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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개 그리스도인이라 할 때 왕, 제사장, 선지자의 직분을 감당하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왕적 직분이란 하나님의 대리통치자로서의 우리의 모습을 말하는 것이고, 제사장적 직분이란 하나님께 예배하고 섬기는 자로서의 우리의 모습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그리스도인의 왕적 직분과 제사장적 직분은 대개 많이 강조되어왔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의 선지적 직분에 대해서는 별로 강조되지 못했다. 그런데 분명히 성경에서는 그리스도인과 선지자를 비교하여 말하고 있다. 마7장11,12을 보면“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인 말을 할 때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12기뻐하고 즐거워하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여기서 보면 그리스도인이 의를 인하여 핍박받는 것을 선지자들이 의를 인하여 핍박받는 것과 동일시하여 설명하고 있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선지자들이란 어떤 사람들인가를 살펴보면서, 그들의 모습을 통해서 선지자적 그리스도인이란 어떤 자가 되어야하는가를 생각해보겠다.
(아브라함 조슈아 헤셀의 예언자들을 참조).
1. 선지자들이란 우리의 사소한 일상사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이다.
거창한 형이상학의 논술로부터 선지자들의 모습으로 시선을 바꿔 본 철학도라면 장엄한 세계로부터 자질구레한 일상사로 나온 것 같은 느낌을 가지게 된다.
즉 선지자들이 우리에게 도전해 오는 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성경적신학과 교리가 우리의 일상事속에 어떻게 나타났느냐를 본다는 것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가장 경계해야 할 삶은 우리의 삶이 일상성에 빠지는 삶이다(소돔,고모라/노아시대의 타락상-"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 팔고").
그런데 선지자들은 이것보다 한 단계 더 높게 우리가 단순히 일상성에 빠지는 것만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적인 삶들 속에 성경적 교리나 신학이 어떻게 나타났느냐를 보고 문제를 삼습니다(사1장).
예)목사가 설교를 할 때 어떻게 사랑과 공의를 외첬느냐 보다는, 그 목사가 교회사무원이나 사찰 집사에게 어떻게 하고 있느냐를 가지고 문제를 삼습니다.
선지자는 우리의 예배를 드릴 때의 모습뿐만 아니라, 버스 안에서의 우리의 모습을 봅니다.또한 도서관에서, 가정에서, 강의실에서, 부엌에서의 우리의 모습을 봅니다.
그리고 그 일상적이고 사소한 일들 속에 과연 성경적 교리나 신학이 어떻게 드러나고 있는가를 주시하고 있다(우리의 관계-교회라는 원리).
이와 같이 선지자가 우리에게 관심을 쏟는 것은 우리 주위의 사소한 일상적인 일들에 관심이 있다.
철학자 시세로는 "신들은 큰일에 몰두해 있다. 그들은 작은 일들을 무시한다" 고 주장을 한다. 또한 아리스토텔레스는“신들은 겉으로 드러난 사소한 일들에는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고 주장을 한다.그러나 선지자들에게는 인간에게 일어나는 사소한 일들이야말로 가장 크게 관심을 가지는 문제이다. 그들이 믿는 하나님은 혼자 앉아서 영원한 이데아를 명상하는 분이 아니라, 사람의 형편에 관심을 가지시고 사람의 형편을 대처하는 분으로 묘사하고 있다.
사람의 형편에 관심을 가지지 않는 것은 초대교회 때 영지주의자들이 그러했다. 즉 하나님은 거룩하고 영적인 일에만 관심이 있지, 세상적이고 인간적인 일들에는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즉 영과 육을 분리시켜 생각했고, 하나님사랑과 이웃사랑을 분리시켜서 생각했다. 이것에 대해서 사도는 분명하게 반박하고 있다(베드로후서, 요한일서).
선지자들이 관심 해 하는 것은 고정되고 비인격적인 자연적인 현상이 아니라, 사람이며 그들 속에서 일어나는 역사며 사건이다(이 시대의 영적인 상태를 어떻게 파악할 것이냐? 날씨가 좋지 않은 것, 천재지변이 많이 일어 나는 것∼무속종교에서 시대의 영적인 상태를 파악하는 방법이다. 그러나 우리는 비인격적인 자연현상이 아니라, 인격적인 사람과 그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 영적인 상태를 파악하는 기준이다).
선지자는 혼자 떨어져 말 만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의 말을 듣는 사람들속에 그들과 더불어 있는 인간이다.
통계학적인 관점에서 보면 선지자들의 주장은 터무니없기 짝이 없다. 그러나 그들의 관심은 사실에 있지 않고 사실의 의미에 있다. 인간행실의 의미, 인간실존의 참 모습은 통계숫자로 표현 될 수가 없다.랍비들은“한 개인의 목숨을 파괴하는 자는 온 세계를 파괴시키는 자로서 대우해야하고, 개인의 목숨을 구원하는 자는 온 세계를 구원하는 자로서 대우해야한다"고 과장된 말을 했다 하여 그것을 잘못이라 할 수 는 없는 일이다(많은 수보다 한 사람의 중요성).
2.선지자의 메세지
그의 생명은 그가 말하는 내용과 그가 말한 것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에 따라 살고 죽는다.메아리를 일으키는 것은 단순한 그의 말이 아니라, 그의 삶이다. 선지자는 말로서 비판하는 사람이 아니라, 몸으로 비판하는 사람들이다.
선지자들의 주장은 하나님과 인간사이에 엉거주춤하여 알쏭달쏭한 법이 없다. 그것은 마치 하나님의 가슴으로부터 쏟아져 나와 인간의 가슴속으로 뚫고 들어가려는 듯 강요하고 앞으로 밀어붙인다. 권위롭다기 보다는 장엄하다. 예언자는 책임을 강화시키는 일에 골몰하고 핑게를 참지 못하며 겉치레와 꾸미기와 자기연민을 경멸한다. 그의 억양은 조심스럽다거나 달콤하지는 않지만 때로 부드럽고 안심시키는 기분을 풍기기도 한다. 사정없이 쪼개고 때로는 무섭기까지한 그의 말은 교화를 시키는 것보다 충격을 주기 위한 것이다.
선지자의 입은 날카로운 칼이다. 그는 하나님의 화살 통에 꽂아 두신 날카롭게 벼린 화살이다.(사49:2,사32:11)
선지자의 글을 읽으면 감정이 팽팽하게 고조되고 느긋하게 안정을 즐기던 양심이 마구 뒤틀린다(당시의 거짓선지자, 즉 궁중선지자의 주된 메세지는 하나님은 혈통적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시기에 우리를 버리시지 않으시고 우리는 결코 멸망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들은 "평안하다, 평안하다"고만 외쳤다)
선지자가 되기란 곤혹스런 일이다. 숱한 인간들이 뭘 좀 아는 체 하면서 평화와 풍요를 예고하고 듣기 좋은 말로 대중 앞에 아첨을 하는 틈바구니에서 예언자는 재앙과 역병, 고통, 파멸을 예고해야 한다.
지금까지는 사람들이 모르고 있던 아주 미세한 물체가 갑자가 현미경아래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과장이라고 생각되는 것이 다만 보다 깊이 뚫고 들어가 살펴본 것일 수가 있다.선자자는 세상을, 세상속 에 묻혀있는 진리가 아니라 초월한 진리이신 하나님의 눈으로 보기 때문이다(세상 속에 감추인 하나님의 진리)
선지자는 인간의 능력의 한계가 있음을 용인하지 않는다. 인간이 얼마나 약한 존재인가를 충분히 고려하지 않음으로써 그는 인간이 잘못을 저지 수 있음을 조금도 참작하지 않으려는 듯이 보인다(이로써 우리에게 성령역사의 필요성을 깨닫게 하는 것이다. 선지자의 메세지의 결론은 새 언약의 시대를 바라보면서 그 시대가 되면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인간적으로는 지킬 수 없게 보이는 하나님의 말씀도 능히 지킬 수 있다고 소망하고 있다).
고대종교의 기준으로 보면 위대한 선지자들이 오히려 덜 감동적인 인물들이었다. 이를테면 기적 같은 후광과 발자취는 그들의 뒤를 따라 다니지 않았다.
아주 드물게 선지자들에게 기적이 일어난 것으로 되어있다(사38:7-8) 기적으로 예언을 입증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신13:1-3).
사무엘이 여호와를 부르자 여호와께서 그 날로 천둥과 비를 내리시어 모든 사람이 사무엘과 여호와를 두려워했다는 기록이 있다(삼상12:18).
기드온(삿6:36∼40)과 엘리야(왕상18:36∼38)는 하나님께 기적으로 징조를 보여달라고 간청했다(그러나 하나님은 큰 지진가운데 계시지 않고 세미한 음성가운데 계셨다. 큰지진-엘리야의 제단에 불이 내린 사건).
기적으로 인간의 의심이 깨끗이 사라지지도 않았다. 애굽의 마술사들도 기적을 행할 수 있었다(출8:3,7:11,22).
선지자가 수단으로 삼는 것은 다만 말(言語)과 예언의 내용을 설명하는 상징적인 행동뿐이다.
3.선지자들이 생각했던 제일 높은 善
무엇이 최고선인가? 고대사회에서는 세 가지가 특히 소중하게 여겨져 왔다.그것은 지혜, 건강, 힘이었다. 예언자들은 그러나 그런 것들에 열중하는 것이 도대체 쑥스럽고 우상숭배적이라고 생각하였다.
사10:12,13-앗시리아의 힘과 지혜에 대하여
사29:13,14/렘8:9-지혜에 대하여
호12:8,10:13,14-부와 군사의 힘에 대하여
현자는 지혜를 자랑하지 말아라, 용사는 힘을 자랑하지 말아라, 부자는 돈을 자랑하지 말아라. 자랑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나의 뜻을 깨치고 사랑과 법과 정의를 세상에 펴는 일이다.우파시드에서는 물질세계가 무가치한 것-비현실적인 모조품, 환상, 꿈이다.그러나 성경에서는 물질세계가 실재인 하나님의 창조물이다. 힘,자손,부 재물-이 모두가 소중한 축복이다. 그러나 이른바 성공하여 스스로 교만한 자와 그의 권세는 공허한 쭉정이요 물거품에 지나지 않는다고 본다(사40:15,17)
4.선지자는 우상 타파자(打破者)이다.
선지자는 겉으로만 거룩하고 신성하며 두려운 모든 것을 부수는 우상 타파자이다. 선지자는 알고 있었다. 인간이 만든 종교가 인간에게 내린 하나님의 명령을 오히려 왜곡시킬 수도 있다는 사실을. 사제라는 자들이 거짓 증언을 잉태하고 폭력을 용납하며 증오를 묵인하고 무자비, 거짓, 우상 숭배, 폭력 따위를 분노로 두드려 부수는 대신에 의식(儀式)으로 승격시킴으로서 위증죄를 범해 왔다는 사실을.선지자는 졸지도 자지도 않는다. 그는 언제나 진지하다. 慈善의 유향(乳香)으로도 인간의 간혹함을 달콤하게 만들지 못한다. 경건의 냄새인 성대한 의식(儀式)은 인간의 잔인성과 고루
썩여 잠자지 못하는 선지자를 괴롭힐 따름이다.
5. 선지자들은 엄정함과 동시에 동정심(同情心)도 가지고 있다.
선지자의 말은 준엄하고 메마르며 가시가 숨어 있다. 그러나 그의 엄정함 뒤에는 인류에 대한 사랑과 동정심이 있다.실로 모든 재앙의 예고는 그 자체가 회개를 권유하는 것이다. 선지자를 하나님이 보내신 것은 꾸짖으라고만 보내신 것이 아니라“늘어진 두 팔에 힘을 주고 휘청거리는 두 무릎을
꼿꼿이 세우게"(사35:3)하려고 보내신 것이다.
거의 모든 선지자들이 꾸지람과 징계를 내리면서 위로와 약속과 화해의 희망을 덧붙여 주고 있다.
그는 멸망의 메세지로 시작하여 희망의 메세지로 마친다.
그들의 두렸한 주제는 단순한 예고(豫告)가 아니라 권고이다. 즉 앞으로 있을 일을 미리 예고하는 것이 선지자들의 중요한 사명이고 그들의 권위를 나타내는 표시가 되기도 하지만 (신18:22,사41:22,43:9)
그의 중심되는 사명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금, 여기에 밝히는 것이다. 미래를 열어 보이는 것도 현재 무엇이 이루어지고 있는가를 드러내기 위함이다.
우리의 공의의 판단이 증오가 되어서는 되지 않는다. 혁명보다 어려운 것이 증오를 이기는 것이다(최대치-여명의 눈동자에 나오는 빨치산 두목).
5. 외로움과 고뇌의 사람
선지 자들 중 그 누구도 자신이 선지자가 된 것이 스스로 반하거나 자기가 이룬 일을 자랑스럽게 여긴 것 같지는 않다(렘20:14∼17,18)
선지자들의 가슴에는 한 평생, 여기 들어온 자여, 아첨하는 말일랑 버릴지어다-라는 말이 새겨져 있다. 선지자가 된다는 것은 외톨이가 되어 고통을 격는다는 것이다.
그는 동시대인으로 부터는 미친 자라는 낙인이 찍히고 오늘날 몇몇 학자들로 부터는 비정상인이라고 불리운다.
선지자의 할 일은 사람들에게“그들이 듣든 듣지 않든"말하는 것이다.
선지자의 중심사명은 “야곱의 죄상을 밝히고 이스라엘의 죄를 규탄하는"(미3:8)것이다. 그리하여 사람들로 하여금“하나님을 배신하다가 ∼ 처참한 재난을 당한다"는 것(렘2::19)을 깨닫게 하고 그들에게 돌아서라고 권고하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들은 목적을 이루었던가?(렘25:3∼7,결국 이스라엘은 실패하고 말았다. 그러나 하나님의 구속사는 남은자들로 통하여 이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지자가 된다는 것은 즐거움이요 의기양양한 기쁨이기도하다(렘15:16)
6. 분석자, 전달자, 증인
선지자는 감시자(호9:8), 종(암3:7,렘24:4,26:5),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자(학1:13), 백성들
의 살아 갈 길을 분석하고 시험하는 자(렘6:27)이다.“너는 나의 입에서 떨어지는 말을 듣고 나 대신 그들을 깨우쳐 주어야 한다"(겔3:17)
선지자는 그가 살고 있는 현장에 쏠려있다. 그러나 그의 귀는 항상 하나님께 열려있다.
첫댓글 선지자적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하여..~♡
선지자는 그가 살고 있는 현장에 쏠려있다. 그러나 그의 귀는 항상 하나님께 열려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