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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축기
안 수 길
멀리서 보면 흡사 누워 있는 소 형국이었다. 밋밋한 등어리하며, 불룩한 배하며, 더욱이 지금은 황엽(黃葉)의 늦가을, 그것도 해질 무렵이라 낙조를 받아 함빡이 짙은 산 전체는 그 모습이 그대로 누워있는 누른 소였고, 그것도 기름진 암소였다.
누가 짓든 그 산 이름을 소를 두고 생각할밖에 없겠으나, 와우산(臥牛山)이란 평범하면서도 그 산을 가장 인상적으로 드러낸 이름이었다. 더욱이 소를 치고 돼지를 기르는 목장이 그 산을 배경으로 그 기슭에 자리를 잡고 보매, 와우산은 그 이름과 더불어 한층 더 생채를 내는 것이었다.
밖에 갔다 돌아올 때마다, 언제이고 찬호는 처음에는 멀리 작게 바라보이다가 걸음을 따라 점점 커지는 와우산의 모습과 더불어, 그 이름을 재미있게 생각하는 것이었으나, 오늘은 멀리 두만강을 건너 충청도에서 모셔오는 귀중한 손님을 앞세우고 가는 터이라, 몸이 가볍고 마음이 흐뭇하여 바라다보이는 와우산이 한층 더 정답게 여겨졌다.
손님이란 씨돝[種豚] 칠십 두였고, 찬호가 손수 논산 종묘장에 가서 사가지고 오는 것이었다.
여드레 동안의 긴 기차여행에도 한 마리의 사상이 없는 것이 첫째 찬호를 기쁘게 한 것이었으나, 그것은 또한 그가 돼지를 실은 화물차바구니에 혼자 올라앉아, 돼지와 함께 수송되어 오면서 그 옆에서 손수 그것들을 보살피었고 가지가지로 가꾸었던 고초의 보람이기도 하였다.
고초로 이른다면, 이번 것은 찬호의 사십 평생에 일찍 기억에 없었던 것이었으나, 말을 하려야 제가 부르고 제가 받아쓰지 않아서는 안 되는 어두컴컴한 화물차 바구니 안에서 돼지와 함께 자고 먹고 놀고 하는 사이에 얻을 수 있는 동물의 가지가지 습성에 대한 지식과 아울러, 이 누추하기 이를 데 없다 하는 동물한테도 깨끗하고 직한* 일면이 있는 것 등이 발견되어, 이번 여드레 동안의 체험은, 그가 일찍 학교에서 축산과(畜産科)의 학업을 전문으로 연찬한 수삼 개년의 시간에서 얻은 지식에 몇 배 되는 귀중한 것을 얻을 수 있었다. 돼지에 대한 애정이 더욱 그랬다. 짐승을 동물로서가 아니라, 사람의 자식과 마찬가지로 사랑할 수 있는 감정은 목축하는 사람의 신경이라야겠으나, 이번 여행에서 찬호는 그가 목축인의 자격을 십분 갖추고 있다는, 것을 시험 할 수 있은 것이 무엇보다 유쾌하였다.
돼지는 젖이 갓 떨어지고 먹이살이 막 붙으려는 무렵의 버크셔 새끼였다.
주둥이가 쭈뼛하고 등어리로부터의 밋밋한 선이 궁둥이 쪽에 와서 여유있게 퍼진 몸매, 거기에 날렵한 꼬리를 홰홰 내저으면서, 우삣주삣 밭은 다리를 움직이며 꿀꿀거리는 양은 아닌 게 아니라 사랑스러웠다.
그러므로 그는 수송 도중, 아무런 정거장에나 되는대로 팽개쳤다가 생각나는 때에 와서 끌어가는 화물차 바구니가 역역에 닿을 때마다 미리 준비하여두었던 물지게를 둘러지고 우물을 찾거나 수도에 가서 맑은 물을 길어다 볏겨! 같은 사료를 타서 먹이는 일로부터, 정강이까지 쌓인 배설물을 쳐내는 인부들의 고역까지를 기꺼운 마음으로 행할 수 있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바구니 한 귀퉁이에 볏짚을 높직이 깔아놓고, 그 위에 담요를 덮고 자는 그에게, 돼지가 달려붙어 담요를 물어 벗기고 가슴패기를 짓밟는 것 같은 곤욕을 당할 때에도, 허 이것들 배고파 그러는 게로군, 하고 너그럽게 웃을 여유를 가질 수도 있었다. 이럴 때에는 차가 정거장에 닿기 무섭게 물지게를 지고 뛰어내리는 것이었으나, 한번은 새벽 컴컴한 때라, 부근에 우물이 얼른 눈에 띄지 않기에, 기관차 급수용 탱크에 물을 빌리러 갔다가 젊으나젊은 급수부한테 수모를 당한 일까지 있었다.
불쾌하기 짝이 없었으나, 그러나 물은 얻을 수 있어, 다리와 물통 둘이 각각 제멋대로 노는 서투른 걸음을 다그쳐 차 바구니 문을 열었을 때, 문 옆에 우르르 모여드는 돼지, 찬호는 그때 왈칵 오졸오졸 기름이 조르르 흐르는 그 등어리들을 한목에 껴안고 싶은 애정을 강렬히 느꼈다.
저희를 생각해주는 줄 알고 저희를 위하여 애쓰는 사람에 대하여 감사의 뜻을 표할 줄 아는 돼지ㅡ이것을 한갓 주림을 채우려는 극히 동물적인 본능의 발로라 언하*에 물리친다면 문제도 없겠으나, 그러나 찬호는 수년 전 그가 가르치던 학교 생도들의 행장(行狀)과 비교하여 도리어 동물적 본능을 억압하고 영적(靈的) 세련을 갖추었다는 것으로 만물의 영장을 자처하는 인간의 심성이 돼지와 더불어 얼마나 나은가 이때에 잠깐 생각하였다.
감상임에 틀림이 없으나, 그러나 일찍 교원생활에서 실패 본 쓴 경험을 가지고 있는 찬호로서는 품어봄직도 한 생각이었다. 아이들을 극진히 위했던 그였기에 더욱 그랬다.
사실 아이들을 위한 점에 있어는 우러러 부끄럼이 없었던 그였었다. 그리고 뜻이 굳건하였다. 그러나 아이들은 그것을 몰라주었다. 그것은 그 당시 아이들이 그리 즐긴다고는 할 수 없는 농업 선생, 그것도 학과인 것이 아니라 실습을 담당한 선생인 탓만도 아니었다. 을종 농업의 학력밖에 없는 그였으므로, 그의 학력을 머리에 두고 선생으로서의 자격을 인정하지 않는 점도 아니었다.
오히려 그 사립중학교에는 전문 출신 교사는 이삼 명밖에 되지 않았고, 교장을 비롯하여 간부 교사는 거의가 학력이 박약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학교 창립 시대부터의 근속자거나, 경영상 파란이 많던 그 학교의 운명과 함께 쓰고 험한 길을 걸어온 공로자들이었다.
거기에 그들은 삼일운동 전후, 간도에 망명 해 있는 지사(志士)들이라, 거의가 남에게 감격을 줄 수 있는 웅변가들이었다. 조리 있고 감격적인 말솜씨와 더불어 같은 교과서를 몇 해씩 곱씹어 가르치는 사이에 얻은 훌륭한 교수 방법은, 햇내기 전문 출신의 멀리 따를 바가 못되었다. 아이들은 그들의 교수 방법과 더불어 그 공로와 지사로서의 한 마디, 한 행동에 자연히 존경을 가지었으나, 찬호는 이 두 가지에 전부 실격이었다. 첫째 그는 공로라고 지목받을 것이 없었다. 만주국의 교육 방침이 근로(勤勞)의 방향으로 기울어질 때 거기에 순응하기 위하여 학교 당국이 청해온 것이 그였었다. 실과의 전문 출신도 초빙 안한 바 아니었으나, 빈약한 봉급으로 만주국 정부가 설치된 당초의 호경기 시절인 당시 사립학교 교사로 접어드는 젊은이가 흔하지 않았다. 있다 해도 그들은 농과면 농과만을 전문으로 가르칠 수 없었다. 농과 고사란 당국에 대한 보고에 지나지 않았고, 실제 교수는 물리, 화학, 수학 같은 것을 도맡게 되었다. 이러한 학교라 찬호는 농과에 한한 대용 교사에 불과하였다. 거기에 그는 구변이 도무지 없었다.
만주국이 건립되기까지 사상적인 분위기 속에서 교육을 받아왔던 학생들이라, 가슴에 불을 일으켜주는 한마디의 열변도 없이 묵묵히 괭이와 호미로 땅을 파는 면에서만 접촉하는 찬호에게 존경이나 흠앙을 가질 수 없었다. 더욱이 만주국의 교육 방침에 순응하여 초빙되어 왔다는 점이 찬호의 행동이야 어쨌든 그가 무시당하는 조건이 되었다.
그러나 그는 농촌으로 돌아가야 된다는 그의 신념만은 굽히지 않고, 이를 기회 있는 대로 눌변(訥辯)에 담아 이야기하였다.
그것은, 그러나 아이들에게 한낱 웃음거리밖에 되지 못하였다.
“농촌으로 돌아가라.”
“백오십만 동포의 팔 할을 차지한 농촌은 배운 자를 목마르게 기다린다.”
한 아이가 운을 떼면 뒤를 받아 다른 아이가 나섰다. 그의 말이 옳건 그르건 그것을 검토하거나 음미하려고 생각지 않고, 아이들은 실습시간에 제멋대로 찬호의 흉내를 내었다.
“날 보구 듬직하게 생겼대서 촌으루 가 돼지 치구 소 먹이구 그러래.”
“말은 옳지 뭐 그래.”
“부의 황제께 충성을 다하고 만주 건국에 초석이 되기 위해 농촌으루 가야 된단 말인가?……”
그가 겸임한 여학교 생도들도 질색이었다. 이래도 그는 그의 신념을 지그시 눌변 위에 지탱해나갔다.
이러기를 삼 년, 그 사이 세 회의 졸업생이 났으나, 한 청년이 개척지에 교사로 갔다가 조그만 도둑의 습격에 놀라 한 학기도 못 마치고 도망해 왔었고, 또 하나 역시 교사로 개척촌에 갔던 청년은 그와 함께 도피행이나 다름없었던 여인이 죽게 되자 한숨을 쉬면서 돌아오고 말았다.
내가 사람을 가르친다는 것은 망발이라 찬호는 생각했으나, 그 무렵 성내(省內)의 사립학교는 하나씩 성립(省立)으로 개편되어, 그가 근무하는 학교에 그의 마지막 동생이 교두(敎頭)로 파견되어 오자, 슬며시 그는 출근을 그만두고 말았다.
그 후 역시 개편으로 ‘자리를 후진에게 맡기고 용퇴한’ 그 학교 수석 박선생과 더불어, 사소한 자본으로 시외 산기슭에 양계장을 꾸며놓고 이 년 남짓 적잖이 재미를 보고 있을 때, 목축의 유리함을 눈치챈 용퇴 교사들은 하나둘 빈약한 주머니를 들고 와서 한몫 끼워달라 하였다. 거의가 이런 용퇴 교사가 주주가 되어 조직된 회사에 박선생이 사장, 찬호가 전무의 책임을 맡아가지고 목축 지정 현(縣)인 × ×현 와우산 기슭, 소의 형국을 놓고 이른다면 꼬리로부터 시작하여 앞말까지의 타원의 반원을 흐르는 냇물로 경계가 된, 그 안의 송편 형국의 토지 육만 평을 사서 목장을 차비한 것이 지난 삼월이었다.
지난 삼월에 시작한 목장이었기에 그동안의 칠팔 개월은 건축과 설비에 시간을 허비하여 이번 돼지의 입식이 목축물로서는 첫 착수이기는 했으나, 그러나 양봉의 기초를 세운 것과 농민의 입식은 그사이의 성과였었다.
목축은 물론, 양봉·양돈·양계·목우·목양의 전반에 걸치기로 되었으나, 우선 양돈에 주력하여 그 방면의 전문인부를 불러들인 외에 사료를 얻기 위한 방법으로 목장 소유지에 농민을 입식시켜 감자 농사를 짓게 하였다. 농민은 우선 다섯 가호가 들어왔다. 그들은 전부 자작농으로 하여 일 년 계량*이 될 만한 곡식을 무상으로 지어먹게 하되, 나머지 토지에는 감자를 심게 하여 그것을 회사에 공정가격대로 일수로 팔도록 하였다.
회사에서는 감자로 전분과 엿을 만들어 파는 일방, 그 찌끼로 돼지의 먹이를 삼자는 것이었다.
현 당국은 와우산 목장을 목축 부락으로 인가하였고, 목축 자작농으로서의 자급자족 경제를 세우는 데 편의를 주었다.
찬호는 교육에서 실패 본 우울을 이 사업에서 깨끗이 씻을 수 있는 것이 무한히 기뻤다.
여기에는 웅변도 필요없었고, ‘귀농선생’의 별호도 불릴 리 없었다.
오직 실행과 근실 그것이면 족하였다. 물론 많은 인부를 다루는 일, 그것이 역시 사람과의 접촉이라, 골치 아픈 때도 있었으나, 그들에게는 경제적으로 후하게 대접함으로써 문제가 해결될 수도 있었다. 더욱이 주주들의 잔간섭이 없는 것이 사업 진행상 좋았다.
같은 교사 출신인 주주들이라 찬호의 위인을 알고 전부를 그에게 맡겼다. 어떤 주주는 말하였다.
“노후에 와우산과 벗하여 주경야독(晝耕夜讀)할 수 있도록 이상적 부락을 만드시오.”
그러나 이런 신임이 더욱 그의 어깨를 무겁게 하였다.˙
이번 그가 손수 차 바구니에 앉아 여드레 동안 돼지와 침식을 함께한 것도 다른 목장에서 수송을 인부에게만 맡겼다가 도중에 반수 이상이나 폐사(斃死)시킨 전철을 밟지 말려는 것이었으나, 어떻든 이것도 주주들의 그에 대한 신임에 이바지하려는 성실에서 나온 행동임에 틀림이 없었다.
돼지는 목장에서 미리 준비해가지고 나온 궤짝 스무 개에 갈라 담고 달구지에 실었다.
역에는, 돼지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 목장에 하루 전에 와 있던 사장과, 수레를 몰고 온 농부들과, 양돈 전문인부인 로우숭(老宋)이 함께 나왔다. 사장도 로우숭도 농부들도 모두 찬호의 초췌한 행색에서 그사이의 신고를 역력히 살필 수 있어 무수히 치하했으나, 먼길에 시집오는 색시들의 원기 있는 모양이 또한 사랑스럽고 대견치 않을 수 없었다. 모두 흐뭇한 마음이었다. 그런 마음으로 달구지 뒤를 따라섰다. 낙조는 그들의 둥에 붉은빛을 던지었다. 잔잔한 석 양, 그러나 길옆의 새풀*을 간들거리는 바람은 사람의 옷 속에도 스며들었다. 시월 중순이라 했으나 하늘이 맑은 것뿐 기온은 벌써 겨울이었다. 산골두메 속이라 추위가 먼저 알고 찾아든 듯하였다.
“엇 춰.”
찬호는 담요를 펴서 돼지 궤짝 위에 덮었다.
“뛰라(對了).”
로우숭도 양털 안을 받친 다부산즈(중국 두루마기)를 벗어, 나머지 달구지에 덮었다. 우차꾼은 소를 다그쳐 몰았다. 그 뒤를 찬호들은 달리다시피 쫓아가지 않을 수 없었다.
늙은 사장은 얼마 못 가서 걸음을 늦추었다.
찬호도 사장과 보조를 함께하였다.
그러나 로우숭은 바싹 달구지 뒤에 붙어서서 성큼성큼 걸음을 옮겨놓았다. 동저고릿바람의 로우숭은 키가 더 커 보이었다. 더 장대하게 여겨졌다.
긴 다리와 무릎까지 내려오는 팔소매를 저으면서 성큼성큼 수레 뒤를 쫓아가는 양을, 찬호는 무슨 거인의 행동같이 바라보았다.
그는 흘러내리려는 담요와 다부산즈를 바로잡아놓기도 하였고, 가끔 뒤를 돌아보며 벙글벙글 웃기도 하였다.
그러면서 찬호와의 거리는 점점 멀어졌다.
반 마장이나 거리가 있었을 때일까? 로우숭은 홱 돌아서서 이쪽을 향하여 왼손을 번쩍 쳐들고 소리를 질렀다.
‘쾌이라이바[快來吧)’라고 알아들을 수 있었다.
찬호도 한 손을 쳐들어 이에 응수해주었다. 로우숭은 다시 무슨 소리를 지르더니 돌아서서 그사이 다섯 간은 앞섰을 달구지를 및느라* 성큼성큼 발짝을 넓게 떼었다. 바위같이 육중하던 로우숭으로서는 일찍 볼 수 없었던 기쁨이었고 경쾌한 행동거조였다.
“돼지 가져오니 저 좋아하는 로우승 보십시오.”
찬호도 사장도 빙긋이 웃었다.
‘돼지 로우숭’ 이라 불려지는 영감이었다.
예순여섯의 오늘에, 슬하에 혈육도 가족도 없는 그였으나, 그러나 또한 가장 자손이 번열한* 것도 그였다. 돼지는 그의 아들이고 손자고 딸이고 손녀였다. 철나서부터 사오십 년간 돼지만을 길러 내려온 그였으므로, 그의 생리는 돼지와 더불어 화한 듯도 하였다. 고희(古稀) 가까운 오늘에 아직 삼십의 건강을 지닌 것이 그랬고, 좀처럼 표정이 나타나지 않는 얼굴이며, 피둥피둥 터질 듯한 몸집 이며, 더욱이 바위나 옮겨놓는 것 같은 둔한 행동거조하며 모두 그랬다.
돼지화한 것은 몸뿐이 아닌 듯하였다.
신경이 그랬고 감정이 또한 그랬다. 돼지의 말을 알아듣는 듯했고, 돼지도 그의 말을 잘 들었다. 아무리 야생의 재래종이라 해도 그의 손아귀에 들면 며칠 못 가 그가 시키는 대로 되었다. 넓은 초원에 방목할 때에도 꽥 소리 한마디에 돼지는 저희들의 열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먹이 먹일 때도 구유 뒤를 뒷짐을 지고 왔다갔다 하면서, 발을 먹이 속에 넣는 놈만 있으면 역시 꽥 소리 한마디로 당장 그 버릇을 고치게 하였다. 엄했으나 또 인자도 했다. 병난 놈이 있으면 따끈한 자기 방에 안아다 재우며 간수하는 것을 비롯해, 더욱이 먹이에
대하여는 어머니의 애정이었다. 아침에 먹일 것이면 꼭 전날 밤에 마련해두지 않고는 자지 않았고, 그것도 티끌 하나 섞일세라 정하게 하였다. 구유도 항상 깨끗이하여 먹기 전후에 말짱히 부심을, 마치 사람의 식기같이 하였다. 그러므로 돼지도 그를 따르는 듯하였다. 손만 내밀면 닭 모이듯 하였다. 이럴 때마다 그는 무상의 기쁨을 느끼는 듯하였다.
그러나 세상일에는 어두운 그였다. 만주국이 건설된 지 팔 개년이 된 오늘에도 그대로 옛날 세상인 것으로만 여겼다. 도무지 그런 것을 알려 들지 않았다. 그의 경력부터가 모호하였다. 산동성(山東省) 태생이라는 것뿐, 언제 동만(東滿)에 이주했는지, 사오십 년간 돼지를 쳤다는 것뿐, 자세한 것은 알 길이 없었다. 한때는 목단강성(牧丹江省) 오지에서 수백 마리의 방목을 하여 상당한 재산을 만든 일이 있었다고도 하나 그 진위는 알 수 없고, 이 목장에 오기 바로 직전 남양둔(南陽屯)에서 초라하게 열 마리 불과한 돼지를 기르고 있었을 따름이었다.
찬호는 로우숭의 돼지로 화하여 있는 철저한 생활을 항상 감탄의 눈으로 보고 있었으므로, 이번 수송 같은 객기를 낸 것도 이것이 한 원인이 되었다고 할 수 있으나, 이제 로우숭의 평소에 없이 기꺼워하는 양을 보니 그에게 무슨 적선이나 베푸는 것 같은 흐뭇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목장에 도착한 돼지는 곧 미리 지어놓은 돈사(豚含)에 수용하였으나, 기후와 풍토가 다르고, 긴 여행에 쇠약한 동물을 어떻게 가꾸느냐가 문제였었다. 도착된 사흘 만에 두 마리가 쓰러진 일이 생겼으므로 더욱 마음들이 초조하였다. 춘양목장에 수송해다 놓고 한 달이 못가 반수를 죽여버린 전례를 놓고 보아도 겁이 나지 않을 수 없었다. 찬호는 그 방면의 지식과 경험을 총동원시켰다.
그에게는 다소의 자신은 있었다. 그것은 춘양목장 사건 때, 그도 다른 수의(獸醫)와 함께 현장에 가서 진찰해본 일이 있었다.(그는 수의 면허를 가지고 있다.)
그때 그가 조사하고 연구한 결과, 폐사의 원인이 기후 풍토가 다른데 있는 것이 아니라 사료에 있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것은 남아 있는 돼지를 보고 알 수 있었다. 대부분의 돼지가 배는 뚱뚱히 불렀으나 입을 내두르는 것이 배고파하는 눈치였다. 그리하여 먹이를 검사해본 결과, 아니나 다를까 감자를 좀 썰어넣은 데다가 물을 많이 타고 거기에 겨우 겨를 끼얹은, 이를테면 멀끔한 물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수송 도중의 쇠약을 회복하기에는 너무도 영양가가 없는 사료였다. 돼지는 쇠약을 회복하기 위하여 먹기는 하였으나, 찌끼는 적고 물만이므로 그 물을 맘껏 먹음으로 하여 배탈이 났을 뿐, 실제 영양은 조금도 취하지 못한 것으로 되어 그렇게 많이 폐사한 것이었다.
찬호는 이 경험을 대뜸 이번 그의 돼지에 이용하였다. 영양을 섭취시키자―그는 감자·조·고량 등의 잡곡을 한데 넣어서 잘 삶고 충분히 익히어, 처음은 국물을 적게 하여 일주일간 잘 먹이었다. 돼지는 아무 탈 없이 원기를 회복하기 시작하였다.
일주일 후부터는 찌끼의 양을 점점 줄이고 국물을 더하다가 급기야엔 보통 사료에 이른 것이 그 후 일주일 뒤였다.
돼지가 원기를 얻자, 성(省)에서 얻어온 돈 호열자 주사의 제일회를, 그 후 일주일 지나 제이회를 놓았고, 그것이 끝난 다음 십여 일만에 돈역 주사도 하였다. 이것으로 우선 안심이 되어 찬호는 기뻐하였으나, 더 기뻐한 것은 로우숭이었다. 그의 기쁨은 버크셔가 그가 지금까지 취급해온 재래종보다 훨씬 말을 잘 듣는다는 점이었다. 그때 목장에는 재래종도 삼십 두나 있었으나, 이주 부대에 그는 얼른 정이 들어버린 모양이었다. 그것은 주사를 놓을 때의 일만으로도 그럴 법 하였다.
재래종은 오랫동안 그의 손아귀에서 길들였음에도 도망치거나 소리를 질러, 로우숭의 이상한 꼬챙이 소리가 연발되었으나, 버크셔는 끙끙대기만 할 뿐 솔깃이 사람에게 안기어 지그시 주사를 맞았다.
그러나 한 가지 두통거리가 있었다. 그것은 돼지가 불음으로부터 산짐승이 발호한 것이었다. 전에도 이리·삵 같은 것이 가끔 들르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그다지 심한 것이라 할 수 없어, 다소의 간수만 한다면 목축물의 손해는커녕 목장 사람에게 심심찮은 장난거리를 제공한 데 지나지 않았으나, 이번만은 그렇게 만만한 것이 아니었다.
벌써 겨울, 산야에 먹이가 끊어질 무렵인데, 때를 같이하여 먹기에 알맞은 돼지새끼가 우글우글 눈에 띄었으매 짐승들의 구미가 목장에 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갑자기 기를 쓰고 달려드는 것은 이 때문이었으나, 찬호는 또 찬호대로 목장의 방비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돈사를 마치 다락이나 진배없이 높직이 만들어 좀처럼 뛰어들지 못하게 한 것을 비롯하여 가능한 정도의 방비는 했으나 영악한 짐승들은 방비선을 무난히 돌파하고 곧잘 침입 해왔었다.
처음 잃은 것이 버크셔 두 마리와 재래종 한 마리였다.
달도 없는 맵짠* 날 밤중의 일이었다. 요란한 돼지의 비명이 돈사에서 들렸다고 생각되자 모두들 뛰어나갔으나, 그때 벌써 비명은 와우산 기슭에 사라진 뒤였다. 십여 명의 목장 사람들이 함께 뒤통수를 긁었을밖에 그날 밤은 별수 없었으나, 찬호와 로우숭은 혈육을 찢기는 것 같은 아픔을, 그리고 분함을 억제할 수 없었다.
그 후 정한 것이 파수보기였다.
목장 사람들로 하여금 번을 짜서 밤마다 목장 주위를 돌게 하는 것이었다. 번에 당한 사람은 석유통과 방망이를 들고 다니다가 짐승의 기척을 발견하기만 하면 통을 두드려 그 신호에 의하여 집안사람들이 총동원하기로 되었었다. 겨울, 목장의 한산기라 인부들은 이 목장 건설의 파괴자를 응징하려는 투지와 함께 무료를 푸는 한 수단으로서도 신명이나, 파수들에 열심이었고, 그리고 그 결과 짐승을 곧잘 물리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는 한두 마리 출몰의 경우였고, 짐승도 꾀를 얻었음인지 떼를 지어 접어들게 됨으로부터는 자칫 방심했다간 파수꾼이 경칠 위험이 생기게 되었다.
이래서 가져온 것이 셰퍼드 세 마리였다. 베니하스·지무·뎅게끼―영악하고 날렵한 삼용사였다. 워낙 사나운 것으로만 골라오기도 했으나, 거기에 날고기를 십분 먹이었으므―로 놈들의 기세는 이리 쯤은 당초에 문제도 되지 않았다.
그 후 사람들은 베개를 높이할 수도 있었으나, 그러나 이리도 대부대를 편성하여 습격할 때에는 셰퍼드의 방비만으로는 힘이 부치었다. 이런 때에는 물론 사람이 응원하는 것이지만, 야반 삼경 산록에서 벌어지는 산짐승과 셰퍼드의 먹히느냐 먹느냐의 쟁투는 미상불* 장렬하였다. 짐승의 세력이 약하면 문제없이 이를 목장 안에 들지 못하게 막아내지만 개가 힘이 부칠 때, 놈들은 몹시 짖으면서 한 발 두 발 쫓기어 목장 안까지 들어오는 것이었다. 그 짖는 소리를 듣고 사람들이 등불을 들고 우르르 몰려나가 준비하였던 석유통을 두드리며 아우성을 칠라치면, 개들은 갑자기 용기를 내어, 연지 철철 흐르는 입을 벌리고 역습해나가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급기야 산속까지 적을 물리치고야 돌아오는 것이었으나, 이런 이튿날이면 찬호는 특히 피가 철철 흐르는 쇠고기를 떠다가 양껏 먹임으로써 삼용사의 수고를 위로하고 용기를 북돋아주었다.
그러한 어느 날 밤이었다―로우숭이 범에게 귀를 떼인 일이 생긴 것은……
―자정이 될 무렵, 사방이 고요했을 때였다. 어슴푸레 잠이 든 로우숭은 그의 방문에 철썩 무엇이 와 동댕이치이는 것 같은 소리와 함께 깽 하는 강아지의 외마디 비명에 놀라 깨었다. 잠결에 뛰어나간 그의 첫눈에 띈 것, 그것은 십여 보 앞에 이쪽을 향하여 앞발을 떡 짚고 앉았는 범이었다. 모발이 송연하고 등골에 땀이 낀 로우승은 문 옆에 동댕이쳐진 바 되어 쪼그리고 쓰러진 채 숨도 크게 못 쉬고 있는 지무와 함께 어쩔 바를 모르고 섰을 때, 다른 방에서 나온 사람들이 먼발로 “이노옴” “찌이놈” 하고 욱여 모는 소리가 들렸었다. 범이 섭적* 일어나 한 번 크게 용을 쓰던 것만이 기억에 남아 있을 뿐一그 후 로우승은 정신을 잃고 말았다고 말하였다―범은 그날 밤 로우승의 왼쪽 귀를 할퀴어 떼어간 외에, 지무의 목을 물어 걸려가지고 유유히 산으로 돌아간 것이었다.
귀 잃은 로우승은 몹시도 분해했고 침울해졌다. 하루저녁에 그냥 예순여섯의 노인이 되고 만 듯, 기운이 탁 풀렸다. 목장 사람들은 그를 극진히 위로하였다.
“얼후(二虎)였으니 말이지…….” (범은 두번째 새끼는 바보를 낳는다고 한다. 로우숭의 귀를 떼어간 범은 얼후였다.)
귀만 떼인 것은 로우숭의 재수라고― 이렇게 위로하였다. 그러나 그랬다고 그의 침울과 비탄이 가실 리 없었다. 날이 가면 갈수록 그의 침울은 점점 더해졌고, 거기에 성격이 홱 변한 사람이 되고 말았다. 인경같이 동치 않던 그는 하찮은 일에도 곧잘 골을 내는 사람으로 변하였다. 귀 붙었던 자리를 어루만지며 이를 부득부득 가는 그를 찬호는 몇 번이고 안타까운 눈으로 보았다. 돼지와 속삭이고 돼지의 말은 물론, 그 세세한 숨결까지를 가려듣는 데 보배였던 귀였기에 그의 비탄과 분노가 찬호에게는 뼈아프게 수긍되었다.
그러나 위로의 방법이 없는 것이 그를 더욱 안타깝게 하였다.
더욱 돼지를 대하는 태도가 찬호에게 한층 측은한 마음을 자아내게 하였다.
― 귀 떼인 후에는 돼지까지 구를 업신여긴다고 생각하는 그였었다. 그렇게 잘 훈련시킨 돼지, 더욱 버크셔까지도 그의 눈으로 보면 전과 다르다 하였다.
하루는 역시 돼지를 몰고 들로 나갔다 오는 길이었다. 인젠 제법 중돝은 된 백여 마리의 부대가 한데 뭉쳐 석양을 받아가며 목장으로 돌아오는 광경은 예나 이제나 조금도 다름이 없었으나, 비뚤어진 로우숭의 마음에는 그것이 못마땅하였다.
그때, 버크셔 한 마리가 무리에서 벗어나서 무엇을 주워먹느라고 한 번 소리에 움찔 안했고, 두 번 소리에도 아랑곳하지 않아, 홱 골이 치민 로우숭은 돼지채를 높이 들고 기를 쓰고 그놈을 때렸다. 그놈은 의외의 불벼락에 비명을 지르고 이내 무리 가운데 돌아왔으나, 그의 골은 그래도 가라앉지 않는 듯, 그놈을 끄집어내다 다시 죽어라 때렸던 것이었다.
그것을 보고 있던 베니하스·뎅게끼는, 다짜고짜로 그 돼지한테 달려들어 물어뜯으며 덤비었다. 사람의 힘을 돕자는 개의 충직이었다. 돼지는 목을 물리고 등을 물리어 피를 흘리며 애처로운 비명을 질렀다. 피를 보자 로우숭의 얼굴은 파랗게 질리었다. 그의 매는, 이번에는 셰퍼드의 등어리에 내리었다. 깨깽 ―두 놈이 물러나자 덥석 돼지를 품에 껴안고, 볼을 통통한 배에다 비비는 그의 얼굴에는 눈물이 주르르 흘렀다.
그길로 그는 찬호에게 뛰어와서 말하였다.
“강아질 없애든지 날 목장에서 쫓든지 양단간으로 하시유…….”
그 후 셰퍼드는 낮에는 사슬을 매어두고 밤에만 풀어놓기로 하였으나, 찬호는 로우승이 범에 대한 복수귀(復讐鬼)가 된 것을 또한 역력히 살필 수 있었다.
목장에는 로우숭의 조난 후 석유의 특별배급이 정규적으로 있어, 곳곳에 장명등을 켜놓아 낮같이 밝혀놓음을 비롯하여 길목과 목장 주위에 함정을 만들어놓고, 거기에 산에서 통나무를 베어다가 높이 아홉 자의 울타리를 쭉 둘러막는 것에 이르기까지 방비를 더 엄중히 하였고, 장차는 셰퍼드도 더 얻어올 것, 그리고 찬호는 현엽우회(縣獵友會)에 들어 열심히 엽총 연습도 하였다. 물론 파수제도 여행(勵行)하여 물적·인적 방비에 물샐틈이 없이 하였다. 돼지는 그 속에서 오래지 않아 교미할 수 있게 자라갔다.
그러나 로우승의 복수심과 비뚤어진 성격은 고질이 되어가는 듯, 보는 자에 게 더욱 측은함을 느끼게 하였다.
그는 쇠창을 만들어가지고 밤마다 목장 주위를 돌았다.
지무를 잃은 후의 베니하스·뎅게끼도 악을 내어, 밤이면 동료의 복수를 위하여 눈에 불을 켜는 듯 맹렬하였다. 하루는 이리 한 마리를 셰퍼드가 막고 로우숭이 창으로 찔러 잡은 일이 있었다.
그 후 그는 자신을 얻었노라, 범잡이를 떠난다고 창을 휘두르면서 찬호를 못 견디게 굴었다.
찬호는 겨우 엽총 사용허가를 신청하였으니 그것이 내릴 때까지 기다리라고 달래었다.
로우숭은 그것을 큰 턱으로 기다린 듯하였다.
그러나 엽총 허가가 찬호에게만 내렸을 때, 그는 몹시도 실망을 하였다.
그는 이틀이나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사흘 되는 날, 그는 각반에 털모자에 몸을 가뜬히 차리고, 창을 닦아 들고 찬호 앞에 나타났다. 총을 빌려달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범 잡으러 떠난다는 것이었다.
찬호는 웃을 수밖에 없었다.
“총 쏠 줄도 모르고…….”
찬호는 좋은 말로 달랬으나,
“당신 귀게, 그리 몸 달아하겠수?”
그리고,
“총 아니라두 이 창이면 그만요. 내 귀 떼간 범새끼 가면 어딜가……”
볼멘소리를 하면서 문을 홱 닫고 나갔다.
부산하면서 베니하스·뎅게끼를 앞세우고 산으로 올라가는 것을 찬호는 안에서도 역력히 알 수 있었으나, 그러나 그는 그의 하는 대로 맡겨두었었다. 그렇게 하는 것이, 현재 로우숭에게 베풀 수 있는 찬호의 최대의 후의 일 것이라 생각한 때문이었다.
싸락눈이 내리는 맵짠 날씨였다.
와우산은 얼룩소로 변하여 자욱하니 안개 속인 양 내다보였다.
『춘추』 27호(1943 4); 『제3인간형』 (을유문희사 1954, 범우사 1975)
안 수 길
남석(南石) 안수길(安呑吉)은 1911년 함남 함흥에서 태어났다. 동맹휴교사건으로 함흥고보 자퇴, 광주학생운동 이후 학생운동에 앞장섰다가 서울 경신학교 퇴학, 집안 사정으로 와세다(早稻田)대학을 중퇴했다. 『만선일보』 기자로 활동하다 월남해 서라벌예대 문예창작과 교수, 한국문인협회 이사 등을 지냈다.
1935년 『조선문단』 에 「적십자병원장」 이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고, 「4호실」 「한여름 밤」 「원각촌」 「목축기」 「벼」 『북향보』 등을 통해 만주 체험을 형상화했다. 월남 후엔 「여수」 「밀회」 「제3인간형」올 통해 해방과 6·25 공간 속 삶의 문제를 다루는 한편, 대작 『복간도』를 통해 민족수난사를 형상화했다. 1977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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