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다.”(루카 21,28)
오늘 복음 말씀은 어제 복음에 바로 이어지는 루카 복음의 말씀으로서 예수님은 사람의 아들이 오는 날, 마치 그 날이 세상의 종말과도 같이 다가와 모든 이들을 혼란에 빠뜨릴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사실을 말씀하시면서 구약의 인물 노아와 롯의 경우를 들어 이야기하십니다. 우선 노아의 경우, 노아는 창세기 6장에서 7장에 등장하는 인물로서 성경은 노아를 일컬어 ‘의롭고 흠 없는 사람’이라고 칭합니다. 하느님과 함께 살아가던 노아는 모든 이가 죄로 타락한 시기에 유일하게 의로운 사람으로서 40일간의 홍수로 세상 모든 것을 쓸어버리려는 하느님의 뜻을 미리 알고 방주를 만들어 목숨을 구한 유일한 사람입니다. 한편, 롯의 경우는 창세기 19장에 등장하는 인물로서 죄의 도시 소돔을 하느님께서 불벼락으로 벌하실 때, 유일하게 구원받은 인물입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바와 같이 불타는 소돔을 뒤로 하고 자신을 구원해 주신 하느님의 뜻을 따라 뒤를 보지 않고 앞으로만 걸어가야 하는 그 때, 롯의 부인은 뒤를 돌아보고 결국 그 자리에서 소금 기둥으로 변했다는 창세기 19장의 이야기에 등장하는 인물이 바로 그 롯입니다. 이처럼 오늘 복음의 예수님은 구약의 두 인물 노아와 롯을 등장시켜 하느님의 나라가 오는 때가 마치 그와 같을 것이라고 말씀하시는데, 예수님의 이 말씀은 곧 하느님의 나라가 오는 때가 구약의 가장 큰 하느님의 벌이 내린 시기, 40일간의 홍수로 세상 모든 것을 쓸어버린 그 때, 그리고 하늘에서 불벼락이 내려 소돔을 멸망시킨 그 때와 같을 것이라 이야기하고 계신 것입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이 노아와 롯을 등장시키며 그 날에 대하여 이야기할 때, 그 말을 듣고 있던 모든 이들은 그 인물의 등장만으로도 그 날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의 마음에 사로잡혔을 것입니다. 노아 때 홍수로 모든 사람이 죽었던 것처럼 그 날 역시 그러한 일이 벌어진 것인가, 또 소돔을 불벼락으로 없애버리던 그 때처럼 그 날 역시 그러한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공포에 떨었을 군중들. 그렇다면 예수님은 왜 이렇듯 사람들로 하여금 공포심을 일으키는 구약의 인물들을 등장시키셨던 것일까?
그 이유는 우리가 어제 복음 말씀에서 들었던 것처럼, 하느님의 나라는 우리의 이해 방식을 뛰어 넘어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만의 고유한 방식으로 이 세상에, 이미 우리 가운데 와 있다는 사실에서 기인합니다. 곧 하느님 나라의 존재 방식은 하느님만의 특별한 사랑의 방식으로 이 세상 안에서 그 사랑을 실천하는 이들의 눈에는 이미 와 있는 것으로 보이며 그들의 사랑의 실천 안에서 이미 하느님의 나라는 우리의 곁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또 다시 반복하여, 그러나 조금은 다른 어조로 지금 이 순간 이미 와 있는 하느님의 나라, 그리고 그 나라의 도래가 지금 이 순간, 우리의 삶을 변화로 초대하고 있다는 사실을 급박한 어조로 예수님은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도래. 그리고 그 나라의 도래가 우리에게 요청하는 삶의 변화에 대한 급박하고도 절박함. 오늘 복음의 예수님의 말씀은 바로 이 사실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한편, 오늘 독서의 요한 2서의 말씀은 하느님의 진리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하느님이 주신 계명, 곧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을 지키는 이들임을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요한 2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그대에게 써 보내는 것은 무슨 새 계명이 아니라 우리가 처음부터 지녀온 계명입니다. 곧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우리가 그분의 계명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고, 그 계명은 그대들이 처음부터 들은 대로 그 사랑 안에서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2요한 5-6)
세상의 모든 아름다움에 감탄하면서 정작 그 아름다운 모든 것을 창조한 하느님의 진리를 알아보지 못한다면 우리는 마치 복음의 예수님의 말씀 속에 등장하는 사람들, 곧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그저 무서운 세상 종말처럼 맞이하는 사람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 우리 곁에 와 있는 하느님 나라, 그 나라가 우리 각자에게 아름다움으로, 선함으로 그리고 진실됨으로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 있음에도 우리가 눈과 귀와 마음을 닫은 채 그것을 외면한다면 우리는 결국 하느님의 나라를 알지 못한 채 그저 두렵고 무서운 그래서 피하고만 싶은 세상의 종말을 맞이하는 것과 다를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면에서 오늘 화답송의 시편의 말씀은 어떤 이들에게 하느님 나라의 진리가 드러나게 되는지, 우리가 어떻게 행동할 때 하느님 나라의 진리를 깨닫게 되는지를 알려줍니다.
“행복하여라, 온전한 길을 걷는 이들, 주님의 가르침을 따라 사는 이들!”(시편 119(118),1)
“행복하여라, 그분의 법을 따르는 이들, 마음을 다하여 그분을 찾는 이들!”(시편 119(118),2)
오늘 화답송의 시편의 이 말씀처럼 주님의 가르침과 그 분의 법을 따르는 이들, 곧 네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라는 사랑의 계명을 실천하는 이들은 참 행복한 이들이며 그들에게 하느님 나라의 진리가 드러나며 그 진리를 통해 하느님의 오심을 합당하게 준비하게 된다고 시편은 이야기합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오늘 화답송의 시편의 마지막 구절의 말씀처럼 눈을 열어 주님의 놀라운 가르침을 바라보아야 한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오늘 독서의 요한 2서가 이야기하는바 그대로 사랑의 계명을 실천하는 삶, 곧 내 곁에 가난한 이웃에게 내가 가진 것을 나누는 사랑의 실천이야말로 부활하신 예수님께 받은 사랑을 돌려드리는 것이며 이 세상에서 하늘 나라를 구현해내는 하느님의 특별한 사랑의 방식입니다. 오늘 복음환호송의 말씀처럼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 이미 우리 곁에 와 있는 하느님의 나라를 바로 알아보고 그 분이 우리에게 주신 사랑의 계명을 온전히 지켜나갈 때, 하느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에게 당신의 사랑을 넘치도록 베풀어 주실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가 여러분의 삶 안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이웃에게 실천하여 여러분의 삶이 이미 이 세상에 온 하느님의 나라를 구현하는 삶을 이루어 가시기를 언제나 기도하겠습니다.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다.”(루카 21,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