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이 앉아서 사진을 박고 부터 더욱 유명해진 의자
인도의 타지 마할 입니다
타지 마할의 사랑
槿岩/유응교
무굴제국의
장엄한 역사를 안고
유장하게 흐르는
아무나 강변에
사랑하는 아내
뭄타즈 마할을 위하여
대리석 왕관을
지상에 세운 이는 누구인가
열다섯 번 째 아이를 낳다가
세상을 떠난
사랑하는 아내를 위하여
우유 빛 찬란한 대리석 왕관을
영원히 씌우고
빛나는 별빛을
이중의 대리석 그물 사이로
쏟아져 내리게 한
오! 숨 막히는 아름다움이여!
20여년을 나라의 재정이 기울어
멸망을 자초 할지라도
한 여인을 위하여
저토록 사랑을 한 사내를
나는 한번이라도 만나고 싶다.
달려가서 껴안아 주고 싶다
애절하고 푸른 추억의 그림자
길게 누워있는
맑고 투명한 수로에
오늘도
샤 자한 황제의 사랑은
달빛아래 물들어 있는데..
아무나 강 건너에
검은 대리석 궁전을 짓고
구름다리로 타지 마할에 오고자 한
아비의 소원은 못 들어 줄망정
8각형의 무삼만 버즈 감옥에
아버지를 유폐시키고
형제를 모두 죽인 막내아들
아우랑 제브는
저토록 지순한 사랑을 한
그 아비의 아들이란 말인가
그 더럽고 피 묻은 이름을 여기에
올리고 싶지도 않구나.
나는
달빛어린
타지 마할 앞에서
긴 여정에 고단한
아내의 손을
말없이 꼬옥 쥐어줄 뿐이었다
사랑을 위한 불멸의 금자탑 타지마할 (Taj Mahall)
타지마할은 샤 자한(Shah Janhan)이 17년의 결혼기간 동안 14명의 아이를 낳고,
15번째의 아이를 나으려다 1629년 세상을 떠난 부인 뭄타즈 마할(Mumtax Mahal)을 추모하여 만든 무덤이다.
샤 자한은 부인을 기념하여 타지 마할과 같은 호화 분묘를 조성하는것 뿐만이 아니라
수도를 델리로 옮기기로 계획하고 레드 포트(Red fort) 등과 같은 엄청난 공사들을 계속적으로 진행하여
국가가 흔들릴 정도로 제정을 휘청거리게 만든다.
이러한 실정을 구실삼아 막내아들 아우랑제브는 (Aurangzeb) 반란을 일으킨다.
아우랑제브는 샤 자한의 총애를 받고 왕위를 이를 아들 다라 시코(Kara Shikho)를 포함한 모든 왕자들을 죽이고
1658년 아버지인 샤 자한에게서 왕위를 박탈한다.
아우랑제브(Aurangzeb)는 샤 자한을 타지 마할이 마주 보이는 아그라 포트의 8각형 탑과 같은 형식의 구조물인 무삼만 버즈(Musamman Burj)에 가두게 되는데, 감금된 후 그곳에서 타지 마할을 바라보며 죽을 때까지 지내야 했던 샤 자한은 1666년 죽어서야 부인 곁에 나란히 묻히게 되었다. 샤 자한은 부인 뭄타즈 마할을 위해 만든 무덤, 타지 마할과 비슷한 크기로 자신의 무덤을 타지 마할과 반대가 되는 검은 대리석만으로 야무나 강에 건너편에 짓고, 구름다리를 만들어 이 두 무덤을 연결하려는 계획이 었었다는 숨겨진 이야기가 있지만 증명된 이야기는 아니다.
타지마할을 이루고 있는 하얀 대리석은 각도에 따라 다른 색감을 보여 아침과 한낮 그리고 석양 무렵의 느낌이 다르고, 달빛에 따라서도 느낌이 다르다. 달빛 아래의 타지 마할을 보고 싶다면, 부근에 있는 높은 건물의 옥상에 오르면 된다. 타지 마할 건물의 정면 마당에 있는 무굴양식의 정원 수로는 무더운 한낮에 아지랭이 현상을 볼수 있게 만든다. 본관에 있는 두묘는 아무 것도 내장되어 있지 않고 본관 아래층에 뭄타즈 마할과 샤 자한이 나란히 묻혀있다.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로 손꼽히는 마력에 찬 건물
타지마할은 이란의 쉬라즈(Shiraz) 출신인 우스타드 이샤(Ustad Isa)에 의해 설계된 것인데, 설계된대로 만들기 위해 이탈리아, 프랑스, 터키 등지에서 동원된 장인들을 포함하여 총 인원이 2만여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건축 자재 운반을 위해 1,000여 마리의 코끼리가 동원되었으며 라자스탄의 마크라나(Makrana)에서 채취된 대리석을 비롯하여 건물 안의 세세한 장식을 위하여 러시아와 중국 등지에서 수입 했던 여러가지의 돌이 사용되었는데, 이처럼 엄청난 규모의 준비 과정과 장인들을 동원하여 만든 타지마할의 건축비는 상당하였을 것이라는 것은 짐작하고도 남을 것이다.
1631년에 짓기 시작하여 22년만인 1653년에야 완공된 이 건물의 정면 마당에는 수로가 있는 정형적인 무굴(Moghul) 양식의 정원을 두고, 좌우로는 회교사원과 회당을 둔 구조로 되어 있다. 타지마할의 뒤편으로는 야무나(Yamuna)강이 흐르고 있는데, 높은 축대로 쌓여진 야무나 강 쪽의 뒷면을 제외한 타지 마할의 삼면은 모두 높은 담이 둘러져 있다. 동쪽과 서쪽 그리고 남쪽에 타지 마할로 들어서기 위한 1차 관문이 있고 이 1차 관문을 통과하면 널찍한 마당이 나오는데 타지 마할은 이 마당을 건너 또다른 문을 통과해야 볼수 있다. 타지마할로 통하는 최종 관문으로 세워진 붉은 사암으로 된 문에는 아랍어로 코란(Kolan)의 경구들이 새겨져 있다. 하루에도 여러번 각기 다른 느낌의 타지마할에 많은 사람들이 넋을 잃을다.
사람들은 하나같이 이들의 지고지순한 사랑을 이야기하지만, 보통 남자의 상식으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것을 사족처럼 소개한다. 그것은 다름 아닌, 왕비의 아름다움이 과연 어느 정도였길래 하렘에 있는 수많은 후궁들을 물리치고, 14번째 아기를 낳기까지 황제를 붙들어 둘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그것은 성애(性愛)의 성전(聖典), 에서 전수 받은 노하우가 아니었을까...... 또 한 가지, 그런 사랑에 동의하는 여자가 지금 세상에도 과연 있을까. 이런 샤 자한 황제의 의지로 인해, 유사이래 지구상에 타지마할보다 더 화려한 무덤은 없고, 이보다 더 잔치집(?) 같은 분위기의 무덤 또한 이 세상에는 없다.
타지 마할 (Taj Mahal) - " 大理石으로 빚은 悲歌 "
세계 근대 7대 불가사의(The top seven tourist travel wonders by Hillman Wonders)의 하나라고 일컬어지는 인도의 대표적인 이슬람 최고의 건축물인 궁전형식의 묘묘(墓廟). 1983년 세계 문화 유적지(UNESCO World Heritage Site)로 지정되었다.
타지 마할은 과거 이슬람의 대 제국이었던 '무굴(Mughal, Moghul)제국'의 중심이었던 아그라(Agra)에 지어졌다. 위치는 인도 북부 우타르 프라데시(Uttar Pradesi)州 아그라 교외의 아그라성(城) 동쪽 약 2 km 지점.
타지 마할의 뒤편으로는 야무나(Yamuna/Jamuna)강이 흐르고 있고, 높은 축대로 쌓여진 야무나 강 쪽의 뒷면을 제외한 타지 마할의 삼면은 모두 높은 담이 둘러져 있다. 그리고 남쪽의 타지 마할로 들어서기 위한 1차 관문을 들어서면 넓은 마당이 이 있고 이를 건너 타지 마할로 통하는 최종 관문(darwaza)으로 세워진 붉은 사암으로 된 문에는 아랍어로 코란[The Noble Qur'an( Quran/ Koran/ Al-Quran)]의 경구들이 새겨져 있다.
무굴의 제5대 황제 샤자한(Shāh Jahān:1592~1666, 재위 1628–58)이 뭄타지 마할(Mumtāz Mahal)로 더 잘 알려진 그의 두번째 아내(Arjumand Banu Begum:1595~1631)가 그와 지낸 19년 되던 해(1631년) 14번째의 아이를 낳다가 세상을 떠나자 사랑했던 그의 아내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장장 22년간의 대역사 끝에 완공시켰다는 ("elegy in marble") 무덤이다.
인도의 시성 타고르는 타지마할을 보고 `영원의 얼굴에 떨어진 눈물'(teardrops on the face of eternity)이라고 노래하였다.
1632년에 기단(plinth)부터 짓기 시작하여 1638-9년 영묘(mausoleum)를 완성, 1643년까지 부속건물을 건축하였고 1647년까지 장식작업을 마쳐 완성하였다. 이후 아우랑제브 대에 이르러 1654년에야 Main Gateway 까지 포함한 넓이 42-acre (17-hectare)에 이르는 복합 건축물이 완성되었다.
타지 마할이란 <마할의 왕관>이라는 뜻이며, 이슬람, 힌두, 페르시아,그리고 터키의 건축양식이 혼합된 복합 건축물이다.
타지 마할의 가장 중심적인 흰 대리석 영묘는 완전한 대칭의 돔형 구조로서 한 변이 약 56 미터인 정 4각형 기단위에 세워져, 중앙 큰 돔의 높이가 58m, 돔 자체는 높이 24 미터 직경 18 미터이며, 기단의 4귀에는 40 미터 높이의 기둥인 미너렡(minaret)이 서 있다. . 바깥쪽 과 묘실내 흰 대리석면에는 붉은색과 푸른색, 검은색, 노란색 등 모두 28종의 각종의 보석및 귀석(貴石)인 천연 색돌로 상감되어 있는데, 몇백 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에도 그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다.
묘당 내실은 보석가공을 하듯 전무후무할 정도로 화려한 걸작 예술공예품이라 할 만하게 장식되어있다. 벽 높이 약 25 미터이며, 정 중앙에는 왕비의 묘석(cenoteph- from Greek keno taphas, empty tomb.), 그 서쪽 옆에 왕의 것이 위치하고 있다. 주위에는 투각된 대리석 판넬(jali)이 8 각형으로 병풍처럼 둘러져 있다. 왕비의 묘석은 가로 1.5, 세로 2.5 미터의 대리석 기반위에 그 보다 작은 관(casket)이 놓여 있고 정교하게 장식되어 있으며 코란의 귀절및 왕비를 찬양하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샤쟈한 왕의 묘석은 왕비의 것과 동일한 모양이나 조금 더 커고 역시 매우 정교하게 장식되어있다. 그러나 묘 자체의 화려한 치장을 금하는 이슬람 전통때문에 실제 묘실은 펑범하며 mirror image로 바로 아래쪽 지하실에 남북 방향을 축으로 얼굴은 서쪽(우측)으로 메카를 향하도록 안치되었다.
묘와 누문(樓門) 사이의 정원에는 정형적인 무굴(Moghul) 양식으로 분수를 1열로 설치한 가늘고 긴 못이 있고 또 양쪽에는 적사암(赤沙岩)으로 만든 이슬람사원인 모스크와 집회당(jawab-"answer")이 대칭을 이루며 세워져 있어 전체적인 균형을 이루고 있다. 설계는 오스만 터어키 제국(Ottoman Empire)의 건축가 Koca Mimar Sinan Agha(1489-1588) 에게서 전수받은 Ustad Isa 와 Isa Muhammad Effendi 가 주역할을 했고 main dome은 Ismail Khan에 의해 디자인되었고 main dome은 오스만 제국의 Ismail Khan 에 의해 디자인되었다고 여겨진다.
이 무덤을 만들기 위해 터키, 이태리, 프랑스 등지에서 차출된 장인들을 포함하여 2만여명의 인력이 동원되었고. 타지 마할의 주 재료인 흰 대리석은 라자스탄의 마크라나(Makrana)에서 1000마리이상의 코끼리를 동원해 운반되어졌다고 하며, 수정은 중국에서, 적마노는 바그다드에서 들여오고 기단부분의 붉은 사암은 파테푸르 시크리에서 옮겨졌다 한다.
황제 샤자한은 이토록 방대하고 훌륭한 건축물이 완성된 후, 건축에 관여한 설계및 공예 장인들이 더 장대한 기념물을 짓지 못하도록 그리고 이보다 더 아름다운 것은 보지 못하도록 손을 절단하고 눈을 뽑았다는 믿기지 않는 전설적인 이야기도 전해진다.
타즈마할은 과거 인도의 영화를 보여주는 대명사와도 같은 존재이지만 이를 건축하는데 든 막대한 부담은 나라 경제가 파탄날 정도로 샤자한 당대에 이르러 그전까지 축적되었던 무굴제국의 부가 다 소멸되어 그의 아들 아우랑제브(Aurangzeb) 에게 반란의 빌미를 주었을 정도라 한다.
타지 마할의 완공후 얼마 못 가서 샤자한은 아들 아우랑제브에게 왕위를 뺏기고 아그라성 인근에 유폐된다. 그는 여기서 타지마할을 창 너머로 바라보며 남은 여생을 마쳤다. 그의 사후 아우랑제브는 부왕의 시신을 왕비곁에 안치하므로서 샤자한은 죽어서야 그토록 사랑하던 아내곁으로 갈 수가 있었다.
19세기후반까지 타지 마할은 부분적으로 심하게 파손되었다. 제 1차 인도독립전쟁때는 영국 병사, 용병 세포이(sepoys) 그리고 정부관리들이 대리석면에 내장된 보석들과 靑金石(Lapis lazuli)을 긁어 내어 훼손시켰다. 19세기말 영국의 인도총독 George Curzon경은 대대적인 복원작업을 명령하여 1908년에 완성하였다. 20세기에는 더욱 보존에 노력하였는데 1942년 독일의 공습, 이후 일본 공군으로부터의 피습을 막기위하여, 그리고 1965년과 1971년의 인도-파키스탄 전쟁때에도 거대한 외부 골격을 덮어쒸워 보호하였다. 최근년에는 Mathura 정유공장때문에 발생하는 야무나강의 제방 부근의 산성비로 인한 환경오염이 훼손의 위험요인이 되고 있다.
타지 마할의 돔형 흰 대리석 영묘(靈廟 mausoleum)는 태양빛을 정면으로 받는 대낮에는 하얗게 빛나고, 석양이 질 때는 오렌지 빛깔로 물들어 보이며, 만월이 뜬 밤이면 전체가 청백색의 형광빛을 띤다. BBC 에 의하면 2004년 한해, 300만 이상의 관광객이 방문하였다고 한다. 1984년이후 건물의 피습을 우려하여 전면 야간관광을 금지하였으나, 최근 만월을 포함한 전후 5일간 1일 야간관광객 400인으로 제한하여 개방하고 있다. 지난 세월 동안 대기 오염으로 흰 대리석 돔이 변색이 생기므로 주변에는 디젤과 가솔린자동차의 운행을 제한하여 상당한 효과를 거두고 있다고 한다. 영내의 회교사원의 출입은 금요일 이슬람교도에게만 허용한다.
최근 수니派(Sunni)회교계에서 샤자한이 수니파였으므로 타지마할이 종교적으로 양도될 수 없는 자산이라고 관리권을 제소하였으나 인도 정부는 그 근거가 없다고 기각하고 인도의 국가재산이라고 선언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