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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4월14일(토)비 온 후 흐림
아침 일찍 대구 버스타고 관오사 오다. 공부모임 갖다. 혜등Pannadipa스님이 반야심경에 대하여 발제하고 토론하다. 오후6시에 마치고 <산쓰끄리트본 십지경 강좌>에 대한 준비를 논의하다. 운영위원장을 맡기로 하다.
돌아오는 길. 거대한 어둠의 얼굴에 외눈박이 눈이 반짝. 그 눈에서 눈물이 흘러. 그건 빛이다. 빛을 향하여 달려. 마치 신대륙을 찾아 나선 탐험대가 흑암의 폭풍 가운데서 등대를 발견한 듯 빛을 향해 나아가라. 그러나 그 끝은 신대륙이 아닌 다람쥐가 체 바퀴를 돌리는 곳인 걸. 출발은 거창하지만 도착하는 곳은 모두 같은 곳. 집 아니면 사무실, 제가 있던 그 구석자리로. 결국 다람쥐는 체 바퀴를 돌리는 수밖에 없어. 그래 뛰어봤자 벼룩. 서울에서 부산으로 달려가고, 미국으로 날아가도 벼룩이 뛰는 일에 불과하니 별다른 것이 아니다. 지구에서 달에 가고, 별에 간다 해도 마찬가지. 천상천하 벼룩의 뜀박질, 백년 인생 다람쥐 채 바퀴. 그렇지 않으면 뭘 할 거냐? 뜀박질하는 자기를 관조하는 벼룩은 벼룩이 아님을 안다. 바퀴를 돌리는 자기를 관찰하는 다람쥐는 다람쥐만인 것을 넘어선다. 자기를 객관화하여 바라볼 수 있으면 자기에게 갇히지 않는다. 이것이 갇힌 삶과 열린 삶의 차이다. 이 조그만 차이가 엄청난 효과를 가져 오느니, 바위에 눈이 생기면 학이 되어 날아다니리.
어디든 갈 수 있고, 어디서나 살아갈 수 있으며, 모든 것을 알 수 있다는 것은 현대인의 환상. 문명의 이기는 공간을 압축하고, 거리를 말소하며, 장소를 파괴한다. 생각나는 대로 어디든 훌쩍 떠나 가볼 수 있고, 누구든 만나러 갈 수 있다. 그러면 사람과 장소에 대한 그리움과 기다림이 빛바래어져, 소중하게 대해야할 것들이 사라진다. 그래서 신속한 만남과 이별이 유행하고, 여행은 소비될 뿐 모험이나 배움이 아니게 된다. 사람들은 지껄이지만 진심을 말하지 않고, 듣는 척하지만 듣는 게 아니다. People talking without speaking, hearing without listening. 침묵의 샘물에서 우러나오는 메아리 소리를 들어보라. 모든 사람이 위로 받기를, 들어주기를, 위안을 원한다고 중얼거린다. 그러면 깊은 동굴에서 무슨 응답이라도 들려오기나 할까? 어떤 답이라도 주어지기만 한다면. 허나 당신이 얼마나 기다릴 수 있느냐가 문제다. 당신은 진득하게 진심으로 얼마나 오래 기다릴 수 있나? 그런데 무엇을 기다린단 말인가? 무엇을 기다리는지 모르고 기다리는 사람이여! 결국 고도Godot는 오지 않는다.
2018년4월15일(일)맑음
반야심경의 설법하는 주인공은 관자재보살이다. 觀自在관자재는 觀관에 自在자재한 보살이다. Avalokita觀+isvara自在=avalokitesvara. 반야심경을 독송하는 사람은 관자재보살이 되어 觀自在行관자재행을 할 것이 기대된다. 그것이 照見五蘊조견오온하는 일이다. 조견은 vyalokayati=vi(나눔, 분석)+avalokita(관찰하다)=look down from on high, 높은 데서 내려다보듯 관찰하는 것이다. 관자재행을 하기 위해서는 조견오온을 해야 하는데, 오온을 조견한다는 것은 사념처를 한다는 뜻이다. 결국 반야바라밀다심경의 실천적 수행은 사념처 수행으로 귀결된다. 그 수행의 결과는 오온이 자성이 공한 것(이것을 自性空=空性)을 바르게 알게 됨으로써 마음에 걸림이 없는 경지(無罣碍무가애acittavarana)를 누리는 것이다. 오온에 자성이 비었다는 말은 무아를 깨닫는다는 것을 말한다. 위빠사나를 가르치는 <대념처경>과 반야심경에서 똑 같이 무아를 깨닫는 수행을 지시하고 있지만 반야심경에서는 너무 단도직입적이어서 좀 모호하게 들린다는 차이가 있을 따름이다. 위빠사나 수행으로 좋은 체험을 한 사람은 반야심경의 취지를 훨씬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고로 초기불교수행은 대승불교의 건전한 이해를 위한 초석이 된다. 초기불교에 대한 이해와 수행이 없는 대승불교는 사상누각이다. 그 폐해가 자못 심각하게 나타나고 있는 것이 한국불교의 현주소이다.
법명으로 생각해놓은 아름다운 말: 일산一珊, 유담柳潭
2018년4월16일(월)맑음
기공체조하고 점심 공양하다. 저녁 강의하다.
사슬에 묶인 코끼리를 생각한다. 자신이 코끼리임을 망각한 채 사슬에 매여 주인이 주는 밥
과 채찍에 길들여져 평생을 보내는구나. 얼마나 한심한가! 코끼리여, 밀림의 왕자였던 위용과 용맹을 잊었는가? 야생의 드넓은 초원과 숲 어디 간들 먹을 것과 살 곳 없으랴. 하지만 그대는 코끼리임을 잊어버렸으니 목줄에 매인 개 같은 꼴이 되었구나. 인간이여, 너도 사슬에 매인 코끼리 같은 삶을 살고 있지는 않은가? 네가 매고 있는 사슬은 눈에 보이지 않고 귀에 들리지 않으며 만져지지도 않지만 너의 24시간을 끌고 다니고 있지 않느냐? 사슬이란 무엇인가? 습관적인 반응과 의욕이 생기지 않는 활동, 의무적으로 해야 하는 일들, 의식주의 안정적인 확보를 위해서 하지 않으면 안 되는 번거로운 일이다. 사슬에 매인 삶은 자유가 없으며 불안하고 괴롭다. 그래서 너는 긴장을 풀고 죽은 듯이 쉬고 싶다. 그러나 사슬은 너를 일으켜 어디론가 끌고 간다. 너는 그 힘에 저항하고 버텨보지만 결국 사슬에 끌려가고 만다. 사슬에 끌려가는 삶의 말로는 복종, 무기력, 권태, 피로, 소진, 그리고 사망이다. 죽어야 끝이 나는 삶이다. 왜 그렇게 사느냐고 묻는다면 온 세상이 사슬에 묶여있어 누구도 거기서 벗어나 살 수 없는데 나는 어쩌란 말이냐, 이만큼 사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닌데 나더러 어쩌란 말이냐 고 되묻는다. 사슬에 묶인 채 잘 살아갈 수 있다면 그렇게 해도 된다. 그러나 인간이란 자신이 처한 상황을 객관화하여 떨어져서 바라보는 기묘한 능력(그걸 반성이나 반조라고 한다)을 타고 났다. 그것이 동물과 인간의 차이를 만들어 냈다. 사슬에 매인 삶은 사는 게 아니라 살아남기 위한 것(life for survival)이다. 우리는 고해에 깊이 잠겨 살아가는 深海魚심해어다. 심해어는 빛이 없기에 눈이 퇴화하고, 닥치는 대로 먹어야 하기에 입과 소화기관이 유달리 발달했다. 오직 먹고 소화하고 번식하며 포식자로부터 자기를 보호하고 도망치면서 살아간다. 몸에 비해 입이 너무 크기에 생긴 모습이 아귀 같고 괴물 같다. 인간이 심해어처럼 살아간다면 너무 슬프지 않은가? 그런데 기묘하게도 심해어 가운데 머리에 발광체를 매단 종류가 있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 빛을 비추면 먹이 감이 모여든다. 이런 종류의 심해어는 발광체로 먹이를 유인하여 잡아먹고 산다. 그런데 머리에 달린 발광체를 수행자에게 적용한다면 sati-sampajana사띠삼빠자나가 된다. 마음을 한곳으로 집중하여 주의를 기울이면서 지금 자신이 하고 있는 것을 알아차린다. 지금 현재 자기 자신의 행동과 숨은 의도, 주변 환경과의 관계를 알아차리고, 자극에 대한 인식과 반응을 알아차린다. 그러면 행동을 일으키는 의도와 일거수일투족의 동작과 자세, 원인과 결과를 꽤 뚫어 바라본다. 그 효과는 무엇인가? 명료함과 투명함이다. 불안에서 벗어난다. 초조하지 않고 유연해진다. 습관적으로 저지르든 실수를 반복하지 않아 고통에서 벗어나게 된다. 이런 삶은 깨어난 정신으로 살아가는 깨어있는 삶이다. 깨어난 심해어는 더 이상 아귀 형상이 아니라 바다 위를 나르는 킹피쉬Kingfish이다. 주의를 집중하여 정신이 깨어난 코끼리는 자기가 사슬에 매어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린다. 그리고 자신에게는 사슬을 끊을 수 있는 힘이 있다는 걸 깨닫게 된다. 힘을 되찾은 코끼리는 다리를 한번 휘저어 사슬을 묶은 말뚝을 뽑아버리고 늠름하게 걸어간다.
2018년4월17일(화)흐림
나는 일기쓰기를 너무 쉽게 여겼던 것 같다. 읽어줄 사람을 의식하면서 쓰는 것이 일기일 수 있을까? 그건 일기가 아니고 수필이나 글쓰기연습일 것인데. 누군가 내 글을 통해서 나를 들여다보고 나를 판단할 것이다. 나를 이해하고 공감하는 사람도 있고 그렇지 않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일기란 공개되는 순간 사적인 기록을 넘어서 공적인 것으로 변해버린다. 남의 눈을 의식해서 쓰는 일기이기에 내 생활이나 마음속에 일어난 것을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쓰지 못하는 것도 있다. 그렇지만 읽은 사람에게 직감적으로 짐작되는 바가 행간에서 묻혀 있을 수도 있다. 행간에서조차 어떤 냄새를 맡을 수 없다면 할 수 없는 일이다. 이건 나의 일기니까 나만이 알 뿐이다. 그렇기에 일기는 무게와 깊이도 없고 논리와 전후맥락도 없이 쓰지는 대로 쓰는 것이다. 그래서 일기는 수필이다. 오늘 밤 생각을 이렇게 정리해놓고 자려한다. 늦게까지 다치하라 세이슈(立原正秋, 김윤규, 1926~1980)와 로만 킴(김기룡金夔龍, 1898~1967)이라는 변경인의 삶을 생각했다. 이국 타향에서 주류의 틈새에 끼어 살아보려고 안타까울 정도로 애쓰다 결국은 어디에서도 안식을 얻지 못한 채 죽어간 디아스포라diaspora 한국인들이다. 또 카뮈의 <전락>을 읽고 생각한다. 우리는 모두 같은 흙탕에서 구르고 있다고 카뮈가 말한다. 그렇다. 나도 혼자 깨끗하고 고상한 척하고 살지만 다른 사람과 똑 같이 진흙탕에 몸을 굴리면서 요령 좋게 살고 있지 않은가? 지금 한국에서 노동하지 않고도 의식주 걱정 없이 편안하게 살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나는 그럴 수 있는 행운아 가운데 한 사람이다. 이것을 축복이라 하자니 염치가 없고, 부끄러워하자니 내숭을 떠는 짓이다. 내게 도움을 주고 있는 사람들에게 고마울 따름이다. 나는 전적으로 고마운 분들의 호의에 의존하여 살고 있다. 그런데 나는 그들에게 어떻게 무엇으로 보답하고 있는가?
2018년4월18일(수)맑음
내가 사람들에게 가르치는 방식은 설교, 강의, 주장, 훈계가 아니라 해설, 안내, 권유, 격려, 관심이다. 내가 사람들에게 무엇을 하라, 하지 말라고 훈계하고 주장할 수 있겠는가? 나는 자신에게 먼저 물어야한다. 너는 사람들에게 가르치는 대로 살고 있는가? 내가 하는 말과 행동이 얼마나 명실상부한가? 나는 내가 말한 대로 살지 못한다. 나는 우리가 나아가야할 방향을 가리키며 함께 그 방향으로 같이 가는 게 어떻겠느냐고 권유하면서 격려할 따름이다. 누가 인생과 세상에 대한 문제의 답을 손안에 가지고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가? 출가수행자와 성직자들은 자기들이 전승받은 교리나 경전에 세상의 모든 문제를 일거에 해결할 최종 답이 있다고 믿으면서 그걸 자랑스레 선전한다. 그러나 만병통치약이 선전은 그럴듯하지만 효과 가 없듯이, 기성화 된 답들은 현실에서 별로 효과가 없다. 진실로 효과가 있었다면 출가수행자와 성직자 자신들이 모두 최고의 경지에 올라 부처나 성자가 되고도 남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주장하는 것, 믿고 싶은 것과 실제는 다르다. 생활 가운데서 수행을 견지하는 것은 실제 상황이라, 최전방에서 보초를 서는 것과 같다. 현실은 실전이다. 실전에서는 주의 깊음과 알아차림, 정직과 인내, 신심과 열정이 요구된다.
광양 백운사 상백운암을 다녀오다. 1985년 가봤던 기억을 떠올리며 암자를 방문하다. 그 당시 지엄스님과 묵담스님이 암자의 지붕을 고치고 있었다고 기억된다.
2018년4월19일(목)맑음
새 선원에 모여서 블라인더를 선정하고 점심 공양을 함께하다. 죽향 앞 동네 농구코트에서 가지고 온 커피를 나눠 마시다. 가구점에서 식탁과 의자, 거울을 사다.
김소월의 <바라건대 우리에게 우리의 보습 대일 땅이 있었다면>을 생각한다.
나는 꿈꾸었노라, 동무들과 내가
가지런히
벌가의 하루 일을 다 마치고
석양에 마을로 돌아오는 꿈을
즐거이, 꿈 가운데
그러나 집 잃은 내 몸이여,
바라건대 우리에게 우리의 보습 대일 땅이 있었다면!
이처럼 떠돌으랴, 아침에 저물 손에
새라 새롭은 탄식을 얻으면서.
동이랴, 남북이랴,
내 몸은 떠가나니, 볼지어다,
희망의 반가임은, 별빛이 아득임은.
물결뿐 떠 올라라, 가슴에 팔다리에.
그러나 어쩌면 황송한 이 심정을! 날로 나날이 내 앞에는
자칫 가늘은 길이 이어가라. 나는 나아가리라
한 걸음 한 걸음. 보이는 산비탈엔
온새벽 동무들 저 저 혼자 ― 산경(山耕)을 김매이는
소월은 평안북도 곽산에서 생활고로 32살의 짧은 생을 정리했다. 어찌 그리 빨리 가시는가? 난세에 제 정신 갖고 오래 산다는 것이 얼마나 괴로웠을까? 더구나 식민지 치하에서 시를 쓰면서 가족의 생계를 유지한다는 것 자체가 생함지옥(生陷地獄, 삶이 곧 지옥)이었으리라.
저녁 강의하다.
2018년4월20일(금)맑음
연기적으로 세상을 본다는 것은 불자의 기본이면서도 쉬운 일이 아닌가보다. 연기적으로 사유하고 실천하는 것이 불교적으로 산다는 것이다. 불교적으로 산다는 것은 보편타당한 진리를 실천하는 것을 말한다. ‘진리를 실천한다.’는 말은 무슨 의미일까? 이게 말이 되는 말인가? ‘진리’도 정의하기가 간단하지 않는데, ‘진리를 실천한다.’고 하니 산 넘어 산이다. 사람은 모름지기 쉬운 말로 쉽게 말하도록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마나 한 말이 되어, 자신과 남을 속이게 된다.
2018년4월21일(토)맑음
새 선원으로 이사 짐을 들이고 정리하다. 학생들이 하루 종일 불단을 장엄하고, 침대를 들이며, 책장을 정리하고 청소를 하다. 짐 정리를 대충하고 식탁에 둘러앉아 차를 마시며 환담을 나누다.
2018년4월22일(일)흐림, 간간히 비
새 선원에서 책 정리하다. 일상의 삶을 성실히 살아가야 하는 것이지, 수행한다고 무엇이 크게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단지 수행으로 인생이 변할 거라는 어떤 약속도 보장할 수 없다. 그러면 ‘수행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수행에 결부되는 환상과 기대를 버려야 한다. 30년 수행했다고 하는 사람 가운데 자타가 인정할 만큼 긍정적으로 변한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되는가? 한 번 찾아보라. 찾은 사람은 행운아일 것이다.
2018년4월23일(월)비
이사하다. 이제 오늘부로 옮겨 다니는 생활을 끝내다. 연경보살님 부군이 액자를 단다. 기술자가 와서 창문마다 블라인더 설치하다. 불단 정리하고 마이크 장치하다. 명상적인 분위기가 연출된다. 차탁에 둘러 앉아 차를 마시면서 청정도량이 장엄되었음을 수희찬탄하다. 저녁이 되자 빗줄기를 뚫고 학생들이 우루루 나타난다. 명성과 해성이 꽃과 떡을 들고 오다. 아미화보살은 꽃으로 법상을 장엄하다. 부동거사, 초아, 하심보살도 오다. 저녁 강의하다.
2018년4월24일(화)맑음
식당방에 문 달다. 현관 다이얼 키 시설하다. 거실에 책장 정리 다시 하다. 저녁에 위빠사나 명상하다. 6명 참석.
2018년4월25일(수)맑음
모처럼 화창한 아침. 문 열고 바람을 통하다. 새집증후가 느껴진다. 며칠 햇볕을 쬐고 바람을 통하면 쾌적해지겠지. 주문할 경전을 찾아보다. 한국 빠알리성전협회에서 나온 숫타니파타(양장본), 빅쿠비방가, 빅쿠니비방가, 티베트-한글 사전, 불교와 섹슈얼리티(양장본), 초기불전연구소에서 나온 디가니카야4권, 맛지마니카야, 상윳타니카야6권, 앙굿타라니카야6권, 담마상가니2권, 들숨날숨에 마음 챙기는 공부(대림스님). 저녁강의하다.
2018년4월26일(목)맑음
송화가루 날려서 마루에 희노랗게 쌓인다. 문인, 향인보살과 븟반에서 점심 공양 함께하다. 문정과 현정 와서 양파를 방안에 놓아 새집증후를 제거하려 하다. 그러자 연경보살과 그의 부군이 와서 액자를 달다. 차실과 객실 문 위에 편액을 달고, 내 방에 밀라레빠 존자상은 침대 위에. 서옹선사의 글씨는 문 위에 달다. 주형훈이 창원으로 출장 나갔다가 돌아가는 길에 선원에 들리다. 법무법인을 경영하는 지인이다.
첫댓글 스님의 수행일기, 반야심경이며 금강경입니다.
많은 이들이 접할 수 있게 책으로 발간되면 얼마나 좋을까 늘 생각합니다.
선진보살님, 새 선원에 한번 다녀가세요.
@Wondam:원담 감사합니다 스님.
스님 계신 곳, 가난한 친정을 두고 멀리서
애틋한 마음 뿐인 듯, 그립고 빚진 곳입니다.
지방 선거 치르고 봬러 가겠습니다.
청안하십시오._()_
@선진 선도거사와 선진보살, 이웃을 이롭게 하리라, 사람을 섬기리라는 선한 의도가 열렬하고, 약속한 것을 실천한다는 믿음을 주는 사람은 한 마을과 지방의 리더가 될만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