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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새 집 장만, 545-29번지
6 25 전후 우리의 삶은 어떠했는가. 제아무리 시내 중심가에 있는 집이라도 재래식화장실과 우물 내지는 펌프로 식수를 해결하고, 하수도시설이 부족해서 길거리에는 오물이 가득했다. 장작이나 연탄이었기 때문의 주택의 내부는 항상 연기나 가스가 가득 차 있었으며 재래식 화장실은 악취를 풍기기 때문에 주택 내 외진 곳에 자리하였고, 아이들은 한밤에 화장실 가기를 두려워하였다. 때문에 요강은 필수품이었으며, 한달에 한두번 꼴로 화장실의 오물을 수거하기 위해 「변소 퍼」차가 오게 되면 동네 전체가 악취에 싸이곤 했다.
전기가 부족해서 낮에는 전기가 늘어오지 않고 대게는 해가 질 무렵에 전기가 들어오게 되는데 그나마도 과부하가 걸리면 정전되기가 다반사였다. 대부분이 목조인 주택의 벽체는 짚을 넣은 황토를 반죽하여 메운 것이었기 때문에 각종 해충이 서식하기 좋은 조건이었다. 한밤이면 천장을 오가는 쥐들 때문에 잠 못 이루고 벽에서 기어나 온 빈대로 인해 잠을 설쳤다. 그 시절 이제는 사라진 직업이 있었다. 「빈대약치기」와 「굴뚝 청소부」. 매우 특이한 톤으로 외치는 “빈대약 뿌우려어”에 온통 시커먼 끄으름에 징을 치면서 “굴뚝, 굴뚝”을 외치는 청소부의 목소리는 지금에서는 친근한 그리움이다.
1960년대 들어서 군사정권이 근대화라는 명제를 걸고 산업화와 공업화를 추진하면서 우리의 주택은 크게 변화했다. 일부 저명한 건축가들이 설계한 양식 주택이 선을 보였으며, 이러한 주택유형은 1960년대 후반들어 대량으로 모방되어 건설되었다. 이러한 주택들을 당시에는 「미니 2층집」이라 불렀다. 거기에 미국의 원조에 의존하던 시멘트, 철근 등의 건축자재의 국내 생산이 가능해지면서 아파트가 건설된다. 특히 1962년에 준공된 마포 아파트는 우리나라 최초의 단지식 아파트로서 이후 아파트 대량건설에 기폭제가 되었다.
그러나 아파트 건설기술이 불충분한 상태에서 단기간에 많은 양의 주택을 제한된 예산 범위내에서 건설하는 바람에 부실공사를 피할 수 없었다. 1970년 4월 8일에 발생한 「와우아파트 붕괴 사건 」을 우리는 기억하고 있다. 여의도 아파트를 보란듯이 지은 효과일까. 그래도 종전과는 전혀 다른 편리함으로 아파트에 대한 시민들의 나쁜 인식은 불식되고 오히려 고급주택이라는 인식이 각인되었다.
'중단 없는 전진' 그 시대 구호처럼 비로소 우리나라가 본격적으로 건설의 붐을 이룬 것은 1970년대이다. 경제성장에 따른 중산층 주택수요의 증가, 주택건설을 확대하기 위한 정부의 적극적인 주택건설정책, 철근과 시멘트와 같은 주요자재산업의 급성장 그리고 난방기기, 위생도기 등의 생산량 등등 건설을 이끈 원동력들이다. 그 바람에 또 부동산투기 열풍이 몰아치기도 했다. 그 무렵이 그러니까 중산층이 급성장한 시기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우리 집도 1970년 새 집으로 이사를 했다. 안양 545번지, 먼저 말한 처음 우리집이 땅을 샀다는 고구마 밭이 아니다. 그때까지도 고구마 밭은 주변이 밭과 빈 터들로 썰렁했다. 내가 국민학교를 졸업할 무렵 부터 나온 관사 불하 이야기는 2년여 실랑이를 했지만 유종의 미를 거두지 못했다. 당연 국가 땅이니 국가가 거두어가는 것이고 그간 공짜로 살게 해준 것에 감사하며 순순히 물러서야 할 것인데 오히려 산 세월을 말하며 땅을 싼 값에 불하해주기를 바란다. 우리 집도 그랬다. 대개가 다 그러하지 않은가. 분명 특혜인데 이를 자기 입장으로만 받아들이려는 심산, 나쁘게 말해 도둑놈 심보는 어디서 언제부터 만연했던 것일까. 전깃줄을 몰래 걸쳐서 공짜로 전기를 쓰는 사람들이 그 시절에는 많았다.
이는 가난 때문이라고 말을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의식이 잘못 된 것이다. 아무튼 우리 집은 이를 대비해 큰 관사 가까이에 길쭉한 땅을 하나 사두었었다. 그때처럼 온가족이 똘똘 뭉치고 가슴 설레던 적이 있을까 싶다. 부모님은 비로소 자기 집을 갖는다는 기쁨으로 저녁때만 되면 현장으로 향했다. 22평 단층 슬라브 집, 그 시대 제일 흔한게 바로 이런 가옥형태였다. 그 무렵 새마을 운동도 시작되어 강남은 아파트, 여타 동네는 단층 콘크리트 슬라브, 시골은 초가집을 헐어내고 슬레이트나 기와를 얹은 주택이 마치 유행처럼 번져나갔다.
새마을 운동 처음 시작은 마을 안길 넓히기였다. 이는 곧 바로 농촌 지붕을 바꾸는 전기가 됐다. 도로확장과 동력경운기의 보급으로 하천변의 모래와 읍·면소재지로부터 시멘트를 마을까지 운반할 수 있게 되자 기왓장을 만드는 틀을 공동으로 구입, 이웃끼리 시멘트기와를 직접 만들었다. 또 지붕개량을 한 뒤 초록·주황·파란색 등 원색의 페인트를 칠해 마을 색깔을 바꾸는 게 유행처럼 돼 버렸다.
피죽도 먹기 어려운 시절 빚을 얻어서까지 지붕개량에 나선 것은 정부와 공무원들의 강요때문이었다. 사람들은 지붕을 초가에서 기와나 슬레이트로 바꾸는 것이 마치 새마을 사업의 전부인 양 생각할 정도가 됐으며, 1975년에는 전국의 거의 모든 농가의 지붕이 기와나 슬레이트로 바뀌었다. 석면 슬레이트는 시멘트에 석면을 배합해서 만든 것으로 경량이라 강인하지 못하고 쉽게 풍화, 마모되는 바람에 때 지나서는 또 탈바꿈을 했다.
전국 어디를 가나 푸른 색 아니면 주황색 물결이 넘치는 이런 획일화가 좋았는지에 대해서는 나는 의구심을 갖는다. 전시행정, 보여주기 위함이 농촌의 실질적인 삶은 아니지 않는가. 그 시대에 넘쳐나던 단층슬라브 주거, 70년대를 대표하는 건축물 중 하나다 싶어 자료를 찾아보았다. 그런데 눈 씻고 봐도 단층 슬라브 이야기는 없고 그 시대 대표할만한 예술적 가치의 건축물에 대한 양식에 대해서만 장황하게 적혀 있었다. 이를 보자 건축과 주택은 별개로 취급되는 것인가 싶기도 하고 흔해빠진 주거를 건축학을 설명하는 고상한 자리에 껴 넣을 수는 없는 것이라고 파악하는 것도 같고...흡사 폼 잡는 전시행정과 유사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새삼 누군가 한 이 말이 떠오른다.
<조형예술로 예술의 한 장르로 자리잡아왔다. 그러나 건축의 예술적 가치만을 이야기할 수 없는 것은 건축이 우리의 ‘삶의 역사’이자 ‘삶을 담는 그릇’이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에서 건축에 대한 인식은 공간·조형 예술이라기보다 비바람을 막는 건물의 의미로, 부동산 가치로 보는 시각이 크다. 건축을 예술로 인식할 만큼 사회적 여건이 성숙하지 못했기 때문이며, 건축의 예술적 가치를 돌아볼 기회가 그리 많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건축 역시 우리 사회가 걸어온 길과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아무튼 70년대 건설은 시대의 주역이었다. 활황 국면에 건설, 그때는 건설이 인기 직종이었다. 강남이 개발되면서 벼락부자들이 생겨났고 그들의 씀씀이가 커지면서 강남은 명동 못지않은 상권으로 등장했다. 호화 술집들이 생겨나고 고급백화점들이 들어섰다. 강남은 돈을 쓰기 위한 거리였다. 그때만 해도 강남의 술집에 가서 건설회사 명함만 주면 외상 술을 먹을 수 있을 정도로 건설회사 직원들은 술집에서 인기 있는 고객이었다. 건설현장이 개설되면 제일 먼저 찾아 오는 사람들이 술집 홍보자들이었을 정도로 건설회사 직원들은 술을 많이 먹는 사람들로 인식되었다.
국내 건설시장의 활성화와 함께 해외로 진출한 건설사도 많아졌다. 해외현장으로 발령 나면 국내 임금의 두 배를 주었다. 그래도 해외로 가려는 사람들은 별로 많지 않았다. 서로 가지 않으려고 버티는 사람들 때문에 의무적으로 한 번씩 다녀와야 하는 규칙을 만들기도 했다. 끝까지 해외를 가지 않겠다고 고집을 피우는 사람들은 결국 다른 회사로 옮겼다. 그때는 회사를 그만둬도 갈 곳이 얼마든지 있었다.
건설업이 호황을 누리자 많은 기업이 건설업에 뛰어들었다. 1000여 개에 달하던 건설사는 7300여 개로 늘어났다. 물론 여기에는 이른바 ‘Paper Company’가 많았다. 즉 회사는 서류로만 존재하고 실제로 공사 현장에는 나타나지 않는 업체들이다. 그들은 공사를 수주하지만 직접 시공하지 않고 하청을 주는 방식으로 이윤을 챙겼다. 당시엔 인맥과 로비를 통해 쉽게 공사를 따낼 수 있었으니 건설회사에 몸담았던 사람들이나 건설 관련 관공서에 있던 사람이 직장을 그만두고 이런 방식으로 공사를 수주했다. 어떤 회사는 하청업체 대부분이 친척이나 친구들로 구성된 경우도 있었다.
대기업들이 건설업에 뛰어든 데는 여러 이유가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단시일에 많은 돈을 벌 수 있고 자체공사를 소화하며 비자금 조성이 용이하다는 점이 크게 작용한 것이다. 차츰 건설사는 비리의 온상으로 바뀌었는데 주로 이용하는 방법이 설계변경이었다. 공사가 다 끝나면 변경금액을 증액해서 10%미만은 바로 정산처리가 가능한 것으로 법으로도 정해져 있는데 이를 악용하는 사례가 빈번했다. 감독만 잘 구슬르면 100억 공사에서 10억은 넉넉히 챙기니 그 정도면 일반 제조업 이윤 10%가 덤으로 거저 생기는 격이니 아니 그런가. 어느 경우는 공사 비 50억에 공사변경 금액이 70억으로 배보다 배꼽이 큰 경우가 생기기도 했다. 공사금액 부풀리는 여러 방식은 건설 호황과 더불어 같이 번창했음이다.
그 무렵 그러니까 목수들이 대한민국을 주름잡기 시작하던 때 우리집도 집을 짓겠다고 나섰으니 그 집이 제때 지어졌을리는 만무다. 목수찾아 삼만리, 영세업자가 돈 떼먹고 도망가던 경우도 허다 했다. 우리는 목수만 구하고 자재부터 직영을 했다. 당시 목수는 단지 나무만 다루는게 아니었다. 만물박사, 그리고 그는 착했다. 그러다보니 또 그게 문제였다. 온 동네서 장목수만 찾으니 그가 돌보는 현장이 열 곳도 넘었다. 소문이 나다보니 서울까지 그가 나섰다. 그를 만나기가 하늘에 별 따기보다 어려웠다. 돈 아끼고 혹시 발생할 수 있는 돈 떼는 사단을 막자고 직영을 하는 바람에 그가 부재중이면 일을 전혀 할 수없었다. 만물박사의 조언을 받잡고 엄마는 내장재를 사러 을지로까지 진출을 했다. 대단한 우리 엄마다. 나중에는 작업반장이 우리엄마였다. 아버지는 조수. 알다시피 건축에는 일본말이 많이 섞여 있다. 엄마는 우리 집을 다 짓고 나서는 덴조 공사에 대해서는 거의 전문가 수준이 되어 있었다.
4월에 시작한 공사가 9월 추석 무렵 끝이 났다. 22평치고는 대단한 장기 공사였다. 관사에 살 때와는 전혀 다른 생소한 분위기의 산뜻한 집, 대문이 생기고 울타리가 쳐졌으며 을지로에서 구입한 양변기가 그때 장착됐다. 마당깊은 집은 아니지만 계단 넷 정도는 밟아서야 현관에 들어설 수 있어 품위가 있었다. 도끼다시라고 해서 안방부터 건너방에 이르기 까지 난간을 한 외부는 돌을 박고 갈아서 반질반질하면서 예쁜 모양이 새겨진 여유공간도 들어섰다. 연탄보일러로 바뀌었으며 옥상 난간은 그리스 도리아식 모양을 흉내 낸 잔 기둥들이 줄줄이 박혀 한껏 모양을 뽑냈으며 현관 정중앙은 하얀대리석으로 치장하여 작지만 웅장한 효과를 주었다. 거기에 또 정원석이라는 돌들이 쪼르륵 연산홍 나무 호위를 받으며 뜨락을 형성하고 도열하였다. 이쯤이면 감탄할 만하지 않은가.
지금도 희망의 느낌으로 다가오는 그 시절의 단층 슬라브, 옥상에 콘크리트가 올려지는 때 아버지는 물과 섞어 불량이 나고 돈을 많이 남겨 먹는다는 주위의 충고를 곱게 받아들여 확인 검사 한다며 꼬챙이를 들고 그들과 같이 장화를 신고 옥상을 누볐고 우리는 가마솥을 동원해 돼지 찌개를 끓여 아예 동네잔치를 벌였다. 그때를의 소담함을 장식한 사랑스러운 것들, 나는 옥상을 무척 사랑했다. 하늘과 닿는 쾌적한 공간은 나만의 휴식 공간이었다. 책도 읽고 오가는 사람들 구경도 하고 나는 옥상을 자주 올라 다녔고 크린트 이스트 우드 흉내내며 담배도 그곳에서 처음 배웠다. 아버지는 정원석을 유달리 마음에 들어 했으며 엄마는 거실 덴조의 우아함을 늘 자랑하고 다녔다. 건설 붐을 타고 안양 읍내에서 장사를 시작했던 아버지 후배인 안흥 유리집은 축하 한다고 집안이 쩌렁쩌렁 울리는 계종시계를 선물을 했다. 물론 우리 집은 큰 유리 창들을 그 집에서 샀었다.
그쯤 우리 집이 여유란 것을 만끽했던 처음이 그때가 아닐까. 정원석은 단순한 돌이 아니다. 이는 나무를 가꾼다는 것이고 정성들여 또 다른 삶의 기쁨을 느낀다는 의미가 담겨있다. 내 방이란 게 처음 생겨났지만 불을 거의 안 때 저녁이면 안방으로 모이던 그 무렵 추워서라고 했지만 실은 나는 그때 한창 재미를 들이던 윌튼네 사람들이라던지 보난자와 타잔 TV프로를 보기위해서였다. 지금도 떠오르는 아득한 그때, 이사 오고나서도 우리 집 개는 번번이 예전 집으로 돌아가 무척 애를 먹었는데 나는 금세 그 관사란 낡아빠진 헌 집을 잊고 새 집의 안락함에 빠져 들었다. 인간은 뱃 속 편하고 안락하면 과거를 쉽사리 잊는다. 그래서 과거의 고달픔으로는 다시 돌아가려 하지 않으려 한다.
1. 이 세상의 삽질
사람들은 저마다의 밥그릇은 따로 있다고 믿고 있다. 우리는 그렇게 택일 하여 밥을 퍼 담는 삽질을 부지런히 하며 살아간다. 택일로는 모자라 여러 일을 가리지 않고 하는 이들도 많다. 재주많은 사람이 배 곯는다는 말이 이럴 때는 그대로 들어맞는다싶다. 우리의 삽질, 이는 노동을 말한다. 머리를 쓰는 사람이 힘든 일을 잘 할 수 없으며 힘을 쓰던 사람이 갑자기 머리를 쓰기 또한 어렵다. 기술도 기술 나름 얕은 재주는 누구나 넘볼 수 있는 재질이라 이 또한 숙련이나 탁월한 기술을 터득하여야 든든해진다.
기실 사람 사는 데는 그런 점에서 자기 특성이나 하기 나름 공평한 면이 있다. 하지만 문제는 버는 돈의 차이다. 힘을 쓰며 돈을 버는 사람들이 돈을 많이 번다면 힘은 들지만 괜찮다 할 것이지 구차하다거나 자식들한테 가난을 물려주고 싶지 않다는 말을 하지는 않는다. 누구든 바라는 것이 힘들이지 않는 안정적인 돈벌이다. 안정적이지 못하고 편하지 않으며 돈도 잘 안 벌리는 일, 요즘은 굳이 어느 것이라고 단정 짓기도 뭐하다.
내가 보기에는 급변하는 세상에 어느 직업이든 안정적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변호사나 의사도 예전 같지 않으며 기술자도 마찬가지다. 오히려 역발상으로 힘든 일을 마다하지 않은 사람이 전천후로 보다 더 유리한 세상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그 시절은 직업에 차등이 심했으며 일자리는 가뭄에 콩 나듯 하였다. 특히 맨 몸으로 사는 사람들에게는 싼 임금이 문제가 아니라 일이 있는 게 용한 노릇이었다. 그러기에 그 시절에는 닥치는 대로 일감을 찾아 다녔다.
한참 전국이 새마을로 변신을 하던 무렵. 우리 동네는 삽 하나로 먹고사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른 새벽 장화를 준비하고 장갑을 끼고 신작로에 오르면 큰 트럭 한 대가 기다린다. 그 중에는 지난해까지 마부였던 사람도 번데기를 파는 아저씨도 벌터에서 소작을 했다는 사람도 끼어 있었다. 웬만해선 그 무리에 끼기도 쉽지 않다고 했다. 돈벌이가 괜찮은 만큼 서열도 있고 끼려는 사람들도 줄을 대야 했다.
우리 동네에 그런 사람이 많았던 것은 그나마 줄을 잘 선 덕분인지도 모른다. 목수나 미장이가 떼거지로 산 동네였으니 굴비 엮듯 꼬인 트럭 한차였다는 생각도 든다. 말을 놓아주고 말 대신 시멘트 포대를 움켜 쥔 마부출신도 꽤 있었다. 나는 그들이 하는 일을 여러 번 목격했다. 그야말로 삽질에 도가 튼 사람들이다. 시멘트 포대를 한 손에 딱 잡으면 옆으로 부지직하고 실밥이 튕겨져 나갔고 큰 철판위에 마치 비빔밥을 만들듯 금세 물과 모래가 뒤섞인다.
물이 철렁되며 넘쳐날듯 한데도 전혀 그런 일 없이 갈무리 하듯 골고루 잘 섞인다. 이제부터는 굳기 전에 부리나케 삽질을 해야 한다.물 타기를 해서 시멘트 양을 줄인다고 주인들은 꼭꼭 챙겨 보던 그 시절. 질통을 멘 사람은 연실 퍼 나르고 삽질 하는 사람은 구령에 맞춰 삽질을 한다.일명 ‘공구리 패’라 하여 스무 명이 한 패가 되어 동네 신축현장은 그들이 불려 다녔다. 그 광경을 보면 자연스럽고 전혀 힘이 안 들어 보이는데 아무나 그 일을 하는 것은 아니었다.
숙달이 되고 요령을 잘 아는 그들만이 가능한 그런 삽질이었다. 새벽부터 두 시간 남짓 뚝딱 한 일을 해치우고서는 그들은 준비된 트럭에 또 오른다. 하루에 그렇게 다섯 번은 해야 돈벌이가 된다고 했다. 그들을 기억하자면 뻔! 뻔! 외장치며 번데기를 동네방네 팔고 다니던 아저씨가 나는 꼭 떠오른다. 그중에서 제일 가냘팠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는 하는 폼이 엉성한게 내가 보기에도 요령이 부족했다. 욕을 질펀하게 하던 오야지란 사람한테 혼나는 것을 여러 번 보았다.
그때마다 신문지 둘둘 마른 번데기 봉지나 들고 동네나 돌 것이지 하는 낙심천만의 생각을 하곤 했다. 내가 그 삽질을 통증으로 가슴에 담은 것은 그리고 얼마 안 있어서다. 다들 삽질하러 떠난 아침, 아저씨는 일은 안 나가고 양지녘에 쪼그리고 앉아 우리 노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곤 했다. 그는 대열에서 결국 낙오자가 된 것이었다. 그때문인지 훗날 '저문강에 삽을 씻고 '라는 정희성의 시를 읽을 때 번데기 아저씨가 자연적으로 다시 떠올랐다.
그의 시의 끝 구절,
'삽자루에 맡긴 한 생애가 이렇게 저물고, 저물어서 샛강바닥 썩은 물에 달이 뜨는 구나. 우리가 저와 같아서 흐르는 물에 삽을 씻고 먹을 것 없는 사람들의 마을로 다시 어두워 돌아가야 한다.'
삽질! 그러하다. 고달프지만 자기 삽은 따로 있으며 삽질은 모든 노동을 대변한다. 노동은 사람이 세상에 참여하는 거룩한 방식 가운데 하나인 것이다. 그럼에도 정직한 노동의 가치는 그에 합당한 대우를 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가치가 떨어져서가 대부분이지만 때로는 부당하게 취급도 당한다. 저문 강에 선 하루의 저녁은 인생의 노을과 같아서 ‘흐르는 것이 물뿐이랴’는 자조와 탄식 그리고 생의 달관을 절로 자아내게 한다.
‘삽자루에 맡긴' 묵묵한 노동의 성실함을 어느 시대 그 누가 제대로 알아주랴. 저문 강은 피곤했던 하루를 씻어줄 뿐 아니라 의연한 깊이를 보여주어 세상살이에 지친 이에게 위안을 준다. 요즘은 공구리 패란 패거리는 없다. 아예 그러한 삽질도 없어지고 말았다. 대신에 레미콘이라는 괴물이 그 일을 한다. 이 말은 세상이 변했음을 의미한다. 자동화라는 말이 등장하고 웬만하면 기계들이 알아서 사람을 대신하여 생산을 하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사람중심인 경공업에서 중공업으로 탈바꿈을 하던 시대, 포크레인이 등장하고 불도저, 지게차가 나오고 나서는 기껏 우리가 삽질을 한다는 것은 어쩌다 땅 두세 치 파고 작물을 심는 일이다. 그러기에 요즘은 ‘삽질을 하다.’ 하면 괜한 일을 득도 없이 힘들게 했다고 할 때 비어로 그 말을 쓴다. 하지만 삽질은 여전히 사람이 세상에 참여하는 거룩한 방식중 하나가 아닌가.
'삽'이라는 한 글자에는 실로 많은 의미가 담겨 있다. 삽질은 자신의 몸을 구부리고 낮춰야 하는 일이다. 한 삽에 한 삽을 더해야 하는 묵묵하고 막막한 일이다. 요즘도 헛손질하는 사람들이 많다. 지난 60년간 급속하게 성장했고, 국민들의 삶의 질 역시 전반적으로 향상되었다지만 변화의 바람과 무한경쟁 구도 속에서 낙오된 이들도 자연 생겨난다. 도심 곳곳에는 최하층에 해당하는 도시 빈민의 삶이 상존하고 있다.
빌딩숲 사이사이 쪽방촌이 군데군데 숨어 있다. 도시 빈민으로 살며 왜 그들은 도심을 벗어나지 않으려는 걸까. 비정한 도시, 보잘것없는 도시에서도 어떻게 해서든 자신의 공간을 마련하려고 부단히 노력을 하는 사람들, 부박한 거처로 달동네, 쪽방촌에 얹혀살지만 대문 골목길이나 계단 한 편에는 일용할 식물이 그들의 어느 소망처럼 무럭무럭 자라고 있음이다. "그래, 떠날 사람은 잘들 가거라, 나는 모든 것이 터져 버릴 것 같은 이 도시에서 끝까지 살아내리라."
고달프고 힘들어도 버티고 살겠다는데 누구인들 그 속된 이유를 제대로 알까. 나도 그렇지만 현세의 우리는 도심에 찰거머리 같이 늘어 붙어 환상을 꿈 꾸며 날마다 수척해지는 것만 같다. 마땅치 않지만 원래 인간은 모여 살기를 원하고 외로움을 극복하려 한다는 게 이유라면 이유가 될까. 기실 사람들도 모여야 삽질도 가능하고 돈도 눈에 보인다. 흙 한 삽, 모래 한 삽, 시멘트 한 삽이 모여야 밥이 되고 집이 되고 길이 되고 마을이 되고 무덤이 된다.
그런데 갈수록 큰일이다 싶은 게 현실이다. 삽질이 줄어들어 삽질 한번 제대로 못한 청년들이 이 세상 수두룩하다. 내가 기계를 전공할 때만해도 중장비를 만드는 막중한 책임을 짊어졌다 여겼는데 그 중장비는 어느 참 삽질을 대신 해 빌딩 숲을 이루더니 이제는 기계공학은 쇠퇴하고 로보틱스라는 신학문이 자리를 넓혀 왠만하면 로보트가 스스로 작동하고 멈추는 세상이 되고 말았다. 굴착기를 만드는 기계쟁이나 자동차나 배 만드는 기술자가 그렇게 필요도 없게 되었다. 스스로 자기 발등에 도끼를 찍은 격이라고 할까.
삽에서 굴착기로 이제는 로보트가 알아서 하는 세상, 아무리 그렇다해도 이세상 일은 계속될 것이며 또합 삽질도 멈추지는 않을 것이다. 삽은 곧 삶이기 때문이다. 삽질은 그 우직함과 정직함에 있다. 파고 푸고 옮기고 덮고 매만지듯 차곡차곡 하는 일이 비단 땅을 다루는 삽질만인가. 늘 반복되는 우리의 일상은 삽질과도 같다.알량한 자존심을 내세울 것도 없이 어느 참 우리는 몸을 낮추고 허리 춤 힘까지 아낌없이 다 소비하는 용감한 일꾼이 되었다.
이른 아침이면 으레 눈이 떠지고 삽을 들고 구부리고 일터로 향한다. 누구는 그 같은 생이 곤곤하다 할지 모르지만 일터가 있다는 것은 그야말로 행복이다. 삽을 들고 걷는 모습은 상상만 해도 뿌듯하다. 그러기에 비록 삽자루에 맡긴 생애가 저물고 저물어 썩는다 할지라도 의연히 우리는 삽자루를 들고 나설 것이다. 가족을 위한 것이라면 그 시절과 다름없이 사는 날 다하여.
2. 괘종시계
이사를 가고서 비로소 우리 집에 祝이란 단어가 새겨진 괘종시계가 입성하였다. 그전에는 아주 작은 사발시계가 고작이었다. 그 시절의 시계는 지금과는 아주 다르다. 시계가 귀중하였던 만큼 실체의 존재로서 큰 역할을 했다. 시계는 손이 닿지 못하는 곳에 올려 있었다. 간소한 집에서 제일 확실한 영예로운 존재였다. 시선집중이 바로 시계였다.
시계를 올려다보며 하루를 시작하고 일을 결정하였으며 똑딱똑딱 시계 소리를 늘 듣고 살았다. 캄캄한 밤엔 시계소리 때문 무섭지 않았고 시계소리를 혀로 똑딱똑딱 흉내 내며 때론 잠이 들기도 했다. 당시의 시계는 집안의 질서를 다스리는 묵언의 훈시자 같은 존재였으며 아늑한 공간을 감싸 안은 집안의 파수꾼이었다.
정각에 울리는 뎅뎅뎅 우렁찬 소리는 집 안 구석까지 퍼져 뒷마당에서 일하는 어머니는 소리를 듣고 밥을 챙기곤 했다. 흡사 부산한 아침에는 기차 기적소리 같았고 한밤중 적막한 때는 산사의 종소리를 연상시켰다. 외관이 수려해서 마루 정중앙을 차지했는데 그로 집안이 기품이 생기고 화사해지는 기분이었다. 나는 시계를 닦는다던지 시계 밥을 주는 일을 도맡아서 했다.
의자를 놓고 태엽을 감고 조금 어긋난 시간을 바로 잡고 조심조심 얼굴을 닦았다. 덩치도 컸지만 고상한 모습이 늘 의젓하여 비록 사물이지만 나보다 훨씬 나이든 존재라고 생각하였다. 긴 시간 집안의 또 다른 가장인 양 늘 규칙적인 행실을 준수해 동생들까지도 시간 꼭꼭 지켜 성장기를 잘 보냈던 것 같다. 하지만 그런 품위의 시계도 때가 되면 늙는지 아쉽게 시리 점점 시간이 느려지더니 제 시간은커녕 가는 게 용하다 싶은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신용을 잃은 이상 시계 밥을 줄 필요도 없이 되어 버렸다. 그래도 진열장 역할은 톡톡히 하기 때문 손님이 오는 때 닦는 일은 충실히 했다. 그 시계가 고물로 팔려나간 것은 꾀꼬리가 문 열고 들어왔다 나가며 시간을 알려주는 스위스 제 벽시계를 아버지가 들여온 때였다. 외제 벽시계는 하는 짓만큼이나 우아하고 고상하였다.
그 무렵은 동생들도 손목시계를 차고 활발히 활동하던 때였다. 당시 입시제도는 여러 번 바뀌었는데 중학교 무시험제도가 생기면서 서울로 학교를 다닐 수 없게 되자 공부 좀 한다는 아이들은 가짜주소를 만들어 서울 학교로 전학을 했다. 하지만 나는 동생들과는 달리 그냥 안양중학에 진학했는데 고등학교 입시에 낙방을 해 재수를 했다. 그런데 그 무렵은 서울은 고등학교마저 무시험으로 바뀌었다.
나는 어쩔 수없이 인천에 제물포 고등학교에 시험 쳐 들어갔는데 지하철이 없던 시절 너무 힘들어 조금 다니다가 포기하고 당시 허술한 제도를 이용해 검정고시를 보고는 서울에 입성을 했다. 그러니까 나는 멀쩡히 중학을 마치고 가난으로 제 때 공부를 못한 양 검정고시에 응시해 당당히 등수 안에 들었고 그것을 갖고 서울로 학교 전학을 간 것이다.
아무튼 괘종시계가 정확도 면에서 전자시계에 밀리다보니 시계란 실체의 존재로 각광을 받았다고 보기는 어렵다. 아마도 기능이었다면 시계는 할 도리를 다하는 때 하직을 면치는 못했을 것이다. 지금도 본가에는 시계를 사온 당신은 돌아가셨지만 장식용 시계는 번듯하다.
지금 우리 집에는 시계가 무려 스무 개가 넘는다. 아내가 시계에 한이 맺혔는지 미니에쳐소장품이라 하여 화장대에도 한 묶음 책상에도 또 한 묶음 곳곳에 시계를 펼쳐 놓았다. 말이 시계지 바늘이 꼼짝도 안하니 시계라 할 것도 아니다. 책상머리에 놓인 탁상시계가 제대로 된 시계로서 홀로 외롭다.
제시간을 찾아 죽어라하고 쉴 틈 없이 바삐 가는 탁상시계. 나 역시도 제 시간을 놓치면 큰일 날 것 같이 산지가 꽤 오랜 세월이다. 그러다가 어느 날 사발시계처럼 달리 취급을 받겠다 싶으니 문득 우울해진다. 얼마 전 산길 어느 암자에서 우연히 오래된 괘종시계를 보았다. 시간도 틀린 것이 예전 괘종시계를 그대로 닮았다.
마침 스님이 시계 밥을 주고 있었다. 밥은 다줬는데 스님은 시간을 맞추지를 않았다. 나는 도움이라도 줄 양으로 시간이 틀려있다고 말을 했다. 그러자 스님이 빙그레 웃으며 말을 하였다. ‘또 틀릴 텐데요, 뭘. 굳이 시간에 매달리지 않아요. 얘도 그렇지만 나도 그래요. 안 가면 심심하니 밥은 줍니다. 서로 의지 하는 거지요. ’ 하는 거였다.
시간을 초월한 노구를 아끼는 노승의 말이 왠지 멋있고 달게 들렸다. 돌아오는 길 그 시절의 시계가 어제의 시간처럼 다시 떠올랐다. 우리는 엉터리라고 나무랐지만 자기 시간을 찾아 늘 반짝이던 괘종시계. 나와 같은 청춘을 보낸 시계를 아무래도 소홀히 대접한 것만 같다. 시계는 늘 그 시간을 맞춰 운행하는데 보는 시간은 참 알 수없는 많은 얼굴을 지녔다.
어느 때는 길지만 어느 때는 또 너무 짧고 어느 시간은 왠지 아쉽고 그립고 어느 시간은 또 무료하고, 그러면서 겁 없이 달려드는 시간의 실체. 나는 어느 새 늙고 말았다. 꼭 맞춘 시간의 실체를 고집하는 사람들은 굴레를 벗어나기 힘들다. 꼭 맞춘 시간이 숫하게 지났으니 당연 늙었다고 말 할 수밖에는 없을 처지다. 요즘 나는 태평한 괘종시계가 무척 탐이 난다.
내일을 감고 감으며 그 노승처럼 실체의 존재와 친해지고 싶어서도 그렇고 산만큼 자신의 시간을 고집하는 자연스러움도 마음에 든다. 그러면서 자신의 주어진 시간대로 뎅뎅뎅 교회당 종소리 울리듯 때를 알리고 침묵하는 카리스마라 한다면. 세상 시간이 틀린다고 뭐가 대수인가. 늙어서도 흉 안 나게 꼭 맞춰 살아야 한다는 부담은 너무 버겁다.
난 엑셀 프로그램도 어렵고 스마트 폰 기능도 잘 모른다. 웬 기능과 사는 법들이 자꾸 늘어 나는 지 참 힘들다. 누구에게나 각자의 시간은 따로 존재한다. 긴 시간 고되게 살았으니 틀린 시간을 말하는 것도 괜찮다. 그 시절 지엄한 분부처럼 올려다보며 하루를 시작하고 챙기고 일을 결정하며 똑딱똑딱 소리를 늘 과정으로 크게 듣던 괘종시계처럼 나 역시도 의미 있는 자신의 시간과 소리를 마음 속 깊숙이 새겨듣고 싶은 요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