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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는 죽는다. 젊어서 죽거나 늙어서 죽거나 둘 중 하나다. 피할 수 없다. 인류가 처음 겪게 될 초고령화 사회가 위기인지 기회인지는 아직 확언할 수 없지만, 확실한 것은 늙어서 죽을 확률이 예전에 비해 훨씬 높아졌다는 사실이다.
생애의 주기에 따라 대학 입시나, 취업이나, 결혼을 준비하듯, 은퇴 이후의 삶을 준비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언제부터 무엇을 어떻게 준비할까? 개인마다 다를 것이다. 아무런 준비 없이 노후를 맞이하여 힘든 삶을 사는 이들도 적지 않다. 노후에 나에게 닥칠 최악의 경우와 최선의 경우를 대비하고, 최우선으로 해야 할 준비를 착수해야 한다.
글을 쓰기 위해 십여 권의 책*을 빌려왔다. ‘나이 듦의 실상’이 워낙 복잡해서 이 주제가 생각만큼 간단치 않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 빌려 온 책을 읽다 보니 ‘나이 듦의 좋은 모델을 따라 하라’는 글이 눈에 번쩍 띄었다. 나야말로 ‘나이 듦의 아주 좋은 모델’을 둔 행운이 있었다.
나이 듦의 모델을 만난 행운
대학원을 졸업한 다음 날부터 연세대학교 백낙준 명예총장님의 비서로 일했다. 그분은 내가 모시던 5년 동안, 90세에 돌아가실 때까지 연세대 명예총장실에 거의 매일 출근하셨다. 오전 근무만 하시고 오후는 쉬셨지만. 그분이 노년에 아쉬워하는 것이 딱 하나 있었다. 당신 자신은 중국에서 3년, 미국에서 10년 동안 학인(學人)으로 훈련받았는데 해방된 신생(新生) 조국에서 할 일이 너무 많아 ‘학인으로 성공하지는 못했다’고 여러 번 토로하셨다. 그분은 실제로 연세대 총장, 참의원 의장, 문교부 장관을 포함 29개 기관 또는 단체의 장(長)을 맡으셨다.
나는 대학에서 학문의 세계가 깊고도 넓으며 새롭다는 것을 어렴풋이 맛보게 되었다. 일단 박사학위부터 받아야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박사학위를 받고 장로회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 목사가 되었다. 그리고 대전신학대학교의 교수가 되었을 때, 백 박사님의 회한을 반면교사로 삼기로 하였다.
그분이 말씀하신 ‘학자로서의 성공’이 뭔지 막연하였다. 그리고 ‘성공’이란 말이 좀 그러했다. 그래서 ‘성실한 학자’가 되겠다고 다짐하고, 20년 남은 정년 동안 20권의 책을 쓰겠다는 구체적인 목표를 세웠다. 대학에서는 정교수가 되면 온갖 취미생활을 하거나, 주요 보직을 이어 가면서 학교 행정을 하느라 공부할 짬이 없는 교수들도 적지 않았다. 나는 성실한 학자의 길에 집중하기로 하였다. 현직에 있을 때는 그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고, 은퇴 후 세 권의 책을 내 지난 연말 20번째 책 원고를 출판사에 넘겼다. 스스로 정한 성실한 학자로서 목표를 늦게나마 이루고 노년기를 맞이한 것이 감사할 뿐이다. 백 박사님의 회한 덕이다.
혼자서도 잘 놀기
백 박사님을 모시면서 또 하나 보고 배운 것이 있다. 가끔 알지 못하는 분들이 찾아뵙겠다고 연락하는 경우가 있었다. 그분은 “나는 남은 생애가 얼마 되지 않아 시간이 많지 않다고 설명하고, 정중하게 거절하라”는 응대 지침을 주셨다. 그리고 오전 내내 이런저런 독서를 하면서 혼자만의 시간을 즐겼다. 저 연세에도 자기만의 시간을 저토록 소중히 여기시는구나! 그분이 주로 기거하는 방과 서재의 책상과 소파에는 늘 다양한 책들이 놓여 있었다. 특별한 취미도 없으신 것 같은데 책 읽는 일로 소일하시는 것 같았다. 찾아오는 분들도 거의 없었고, 최현배와 정인보 선생님 같은 절친들도 모두 세상을 떠났는데 혼자서도 참 잘 지내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언젠가부터 ‘혼자서도 잘 놀기’를 스스로 체득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전국 여러 곳에서 특강을 요청받으면, 일정을 연장하여 하루를 숙박하면서 그 근처의 명소를 혼자서 방문하곤 하였다(아내는 장거리 여행을 힘들어했기 때문에). 바닷가에서 자라서 바다를 좋아하는 나는 이렇게 동해안, 남해안, 서해안 모두 일주하였다. 틈틈이 해안 길을 찾아 혼자 다니면서, 빈 곳을 채워 나가다 보니 전국 해안 일주를 하게 된 것이다.
한 번은 속초에 특강을 갔다가 하루 자고, 이튿날 아침 고성으로 가서 내 고향 포항까지 15시간을 혼자서 운전하면서 동해안의 주요 해수욕장을 잠깐씩 모두 방문한 적이 있다. 가장 기억이 나는 혼자만의 여행으로 죽을 때까지 즐겁게 추억할 일이다.
두 발로 걸을 수 있을 때 죽어야지
백 박사님은 거구셨고 젊어서 미국 유학 동안에는 학비를 벌기 위해 농장에서 중노동을 하셨기 때문에 중년까지는 건장하셨다. 그러나 내가 모실 때에는 지팡이를 짚고 다니셨다. 늘 승용차로 이동하셨기 때문에 의사가 ‘많이 걸으라’고 해서 한때는 골프도 하셨다고 한다. 연로하여 골프조차 못하게 되자 가끔 명예총장실이 있는 도서관 5층 계단을 걸어서 다니곤 하셨다. 나는 뒤따라 올라가면서, ‘아! 나이가 들면 우선 다리의 힘이 빠지는구나’ 생각했다. 두 다리로 걷지 못하면 삶의 질이 형편없이 떨어진다는 것도 깨닫게 되었다. 아무리 나이가 들더라도 두 발로 걸을 수 있어야지, 두 발로 걸을 수 있을 때 죽으면 좋겠다는 소원이 생겼다.
그때부터는 가능한 한 많이 걷기로 하였다. 우선 계단을 걸어서 올라다니기로 했는데, 7층 연구실에서 3층 강의실로 이동할 때도 계단으로 걷기 시작했다. 수업이 끝나고 연구실을 방문하겠다는 학생들이 내가 계단으로 걸으니 따라오다가 헉헉거리는 것을 보는 쾌감도 쏠쏠했다. 그리고 지하철 계단은 무조건 걷기로 하였다. 그 깊이로 유명한 지하철 2호선 이대역 계단을 걸어서 오르락내리락할 때면,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다니는 젊은이들에 대하여 묘한 우월감을 느끼기도 하였다. 그리고 산책하기 좋은 동네로만 이사하였다. 지난봄에 이사 온 이곳 역시 산책로가 사철 변화무상한 산자락 왕숙천 계곡을 낀 곳이라서 매일 산책하며 오감의 즐거움을 향유하고 있다.
홀로서기, 내 먹거리는 내가 만든다
15여 년 전 노후의 ‘홀로서기’와 관련하여 ‘자기가 먹는 음식을 자기가 만들어 먹을 수 있어야 독립적인 인간’이라는 글을 어디선가 읽었다. 나는 철이 들면서 스스로 자유롭고 독립적이기를 꿈꾸어 왔는데, ‘내가 먹는 음식을 내가 만들어 먹지 못하는 현실’이 다소 충격적이었다. 그래서 내가 어려서부터 좋아하던 건강한 먹거리를 만들어 먹는 법을 아내에게 배우기 시작했다. 십수 년이 지난 지금 여러 종류의 국, 찌개, 밑반찬을 만들고 심지어 총각김치 등 몇 종류의 김치를 담글 수 있는 수준에 이르렀다. 아울러 청소와 빨래 등 집안일도 나눠 하니, 이젠 ‘준전임 주부’라고 자칭한다.
집안에서 무료하면 운동 삼아 몸을 움직이며 집안일 하는 것을 즐긴다. 누가 이를 ‘잔몸밟기’라고 하던데, 하여튼 살림살이를 정리한답시고 이리저리 옮기고 온통 휘저어 놓아도, 착한 아내는 ‘자기가 좋아서 하는 일’이라고 잘 참아 준다. 그리고 “당신은 나 없이 혼자서도 잘 살 거야”라고 후렴처럼 노래를 한다. 두 발로 걸어 다닐 수 있는 동안은 혼자서도 잘 놀고, 집안일을 즐기며, 혼자서 잘해 먹을 준비가 되었다. 이 나이가 되어서야 비로소 자유롭고 독립적인 인간으로 홀로 선 것이다.
나이 듦의 영성 : 물러남과 내려놓음, 비움과 버림, 느림과 멈춤
1980년대에 들어서 세계보건기구는 건강을 “단순히 질병이나 허약함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신체적, 정신적, 사회적으로 그리고 영적으로 완전한 안녕 상태(well being)”라고 정의하였다. 따라서 노인의 신체적, 정신적, 사회적, 영적 특성을 고려하여 ‘노인의 삶의 질’을 높이는 것이 중요한 과제가 되었다.
영적 웰빙(spiritual wellbeing)에 대한 관심은 신학에서 사용해온 영성이라는 개념을 인문학 전반으로 확장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리하여 물러남과 내려놓음, 비움과 버림, 느림과 멈춤이라는 주제가 미학이나 영성으로 회자되어 왔다. 신앙적으로 볼 때 노후의 삶이야말로 이러한 영성적 특성이 자연스럽게 드러나도록 최적화되어 있다.
첫째로, 나이 듦은 물러남과 내려놓음 그 자체이다. 평생 하던 일을 내려놓고, 그 자리에서 물러남으로써 노후의 삶이 시작된다. 노후의 삶을 은퇴(隱退) 이후의 삶이라 하는 이유이다. 은퇴(retire)는 ‘피정(retreat)의 지속’이라는 의미에서 그 자체가 영성적 차원을 지닌다. 영성 생활의 가장 중요한 요소로 여겨 왔던 피정은 피세정관(避世靜觀)의 준말로서 ‘세속적인 삶에서 잠시 물러나 오직 주님만 바라보는 영성 쇄신’을 뜻한다. 개신교에서는 퇴수(退修)라는 이름으로 행해지고 있지만 원래의 뜻을 살리지 못하고 있다. 은퇴 이후의 삶이야말로 세상일에 매몰된 삶에서 물러나 세상 짐을 내려놓고, 자유롭고 홀가분하게 삶을 관조하며 영적 웰빙을 향유하기 딱 좋은 나이인 것이다.
둘째로, 나이 듦은 비움과 버림의 시작이다. 영성적으로 보면 은퇴는 ‘비움과 버림’ 그 자체이다. 자리를 비워주고 미련을 버리고 은퇴해야 하기 때문이다. 나처럼 평생 공부하던 교수 중에는 젊어서는 책을 사서 서가를 채우는 기쁨으로 돈 아까운 줄 몰랐던 이들이 대다수일 것이다. 그리고 50대가 되면 연구실에 채워진 그 많은 책만 봐도 흐뭇하였을 것이다. 그러다가 60대에 접어들면 새로운 걱정거리가 생긴다. 은퇴하면 저 많은 책을 어떻게 하지! 나 역시 은퇴하면서 서가에 꽉 차 있던 책 대다수를 ‘내다 버리다시피’ 하였다. 그때 독한 반전을 경험했다. 채움과 쌓음에서 비움과 버림으로.
예수는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자기를 비우고 버리시고, 낮아지시고 죽기까지 하셨다(빌 2:8). 이는 예수가 친히 보여주신 케노시스(Kenosis) 즉 비움과 버림의 영성의 원형이다. 예수께서 자기를 비우고 버림으로 우리를 새 생명으로 채우고 살리는 구원의 길을 여신 것처럼, 비워야만 열리는 길이 있다. 영감을 받아 한 편의 시를 썼다. ‘모세의 기적’이라는 제목으로.
물이 찼을 땐 보이지 않더니
물을 비우니 길이 열리네
나이가 듦에 따라 젊어서는 주체하지 못했던 육체적 욕망들이 쇠잔해지기 마련이다. 따라서 육체 소욕(갈 5:17-25)을 비우고 영적 소욕으로 채우기 아주 좋은 나이에 이르게 된다. 노욕(老慾)은 노추(老醜)를 낳을 뿐이다.
셋째로, 나이 듦과 함께 느림과 멈춤이 수반된다. 나이가 들수록 행동이 굼뜨고 느려지며, 그래서 자주 멈추고 전후좌우를 살펴보게 된다. 슬기로운 노인 생활의 징조이다. 다행히 초고속으로 질주하고 있는 자본주의 문명의 광기를 제어할 대안적인 삶의 자세로 느림의 미학과 멈춤의 영성이 거론되고 있다. 느림의 미학은 느림의 경제학으로 이어져 슬로푸드와 슬로시티를 상업화하기에 이르렀다.
이런 예화가 있다. 어떤 도시에 사는 큰 부자가 휴가를 내어 어느 한적한 어촌 마을에 여행을 갔다. 바닷가를 산책하다가 나이 많은 어부를 알게 되었다. 그런데 이 어부는 해안으로 고기 떼가 밀려오는데도 오전에 잠깐 그물을 던져 고기를 잡아 오고는 종일 바닷가에서 어슬렁거리며 놀고 있었다. 며칠째 그러고 있는 것이 너무 한심해 보였다. 그래서 하루는 작심하고 어부에게 물었다. “고기 떼가 저렇게 많은 데 왜 잡지 않고 놀고 있습니까?” 어부가 반문했다. “왜 잡아야 하는데요?” “고기를 많이 잡아야 그것을 팔아 돈을 많이 벌 수 있지 않습니까?” “돈을 많이 벌어서 뭐 하는데요?” “그래야 나처럼 바닷가로 여행하면 여유 있는 시간을 보낼 수 있지 않습니까?” 시골 어부는 빙그레 웃으며 도시 부자에게 말했다. “지금 내가 뭘 하는 것으로 보입니까?”
은퇴 이후의 삶이야말로 슬로시티에서 슬로푸드를 먹으며 느긋하게 한가로이 멈추어 서서 여유롭게 삶을 향유할 수 있는 일생 중 가장 좋은 세월이 될 수 있다.
늙은이들의 꿈 : 속사람 새로워지기, 새 역사 열어가기
바울은 “우리는 낙심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 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나날이 새로워 갑니다”(고후 4:16, 표준새번역)라고 하였다. 노후에 몸의 기력은 떨어지고 정신도 혼미해질 수는 있으나, 속사람인 영혼은 날로 새로워져야 한다는 교훈이다. 나이 든다고 모두가 자동적으로 지혜로워지고 후덕해지고 영적으로 성숙해지는 것은 아니다. 노욕과 노추로 늙어가는 이들도 적지 않다. 나이 들수록 옛사람을 벗어 버리고 새사람이 되어야 한다. 새 사람이란 어릴 적의 옛 생각과 낡은 생각을 버리고(고전 13:11) 새 시대에 걸맞은 앞선 생각으로 앞선 삶을 사는 것이다.
초기 한국교회는 시대를 앞서가서 젊은이들이 제 발로 찾아오는 교회였지만, 100여 년이 지난 지금은 늙고 낡은 교회가 되었다. 그 껍데기만 남은 듯한 교회를 새로운 젊은이들은 참지 못해 떠난다. 주로 노인들로 구성된 태극기 부대의 광화문 집회 구호를 들어보면 낡은 시대의 낡은 생각을 고집하면서, 그것이 나라와 교회를 살리는 길이라는 확신에 차 있는 듯 보인다. 모름지기 신실한 신자라면 젊은이든 늙은이든 ‘시대의 징조’를 알아 시대에 앞서가는 선구자가 되어야 한다. 낡은 지도자들의 구태와 적폐는 패망의 선봉이기 때문이다.
성서의 인물 중에 아브라함은 75세의 나이에 안주하던 “고향 친척 아비의 집을 떠나 내가 지시한 땅으로 가라”(창 12:3)는 말씀만 의지하여 “갈 바를 알지 못한 채” 훌훌 떠나서 믿음의 조상이 되고,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의 뿌리가 되는 새 역사를 열었다. 모세는 80세의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40년 안주하던 미디안을 떠나 “이집트로 돌아가라”(출 4:19)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집트의 압제로부터 탈출시키는 새 역사 창시의 주역이 되었다. 늙은 아브라함과 늙은 모세는 낡은 세상을 과감히 청산하기 위해 새 길로 떠났기 때문에, 그들을 따라나선 많은 젊은이들이 새로운 역사를 만들 수 있는 초석을 마련한 것이다. 주의 말씀이 영으로 임하면 젊은이뿐 아니라 늙은이들도 꿈을 꿀 수 있다(행 2:17)는 증거이다.
그리하여 나는 오늘도 남북 사이에 평화 통일이 이뤄지길 꿈꾼다. 기본소득제가 온전히 시행되기를 꿈꾼다. 이 땅의 모든 약자들도 노후 걱정 없이 삶을 향유할 수 있기를 꿈꾼다. 늙은 시므온이 메시아를 고대하다가, 아기 예수를 만난 감격에 겨워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눅 2:30)라고 외친 것 같이, 내가 죽기 전에 이 모든 꿈이 이루어지기를… 그때까지 오래오래 살고 싶다. 그렇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첫댓글 나이 듦은 물러남과 내려놓음 그 자체이다..
나이 듦은 비움과 버림의 시작이다..
나이 듦과 함께 느림과 멈춤이 수반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