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환경운동가가 그린 다음 세대의 환경 낙원
《에코토피아》, 어니스트 칼렌바크/김석희, 정신세계사 1991
학기 강의가 끝날 무렵 던진 ‘전기 없이 살 수 있겠냐’는 질문에 한 여학생이 고개를 조그맣게 도리질한다. ‘왜?’ 찰랑거리는 긴 머리가 자랑인 듯한 그 예쁜 여학생은 ‘헤어드라이어를 사용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답한다. 하긴, 긴 머리를 잘 관리하려면 그렇기도 하겠지. 적지 않을 샴푸도 필요할 테지.
1960년대 이후 지구는 자정력을 상실했다고 주장하는 환경학자가 있다. 이미 끝났다고 단정하는 목소리도 있다. 자정력 이상 개발하고 오염시킨 경쟁적 소비로 만신창이가 된 지구를 지속가능하게 되살리려면, 우리의 삶을 적어도 1960년대 이전의 수준으로 돌려야 한다는 뜻일 텐데, 주어진 편의에 길들어진 우리는 자신의 삶을 스스로 퇴화시킬 충분한 용의를 가지고 있을까.
환경운동가들의 가슴 절절한 노력으로, 이대로는 안 된다는 공감대와 어떻게든 소비를 줄여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시민 사회에 자리잡았다고 치자. 그런데 어떤 방법으로 무엇부터 실천해야 할지, 도무지 오리무중이다. 샴푸와 전기를 덜 소비하는 식의 단순한 실천은 아닐성싶고, 남들은 흥청망청인데 혼자 고고한 척해도 아무 소용없는 일 같다. 어디 좋은 지침서라도 있는 것일까.
누가 뭐래도 어니스트 칼렌바크는 소설가만은 아닐 것이다. 서너 편의 베스트셀러를 발표한 적이 있어도 주제가 한결같고, 환경강의를 위해 세계 각국을 돌아다니는 그는 환경운동가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환경에는 피해자도 없고 가해자도 없다거나 모두가 피해자이며 동시에 가해자라는 식의 물타기가 횡행하고, 혼자 반성한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세상도 아닌데 ‘대중 속에 파묻혀라’는 상품광고가 무른 귀를 사정없이 유혹하는 생산력주의 앞에서, 답답한 시민들을 깨우는데 지치기 마련이다. 이때 환경운동가는 소설을 쓰고 싶은 법, 타고난 필력을 한껏 발휘한 어니스트 칼렌바크는 환경소설을 한편 한편 쓸 수밖에 없었으리라.
《에코토피아》 소설이다. 출판사에 원고를 넘긴 1975년 시점에서 한 세대 이상 지났을 2000년대 어느 무렵, 자본주의 종주국인 미국을 역설적 모델로 삼는다. 암울한 세계에서 사상가가 나오는 법, 거부하기 어려운 문명을 최대한 수용하면서 지속가능한 환경은 어떤 모습일 수 있을까. 건강한 후손을 위해, 우리는 현재의 문명 중 무엇을 포기하고 무엇을 계승하여야 할까. 미국인인 소설가는 현 미국인의 가슴에 환경 천국의 모델을 제시하고자 했다.
지속가능한 환경이라는 말을 쉽게들 하지만 구체화시키기 어려운 게 사실이다. 가장 환경적인 정치는 어떤 모습이어야 할지, 경제 사회 문화 자연 교육 등을 지속가능하게 이끌어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소설가이자 환경운동가인 어니스트 칼렌바크는 고심 속의 상상력을 총 동원, 다시 한편의 소설 《에코토피아》를 썼다. 독자를 위해 미국식 재미도 물론 가미하면서.
‘에코토피아’는 미 대륙 서북부의 독립국가다. 식민지일 때 친숙했으나 미연방에서 탈퇴하면서 교류가 끊어지고, 현재 실상이 거의 알려지지 않아 억측만 난무하는 작은 나라다. 타임스 포스트 지의 윌리엄 웨스턴 기자는 미국 기자로서 20년 만에 6주 일정의 공식 취재를 위해 방문하게 된다. 기자가 송고하는 24개 파일을 빌려 어니스트 칼렌바크는 다음 세대를 위한 환경천국을 실감나게 그려간다.
화려했던 샌프란시스코에서 받은 첫 번째 충격, 넓었던 간선도로는 2차선으로 줄고 나머지 공간은 새들이 지저귀는 공원으로 변했다. 넘치던 승용차는 간 곳 없이, 전기로 움직이는 괴상망측한 미니버스와 택시, 손수레와 자전거가 널려있고, 5분 간격의 전기 버스는 시속 16킬로미터에 불과하다. 지상으로 끌어올린 하수는 잉어가 숨쉬는 맑은 시내로 도심에서 흐르고, 디자인은 촌스럽지만 천연 섬유나 가죽으로 만든 옷, 형편없는 침대에 사치스런 이불, 구식 화장실에 고급 나무 욕조, 모순이 가득 찬 모습은 서방 기자의 상식을 어지럽힌다.
자본을 빼돌린 부자들이 빠져나가 국민소득이 3분의 1로 축소되었지만 모든 시민들은 즐거운 듯 보이는 에코토피아의 이곳 저곳을 다니면서 웨스턴 기자의 충격은 거듭된다. 식량을 완전히 자급자족하고 철두철미하게 재생가능한 자원과 에너지로 충당하는 모습, 썩는 플라스틱으로 만든 집, 경쟁은 물론 학력조차 따지지 않는 교실, 정규 프로그램이 없는 텔레비전 방송, 목재는 물론 플라스틱의 원료로도 이용하는 풍부한 숲과 지속가능한 벌목, 태양과 바다 등으로 얻는 자연에너지, 환자의 처지에서 치료하는 병원, 그리고 야만스런 전쟁놀이들을 구체적으로 취재한다. 웨스턴 자신도 참여한 에코토피아의 전쟁놀이는 비록 원초적이기는 해도 인간의 냄새가 스며 있다. 서방의 전쟁보다 절대 잔혹하지 않았다.
여성이 주도하는 생존당에서 정권을 잡고 있는 에코토피아의 대통령은 여성이다. 취재가 끝날 무렵 대통령을 만나고 나서 뭔가 모를 고민과 심각한 열병을 앓던 웨스턴은, 미국으로 돌아가지 않기로 마음먹자 열병은 씻은 듯 나았고 고민도 말끔히 사라졌다. 취재 중에 만나 사랑을 나눈 산림관리원 마리사와 결혼을 결심하는 것으로 끝맺는 소설을 통해 인간에게 발전이란 무엇인가, 가장 인간다운 삶은 무엇일까, 독자들은 고심하게 된다.
에코토피아는 소설 속에 갇혀있어야 할까. 어니스크 칼렌바크는 미국식 에코토피아를 상상해냈지만 그게 정답은 아닐 것, 하지만 독자를 깨우는 가치 있는 그림이었다. 반만년의 역사와 문화를 지닌 우리의 에코토피아는 어떤 모습일까. 2000년대는 이미 시작되었는데, 우리의 현 사정은 1975년 미국보다 나을성싶지 않은데, 실천으로 이끌 에코토피아를 구체적으로 그릴 우리의 환경운동가는 어디 없을까. 고민하는 환경운동가에게 일독을 권한다.
에코토피아(Ecotopia)
어니스트 칼렌바크(E.Callenbach)가 1978년 발표한 소설로서, 작중 주인공 웨스턴의 일기와 기사로 짜여진 독특한 형식을 가진다. 에코토피아는 미연방에서 탈퇴해 독립한 국가의 이름. 에코토피아가 연방에서 탈퇴한 것은 인간과 환경이 완벽하게 조화된 생태적 이상향을 창조하기 위해서 였다. 과학적 상상력이 돋보이는 이 소설은 자연을 거역하고 파괴한 구세계의 종언과 미래의 인류 생존에 대한 암시를 담은 문제작이다.
지은이 어니스트 칼렌바크는 신생국 에코토피아와 에코토피아 백과사전 및 출판인의 점심식사의 지은이이기도 하다. 그는 또한 우정의 기수 과 고집불통인 고래 험프리를 크리스틴 리펠트와 함께 썼고, 시민입법부를 마이클 필립스와 함께 썼다. 그는 캘리포니아 대학 출판부에서 자연사에 관한 서적과 계간 영화지의 편집을 맡고 있으며, 세계 곳곳을 다니며 환경문제를 주제로 강연활동을 하고 있다.
에코(ECO: 집, 큰 가족의 무리를 뜻하는 그리스말 오이코스oikos로 부터) + 토피아(Topia: 장소를 뜻하는 그리스말 토포스topos로부터)
에코토피아는 생태적으로 조화롭고 생동감이 넘치는 미래로서 생태적 유토피아이다. 실제로 1980년대에 미국의 다른 지역들과 분리되어서 새로운 생태주의 정치 체제를 수립하고자 하는 시도(에코토피아를 건설하려는)가 미국의 오레곤 주와 노스캘리포니아 주 일대에서 실험적으로 실현된 적이 있었다.
에코토피아에 살으리랏다
장원 (배달녹색연합 사무총장)
'나라는 작고 백성은 적어서 백사람 몫을 할 도구가 있어도 쓸 데가 없고, 배나 수레가 있어도 탈 일이 또한 없으며, 갑옷 입은 군대가 있어도 진을 벌일 일이 없다. 백성으로 하여금 모든 것을 손수 만들어 쓰게 하고, 그 음식을 달게 먹으며, 그 옷을 아름답게 입으며, 그 거하는 곳에서 평안하게 살게 하며, 그 풍속을 시시로 즐기게 한다.'
노자가 그리는 에코토피아다.
에코토피아는 이 세상 모든 것들이 모자람도 없고 지나침도 없이 서로 잘 어울어져 있는 녹색이상촌이다. 이곳에선 모든 것이, 그것이 신이든 인간이든 자연이든 또는 물질이든 정신이든 영(靈)이든 서로 다르지 않은 하나이며, 그래서 계급없고 없고 분리도 없고 억압도 없는 '조화'와 '평등'과 '정의'의 세상이다. 이곳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번잡스런 제도, 규율, 속박과 갖은 종류의 오염으로부터 자유스러운 진정한 의미에서의 '해방시공간'이다. 또한 모든 것이 돌고 돌아 단절과 적체가 없는 '피드백'과 '순환'의 현장이며, 진실로 '작은 것이 아름다운' 저마다 '지족(知足)'의 한마당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땅과 하늘과 바다에 있는 뭇 것들이 싱싱하게 살아 펄떡이며 서로 기쁨을 나누는 '생명'의 공동체다.
이러한 에코토피아 건설은, 좁게는 우리 인류가 잃어버린 녹색정서를 되찾아 녹색문맹 (Green Illiteracy)에서 깨어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여, 생태계로부터 일탈(逸脫)한 인간중심적(ego-centric) 삶을 온전히 생태중심적(eco-centric) 삶으로 복귀시키는 것으로 완성된다. 넓게는 우리 인간 스스로의 무지와 전횡의 결과인 모든 생태적, 사회적, 문화적, 이념적 단절과 속박으로부터 궁극 해방의 과정이며, 그에 바탕한 새 인류질서의 정립이요, 늘푸른 문화의 구체적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에코토피아 건설은 이미 시작되었다. 시민 스스로 삶의 양식 변화를 추구하는 녹색생명 운동의 활발한 시작, 자연과 인간과의 합일을 꾀하는 녹색예술의 발현, 기계론적, 환원론적, 그리고 인간이익 우선적 과학관을 타파하는 신과학 운동의 태동, 모더니즘에 대한 포스트 모더니즘의 도래, 그리고 슈마허의 '작은것이 아름다운' 경제철학, '겉 단순, 안 풍부'를 외치는 '소박하게 살기 운동(Voluntary Simplicity Movement)', 간디의 '스와라지 운동', 우리 나라의 '신물산 장려운동' 전개가 다 그 맥을 같이 하는 것이다.
이러한 에코토피아는 무엇보다 사상적으로 오늘날 서구문명의 개화를 이끌어 낸 이원론(Dualism)을 극복해야 완성할 수 있다. 왜냐하면 오늘날 환경오염을 포함한 인류의 총체 적 오염의 근간인 비가역적 착취구조가 바로 여기에서 비롯하였기 때문이다. 이원론은 모든 것을 분리시킨 후 그것들 각자에 높은 담을 쌓아 결과적으로 '조화'와 '평등'의 에코토피아 실현을 불가능하게 했다. 그렇다고 이원론에 바탕한 서구의 사상이나 현대 과학문명이 에코토피아 건설에 불필요하다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서구 것들은 보편적 인간화와 전일적 유기화 같은 창조적 변환 과정을 거쳐 에코토피아 구현에 이바지할 수 있을 것이다.
자,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에코토피아, 우리의 녹색이상촌은 어떤 곳이어야 할까 ? 우선 이 생명공동체의 의사결정구조를 보자. 마을엔 주민들이 추대한 대표가 있는데, 이 사람은 높은 지혜와 경륜을 지닌 마을의 어른으로 일반 행정의 일 뿐 아니라, 마을의 모든 길흉사를 주관하며, 무엇보다 도덕적으로 스승의 역할을 한다. 때때로 이 촌장 어른과 주민들이 모 여 마을 대소사를 함께 의논하며, 법이나 규율 같은 사회적 제도보다는 도덕적 권위에 바탕한 공동체의 규범에 근거하여 만사를 다스린다.
녹색이상촌의 가르침과 배움은 어떨까 ? 모든 학교에선 무엇보다 우선적으로 생태학을 가르친다. 학생들은 생태계의 중요한 특장인 관계성, 다양성, 순환성, 공생성을 가르쳐 모든 인간사와 자연의 살림살이가 서로 다르지 않음을 배운다. 강자를 기르는 교육, 최고를 지향하는 교육, 이기심을 조장하는 교육, 자연을 착취하는 교육은 단호히 배격한다. 한마디로 생 태적 삶을 사는 방법을 가르치고 배우는 곳이 에코토피아의 학교이다.
인간과 자연을 함께 구하는 경제학인 생태경제학도 학교에서 중요하게 가르쳐야 할 과목이다. 수천만 종의 생물 중에서 오직 한 종에 불과한 인간의 욕망 만족과 편리를 위해 대량생산과 대량소비 그리고 그에 필연적으로 따르는 대량폐기를 당연시하며, 지구 생명공동체의 근본 질서인 순환과 엔트로피의 법칙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방향으로 발달해 온 이제껏의 경제학은 에코토피아의 강단에서는 더 이상 설 곳을 찾지 못한다. 인간의 자연에 대한 착취를 결과적으로 질서정연한 이론으로 뒷받침해 온 것이 여태껏의 경제학이기 때문이다. 대신 진정한 의미에서의 '삶의 질' 제고와 선하고 참한 공동체 즉 에코토피아 건설에 이바지할 수 있는 '근검절약'의 경제학과, 양적 성장 아닌 질적 성장을 추구하는 '내생적(內生的) 발전'의 경제학이 학교에서 가르쳐진다.
과학교육도 당연히 거듭나야 한다. 인간의 자연에 대한 착취와 지배 방법을 실제로 개발 한 것이 현대의 소위 첨단 과학기술이기 때문이다. 에코토피아의 과학기술은 인간의 인간에 대한, 인간의 자연에 대한, 인간의 신에 대한 착취와 지배와 저항의 도구로서가 아니라, 이러한 모든 것들의 상호 조화와 화해를 위하여 개발되고 사용된다. 복잡하고 큰 기술보다는 보다 인간적이고 에너지를 덜 쓰는 '중간기술', '작은기술'이 더 각광을 받는다. 에코토피아의 학교에서는 과학기술 그 자체로 말미암은 부작용과 부산물을 책임질 수 있는 '참과학'을 연구하고 가르친다. 그리고 무엇보다 과학기술의 연구와 개발이 무조건 가치중립적인 것이 아니라, 그것이 진실로 올바른 방향에서 인류에 도움 될 때 비로소 가치가 있는 것이라는 것을 꼭 가르친다.
산업구조는 중화학공업 위주의 에너지와 자원 소모형 산업에서 모든 것을 덜 쓰고 또 되돌려 쓰는 순환절약형 산업이 주를 이룬다. 특히 전형적 순환형 산업인 농업의 의미는 훨씬 커진다. 에코토피아에서는 농약과 화학비료를 과다하게 사용하는 약탈과 죽임의 농법에 서 탈피하여 자연농법이나 유기농법에 의하여 농사를 짓는다. 여기에서 생산되는 모든 먹거리는 당연히 무공해일뿐만 아니라 땅과 하늘의 온갖 신령한 기운을 다 응축하고 있다. 이런 신령한 천지조화의 기운이 서린 먹거리를 먹고 사는 에코토피아의 선남선녀들에게 식사는 곧 하늘과 땅에 감사하는 제사행위요 잔치이기도 하다.
에코토피아의 종교는 세속화와 위선의 구각을 이미 깨뜨렸으며, 타종교의 존재를 존중하며, 그리고 무엇보다 자연과의 화해와 조화를 그 첫째 가는 '복음'으로 삼는다. 에코토피아 에서는 구원을 받든, 해탈을 얻든, 득도를 하든 인간과 자연이 다르지 않은 '일체'로서 작용하며, 꼭 같은 자격으로 이 모든 천지공사에 함께 참여한다. 이곳에서는 절대자 또는 신령스러운 기운의 임재(臨在)가 인간 뿐 아니라 존재하는 모든 것에 일어난다.
에코토피아에서는 진정한 노동 즉 모두 함께 '땀흘림'을 가장 귀한 것으로 친다. 과학기술의 발달로 생길 수 있는 '땀 안 흘림'과 '잉여시간'을 무엇보다 경계한다. 이곳에서는 노동이 곧 삶 그 자체이고 노동이 곧 여가이기 때문에 노동 따로 삶 따로 여가 따로의 분리 개념이 없다. 이런 '참노동'을 통하여 이제껏의 소수에 의한 소품종 환경파괴적 대량생산 체제를 다수의 참여에 의한 환경우호적 다품종 소량생산 체제로 바꾼다.
에코토피아의 도시는 어떤 곳일까 ? 도시는 원래 생산, 소비, 분해의 순환고리가 단절되어 생명이 병드는 곳이므로 이곳의 도시는 순환체계를 가장 중요하게 여긴다. 자전거와 보행자 중심의 교통체계와 장애자와 노약자 존중의 복지 시설 등 진정 삶의 질을 높이는 도시 계획이 이루어져 있다. 무엇보다 도시가 크지 않고 각지지 않다. 학교도 병원도 직장도 놀이터도 서로 멀지 않은 거리에 위치해 있다. 지구생명 체계의 근본인 푸른나무가 많아 공원 속에 도시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건물들은 그다지 크지 않으며 모두 자연재료를 이용해 만들고 태양을 에너지원을 사용하는 등 생태적 건축기법에 근거해 있다. 한마디로 도시가 자연의 파괴를 딛고 건설된 것이 아니라 자연의 재생산에 기초하여 건설되고 유지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좁은 의미에서의 환경오염도 없다. 폐수는 생물학적 처리를 거쳐 세차용수나 정원수, 공업용 냉각수 등으로 죄다 다시 쓰이며, 쓰레기는 근본적으로 더 이상 나오지 않으며, 기존의 매립장은 나무를 심어 근린공원으로 이용하고 있으며 소각장은 오만하고 무지했던 구시대의 유물로 전시하고 있다. 공기는 맑고 집 바로 옆을 흐르는 샛강은 맑아 온갖 길짐승, 날짐승, 물고기들이 사람들과 어울려 잘 살지만 환경단체나 환경부, 환경언론은 이미 이곳에서 살지 않는다. 그리고 무엇보다 에코토피아에 존재하는 모두가 영적 진보 없는 삶은 겉보기 삶이라는 것을 사려 깨달아, 명상과 침잠, 신앙고백과 자기성찰로 온 천지의 창조적 순환 과정 참여에 저마다 열심이다.
에코토피아의 부정적 측면
극단적인 생태주의 프로그램을 따르는 에코토피아 정부는 사회적, 경제적 복지를 위태롭게 할 수도 있으며(생산성의 저하에 다라), '불도저의 바퀴덮개가 과연 철제로 되어야 하는지, 아니면 목재로 되어야 하는지' 같은 매우 중요한(?) 쟁점들에 대한 지속적인 토론을 강요하기도 한다. 또, '생존을 위한 청사진'에 따른 새로운 법률은 사유 재산을 강제로 빼앗고, 쓰레기의 분류를 강압적인 방법으로 수행하는 등의 부작용을 낳을 수도 있다. 환경을 오염시키는 사람은 즉각 구속되고 재벌 기업은 물리적인 공권력에 의해 분해된다.
교육에서도 파란이 일어난다. 부족 사회에 기초한 계층적인 엘리트주의 학교 체계에 의해서, '사회적인 책임감을 더욱 강조하는 아동 교육'과 '환경에서의 인간의 적절한 위치'에 대한 교육이 진행된다. 이러한 교육 과정에서는 줄곧 공격적인 민족주의가 흐르고 있으며, 수목 숭배와 토템 기둥에 의해 나타나는 대지 숭배 사상과 야생주의, 그리고 히틀러의 망령이라 볼 수 있는 '토지에 대한 지극히 낭만적이고 신비롭기까지 한 감상주의적 집착'이 내포되어 있다.
에코토피아를 지배하는 올윈(Allwym)은 힘과 지혜를 상징하는 존재로서, 정치인인 동시에 종교적 지도자이기도 하다. 이러한 종교적 분위기는 전쟁놀이로 대표되는 '폭력에 대한 숭배' 속에 넘쳐 흐르고 있다. 반 종교적 의례로서의 '전쟁놀이'는 스스로 피를 칠해 공격적인 충동을 유발시키고 심지어는 상대방을 죽이거나 불구로 만드는 공격까지도 용인되는 '실전에 가까운' 놀이이다. 이 놀이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인간에 의해 표출되는 아주 평범한 동물적 힘에서 희열을 느끼게 되며, 피를 흘림으로써 힘찬 종족 보존의 생명력과 숭고함까지도 얻는다고 한다. 비록, 소설 속의 이야기라고 하지만, 이는 곧 순수한 파시즘인 것이다. 사회적 다윈이즘에서 유래하는 이런 식의 '에코토피아적 인간상'은 근본적으로 부족 시대의 동물적 인간과 결코 다를 바가 없다. 또, "다른 인종끼리는 함께 조화를 이루면서 살 수 없다."는 논리하에 만들어진 '인종 분리주의'가 에코토피아의 단점으로 지적되기도 한다.
에코토피아는 사리 사욕에 집착하는 극심한 이기주의를 나타내는 '생태적 파시즘'의 한가지 사례에 불과하다. 생태 지향주의 내에는 이와 비슷한 경향을 보이는 또다른 많은 '구명 선윤리'의 사례가 존재한다. 이러한 경향은 영국에서의 공항 건설 반대 운동과 같이, 서구의 환경 운동과 캠페인에서도 자주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나 생태적 파시즘에 대한 가장 현저한 논란은 항상 '제3세계의 발전'과 '인구 통제'라는 문제와 관련된 종류의 것이었다.
데이비드 페퍼, '현대 환경론'(한길사, 1989)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