觀其甚麽之謂歟。
未發之前。不容尋覓。必須於已發之際觀之。然後可以審其善惡之幾。而加精一之工矣。
祭時羹。以何物爲之歟。今禮多以素羹。未知是否。
古之祭也。有大羹,鉶羹。大羹。太古之羹。湆煑肉汁不和。鉶羹。肉汁之有菜和者也。今禮之有素羹。疑或羅,麗間齋食之遺俗。然擧一國好禮之家。未聞廢而不用。從俗用之。何害於禮。
禮。男子斬衰。括髮以麻。齊衰。免以布。則婦人齊衰。亦當以布爲髽。而家禮。只言髽麻者。何歟。
按。儀禮經傳通解續第十卷。喪服制度。引小記男子免而婦人髽條下䟽曰。男子免。對婦人髽。男子免。旣用布。則婦人髽。不容用麻。是知男子爲毋免。則婦人布髽云云。以此觀之。則婦人齊衰。布髽明矣。而家禮。只言髽麻者。豈猶有未備而然歟。
首絰。本象緇布冠之頍項。則婦人及童子。似當皆無首絰。而婦人之絰。禮有明文。童子之絰不現。當如之何。
男子冠而婦人笄。則男子之冠者。婦人之笄者。固宜有絰。童子不冠。則無絰似宜。但今俗或有童子而絰者。是則未可詳也。
儀禮。要絰自斬衰至大功。皆散垂於初喪。据此齊衰三月。在大功之上。亦當散垂否。
齊衰旣在大功之上。則雖三月之服。似亦當散垂。儀禮喪服圖式中。可考也。
儀禮大功章。女子子嫁者未嫁者。爲世叔父母姑姊妹嫁者降一等。自是常法。而未嫁者。亦降一等。何義。
按。本章傳下註䟽。所謂未嫁者。乃是女子十五已後許嫁。而笄爲成人者。有出嫁之道。故雖未出。卽逆降世父以下傍親。又女子年十九。後年二月當嫁。今年遭此世父以下之喪。若依本服服朞。則過後年二月。不得及時。故逆降在大功。大功之末。可以嫁娶。則於二月得及時而嫁也云云。盖古者女子十五以後。則有許嫁而笄之禮。故如此。今則此禮廢而不行。至嫁之日始笄。恐難直据儀禮。而使未嫁者。逆降世叔父母以下之親也。如何。
沙溪曰。衰負版辟領。楊氏雖有旁親不用之言。當從家禮本註。大功始去之爲是。此言如何。
楊氏旣曰。親見先生家所行之禮。旁親。不用衰負版辟領云。則家禮本註。恐是未定之論。而沙溪之說。亦必有考。淺見何敢容喙於其間。惟在好禮者詳考而行之之如何耳。
承重孫。遭祖父母喪及曾祖考喪。其妻若其母及祖母在。則誰服三年歟。先儒議論多端。未知折衷如之何。
沙溪雖有承重孫之婦。從夫服之言。然此中士大夫家多從退溪之說。亡者之妻及子之婦服三年外。雖承重者之妻。皆依本服服之。未知果孰爲得也。
有人無子而死。若立后於練後。止 喪盡之後。不徹几筵。祥禫。一如三年內歟。撤几筵。只行心喪否。
此等變禮。尤不敢輕爲之說。然嘗聞通典中。庾蔚之之論。先儒多以爲是云。且旣爲之追服。則不撤几筵。行祥禫。固當一如三年之內矣。
子喪中。父母死則子喪雖葬。父母葬前。當設素於子之几筵否。
來示似然。然亦不敢質言。
今禮葬時題主者。有題畢再拜之禮。未知何據。且喪主拜謝題主者。亦有古据否。
題主者。題畢再拜。恐近於非禮之禮。而神主題畢。喪主方行奠酹。亦恐有所未遑於拜謝之禮。家禮。無此一節。古据有無。愚不能知也。
家禮曰。凡重喪 止 而哭之。又曰。其除之也。亦服輕也。據此則重喪在身。雖遭功緦之服。亦當制其服而哭之歟。且除喪 止 易以何服而入哭歟。
禮說旣如此。則雖功緦之服。豈可以重服在身。而不制其服乎。其除之也。旣除輕服。則似當反重服而入哭。未知知禮者。以爲如何。
禮云。過時不禫。雖過一二月。當爲過時否。
正月當行大祥。則三月爲禫月。正月有故。不得行祥。追行於三月。則不禫爲是。或退行於二月。則逾月而禫。此有先輩定論。而適無書冊考驗。更問于知禮者。如何。
凡此條答。旣無實見。又無博考之證。直以一時淺慮。杜撰爲說。誠爲僭率。且於禮學。尤所昧昧。必有乖錯妄謬之失。汰哉之誚。豈可逃乎。幸乞獨覽而裁節焉。切勿煩人眼目。以爲嗤笑之資也。千萬千萬。鄙陋於此。又有所懷而不敢隱。未知高明。不以爲罪耶。竊觀古人往復論難之語。大抵博考參驗。爛熳思量。而猶有所未通。然後就朋友而講論焉。故有憤悱啓悟之益。而無閒漫口耳之疵。今此辱詢諸條。固皆所當講而辨者。然前後儒賢所論。不止一二。而高明亦旣涉獵而知其取舍矣。就此玩索。積久不已。則以高明之聰明。不待問人而自得之。如是而或有一二未盡了然者。則正好與人商量。退溪集中答李叔獻,趙起伯問目末端。皆以此爲戒。葛庵先生答橫溪二鄭問目。亦有此說。而鄙生亦嘗於密翁門下以問目之不緊。被警責之言。此實學者所當省念處也。僕非敢以賢者之問難爲不可。或恐如鄙人往時之所爲。有害於切問近思之工。故敢云云。賢者以爲如何。
*答黃爾直書
前書裁謝將封之際。又承惠問。眷意彌重。感荷益深。第於其時。賤疾方苦。不能特修謝儀。但以承拜之由。略及紙末。至今悚恨無已。卽日春序欲半。風氣漸和。遠惟承歡懋學。况味益勝。區區瞻慰。豈容言喩。聖鐸末疾偶爾。遂至沈淹。坐卧行履。尙不得任意。苦閔奈何。獨幸老人姑免大段愆節爾。書中病痛之示。足見賢者省身欲寡之意。甚善甚善。但前此。竊覸賢者。氣質溫雅。辭色恭遜。如所謂輕躁忿懥。錯謬暴亂等過失。似無可憂。今乃自訟若此。令人不覺憮然駭歎。豈自治密切。以少差失。爲大尤悔。而常自視欿然故云爾耶。然以僕推之。賢者之言。非特出於退托之過甚。而或者於此。盖亦未免有近似者何也。僕禀性柔懦。出外對人。輯顔遜辭。不敢作輕俊態。人之見者。或認以爲溫和平順底人。而其實則居常應物之際。忿戾躁迫之咎。十常八九。其於家人僕御狎暱卑下處尤甚。未嘗不自知其爲病。而旣悔復然。至老依舊。今賢者雖不至如僕之甚。閨門之內細微之事。人情所易忽處。安保其無喜怒之過中。酬酢之失宜。以至於拂亂懊悔之境者乎。然則僕之所嘗竊覸於左右者。無亦近乎人之謬認於僕者乎。人之患。在不知其過。知而不改。又患之大者。賢者旣自知之。則盍亦痛懲亟改。拔去根株。使不復萌芽於日用間耶。若其治病之方。僕方坐在裏許。不能自救。何敢爲賢者謀耶。且賢者旣以師門主敬致知之訓。爲眞切有味。而又方讀心經。以僕所聞。敬者。實治心養氣之要法。而其詳具載於心經。其中所引損益二象。尤爲今日對病之藥。賢者苟欲醫治得這箇證情。則恐不可外此而別求方法。今乃日講乎此。而猶若不知所以治之者。何也。願賢者之加之意也。旣知心經爲治病之方。而不知自勉。反爲賢者勉焉。其舍己田耘人之田甚矣。誠亦可愧也已。然賢者儻能從事於斯。深潛積久。涵養體驗。使氣質偏處。消融化革於不知不覺之中。旣又以方法次第功效本末。施及不佞。使之亦有以知警補過。則又豈非衰晩之一大幸耶。是仰是仰。詢目。重孤好問之意。又此杜撰以對。僭率益甚。其差謬處。幸乞因便回敎。
別紙
心經序曰云云。以敬抵敵人欲。如障川之柱者。然矣。所以爲指南之車燭幽之鑑。何也。
敬然後心存。心存然後可以應事接物。而不迷於所向。此非指南之車乎。敬然後心不昏昧。而明於善利之分。察於幾微之際。豈非燭幽之鑑乎。
人心惟危章註。朱子曰。大凡徇人欲自是危險云云。人心易流於人欲。故曰危。而此似以人心。作人欲看。無乃朱子初年議論歟。
朱子固以陸子靜所謂人心非全不好者爲是。然人欲之欲字。說得亦有輕重。如目之欲色。耳之欲聲。口之欲食之類。豈必皆不善哉。惟縱情不節。然後爲惡爾。然則人心亦豈不可謂之人欲耶。但恐學者將人心。作不善底人欲看。故不得已而爲人心非人欲之說。其實非有異也。先師葛庵先生。與申明仲往復書中。論此甚詳。
上帝臨汝章附註。程子曰。無不敬。可以對越上帝。朱子敬齋箴。潛心以居。對越上帝。朱子專言靜時。而程子兼動靜言歟。對越上帝。言心身肅然。如對上帝歟。抑敬以直內。無一毫人欲。則可以合於天理。故云然歟。
朱子專言靜時。而程子兼言動靜者。來諭得之。對越上帝之義。以程子說。可以二字觀之。來諭後說。恐近是。盖身心肅然。無私欲之累。則可以配對上帝而無愧也。
易乾之九二章附註。動容貌整思慮。則自然生敬。敬只是主一。坤之六二章小註。或問敬何以用工。曰。莫如主一。以主一。或謂持敬之極功。或謂致敬之道者何歟。主一恐或爲敬之始終歟。先儒論敬云云。四者亦有先後終始歟。
所謂只是主一。所謂莫如主一。未見其有異義。而來諭疑之何也。主一之外。更無持敬之道。表裏終始如此而已。整齊嚴肅。則自然主一無適。自然常惺惺。自然其心收斂。又未有常惺惺。而不能主一無適。不能整齊嚴肅。其心不能收斂者。朱子所謂從一方入。則三方入處。皆在其中者。是也。豈有先後終始之異歟。但朱子以整齊嚴肅一段。尤謂之切至工夫。其意云何。所當深思體驗也。
大學誠意章註。趙氏問於朱子曰。誠無爲。幾善惡。止此明人心未發之體云云。人心未發之體。不論賢愚。而皆謂之誠歟。下文又曰。此亦誠之動。惡之所以爲誠之動者。可得聞歟。
人心之未動也。其眞靜之體。豈有賢愚之間。但衆人少靜而多動。其本體之存者寡矣。其中動而七情出。於是乎有善惡之分焉。非動。豈有惡乎。由動而有惡。則惡亦非誠之動乎。比如一泓。止水固澹然淸淨。然及其動也。或爲淸瀾。或爲濁流。其濁者固非淸淨之本體。然不動。豈有濁乎。然則濁流。亦豈非止水之動乎。
仁人心章附註。朱子曰。所謂放心者。不是走作向別處去。瞬目間。便不見。止 且去提撕。便見得。便不見。便見得。皆言心歟。此等語。似於以心觀心如何。
人心出入無時。莫知其鄕。頃刻之間。乍明乍昏。乍存乍亡。其昏而亡也。便不見心之所在。明而存也。便覺得心在此。此乃自然而然。非用意看覷之比與。所謂以心觀心者。似同而實不同。
*答黃爾直別紙
謹按。別紙下誨曰。朱子以整齊嚴肅一段。尤謂之切至工夫。其意云何。所當深思體驗也。後榦竊嘗思之。主一無適。常惺惺。其心收斂。固皆持敬之要。而獨於整齊嚴肅。謂之切至工夫者。盖心兮本虛。慌惚難狀。有些不操。則有天飛淵淪之患。用力把持。則有揠苗助長之病。其操之之道。不可他求。惟當制之於外。以養其中。所謂整齊嚴肅。是箇制外養中之法也。學者苟能整齊嚴肅。儼然若君父之臨其前。隨時隨處。無少間斷。則此心自然生敬。不昏昧。不怠慢。直上直下。便無東西走作之患。如此則可以主一無適。可以常惺惺。可以其心收斂。要放下不得。此所謂切至工夫歟。不能深思體驗妄率言之。悚仄悚仄。
見得極是。推說甚好。歎服歎服。
惡亦誠之動。後榦承誨。更思之。人心之未發也。實理渾然有善無惡。而及其動也。七情出而善惡分焉。惡雖非實理中固有底。然因其有實理之動而流之。有差。便成惡焉。若無實理之動。惡亦何從而生乎。是以云惡亦誠之動歟。因下誨。若有所開悟。而猶恐下語之際。有差謬。敢復仰禀。伏乞明敎。
說得大槩亦是。但所謂因其有實理之動云云。若無實理之動云云等語。微似未安。非謂其義不然。恐下語之際。少失斟酌耳。如何。
旁親。不用衰,負版,辟領。旣得聞命矣。若高曾祖及祖父母。皆是直先。且妻之服最重。與父在母喪同。此等處。當如何。但父母用之。而他皆不用否。爲長子斬衰者。亦如何。
衰,負版,辟領。惟於父母喪用之。旁親則不用。實楊氏復說。今不可更議。然沙溪號爲知禮。而從家禮本文。不從楊氏說者。亦必有所見。愚何容喙。高曾祖祖父母服。恐當用之。長子斬衰。亦不可不用。而妻服。亦莫重之服。依家禮用之。何不可之有。然素昧禮說。不敢臆斷。更考知禮者。勿以鄙說爲可信也。汰哉之誚。甚可懼也。
*答黃爾直書 丙寅
匪意獲奉惠札。滿幅縷縷。無異覿面披懷。披復數四。豈勝驚歎。信後開春。遠惟侍省之下。彩懽增勝矣。遙爲之祝賀無已。纍人入島來。姑免大憊。風土民俗。未覺甚惡。當初不復爲海外棘囚。而又得此以處。此莫非天覆之盛德也。感泣之外。復何恨哉。前此知賢者。頗不免屈首於公車業。以爲此是前古大賢所嘗屑爲之者。雖或妨工。而不至於奪志。則亦無傷也。今乃有回頭住脚之意。左右雖向衰。方在侍下。不知何遽爾耶。若庭命如此。則是爲善爾。傷急之示。纍人平生常患。此病至今白首。猶未能袪。其何能爲左右發藥耶。然朱子答門人之問曰。頭痛灸頭。脚痛灸脚。此謂就病處治其病耳。是在左右。他人何與焉。纍人年來。頹惰益甚。尤悔山積。而又落在海中。絶無人士相從者。又無書冊可借處。日夕偃息。無所猷爲。雖欲收桑楡萬一之功。以爲晩聞之計。何可得耶。以此益思得與賢者相從。庶幾扶策衰懶之氣。而左右雖有春間枉顧之諭。調養中。豈可遠涉長途耶。是固不敢望。而此身出島。未卜遲速。衰病已甚。此生相逢不可必。臨書惘然。無以爲懷也。惟願左右。藥餌之暇。益留意遠大之業。以副區區期愛之誠也。知方看節要書。甚善。惟潛心玩索。至於爛熟無可看。則何患無所得耶。躬所未能。聊復爲賢者云云。亦可愧也。幸諒之也。
*贈黃爾直序
夫人肖天地之形。受天地之中以生。而其智愚賢不肖之相去。或什百焉。或千萬焉者。何哉。以其氣質之稟。有美惡。而學問之工。有至不至也。夫質美者。然後有爲善之田地。而可與爲學。可與適道。可以爲聖爲賢。然徒有其質。而不學以成之。則亦終於美質而已。卒無以入聖人之道。而或反爲世俗之所撓奪。異言之所遷惑。而不能保有其質者。亦多矣。故先聖云十室之邑。必有忠信如某者焉。不如某之好學也。而朱子釋之曰。美質易得。至道難聞。然則學之可貴。尤有甚於美質。而學之道。又必以勉勉循循。深造力窮。以求至乎充實輝光之域爲貴。若悠悠泛泛。有學之名。而無學之實。終不過爲鄕里之善人。而不得聞聖人之道。則與初不學者。相去何遠哉。吾友黃君爾直。卽所謂質美者也。醇謹而溫厚。忠信而慈諒。而其家咸州。咸州故多士大夫。先輩之遺風。猶有存者。而其大人處士公。以儒學。爲一邦士林重。爾直自幼習聞詩禮之訓。而又嘗從李密翁。講大學一部。亦可謂有志於學者也。爾直又以余嘗遊於葛庵先生之門而習於密翁也。前後再辱臨顧。禮意甚至。及余得罪。竄逐踰年。自海外蒙恩。移配于光陽。僦居蟾江上。則爾直以去歲秋九月。與李君封若。惠然相訪。留一日而歸。今年元春。又與安生慶龍。不避風江之險。來留五六日。相與讀大學或問。間及禮俗疑難整容謹節之方。其謙虛之誠。懋敏之意。庶幾乎可與適道。而終能成就其美質者。夫以余之顚沛困厄。爲世所擯斥。而齒髮衰邁亦甚矣。其將無聞以終焉。而爾直不挾其所有。不嫌於相從。眷眷焉辱與之討論如是。則余將何以答其意之勤。而不甚愧於過分之禮也。爾直質旣美矣。又能學焉而求聖賢之道矣。惟不奪於流俗。不廢於中途。俛焉日有孜孜。精思力踐。不得不措。知必極於高明。行必期於中正。以無負肖形受中之責。而不止爲質美之善士。則是余之所望於爾直。而欲一奉聞焉者也。於是爾直以遊方之有限。不敢久留。將辭歸。請一言以贈其行。余固有愧於爾直之相與。而欲一答其意者。遂書此以爲別。爾直倘不以人廢言。則願歸而質之庭下而勉之哉。己未春正月丁卯。蟾上纍人。
祭文[門人黃後榦]
道東而南。嶺爲閩洛。眞儒輩出。倡明是學。爰曁陶山。集厥大成。餘派遙遙。錦水淵泓。一家衣鉢。西山九峯。猗歟先生。傳得其宗。金玉之姿。精篤之學。主敬致知。不越準的。有進無退。眞知實踐。渾圓體用。昭融隱顯。仁孝友弟。和樂淸通。氷壺秋月。塑座春風。允矣吾師。展也儒眞。婆娑丘林。擬終吾身。軒冕逼迫。愈避愈嬰。師誣欲辨。禍機攸萌。萬死投荒。一心戀闕。如斯舍達。勝昔髭髮。蟾上僦屋。先師遺躅。維坐維卧。于墻于羹。日與仲默。不懈課程。素患行患。阨竆何傷。惟是萱堂。恨結未將。日夕望雲。終遭巨創。孝子至痛。竆天難忘。星夜奔赴。號哭隕絶。聖明在上。庶見天日。賜環猶遲。易簀遽忽。雲岑慘憺。蟾水嗚咽。誰知學古。而反逢罹。命與仇謀。生世非時。痛豈吾私。爲斯文哭。嗟惟聖學。如綫不絶。先生得之。旣全而篤。進未獲施。退未及傳。殉身以沒。奈何乎天。念我小子。質本朽木。幸從密翁。蒙被敎育。梁木遽摧。倀倀靡適。得蒙先生。收置門墻。示我周行。導我義方。多年丈席。不倦誘掖。如藥對證。如箆刮瞙。不我悾悾。惠我孔大。心茅則塞。百不一會。性偏難克。伎倆猶昔。每祝遐壽。愚蒙是擊。今焉已矣。小子安仰。回瞻霽岳。寂寞書幌。錦里餘痛。川上今日。仍念不敏。辜負盛德。前冬趨候。宿痾沉劇。引入卧內。見勵彌切。最後有言。吾子勉之。吾病難醫。相見無期。願加努力。無負相規。我時感泣。憂心忡忡。神明扶護。恃在上穹。日月無幾。哀音遽及。那意斯言。終天永訣。病不擧扶。喪不隨櫬。奔赴後人。死有餘恨。千里漬綿。一杯是奠。失聲長號。懸泉淚落。不亡者存。庶幾歆格。
이봉집
*先生前上書。
趨謁侍右少冩。夙宵憂慮。且喜且悲。下懐難狀。嘗竊以為。備經艱危。勢必神觀之頓換竊瞷容貌髭髮。未甚有損扵前。固知學力。無媿古賢。私自賛歎。歸與同志相賀爾。但以觸冐炎蒸。至有愆度。雖已向差。而眠食之莭。迄未如常。歸来。㐲慮未嘗頃刻间㫁。㐲未審。徂兹寒威。調養中體候。安否如何。竊念先生氣力。本非彊壯。重以禍患積傷之餘。真元未復。千萬安心息慮。善加調護。早収勿薬之效。以副區區仰慮之忱。伏祝伏祝。後榦。頃與李生宗臣。無撓得還。莫非㤙庇之及。下感無窮。而第家親。連患冷泄。感冐諸症。寜日怕少。私情煎悯。難以形喻。兼以移築家屋。自多淟汨。全沒所做工夫。尤㘦媿懼之至。竊擬㤙赦未间。卽為更趨。陪侍杖屨於寂寞之中。以受陶鎔之㤙。而親患每如是種種。安可必也。私然計已固。何敢終抛也㦲。此去趙生龜瑞。素有志尙操修。景仰先生之風雅矣。今將徃矣。伏望勿視以凡類。垂賜容接。無孤繼此依歸之望。如何。自餘下懐冗迫。只此不備。伏惟下鑑。上書。戊午十一月十一日。門生黃■卓謹封。令季氏尊丈。其已返斾否。遠路風寒。想應多苦。為之伏慮伏慮。門生黃後榦上書。咸出書札。先生前上書。
*先生前上書。
獻嵗發春。萬彚維新。伏惟省下。道軆納祐增福。伏切賛祝。無任區區。向伏聞先生特蒙超叙。發向京洛。而未知到闕後。去就之如何。寤寐食息。慕仰不置。旋聞三次登對。天意慇懃。旣以手賜臘藥。又以許退。皆出聖明知遇之隆。而誠曠世異數也。令人感泣。殆不自己。卽當拜修慶問。而每乖信便。因循至此。常常罪悚。近伏聞又有丹州之命。區區私心。尤以仰慰。竊惟先生。以道自樂。未嘗經心扵外物。然聖上之眷遇如此。古人亦有捧檄而喜之者。飜然一起。庻幾少展平日之所講。亦有以致其榮養。豈非甚盛乎。以是賛賀萬萬。但聞京痘甚熾趍前一款。如何䖏之。其或有除朝辭之命。而今已就任否。遥想慕極。後榦奉親迎新。僅免他撓。惟是親年日老。喜懼交切。且以志氣頽惰。一向悠泛讀書講業。了無頭緖。年進學退之歎。固難自任。奈何奈何。日侍凾丈。仰承謦咳。誠區區志願。而坐扵地步之落落。久曠供掃扵門下。徒切望慕之忱。不意今者。遭此幸會。固是天與之便。源源就正。從此可卜。其為喜幸如何可喻。自聞此報。不覺寢食之俱㤀。光天兄来此經年。而有事巧違。僅得一再面晤。常以為歎。今此歸路。枉顧■……門下生黃後榦再拜先生前。謹再拜上候狀。黃後榦謹封。
이세근(李世根)
자는 달후(達厚) 제산 문인
제산집
李友達厚 世根。聞余移配薪智島。臘月十九日。發晉陽。以新正旬二入島。勞問余老病流離艱難辛苦狀。旣乃留連屢日。慰釋開益甚多。此古人之事。而今世之所難也。纍人旣感歎不已。一日達厚又以五七兩絶。示余求和。其辭語過重。令人恧然汗顔。然厚意不可以無謝。故忘拙步韻。以博客中一粲。 a_206_242b
少年從有道。白首尙迷源。狼狽今如此。深慚累法門。
身如泛梗寄中洲。蜒戶啁啾卽異區。堪愧故人推借重。孤臣空自訟愆尤。
一棹間關夜泊洲。高情不讓訪韓區。慚無好語留嘉客。賴有東風當石尤。
*達厚愛蟾江之勝。買取一屋子。或以價重譏之。達厚賦二絶解嘲。余戲次其韻。
歲歲江潭費獨吟。君今來住可論心。方知廉價還歸富。收得江山不用金。
*贈李達厚序
余觀世之讀書之士。率多爲榮名利祿計。而能有志於學者鮮矣。或有志矣。而勤於始者。或怠於終。失於少日者。鮮復於晩塗。而又其年紀暮大。則驁然以老宿自居。雖有不知。而恥問於人。其能自奮於已衰之境。無榮名利祿之慕。而兀然終日。味衆人之所不味。虛己求益。不問其年之先後者。盖千百人一二有焉。吾友李君達厚。葛庵李先生之族孫。而茅溪曹處士之甥也。質厚而氣醇。內和而外恭。恂恂然有退讓之風。聖鐸得罪于朝。自耽羅。移配晞陽。達厚自晉陽。惠然來訪于蟾江之上。前後凡三四至。留連信宿。久而不厭。一日謂余曰。世根生也後。未及從葛老遊。而少學於舅氏。舅氏不以余愚昧。凡所指授。大抵多所聞於師門之緖餘。世根雖不敏。或庶幾有所私淑而開發焉。而無祿。舅氏中年卽世。倀倀焉無復師承。遂至中廢。今年已晩矣。鈍滯益甚。不復可以有爲矣。而猶有一念慨然。痛負吾舅敎育之恩。而懼此身之終於無聞也。於是不自知日暮而道遠。復取大學書。循環反復。讀至千有餘數。而微辭奧義。猶或有未能通曉者。欲與吾子講之。余感其意嘉其篤志。不敢以固陋辭。相與對討屢日。余或病倦。則達厚又引兒子晉行。難疑答問。如徒友然。不以其長少爲嫌也。及其將歸。余出示大學或問。勸令熟看。以求其義。達厚欣然。請借將謄書以讀之。又以紙十數幅。請兒子書宋賢箴銘中最切於身心者及濂溪以下諸先生畫像贊。以爲警省儀象之地。若達厚者。可謂能有志者矣。可謂能自奮於已衰之年。而味人之所不味者矣。可謂能虛己求益而不恥下問者矣。孔子曰。君子嚮道而行。中道而廢。俛焉。日有孶孶。忘身之老也。不知年數之不足。孟子曰。君子不挾長。不挾賢而問。充達厚之志。其殆庶幾乎。達厚又自言所居在金華山下。有屋數間。將以葛茅。扁吾堂。而讀書其中。以終老焉。盖取李先生,曹處士之號。而寓羹牆之慕者。其意亦甚善矣。聖鐸纍人也。衰病窮厄。志業荒墜。不免爲師門罪人。其有愧於達厚甚矣。而達厚請一言以相贈。乃以其所感於心者。書以貽之。昭陽大淵獻季秋。蟾江病纍。不敢名。
의성김씨 제산종택 무진년 8월에 이세근이 제산 김선생에게 올린 제문(祭文)
무진년 8월에 이세근(李世根)이 제산 김선생에게 올린 제문(祭文)이다. 장문의 제문에서 망자의 어린 시절 회고와 그의 평생 행적을 회상하면서 슬픈 심정을 절실하게 그려내었다.
維歲次戊辰八月癸未朔九日辛卯。門生李世棖。謹以二百錢焉。替人。具淸酌庶羞。痛哭再拜。敬奠于先師霽山金先生靈几之下。而告之以辭曰。嗚呼哀哉。先生學於葛翁之門。葛爺卽我族大父。而我舅氏茅溪曹公。亦從而學焉。入學於先生。爲何如人哉。先生學聖賢之道。而不能見容於時。達者。贏島。備經艱危。何幸出陸而至晞陽之蟾江。小子於是乎以淵源一派之義。有請業從遊之志。歲庚申望十二日。進拜於匪所。適先生丁內艱聞喪初也。兼之以弔慰。留一日而還。越明年癸亥。請和負笈而進。挾冊而質。卽大學一部書也。講授留連一望而歸。其年仲秋。又復趨謁。因請伯胤與之入頭流。訪玄鶴遊三神洞而還。先生曰。君旣遊於山於水之樂兼之可乎。分付學童。得一船於鎭將。命小子與伯胤同身遊五龍亭。進退承敎。日亦多矣。其間耳提面命。蒙賜甚厚。伯胤書宋賢箴銘以贈之。先生題一言以與之。蓋是警省切己之要。顧此庸陋。可有得於師友者。爲如何哉。翌年甲子。往而候焉。我舅氏家狀。巴山學者。朴丈涵所撰也。請益之暇。因乞行狀於先生。而先生迺以謫纍固辭。强之而後。蒙留置之敎伊后去來。亦嘗提稟此事。而遷延時月。未果屬筆。竊惟先生之意。蓋有所待。而天不我與。奄喪斯文。豈意人事之不可料。乃至於此。吾黨今日之望。惟在於二棘人之繼述。則我舅氏行蹟之毋至泯沒。亦當與二棘人圖之也。興言及此。尤可悲也。其年八月。隨巴山武陵語丈。作觀海遊山之行。承謁門廡之下。告歸之日。先生出送于魚龍臺。卽九月九日也。諸丈以李伯九日龍山韻各賦進。而先生和之。己丑春秋。皆不得進候者。以身有采薇之憂也。替以伻候在十月望念間。而至月初六七日間。淸源一家人傳言。先生移配康津之智島。北徙南遷。古賢所不免。則小子於先生。亦何恨哉。但海島渺茫。風土不美。暮境精力。能不損鑠。用是驚慮。未嘗一日弛于方寸間。小子雖甚懦。亦不能無感於古人浮海相從之義。臘月十九日登程。越明年正月十二日。得到智島之東臯。伯胤及蟾湖學子侍坐矣。倒屣迎之。入室承顏。還紓千里之慮。始知先生道力之全也。從頌陪唔。所得非一。進而薰炙於先生。退而切劘於伯胤。留蓮信宿八九日夜。其間警誨。無非開蒙激懦之端。而東臯亦金陵最殊勝處也。其地勢据山枕海而爲三臺焉。先生居上臺之松竹間。小子舍舘居其中。與伯胤晝則進而侍敎。夜則退而聯枕。一日余以所懷。陳于先生曰。小子平生癖於山水。而一自庚申喪明之後。尤無意於世。自分爲物表之身。只有欲盡吾東形勝之意。先生答曰。此事亦自好矣云云。而於其明日伯胤謂余曰。昨聞所懷。則玩景耽閑。將有遺世之志。雖爲好事。然倘爾成癖。不憚遠遊。則爲令胤憂慮必多矣。且年近六旬。歲月不待。惟願早就葛茅之堂。閑養身心。不廢讀書之工。而時或游咏於近處佳山好水之間。此優於彼也。余卽應之曰。謹奉敎心從。余於眼脚。已成痼疾。今得對證之劑。吾當歸而醫之。告别之際。先生所賜别章之末。示以葛茅堂早就之句。余奉讀曰。向來以遊山之意敷陳。而先生只答之以好。别無戒敎。昨昨之晨。伯胤有投藥之言。小子於是。而竊有惑於先生者。以爲用友意善之意尤切也。今奉别章之惠。果知先生不言中之敎矣。先生笑曰。今而後則以友待奈可乎。蓋不欲當師生之分也。此蓋陶山待門下之義耳。猥蒙瓊詞者。前後凡九章。其餘唱酬亦非一二。而前日所留。有所謂金華子傳者。先生惻然爲題遺事後。伯胤聞余蘭草韻二疊。作詩三章而序之。先生亦覧而悲之。爲吟一絶。以附篇末而歸之。其爲幽明之感。尤復如何。言當告歸惜别之情。兩相接對。而風帆無恙。兩津渉利。則亦吾先生感人之誼。及於小子之行也。爲雪所阻。住於葛德山洗心菴。菴臨大海試望分携之處。孤島蒼茫於雲海之間。仍竊怳念。先生尺疏。由於生三成一之義。而卒乃爲世人大戮。荐入海島耶。嗟乎。我亦爲吾先生之門下。而乏此一丹之心。一無爲師之道。環顧循省。自多愧色矣。菴下有橘洞尹上舍就緖。及石門尹處士吉緖。甫於先生耽羅之行。有一拜之雅。爲來訪我。說到師門。有歎服稱道之言。而以大君子素患行患。隨遇而安之道。今乃知之矣云云。玩賞周遊迤進。至河南之虎巖。聞先生出陸還配。方住杖屨於晞陽沿底。卽其行馳。五日承謁。翌日陪先生還歸蟾湖。蟾湖之上。老少相與喜迎。有若赤子之見慈母。倘非盛德入人之深。烏能爾耶。前後謫居。雖以絶域之俗。亦多有感化而愛敬者。於此亦可見其一端矣。侍敎二晝夜而辭歸。伯胤亦作故園之行。與之偕轡。至晉西而分路。未幾而小子又趨拜。與秀胤同侍一月矣。先生前日所留芝幕逕。葛爺謫居之室。而先生移配之後。無人看守。累月久廢之餘。荒落不可處。故僣得臨湖一屋子。其制蕭灑便爲江齋。余所酷愛者。此地有漁臺。偃臥於江中。石亭特立於臺上。皆爲門外第一之勝。小子爲之買其屋子。而以出丈名其臺。爲入而詣敎云。而承杖屨之所。夫何論價之多少也。小子謾作蟾江别曲。而又有拙吟。先生亦和之矣。留居一月侍敎陪遊。講學酬唱之餘。起居飮食之節。亦莫非恩庇之所及。何嘗有一日離側之意也。因兒子之來。有不獲已還家之事。告以十日爲歸來之期。還家之後。以村中癘虐挈眷之寓。而身不免渠痛。累次猖獗症情不佳。先生爲之賜書垂問。兼之以美膳兩種之惠。余於病中。不任感謝之懷。爲吟一小詩以識之。一日夜夢。侍坐丈席。先生曰。余於爾。曾有一絶之和。爾猶留念勉之哉。余卽覺來記之。乃君我俱非少壯辰。鏡中髭髮日看新。武公抑戒宜堪誦。須向今生度此身之詩。此亦開發眷眷之意。及於寤寐之間也。過夏三朔。猶未快復。仲秋强作進候之行。先生證候。越添移寓芝幕屬耳。奉諗以來。不勝驚慮。但所恃者。氣宇淸明。精神無損。而留宿數日。自量身病。似加不無客裏之苦恙。貽先生病中之憂。還不如旋歸。告以黃花未落。爲重來之期先生力疾起坐。開戶送之。嗚呼。誰知此别。竟作千古訣耶。歸來而往之慮。何嘗有食息間弛也。返捧之後。病毒添加。頹臥杜門。圉圉難振。秋末家侄之往。不得修書以候。其還。先生賜書問之。滿紙辭意。無非慰余病懷眷戀之情也。一自其後。終冬歷春。痘虎梗路。消息茫然。適於四月念四。因崔生歷訪便。叨得先生症候一向添劇。自黃龍寺避痘之所。移寓龍仙菴。慕慮之忱。尤當如何哉。五六月之間。內從以其身之病。來寓於家。遠近親知。迭相來問。或傳喪出之音於千萬夢寐之外。心之驚痛。無以堪遣。而猶未得的報。方俟通訃之際。有人自市上來言。蟾津靈車自水路。昨到麻津云。余與族孫李琇。往候於濂津。卽六月十三日也。留待經夜。雨水大漲。故不免罷還。翌日又往候於上寺津。而不能直途馳進者。所經二處。痘火猶熾。方送人麻津。以爲邀船越去之計。適有從邑中來者。言今日午後喪船離發云。卽與琇。馳到濂津。喪船已過宜春界云矣。宜咸之路。亦有疫未淨。佇立江于。悵痛何言。嗚呼。小子之一哭先生。豈意後於人若是哉。至月之望。適有事蟾江之濱。卽訪函臺。臺空無人。獨立雪風。有淚添水。先生之歸。小子旣不得臨斂永訣。又未能攀輀痛哭。每以眞夢。將信將疑。今焉來斯。亦不覺其眞。而豈弟淸儀。警咳德音。如見如聞。而終不可得以見而聞之。嗚呼。先生之歸。非夢而眞也。小子此日之懷。當如何也。江山亦爲之悲。蟾水嗚咽。白雲慘憺。豈意昔日依歸之所。便作今日垂涙之地耶。遂以景慕二字。改題臺名。仍吟一小詩。以寫痛泣之懷。小子曾於侍坐之日。不揆荒拙。値與輙咏。先生隨吟隨和。未嘗一闕。今此之吟。踽踽涼涼。尤可悲也。荏苒歲月。苦待常期。大擬趨哭。而私家不幸。遭妻喪於三月初旬。庶從兄弟。又以痘疾相繼。夭化悲疚奔避之中。無遠役之勢。又未遂此意。遂欲趁初朞之日。趨進芝幕。洒掃舊室。揭紙榜而奠酹之。方將操文治行。而旋以事勢拘牽不果焉。今此所告。卽當日構出之大略也。屬兹新秋。痛軀稍蘇。决意登程。以本月初五到仁里。翌朝哭拜於靈筵之下。仍與伯胤同處於隔壁之室。感古傷今。心腸欲摧。豈料今日以此弔哭之行。而入此土耶。嗚呼。先生道學文章之盛。乃擧世之所共知。固不待小子區區之言。亦非小子之所能形容。而惟是小子早失舅氏之訓。有志於學。而未知其方。心常以爲所謂道學者。微妙高遠。非人人之所可窺測而企及也。自從先生遊也。默察其動靜語默之間。而驗之於古聖賢之說。然後乃知此道。只在日用云。爲庸言庸行之間。而初非怳惚窈冥。不可摸捉之物也。蓋先生之德。慈諒而樂易。白直而坦蕩。平易之中。自有至難之實。淺近之中。自有深遠之妙。卒然見之。若人人可能。而要其歸。則卓然有人不可及者。嗚呼。此眞所以爲精微高遠者也。嗚呼。惟知者可知之。而南方之人。至今追思。而不忍忘者。亦豈無所以而然哉。嗚呼。入門而莫之見。長號而莫之應。告之而莫之答。明日之朝。將復南路矣。長程來去。果何爲哉。我心之悲。曷有其極。道遠而物不能自具。文短而言不能盡意。伏惟先生庶幾降格而恕之。嗚呼哀哉。尙饗。
하필청(河必淸) 1701(숙종 27)
본관 진양(晉陽). 자는 천기(千期) 호는 태와(台窩)
영조(英祖) 14년(1738) 식년문과에 갑과로 급제. 찰방을 지냈다.
제산집
*與河千期 必淸 書 壬戌
姜居士匪意來訪。自云從足下於落水書齋。奉談讌甚穩。仍叩得足下近况及落水泉石之勝頗詳。甚慰懸仰。足下雖枳於世。局跡林野中。然得此佳勝靜僻處。爲藏修遊息之所。而又將聚鄕里子弟。敎育而作興之。此其爲樂。豈儻來軒冕之榮所可擬哉。天之所以餉吾人者。亦不薄矣。良賀良賀。仍竊妄念貴鄕。自冥翁門下諸賢以下。至五六十年前。文學行誼之盛。非他州可比。以今觀之。文詞才俊之士。固不乏。然律之以先輩風猷。則似少衰矣。足下盍亦思所以振之也。足下年尙彊。天稟之懿。志尙之潔。無遠之不可到。及此閒放時日。大覃思於經籍。以古君子事業自期。而不止爲文人名士之倫而已者。寔區區之望也。未知足下以爲如何。不勉己而勉人。固可笑。然如纍人之枯落衰病者。雖欲自強。何可得耶。幸勿以是罪之也。纍人病瘁日甚。又有兒少之憂。比來益憒憒爾。居士儘奇矣。見其裝中詩軸。盛詩皆好。序文尤佳。可知足下於文辭。用功不淺。歎服歎服。居士欲得拙語甚勤。不得已牽率以副之。足令觀者冷齒。渠或欲移錄於卷末。則切禁之如何。奉際無期。向風悒悒。
*答河千期書 乙丑
改歲以來。久不承動靜。日者。仁川金君見過。叩審閒中日用大略。又知落水所築已完。規橅稍備。懷仰高風。引領東望。屢日而不已也。今於匪意。迺辱專人惠書。存問甚至。奉讀再三。感歎彌襟。且審春寒。承懽起居有相。尤不任慰仰之忱。纍人疾病呻喟。比前似减。而暮途添齒。衰悴益甚。兩子前月北歸。姑未下來。寥寥獨居。愁鬱不自遣。苦歎奈何。書中縷縷之諭。陳義高遠。足見賢者志業之懿。歎服歎服。但推借鄙人。太不近似。足下莊士。必不肯爲浮辭以調戱人。得無知人之明或有所蔽而然耶。抑亦以見愛深。故忘其惡也。讀未及半。愧汗竟趾。纍人雖甚陋劣。少從師友間。有一二感發。非全然無意趣者。顧以平生爲名利所汨沒。敗壞其心術。無異醉夢中人。及此罪廢流落。竆厄備至。志氣銷落。而年紀又從而頹暮。精神筋力。逐歲减耗。雖欲自強如下瀨之舟。勢不可挽而回之。朝晝思慮云爲之間。鄙吝山積。自知與鳥獸之降漬同歸。有時撫枕自悼。當食忘箸。若無以自比於人人。於是而幸得遇足下。目擊耳剽之餘。因以窺測其所存。知其有高世俗之趣。故私竊敬愛。欲一布其中心所藏者。而未及也。頃因姜居士之歸。乃始略陳其衷。誠不勉己而勉人之譏。有不暇顧也。不謂足下之自卑而尊人。一至於此也。此固足下謙謙虛中之盛意。自鄙拙言之。豈不令人代羞哉。然足下年尙彊。才資意尙。又無遠之不可到。而今又得靜僻處。以爲藏修之所。此殆若天所畀焉。敢復忘僭奉勉。願足下無以所已得者自晝。趁此閒退之日。益究心大業。使知見日博。德器日就。出而爲當世用。入而爲一方所矜式。則其視纍人抱竆途枯落之悲而噬臍無及者。豈止壤虫黃鵠之比而已耶。足下勉之勉之。嗟乎。纍人雖已矣。儻得從足下遊居。食息於泉聲岳色中。以資其觀善麗澤之益。則桑楡分寸之效。或可庶幾焉。而奈此拘係。欲從而末由焉。何哉。感足下眷眷之誨。信筆及此。亦可謂不知量也。幸足下閟之。勿掛人眼也。恐爲有識者嗤罵也。
태와집
*次李達厚景慕臺韻 臺在蟾江金霽山所遊處
臺在蟾江 金霽山謫居所遊處初以函丈名霽山亡後達厚改以 景慕臺
大澤龍亡後 名區管領誰 筇痕留石榻 墻慕益增悲
*奉次宋上舍伯綏蟾湖贈別韻兼呈金校理謫居 四首
金校理名聖鐸字振伯號霽山安東人乃葛庵李先生高弟也德行文學爲一世所推重道伯累薦于朝連授齋郞縣監職登乙卯文科卽除持平俄遷修撰校理因上箚爲師訟冤事被恩譴謫耽羅戊午夏量移于光陽蟾津仲秋余仍遊山行歷訪焉己未五月漆谷宋進士履錫伯綏 與余爲妻姨從 率其子學濂爲訪蟾謫過余信宿而去余與德淸弟佩酒肴謁霽山丈于謫所宋友亦留在焉團晤一席竟晷達霄討論今古講說義理實多發藥薰浴之益余先歸宋友追到袖示酬唱詩累什余亦追次其韻奉呈霽山丈
重溟萬里片帆歸始識天心欲濟危夫子肯敎炎海久倘來榮辱任他宜
落日長沙逐客悲徵還宣室問何時斯文否泰關天運倚伏休凭鵩鳥知
蘭珮無心上海樓名區都付別人遊風光不合牢騷詠只助離亭惜別憂
孤舟又出洞庭波澤畔形容問若何海外風霜消不盡胸中長葆一團和
附次韻
三載漂流苦未歸 風波江海一身危 大賢遺則吾何敢 血泣追愆乃所宜
鰐水鮫山失路悲 孤臣虛負聖明時 由來禍福相須理 惟有長沙鵩鳥知
蟾湖西北岳陽樓 長送他人作勝遊 惆悵芳洲無限意 斜陽獨立倍離憂
南湖極目渺烟波 此地分携可柰何 千古懷沙遺恨在 感君深戒損沖和
*與霽山金振伯
今夏霖炎挽近所罕雖處淸冷地無疾恙者尙不堪頹塌矧瘴沴之鄕蒸鑠尤酷曾患諸證想必一倍作惡仰庸憂慮金氏所劑用至幾何邇間調養增損更如何必淸省事粗安是幸宿疴當暑別證層生不絶悶惱可言一者晉拜劫於盾威未易遂誠遙想客榻岑寂晤語無人祇自嚮風馳神而已傳聞國有頒慶之典匪久當有賜環之恩預切柏悅餘冀調候順序自愛
*答霽山金振伯
頃晉門屛款賜奬誨不啻三沐而三薰飽德來歸自詫頑金之質幸入大治之鑪錘也宋生回又伏承下書十行諄復如錫百朋圭復再三益切鐫感仍審愆候尙遲勿藥此必瘴濕之鄕風土之感炎潦比酷調將體履震艮更若何區區仰慮不尋常比也必淸宿疴添㞃委頓度了私切憫惱竊擬源源於杖屨之側得聞謦欬之餘砭此玩愒之昏痼而非直誠蔑向學日熱路夐病難抽脫荏苒未就夙宵山仰之意果安在哉令胤其已反面否炎程潦水似難趁期還往旅館寥落更尠賓朋愁寂鬱悒想益難聊遙切耿耿響像之私也宋上舍留弊居累日頃始旋駕伊后淫霖連日未知無事得到否也宋友橐中有贈別酬唱韻累什愛玩吟詠之餘與伯綏更爲遣興破寂敢更忘拙別紙書呈伏望恕其狂僭而特賜批抹若何藥物若干奉呈助治暑濕之資耳
*答霽山金振伯
一宿陪話猶未穩承諄誨歸后旋切悵黯卽於匪圖令胤歷訪窮居獲拜惠札感喜交幷稍豁日夕嚮往底懷第審曾患口爛之證往復無常蘇完未易深庸虞憫必淸侍事姑安是幸而宿恙沈痼書冊玩索讓與別人事業尙何望扶豎心神窺得一班文理乎胤兄旋卽告別深切悵缺南冥集師友錄多有缺誤入梓時校正未精之致伏望披閱之時付標以送如何日氣漸熱路且稍間奉拜未易臨書尤增忡悵惟祈愆候趁復
*與霽山金振伯
今夏霖炎挽近所罕雖處淸冷地無疾恙者尙不堪頹塌矧瘴沴之鄕蒸鑠尤酷曾患諸證想必一倍作惡仰庸憂慮金氏所劑用至幾何邇間調養增損更如何必淸省事粗安是幸宿疴當暑別證層生不絶悶惱可言一者晉拜劫於盾威未易遂誠遙想客榻岑寂晤語無人祇自嚮風馳神而已傳聞國有頒慶之典匪久當有賜環之恩預切柏悅餘冀調候順序自愛
*答霽山金振伯
春間晉侯款承諄誨頓豁積歲幽菀伊后淫雨極備便音久閡旋切戀德之忱令胤匪意來訪伏承下訊以審長夏炎潦體中動止神勞萬珍尤庸慰沃必淸侍事姑寧是幸但懶習與宿疾成痼其於書冊探討讓屬別人如是而其可望向上漸進不見棄於大方乎千膺弟三霜已過追念其心天器業可作私門之一棟樑痛怛嗟惜之私不以年久而有間今承座下文以哭之滿紙悱惻無非赤心片片中流出長逝者有知必感泣於冥冥中矣今其神主尙仍殯筵當因朔奠依敎致酹南雲擧醇資篤志親友之期嚮不些今遽作泉下人非但鄕黨之不幸遙想左右累年敎誨之餘益切爲慟之私矣胤兄歸意甚速纔奉旋別冒暑致遠切所貢慮
*答霽山金振伯
客冬姜居士回伏承下書滿紙諄復無異親承熏浴況其警勵奬勉之意溢於言表圭復再三感戢無諭私自喜頑金之質幸入大冶之鑪韛也伊后歲色已改春寒尙峭不審此際體履震艮若何湖海寒暑俱酷將息之節溫淸難適惟以豈弟神勞少寬夙宵懸仰之忱必淸侍事及病狀竝姑依前但年漸加而學未進一嚮祇是這等人良可歎咄索居無事時以經史自娛而迄未有實見得是由於才識之凡下志氣之茸闒未能刻意精思之致尙何望自異於庸衆人而庶追先輩之風猷乎仍念學雖貴於自得而其必資於賢師友以德成者居多嘗觀古人苟有尊賢尙德之心則雖黃卷中人尙必敬之如神明抑或在千萬里之遠亦不憚負笈而從之況不佞之於座下生竝世居同道而座下又久配湖邑其窮阨則甚矣於吾黨從遊之路則尤近矣豈可曰考德問業之無所而如不佞者非但未能執經請斅尋常存候亦未能歲二三之雖蒙時賜耳提面誨而有若十寒之一曝矣好賢待長之誠旣如是蔑裂則讀書向學之意又安知其必不然乎雖誘諸痼疾之纏身世故之掣肘而自訟則深矣今座下不以其淺弊而謂無足與語勉之以古君子事業在長德誘掖後進之道則然矣而顧玆淟涊何敢當何敢當雖然特感眷意之出尋常萬萬敢不銘在心頭替作三字符耶落水別業近纔苟完自量疏慵與時抹摋故得此靜僻以爲遊息之所非敢謂能作名區主人爾時與數三學者逍遙講論亦一間中樂事但恨未得挽回長者花外之車共探討好光景也頃惠佳什兩絶忘拙奉和更呈四韻一首敢冀報琚不備
*與霽山金振伯
日者令胤意外來訪驚喜握敍之餘細審伊時體履將息差欠康和暮境窮途當此濕蒸衰病時侵不甚異事而惟是在遠懸仰者之夙宵嚮慮曷有其極比間淫雨連旬溽暑中人愆候調度其無添㞃之患否素患難行患難無入而不自得固是平日定力之所以禦外物者縱有一時風土之感亦何損於髭髮之勝昔也必淸親候粗安是幸此距蟾湖不過朝發夕至而座下旣匏繫一隅如不佞者一病守奧未勤鞍馬些小世故又從而掣肘一年之內尙未選一小隙雖誘諸事勢之使然而烏在乎心悅誠服之意哉前後累度諄誨眞是赤心說與鐫念不忘奚啻如奉拱璧顧玆病瘁殘骸一嚮委靡怠惰少無奮發堅篤之志氣時時書冊披閱者只是悠泛看過其何能體驗身心漸化氣質而仰答屬意之勤摯乎胤兄盍簪累日相與逍遙於落水泉石之勝非徒暢敍幽鬱而實多麗澤之益反面期促未投歸轄旋切耿結頃因病甚未修一字適憑齋僧市便暫此探候當歸少許付呈偶得一絶奉浼以博一粲
*挽金霽山振伯
德行文章繼曩賢 必於顚沛見眞天 一生心內惟三事 萬死湖中已十年
瓢隱家聲今忽寂 陶山遺緖更誰傳 追思平昔勤諄誨 愧負輔程奠漬綿
이봉환(李鳳煥) 1701(숙종 27)~1777(정조 1)
본관은 재령(載寧). 자는 경의(景儀), 호는 검남(劒南).
아버지는 영(栐)
詩文과 禮說에 뛰어났으며 글씨를 잘 썼음. 金聖鐸과 李象靖과 교유.
安東座首를 지냈다. 저서:『釰南集』.
제산집
*答李景儀書 戊申
潦雨跨月。咫尺伊阻。匪意損惠長牋。謹審有奔逬之撓。高榻來住禪室。不勝驚歎。第於淸凉界中。陪侍大阮先生。講學肄業。况味超勝。是則可慰也。聖鐸孱羸之軀。爲濕熱所困。日涔涔無餘氣。獨幸老人安寧。不卻匕箸耳。書中見念之誨。良感不遐厚意。第所以推借稱道之者。千不近萬不當。非但使聖鐸踧踖羞愧。無顔面相見。以足下言之。一則有違於直諒忠益之義。一則有犯於一言不知之戒。足下何爲而忽爲此非倫之辭。有若相調侮然哉。然調侮非君子之道。雖於他人不相親厚者。亦不當以此施之。况聖鐸辱知辱愛於左右。非一日矣。今乃以不施於他人者。施於聖鐸。豈理也哉。特其相愛厚相知深。故不惜齒牙餘潤。而不自覺其浮於情也。抑又欲推而納諸文學道義之林。故爲是過奬語以相扶掖之也。足下之意則甚盛。然聖鐸何敢當何敢當。聖鐸自幼少時。於儒者事。非全然無意者。而氣質所稟受。偏在柔懦。不能獨立自樹。且自數十年來。與賢師友周旋之日少。離羣索居之時多。悠悠汎汎。虛老歲月。卽今齒髮已向衰落。問學日退。尤悔日積。無論日用動靜之間。顚倒錯謬。至於書卷文字之業。亦放廢不以爲意。飽食終日。無所猷爲。已自分爲四十無聞人矣。然有時閒居獨念。反顧初心。惕然自悼。不覺年紀之已晩。而尙有望於彊輔之益者。不淺尠矣。切願吾兄自今以往。勿復以假借慫慂爲事。專以忠告善導。切磨箴規爲務。使衰懶者。或有所賴。而收分寸之功於桑楡之景。然後乃爲眞相知眞相愛也。吾兄亦宜加眞積之工。懋久大之業。使天賦英才。不但止於小成。而家世文學之傳。得有所嗣。則在下交之列者。豈不與有幸焉。區區鄙誠。惟吾兄念之。
*答李景儀書 庚申
歲改春晩。謹問卽辰學履起居連享佳吉否。瞻遡之懷。不比尋常。纍人移配到此。又已三歲。流落牢騷之歎。不足云云。而邂逅一疾。轉成沈痼。見今形銷神脫。鬢髮蕭疎。若使平日有一分素養之力。豈遽至此哉。髭髮勝昔。是大賢事。固不敢妄希。而如王定國特一名士耳。東坡猶稱其十五年瘴烟窟裏。面有紅玉色。乃知古人不可容易企及也。可愧可歎。自頃尊先諸先生棄世之後。蒙陋鈍滯之惑。至老益甚。每倀倀焉無所適從。則區區一念。有望於僉兄紹述之業者。雅不淺淺。及此狼狽流遷。無復世念。而獨於僉兄乎。相期之意。猶未已也。此非獨爲法門傳授淵源。有所賴而不墜。亦庶幾此身未死之前。復覩天日。有北歸從遊之幸。則或可以切磨資扣。以爲收拾桑楡之助耳。幸願無過於撝謙。益留意於進德修業之工。以慰此傾仰之心。且以所得之餘。不惜遠施。使荒廢昏惰者。得有所警發。則豈非君子以善及人之惠耶。萬萬書不能盡。惟冀自愛崇深。起居佳勝。
검남집
*與金霽山[聖鐸○戊申]
冐暑辱臨。厚義出尋常。坐席餘香。秪今不泯。第劇瞻仰。庚熱煩蒸。雨意不已。不審勞頓之餘。還侍體履何如。區區不瑕之慮。不勝以喩。鳳煥客狀如昨。不才謏聞。豈敢望君子之不遺。而竊不自揆。欲忝門下之列。實所蓄積也。因縁幸會。得以從容於淸閒寂寞之濱。罄竭底藴。少可以酬平生見慕之意。事勢適此牵礙。不果遂願。悵歎無已。聞李世卿柳汝潤諸友。方住高林。移槖往赴。若聞執事命駕此中。當更移棲趨下風矣。幸因便回敎期日如何。
* 答金霽山[己酉]
雨後炎蒸。特地非常。㐲惟尊侍彩起居。愼毖增相。慰遡區區。迺者。碧水從兄從宇下來。㐲聞新拜陵寢之官。将啓肅謝之行。鶴鳴九臯。聲聞于天。固是自然之理也。半世山林。積學修行。正為向後受用之地。而進塗始闢。益復尊顯。以展布其平生所知見。實是遠近知舊之所共祝望。但鶴髮倚閭。恐難遠離。未知盛算久速何如。亟欲馳進。參聽凢百。奉送行韉。而冗故相妨。未果遂誠。孤負眷私。實深慚恨。
* 與金霽山[戊午]
圎扉之日。固無奉咫尺以效微悃之勢。而及後受玦涉海。亦出遠未還。前後並闕一字之候。尋常供恨之。至大海之南風土。不並以北。雖將息得宜。豈弟神勞。保無他虞。而區區見慕之誠。自不勝不瑕之慮也。然古來賢達。鮮有不遭此禍患者。無乃天之所好惡與人異心而然耶。平日之所知所養。正好今日受用。想必樂天知命。髭髮勝昔。是用慰祝。但太夫人倚閭之望。足使他人反袂。况尊十二之思。當復如何。奉深吁惋而已。德門重値不幸。令宗姪尊丈。竟不起疾。㐲惟患難睽離之際。傷痛倍萬難堪。令督戚兄曾在風霆震薄之中。克盡處變之義。今又扶侍在側。擬作西山之二郞。此中得此。儘非易事也。令人欽歎無已。適聞有便。暫此修敬。惟祝為時為斯文加護。勤毖天爲。吾君扶社稷。漢廷行召賈生還矣。
*與金霽山[已未]
自執事蒙㤙。稍北雖拘掣。不卽走省。奉咫尺。粗效區區之誠。不宜在人後。而喪禍以來。神沮魄遁。因循逋闕。淹歷歲年。深恐不敏。久已見絶於君子之門也。或遇德門諸賢。輒問南來消息。每道尊軆候。久失和䂊。神觀殊損。昔日雖平生定力。樂天知命。無入而不自得。然水土不習。瘴癘侵薰。氣血之致傷。理勢之必至也。為道為時。曷勝憂歎。惟以太夫人氣力淸寧。遠慰陟屺之思。為奉幸萬。萬鳳煥前年六月。舍弟奄忽喪逝。其豈弟慈良之質。本無夭死法。而直縁劣兄積惡。招殃以移禍於無辜也。摧心傷骨。欲殉無路。而重以老母在堂。無人將護。覆巢餘夘。未成毛羽。家事飄飖。未有稅駕之地。令人睂攅而髮白也。似此淟涊中。送盡無限好光陰。居然作四十。無聞之一措大。使吾家舊來靑氊墜地。而莫可收拾。痛心痛心。執事者聞之。想亦為之愴然不怡也。歲律將窮。萬物皆有除舊就新。去灾來福之望。惟祝天日照臨。特垂金鷄放還之息。得有彩衣還侍之慶。
*祭金霽山文[戊辰]
惟先生。山河淑氣。圭璋令質。自在黃悼。奄成蒼蔚。時吾叔祖。賜還南歸。胥宇錦里。講道塾師。公卽摳衣。夙聞大方。學優入室。痛纒築場。戴盆有寃。擧幡久稽。公會脫褐。通籍金閨。鶚騰淸秋。鳳儀高岡。上喜得人。寵賜宸章。王明遠照。臣言可効。一封朝奏。羣猜暮激。慈杼忽投。駭機叵測。十載遐荒。一介孤擯。瘴癘為祟。杯蛇感疢。天涯臯復。惟道是殉。吾黨儘厄。萬事都蹶。人或訛公。不酌時勢。豈公昧幾。而義所安。昔吾先子。道義交懽。歲寒方期。夜㙜先杳。公新錦還。臨門哀吊。旣又將葬。為文逆祭。恩深惠恤。感鐫肝肺。曩公柩歸。適余病吟。未奠瓣香。孤負宿心。知公有靈。以我非人。玆趁小期。敬薦一危。庶鑒微誠。俯賜幽聽。
권렴(權濂) 1701(숙종 27)~1781(정조 5)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희원(希元), 호는 후암(厚庵)이며, 후준(后準)의 아들이다.
제산 김성탁(金聖鐸)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이재(李栽)를 사사하기도 하였다.
1669년(현종 10) 밀암의 문하에서 소학의목(小學疑目)을 강질(講質)하여 진덕수업(進德修業)의 근본을 삼아 궁행실천에 힘썼다. 천성이 온후하고 명리에 뜻이 없었으므로 백씨와 함께 진사에 합격했으나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고 또 추천을 입었으나 기용되지 못하였다. 저서로는 『명성내외편(明誠內外篇)』이 있다.
김익한(金翼漢) 1702(숙종 28)~1781(정조 5)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장천(章天). 호는 추재(秋材)
조부는 항중(恒重). 아버지는 약흠(若欽)
*答再從姪翼漢書
大收光天行中。得奉惠字。驚感叵量。近日竆寒。爲况更如何。碧牕明燈之諭。令人不勝悵然興懷。萍浮異域。白髮滿頭。匡山讀書之處。還歸固不易。縱使得歸。亦豈復有少年之樂耶。如君年方盛壯。雖在僑避中。適得山寺靜僻處。正好日對黃卷。求古人所樂者何事。吾諸從兄弟。皆且老矣。纍人則尤無可言者。所期以門戶之業者。惟君及光天兄弟若而人耳。幸勿爲俗累所撓。及此未衰之年。惜分孜孜。如恐不及。千萬之望。
유정원(柳正源) 1703년(숙종 29)∼1761년(영조 37).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순백(淳伯), 호는 삼산(三山).
아버지는 석구(錫龜)이며, 어머니는 연안이씨(延安李氏)로 천린(天麟)의 딸이다.
1729년(영조 5) 생원시를 거쳐 1735년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으나 아버지의 상을 당하여 오랫동안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다.
1749년에 성균관전적을 거쳐 자인현감(慈仁縣監)이 되어 백성의 부담을 줄이기 위하여 노력하였으며, 이듬해 홍문록에 올랐다.
1751년 3월 안동에 귀향하여 윤광소(尹光紹)와 함께 향음주례(鄕飲酒禮)를 실시하고, 여강서원(廬江書院)에서 회강(會講)하였다.
1752년 정우량(鄭羽良)의 천거로 지평에 임명되었으나 사직하였고, 그뒤 수찬에 여러 번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1754년 필선이 되었고, 이때 장헌세자(莊獻世子)의 보도에 능력을 발휘하여 영조의 신임을 받았다. 같은해 수찬·사간을 거쳐 교리에 임명되었다가, 통천군수로 나가서는 백성의 진휼에 힘썼다.
1756년 원인손(元仁孫)과 채제공(蔡濟恭)의 추천으로 부교리가 되어 조정에 돌아온 뒤 왕의 특명으로 동부승지에 임명되었으나 사직하였다.
1758년 춘천현감에 부임하였다.
1760년 형조참의·동부승지·우부승지·판결사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직하였다.
그뒤 대사간·호조참의에 임명되었다.
젊어서 제자백가(諸子百家)를 섭렵하였고, 천문(天文)·지지(地志)·음양(陰陽) 등을 비롯하여 병률(兵律)·도가(道家)에 깊이 침잠하였으나, 유학의 본지는 사서삼경에 있음을 깨닫고 그것을 깊이 탐구하였다.
경학에 능하고 여러 학자들의 주석에도 밝아 으뜸가는 경연관으로 영조와 여러 신하들의 신임을 받았다.
문집으로 《삼산문집》, 저서로 《역해참고 易解參考》·《하락지요 河洛持要》가 있다.
*祭霽山金公 聖鐸 삼산집. 제산집
俗衰道弊。士鮮知學。便儇皎厲。剽掠組織。聆言則似。視履斯忒。猗歟我公。天稟卓絶。相惟金玉。懷似蘭雪。早歲聞道。近裏鞭辟。美在于中。暢支發業。羣行兼融。遵蹈繩約。一室嘯歌。慨想前哲。疾驅駸駸。整我弭轄。尙絅外章。家邦必達。弓㫌鼎來。晉塗大闢。金門文學。聖眷攸屬。領袖南國。時宰亦說。煥猷賁治。拭目翹足。嶢嶢易缺。古人所咄。一疏媒禍。瘴海罾罻。素患行患。講之已熟。陸方奚取。涪易日讀。啖咀道腴。梳洗理窟。舂陵有士。來近秉拂。畜德成物。一行氣力。十數已終。庶冀天澤。如何子服。告孼斜日。嗟公蘊抱。殉身以沒。彼蒼蒼者。不庸予敓。謂其嗇之。曷厚于德。曰篤降生。胡夭是椓。我靜思之。其端可詰。閔下仁覆。匪命不淑。理或未定。而氣流斡。騰倒用事。錯糅多慝。閒値其淸。於數必局。閼之悴之。讎之若敵。帝亦到此。主宰不得。矇者妄詬。造物隨俗。公應洞觀。順寧存歿。法門衰敗。山南蕭索。矜式無所。後死是怛。矧余憃愚。荷眷素篤。與有光寵。聯題淡墨。偸懶障學。鉗鎚無質。願剗鱗甲。庶補黥刖。時承警誨。果然我腹。公旣遠邁。我罹憂慽。篲未操。詗訊亦闊。志愧東平。罪類子直。尙戒化夷。以竢篦刮。不憗斯遽。茹痛靡及。倀倀迷道。誰憐擿埴。來奠寢門。醪單饌薄。惟此微忱。庶通冥漠。
김광한(金光漢) 1704(숙종 30)~1756(영조 32)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유장(幼章).
증조부는 지촌. 조부는 세중이며, 아버지는 여흠(汝欽)이다
*聞族姪光漢上來
禁府深深似夜臺。竆愁日夕苦難排。朝來忽得歡心報。千里遙程爾又來。
김우한(金宇漢) 1705(숙종 31)~1783(정조 7)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광천(光天), 호는 인재(忍齋). 숭청처사(崇禎處士) 시온(是榲)의 현손이다. 아버지는 순석(舜錫)이며, 어머니는 완산유씨(完山柳氏)로 봉시(奉時)의 딸이다. 족부(族父)인 제산 김성탁(金聖鐸)의 문하에서 수학하며『서경』<반경(盤庚>편을 배우고 다음날 배송(背誦)함에 전혀 막힘이 없었다. 효행으로 이름이 났으며 동생 지곡(芝谷) 정한(正漢 ; 1711~1766)과의 우애도 깊었다. 구사당(九思堂) 김락행(金樂行)과 잠자리를 같이 하며 학문을 강마하기도 하였다.
제산집
丁未。寓瓢谷。四月十日夜。宗姪善伯 敏行,柳達夫 顯時,柳允卿 升鉉。及余小飮溪上。族姪宇漢,兒子晉行。樂行初名。末至。以朱文公朗然淸夜月明時之句。分韻。得月字。
南溪多樹木。薄暮淸風發。吾宗適無事。扶杖度深樾。
臨溪對綠酒。座客盡華髮。而我躡羣賢。笑談愧唐突。
柳林忽暝色。飛絮暫明沒。擧杯飮未已。復照松間月。
相顧意歡適。不覺醉兀兀。人生百年內。此樂未宜忽。
同志易睽達。佳節共消歇。山蔬與匏樽。不須嫌蒼卒。明朝酒醒後。月落思慌惚。
*族姪光天,李郞伯實東英。與小兒濟行。追到島中。留五六日還歸。贈詩以別。
白首孤囚又海中。那知此地笑談同。今朝送別前期遠。無限鄕愁向北風。右別光天
遠涉鯨波爲逐臣。竆途彌見舊情親。世間離合何須較。笑殺夷陵泣下人。右別伯實
*答宇漢,正漢書。戊午
以海外邈然之思。得見手畢於出陸之日。此豈與尋常書問。同其喜慰耶。信後忽已歲晏。未審秋寒。僉學味如何。纍叔當初所冀幸。豈敢到此。自大霈落莫之後。不知此身將幾年作烟瘴中生活。而孝理推恩之聖德。若是罔極。罪大孤臣。雖糜身粉骨。豈足以上報萬一。北向稽首。但有感涕自隕而已。謫客除栫棘重罪外。固可任意出入於其境內。而至於放意遊賞。恐非所宜。如柳州,東坡之恣遊於山水間者。當時罪逐者例帶刺史,司馬之官。與今時自不同也。受由歸覲。亦非前聞。近來雖或有如此者。不過圖之於本官。非國法所許也。嘗聞趙重峯謫通津。其親在金浦。相去數十里。而不敢越境而往省。親喪亦不敢奔云。如有法典。則豈如是耶。且輕罪猶可。如我者何敢生意耶。蟾江在門前。乘月一泛。吾所樂也。但一水外。卽河東地。恐人之以涉他境罪之也。先師岳陽,雙溪之遊。亦在全放後耳。
*答宇漢書 己未
知與章天同處泗上。讀得貨殖傳四百遍。其不浪過可想。喜甚。然君年紀已晩矣。未知讀貨殖傳有何大得力。欲爲做文章地。則似非切急之務。欲做時文。則今世之業程文者。已弁髦此等文字矣。彼此皆無當。吾意莫若就儒家書中用力。使識見日廣。議論日高。則發而爲文辭者。亦不期好而好矣。莊馬大家文字。固不可不讀。而此乃二十左右時。才氣方銳者。所當讀。如君方在中晩之間。恐非切己得效之道也。如何如何。所與晉兒爭論者。吾以爲近於閒論。孝剛之廢擧業而專意於學。在渠意向及再從兄所命之如何耳。君等雖在至親之屬。何可勸禁於其間耶。要之廢擧。亦非容易事。晉兒之言。豈不輕發耶。以此而自以爲大論。互相往復。諸君何其多事耶。不如各自反己。察吾學之至與不至。而以其所得之餘。勸率少輩之有志者。不以廢擧之名。標異於世。而闇修之功。交相輔益。則豈不善耶。然孝剛之志向。誠可尙。扶掖激厲之責。僉君當不可忽也。短律。諷來愴然。欲和送。而適値晉陽故友姜君平之兩子來訪。撓甚不暇。恨恨。
*答宇漢,正漢書。庚申
兒來。得奉僉札。具審春生後侍奉平吉。良慰。纍叔病勢無加减。可苦可閔。年在頹暮。前路促迫。而流離病困。無復可冀。如纍人者。固宜有枯落無聞之歎。盛年壯氣。前頭歲月。不爲不富者。亦復云爾耶。勿以旣往爲慨恨。且自今日。更加策勵之工。則何事之不能做也。光天前日與晉兒往復書。得一閱焉。以吾謬見。則彼此皆以閒氣務勝。各不思參量相濟之道。往往不失之過激。則又近於戱劇。但可以資愁寂中一笑耳。要之。迷兒之言。大槩正當。而其於事勢委曲處。似欠斟酌。君之所執。則頗切事情。而恐於第一義上。未能透出也。人之爲學。自是常分。何必論其才質之鈍敏。形勢之可否。然後爲之耶。但今世扶門戶之道。多在科名。前世大賢。亦有從科目中出身者。科業亦何可廢也。况有父兄在。則尤有所不得自專者。若使科業可廢。則前賢已禁戒之矣。然應擧時隨分應之。退則爲爲己之學。此學者家常茶飯。若必以了此一事後。爲學爲心。則事不可易了。而此心一溺。難可捄拔。所謂奪志之戒。爲此故也。吾意兩家議論。去短取長。合而爲一。然後可無病敗。未知如何。君輩無乃以我爲黃政丞公事耶。可呵。扶仲。書辭紆餘贍悉中。有明暢雅潔之態。不待相對。而足令人刮目。喜甚喜甚。末端所喩。亦皆得之。但前日鄙言。以近世攻文之人。用其衰末膚淺之才力。妄意先秦莊,馬之閫域。至以韓,柳以下。爲不足法。然畢竟所成就。反不逮宋季元末之人。是果何益哉。况以其至者言之。縱使掉鞅於遷固楊劉之間。猶非君子之所取。故朱子以爲古文時文。皆使學者。棄本逐末。爲害等爾。此鄙說所以爲据者也。至於作文之際。則有物必有則。小事尙爾。况於文章。可不略以法度典則。施於其間。而全不留意。任其鄙俚叢雜耶。此亦朱子論文之雅言。爲文者不可不知也。書牘酬答甚煩。不能盡所欲言。異日幸復之。
*答宇漢,正漢書。癸亥
前後便。光天書踵至。又得扶仲七月書。千里相戀之餘。何等傾慰。况審比來。尊堂氣體無甚愆違。今書所示腰脇之痛。恐是一時偶然。計已勿藥有慶。爲之慰祝萬萬。此中病狀。與前書所告一㨾。不足復云。近來門戶凌替日甚。喪禍之外。往往有交瘉之端。先故遺風餘韻。殆盡掃地。而後生小子。無所倚仗而歸嚮者。天涯愁寂中。時一念及。不覺推枕慨然。獨念君兄弟及章天雲若輩若而人。可以任此責。故不免及之於書中。此是衷誠所發。非一時謾語。且一家至親之間。不必以謙挹爲事。扶仲之避不欲當。無乃太過耶。幸須以古人所謂好家門爲己任。勉自樹立。以爲後生者之先導。實區區之望也。書末所喩科工之敗人心術。壞人學業。誠至言也。然侍奉之下。不可不思悅親之道。况我國士子出身之路。舍此無他歧者乎。做程文入塲屋。昔賢之所不免。要當於其間。審內外輕重之分。勿令心志。全然陷溺則善矣。然古人云。九折臂而成醫。吾卽四十年科臼中折臂人也。得失早晩。儘有命焉。彼營營汲汲者。豈非不知命者乎。置此身於聲利之塲。汨此心於程文之內。終不得回頭轉脚。思其所當思之事。讀其所當讀之書。以至蹉過平生。白首紛然。追悔無及。如我老物者。豈不爲可鑑之前車耶。因扶仲之相激發。不覺縷縷至此。可笑可笑。
*答宇漢書 甲子
別廟處置。出於不得已之僉議。吾何敢間。然吾之前日之論。今不省其如何。而以今所見。則先王制禮。自有限節。若徇情而不爲之節。則自古孝子慈孫爲先之誠。豈有竆已耶。高曾兩位。則見在子孫代未盡者頗多。以次輪行。固無妨礙。而以上一位。不論代盡與否。一體輪行。則似有情勝滅禮之嫌。若使代未盡子孫。獨當行之。則恐有難便緯繣之患。故前書有所云云。今聞衆議協同。已爲定式。此雖非禮之正。猶愈於委諸婢僕。而有未安之弊者。淺見復何異議耶。然吾意則終有所未安者在。雖宗子。代盡則遷之而不祭者。以禮制之不敢越也。况支派之遠裔而祭其代盡之先祖。於禮果如何也。必以婢僕輩之不謹爲未安。而有所變通。則何不遵前日諸父兄所定之制。每年定出有司二員。其行祀也。有司家親自辦供。而不委於婢僕也。此與子孫之輪行何異。而且無越禮之嫌。難便之事。豈不順而易行乎。且旣以見在子孫輪行。則必將不擇貧富裕乏。一體行之。曾見輪行之日。辦供家苟竆甚。則所受祭具。或不免前期受出。用之於迫切之私故而臨時窘急苟簡之弊。往往而然。其爲未安。與委於婢僕。有何大相遠乎。今此處置。初雖出於情理之所切。安知後日之弊。不復如前耶。此淺料之所慮者也。然今旣完定。不可復撓。切勿以此等語。煩及於一家他人也。
*祭文[門人再從姪宇漢]
嗚呼哀哉。時何易邁。天何不復。覆盆莫白。墓草再宿。金聲玉色。日以冥漠。已矣斯世。那見髣髴。謙和精粹。先生之德。平易明白。先生之學。葢其淵源。來自文純。文純有大。道尊人親。具體而微。謂公則然。非我阿好。得諸人言。公在南海。人說小陶。宜古宜今。不激不流。世竟莫容。孰詰其由。來或可聞。空懷遠遊。維今之春。汨吾南征。湘潭波綠。君山草靑。桄榔舊庵。怳覩枯容。窻前小檜。人戒勿傷。江上有臺。景慕揭名。柳州化夷。韓子能天。一時之屈。百世之伸。先生奚憾。所悲斯文。在陳十年。猶望復歸。率是一邦。爲矩爲規。縱違兼濟。長惠後人。天又不憗。是曷故焉。儒林氣索。愈久愈新。哀余安倣。迷塗倀倀。嬰兒失哺。逆旅悲鄕。小庵在此。圖書滿壁。怳余隅坐。進退唯諾。追思往事。華胥一夢。昔昧其樂。今也爲痛。師儒難幷。歲月不再。古人此語。三復流涕。尙冀恩靈。陰誘我衷。庶免大戾。歸見先生。瀝血以告。不隔者誠。
김익명(金翼溟) 1708(숙종 34)~1775(영조 51)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운약(雲若). 호는 범암(凡巖)
조부는 학배(學培). 아버지는 세용(世鏞)
*答族姪雲若書 癸丑
仲春所示別紙。頹懶汨沒。迄未奉復。殊孤辱問之盛。愧甚愧甚。近日偶因無事。試復拈出思量。而元來愚鈍之性。久廢講習之工。心地茅塞。與文書義理。不相流通。玩繹數四。終未覺其有實見得處。尤增慚懼。然於左右。不可以不知。而不反復以取相長之益也。玆以愚慮所及。摸索爲說。幸左右。勘訂去取之。中庸第二十章誠者天之道也下章句中。然而二字。振谷丈所批雖如彼。愚意則猶未能曉然。何者。擇善明善。朱子旣以爲兩件事。則固執誠身。何獨爲一截事耶。愚以爲擇善固執。皆以工夫言。而明善者。擇善之功。誠身者。固執之效。其先後次序。實無彼此之殊。故兩句皆下後字。而其或加然字。或加而字者。乃偶然耳。不然則或取便音讀耳。若果以固執誠身爲一截。則當幷去後字。然後其義乃明。何必不改緊要之後字。而獨改無緊要之然字耶。况所考小註朱門問答中。換著然而字者。尤爲證據明甚。今乃曰。固執之外。更無誠身工夫。以而字代然字。猶大學之格致。易先以在之義。然則擇善之外。乃別有明善工夫。而必加然字耶。殊不知二者。皆有工夫功效之先後。而然而字初無各㨾義耳。且所謂才執身便誠云者。亦似有急迫意思。如何如何。誠者。物之始終此一條。左右所對。固似未瑩。而振谷丈所批。亦甚草草。使見者。不得了其歸趣。愚陋於此。誠難劈畫爲說。然盖嘗思之。以理之本體言之。則終始固無端矣。而以一物言之。則其始終。何莫非實理之所爲乎。故得其理。則有是物。所得之理旣盡則是物亦盡而無有。其有始終之理。似若有聚散者。而其實則理非有聚散也。以其物之終始。皆實理故也。然物有終始。而理之本體。固浩然而無窮也。學者於此。當猛著精采。得之於言語之表。若見物之有終始。而謂理果有終始之端則誤矣。然此以天之實理言也。若就人之實心上論。則凡有所爲。自始至終。誠心貫徹。乃爲一事之終始。不然而其心或有不實。則雖有所爲之事。亦如無有而不能爲終始矣。盖天地之理。本無不實。故凡物之生。各得其實理。有始有終。而無不實之物也。人之心。或未免有不實。故必有是心之實。然後乃有是事之實。若無是心之實。則决無是事之實。此君子所以誠之爲貴也。如此推之。未知如何。大學誠正脩齊章章句中。段段揷入致知意思者。愚於振谷丈說。亦不能無惑焉。夫八條目。階級各殊。工夫自別。而所謂致知者。非倏霎間略綽照管之謂。必煞用心思。窮究物理。以求至乎其極。然後方可謂之致知。彼所謂察四者之心。察不在之心。察五辟之病者。乃是誠正脩齊工夫之不得已者。烏可以致知當之乎。若果以此爲致知事。則所謂誠。所謂正。所謂修齊。將如何用工也。只是昏昏冥冥。全不省事而已耶。如是則大學一部。獨立致知一章足矣。何爲各立條目。而至於十章之多耶。且夫諸章中。悉帶得致知意思。則先輩所謂致知之意。貫通於十章中。不必特立格致章者。爲至當之論。而朱夫子苦心盡力。不顧傍人是非。獨取程子之意。以補其亡者。反爲僭踰無益之歸矣。振谷之論。不亦過乎。先儒說。愚所未詳。而恐亦未免牽合傅會之病也。惟左右更加深思焉。絜矩之釋。本之以章句。證之以或問。參之於先儒之說。考之於陶山之釋。而知諺解之不謬久矣。振谷丈。雖以江德功一書。爲斷案而力言之。恐未可輕信而遽從之也。然以文字釋例言。則絜以矩之者爲順。而以矩絜之者似傎。人之所以或不免。然疑於其間者爲此故也。郤不思以義理指趣求之。則以矩絜之者爲有本。而絜以矩之者郤無準。且以矩絜之者。其用矩字之義平正而穩貼。絜以矩之者。其用矩字扤捏而不安。况大學一部中。未有用字。如此者。則愚安得不從其義理之有本。字義之平穩。而顧以其解釋之稍順。而郤徇其義理無準用字不安之論耶。左右之謹守師說。恐得之。凡此所論。非故欲與長者之說相背馳。心有所疑。不可苟合。且感左右見解之精求問之切。而悉布聞之。盖忘其朽弊而欲藉明者。討論之力。以庶幾於桑楡分寸之功。願左右無以一日之長。而不憚指摘。以爲開警之資。幸甚幸甚。
*答雲若啓蒙問目
陳氏註。參互呈見。
來諭大槩推說得好。然以鄙意觀之。陳氏所謂互爲正變者。卽參互呈見之意。盖主河圖而言。則河圖之自一二至九十。奇偶相配。而得全數者爲正。而洛書之自一至九。奇贏而偶乏者爲變。主洛書而言。則洛書之分居其所。爲對待之定體者爲正。而河圖之同處其方。爲流行之妙用者爲變。以此而觀。則參互呈見之意。可知矣。然如來諭所推。則其意尤備矣。
蔡氏註。用則存乎偶存乎奇云云。
河圖。體圓而又有一三五七九之奇。故曰。非無奇也。然一與二。三與四。五與六。七與八。九與十。奇偶相配而數全。則是陰陽對待之象也。故聖人取其用而畫八卦。八卦。卽象陰陽之偶也。故曰。用存乎偶。洛書體方。而又有二四六八之偶。故曰非無偶也。然自一至九。奇贏偶乏而不相對待。則是五行迭運之數也。聖人取其用而叙九疇。九疇。卽象五行之奇也。盖所謂體圓體方者。以圖書兩圖之形狀而言也。用方用圓者。以二圖之或備全數。或缺十數。有奇偶之不同而言也。如此看。未知如何。
劉氏註。以質而論 止 以氣而論。
所謂各居其所者。謂一三五七九之奇。居於四方及中位。二四六八之偶。居於四偶也。不必言一六爲水。而居於一方。二七爲火。而居於一方也。所謂同處其方者。謂一之生數與六之成數。合而處於北。二之生數與七之成數。合而處於南。三八四九五十倣此。盖以質而論。則奇偶各有定止。而自成一體。以氣而論。則必生成相合而後。可以流行也。如此看。如何。
胡氏註。各當其所處之位 止 悉協所生之卦。
來諭似得之。盖此章下補註說甚詳。又傳疑云。圖之象當位。書之象不當位。兩象字。作五行生成之數看。圖之象不協卦。書之象協卦。作四象生八卦看。此又八字打開矣。以此更推之。如何。
曰。其皆以五居中 止 參天而兩地者也。
參天兩地。以本章說及下蔡氏註胡氏註觀之。大煞分明。不必就陰陽一畫三分而言之也。盖一箇物其象圓者。其圍三。三各一奇。而皆在所用。故曰用其全。一箇物其象方者。其圍四。四卽二偶。而半在所用。故曰用其半。奇者。陽之數也。偶者。陰之數也。奇以一爲一。故陽畫一。偶以二爲一。故陰畫一。此聖人所以參天兩地而倚數也。所謂三其三。三其二。兩其三。一其二。兩其二。一其三者。當就四象而論之。不可以八卦而言也。何者。三三爲九。卽老陽之數也。三二爲六。卽老陰之數也。兩其三一其二爲八。卽少陰之數也。兩其二一其三爲七。卽少陽之數也。如左右所論以八卦求之。則合於後天。而不合於先天。且如乾固老陽之卦。坤固老陰之卦。兌則四象屬太陽。而爻畫之數爲少陰之八矣。艮則四象屬太陰。而爻畫之數爲少陽之七矣。離之爻畫。屬於少陰者當矣。而震之爻畫。則乃少陽之七。而其實四象少陰之卦也。坎之爻畫。屬於少陽者當矣。而巽之爻畫。則乃少陰之八。而其實四象少陽之卦也。參天兩地。乃聖人畫卦時事。則當以先天論之。不當以後天論。凡象數之說。不止一路。橫說竪說。無不可通。則雖以後天言之。豈不可也。而要非根本之論也。且才得一爻。已有九六七八之數。不必待三畫積成。然後方有此數也明。蓍策篇中。其法甚詳。試考之如何。所論二震七坎四艮之數去十。則止於三。三巽八離一兌之數去十。則止於二。以此爲參兩之義者。恐近於牽合傅會。且其所謂少陽少陰者。亦以後天卦言之。非朱子橫圖之本義也。如何如何。
胡氏註。七八九六。迭爲消長云云。
按胡氏說及小註要解。則以一得五爲六。爲九長而六消。四得五爲九。爲六長而九消。而左右相反言之。何也。盖一得五爲六。則六陰已極。而有進而爲九之象。故曰六消而九長。四得五爲九。則九陽已極。而有退而爲六之象。故曰九消而六長也。八長七消。七長八消之說。來諭是矣。河圖之消長。亦當以陰陽老少之迭進迭退。推之矣。
柝合補空
朱子則以一補東南隅之空爲兌。以二補東北隅之空爲震。三補西南隅爲巽。四補西北隅爲艮。而胡氏則以一爲西北之艮。二爲東南之兌。三爲東北之震。四爲西南之巽。豈可謂無異同乎。其說詳於傳疑。取考則可知矣。
四實四虛。四方四隅。
鄙意四實。卽指四方。四虛。卽指四隅。盖四方爲正位。故曰實。四隅爲兩方之間。故曰虛。左右以成數爲實。以生數爲虛。未知有所据耶。玉齋說以下推說。似好矣。
小註。朱子云陰陽相交云云。
按傳疑云。朱子謂陰交陽而生陰。陽交陰而生陽。其重在本身。故兌艮互位而生。震巽還本位而生。然陰生陰。陽生陽則同。以此推之。則老少之生不同者。可知矣。以下推說。似得之。
朱子答袁機仲云。上半下半。
此以先天六十四卦圓圖言之。圓圖左邊。自復卦第一畫。至乾卦第一畫。爲陽儀。右邊自姤卦第一畫。至坤卦第一畫。爲陰儀。自復至同人十六卦之第一畫。卽陽下之半。自姤至師十八卦之第一畫。卽陰上之半。陽上陰下。亦依此推之。自乾至臨十六卦之第二畫爲太陽。而自乾至泰八卦之第二畫卽太陽之上半。自履至臨八卦之第二畫。卽太陽之下半。自遯至坤十六卦之第二畫。爲太陰。而自遯至謙八卦之第二畫。卽太陰之上半。自否至坤八卦之第二畫。卽太陰之下半也。左右以橫圖言之。亦通。而朱子說則以圓圖言之。其實圓圖橫圖一爾。
小註又曰。初爻二爻之四。今分爲八矣。
來諭是。
邵子曰。無極之前。陰含陽也。有象之後。陽分陰也。
來諭亦是矣。而但語有未盡處。盖坤復之間。卽無極。自坤而反垢。是無極之前。自復而至坤。是有象之後。不可曰坤復以前坤復以後也。又不可曰陽在陰中。故爲無極之前。陰在陽中。故爲有象之後也。是不過曰太極未動之前。太極已動之後云爾。太極未動之前。冲漠無眹。而萬象具於其中。故曰陰含陽也。太極已動之後。翕聚者發散。而萬象皆呈見。故曰陽分陰也。左右於此。非見未及。特下語有未盡。故云爾。
震始交陰而陽生。巽始消陽而陰生。
來諭本小註朱子說及胡氏註而言之。無可議矣。但於陽生則下交字。於陰生則下消字。此亦扶陽抑陰之義。亦不可不知也。
陽在陰中逆行。陰在陽中逆行。
來諭亦本小註中朱子說。是矣。但陰陽各居其方。則陽自下而上。陰自上而下爲順。互居其方。則陽自下而上。陰自上而下爲逆。此又不可不知也。
大傳。艮兌爲耦。
鄙亦未詳其意。欲考周易本註。而不可得矣。來諭所謂以少男少女而爲耦者。近矣。盖長男長女。則代父代母。而任發生長養之事。少男少女。以其少而不任事。是其所以爲耦耶。更詳之。
翁氏註。只此四位 止 羲文微意。
未詳其義。然試推之。坎離是乾坤中爻之交。中是不上不下。無過無不及。恰好底位也。東西南北。亦爲天地之正位。盖東西是南北方之中。南北是東西方之中。非如四隅之倚於一偏。而無正當之位。且如東北隅。謂之東亦可。謂之北亦可。豈如東西南北之各得正位而不偏不倚乎。此所以爲位之極好處。陽中有陰。陰中有陽。以坎離二卦見之。可知矣。盖聖人所貴者中正。故易中爻辭以二五爲貴。坎離以乾坤中爻之交。居東西南北之四正之位者。豈非聖人之微意乎。以此言之。未知如何。幸反復而得其說。然後見敎爲望。
少男進之後。長女退之先。
來諭推說。似得之矣。
*答雲若喪禮問目
爲人後者之妻。爲本生舅姑服。
退溪先生旣曰。只服大功。不近情。沙溪亦云。降三年當服期。則後人似當依行。而但儀禮婦爲舅姑期。又曰。爲人後者之妻。爲舅姑大功。而至宋朝。秖加婦爲舅姑服三年。爲本生舅姑。則仍大功而未之加也。故家禮婦爲舅姑。則用時王之制。入於三年條。而爲本生舅姑。則仍古禮入於大功條。此必有義意。故葛庵先生答金幼淸書曰。夫爲父母應服三年者之妻之服。則雖以宋制加服三年。至於爲人後者之妻之服。則禮經本文外。更無議擬。今輒以禮宜從厚之意。率情行之。則恐非守經信古之道也云云。先輩所見異同如此。未知何所適從。然依家禮服大功。似寡過矣。
爲人後者之子。又出繼於人。爲本生祖父母服。
小功之議。想以兩世出後。故爲再降之制。然鄙見則祖父服期年之重者。恐不可以兩世出後。而再降至小功也。然於禮說中。未有所考。不敢質言也。
小斂遷尸後杖
據儀禮,家禮。小斂遷尸後。襲絰帶。三日之朝。成服而杖。小斂而杖。恐俗禮之誤也。然先儒正論。則未暇考見也。更問於知者。如何。
承重童子拜賓
以喪大記子幼。則人以衰抱之而拜之之文觀之。童子若能堪服衰而拜跪。則似當拜賓。不能則攝主代而拜之。似可矣。令子旣承重拜賓。則哀似不當拜。今俗主人謝賓之時。主人之弟。皆拜謝者。已非禮矣。况父子同拜。尤有嫌焉。或說似有理矣。
童子首絰
沙溪云。首絰。象緇布之頍項也。童子未冠。何缺項之有。愚伏以此說。爲簡易明白。以此觀之。雖當室童子免而杖者。首絰則似無之矣。吾家從前童子皆首絰。未知何據。以此人或議之。然旣絰之後。不可旋除。姑仍之。或無妨耶。
中衣失制者
正服失制者。旣成之後改之。爲未安。已有朱子定論。則中衣雖或失其制度。仍舊何傷。
*答雲若書 癸亥
所示疑節。素所昧昧。何足遠問。然愚見所及。不可不復。故略此奉報。恐犯汰哉之誚。是悚是悚。小祥後上食哭。妄見沙溪說。似合情節。而退溪先生。旣以不哭爲宜。寒岡亦無異論。後人不敢妄議於其間。惟在當之者。參酌爲之耳。小祥後。晨昏展拜。朱子雖云。三年內有常侍之義。退溪說。旣如此。沙溪之意。亦似不以展拜爲不可。依此行之。何妨。小祥後止哭。又無展拜之節。則孝子哀慕之誠。當何以自伸也。三年內墓祭。家禮雖無明文。退溪答禹景善書曰。節祀古所無。而起於後。今人平日。皆行於墓所。而三年內節祀。皆歸几筵。則體魄所在。一無所事。是謂神不在於彼也。直待喪畢後。始行於彼。則無乃有求神於所無之嫌乎云云。寒岡亦云。孝子於體魄所托。雖三年之後。尙不堪雨露霜露之感。况三年內墳土未乾之時乎。兩賢之論皆如此。則似無不可行之理。况吾家自先。有已行之例乎。祝辭則未知其如何。而因家禮墓祭祝辭用之無妨耶。令亡姪之服。雖不敢質言。而鄙意本服。只降一等似爲得宜。若以令兄出繼之故。再降令姪朞年之服爲小功。則無乃薄乎。有人問於寒岡以爲父旣出後於人。則爲本生親服朞。爲其孫者。當以從祖父之服。服本生祖父。寒岡責之曰。誰爲此薄祖之論者。以此旁證。則哀之於令姪。從從叔姪之服爲小功。果合於人情禮意乎。然先賢定論。未及考据。更詢於知禮者。以决疑惑如何。感哀辱詢。有此僭率。哀自取捨而已。勿煩他人。以資譏嘲。千萬幸甚。
*答雲若書 乙丑
一月之內。再奉情訊。備悉侍况平吉。感慰良深。纍人春來。別無呻痛之疾。而眼目昏暗。腰脚疼痛。去而益甚。當愁鬱無聊時。欲披卷消日。則不過數紙。眼力已窘。欲扶杖騁懷。則未及數步。脚力已倦。秖是頹然倚枕瞌睡而已。年纔踰六。衰落如此。桑楡收拾之工。固已無望。而量此氣力。亦豈久視於世者耶。半世醉夢。居然到此境界。吁其悲矣。奈何。每得賢者書。縷縷陳說。無非惕厲奮發之意。而尤以不得副先庭期望之意爲懼。嗟乎善哉。學者之用心。孝子之爲道。固不當若是乎。由是而自力不懈。何爲而不成。何遠之不可到哉。大抵游泛。最爲學者之大病。今日自責。而明日復然。不知富有之年紀。一逝而不可復回。旺盛之聰明。一衰而不可追補。因循荏苒。白首無成者。誠可惜也。纍人平生。政坐此病。所以從師友許多年。卒未能自拔於流俗。人欲橫流而天理自晦。到今衰暮之境。依然落在舊日窠臼中。有時回顧初心。非不慨然自悼。而志氣已衰。結習愈痼。朝悔其行。夕已復蹈。自知其終也。已。屈子之言曰。九折臂而成醫。愚於游泛之病。不啻九折臂而已。知其可畏而不可不去。則可謂甚審矣。雖不能自治。而猶恐人之不察而不戒也。故因來諭之及。敢有所云云。非謂賢者亦不免此患也。然程子不云乎。懈意一生。便是自棄。又曰。纔說姑待明日。便不可。先哲豈欺我哉。此則不可不念也。景文學識氣象。非今世學者比。早晩與之相從。則其有益。當不小矣。
김원하(金逺河) 1710(숙종 36)~1768(영조 44)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원보(源甫)
조부는 태중(台重). 아버지는 명석(命錫)
*答再從姪遠河書 辛亥
日昨率爾之談。非曰有所知。感君偶相扣發。不覺娓娓。不謂君乃復省念意。眷眷不已。以至形於筆札也。書辭明暢。指意甚遠。近來後生中。未見有語及此者。於君而始見之。非其中心所自期雅不碌碌。其能然乎。惜乎。使君不幸而不生於三二十年前。不得事先王父適庵先生也。又不幸而不少延密翁之壽。使君不得卒其業也。今二老已矣。不可復作於斯世矣。君雖有嚮學之誠。孰爲之善誘。雖欲聞道德仁義。孰從而求之。君所以自歎晩生倀倀若無所歸者。其意誠悲矣。其言誠切矣。然方將慨然自奮。以求古人所謂爲己之學。而誘掖鼓發之任。乃有望於我。則君殆不思之甚也。工欲善其事。必先利其器。如今家門之內。士友之間。固未聞有承適庵之風。紹密翁之學者。然其遺言餘敎。尙未遠未墜。或識其大。或識其小者。亦不爲無人。以吾所見而在吾門者。伊湖兄其尤也。况家庭所敎詔。亦不出二先生旨訣之外。君誠有志乎。何患求敎之無地。志業之不成乎。如我懶廢衰朽。自求免爲父師之罪人而不可得。安能爲君。浚其源而導其流。策其步而進於道耶。誠非其人。不敢當不敢當。然君旣以誠相求。吾若以僭率爲媿。而終不副其意。則是非父兄子弟相與之道也。請爲君一言。以張之。凡事莫不有初學之初。君所謂立志是也。志之高下而所就之大小判焉。志之剛怯而所業之進退係焉。同爲山也。而志於百仞則百仞。志於十仞則十仞。同行道也。而志於萬里則萬里。志於百里則百里。人之爲學。亦若是而已。以科業爲志者。科業而止耳。以文章爲志者。文章而止耳。若夫進而志於叔孫穆子所謂太上者。則其爲堯爲舜爲顔孟爲程朱。夫亦孰能禦之。昔孟子之於滕文公。始告之以性善者。欲其知人性皆善。雖塗人皆可以爲堯舜。繼之以成覸顔淵公明儀之言者。欲其奮迅惕厲。不至於聖賢則不止也。終之以若藥不瞑眩厥疾不瘳者。以其人雖有志。而不能喫辛耐苦人一己百。如有疾者之不憚毒藥。則亦不能卒成其志也。夫立志嚮道之要。此章盡之。故朱夫子每爲學者擧似以勉之。此豈非後學所當猛省處乎。夫志。卽我之志也。我欲立之斯立焉。已矣。何與於人。何求於人。且使爲學而爲世所諱。惡禍患之隨其後。有志者亦不恤也。况無此之慮。而上之可以答皇天付畀之責。下之可以報父母生育之恩。內而爲宗族門戶之光寵。外而爲師友鄕黨之榮幸。皆於是乎在。夫亦何所畏憚。而甘退產居下流乎。吾之所以爲君言者。姑如此而已。此非吾言也。乃所受於先輩長者之言也。君若不以爲迂愚。而試留意焉。則請繼今次第誦所聞以告。源甫其終有意乎是耶。相長之益。深有望焉。言不盡意。
김시형(金始亨) 1710(숙종 36)~1766(영조 42)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사회(士會).
고조부는 방열. 조부는 지탁(之鐸). 아버지는 이행(履行)
*答再從孫始亨書 乙丑
初喪。不得成服者脫服之節。孤山,葛庵兩先生所論各異。而曾在錦陽門下。親聽葛庵先生以孤山之論。爲有違於朱子答曾無疑書之意。未知何所適從。然以朱子說觀之。似當從葛庵說矣。惟在哀禀告于屛谷行之耳。宗孫則旣於初喪。以巾帶成制。則世俗雖於朞喪。亦多只以巾帶服之者。退溪先生。亦自以爲不免只服巾帶云。此則雖重服。異於喪人之成制。鄙意似當以初朞脫服。不可以後日具服。爲拘。然臆見。未必爲得。亦問于知禮者如何。初朞若以忌祀行之。則祝文當就家禮本文小祥字。改以初朞。常事字。亦商量改之曰。恭伸哀薦。如何如何。
晨昏哭時。展拜與否。未知何所適從。然所謂不拜者。以喪人常侍几筵之意言之耳。今之喪人。未必一如古之喪人之所爲。則晨昏展拜。似無大違於禮者。况小祥之後。旣無哭。則晨昏入殯之際。不哭不拜。亦甚無謂。未知如何。
葬後上食時。閉門止哭之節。近來更思之。世俗皆通行之。吾家自先亦如是。率意變改。恐不如從先之穩當。如何如何。
祠宇茶禮時。喪人入廟。乃不得已之禮。朱子雖以墨衰行之。墨衰之制。今所未詳。則不如使人代行爲得。雖婦人。亦無不可之義。沙溪說雖如此。此等處。亦不如從俗之爲宜耳。
神主奉安向背。沙溪說不但爲朝祖時而言。盖神位必在西北而向東南。西向北向。獨於宗廟祫祭時及學校配位然爾。以常禮言之。則主必東向。而不西向耳。但地勢難便。則未知何以處之。惟在哀量宜爲之耳。
* 광양에 보낸 편지가 3통 있다.
김정한(金正漢) 1711(숙종 37)∼1766(영조 42)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부중(扶仲), 호는 지곡(芝谷),
아버지는 순석(舜錫)이며 어머니는 전주유씨(全州柳氏)로 봉시(奉時)의 딸이다.
제산 김성탁(金聖鐸)의 문인으로 역학과 성리학에 조예가 깊었고 김성탁이 유배를 떠날 때 후진교육을 부탁하기도 했다.
제산집
*送族姪正漢之其伯舅咸安任所
巴山千里送君行。三月江南草色靑。身上須看慈母線。靜中宜讀聖人經。
*答正漢書 己未
久不相聞問。戀鬱方深。此際長牋見惠。披豁良多。况審彼時寓榻在淸凉界中。日有讀書授徒之樂。尤令人欣慰無已。纍叔病狀少歇。食味又勝。自此更無有失攝之事。則復常亦可有冀。而淫霖之後。三伏且近。吸瘴飮暑。其不生病也難矣。閔歎奈何。文章之論。甚偉甚偉。盖要其至者言之。則有德而後有言。古之聖人賢人。秖是明道蓄德。以至於美在其中。而英華自發於外。一言一句。莫非義理之所形。而藹然可法於天下後世。彼曷嘗操觚弄墨。從事於說話聲響之間哉。然則德行本。而文藝末也審矣。有本者必有其末。則君子之所當務者。惟德行而已。何必區區文藝爲哉。然三代以降。道喪文弊。不但聖賢之學不明於世。其文章亦日益汙下。自三代而先秦。自先秦而西漢。至于六朝。而軌則蕩然矣。於是乎韓,柳起而振之。自是而又益衰。至五季而纖微極矣。歐陽,曾,蘇。又出而挽回之。彼五君子者。卓然爲一代之宗主。而唐宋文章之盛。無愧於兩漢者。皆其力也。則彼雖不知本末之序。率未免浮華之譏。然要之其樹立振作之功。有不可誣者。故學者至今宗之。家誦而戶詠之不衰。然律之以聖賢之道。則豈不眞倒駁雜淺之爲事業哉。况不及此數子遠甚。而乃肆然以號於世曰。吾爲韓,柳也。爲歐,曾,蘇也。而究其所成就。則皆無用之空言。古人之餘沫也。有之無所補。無之無所損。如是而自許以爲大事業者。不亦可哀而可笑乎。雖以皇明王,李諸大家才力。猶不得免。况我東之褊局。而時代之衰末者乎。平生矻矻焉弊精疲神。至白首不知倦。而觀其所爲文字。則又遠出於宋末元季文人之下者皆是。若是者果何補於世。而何益於身哉。吾故每以爲己之才氣力量。足可以軼韓駕蘇。雖其無頭而不醇。有愧於聖賢之文。尙亦可爲也。不然而以淺末之才。萎弱之氣。妄欲追蹤乎古人之文章。勤一生之力。以沈酣於其中。而終不能窺作者之藩閫。豈不亦勞苦可憐之甚乎。曷若一意潛心於聖賢之遺訓。隨吾才分之所及。而推究義理。充擴知見。不至虛過一生。爲士君子本分上事業哉。况義理充積於中。而知見日益高明。則發於文辭者。反有賢於綴緝浮藻者之爲乎。世之爲文者。以洛閩間文字。爲冗長而支離也。不肯留意玩索。而必曰先秦西漢云者。皆惑也。退陶先生。一生以程朱書。爲飮食裘葛。殆不知世間。復有他書。然今其文集流布一國。外至於蠻夷之人。無不尊尙而諷誦之。比之前朝之牧隱。我國之簡易。不啻懸截。則義理之文與文士之文。其輕重大小。可推而知也。來書云。通乎此者。未必妨於彼。蓄積旣富。發爲詞藻。是誠然矣。但恐一留心於文藝。則不知不覺之間。不免爲習氣所使。伎倆所役。往往至於弁髦儒家。而闘華競䧺。終歸於南越王黃屋自娛之譏者多矣。此吾所以於諸君。不數數以文章相勸勉者也。况古者文章之士。一老蘇外。莫不於少年氣銳時成就焉。若以四十左右年紀。欲就其不朽之業者。不幾於夸父之逐日乎。如纍叔者。本無近似之才。年且老矣。身亦困矣。雖今世所謂文章者。亦何敢唐突其後塵乎。惟吾君年尙壯。又有其具。苟有意焉。則試努力焉。然向所謂本末輕重之分。則不可不念也。且勿以儒家文字爲有害於文章。而惟韓,柳,歐,蘇之是務則幸矣。
*祭文[門人再從姪正漢]
嗚呼哀哉。美質之生爲難。其充而成之也尤難。夫氣之流行而鍾於人者。駁者常多。而純者常少。濁者常聚。而淸者常散。稟其純與淸而挺然秀出。可以爲賢爲聖者。此生之所以爲難也。所稟雖美。而不能循而修之。或陷而爲異端。或局而爲小藝。不陷不局而粹然中正。質之先哲而不謬。傳之後學而無弊者。此成之所以爲尤難也。黃叔度質美而未學者也。程伯淳學而成其美者也。若吾先生者。有叔度之質之美。而庶幾近乎伯淳之學而成之歟。世之人貴遠而賤近。慕古而忽今。其於簡編所載之人。言行本無可道。而信之如神明。其與賢人君子同時幷處。卽不知師尊之由。其無深識定見也。叔度伯淳。世所稱類顔子者也。今吾以爲吾得如是之人。爲吾師。爲吾父兄。人必不以爲信。信不信。於我何有哉。先生德性愷悌。志氣靜一。襟懷廉雅。節操謙遜。聰明足以該通千古。精力足以持守終身。言不必擇而自無悖出。身不必勑而自無妄動。愛人壹於和氣。應物任於眞情。望之如祥雲慶星。襲之如芳蘭瑞芝。先生之質可謂美矣。剖析精微。而不入於鑿。貫穿今古而不失於雜。志大道而不略細微。行古禮而不乖時俗。言與行相顧。始與終相承。塗轍甚正而不可改易。權度甚明而不可欺蔽。大而竆天人性命之奧。小而盡訓詁名物之詳。至於星曆地志卜筮醫藥筭數兵律之流。無不總其凡。而究其歸。其發而爲文章。明白典贍。紆餘百折而辭理俱到。無艱難側媚之態。先生之學。可謂成矣。天之於先生。命之生相之成如此。而乃不使之有爲於世何哉。飢寒之人。偶獲千金之璧。必墮而毁之。分不當有也。是故。衰世無盛事。使斯世用斯人。則是爲任賢有終。待賢有禮。君子有所勸而興起。小人有所媿而退沮。君德以之而崇。朝象以之而舒。士趨以之而正。民心以之而服矣。此豈今世之所可有者耶。丁巳之禍。眞所謂莫之爲而爲者矣。不然。先生豈取禍之人哉。主上豈棄賢之君哉。在廷者豈必皆李林甫,韓侂胄之朋哉。雖無丁巳之疏。吾知先生道終不行。禍終不免矣。而或者乃以爲先生悔之。其亦惑矣。先生於死生榮辱。視之如一。擯處湖海之間十年。不怨不悔。不挫不懾。好學樂道。悠然不知其身之竆且老也。鄕國之人。引領而望之。大者願放歸田廬。小者願移就善地。孰謂一疾之難醫。高壽之難躋。而竟以喪返哉。正漢幼而不學。長而不勉。愚魯放懶。最無知識。先生猶以爲可敎。或警其昏。或奬其善。請業則應之不倦。質疑則告之不靳。薰陶啓發之功。多在於屈首受書之外矣。世之攻擧業者。不知經學爲何事。談性理者又以文藝爲不足爲。先生常調和其說。使人先立其本。而不廢其末。正漢雖未能從事於斯。亦嘗與聞其旨矣。自先生流落以來。不能振懦擺冗。往從於瘴江之濱。每一得奉書敎。猥以門戶之寄見責。未嘗不恧然而愧。悵然而悲。然猶意異時復奉顔色。庶幾卒承敎誨也。今先生奄忽見背矣。自玆以往。雖欲補過勉學。無爲師門之累。其可乎。正漢去年喪慈母。今年失明師。百哀所叢一身焉。託擧聲長號。惟先生其聞之。嗚呼哀哉。
지곡집
*上霽山先生
*答霽山先生
*上霽山先生
김진한(金振漢) 1714(숙종 40)~1756(영조 32)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권보(权甫)
조부는 항중(恒重). 아버지는 도흠(道欽)
*答再從姪 振漢 書
得奉惠問。欣感良深。此中病狀。別無加减。苦閔何言。書中。有廢業浪過之歎。其留意問學之誠。固可尙。然旣知其作輟鹵莽之爲不可。則亦在自奮用力而已。何必過自辜歎。有若有所牽掣而不得自由者乎。且讀書有疑難處。就先進之如章天,光天,雲若輩講之。又不足則禀正於伊湖。無所不可。何患其學無所稽。而中途彷徨。空自慨然而已耶。此中。近來絶無過訪者。况望其有負笈相從者耶。設令誤聞而遠來。似此昏聵病憊者。其何以應副哉。江漢姪。月前來到。相守五十餘日。未免垂槖而歸。他可知也。惟望勿倚靠他人。各自勉力。以成就其志業也。
이상정(李象靖) 1711년(숙종 37)∼1781년(정조 5).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경문(景文), 호는 대산(大山).
아버지는 태화(泰和)이며, 어머니는 재령이씨(載寧李氏)로 현일(玄逸)의 손녀이며 재(栽)의 딸이다. 안동 일직현에서 출생하였다.
14세에 외할아버지 이재를 사사하였다. 학문에 크게 힘써 문장·율려(律呂) 등 제도문물에 대하여 연구하고 경학에 침잠하였다.
1735년(영조 11) 사마시와 대과에 급제하여 가주서가 되었으나 곧 사직하고, 학문에 전념하였다.
1739년 연원찰방(連原察訪)에 임명되었으나, 이듬해 9월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와 대산서당(大山書堂)을 짓고 제자교육과 학문연구에 힘썼다.
1753년 연일현감이 되었는데, 그 사이에 《퇴도서절요 退陶書節要》·《심동정도 心動靜圖》·《이기휘편 理氣彙編》·《경재잠집설 敬齋箴集說》 등 사상적 기초를 정립한 여러 저술을 남겼다.
38세 때 아버지의 상을 당하여 시묘하던 중에 《사례상변통고 四禮常變通攷》와 《약중편 約中編》을 편찬하였다. 연일현감으로 있을 때는 민폐를 제거하고 교육을 진흥하는 데 진력하였다.
2년 2개월 만에 사직하려 하였으나 허락되지 않자, 그대로 벼슬을 버리고 돌아와 고신(告身)을 박탈당하였다.
그 뒤로는 오직 학문에만 힘을 쏟아 사우들과 강론하고, 제자를 교육하는 데 전념하였다.
특히, 최흥원(崔興遠)과 친교를 맺고 아들 완(琬)을 그에게 배우게 하였다. 그는 사상을 정리하여 《심무출입설 心無出入說》·《주자어절요 朱子語節要》·《밀암선생연보 密庵先生年譜》·《심경강록간보 心經講錄刊補》·《연평답문속록 延平答問續錄》 등을 저술, 편찬하였다.
그는 이황(李滉)이후 기호학파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침체하던 영남학파에서 이황의 계승을 주창하고 일어난 이현일·이재로 이어진 영남 이학파의 중추적 인물이다.
외할아버지를 통하여 영남 이학파의 학풍을 계승하는 한편, 그 근원이 되는 이황의 사상을 계승하고 정의하는 입장에서 사상적 터전을 마련하였다.
특히, 이황의 존리적(尊理的)인 입장을 견지하면서 《독성학집요 讀聖學輯要》 등의 저술을 통하여 기호학파의 이기를 대등하게 보는 태도를 거부하였다.
다만, 이황의 존리적인 태도를 하나의 이념으로 받아들여 일방적인 주리론을 펴는 것을 반대하여, 이(理)의 동정(動靜)과 이기(理氣)의 선후(先後) 등이 가지는 의미를 해명하고 본뜻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함을 강조하였다.
또한 성명이기(性命理氣)에 대한 논의보다는 덕성을 배양하는 일용궁행(日用躬行)의 실천적 공부에 치중하여야 함을 강조, 일용평상(日用平常)의 도리인 유학의 본지로 돌아가는 일을 몸소 실천하였다.
그의 학문적 흐름은 아우인 광정(光靖)과 남한조(南漢朝)를 통하여 유치명(柳致明)으로 이어지고, 다시 이진상(李震相)에 이르러 유리론(唯理論)으로 전개되었으며, 한말에 이르러서는 곽종석(郭鍾錫)으로 계승되었다. 정조가 왕위에 오른 뒤 병조참지·예조참의 등에 발탁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고종 때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뒤에 고산서원(高山書院)에 봉안되었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제산집
*答李景文 象靖 書 己未
冬初。聞左右作郵湖西。雖在流落中。猶爲之柏悅。臘裏。令伯季氏垂問。而美名不在其中。則又恨音驛稍遠。動靜難承。卽於匪意。乃蒙記存。千里送使。辱書以問。凡所以愍恤警誨者。無非愛我深望我厚之意。况其種種餽惠。又有戀戀故人之情者乎。奉承以還。感戢無量。仍審彼時。仕學俱優。起居珍衛。且知趨庭有日。伏惟卽此新春。承懽迓吉。喜慶盈溢。區區遠誠。豈勝慰祝。但未探車馬之已還官次與否。是爲瞻鬱。纍人。六朔注泄。殆無蘇意。幸自冬末。稍得少歇。而禍厄未殄。去至月奄遭姑氏喪。客裏悲慟。當復如何。且得罪來已涉三載。親年益高。歸日無期。逢新懷緖。自爾難聊。此際又聞親候。寧日常少。而近復有避痘之撓。人子情理。痛迫尤豈可堪忍耶。出處之道。高明精義已審。顚沛之人。何敢容議。然卽今時義。似不得不僶俛。何必太存形迹耶。鄙作何從而遠浼高眼也。素養全乏。而所遭情地。又非尋常罪斥者比。故自不能不發於詩句之間。豈其中不然。而強作窮愁語耶。自此謹當銘佩來誨。然每誦古人日迫西山之語。輒不覺心腸摧斷。有抑遏不得者。奈何奈何。左右若細諒。當不暇䂓責。而爲之酸噎矣。到此後。身病旣苦。且遭服制。絶不復吟詠。頃因一家老兄之來訪。略有所酬和。其中。有追和雪翁之所進於先師者數篇。盖師門遺躅。在纍人所住一洞內。當時雪翁以掘土官。來謁而賦呈矣。別紙寫呈。覽後。卽付丙勿煩。千萬切仰。
*答李景文書 壬戌
昨歲還配之路。未得攀奉之歎。至今猶未已也。厥後因家便。知罷官歡侍於家。而其起居况味之詳。則無由承聞。徒自耿耿而已。豚兒之行。歷宿高齋。爲傳閒居味道講授有樂。已令人聳然歆想。旣而。得奉所惠長牋。備審侍奉吉慶。動止佳迪。千里消息。何慰如之。罪人。前冬以來。避痘逼癘。經歷無限憂窘。而南土炎瘴。今夏特甚。舊證新恙。迭相侵毒。以元來殘敗氣力言之。則理宜不敵。而猶且廑廑支過。喘息猶存。可謂命之頑矣。自離几筵。日月如流。旣經練變於此。此歲又將暮矣。二十五月之期。只隔兩朔。而歸望已絶。將復在此除喪。不孝之罪。罔極之痛。世豈復有如此者耶。只自北望哀號而已。所示與權正郞往復書及與光天姪論王覇書。奉讀再三。不覺心開目明。斂袵歎服也。自錦水寂寞之後。此學絶講。儕友之間。氣宇厭厭。未聞以如許議論。敢開口辨說者。况此瘴海荒僻之陬。又非北方之比乎。無聊中竊自慨然。恐不得復聞法門之餘論。以警發此頹惰之氣也。今何幸得之於賢者也。王覇之辨。自孟,程,朱氏以來。所論說。不啻白黑之分。光天之論。固爲謬矣。賢者之辨斥。無復可議。至如權公。則彼以文章自任者。文章家例多俯視儒家文字。彼之作此見解。亦無足怪。但不知孔聖辭達之訓。實爲文章之至訣。朱文卽文辭之至達者。爲文若此。亦可謂至矣。况欲究義理者。尤莫先於朱書。假令有害於文章。苟知輕重本末之分者。亦不肯舍之而不讀。况義理文章俱備而無憾乎。罪人竊以爲以朱書爲文章之禁者。不知文章者也。然此則以文辭言爾。陶山節要之意。本欲學者終身講讀。以爲受用之地。不必待晩暮而後讀也。六經豈不是義理本原。先正之眷眷於朱書者。盖爲其最切於學者故也。不學則已。如有志於學。則其可不汲汲於此乎。賢者所執。雖使權公有賁育之力。恐不可奪也。甚尙甚尙。罪人已矣。五十年光陰。徒於醉夢中過了。時一點撿平生。往往有大可羞愧者。今雖欲自奮於桑楡之境。疾病垂死。志氣已頹。呻吟之暇。漫看書冊。於古人學問蹊徑。或不無一斑之窺。而其如鼎器之已弊。何哉。惟願賢者。益加懋勉。潛心大業。使錦水淵源。有賴而不絶。則實斯文之幸也。承以念晦間戒西轅。光塵益遠。不勝瞻悵。且恐鄙䟽不及於啓行之前。則尤可缺恨也。
*答李景文書 癸亥
迺者。聞車馬西上。尋復受由歸覲。欲以一書。奉問起居而未果也。家累之行。過貴縣也。從者委辱出問。又賜遠存於竆荒寂寞之濱。眷厚之意。何以報謝也。感歎感歎。就審彼時侍省外。道味佳迪。尤慰千里傾仰之忱。信後陽復。謹問承歡動止復何如。瞻遡不已。纍人。衰病如昨。而居然之頃。讎月又臨近。天涯摧隕之痛。一倍罔極。奈何奈何。承與一甫。作旬日之會。酬酢上下之際。必多好說話。而恨不得參聽緖餘耳。夏間。渠以所嘗辨爭於左右者。移兵問罪於我。極其張皇震耀。孤軍弱卒。非不知不敢抗正正堂堂之勢。而惟恃大國之餘威。悉索敝賦以從之爾。豈有毫髮相助之力。承諭。不勝愧汗。然竊以爲以義理言之。則六經與程朱書一也。但六經深奧而難竆。程朱書明白而易曉。學者。不求義理則已。如求之。則六經固當誦讀。而欲求六經之旨者。非程朱書。則何以得義理之歸趣。學問之路逕也。高明所執。確乎其不可易也。而一甫見處。每以文辭古今之高下爲主。故其相持不相合如此。誠未可知也。然彼旣以六經立幟。有挾天子之勢。恐難以一時之辨。拔其墨守。且此辨異於儒佛同異之論。不必苦口紛紜。以相角勝。亦恐不知者。或因此有疑於賢者。辭氣之間。英銳大過。則似不無累於謙晦遜讓之道。訥翁之欲令兩家相和者。其意無亦出於此耶。願賢者。姑且韜兵斂鍔。益加闇然自修之工。以待翕然歸順之日。如何如何。末俗囂囂。往往以論辨之不合。失其和氣者有之。怯懶之見。不無過慮。故敢此云云。未知高明以爲如何。比來殘悴益甚。精神都喪。一二舊聞。亦皆忘失。寧復有一分新得。恨不得直諒多聞如吾友者。以爲收拾桑楡之地耳。光天許往復書所論。極正大。無復容議。纍人雖鄙劣。何敢有外於相愛之間。而假餙虛辭以諛之耶。旣承推索。本藁所當依還。而適在深藏中。未果覓出。後便當完璧。幸勿慮其遺失也。
*答李景文書 甲子
家兒至。得奉左右正月所惠長牋。且審彼時起居。感慰無量。而書發已更兩朔。不審春暖。侍省凡百。復如何。想惟趨庭之暇。講學益篤。道味益深矣。纍人異域殘喘。又當周甲之年。孤露之感。衰遲之歎。已無可言。而疾病彌苦。神氣日耗。僵卧床席。生意全沒。自知非久於人世者。造化之所使然。固無可奈何。而但念過去五六十年事。無異昏昏一醉夢。而前頭日月窄迫如此。氣力摧殘又如此。雖欲自奮於桑楡之景。以爲補復萬一之地。何可得也。方此寤寐悼歎。茫然不知所以自免於小人。而來書中稱道太過。至以道體斯文等語。枉相假借之。此何異勒加巍巍之稱於一蟻垤耶。君子之知與不知。在於一言之得失。以賢者爲非君子則不可。然於此恐未免失言不知之責也。千萬奉告。自今惟以直諒忠告爲務。勿學俗人中實不然而陽浮慕之之爲。如何如何。前日鄙書所云。非有他意。竊觀賢者之論。主於義理。一甫之說。主於文章。夫義理文章。本末輕重之辨。三尺之童。亦知之。以一甫之才識。夫豈不知。特以所主而立論者。在於文章。而以後世儒家文字。平鋪冗蔓。不如六經之古奧簡嚴。故欲賢者。姑舍朱書。而熟讀三代以上之文。使之刊落枝葉。從事古雅。此盖自許眉翁以來。已有此論。程朱經書訓解。以爲非古文而不肯讀。一甫之論。盖亦有所來歷。然要之非根本之論。其是非亦不難辨。而張皇累牘。盛氣爭執。邂逅措辭之間。不覺其有所激觸。則左右之於一甫。行輩稍異。一甫長者。雖使賢者。終日正言。或不介意也。儻不令其子弟若他觀聽者。有不察而訝惑者乎。兩家文字。已播行於世。此亦足使有識者。正其是非。而决後生之趣舍。何必頓兵堅城之下。相持不决哉。鄙言盖亦伯益贊禹之意。而來諭乃以擁兵逗撓。議其罪。且恐自陷於收司連坐之科。奉讀以還。不勝悚惕。近世文章之弊。不下於釋氏。所論固然。然其弊易見。不如釋氏之難辨也。若其假託義理。如五覇之爲者。亦至論。然以此律之。則韓,歐以下文章家。皆不出此塗轍。如欲辨斥。以究其本末華實之分。則朱夫子讀唐書一篇足矣。恐不須多費辭氣也。愚見如此。恐於賢者高明之意。有所不槪。則移兵之擧。正所不免。然區區非墨守。何敢固必於淺慮也。惟再煩鐫諭。是仰是仰。一甫所著四七理氣說。前此未嘗聞。况得見乎。縱使得見。如我昏謬。何敢與議於其間乎。且愚意嘗以爲此是儒家大議論。先哲大儒。猶或不免立說之差互。知見之出入。後生末學。豈可容易矢口耶。自陶山。至于我老先生。其所剖釋辨明。殆無餘蘊。且當就此玩繹。期於有契而已。恐未易以年歲工夫。率然立論也。未知於盛意。以爲如何。然此爲世之不自知量而主張己見。輕著文字者云爾。若於講究理會之際。有所悟解。則亦不妨箚錄。以資同志間講說。賢者所見。必有自得之妙。未可錄示後便耶。但恐矇暗。不足以爲反復承敎之資也。道味二字。何撝謙不居之至此也。區區於賢者。直以此道相期。不如賢者擬人不以其倫也。幸願諒此意也。匹馬遠訪。豈敢望乎。惟冀時賜德音。慰此寂寞萬萬。纔經吐瀉。昏憊益甚。掛漏不宣。
*答李景文書
家便中。得拜惠書。具審炎暑。侍省外道味超勝。又承與兒子做一夕款。且有山寺會晤之約。且感且慰。若將與同其講討之樂者。頹懶之氣。伊鬱之思。不覺聳然鼓起也。旣復自悲檻中之猿。籠裏之鳥。雖欲奮迅而不可得。則又爲之北望悵然者彌日矣。信後已浹數旬。不審承懽起居復如何。纍人三月中。兩次吐洩。殘悴氣力。越加損陷。加以齒痛。不得喫物。腰疼不得久坐。意緖忽忽無聊。日僵卧昏睡而已。受天地之中。爲萬物之靈。而環顧平生所爲。大恐小慚。其異於禽獸之蠢頑者無幾。及此楡景未盡之前。竊欲收拾塡補。不復作大惡業以終焉。而志力不強。舊習纏繞。直諒多聞之益。又邈然不可得。一日之間。理欲交戰。或鼓或罷。卒未能有以自立。此纍人比來實狀。而有時撫枕長歎者也。乃景文欲以千萬不近似之稱。強加而謬尊之。豈非可笑之甚乎。此不過景文見愛太過。而不察其無狀之至於此也。自此切願以忠信相與。勿以表襮相待。若以其一日之長。而不欲太簡其禮。則世俗書牘之間。不患無稱謂之常例。何必苟爲假借。使人羞愧。欲遁而不得乎。若夫纍人之於吾景文。則有不然者。纍人自省事以來。見學者亦多矣。以足下年紀。而學問見識之高明。未見有如足下者。中心竊自歎服。以爲師門道學之傳。庶其在此矣。此非諛悅阿私之言。實出於衷誠敬愛之至。則安得不以此道相期。而望其自任之重耶。足下若避小嫌。而以苟讓爲事。則未知吾黨中。復有任此責者否。纍人非不知足下撝謙不敢居之意。而所以必以此加之者。誠願足下之以斯文自任。而使錦水淵源。有所賴而不絶也。足下以爲如何。使纍人。年力之富。志氣之盛。如足下。則雖不足以追躡超逸之步驟。其亦或者策駑磨鈍。不至爲小人之歸。而今則已矣。無復可論於此學之萬一矣。來諭之下。雖欲強顔承當。何可得乎。由中之言。幸須諒察。酉嶺往復之論。足下所執。固不可奪。且義理講說之際。雖於年尊位重之人。必務道之見。而不避其言之勁直。先哲亦多有如此者。纍人非不知此。而特恐往復之間。或有見礙於門生子弟之眼目。則始乎和平者。卒於乖隔。亦不可知。彼此各呈所見。是非較然。而猶有不相合之歎。則莫如閣筆卷舌。默然獨守吾太玄之爲愈。故前書敢有所云云。不意足下過自引咎。有若不當言而妄論。不當辨而妄爭者然。至推前書於日月已遠之後。此則纍人之過。而足下於鄙書之意。看見亦太過也。一甫以此。深致怪訝於纍人。而且以盛札中慮患憂讒之語。爲纍人書所道。此則一甫亦不諒纍人之本意也。至於理氣說。以爲傳者之孟浪而固諱之。盖於纍人。其有所懲而不肎披露無隱者。有由然矣。纍人蹤跡畏約。雖在同人知愛間。不當有涉於論議之緖餘。而不自揣量。率爾發口。使賢者無過而自訟。一甫疑怒而見責。言之不可不愼也如此。駟不及舌。悚恨奈何。兒子果與之相聚否。渠之見識文雅。有何足煩齒牙餘潤者。但得勝己者。有麗澤之益。則或不至爲庸下人物。而七八年來。患難奔走。不但放廢書冊。其志氣亦凋喪無餘。雖有彊輔之助。恐未易扶樹得出也。所謂超詣可畏者。豈於講說之際。見解有過當不切者乎。左提右挈。忠告善導之義。深有望於景文也。千里命駕之難。固已料之。豈敢以食言爲責耶。惟於南鴈之來。頻惠德音。以慰愁寂。四七說。亦望商榷歸正之後。一賜投示。千萬千萬。正夏方熱。惟冀侍懽之餘。益加崇德進學之功。
*答李景文,休文 光靖 書。
月前家便。獲拜六月廿六日所惠書。謹審徂玆炎潦。侍學珍勝。感慰無已。信後秋月再彀。遠惟承懽之餘。聯床講道之樂益深。千里嚮往。不任區區。頃者龜潭之會。殆比來儕友間所不能辦者。聞來爲之艶歎。而家兒積年頹廢之中。得蒙不鄙。而與之提挈。講聞妙論之緖餘。此又私幸之甚也。但書中所推借過分。非渠所敢承當。以兒書所告。則僉兄卓越之見。精到之論。有非今世學者所易及。前書奉勉相期之語。實出赤心。幸勿以過謙爲事。毅然以此學自任。使師門一脉。不至斷絶。則豈不爲吾黨之光幸耶。纍人已矣。無復可道矣。不勝竆途老大之悲。發此妄言。偃然若先進之勉後生者然。其亦愚且僭矣。倘可諒恕否。心經疑難數處。兒子果有所報。而非昏謬所敢與議。以父子間無嫌愧。故隨淺見所及。略有所條答。早晩與兒子相對。可試叩之。其紕謬處。因書示及。則豈非賜耶。兒書。亟稱令再從仲則之英達。德門何多賢若是。可敬可賀。兒子偶得此平生之幸。不數日而以故罷歸。此似關係渠身數也。可歎可歎。
*答李景文書 乙丑
迺者。兒子行過貴里。與左右相見云。而悤遽之間。乃辱手書。遠存纍人甚勤。有是哉。左右之眷眷於故舊也。感歎感歎。信後已過兩月。不審承懽起居更復如何。閒居玩索。造詣日益崇深。欽想高風。不任傾遡之忱。纍人今年來衰悴益甚。鬚髮半白。腰脚常疼痛。而最苦者目視漸昏。尋常展卷以消日者。亦不得任意。以此心緖忽忽若無所聊賴。馴致頹塌放倒。不能自收拾。卽今殘齡望七。疾病如此。非久寄於人世者。而回顧平生。其所以異於禽獸者幾何。方此惘然自愧。不勝其童習白紛之歎。而每得賢者書。以其有一日之長。不量其實狀而推借之太過。至欲以經傳之訓義理之說。往復而上下之。在纍人固愧赧。欲遁之不暇。而於賢者知人之明責人之道。亦不瑕其爲累乎。然賢者之於纍人。相知非一日。而其所以見待者。非若他人之苟爲阿徇。而陽浮慕之者也。其意盖出於引誘扶持。欲其同歸於善。而不忍以其衰朽枯落而棄遺之也。則是可感也。纍雖已矣。無能爲矣。其敢不強顔忘慚。披心效愚。以答辱愛之厚眷乎。與豚兒往還別紙。奉覽久矣。其末又有貶訂於鄙說者。所當卽爲更稟。以求開曉之益。而近來神氣之凋瘁如右所陳。不能自力致思。因循以至于今矣。玆承責諭。益愧其不敏也。今始杜撰條列。以聽裁酌。其間妄謬處。必不止一二。然心有所疑。不敢不盡。幸望因後便一一回敎。其紕繆舛錯之病。痛加指斥。使老而昏昏者。得以發蒙而有所聞。如李初平之於周先生。則豈非賢者終始之賜耶。纍人雖鄙劣。亦知阿好之可恥。而區區所望於賢者。未嘗不以師門道學之傳相期。幸願及此富有之年。益懋博約之工。使忝在遊從之末者。與有光焉。千萬千萬。昏憊潦草。不究所懷。
別紙 心經疑義
來敎所謂存養。專言則該動靜。對省察則屬之靜。此語與鄙意同。而但所謂雖不見聞。亦不敢忽。實屬靜一邊。此句竊聽瑩看雖字亦字。則其語意正謂常存敬畏之心。雖此不見聞無緊要處。亦不敢萌易慢之心云爾。此實兼包動靜而言。恐不可專屬之靜也。
戒懼一段。朱子固以爲大綱說。又以爲統體工夫。則其所以無時無處無動無靜。常存敬畏而不敢忽者。固子思朱子之正意。然旣曰不睹不聞。則所謂不睹不聞者。非靜而何。其意盖曰。道不可須臾離。故君子持養之工。未嘗少懈。至於耳目所不及。思慮所未發之前。而亦莫不戒愼恐懼。不待其耳聞目見。然後用其力云爾。則其謂之靜時工夫也。何害之有。盖專論此一段。則固是大綱說。固是兼動靜。而以戒愼不睹。恐懼不聞。對下文愼獨而言。則豈不爲靜時存養之工乎。來諭亦云。對愼獨則屬靜工夫。而末乃以鄙說所謂雖不見聞。亦不敢忽屬靜一邊者爲非。無乃自相牴牾乎。若以不睹不聞之地。不可屬之靜。則高明所謂靜工夫者。指何者而云也。章句中雖字亦字。固如高明所論。然以鄙見。則此乃君子平常持守之工。不但於日用動作處。雖無形無聲。至靜至寂之中。亦不敢忽耳。卽此二字。尤見其爲靜工夫也。故或問以戒懼愼獨兩節爲兩事。而又以卒章潛雖伏矣。屬愼獨。不愧屋漏。屬戒懼。至於章句分章之下。亦曰次言存養省察之要。則朱子之意。亦未嘗不以戒愼以下屬之靜也。夫所謂統體工夫者。自道不可離以下而統言之爾。非以不睹不聞之處。戒愼恐懼者。爲包動靜也。兒子所論單言戒懼。則包動靜。而賺言不睹不聞。則爲靜工夫者。恐未爲大謬也。如何如何。
西山所謂仁義禮智之理。根於性者。爲未安。
西山。非不知仁義禮智卽性之四德。而觀其語意。以仁義禮智之理。爲道心。聲色臭味之欲。爲人心。而所謂根於性者。卽朱子所謂原於性命之意也。以此活看。則其語雖若未安。而意實無可疑矣。朱子說。一時偶爾揣想。有若與此相似者。故有所云云。此則妄率之罪也。然近見性理大全中有答或人之問口。有些道理。根於一性。渾然至善。故見於發用者。無非善底道理。以此準之。則西山語未見其爲不是。而與朱子行狀中語。亦未知其爲異也。如何如何。
天理人情。同行異情。觀知言本意。則與上款語。皆就一人性情體用上說。
一人之心。固有發於天理者。亦有發於人欲者。然以同行異情四字觀之。則須就二人上說。方爲明白。何者。好貨好色之心。聖賢與衆人同也。而聖賢則一循天理之公。衆人則每徇人欲之私。此其所以異情也。若以一人之心言。則其發也非天理卽人欲。何以比幷而見其同見其異乎。故孟子好貨好色章下小註。輔慶源胡雲峯說。及心經附註朱子說下小註。潛室陳氏說。亦皆以聖賢與衆人。相對爲言。盖以如此。然後同行異情之義。分明可見故也。朱子說中。引五峯此說者。盖謂人心之知覺一而已矣。而毫忽之間。從這邊去。則爲天理。從那邊去。則爲人欲。其分界之處。正學者所當剖析。而必循天理無徇人欲云爾。未必以五峯之言。爲只就一人之心言之也。偶閱性理大全。其中有一條朱子答人問五峯此言曰。同行異情者。如飢食渴飮等事。在聖賢皆天理。在小人皆人欲。所謂同行異情者如此。則朱子亦以二人言之矣。
腔子外。是滿腔子物事。
此一條。推說甚好。但語脉之間。似有叢雜之累。如血氣灌注。而無毫髮之空隙。脉息關通。而無頃刻之停歇。二句雖就程子認得爲己之言形容說出。然上文方言惻隱之心。無內外無限量。而忽然以人身血脉周流之語。不作譬喩。而直接其下。意雖相通。而語不相貼。其下所謂病風患痺之人。以人之手足痿痺者爲言。而繼之曰。一膜之外。便成胡越。則又似以忍心不仁之人言之矣。一語之間。上下血脉不屬。且一膜之外。氣已不貫。亦似不成語。若非高明偶失照管。則愚見有不逮而然。幸望後書。明以回敎。
心無出入
此旣有退溪先生說。而西厓,愚伏之言亦然。則固非末學淺見所敢容喙。然區區妄意。竊以爲心之神明。雖變化不測。而其實不離乎方寸之內也。所謂出者。非眞逐物而走出於外也。所謂入者。非眞自外而還入於內也。譬之銅鏡在此。而光明之中。物象自來照爾。范淳夫之女。所謂心豈有出入者。恐不過如此。如老先生所言。則特因此推說。以明心體之廣大無外耳。非謂淳夫女所見果出於此也。且所謂一人之心。卽天地之心。充滿天地之間。其言大。范女雖明慧過人。其識恐不及此也。朱子曰。此女當是實不勞攘。故云無出入。而不知人有出入。卽此觀之。又似此女但據己心之安靜不放逸者。而認以爲無出入爾。豈可遽謂其能識心體如許廣大。而有此言乎。謬見如此。不覺其僭。而敢以貢疑。來說中自孟子出入二字以下。至不害其爲出也一段。精切明白。令人歎服。但其下云云。若泛論心體。則語意固好。而於心無出入之義。不甚著緊。恐推說太過。未免汎濫之疵耳。如何。
敬義齋記中貫一之義
兒子所論。本出於老物之妄見。今見所諭。始覺其拘局不活。甚愧甚愧。盖天下理一而已。大易之訓。曾思之傳。太極之論。雖其立說各異。而其理未嘗不相貫。朱子所以因此而悟夫天下之理。雖有幽明鉅細遠近淺深之不同。而其實一貫。而未始有異者也。因明者之開示。得有所發。豈非賜耶。感拜感拜。
敬靜合一
主靜。有兩說。濂溪所謂主靜。是君子修之以上事。故曰無欲故靜。夫無欲而靜。非聖人。不能也。如明道,延平所謂靜坐及朱,張諸先生所謂主靜。方是學者事。然偏於求靜。則恐陷於坐禪攝念之失。故伊川提出敬之一字。以爲敎。其實主靜。便是持敬工夫。高明所謂主靜之外。非別有持敬之工者。是也。但其下又謂敬則便靜。只是一事。若謂敬而後能靜。則成兩截云云。而以程子敬則自虛靜之說爲證。此則愚不能無疑焉。夫敬者。工夫也。虛靜者。敬之效驗也。以持敬與主靜爲一事。則可謂敬則便靜。只是一事。則是幷工夫效驗而一之也。工夫所到。必有其效。則固不可分而二之。然以爲一事。則恐爲下語之病耳。且敬則便靜。語傷急迫。夫以常人紛亂之心。而一下持敬工夫。便望其虛靜無欲之效。豈不難哉。必須工夫積累。涵養純熟。然後始可到虛靜地位。則所謂敬而後能靜者。愚則未見其爲病。而反覺意味之平實也。如何如何。
理氣無限量
鄙意以爲理則固無限量之可論。若氣則謂之無限。可也。謂之有限。亦可也。何者。以陰陽往來消息。歷千萬古。而無一刻停息。則可謂之無限量。而但其所以旣往而復來。旣消而復息者。乃生生之理。自然不竆而然也。非旣屈之氣。復爲方伸之氣也。以呼吸言。則呼之氣。非吸之餘氣也。以潮汐言。則方漲之潮。非旣退之潮也。草木榮悴。人物生死。至於天地之終始。莫不皆然。則謂之有限量。不亦可乎。勉齋所謂理無際而氣有限者。豈無所見而云爾哉。但以橫看地頭言。則誠未知其有所竆極。朱子所謂論其極。將何處做極者。豈亦以地頭而言耶。淺見必謬。更賜指諭爲仰。
大山先生文集
書
*與金霽山 聖鐸○壬戌
象靖再拜言。昨夏樸車之回而南也。象靖適有事于西方。未得與故鄕親友。出餞于路左。旣歸而音塵益落落矣。時時引領南風。以寄遐慕則有之。然亦何益哉。祇以自勞焉耳。今年運氣大都不好。竊伏聞孝體連事呻苦。風土旣異。將息之道不比家居。雖隨分理遣。素憂患而行之。然區區仰慮之忱。蓋不敢自弛也。卽日秋事向深。不審體力何似。向來諐節。或已次第平復否。調養之暇。玩索體驗之工。亦有人所不得以窺者。未知一行氣力果竟如何。因便有以辱敎之。使固陋自廢者。有所警勉焉。幸甚。象靖親候粗迪。身亦無大疾病。卽今鄕井無事。秋野稍稔。若得執事回轅。可是圓滿樂事。而此固無可如何。未知天意竟如何耳。象靖杜門塊處。傍無彊輔。重以病宂喪威。不敢措意經史。日有荒廢。無話可說。對退甫夜話雞數鳴。大抵皆自責語也。敢因退甫。私布其腹心於座下。伏望哀其志而勉其所不及。使無終得罪於鄕里長德。所拱手而俟也。近與江左權丈。有閒往復。被退甫覓藁而去。不敢尼也。又前與光天兄。論王霸有書而不敢出。謹以質之座下。伏乞細加點檢。使得以知其病利如何。近復屬槐院本職。累被催促。欲一番作行。當在今晦間也。權丈書。以鄙文之故。賺及座下。以爲霽翁亦有蔓病云云。在象靖則冒與幷按。亦榮有幸矣。然竊恐執事亦不宜都無一言。使一時誤勘之案。遂爲定論也。
*答金霽山 甲子
至月廿二日所賜手書。承坼在本月八日。一番消息。動輒經年。且念太歲在執事。正周一甲子矣。天道好還。而吉凶禍福。一定而不易。此事當聽命於造物者。然愛慕之極。不免時有外念。壹不自知其何心也。新年氣候稍適。伏惟道體履難增重。玩理靜養之工。必有超然人不得與聞者。是天所以相斯文。使執事有今日也。而鄕里後生。抱遺經而靡所質。則是天所以尼吾輩。使不能與有進也。象靖親年漸高。喜懼交至。賤疾作苦。長時呻憊。早晩尋數之工。亦廢之不復講矣。向來些少意想。漸次滲淡。兀然無以自拔於流俗。有時念起。撫躬自悼。然亦何益哉。曩時偶與酉山權丈。略有往復。只是拾丐瀋瀝。以資一時之辯。初非有毫分實得可以藉手而與丈人抗者。是以杜口齰舌。不敢更有倔強之意。迺蒙勤敎。諭以韜兵斂鍔益加闇修之工。則象靖謹拜受賜矣。鄙性偏隘。不解容耐。纔有一言。便有橕眉取勝之心。今日之事。亦其一端。而來敎所謂謙晦遜讓者。正是對證之劑。敢不蚤夜佩服。以毋負千里見念之意哉。雖然。諭以彼此角勝。恐傷和意。則象靖雖無似。亦稍識去取之分。豈敢輒以咫尺之見。自絶於長者之門而惹起同室之鬬哉。此則執事慮之或過也。來敎此與儒佛之論不同。不必苦心紛紜以相角勝。此固至當之論。然區區之見。殆異乎是矣。夫儒釋大分。幸賴諸老先生後先發明。學者得有所持循據守。不迷於所趨。而如文章之業。其害理病心。未至如釋老之甚。而古之人。類皆才高眼大。不甚留情於此等小技。是以皆略之而不肯較計其區區之害。後生末學。初無眞知定見可以覰破重輕之分。又奪於冷淡鬧熱之勢。一切攻文治詞。以爲安身立命之地。逮夫中晩之日。志氣摧頹。始乃回頭却顧。匍匐來歸。以供其桑楡須臾之景。是其下手著力。有初晩生熟之異。是以其立心用意。有出入賓主之分。近世道術之歧。學問之不明。未必不由此其階。則蓋其同異之分。不如儒釋之嚴。是以患生於所忽而不知其憂之反起於蕭墻之內。至其滅質勝本。害正理而喪實志。則其遺風餘弊。未必遽下於指本心而談端緖也。象靖才識魯頓。旣不足與聞於斯學。而辭采荒陋。又幷與夫文章而無之。殆天下之棄材也。然區區狷滯之見。未易遽化。又復昂首自列。以聽可否之命。極知有損於謙晦遜讓之道。然十反無隱。亦古者事師之義。是以不敢用諛辭以相然諾。竊自附於責難陳善之恭。古所謂終日正言而不失和氣者。蓋欲庶幾焉耳。未知自執事觀之。又以爲如何也。四七理氣之說。權丈因看近世名卿集。有所論著。亦幸相與反復。究結公案。使新學後生。拾其緖餘以自考。則不勝望幸耳。惟祝體履神衛萬相。時賜謦欬。以警愚蒙。
*答金霽山
南方多暑。霖濕異尋常歲。伏未審靜中體力對序萬相否。向者辱賜書。謹已承領。然意語過越。顧賤弊萬無一近似也。雖然。區區遜讓之言。不足以披露心腹。而往往反得過情之褒。自此以往。謹當塞兌屛跡。以少塞無實妄作之罪矣。退甫冒熱枉顧。以遂前日之諾。此意鄭重。何可忘也。與一二同志上龜潭。討心經半部。見其文理密察。思索精到。與之處。儘覺有益。適以宂奪。又此告別。自恨無分於好事也。又竊自念。講論之餘。或有區區疑晦處。而邈然無所仰質。又悵然而起下懷也。一兩疑處。退甫錄去。早晩或可達牀下。未可賜以一言之重以破愚蒙。千萬望幸。惟伏祝道體萬相。下慰遠望。
別紙 退甫嘗以心經疑義。擧似於家庭。却以見敎有數處信未及。再此求敎。
戒愼恐懼愼獨
鄙意以爲專言戒懼則兼動靜。而對言愼獨則屬靜境界。此以上下二章而有偏全之異也。退甫以爲單言戒懼則包動靜而賺言不睹不聞則爲靜工夫。是於一章之中而有分合之殊也。來敎。存養專言則兼動靜。對省察則屬之靜。此語實當。實合鄙意。但謂雖不見聞。亦不敢忽。實屬靜一邊。此語竊聽瑩。看雖字亦字。則其語意正謂常存敬畏之心。雖不見聞。無緊要處。亦不敢萌易慢之心云爾。此實兼包動靜而言。恐不可專屬之靜一邊也。如何。
天理人欲同行異情
竊謂此語就一人上說也得。就兩人上說亦得。觀胡子立言本意。蓋曰。天理人欲。同體異用。同行異情。此就人性情上。只說理欲分界。初不論一人兩人。故語類曰。只是一人之心。合道理底是天理。徇情慾底是人欲。正當於其分界處理會。五峯云。天理人欲。同行異情。說得最好云云。見心經首章附註 此以一人而言。孟子註。因太王公劉齊王好貨好色而引此語。則以兩人而言。惟在所用如何耳。今曰豈有一心之中天理人欲幷發出來而其情各異者。則恐有不然。此蓋平論人情之發。其理欲分界。只爭毫釐之間。正如人心道心之云。理發氣發之說。非謂一心之中兩端偕發。如來敎之所慮也。
*答金霽山 乙丑
積違音問。政爾瞻仰。迺者伏承首夏所賜書。副以辨誨一紙。屈指月日。已歷三時。其間淫潦告災。瘴鄕湫濕。伏惟靜裏體力倍艱將息。腰疼脚氣。已得全減否。退甫所苦阿睹。近復如何。種種遐遡之忱。不在人人後也。象靖杜門寡陋。無所過從。千里跂想。不覺神馳而夢遌。惟有簡書往復可以替承規切之誨。而每得賜書。輒加奬飾。至師門道學之傳。則是一段大事。豈人人之所可與聞者。而往往見於肆筆之餘。竊恐傍觀者或有以窺執事語默之節矣。夫以外曾王父立德垂訓。以嘉惠後學者。可謂備至耳矣。而門人弟子次第零謝。又重以世故侵尋。萬事無不有。世之人往往以利害禍福爲趣舍。則默觀物情。時議邈然。少有信嚮之者。况有以進於是者乎。惟執事巋然獨存。師門之所屬託。後學之所期望。蓋有不輕而重者。象靖猶及侍外大父。每見以此事相期。蓋有他人所不得與者。而卽今世道反復。頓踣於炎荒瘴癘之陬。天之於吾道。一何戹哉。雖然。患難憂慽。天之所以玉成於女者。而伊川易傳。得涪州一行氣力。晦齋之九經衍義。暗室之夙夜箴解。大抵皆是物也。天之所以戹公於絶域幾許星霜者。其意安知不在於斯邪。象靖亦嘗兒侍外門。略聞修己理性之方。而旋復奉諱。又奪以擧業。則遂汨沒而忘其舊矣。徒以年來閒廢。無所猷爲。乃始收拾經子。早晩諷詠。思以少補異時㬥棄之罪。惟是義理之端甚微而私欲之害無竆。朋友之講論絶少而應酬之宂故多端。夫以甚微之端而絶講論之益。無竆之害而接多端之故。則其黮闇浸漬而不能自脫於流俗。亦理勢之宜然也。前時猶得退甫提挈之力。幸有偲切之助。而今幷此而失之。所以慇懃顧戀於楚澤之畔者。不獨別離之思。而千里相望。未遂古人徒步之義。因循汨沒。幾何而不爲小人之歸哉。疑義辨誨。剖析精微。義理條暢。前日之所晦昧而不自覺。與夫執泥而不能通者。可曉然而無疑矣。所以惠我周行。豈待親操杖几之日邪。第反復究竆。終有未盡釋然者。不敢自隱。更㬥於函丈之間。伏幾細賜條辨。從頭梳櫛。使彷彿於影響者。得以剟其皮而睹其眞。則仰荷愛人之德。未知所以攸謝也。惟祝爲道自愛。髭髮益勝。
別紙
戒愼恐懼
眞西山所謂仁義禮智之理根於性。
竊詳一箇知覺而以其屬乎形氣義理而有人心道心之分。今以識義理者而謂之人心。而以仁義禮智純是義理者。謂之道心。則二者命名。恐皆失其宜。而下又云所知覺者皆義理。則似若以識義理者。又屬之道心。前後不甚對値。其間必有微意而蒙未曉悟。謹此拜稟。乞賜明喩。
心無出入。
敬靜合一
理氣無限
*祭霽山金公文 丁卯
氣機嬗變。美惡參差。裔而叔季。蓋益淆漓。鍾而在人。詭陰傾窳。間有粹氣。民鮮克遇。維公之生。實應其期。頎而長身。明目疎眉。瑞日揚休。中積和順。良玉蘊彩。外著輝潤。生資洵美。亦懋于學。有媚錦滸。有開講幄。有來如雲。以磋以琢。公時最少。已能見推。山梁一壞。晝嗥狐狸。維我外祖。抱經獨悲。實維公賴。以相扶持。外祖於公。實深期許。詩贊玉人。謂公其庶。我乃不天。我失我祖。公有誄文。情志惻傷。公有狀行。德媺揄揚。遺文散佚。公與編騭。集覽未完。公欲續筆。公於外家。兩世血心。老大隱約。思遠憂深。公有令望。華問日彰。自持謙謙。益尊以光。矦伯擁篲。交口以薦。王曰如何。予欲亟見。再調于寢。或試之郡。亦旣釋褐。玉署薇院。王有喜言。予得詞臣。天章有燦。寵渥愈新。蓋古際遇。鮮克此比。盈朝側聽。何狀乃爾。人爲公榮。公不色喜。盛名易隳。險道難盡。君恩雖重。義在難進。先師行業。自有本末。世道反復。蒙彼汚衊。擧幡有徒。叫閤有疏。脩門九重。閽者見拒。斂手來歸。杜門自持。講明墜緖。歲寒是期。彼狺狺者。巧舌百般。追提冷跡。誣辱無端。公嘻謂人。咎實在己。我之不愼。以及夫子。我不有言。何以自說。辭疏有進。一語附末。聊以自處。敢望伸白。天威震撼。事有不測。五月犴狴。六度桁楊。人謂公死。神或扶將。語有小遜。實維時義。此心炳然。可質神鬼。人有議公。或失時措。仁山紫海。是誰之故。曷不少遲。待天所定。我曰不然。是豈公病。生三義重。所在致死。人有誣言。其忍坐視。我自盡義。寧知其外。憂患倘來。聖亦無奈。濟海洋洋。往罹栫棘。夷險一視。敢有憂戚。蟾江有滸。瘴霧晝塞。葛隱舊里。先師餘躅。岳陽之野。君山杳杳。其竹有斑。其風嫋嫋。憔悴澤畔。其形有纍。有時行吟。念親憂時。我懷伊阻。我佩誰玩。我觀理原。周爻孔彖。我探數窟。邵易楊筭。芻豢可口。兩忘憂樂。父子知己。互爲唯諾。我觀于古。得力每此。悠悠天意。或者在是。公有六歌。辭意絶悲。我僭不揆。妄有進規。素位行患。盍亦自得。公欷有書。子猶不識。慈闈衰邁。夕照如飛。我心匪石。我悲曷歸。子或知我。不責且唏。余有妄論。公或首肯。公亦有著。許以評訂。戒余輕俊。勉余懋篤。時或誤奬。可與進學。余倀失業。繄公是依。夜祝于天。曷不遄歸。師門有緖。公惟嗣述。後生問業。公爲榘律。噫彼昊天。十年不復。誰謂一疾。奄忽不起。季通南徙。卒以憂死。赫赫貳相。終于靑朔。公歸地下。庶無落莫。公有二子。白眉最良。旣孝旣友。亦富文章。蔡家仲默。謂公卽有。後事有託。庶幾不負。余官于朝。哭不以時。瞻望南嶺。有涕漣洏。最後一來。儀容永閟。我有拜跪。公不迎視。我有語言。公不宣吐。我有衷情。公應鑑顧。
김계흠(金啓欽) 1712(숙종 38)~1752(영조 28)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여옥(汝沃)
증조부는 표은. 아버지는 상중(尙重)
*答再從弟美仲汝沃 啓欽 書 丙寅
卽日淸和。不審侍下諸節如何。纍從出陸到此。實惟天恩之罔極。乍到。得與舊日交遊相從。古人幷州故鄕之句。益信其爲眞切語。旣久則信美。非吾土之歎。不覺復萌於中。信乎人情苦不知足。可笑可笑。此來身無疾病。頗自爲幸。此月以後。痰嗽極盛。夜不能安寢。左右牙齒。或動搖或疼痛。甚妨飮啖。而自數日前。左耳常有風雨聲。細語或至不分。此必是聾漸。眼昏已久。鼻瘡亦往復。獨聰聽不减耳。今又如此。面上七竅。無一不病。如是而其能久長於世耶。造化所使然。雖不足恨。而未死之前。若使耳目不衰。四體無疾。豈不大快樂耶。詩軸遠辱寄示。不但詞致俱好。其所以眷眷於此纍者。可謂至矣。有時披閱吟諷。不覺山河之遠。形骸之相阻也。但黃鍾之聲。和之以瓦缶。甚可愧赧。而不宜無報。艱構蕪拙。以答盛意。然往往韻艱。窘窒太甚。一笑之後。卽付之覆瓿之具。如何。三十年天道一變。及春秋書法十年必變之說。曾於古書中。似有所見。而今不記其爲何書。且其所以一變必變者。亦未詳其何義。然天道六十年一大變。三十年一少變。不難推測而知。獨春秋書法之變於十年者。不敢臆論。而亦或以十者數之終故。一襃一貶。一進一退。容有變動之理耶。此無書冊可考。後若有所檢看。幸爲示破耶。
김시원(金始元) 1716(숙종 42)~ 1747(정묘)/1807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경인(景仁).
증조부는 여중(여중). 조부는 지탁(之鐸). 아버지는 민행(敏行)
*次宗孫 始元 紀行諸詩 幷序
宗君景仁。訪余于澤畔。留旬日。往觀智異山。歸路。又登臨晉陽之矗石樓。過星州。入伽倻山。訪紅流洞。宿海印寺。所到輒有吟。旣歸。錄一律三絶。投寄要和。余爲之再三諷詠。足見其風流韻致。有所自來。不但詩句之可賞而已。老拙雖枯落。不可無報。一覽之後。覆瓿可也。
鶴老遺詩在石樓。晉陽東望使人愁。菁川落日君能去。蟾水寒天我獨留。
壯士有魂猶凜凜。長江不渴自悠悠。平生謾讀龍蛇錄。頭白如今負一遊。右次矗石樓韻
曾望伽倻雪裏浮。居然今已十經秋。可憐濟勝都無具。空把來詩當卧遊。甲寅冬。在霞堂。望伽倻山戴雪。如削玉然。右次伽倻山韻
紅流洞裏匝千峯。幾箇遊人到此中。若使尋源看武屹。藏書何啻梵王宮。世之遊客入山。率以觀海印之藏經閣爲奇勝。而不知入武屹。讀寒岡先生所藏書。故云爾。右次紅流洞韻
南來遊歷盡名山。霞氣應留屐齒間。况復今年逢癸亥。先人遺躅後人看。
敬窩公當天啓癸亥。遊伽倻。有遊山諸詩。景仁今行癸亥。適再周。亦異矣。
*答宗孫始元書 戊午
謬詢禮節。吾豈敢質言。吾家之所嘗行者。因退溪先生之言。而考備要則又以爲旣有祭奠。不可無哭。且云。近代諸先生。皆云有哭。所謂諸先生。卽牛栗諸公也。且見眉叟集。則如退溪之訓。未知何所適從也。遵從先之義。則當無哭。據從厚之道。則又不可無哭。惟在哀之參酌行之耳。重服者入哭輕喪。禮必有據。而此未暇考見。然朱子嘗以爲雖服重。臨輕喪時。當服其服。哭之。卒事反初服云云。以此言之。則固當於入殯之際。暫著其服而入哭焉。似可矣。而所未可知者。古人雖輕服。必制服。不但如今人之只用巾帶。或有帶無巾而已成制之日。依禮具服。則如朱子之言行之。有何疑哉。若只有巾帶。則著重服之深衣。而加輕服之巾帶於其上。未知無妨。否此則須更問於知者而爲之如何。朔望奠時。闔門啓門之節。本無之。只如朝夕奠之儀云。而世俗皆行之。吾家亦然。且當從俗。然哭則似當於啓門時。不必待落匙後也。虞祭異於朔望。而亦云啓門後。主人入哭辭神。盖止哭爲闔門也。故啓門則卽入哭。辭神則待落匙。然此亦以鄙見而言。亦望廣問行之。宜矣。
송학렴(宋學濂) 1719(숙종 45) 칠곡 출신
본관 야성(冶城). 자는 영심(令尋)
진사 송이석(宋履錫)의 아들
영조(英祖) 35년(1759) 생원시에 합격
*贈宋令尋 學濂○幷序
(달수 주)1739년 여름 송학렴이 칠곡에서 그의 아버지 남촌 송이석(宋履錫)을 따라 광양 배소로 찾아와 육칠 일을 머물다가 아버지 남촌은 먼저 떠나고 오륙 일를 더 있다가 떠날 때 서문과 시를 지어 주었다.
*己未夏。宋生令尋自漆谷之梅陽。從其大人上舍公。跋涉數百里。訪纍人于晞陽之蟾湖上。留六七日。上舍公先歸。又四五日。令尋隨而歸。臨行。以二律二絶幷小序留別。文彩斐然可愛。令尋卽余再從姊兄故鄭公之外孫。童子時嘗從我講戴記。猥以師禮待我。今乃相問於竆途寂寞中。事我無異子弟。至屢日不懈。此其義與古之盧遵,巢谷。何讓焉。但其文辭稱謂非倫。所推許太過。有足令傍觀冷齒者。余甚愧焉。然不可無一語報謝。遂乃牽率走次其二絶。以致相勖之意云。
愛爾文辭步趣長。異日何難擅藝塲。雖然本末須當辨。游夏元來異馬楊。
靑年可惜好光陰。莫戀浮華枉用心。竆道此身堪作戒。眼昏頭白悔空深。
김강한(金江漢) 1719(숙종 45)∼1779(정조 3)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탁이(濯以), 호는 난곡(蘭谷),
아버지는 필흠(必欽)이다. 김성탁(金聖鐸)의 문인이다. 김성탁이 호남의 광양에서 귀양살이할 때 그곳에 따라가서 『대학(大學)』·『중용(中庸)』·『서명(書銘)』·『주자행장(朱子行狀)』 등을 공부하였다. 김성탁의 문하에 들어간지 9년 만에 스승이 죽자, 그 아들 구사당(九思堂) 김낙행(金樂行)의 문하에서 배웠다. 평생동안 성리(聲利)를 멀리하고 세상을 사절(謝絶)하여 존양하는 학문에만 힘썼다.
제산집
*答再從姪江漢書 庚申
久不收信。瞻想之懷。歲改尤新。小兒之來。得奉元日書。備審彼時重侍下學况。迓吉增福。良慰遠念。書中所謂志氣倦惰。思慮胡亂之病。學者所難免。纍叔。平生此患尤甚。至今白首依舊。沒奈何。其何能爲君謀耶。然君所謂不操不存。不養不明。而操之養之之工。一箇敬字。約而盡矣者。已得其用力之要領矣。至於敬之爲說。則程門所云主一無適整齊嚴肅八字。已開示無蘊。苟不從事於敬則已。如有意乎。何患爲說之多端。而不知所用力也。又知誦得論語數卷。尤可喜也。此書雖間有微奧處。大抵皆日用常行底道理。而集註簡切明白。無甚難解處。苟能潛心熟玩。其味無窮。若於工夫爛熟之後。耳順心得。如誦己言。如尹和靖之爲。則發口論說。庶幾無差矣。豈可用得旬月工夫。讀得一二卷篇。而遽望其論說之無差耶。小註誠爲煩雜。苟非在我見識精切高明。而欲取舍於其中。則轉使人增其迷惑。所云脫略諸言。獨取集註。而求得本意。非但爲讀書之法。亦爲操心之要者。誠是矣。幸望循此勉勉。勿急勿緩。惟務精熟。至於讀盡二十篇。然後看如何也。書史披玩。亦是一工夫。每日課讀之暇。時取而覽閱。則未必不助發意思。開擴識量。然亦不可泛濫無節。又當思其緩急而去取之。吾意欲君之一閱朱子綱目也。未知如何。
*答江漢書
南來屢月。鄕音久阻。尋常懸念不已。十月家便。得接九月所付書。慰思多矣。而會於其時。身病方苦。又有避痘之撓。未果奉復於歸便。迨以爲恨。卽日窮寒。未審重侍下學况如何。此中頑命不死。奄過讎日。邈爾絶域。忍行變除之節。世間情界之痛絶。復有如是者耶。叩地號痛。罔極如之何。來書所諭。足見雅意所在。可尙可尙。但窮理持敬之方。程朱遺訓。不啻耳提。苟欲從事。何患不得其道耶。至於擧業。有父兄在。有不可自任己意者。惟於程子奪志之戒。倍加惕念。不至與俗子同流。則古人所謂超然自得處。自在箇中。而不患爲外物之所誘奪矣。白首坐在裏許者。乃敢發口大言。眞所謂能言之鸚鵡。然於一家至親之間。有何嫌避。不以人廢其言則幸矣。尙書。其已卒業否。周誥殷盤。朱先生。亦苦其不可讀。每勸學者。以就平易處用工。所謂平易處。卽二典禹謨伊訓太甲說命等篇也。其中多格言。於學者極有益。未知如是看取耶。扶仲相距密邇。數相過從。甚善甚善。惟祈侍下送迎增吉。
*答江漢書 壬戌
家便至。得接正月十九日書。縷縷見諭。多是懋學自勉之意。令人心開目明。無異對面講說也。况審重侍下諸節。又何等慰釋耶。此中未死頑喘。遽經初朞。而身在絶域。號隕莫及。日月如流。新春又已盡矣。感時哀慕之情。去益罔極。奈何奈何。所示知處與行處牴牾。不易點檢得如此。如陋劣者。平日或不無一斑見解。而其見諸行事者與所知者。全不近似。往往出於閭里庸衆無識人之下。不但有所牴牾而已。今於來諭。不覺媿騂。然私竊惟之。知行相符。坦然一致。此乃地位已高。深造自得者之事。初學則安能免牴牾。惟從事於博文約禮之工。知必期於眞知。行必期於實踐。勉勉循循。積漸悠久。然後所知者貫通。而無疑晦之患。所行者純熟。而無臲卼之歎。此是學者終身事業。恐不可責效於時月年歲之間也。如何如何。所謂惺惺。不可以寂然不動。淡然無欲言之。只是隨動隨靜。常自警省。使比心虛靈之本體。不昏憒不放倒之謂也。若曰寂然不動是惺惺。則是有體而無用。有靜而無動也。若曰淡然無欲是惺惺。則是此心常惺惺。然後有此境界耳。豈可方著工夫。而遽望其無欲哉。所謂安其內之工云者。亦於惺惺之義。不襯貼。盖程子所謂制之於外。以安其內者。以克己之事言也。聖賢之言。雖若相似。而地頭各異。不可賺連而作一義也。須取大學或問首章論敬處。仔細玩索。則程,謝,尹三先生之言。可以得其本旨。而持敬之功。方有下手處矣。弱喪迷歸。白首憒憒者。乃敢爲人發口。有若引路者然。雖一家間。寧不可慚耶。君其獨覽。絶勿煩人。使老物。爲嗤笑之資。幸甚幸甚。
*答江漢書
所示疑節。今已過矣。不必更論。况昧昧者。何敢斷定。然有疑相講。古人亦不必皆在。於臨事之際。閒漫往復。亦無妨耶。爲妻父母在不杖不禫。禮有明文。則此固無可議。而妻喪實具三年之體。則練祥之不可不行。恐當如來諭矣。舅爲適婦旣主喪。則二祭祝文。似當措辭變通。小祥大祥等字。何可仍用耶。練祥旣行。卽當行祔。此亦爲三年而祔者。何必待二十五月月數之足耶。高祖考妣神主。雖遷奉別廟。主祀者旣是最長。則祔祀時。似當以最長爲主。最長若有故。則使子弟攝行。似合禮意。主喪者主之。恐未安。如何如何。此亦無所考據。但以謬見奉報。未敢自以爲是也。年來。君所遭如此。且在重侍之下。奔走服勤。非他人爲子弟者比。其不得專意書冊。理勢固然。殊可閔歎。然若令此箇意思。不至斷絶。則隨時隨處。亦可以量力著功夫矣。况古人之所謂學。不專在於書冊上乎。私心所期望於君者不淺。故躬所未能。僭率發口。幸勿以人而廢之也。
*答江漢書
所示兩書。文辭義理。卓然驟進。可想其用工篤至。不以患難憂戚。而有所廢輟也。可尙可尙。講學踐履先後本末之諭及今世學者之徒務口耳。而闕卻踐履之歎。皆至論也。然此在學者用心之如何。苟以講學。作切己工夫。則不患踐履之不篤也。論語不云乎。博學而篤志。切問而近思。仁在其中矣。此言爲仁工夫。在於講學之中也。惟是徇外爲人道聽塗說。如南冥所謂手不知灑掃之節而口談天理者。爲可畏爾。若因此而專務踐履。不事講學。則吾恐其所謂踐履者。或不免出於私意之杜撰。而無以考聖賢之成法。盡義理之精微矣。來諭之云。無乃有激於末學之弊。不免有因噎廢食之過耶。然如愚陋者。亦一生陷溺於俗學之窠。至今白首。所以欺世盜名者。不出於四寸之間。而無一二踐行之可論。則於來諭。直將愧汗之不暇。何敢晏然發口言耶。特以君爲至親。故不得不復包羞而冒說至此。幸君以我爲戒。而從事於尊德性道問學之工。以爲將來究竟之地。如何如何。後書中。學貴窮理。而窮理之要。不必馳騖於曠蕩虛無之域者。亦是矣。但所謂一身五臟六腑毛髮筋骨血氣之流行。莫不有天地自然之法象。而與陰陽造化同一機緘。窮理者。於此得之。則日用事物之間。行其所無事者。恐非窮理之先務也。吾身所具百體之理。固不可不知。然莫若先求之人倫五常四端七情之間。爲切近而有益。至於臟腑形骸配屬之理。則一部醫書中。亦已言之。學者何必汲汲以此爲務哉。周夫子建圖屬說之意。亦豈但爲此而已耶。以此而求諸圖說。則恐得其小而遺其大也。謬詢圖說疑處。病中精力短乏。猝難作報。徐待神氣小勝。追後奉復爲計耳。其中有曰借有形之極。以比無形之理。又曰。妙合是陽動時。凝是陰靜時者。皆似未安。其他所論。亦多有可商量處。從當以鄙見及之。然亦願更取圖說。熟讀而詳究之。如何。
*贈再從姪江漢序
上之十四年戊午秋。余自耽羅。蒙恩撤棘。移配于光陽縣。越明年五月。族子江漢爲問余。跋涉六百里而來。仍留處五十餘日。其間講大學,中庸,朱子行狀,西銘,感興詩諸篇。朝夕飯一盂麥。菜藿數器而已。衣垢不澣。幾於弊壞。居處湫隘。炎風瘴雨。日翕爍蒸潤。汗流如漿水。坐榻爲濕。而能處之晏如。終日堅坐對書冊。非便旋不起。非問文字質疑義。不苟言語。終始如一日。無厭倦之色。雖古所謂學如不及。不求安飽者。何以過焉。吾門年少固衆矣。有才氣志尙者。亦間有之矣。其沈靜篤實。堅苦刻厲。不以外物累心。吾於江漢。始見其人矣。孔子曰。後生可畏。以其年富而力彊。可以無所不爲也。今以汝之年之力。而其立志之篤。又如此。其於學也。如朝日之方昇于東也。如火之始炎。而泉之始達也。如輕車駿馬。出門啓行。而王良,造父執策以驅之也。苟循是而益勉焉。不怠以止。則其方來何可量已。夫大學,中庸。汝旣講而讀之矣。學問工夫次第。莫詳於大學。道理極致。莫盡於中庸。而大學之格致誠正。中庸之明善誠身。尤爲當務之急。雖六經語,孟若濂,洛,關,閩之書。其所言者。亦一而已矣。汝其以次讀焉。而不昧於所從事。則其庶幾乎。吾之所望於汝者。非若今人之以科業相勖而已。江漢勉乎哉。余老矣。狼狽窮途。日暮道遠。撫念初志。慨歎方深。而見汝之慥慥。而可畏若此。不勝愧且喜焉。於其歸。書此以贈之。
蘭谷集
*上霽山先生[己未]
*上霽山先生[辛酉]
*上霽山先生[癸亥]
*上霽山先生[丙寅]
*上霽山先生
*上霽山先生
*祭霽山先生文[大祥時
김식하(金湜河) 1719(숙종 45)~1748/1808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청보(清甫)
조부는 태중(台重). 아버지는 명석(命錫)
*答再從姪湜河書 己未
戀際。長牋見及。文辭意致。俱斐然可觀。有是哉。汝之於此學。志尙不汎。而求益之不厭也。慰喜之甚。屢披而不能已也。仍審潦熱寓中。侍學佳吉。尤喜尤喜。纍叔殘病之餘。旣經長霖。又當酷炎。其苦有不可言。而所幸。長兒來會。又得親候平報耳。書中縷縷。爲之一笑。諸君之互相爭辨。於汝有何干涉。汝若有志。則人之譏斥者妄矣。若無實志而枉得爲學之名。則人雖不加非笑。亦可愧也。何必以羣言之朋興。而遽有所摧屈。有若彷徨歧路。無所指向者然哉。公車之業。有父兄在。雖不敢廢。其於內外輕重之分。辨之明而守之固。不以浮名得失。撓奪吾心志。則亦何妨乎。惟應擧時做應擧之工。不應擧時。則汲汲爲吾之所當爲者。要不使所重在彼。而所輕在此也。不然而必欲輟擧業從所好。則亦當禀命於父兄。而尤須切己務實。勿爲皎厲自異之態。然後乃爲隱居求志之學。而得免於實不副名之譏矣。若名爲輟擧爲學。而立志不篤。著工不專。卒無所成就。則反不如隨俗應擧者之得其當分也。此豈可不深思而審處之哉。願汝勿以人言爲嫌。反己而自量焉。苟足以立脚不撓。做得到先哲事業。而不負洪匀賦予之重。則彼之譏笑。不過爲過耳之風聲而已。而况吾之實。旣積於中而有可信之行。則安知向之譏笑者不變而翕然相從乎。若徒淟涊恇怯。驚顧疑慮。欲爲而有所不敢。欲止而有所不忍。徘徊躑躅。卒無所决。則畢竟志衰氣餒。半上落下。進不得爲君子。退不得爲小人。誠是可笑之甚者也。惟於此量擇焉。昔韓文公之始爲文章也。人譽之則慚。毁之則喜。又不知譏笑之爲譏笑。此有志者所當法也。如何如何。當暑倦困。不暇縷悉。
김시층(金始㤗) 1721년(경종 1)~1781(정조 5)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사년(士年)
조부는 지탁(之鐸). 아버지는 근행(謹行)
*再從孫始泰字叙
始余之負罪於丁巳也。再從孫始泰。尙未冠也。後四年。乃冠而有室。又二年。從余于晞陽之蟾湖上。留數月。受讀商周書。一日有請於余曰。始泰之冠也。不克備禮儀。未有賓以字之也。至今朋友。莫適其所以呼。願夫子命之以孔嘉。又推古字辭之義而賜之一言。使始泰。得以永受保之也。余曰。冠而字。所以敬其名也。賓必字之。所以重其禮也。後世禮頹。冠者不宿賓。其字之也。或自字之。或父兄字之。或朋友字之。皆非禮也。然汝旣有請。吾其可辭。夫泰。陽長之卦也。而而於而之兄弟爲季。請字之曰季長。可乎。旣又爲之言曰。天地之泰。以陽長而陰消也。邦國之泰。以君子道長而小人道消也。至於身。獨無所以泰之之道乎。凡善者。陽之象也。凡惡者。陰之象也。長其善而消其惡。斯乃所以泰其身也。孟子曰。苟得其養。無物不長。苟失其養。無物不消。欲長其善者。惟在乎養之而已。今汝質性志行。足用爲善。而其年富力強。又綽綽乎可以進於善也。則其可不及此時。孶孶焉養而長之乎。夫讀書講學。愼思明辨。以養其知識。則知識長而固陋蒙蔽之患消矣。忠信篤敬。非禮不動。以養其德行。則德行長而虛僞放縱之過消矣。用圖書而代博弈之好。以養其性情。則玩適之味長而嬉戲之習消矣。捨宴暱而親勝己之友。以養其威儀。則警益之樂長而鄙吝之萌消矣。隨處而養之。觸類而長之。以至於充滿盛大純粹光明。則得其時而爲泰之初九彙征之君子可也。不得其時而爲否之六二。否亨之大人。亦可也。如此而後。爲長養之極功。而身與名俱泰矣。此吾所以字汝以長之意也。季長。其念之哉。
유도원(柳道源) 1721년(경종 1)∼1791년(정조 15).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숙문(叔文), 호는 노애(蘆厓). 안동 출생.
참의 관현(觀鉉)의 아들이다. 참의 승현(升鉉)에게 입양되었다. 동생인 장원(長源)과 함께 이상정(李象靖)의 문인이다.
어려서부터 재주가 뛰어나 네살 때부터 글을 배우기 시작하였다. 부모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였을 뿐더러 동생 장원과의 우애가 또한 돈독하였다.
일찍이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나 벼슬에 뜻이 없어 더 이상 과거 볼 것을 단념하고, 존심(存心)·함양(涵養)의 실천적 수행으로 위기지학(爲己之學)에 전념하였다.
성격이 매우 청백하여 평소 남들과 함부로 어울리기를 꺼려하였다고 한다. 생활이 매우 규범적이어서 〈십계 十戒〉·〈삼잠 三箴〉 등의 경구를 벽에 써붙여 놓고 항상 애송하며 마음을 닦는 데 주력하였다. 학행이 널리 알려져 도천(道薦)으로 명릉참봉(明陵參奉)에 제수되었으나 취임한 지 3일 만에 병을 칭탁하고 사직, 고향에 돌아가 후진양성에 전념하였다.
1790년(정조 14) 노인직으로 첨지중추부사가 되었다. 주석학(注釋學)에 밝았다고 하며 많은 저술을 남겼다.
저서로는 문집인 《노애집》을 비롯하여 《퇴계선생문집고증 退溪先生文集攷證》·《일경록 日警錄》 등이 있다.
*祭文[柳道源]
惟靈家世靑溪。淵源錦水。天資近道。學力又至。襟宇冲澹。義理精熟。貞松聳壑。紫芝出谷。癯鶴標致。瑞鳳儀姿。貌如其心。無一點埃。餘事文章。由性孝友。吾宗實工。儒林師表。僶勉世路。爲報君親。誰攬虛舟。任他風津。十載飄飄。瘴烟蠻雨。爲賀髭髮。遽迎㫌旐。喬嶽其頹。殄瘁之悲。斯文誰任。士氣沮摧。昔我先君。竹馬與交。契密金蘭。情深㓒膠。朋簪講磨。水石聯翩。明時立揚。雲路後先。栢悅蕙歎。莫逆夷險。公在湘纍。衋然傷念。往復情牘。留在塵箱。倘見天日。復和峩洋。不肖獲戾。遽遭愍凶。公卽書慰。辭意隕涕。那知未幾。公又厭世。愴念疇昔。我何爲懷。先友心知。莫如夫子。終天以後。泣次遺事。擬得公銘。發揮潛德。人事奄忽。至願緯繣。公有胤子。詩禮克紹。觀志觀行。旣敬旣孝。兩家餘孤。念二父志。涕泣相勉。無替舊誼。居諸不留。几筵將撤。萬事陳迹。觸目心怛。雲愁霽峀。波咽洛江。和風斂迹。瑞日韜光。未遇者命。不磨者名。痛哭靈帷。爲私爲公。欲寫之哀。罄竹傾河。欲形其德。談龍畫蛇。草草數語。未究悃愊。靈或不遐。庶賜歆假。
소응천(蘇凝天)
자는 일혼(一渾), 호는 춘암(春庵)
春庵遺稿
제산집
*八月旣望。與蘇一渾 凝天。約會妙覺庵。旣到。一渾不至。
爲有佳期在。留連近午天。錯聞人語響。驚起出門前。
*暮一渾至。對話聯枕。明日雨下。留半日。
勝地同遊分外奇。中秋月色又相宜。十年楚水孤吟客。今夜渾忘搖落悲。
이동영(李東英)
자는 백실(伯實). 선생의 사위
族姪光天,李郞伯實 東英。與小兒濟行。追到島中。留五六日還歸。贈詩以別。
白首孤囚又海中。那知此地笑談同。今朝送別前期遠。無限鄕愁向北風。右別光天
遠涉鯨波爲逐臣。竆途彌見舊情親。世間離合何須較。笑殺夷陵泣下人。右別伯實
答李伯實書
李東英에게 답한 편지이다. 제주도로 유배된 후 사정을 적은 것이다. 고향과 멀어서 모친의 소식을 들을 길이 없어서 애통하다고 하였다. 섬에 함께 이야기를 나눌만한 선비도 없고, 볼만한 서적도 없어서 아들하고 둘이 우두커니 앉아 있으니 사정이 참으로 곤궁하다고 하였다.
이세근(李世根)
선생 문인
李友達厚 世根。聞余移配薪智島。臘月十九日。發晉陽。以新正旬二入島。勞問余老病流離艱難辛苦狀。旣乃留連屢日。慰釋開益甚多。此古人之事。而今世之所難也。纍人旣感歎不已。一日達厚又以五七兩絶。示余求和。其辭語過重。令人恧然汗顔。然厚意不可以無謝。故忘拙步韻。以博客中一粲。
少年從有道。白首尙迷源。狼狽今如此。深慚累法門。
身如泛梗寄中洲。蜒戶啁啾卽異區。堪愧故人推借重。孤臣空自訟愆尤。
一棹間關夜泊洲。高情不讓訪韓區。慚無好語留嘉客。賴有東風當石尤。
*達厚愛蟾江之勝。買取一屋子。或以價重譏之。達厚賦二絶解嘲。余戲次其韻。
歲歲江潭費獨吟。君今來住可論心。方知廉價還歸富。收得江山不用金。
무진년 8월에 이세근(李世根)이 제산 김선생에게 올린 제문(祭文)
維歲次戊辰八月癸未朔九日辛卯。門生李世棖。謹以二百錢焉。替人。具淸酌庶羞。痛哭再拜。敬奠于先師霽山金先生靈几之下。而告之以辭曰。嗚呼哀哉。先生學於葛翁之門。葛爺卽我族大父。而我舅氏茅溪曹公。亦從而學焉。入學於先生。爲何如人哉。先生學聖賢之道。而不能見容於時。達者。贏島。備經艱危。何幸出陸而至晞陽之蟾江。小子於是乎以淵源一派之義。有請業從遊之志。歲庚申望十二日。進拜於匪所。適先生丁內艱聞喪初也。兼之以弔慰。留一日而還。越明年癸亥。請和負笈而進。挾冊而質。卽大學一部書也。講授留連一望而歸。其年仲秋。又復趨謁。因請伯胤與之入頭流。訪玄鶴遊三神洞而還。先生曰。君旣遊於山於水之樂兼之可乎。分付學童。得一船於鎭將。命小子與伯胤同身遊五龍亭。進退承敎。日亦多矣。其間耳提面命。蒙賜甚厚。伯胤書宋賢箴銘以贈之。先生題一言以與之。蓋是警省切己之要。顧此庸陋。可有得於師友者。爲如何哉。翌年甲子。往而候焉。我舅氏家狀。巴山學者。朴丈涵所撰也。請益之暇。因乞行狀於先生。而先生迺以謫纍固辭。强之而後。蒙留置之敎伊后去來。亦嘗提稟此事。而遷延時月。未果屬筆。竊惟先生之意。蓋有所待。而天不我與。奄喪斯文。豈意人事之不可料。乃至於此。吾黨今日之望。惟在於二棘人之繼述。則我舅氏行蹟之毋至泯沒。亦當與二棘人圖之也。興言及此。尤可悲也。其年八月。隨巴山武陵語丈。作觀海遊山之行。承謁門廡之下。告歸之日。先生出送于魚龍臺。卽九月九日也。諸丈以李伯九日龍山韻各賦進。而先生和之。己丑春秋。皆不得進候者。以身有采薇之憂也。替以伻候在十月望念間。而至月初六七日間。淸源一家人傳言。先生移配康津之智島。北徙南遷。古賢所不免。則小子於先生。亦何恨哉。但海島渺茫。風土不美。暮境精力。能不損鑠。用是驚慮。未嘗一日弛于方寸間。小子雖甚懦。亦不能無感於古人浮海相從之義。臘月十九日登程。越明年正月十二日。得到智島之東臯。伯胤及蟾湖學子侍坐矣。倒屣迎之。入室承顏。還紓千里之慮。始知先生道力之全也。從頌陪唔。所得非一。進而薰炙於先生。退而切劘於伯胤。留蓮信宿八九日夜。其間警誨。無非開蒙激懦之端。而東臯亦金陵最殊勝處也。其地勢据山枕海而爲三臺焉。先生居上臺之松竹間。小子舍舘居其中。與伯胤晝則進而侍敎。夜則退而聯枕。一日余以所懷。陳于先生曰。小子平生癖於山水。而一自庚申喪明之後。尤無意於世。自分爲物表之身。只有欲盡吾東形勝之意。先生答曰。此事亦自好矣云云。而於其明日伯胤謂余曰。昨聞所懷。則玩景耽閑。將有遺世之志。雖爲好事。然倘爾成癖。不憚遠遊。則爲令胤憂慮必多矣。且年近六旬。歲月不待。惟願早就葛茅之堂。閑養身心。不廢讀書之工。而時或游咏於近處佳山好水之間。此優於彼也。余卽應之曰。謹奉敎心從。余於眼脚。已成痼疾。今得對證之劑。吾當歸而醫之。告别之際。先生所賜别章之末。示以葛茅堂早就之句。余奉讀曰。向來以遊山之意敷陳。而先生只答之以好。别無戒敎。昨昨之晨。伯胤有投藥之言。小子於是。而竊有惑於先生者。以爲用友意善之意尤切也。今奉别章之惠。果知先生不言中之敎矣。先生笑曰。今而後則以友待奈可乎。蓋不欲當師生之分也。此蓋陶山待門下之義耳。猥蒙瓊詞者。前後凡九章。其餘唱酬亦非一二。而前日所留。有所謂金華子傳者。先生惻然爲題遺事後。伯胤聞余蘭草韻二疊。作詩三章而序之。先生亦覧而悲之。爲吟一絶。以附篇末而歸之。其爲幽明之感。尤復如何。言當告歸惜别之情。兩相接對。而風帆無恙。兩津渉利。則亦吾先生感人之誼。及於小子之行也。爲雪所阻。住於葛德山洗心菴。菴臨大海試望分携之處。孤島蒼茫於雲海之間。仍竊怳念。先生尺疏。由於生三成一之義。而卒乃爲世人大戮。荐入海島耶。嗟乎。我亦爲吾先生之門下。而乏此一丹之心。一無爲師之道。環顧循省。自多愧色矣。菴下有橘洞尹上舍就緖。及石門尹處士吉緖。甫於先生耽羅之行。有一拜之雅。爲來訪我。說到師門。有歎服稱道之言。而以大君子素患行患。隨遇而安之道。今乃知之矣云云。玩賞周遊迤進。至河南之虎巖。聞先生出陸還配。方住杖屨於晞陽沿底。卽其行馳。五日承謁。翌日陪先生還歸蟾湖。蟾湖之上。老少相與喜迎。有若赤子之見慈母。倘非盛德入人之深。烏能爾耶。前後謫居。雖以絶域之俗。亦多有感化而愛敬者。於此亦可見其一端矣。侍敎二晝夜而辭歸。伯胤亦作故園之行。與之偕轡。至晉西而分路。未幾而小子又趨拜。與秀胤同侍一月矣。先生前日所留芝幕逕。葛爺謫居之室。而先生移配之後。無人看守。累月久廢之餘。荒落不可處。故僣得臨湖一屋子。其制蕭灑便爲江齋。余所酷愛者。此地有漁臺。偃臥於江中。石亭特立於臺上。皆爲門外第一之勝。小子爲之買其屋子。而以出丈名其臺。爲入而詣敎云。而承杖屨之所。夫何論價之多少也。小子謾作蟾江别曲。而又有拙吟。先生亦和之矣。留居一月侍敎陪遊。講學酬唱之餘。起居飮食之節。亦莫非恩庇之所及。何嘗有一日離側之意也。因兒子之來。有不獲已還家之事。告以十日爲歸來之期。還家之後。以村中癘虐挈眷之寓。而身不免渠痛。累次猖獗症情不佳。先生爲之賜書垂問。兼之以美膳兩種之惠。余於病中。不任感謝之懷。爲吟一小詩以識之。一日夜夢。侍坐丈席。先生曰。余於爾。曾有一絶之和。爾猶留念勉之哉。余卽覺來記之。乃君我俱非少壯辰。鏡中髭髮日看新。武公抑戒宜堪誦。須向今生度此身之詩。此亦開發眷眷之意。及於寤寐之間也。過夏三朔。猶未快復。仲秋强作進候之行。先生證候。越添移寓芝幕屬耳。奉諗以來。不勝驚慮。但所恃者。氣宇淸明。精神無損。而留宿數日。自量身病。似加不無客裏之苦恙。貽先生病中之憂。還不如旋歸。告以黃花未落。爲重來之期先生力疾起坐。開戶送之。嗚呼。誰知此别。竟作千古訣耶。歸來而往之慮。何嘗有食息間弛也。返捧之後。病毒添加。頹臥杜門。圉圉難振。秋末家侄之往。不得修書以候。其還。先生賜書問之。滿紙辭意。無非慰余病懷眷戀之情也。一自其後。終冬歷春。痘虎梗路。消息茫然。適於四月念四。因崔生歷訪便。叨得先生症候一向添劇。自黃龍寺避痘之所。移寓龍仙菴。慕慮之忱。尤當如何哉。五六月之間。內從以其身之病。來寓於家。遠近親知。迭相來問。或傳喪出之音於千萬夢寐之外。心之驚痛。無以堪遣。而猶未得的報。方俟通訃之際。有人自市上來言。蟾津靈車自水路。昨到麻津云。余與族孫李琇。往候於濂津。卽六月十三日也。留待經夜。雨水大漲。故不免罷還。翌日又往候於上寺津。而不能直途馳進者。所經二處。痘火猶熾。方送人麻津。以爲邀船越去之計。適有從邑中來者。言今日午後喪船離發云。卽與琇。馳到濂津。喪船已過宜春界云矣。宜咸之路。亦有疫未淨。佇立江于。悵痛何言。嗚呼。小子之一哭先生。豈意後於人若是哉。至月之望。適有事蟾江之濱。卽訪函臺。臺空無人。獨立雪風。有淚添水。先生之歸。小子旣不得臨斂永訣。又未能攀輀痛哭。每以眞夢。將信將疑。今焉來斯。亦不覺其眞。而豈弟淸儀。警咳德音。如見如聞。而終不可得以見而聞之。嗚呼。先生之歸。非夢而眞也。小子此日之懷。當如何也。江山亦爲之悲。蟾水嗚咽。白雲慘憺。豈意昔日依歸之所。便作今日垂涙之地耶。遂以景慕二字。改題臺名。仍吟一小詩。以寫痛泣之懷。小子曾於侍坐之日。不揆荒拙。値與輙咏。先生隨吟隨和。未嘗一闕。今此之吟。踽踽涼涼。尤可悲也。荏苒歲月。苦待常期。大擬趨哭。而私家不幸。遭妻喪於三月初旬。庶從兄弟。又以痘疾相繼。夭化悲疚奔避之中。無遠役之勢。又未遂此意。遂欲趁初朞之日。趨進芝幕。洒掃舊室。揭紙榜而奠酹之。方將操文治行。而旋以事勢拘牽不果焉。今此所告。卽當日構出之大略也。屬兹新秋。痛軀稍蘇。决意登程。以本月初五到仁里。翌朝哭拜於靈筵之下。仍與伯胤同處於隔壁之室。感古傷今。心腸欲摧。豈料今日以此弔哭之行。而入此土耶。嗚呼。先生道學文章之盛。乃擧世之所共知。固不待小子區區之言。亦非小子之所能形容。而惟是小子早失舅氏之訓。有志於學。而未知其方。心常以爲所謂道學者。微妙高遠。非人人之所可窺測而企及也。自從先生遊也。默察其動靜語默之間。而驗之於古聖賢之說。然後乃知此道。只在日用云。爲庸言庸行之間。而初非怳惚窈冥。不可摸捉之物也。蓋先生之德。慈諒而樂易。白直而坦蕩。平易之中。自有至難之實。淺近之中。自有深遠之妙。卒然見之。若人人可能。而要其歸。則卓然有人不可及者。嗚呼。此眞所以爲精微高遠者也。嗚呼。惟知者可知之。而南方之人。至今追思。而不忍忘者。亦豈無所以而然哉。嗚呼。入門而莫之見。長號而莫之應。告之而莫之答。明日之朝。將復南路矣。長程來去。果何爲哉。我心之悲。曷有其極。道遠而物不能自具。文短而言不能盡意。伏惟先生庶幾降格而恕之。嗚呼哀哉。尙饗。
憶在京塵多苦顔。邇來心地稍虛閒。看君結契烟霞句。幽興飄飄入海山。
憂病三春少解顔。藥爐茶鼎未曾閒。不知葛社相思夢。能度橫天鶴駕山。
離索堪憎此醜顔。高飛鳥盡去雲閒。平生謾說神交語。此日還成對敬山。
남국붕(南國鵬)
자는 운거(雲擧) 제산 문인
제산집
*贈別南生雲擧 國鵬○幷序
宜春南秀才雲擧。質美而嗜學。前月初。自晉陽。訪纍人于晞陽蟾湖之上。猥以執經請益爲事。聽其言。察其心。蓋有異乎世俗之士之所志也。纍人罪廢流落。重之以疾病。平日所聞於師友者。忘失殆盡。旣無以一言相啓發。又不能自力講討。留十數日。僅讀大學及朱子感興詩。又方讀中庸未畢。而以歲暮。奉其大人命。告別而歸。纍人甚愧其虛辱遠顧。且不勝悵然之懷。用古人贈言之意。以絶句二章。奉送其行云。
竆途甚愧遠相求。攻苦寒牕一月留。歲暮別離仍卧病。滿江雲樹不勝愁。
千古儒家自有門。精思實踐是要言。若將四子潛心久。他日應須見本源。
*次南雲擧自警詩 三絶
言動要須辨是非。知非愼勿更爲非。若敎知後非猶在。何異終身未覺非。
伯玉曾知四十非。淵明又說覺前非。如何頻復迷塗客。白首依然舊日非。
跖蹻初從一念非。不須形外始爲非。工夫正在幾微處。莫待傍人說是非。
*次南雲擧韻。贈琅玕翁。
羈懷黯黯轉難平。行子明朝又北征。千里故園何日到。白雲東望倍傷情。
南國鵬에게 답한 편지이다. 병이 들었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이럴 때는 사람도 만나지 말고 의원을 가까이하고 조리에만 힘써야 한다고 하였다. 별지에 질문한 것은 어리석은 사람이 아는 것은 없으나 가만히 있을 수 없어 조목에 따라 자신의 견해를 밝힌다고 하였다.
別紙 12
의례에 관해 질문한 것에 답변하였다. 선조 묘제사 지낼 때 서의 순서는 어떻게 되는가? 婢妾의 銘旌에 氏자를 쓰는 것은 너무 지나친 것 같은데 召史라고 써도 괜찮은가? 아들이 없는 庶母의 장례의 축문에 사위의 이름을 쓰는가? 祭主를 쓸 때도 盛饌을 하는가? 묘제 때에서 侑食의 예가 있는가? 新婦가 시부모를 뵙는 예절에 있어서, 시아버지가 일이 있어서 출타했다면 신부가 시어머니에게만 폐백을 올렸다가 시아버지가 돌아오면 다시 폐백을 올려야 하는가? 등에 대해 답변하였다.
남국붕이 제산선생에게 올린 편지가 6통 있다.(제산종택 간찰)
김기호(金起浩)
본관은 순천(順天) 자는 시천(時天).
제산선생 처남
제산집
次兒子晉行短律。贈內弟金時天 起浩
欲別難分手。臨行更挽衣。幾年今始見。千里又將歸。
海色迷寒樹。江雲淡夕暉。吾身行復健。持此報萱闈。
홍대구(洪大龜) 1726(영조 2)
본관은 부림(缶林). 자는 국보(國寶). 목재 홍여하의 손자
*輓洪處士 大龜
木老芳風在令孫。淸修姱節我能言。壺中貯月心無累。櫝裏藏珠價自尊。
頹俗向來猶可挽。古人今後復誰存。堪嗟異日東林宅。不見明牕笑語溫。
하겸진(河謙鎭)1870년(고종 7)∼1946년.
본관은 진양(晋陽). 자는 숙형(叔亨), 호는 회봉(晦峯) 또는 외재(畏齋). 진양 출생.
아버지는 재익(載翼)이며, 어머니는 김해허씨(金海許氏)이다.
13세에 사서·오경의 요의(要義)를 모두 익혀 사람들의 칭송을 받았고, 17세에 당대의 명유 허유(許愈)를 만날 수 있었으며, 24세부터는 성리학(性理學)을 논하기 시작하였다.
27세 때 스스로 쓴 《도문작해 陶文酌海》의 서(序)를 부탁하기 위하여 곽종석(郭鍾錫)을 찾아가 제자가 되었고, 29세 때에는 이승희(李承熙)·장석영(張錫英)·송준필(宋浚弼) 등과 교유하였으며, 안동·선산·성주 등지의 선현들의 유허지를 순례하고 많은 선비들과 사귀었다.
그뒤 명산대천은 물론 동서남의 3해안 일대와 명승고적, 중국의 공자·맹자·주자의 묘(廟)까지를 순례하려 하였으나 만주까지 갔다가 되돌아왔다.
저술로 《주어절요 朱語節要》 10권을 편찬하였고, 《도문작해》 6권 및 《명사강목 明史綱目》 18권을 저작하였다.
만년에는 《동시화 東詩話》를 엮었는데, 정인보(鄭寅普)는 그 서문에서 “동국(東國)에서 일찍이 볼 수 없었던 진기한 시화”라고 극찬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나라 유현(儒賢)들의 학문과 연원을 체계 있게 정리한 《동유학안 東儒學案》 30권을 완성하였고, 《해동명장열전 海東名將列傳》, 일제하의 우리나라 국민정신 계발을 위한 〈국성론 國性論〉 3편과 주기론자(主氣論者)들이 주창한 〈성사심제론 性師心弟論〉에 대하여 2편의 변(辨)을 지어 그 부당성을 지적하였고, 심성론(心性論)의 대성인 〈심위자모설 心爲字母說〉 5편을 지었다.
그를 위하여 세운 덕곡서당(德谷書堂)에서는 1957년부터 사림들이 매년 석채례(釋采禮)를 행하고 있다.
東儒學案上編八 康州 河謙鎭纂
陶山私淑學案
○校理金霽山先生聖鐸
金聖鐸字振伯號霽山其先義城人藥峰克一之後戊申嶺南賊起先生與柳慵窩升鉉權江左萬見安撫使朴師洙因謀擧義爲文諭四方俄而賊敗報至乃止嶺南按覈使吳光運豊原君趙顯命連薦先生文學行誼始除 英陵參奉移靖陵參奉後又除司畜命道臣勸駕及入闕謝恩上問嶺南自先正以來必有遺訓傳授者勿辭以對先生對曰大學一部自格致以至冶平其要不出誠敬二字又問政事之要遂以孟子省刑罰薄稅斂孔子君君臣臣父父子子之說對焉上稱善乙卯拜丹城縣監其年中增廣第卽授成均典籍命戴花入侍 賜御製詩一節因命前席次韻以進朝野咸榮之數日拜司憲府持平先生陳辭疏論時弊勉聖學又上十條疏上嘉納丁巳以司諫院正言移工曺佐郞兼知製敎俄拜弘文館修撰校理時上眷日隆若將朝夕大用而西黨恨甚嗾湖嶺儒生投疏構誣辱及先生師門蓋先生少師事葛庵李先生葛庵曾於肅宗己巳應旨上疏及甲戍中宮復位論者摘疏中一句語被謫洪原後有全釋復官之命而其名猶在罪籍先生再疏洞辨上納承旨柳儼言命安置先生濟州之旌義明年量移光陽庚申遭母喪特許奔哭旣葬還配乙丑又以臺啓移配康津薪智島明年還配光陽以丁卯月日卒于配所享年六十四前一日作詩十絶與子樂行皆勸勉家學之意先生嘗語學者曰初學之士當以立志爲先志之高下而所就之大小判焉志之剛劫而所業之進退係焉夫志我之志也我欲立斯立而已矣何與於人何求於人哉正廟乙卯相臣蔡濟恭入侍上曰抉摘文字非聖世事予於金聖鐸知其寃也命還給校理職牒
絜矩說
壬子正月甲子與晉兒講絜矩之義蓋諺解及陶山釋義皆以以矩絜之解之前後學者皆依此讀無致疑者近者趙玉川因朱子大全中江德功書所謂絜矩者度物而得其方也今曰度物以矩則當云矩絜之說以爲絜矩者謂絜而方之也諺解釋義皆非是振谷李丈從而和之爲選士發問自中竝及此義獨李密翁在世時以爲不然與玉川振谷論辨不置又考出朱子答周舜弼書所謂絜矩二字文義蓋謂度之以矩而取其方者以爲證江德功周舜弼兩書皆出朱子而其所解釋相反如此未知兩書先後如何何者爲定論爾晉見以玉川說爲得本義且云章句或問皆不明言以矩度之而所謂上下四方長短闊狹彼此如一而無不方者皆釋矩字之義余以爲以文字語勢言之則答江德功書爲是而玉川振谷之見得矣以義理論之則答周舜弼書爲有力而諺解釋義及錦水之說精矣何者矩卽今之曲尺也以曲尺而度物爲方然後所度之物得其方矣不曰以曲尺而但曰度之而方云爾則所謂度之者果何器也所度之物又將何所準而方正也且矩所以爲方之器若以矩字直爲方字之義則古人用字恐不如此之乖角況大學文字平易明白無一句一字艱誥者乎然則答周舜弼書似爲晩年定論而諺解釋義及錦水之說於義爲長姑存兩說以待異日看如何爾
體用說
振谷文答晉兒書中有云凡言體用以性情及動靜言而中庸章句所謂費者用之廣隱者體之微不可以動靜論使之思索以報余代之下語曰體用字有多少般樣以動靜言者仁爲體惻隱爲用之類是也以本末言者忠爲體恕爲用之類是也以微顯言者卽隱爲體費爲用是也朱子所謂以形而上者言之則沖漠無朕爲體而其發見於事物之間者爲用卽隱體費用之謂也以此答李文則未知李丈以爲如何爾
看列子
漫看列子至北山愚公欲平太行王屋二山爲河曲智叟所笑而猶不止詹何以獨繭絲爲綸芒鍼爲鉤引盈車之魚於百仞之淵而綸不絶鉤不伸竿不撓當其臨河持竿心無雜慮唯魚之念投綸沈鉤手無輕重物莫能亂痀瘻者承蜩其處也若橛株駒橛椿也株木之名也駒定也執臂若槁木之枝雖天地之大萬物之多而惟蜩翼之知不反不側不以萬物易蜩之翼此三者皆寓言未必實有其人與事然余感其言上一條可以爲作事無誠不能彊志徹終者法下二條可以爲臨事不專一爲外物移奪者法於學者極有警省處掇而錄之
晉兒啓蒙質疑辨
第一條勉齋說
天地奇偶始終之數不過自一至十而五行之生成亦各一奇一偶而已以奇生者以偶成之以偶生者以奇成之五奇五偶合而爲十故以十數中分之自五以前爲五行之生數自六以後爲五行之成數而其生其成非判然兩截事天一生水之際地六之成數已具地二生火之際天七之成數已具汝之所謂一纔生水六便成之二纔生火七便成之混然妙合初無隔截先後之分者是也勉齋所謂一生水而未成必至五行俱生而後待第六而方成水則全不成造化云者恐疑之太過耳但汝之所爲說亦有一二處未穩者若於則不過五而己之下去故初五以下二十五字相對以成十下去初非以下二十八字則語意無不足而亦不使人致疑矣又於五纔生土十便成之之下去水之成以下七十字而直接于而其生其成之句則指意簡潔而無叢雜之病矣如何如何蓋所謂初五之後六又爲一七又爲二云者意雖可通而語涉可駭至於所謂水之成雖曰六其實一之偶成之也等語雖似略有意思而未免不成說故云爾若夫奇偶多寡之數吾有一說焉蓋從一二而數之以至於十則多寡固有分矣然河圖之數以中五爲本故一得五而爲六數止於六二得五而爲七而一數旣爲水所占則自二至七亦止於六一與二旣爲水火所占則三得五而爲八而自三至八亦爲六矣一與二三爲水火木之所占則四得五而爲九而自四至九亦爲六矣一二三四爲水火木金之所占則五得五而爲十而自五至十亦不過六而已然則自一至十之數雖有多寡之殊而五行生成之數皆不過六未見有饒乏不齊之象矣此雖夫稽於先儒之說而亦或可備一義耶偶見如此未知汝意如何五行生出次第不但有朱子定論勉齋他說亦有如此者恐不可復容他議矣
第二條帝出乎震章胡玉齋說
先天圖乾南坤北離東坎西而乾坤之交則坤上乾下而各反其所自生所謂乾生於子坤生於午先天圖一陽之復生於子半而進至於午則爲純陽之乾一陰之垢生於午半而進至於子則爲純陰之坤坎離之交則坎東離西而各變其所居之位所謂坎終於寅離終於申者先天圖水火旣濟當寅之變火水未濟當申之半此皆先卦氣之相交而變而無定位者故邵子以爲應天之時而胡氏之以先天當之者以此歟及其再變然後乾自北而退居乎西北坤自南而退居乎西南坎自東而下居乎北離自西而上居乎南乾坤旣居不用之地則震居於東而主發生猶長子代父而用事也巽居於東南而主長養猶長女代母而用事也艮以少男居東北而終萬物始萬物兌以少女居正西而主成物蓋坎離震兌各居四方之正位乾坤各居無用之地而無交變之象故後爲天而邵子以爲應地之方也歟又按乾坤之交而爲泰坎離之交而爲旣濟蓋自先天而爲後天之漸也胡氏之以此專屬先天者雖若可疑而亦不可非斥之也如何如何
第二條明蓍策篇胡氏徑圍說
凡揲蓍之數以一四爲一二四爲二所謂一四者卽一奇也一奇象圓而圍三所謂二四者卽二偶也二偶象方而圍四且如揲得一四則此一四者卽圓徑之一而圓者其圍有三則所謂三者非別有見在之三數也卽徑一中之所有也揲得二四卽八則此二四者卽方徑之一而方者其圍有四則所謂四者非別有見在之四數也亦徑一中之所有也若如胡氏說就四策中以一策象圓而以三策象圍三用全又就八策中去四策而於見存四策以二策象方以二策象圍四用半則是卽此四策而徑圍之數各自在當曰一之外復有三二之外復有二也何必曰一之中二之中耶汝之所謂四策中所用者三策而一策在所不用者雖與胡說有異而其不達於中字之失則一也蓋所得四策不以四視之而以一視之所得八策不以八視之而以二視之則所謂一中有三二中有二之義自曉然矣
朱子大全蓍卦考誤中圖就老陽老陰二圖觀之左邊上中下各一四者卽▩揲掛扐所得老陽之數十二策也一四爲一奇則十二策爲三奇一奇象圓而圍三圍三者用全故以左邊一四象圓徑之一而右邊三四象圍三用全之數蓋一四卽一也三四卽三也所以見一奇之中有圍三之數也非謂一四之外復有三箇一四也左邊上中下各二四卽八者卽三揲掛扐所所得老陰之數二十四策也二四爲一偶則二十四策爲三偶二偶象方而圍四圍四者用半故以左邊二四卽八象方徑之一而右邊二四象圍四用半之數蓋二四卽二也所以見二偶之中有圍四用半之數也非謂二四之外復有二四也且老陽掛扐之數三奇則爲四者三而三四爲十二卽啓蒙所謂一其十二而三其四也此卽徑一而圍三也過揲之數九奇則爲四者九而九四爲三十六三箇十二卽啓蒙所謂三其十二而九其四也亦徑一而圍三也老陰掛扐之數三偶則爲二四卽八者三而三八爲二十四過揲之數亦爲八者三而三八亦爲二十四卽啓蒙所謂四分四十有八而各得其二也兩其十二而六其四也皆圍四而用半也凡此皆卽其徑而圍三用半之數在其中也非旣有徑一之數又有圍三用半之數在於徑一之外也啓蒙蓍策大全考誤之說無異同焉要在識得一中字耳
邵子所謂五與四四以下至四四十六也一段言掛扐數中去掛一而爲四象之數也去其三四五六以下言四十八策中去掛扐之數而爲過揲四象之數也蓋四十八策去四者三則其餘三十六策而爲四者九也去四者四則其餘三十二策而爲四者八去四者五則其餘二十八策而爲四者七去四者六則其餘二十四策而爲四者六小註中朱子說似與此義有異然如此推說亦恐於邵子之本意不至大戾也如何如何經世書中一條所謂十二去三而用九去四而用八去五而用七去六而用六與上條爲說若不同然細推之則亦同歸於一義何者蓍策之用數總之則爲四十八四分之則爲十二十二所去之三卽四十八策所去之三四也十二之用九卽三十六策之爲四者九也蓋四十八策則以四爲一十二策則以一爲一多寡之數雖不同而其爲一之義則無異耳胡氏所論去三成九去四成八去五成七去六成六者其失每在於三奇內各去一策以象圓三偶內各去二數以象方爾汝之所論頗得之然亦每失於四策中去一不用而用三策耳若去一不用則何可謂用其全耶
汝謂若不按策責數則邵子所謂三四五六之數皆無所當然所謂三四五六者乃計掛扐所得蓍策之虛數爾非蓍策之本數也蓍策本數則以四爲一以八爲二而已豈有所礙於按蓍而責數耶胡說中四象之各爲十二者說得明的恐不可易也九八七六四之象數以過揲取象雖若徑捷然過揲必因掛扐而後得其數則掛扐本而先也過揲末而後也過揲雖有九八七六象之而掛扐己先有之則捨其本而用其末不論其所當先而反据其所當後者豈可乎哉朱子之所以明辨而力論者專生於此所宜一遵而潛心焉耳
原卦劃末章所謂凡此數節云云誠有未曉者然後大是文王之易而自乾健也以下諸象今周易中往往著見則雖孔子之說而不妨爲文王之所推說耶不然則文王二字或孔子字之誤耶當闕疑以待知者問之耳
晉兒論權一甫中庸疑義辨
旣以陰陽五行之氣成人物之形又以陰陽五行之理爲人物之性
曰旣以曰又以者分別似太甚且微若有先後之序章句而亦二字下得極精無痕跡可指可更入思量也
喜怒哀樂情也渾然在中則性也在中云者卽未發之謂也不言未發未爲不可
朱子此語不若或問之完備一甫疑之是也答張欽夫書於哀樂之下有之未發三字所謂渾然在中者指此理而言若只曰喜怒哀樂渾然在中則是指喜怒哀樂之情而言未發之時安有喜怒哀樂之可言耶此恐記錄者欠詳悉之致恐當以或問及答張欽夫書爲正禮樂形政以事言之雖不無本末先後而以理言之初無精粗之可論
聖人之設敎也節之以禮和之以樂而政以一之形以防之禮樂形政其極一也何莫非修道之事也然書曰明于五形以弼五敎朱子曰政者爲冶之具形者輔冶之法而德禮則所以出冶之本也以此言之則陳氏所謂刑所以弼敎政卽敎之寓者未見其爲病何攻斥之甚也蓋聖人之敎禮樂而已而禮樂之所不及者以政刑輔之耳雖曰輔之而亦莫非天理之所當然也則謂之修道敎何不可之有此等處恐思索太過之致也
統言心之體用則非二也分其所以爲知覺者則非一也心合理氣止從理邊知覺者亦多般樣從氣邊知覺者亦多般樣止以此言之豈但二而已耶然其爲心一也云云
從理邊知覺者亦多般樣以下至豈但二而已耶似繁蔓不切刪之如何
以過與不及爲兩端之說固好矣故或問因之然止猶有未盡止章句所以不著過不及字而只曰小大厚薄
呂氏所謂過與不及爲兩端者朱子非取之也特取其權輕重取其中之說優於程子所謂執持兩端而使民不得行者耳若朱子自言則以爲兼總衆說以執其不同之極處而求其義理之至當云云此與章句之解有何異同耶
大舜之擇是明睿所照之擇也人言一入於耳便己昭然無毫髮之差然亦必審其擇
擇之審與行之至語勢一般若曰審其擇則語意未穩眞若用力而擇之矣審字猶明字之義尤加詳之謂也
五常三德必欲分配則五常之信可擬三德之勇
第二十章曰知仁勇三者天下之達德也所以行之者一也一者誠也誠者信也則五常之信恐不可擬於勇而其下文曰知恥近乎勇恥卽羞惡之謂也一甫所謂義近於勇者或似之然此等處本不必强求配合朱子於學者如此牽强分屬處輒痛斥之後學何敢復犯此戒耶吾意勇雖性之德與五常之爲純理者微有不同試思之
援非獨附託求取之意如下官不肯遜屈於上官之類亦不害爲援
在下者不肯盡禮於在上之人亦爲援上者果有所考據否其所以爲援之義吾未知之也
若就盛論言之樂字於順字似低郤一位而乃云侵過何也
順與安樂字有何分別一甫侵過之說及汝之所謂低一位者皆吾所未能知也
所謂祭祀之鬼神非獨言人鬼陰陽造化便是神祗止如陳氏說則陰陽屈伸自是一般鬼神所祭祀者又是一般鬼神恐無是理
天地間造化之屈伸往來進退消息榮悴開落死生終始皆鬼神也故此章首言鬼神之無所不包而下又特言祭祀之鬼神明體物不遺之驗陳氏說得此一節之意未見其有差且其意非以陰陽屈伸爲一般鬼神使人祭祀者爲一般鬼神其所謂無所不包之中拈出云云者語意的當謂之無是理者何也此亦思索之過也
都宮以別有門垣之語觀之恐非繞以周垣者似是合群廟而言者也蓋內雖各有寢廟而外實統同周帀故謂之都宮都宮之外乃設門垣未知是否
天子七廟廟各自有門垣而七廟之外又有一大垣門以周帀之則都宮之名因此而得之今日都宮之外乃設門垣未知於文義如何若以其統同周帀而謂之都宮則所謂外爲工字有不通矣更詳之
士大夫家有不遷主者沙溪旅軒所論不同不知何所適從
天子七廟世室不在常數中則士夫家不遷主亦不當竝數於祭四代之數矣以沙旅說論之恐旅軒說爲長
書
精粗本末無彼此之說尤庵謂以太極陰陽對擧而爲精粗本末則所謂太極者豈不汚雜乎此誠的論也又曰朱先生旣於二五之精以氣言之而於此復以精字屬之太極則上下精字自相抵牾亦可謂援證之明覈矣然愚意竊以爲聖賢之言各有地頭理固不可以精粗本末言而亦有以精粗本末爲言者尤庵問自中所引朱子說固曰妙用言其理又曰妙用言其精是朱子己以精言理而尤庵於此旣曰以理爲精者對陰陽之粗跡而言則太極獨不可對陰陽之粗而謂之精乎熊氏所謂太極爲精陰陽爲粗者未可以非之也又按朱子太極圖說後論有曰道體之全渾然一致而精粗本末內外賓主之分粲然於其中又於其下論體用一源顯微無間之說曰是豈漫無精粗先後之可論哉是蓋以至微之理爲之精至著之象謂之粗則太極非至微之理乎陰陽非至著之象乎朱子之以精粗分言理氣者於此又可證矣而通書理性命章曰五殊二實二本則一朱子解之曰自其末以緣本則五行之異本二氣之實二氣之實又本一理之極自其本而之末則一理之實而萬物分之以爲體此一段卽五行一陰陽陰陽一太極之意而以太極爲本以陰陽五行爲末則熊氏之本末分屬亦豈無所據乎眞西山曰天下未有無理之器無器之理卽器以求之則理在其中精粗本末初不相離此亦以理爲精與本以氣爲粗與末者較然明甚此愚生所以不敢致疑於熊氏之註而栗谷沙溪尤庵之說不能無惑者也此中近世先覺之論亦有與沙栗同者而私心竊有所不安及見愚伏集以熊說爲是然後乃始有以自信今得玄石辨說又如此夫愚伏玄石亦豈不知熊註之多穿鑿而至於此解則求之文義語脈固爲穩貼證之通書及朱子西山諸說亦有可據其可賺連而一體非之乎且尤庵以五殊二實無餘欠者謂陰陽於五行無所虧欠而具足此亦恐非本文之意也所謂無餘欠者言分而爲五而非有欠合而爲二而非有餘此卽陳北溪之言而見於性理大全小註中尤庵恐未及照檢也玄石所謂陰陽粗末之道太極精本之本然者下語似不平穩尤菴謂之未安者是矣若夫尤菴所謂二五之精旣以氣言之則不當復以精字屬太極者又有一說聖賢之言一字而兩用之者不止一二如太極圖說中神發知矣之神以氣言之而通書中神妙萬物之神以理言之一神字而可以通用於理氣則一精字而或言理或言氣者亦何不可之有蓋獨擧二五而言之則二五之氣不二不雜者謂之精而以太極相對而言則陰陽固爲粗太極固爲精其所指而言之者各有攸當夫豈有所抵牾乎精粗本末之論旣然矣而獨閤下所諭陰陽氣也太極理也理與氣不可强名一物而謂之無彼此者其有見於理氣不相雜之妙而剖析於毫釐之間者可謂至精而無可間然矣然徐而究之則所謂無彼此者乃是發明太極陰陽之混合無間不可分而二之也豈眞以爲一物而元無彼此之殊乎張子曰心也生也天也一理也其實心與性豈可謂一物而以其混合不可分故謂之一耳朱子所謂無彼此者亦恐如此且以太極爲精爲本陰陽爲粗爲末則其截然不可亂之分己是大煞明白無彼此一句特明其爲一而二二而一之義也有何大未安乎若曰太極於陰陽之精粗本末無彼此云爾則無論其於上下語脈有所不倫而朱夫子解剝圖體之際下語用字一一相貼未嘗汎論贅說故五行一陰陽則曰五殊二實無餘欠也上句言五行陰陽而下句言一之義太極本無極則日上天之載無聲臭也上句言太極下句言無極上下句句莫不皆然則陰陽一太極之解何獨不然而汎說精粗本末乎且上句獨言陰陽而不言太極則下句所謂無彼此者果何謂也必須以精與本屬太極粗與末屬陰陽然後語有下落意相襯貼而無彼此之意亦有所指而分明矣按通書動靜章一節正論此段而曰五行陰陽陰陽太極朱子解之曰此卽所謂五行一陰陽陰陽一太極者此又去箇一字而直以五行爲陰陽陰陽爲太極則豈非所謂陰陽太極無彼此者乎黃勉齋曰天道是理陰陽五行是氣分而言之則理自理氣自氣而合而言之則氣卽是理程子曰形而上爲道形而下爲器須著如此說器亦道道亦器此又非陰陽太極無彼此之證乎濂洛以下諸賢之說可考而質者若此類甚多則熊氏此解可謂得朱子之本意而不可謂之不是閑下所謂生硬不倫之甚者愚未見其爲然此必蒙蔽昏惑有所未達而然伏乞復惠詳敎俾得通曉如何 答豊原君五行之生各一其性朱子於解剝圖體也曰氣殊質異各一其性其解圖說也曰五行之生隨其氣質而所稟不同所謂各一其性也今卽此而究之則五行之性謂之氣質之性可也謂之本然之性亦可也何也金之性非木之性水之性非火之性實由於氣質之不同而就其中眞實具足而不相假借不相凌奪則莫非太極之全體自其隨氣質各自不同而言則爲氣質之性自其太極之全體無不具足而言則爲本然之性譬如天上雨落或爲井泉之水或爲溝渠之水或爲行潦之水大小淸濁各不同而其水則同是天上之雨五行之性何以異於是哉朱夫子答徐子融書曰謂枯槁之物只有氣質之性而無本然之性此語可笑蓋由不知氣質之性只是此性墮在氣質中故隨氣質而自爲一性周子所謂各一其性者向使元無本然之性則此氣質之性又從何處得來耶退溪答李宏仲書曰性非有二只是不雜乎氣質而言則爲本然之性就氣質而言則爲氣質之性今認作二性看誤矣又答李公浩書曰行於天者謂之氣具於地者謂之質氣質中必有所以然之理是性也潤下炎上等是氣質之性然非別有一性只是理在氣中而爲此物之性則不能不隨其氣而有異所以各一其性此政是論太極圖此段而語意尤詳備熟玩此兩賢之說則可以知五行之性矣 答豊原君
用起天地先
尊批所謂沖漠無朕萬象已具之語按本註亦有之今不容有疑而鄙意竊獨以爲用者流行未定之謂體者見成已定之名如亥子之間天地未判而流行不已之妙用已於此中起了將來天開地闢皆由是而肇焉此所謂用起天地先也及其旣判則天爲天地爲地而定體立矣此所謂體在天地後也且如生物形質未成而資始發育之用已先有焉及夫流形之後則各有成性而不可易是卽所謂體也至論易卦其理尤明卦爻未立之前若非先有掛揲之用如何得成八卦六劃及卦劃旣立則乾陽坤陰法象全具而定體可見是非所謂用在先體在後者乎邵子體用之意恐或如此不必引體用一源之意爲之解耳或人所謂太極動而生陽是用之起處云者似不爲無理未知如何
理發
尊批以爲是理之所發竊謂四端卽在中之理自發見於外爾若曰所發則是似者有以此發彼之意下語得無未穩耶蓋理發云者猶所謂太極動云耳今若解之曰太極之所動云爾則其於意義果無未安否鄙意以爲去一所字而改下理自發出之語則似得其義未知是否何如
栗谷曰云云
謹按無情義無造作六字本是先儒論理字之語今乃以此爲栗谷錯認之病則恐未安若曰栗谷全以理爲無情義無造作底物事而不知其實爲萬化之樞紐根柢故其言每如此云云則語意似覺無欠未知如何▩全密庵夫命之爲義兼理與氣而聖賢之言各有所主讀者亦當各就其地頭而究其指趣耳其不宜參互而混竝之也明矣何者天之生物二氣五行紛綸交錯而賦形成質有昏明淸濁之分有短長厚薄之差者命之主於氣者也
元亨利貞之理賦於形氣之中而爲仁義禮智之德者命之主於理者也雖主於理而理必有所乘之氣雖主於氣而氣必有所載之理故天道流行造化發育之際理氣混合若不可分開然其脈絡之相貫首尾之相連則固各有別而不可以相雜矣試就中庸此句而論之天卽一團渾然底理是理也乘氣流衆而賦於人物是謂之命人物各得其所賦之理以爲健順五常之德是謂之性然則在天在人雖有性命之異名而其理則豈不同條而共貫哉此子思所以洞見本原而專就理之一字上昭揭於篇首以明此道之循乎性此性之本乎天命爾何嘗雜氣而爲言乎故程子曰天所賦爲命物所受爲性張子曰天授於人則爲命人受於天則爲性夫天之所賦授卽人物之所受則是乃一串貫物事夫豈有在天爲氣而在人爲理者乎章句天以陰陽五行以下三句固以氣言然是不過言天之所以生人物人物之所以生形質者皆由於陰陽五行之流行而其所以正釋命字之義則在於理亦賦焉一句其下又曰人物之生各得其所賦之理以爲性云云所謂所賦之理卽擧命字而申言之則其以命字屬於理而不屬於氣者不亦較著矣乎章句之訓旣然矣而或問所論尤分曉曰天之所以命乎人者是則人之所以爲性也又曰天之所以賦與萬物而不能自己者命也吾之得乎是命以生而莫非全體者性也夫天之所以命乎人者卽人之所以爲性吾之所得乎天而爲性者卽天之所賦於我者則是固一理而已何必曰命字帶得氣字意思而遂以氣當之乎且謂陰陽五行四字實應命字愚意竊以爲命者乃道之流行不已者而陰陽五行卽其流行之具也恐不可以陰陽五行專屬於命況中庸之義乃專言理而不干氣事者乎大傳所謂繼善成性云者固與中庸此句同一語意然愚之竊所未安於尊敎者執事以繼字當命字以爲言氣之證故愚以爲繼之者善一句可當命字不可但以繼字當之且繼之成之雖屬乎氣而所謂善所謂性實屬乎理則善卽天理之乘氣而流行者性卽天理之具於形氣中者若但以繼字當命字而謂之氣至於人物稟性之後方始謂之理則其脈絡不相貫首尾不相連而天人之判而爲二也甚矣此愚之所以未能曉然者豈果以天命之性謂不同於繼善成性之說而曰此言氣彼言理乎或恐執事者有所未察於淺隨之本意也然來諭中引程朱子及退溪葛庵兩先生說以爲大傳所云云主意在理而不在氣子思之言實祖此而專言理也愚於是乃知高明之見本非不析於理氣之際而於鄙言亦非逈然不相入者乃於末段復反之曰天命之之字以氣言者非無稽之說也是其前後首末之敎不幾於自相矛盾乎或問性命於朱子朱子曰氣不可謂之性命但性命因此而立耳北溪陳氏曰命一字有二義有以理言者有以氣言者如天命之謂性五十知天命窮理盡性至於命此等命字皆是專指理而言及來敎所引朱子說天命之性雖氣包在中若云兼言氣則說率性之道不去云者莫不大煞明白眞有得於子思子主理言命之意而執事之必於命字下注之以以氣言三字者其於義理如何其於先賢之說如何幸深思而明敎之至於合理氣爲心之理不可將作性字看者尤所未曉夫性者何謂也非人生所稟之天理乎人旣得是理又得氣之精爽而爲處靈知覺之心則性外固無心心外固無性其混合無間猶所謂一陰一陽之謂道天生烝民有物有則者豈先有非性之理與氣相合以爲心而此心旣成之後乃有四德之性特具於其中有若四塊物自外來貯於器中者然哉夫心之所以爲一身之主萬事之原者以其所以爲心之理者有四德故也若無四德之性不可以爲心故曰盡其心者知其性也使四德之性果非爲心之理而別有所謂打成一物之理則何以曰知性而盡心耶誠以此誠之外更無爲心之理故知得此性者乃所以盡其心也今來諭曰此理雖無二塗而凝得一物之後自爲一物之理不可復剔其理於凝合之中曳轉來作性也又曰心是有些形跡合理氣自成一物而統仁義禮智之性不可剔出打成一物之理來作五常之性也是顯然以爲心之理作一理又以五常之性作一理而虛靈知覺之體顧無以異於肝肺胃腎之各成一物各具一理者矣其視心字不亦太狹小了而性之在心一如寄贅與爲心之理相對而爲主客則未知此心之所以敷於發用者是果本於打成一物之理乎抑由於所具五常之性乎心之體謂之性心之用謂之靑而情之惻隱羞惡辭讓是非喜怒哀懼愛惡欲莫非自性而發動者則心之所以爲體用者皆客之所爲也彼打成一物之理而爲之主者果何狀而何爲也孟子曰存乎人者仁義之心又曰惻隱之心仁也羞惡之心義也恭敬之心禮也是非之心智也夫仁義禮智卽性也而必以心字襯貼說去使之爲一而不欲其相離是知心者性之器性者心之理豈有凝成一物後自爲一物之理而與五常之性不相干涉之理乎又按程子之說曰心如穀種其生之性仁也夫穀種之所以爲穀種以其有生之性也若曰穀種自有穀種之理而其生之性又別一理不可喚作穀種之理云爾則其可乎哉故愚以爲合理氣之理字卽五常之性之謂也不可別而二之而謂心自心性自性也張子曰合虛與氣有性之名合性與知覺有心之名性卽理也知覺卽氣也則張子固以合理氣之理字作性字看矣其果不可指心之理而喚做性乎聖鐸竊恐執事欲致辨於心性之界限而推之太過便二者分離乖隔不合不一而不知名言之差其弊將至於懸空說性莽蕩無交涉矣如何如何 答李顧齋
反復來諭不但心說卽天命之說其指趣所歸亦不至大相懸隔而其所以不同者有二執事則每以立天之道陰與陽一句爲話頭曰言天者必以氣言理者命字當以氣言而不可以理言聖鐸則以爲子思之言主理不主氣命字之義雖氣包在其中而所主者旣是理則不可以氣而專言之此其不同之一也執事則以繼善之繼字當命字而据通書中旁注氣字於繼字之下及丘氏說降衷之降天命之命卽繼字之義者以爲命字言氣之證聖鐸則以爲降字繼字雖屬乎氣而衷也善也卽指理而言則不但降與繼爲命字之義衷字善字實天命之骨子周子所以旁注氣字於繼字下者固無議爲而丘氏之以繼之者善謂同於天命之性而以繼字當命之義則其將又以善字當性之義乎是不明夫在天在人其理雖一而善與性字義界限不能無天人之殊也淺料於此尋常所未安者而執事以爲辨析精切鑿鑿中▩此其不同之二也大抵命字泛論之則可以兼理氣言而偏言之則有當屬之理者有當屬之氣者中庸此一句卽所謂當屬之理者也何則以其所主者理而不主於氣非謂其元無氣而獨有理也以執事所引朱子諸說觀之其曰天命之性只是主理而纔說命則氣亦在其間曰天命之性是專言理雖氣包在其中說理義較多此其所謂兼理氣言者而其所主則在於理也其曰旣有天命須是有氣質曰天命之性不雜氣質而言若云兼言氣則說率性之道不去此則又似以天命專屬理一邊而與氣質各自爲一物也此與執事之專以氣字旁注命字之下者其同異得失何如也或問於朱子曰性命如何分別曰性是以其己定者而言命是以其流行者而言命便是水恁地流底性便是將椀盛得來大椀盛得多少椀盛得小淨潔椀盛得淸汚漫椀盛得濁朱子說止北以此言之水雖有流動盛椀之異而其爲水則一也性命雖有己定流行之異而其爲理則一也豈可以在天流行底謂之氣而獨以在人己定底謂之理乎且理不流行則氣安得以自運乎是故從古聖賢之言命率多以理言之而獨於所謂昏明淸濁厚薄長短之命始謂之氣耳然則執事之以在天之命專屬於氣在人之性獨屬於理者殆與朱子若先儒之言異矣愚之所謂脈絡不相貫首尾不相連天與人判而爲二者莫無可思而不可以遽斥否若夫以元亨利貞之德於穆不已之命皆謂之言氣而不言理者皆鄙陋之所疑而非卽今所稟之本指故不暇究請至於孟子之言性比大傳疏略云者朱子之意特以孟子只就人生稟受後成之者性一截爲言而不去上面一截一陰一陽之謂道以下流行賦與處統言之故曰不曾推原源頭云爾非特爲其不言人物之有異也且孟子嘗以犬生與人之性不同爲言則豈嘗獨論人身中純粹之性而不言人物稟賦之殊耶竊恐執事者欲引以爲在天言氣之證而未暇究夫朱夫子之本意也如何如何前書答鄙書中天之生物二氣五行止命之主於理者一段處所謂或以氣化而賦於凡品或以理命而賦於聖賢使賢智賦得仁義禮智之性衆生稟受昏濁短薄之氣云者與鄙書所稟者大相逕庭聖鐸雖蒙學淺識
豈敢創出如許無倫之說以溷先生長者之鑑乎或恐高明於鄙書略不留意垂察而不能盡乎淺陋之辭意也伏望更取鄙書特爲照勘且許還擲使妄謬得以自考苟有如尊敎所駁者謹當肉袒負荊請伏妄言之罪於門下心說則兩紙所諭大抵皆明白該悉使小子之惑稍覺開通至於所謂心裏自具五性之理非必取他臟之理而兼統之也者尤爲要約敢不就此玩繹以爲異日請益之地乎然鄙意猶以爲以五常分配五臟者自是一義若夫所謂心者乃人之所稟陰陽五行靈明神秀之氣而爲一身之主宰者非但如他臟之獨稟一氣而爲一物者比故其升降出入雖不外乎方寸之中而其包涵衆理該括萬事則肝肺脾腎耳自百體之理何莫非這箇中所具者也是豈可以五行分配之故而郤謂心之氣火心之理禮與金木水土之氣仁義智信之理本不相干而特以其光明發揚底物事故可以旁包兼總於他臟耶此則執事己知其不然而猶復云云者蓋恐學者偏主五行分配之說則其言之流弊未必不至於此故敢以此桇疊之說更質於座下耳所諭心之爲物果有四方之各色及五臟稟氣不稟理之疑高明之所未瑩鄙陋何敢容喙然旣蒙謬詢敢以率爾爲嫌而不獻疑以求訂乎朱子所謂心如界方一面靑一面赤一面白一面黑者以心之爲體包藏仁義禮智之理而其用之流行四通五達無所隔閡云爾非眞以爲心之形狀果有靑赤白黑四方之色也且天下之理不出五行則七情之分配五臟固也而氣之所在理無不在則豈有稟氣而不稟理之理乎肝有肝之理肺有肺之理脾有脾之理賢有腎之理而特其全體大用之總腦處不外乎心此心之所以爲大而理之所以無所不體也今若以心具五性之故而疑他臟之不稟五性則恐或近於執一之論如何如何末段所示與令姪酬酢之語恐令姪誤聽而誤達之也令姪來此時適語及於此以爲尊叔父丈以分配之說爲主而言肝屬仁心屬禮肺屬義腎屬智則仁義禮智非心中本具之理特以心臟屬火火乃光明發動之物故心於肝肺腎之理自然兼總而旁通若然則仁不包四德而禮郤包仁義智又朱子之訓仁義不當云心之德心之制而當云肝之德肺之制也云云此外無所謂肝包心肺腎之語且夫肝包心肺腎云者於高明之說不相對値聖鐸何故爲此無義無味之言以犯妄謬之罪乎 答李顧齋
明德之訓所示答權潤語恐得其義但所謂心之美稱及與心字大同小異云者無乃主張心字太過否言心則性情固統攝在其中然本體之虛靈者固心也而有時而昏蔽者亦心也豈可直以心當明德乎必於虛靈之中萬理明瑩無時而昏昧然後可謂之明德必如章句所謂人之所得乎天以下二十字然後可以爲明德之訓故愚意竊謂明德不可專以心言亦不可偏以性言孟子所謂良心本心仁義之心此卽大學明德之謂也如何如何所得二字以德言之訓可謂約而盡矣 答鄭篪叟
前書鄙說非敢爲景文左袒亦非謂學者不讀經書而專用力於程朱書也區區淺見以爲以道理本體言之則固有源而後有流以學者求道之序則古人不曰沿流而溯源乎不然程夫子何不以易詩書春秋爲初學入德之門而曰先大學次論孟次中庸而後讀六經也朱呂二夫子何爲褎輯周程張文字纂近思錄以爲四子之階梯也退陶老先生之節要朱書也亦曰聖人之敎詩書禮樂皆在而程朱稱述以論語爲最切然今人之於論語但務誦說而不以求道爲心者爲利所誘奪也則使學者感發與起而從事於眞知實踐者舍朱書何以哉由是而旁通直上溯伊洛而達洙泗無往而不可云云古語曰衆言淆亂折諸聖又曰不敢自信而信其師夫程朱呂三夫子及我退陶先生非聖賢之徒乎後學之所當折衷而尊信者非三夫子若退陶先生乎其爲學者指示門路次第若是其分明而今足下乃曰先讀六經次讀四子又曰學問之道不必先看洛閩書是何與程朱退陶之訓大相戾也洛江梢工之喩浩瀚縱橫令人眩掉而不知所以爲對然亦有所不然者居於太白璜池者固順流而達于金海本在金海者欲求洛水之源則不得不自龍塘而上溯未知以何術舍下流而超然驟到於穿川鹿門之上也恐無是理也以道學擬之生知安行之聖卽居在璜池者類也生來坐在源頭上順水而行沛然自在固其勢也自中人以下皆居在金海者類也不涉其流則不得其源觀津河豊以上固有淺狹多石不易行舟者然亦在其人立志之如何苟有意於必窮源頭則雖淺揭深厲分寸沿溯何不可之有又何不能達之足慮耶順流者猶有捲裳摭挑之辛苦則溯流者獨不可喫耐此辛苦耶若其無志則遇險絶處劃而不進順流溯流者等耳何擇之有大凡讀書爲學先其易而後其難始於明白而入於深奧則門路不差而工夫簡省若不屑程朱平易明切文字而直取上古灝噩簡奧之書率意輕讀則雖白首兀兀唇腐齒落吾恐其於句讀文義亦有所不通況進於此者乎是故漢魏以來諸儒從事專門之學者如梁丘王弼之於易公羊穀梁之於春秋毛鄭之於詩夏候之於尙書用力亦勤矣無論其道理卽其文理語句往往誤讀而錯解者不止一二得洛閩諸夫子之出然後六經四子之旨煥然復明今之學者若無諸賢注解則雖欲讀經得乎由此言之濂洛諸書豈可以爲末後之事而不汲汲讀之乎但不可舍四子而先讀此也景文之意亦豈出於此耶若左右本意爲末世文辭之煩絮而欲挽回典誥爾雅之風則鄙陋有不敢容議至以爲學問之道必如此而後爲得其序則恐先後倒置階級錯謬此子游末也本之則亡之言所以見非於卜子也願足下幸勿以死自矢廓開城柵延納芻蕘之言以爲求助之地如何如何 答權一甫
別紙 心經疑義
來敎所謂存養專言則該動靜對省察則屬之靜此語與鄙意同而但所謂雖不見聞亦不敢忽實屬靜一邊此句竊聽瑩看雖字亦字則其語意正謂常存敬畏之心雖此不見聞無緊要處亦不敢萌易慢之心云爾此實兼包動靜而言恐不可專屬之靜也
戒懼一段朱子固以爲大綱說又以爲統禮工夫則其所以無時無處無動無靜常存敬畏而不敢忽者固子思朱子之正意然旣曰不睹不聞則所謂不睹不聞者非靜而何其意蓋曰道不可須臾離故君子持養之工未嘗少懈至於耳自所不及思慮所不發之前而亦莫不戒愼恐懼不待其耳聞自見然後用其力云爾則其謂之靜時工夫也何害之有蓋專論此一段則固是大綱說固是兼動靜而以戒愼不睹恐懼不聞對下文愼獨而言則豈不爲靜時存養之工乎來諭亦云對愼獨則屬靜工夫而末乃以鄙說所謂雖不見聞亦不敢忽屬靜一邊者爲非無乃自相牴牿乎若以不睹不聞之地不可屬之靜則高明所謂靜工夫者指何者而云也章句中雖字亦字固如高明所論然以鄙見則此乃君子平常持守之工不但於日用動作處雖無形無聲至靜至寂之中亦不敢忽耳卽此二字尤見其爲靜工夫也故或問以戒懼愼獨兩節爲兩事而又以卒章潛雖伏矣屬愼獨不愧屋漏屬戒懼至於章句分章之下亦曰次言存養省察之要則朱子之意亦未嘗不以戒愼以下屬之靜也夫所謂統體工夫者自道不可離以下而統言之爾非以不睹不聞之處戒愼恐懼者爲包動靜也兒子所論單言戒懼則包動靜而賺言不睹不聞則爲靜工夫者恐未爲大謬也如何如何
西山所謂仁義禮智之理根於性者爲未安
西山非不知仁義禮智卽性之四德而觀其語意以仁義禮智之理爲道心聲色臭味之欲爲人心而所謂根於性者卽朱子所謂原於性命之意也以此活看則其語雖若未安而意實無可疑矣朱子說一時偶爾揣想有若與此相似者故有所云云此則妄率之罪也然近見性理大全中有答或人之問曰有些道理根於一性渾然至善故見於發用者無非善底道理以此準之則西山語未見其爲不是而與朱子行狀中語亦未知其爲異也如何如何
天理人欲同行異情觀知言本意則與上款語皆就一人性情體用上說
一人之心固有發於天理者亦有發於人欲者然以同行異情四字觀之則須就二人上說方爲明白何者好貨
好色之心聖賢與衆人同也而聖賢則一循天理之公衆人則每徇人欲之私此其所以異情也若以一人之心言則其發也非天理卽人欲何以比幷而見其同見其異乎故孟子好貨好色章下小註輔慶源胡雲峰說及心經附註朱子說下小註潛室陳氏說亦皆以聖賢與衆人相對爲言蓋以如此然後同行異情之義分明可見故也朱子說中引五峰此說者蓋謂人心之知覺一而已矣而毫忽之間從這邊去則爲天理從那邊去則爲人欲其分界之處正學者所當剖析而必循天理無徇人欲云爾未必以五峰之言爲只就一人之心言之也偶閱性理大全其中有一條朱子答人問五峰此言曰同行異情者如飢食渴飮等事在聖賢皆天理在小人皆人欲所謂同行異情者如此則朱子亦以二人言之矣
腔子外是滿腔子物事
此一條推說甚好但語脈之間似有叢雜之累如而氣灌注無毫髮之空隙脈息關通而無頃刻之停歇二句雖就程子認得爲已之言形容說出然上文方言惻隱之心無內外無限量而忽然以人身血脈周流之語不作譬喩而直接其下意雖相通而語不相貼其下所謂病風患痺之人以人之手足痿痺者爲言而繼之曰一膜之外便成胡越則又似以忍心不仁之人言之矣一語之間上下血脈不屬且一膜之外氣己不貫亦似不成語若非高明偶失照管則愚見有不逮而然幸望後書明以回敎
心無出入
此旣有退溪先生說而西厓愚伏之言亦然則固非末學淺見所敢容喙然區區妄意竊以爲心之神明雖變化不測而其實不離乎方寸之內也所謂出者非眞逐物而走出於外也所謂入者非眞自外而還入於內也譬之銅鏡在此而光明之中物象自來照爾范淳夫之女所謂心豈有出入者恐不過如此如老先生所言則特因此推說以明心體之廣大無外耳非謂淳夫女所見果出於此也且所謂一人之心卽天地之心充滿天地之間其言大范女雖明慧過人其識恐不及此也朱子曰此女當是實不勞攘故云無出入而不知人有出入卽此觀之又似此女但據己心之安靜不放逸者而認以爲無出入爾豈可遽謂其能識心體如許廣大而有此言乎謬見如此不覺其僭而敢以貢疑來說中自孟子出入二字以下至不害其爲出也一段精切明白令人歎服但其下云云若汎論心體則語意固好而於心無出入之義不甚著緊恐推說太過未免汎濫之疵耳如何
敬義齋記中貫一之義
兒子所論本出於老物之妄見今見所諭始覺其枸局不活甚愧甚愧蓋天下理一而已大易之訓曾思之傳太極之論雖其立說各異而其理未嘗不相貫朱子所以因此而悟夫天下之理雖有幽明鉅細遠近淺深之不同而其實一貫而未始有異者也因明者之開示得有所發豈非賜耶感拜感拜
敬靜合一
主靜有兩說濂溪所謂主靜是君子修之以上事故曰無欲故靜夫無欲而靜非聖人不能也如明道延平所謂靜坐及朱張諸先生所謂主靜方是學者事然偏於求靜則恐陷於坐禪攝念之失故伊川提出敬之一字以爲敎其實主靜便是持敬工夫高明所謂主靜之外非別有持敬之工者是也但其下又謂敬則便靜只是一事若謂敬而後能靜則成兩截云云而以程子敬則自虛靜之說爲證此則愚不能無疑焉夫敬者工夫也虛靜者敬之效驗也以持敬與主靜爲一事則可謂敬則便靜只是一事則是竝工夫效驗而一之也工夫所到必有其效則固不可分而二之然以爲一事則恐爲下語之病耳且敬則便靜語傷急迫夫以常人紛亂之心而一下持敬工夫便望其虛靜無欲之效豈不難哉必須工去積累涵養純熟然後始可到虛靜地位則所謂敬而後能靜者愚則未見其爲病而反覺意味之平實也如何如何
理氣無限量
鄙意以爲理則固無限量之可論若氣則謂之無限可也謂之有限亦可也何者以陰陽往來消息歷千萬古而無一刻停息則可謂之無限量而但其所以旣往而復來旣消而復息者乃生生之理自然不窮而然也非旣屈之氣復爲方伸之氣也以呼吸言則呼之氣非吸之餘氣也以潮汐言則方漲之潮非旣退之潮也草木榮悴人物生死至於天地之終始莫不皆然則謂之有限量不亦可乎勉齋所謂理無際而氣有限者豈無所見而云爾哉但以橫看地頭言則誠未知其有所窮極朱子所謂論其極將何處做極者豈亦以地頭而言耶淺見必謬更賜指諭爲仰 答李景文
或者問氣之始亦有淸濁耶云云國鵬答曰云云
以陰陽五行之本體而言則陰濁陽淸水火淸而金木土濁然陰陽五行又各自有淸濁偏正紛綸交錯有萬不齊故人物之稟受或得其正且通者或得其偏且塞者而正通之中又有昏明强弱聖愚賢不肖之不同偏塞之中又有斷鳳龜龍之靈鸚鵡猩猩之能言及虎狼蜂蟻豺獺雎鳩之通於一路者而草木雖全塞不通其中亦有松栢之正萓莢指佞之異此皆由於二五之氣淸濁純駁不一故也何可謂純一不雜乎且陰陽無始動靜無端未知以何者而爲氣之始乎若以天地肇開之初爲氣之始則天地之氣固有古今醇醨之不同然其淸濁偏正則自兩儀之立而已然或人之說愚未知其可也但左右所謂理亦有善惡之理者似錯會於大意程子所云人生氣稟理有善惡者朱子以理字爲當如合字義看然則所謂有善惡謂氣稟然爾豈理之云乎又所云太極之氣者亦未安太極只是理謂之太極之氣則無乃近於老莊所謂太一太初之說耶太極圖說所謂太極動而生陽靜而生陰者特以理有動靜故氣有動靜而陰陽立焉爾非以太極爲氣之未判者也且太極謂之具陰陽之理則可謂之包含淸濁之氣則不可幸取太極圖說熟玩而深究之如何 答南雲擧
제산 선생 동방록
달수 주) 영조 11년 증광시에서 42명이 급제하였는데 안동 출신으로 제산선생(당시 52세)과 삼산(三山) 유정원(柳正源)(당시 33세) 양파(陽坡) 유관현(柳觀鉉)(당시 44세) 해저의 김경필(金景泌)(35세).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 (당시 25세)로 같이 급제하였다.
동방록을 대강 정리하여 관직을 수록한다
박필리(朴弼理) 경옥(景玉) 1687 반남(潘南) 갑과(甲科) 1[장원(壯元)]등 승지
유동원(柳東垣) 숙야(叔野) 1688 진주(晋州) 갑과(甲科) 2등 판결사(判決事)
오명서(吳命瑞) 신경(信卿) 1688 해주(海州) 갑과(甲科) 3등 경상감사
김성탁(金聖鐸) 진백(振伯) 1684 의성(義城) 을과(乙科) 1등 제산(霽山) 선생.
김범갑(金范甲) 중만(仲萬) 1690 안동(安東) 을과(乙科) 2등 현감(縣監)
주 기(朱 杞) 중량(仲良) 1683 전주(全州) 을과(乙科) 3등 함경판관(咸鏡判官)
신명좌(申命佐) 계량(季良) 1685 미상(未詳) 을과(乙科) 4등 예조좌랑(禮曹佐郞)
유정원(柳正源) 순백(淳伯) 1703 전주(全州) 을과(乙科) 5등 삼산(三山) 대사간
김경필(金景泌) 원중(源仲) 1701 의성(義城) 을과(乙科) 6등 해저 팔오헌 손자
심경선(沈景先) 사행(士行) 1700 풍산(豊山) 을과(乙科) 7등 승문원정자(承文院正字)
박필간(朴弼幹) 계직(季直) 1683 반남(潘南) 병과(丙科) 1등 승지(承旨)
홍상한(洪象漢) 운장(雲章) 1701 풍산(豊山) 병과(丙科) 2등 예조판서
이창의(李昌誼) 성방(聖方) 1704 전주(全州) 병과(丙科) 3등 좌의정(左議政)
이징규(李徵奎) 천장(天章) 1682 연안(延安) 병과(丙科) 4등 지평(持平)
박창윤(朴昌潤) 군탁(君擢) 1699 밀양(密陽) 병과(丙科) 5등
박해윤(朴海潤) 여중(汝重) 1696 밀양(密陽) 병과(丙科) 6등
황최언(黃最彦) 양백(良伯) 1711 창원(昌原) 병과(丙科) 7등
유관현(柳觀鉉) 용빈(用賓) 1692 전주(全州) 병과(丙科) 8등 양파(陽坡) 형조참의
오수채(吳遂采) 사수(士受) 1692 미상(未詳) 병과(丙科) 9등 대사헌(大司憲)
이성중(李成中) 사득(士得) 1706 전주(全州) 병과(丙科) 10등 이조판서(吏曹判書)
유언국(兪彦國) 군필(君弼) 1701 미상(未詳) 병과(丙科) 11등 병조참판(兵曹參判)
서해조(徐海朝) 종지(宗之) 1691 연산(連山) 병과(丙科) 12등
윤지태(尹志泰) 대첨(大瞻) 1700 칠원(漆原) 병과(丙科) 13등 사간(司諫)
정순검(鄭純儉) 성종(聖從) 1710 동래(東萊) 병과(丙科) 14등 대사간(大司諫)
심 곡(沈 瑴) 군옥(君玉) 1695 청송(靑松) 병과(丙科) 15등
윤동준(尹東浚) 사심(士深) 1693 파평(坡平) 병과(丙科) 16등 대사간(大司諫)
이형만(李衡萬) 평일(平一) 1711 경주(慶州) 병과(丙科) 17등 승지(承旨)
허 추(許 錘) 덕칭(德稱) 1697 양천(陽川) 병과(丙科) 18등 승문원정자(承文院正字)
이창유(李昌儒) 이진(而珍) 1713 전주(全州) 병과(丙科) 19등
김광국(金光國) 대관(大觀) 1709 안동(安東) 병과(丙科) 20등 병조참판
임상원(林象元) 언춘(彦春) 1709 나주(羅州) 병과(丙科) 21등 부사(府使)
정하언(鄭夏彦) 미중(美仲) 1702 연일(延日) 병과(丙科) 22등 승지(承旨)
박홍준(朴弘儁) 자의(子毅) 1704 반남(潘南) 병과(丙科) 23등 사간(司諫)
김 운(金) 구이(久而) 1694 부령(扶寧) 병과(丙科) 24등 첨지사(僉知事)
민수언(閔洙彦) 성원(聖源) 1686 여흥(驪興) 병과(丙科) 25등 정언
임 원(任 遠) 치숙(致叔) 1688 풍천(豊川) 병과(丙科) 26등
이이장(李彛章) 군칙(君則) 1708 한산(韓山) 병과(丙科) 27등 대사헌(大司憲)
이상정(李象靖) 경문(景文) 1711 한산(韓山) 병과(丙科) 28등 대산(大山). 예조참의
김시찬(金時粲) 치명(穉明) 1700 안동(安東) 병과(丙科) 29등 부제학(副提學)
안택중(安宅重) 인로(仁老) 1695 순흥(順興) 병과(丙科) 30등 승문원정자
강봉휴(姜鳳休) 의백(儀伯) 1694 금천(衿川) 병과(丙科) 31등 헌납(獻納)
김 굉(金 硡) 대숙(大叔) 1703 경주(慶州) 병과(丙科) 32등 지평(持平)
첫댓글 낙민선생님! 이 귀한 자료를 나누어 주시니 정말 감사하고 감사합니다. 정신차리고 읽어서 잘 배우겠습니다.
김교수님 오랫만입니다. 금년에는 한번 만낫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