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출처: 광주대교구 꾸르실리스따 원문보기 글쓴이: 이선정스테파노
2026년 5월 4일 월요일
[(백) 부활 제5주간 월요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말씀의 초대
바오로와 바르나바가 앉은뱅이를 일으키는 것을 본 군중이, 자신들에게 제물을 바치려 하자, 두 사도는 이를 말린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보내실 보호자 성령께서 모든 것을 가르치실 것이라고 하신다(복음).
제1독서
<우리는 복음을 전하여 여러분이 헛된 것들을 버리고 살아 계신 하느님께로 돌아서게 하려는 것입니다.>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 14,5-18
그 무렵 이코니온에서는 5 다른 민족 사람들과 유다인들이
저희 지도자들과 더불어 바오로와 바르나바를 괴롭히고
또 돌을 던져 죽이려고 하였다.
6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그 일을 알아채고
리카오니아 지방의 도시 리스트라와 데르베와 그 근방으로 피해 갔다.
7 그들은 거기에서도 복음을 전하였다.
8 리스트라에는 두 발을 쓰지 못하는 사람이 하나 있었는데,
그는 앉은뱅이로 태어나 한 번도 걸어 본 적이 없었다.
9 그가 바오로의 설교를 듣고 있었는데,
그를 유심히 바라본 바오로가 그에게 구원받을 만한 믿음이 있음을 알고,
10 “두 발로 똑바로 일어서시오.” 하고 큰 소리로 말하였다.
그러자 그가 벌떡 일어나 걷기 시작하였다.
11 군중은 바오로가 한 일을 보고 리카오니아 말로 목소리를 높여,
“신들이 사람 모습을 하고 우리에게 내려오셨다.” 하고 말하였다.
12 그들은 바르나바를 제우스라 부르고 바오로를 헤르메스라 불렀는데,
바오로가 주로 말하였기 때문이다.
13 도시 앞에 있는 제우스 신전의 사제는
황소 몇 마리와 화환을 문으로 가지고 와서,
군중과 함께 제물을 바치려고 하였다.
14 바르나바와 바오로 두 사도는 그 말을 듣고서
자기들의 옷을 찢고 군중 속으로 뛰어들어 소리를 지르며 15 말하였다.
“여러분, 왜 이런 짓을 하십니까? 우리도 여러분과 똑같은 사람입니다.
우리는 다만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할 따름입니다.
여러분이 이런 헛된 것들을 버리고
하늘과 땅과 바다와 또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드신
살아 계신 하느님께로 돌아서게 하려는 것입니다.
16 지난날에는 하느님께서 다른 모든 민족들이 제 길을 가도록 내버려두셨습니다.
17 그러면서도 좋은 일을 해 주셨으니,
당신 자신을 드러내 보이지 않으신 것은 아닙니다.
곧 하늘에서 비와 열매 맺는 절기를 내려 주시고 여러분을 양식으로,
여러분의 마음을 기쁨으로 채워 주셨습니다.”
18 그들은 이렇게 말하면서 군중이 자기들에게 제물을 바치지 못하도록 겨우 말렸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아버지께서 보내실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쳐 주실 것이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4,21-26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1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나도 그를 사랑하고 그에게 나 자신을 드러내 보일 것이다.”
22 이스카리옷이 아닌 다른 유다가 예수님께,
“주님, 저희에게는 주님 자신을 드러내시고
세상에는 드러내지 않으시겠다니 무슨 까닭입니까?” 하자,
23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그에게 가서 그와 함께 살 것이다.
24 그러나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내 말을 지키지 않는다.
너희가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다.
25 나는 너희와 함께 있는 동안에 이것들을 이야기하였다.
26 보호자,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해 주실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의 묵상
이정하 시인의 “바보 같은 사랑”이라는 시의 다음 구절로 묵상을 시작합니다.
“셈이 빠르고 계산에 능한 사람은 사랑에 빠지지 않는다. 사랑에 빠진 척 얼굴만 찌푸리고 있지 잘 살펴보면 언제라도 달아날 궁리만 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래, 사랑은 그런 우직한 사람만 하는 거다. 남들은 미쳤다고 하는 일을 서슴없이 하는, 오지 않을 줄 뻔히 알면서도 그대가 오기 전까지는 결코 한 발자국도 떼지 않는 미련한 사람들. …… 모든 걸 다 잃는다 해도 스스로 작정한 일, 떨어질 줄 뻔히 알면서도 마지막 순간까지 제 한 몸 불태우는 단풍잎처럼.”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랑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만이 예수님의 말씀을 지킬 것이라고 하십니다.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그에게 가서 그와 함께 살 것이다”(요한 14,23). 계산이 빠르고 자기 이익이 먼저인 사람은 사랑에 빠지지 않기에 예수님의 말씀을 지키기 어렵습니다. 말씀을 지키려면 우직해야 합니다. 자기 자리를 우직하게 지키며 기다릴 수 있는 사람만이 예수님의 말씀을 지킬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사랑은 십자가의 우직함, 십자가의 어리석음, 십자가의 희생과 연결됩니다. 모든 것을 다 잃는다 해도 끝까지 사랑하는 것입니다. “떨어질 줄 뻔히 알면서도 마지막 순간까지 제 한 몸 불태우는 단풍잎”과 같은 것입니다.
오늘도 예수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실 것입니다. 우직하게, 바보스럽게 예수님의 말씀을 지킵시다.(권순호 알베르토 신부)
정통 가톨릭교회 가르침은 누군가를 신격화·우상화시키지 않습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장화 형상인 이탈리아 지형의 발뒷굼치에 해당하는 지역에 몰페타라는 이름의 지역이 있습니다. 대영성가 안토니오 벨로 주교님(1935~1993)이 사목하셨던 교구입니다. 지금 현지에서는 주교님에 대한 시복시성를 절차를 진행 중입니다.
안토니오 벨로 주교님은 대단한 신심가였습니다. 특별히 성모 신심이 돈독하기로 유명했습니다. 이분이 쓰신 성모님 관련 기도 모음집에 한국어로도 번역되었습니다. 제목이 ‘성모님과 함께 하는 31일 기도’입니다.
기도문 하나하나를 읽어보면 이분의 성모 신심이 얼마나 탁월한지 잘 알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주교님은 결코 성당 안에만 머무시며 묵주기도만 열심히 바치던 신심가가 아니었습니다.
주교로 임명되자마자 교구 내 모든 본당에 가난한 이웃들을 돌보는 까리따스회 설립을 의무화했습니다. 교구청 내에 마약 중독자 구호 센터, 난민과 이주민을 돕기 위한 센터를 설치하였습니다. 가장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웃들을 위해 교구와 본당의 문을 활짝 연 것입니다.
뿐만아니라 안토니오 벨로 주교님은 당시 벌어지고 있던 걸프전을 노골적으로 비판하셨고, 문제 해결에 적극적이지 않고 어정쩡한 자세를 취하고 있는 NATO를 대놓고 성토하셨습니다. 돌아가시기 1년 전인 1992년 위암 말기로 앉아 있기도 힘든 상황에서도 이탈리아에서 아드리아해를 거쳐 사라예보에 이르는 평화 행진을 주도했습니다.
안토이오 벨로 주교님의 명성을 익히 잘 알고 계셨고 행동 노선을 함께 하셨던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2018년 벨로 주교님 선종 25주년을 맞아 그 작은 교구를 사목 방문하셨습니다. 추모 미사를 집전하셨는데, 미사에는 4만 여명의 신자들이 모였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강론 내내, 안토니오 벨로 주교님의 행적을 말씀하시면서 주교님처럼 우리도 존재 자체로 또 다른 마리아가 되고, 또 다른 복음이 되자고 초대하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안토니오 벨로 주교님에게서 균형 잡힌 성숙한 성모 신심이 어떤 것인지를 잘 확인할 수 있습니다. 좋으신 성모님께 예쁜 꽃다발을 봉헌하는 것도 좋은 성모 신심입니다.
성모님의 겸손하면서도 위대한 생애를 아름다운 기도문이나 문장으로 표현하는 것도 아무 좋은 성모 신심입니다. 묵주기도를 바치면서 성모님과 함께 예수님의 생애를 묵상하는 것도 성모신심가로 좋은 모습입니다.
그런데 거기서 그친다면 50퍼센트 부족한 어색한 성모 신심입니다. 그 위에 뭔가가 더 필요합니다. 나자렛의 마리아가 서둘러 아인카림을 향했듯이 가난하고 고통받은 이웃들을 부지런히 찾아 나서는 모습이 참된 성모 신심가에게 요청됩니다. 복음을 선포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나 자체가 복음이 되는 것이 필요합니다.
오늘 우리가 봉독하는 첫 번째 독서 사도행전의 내용이 참으로 흥미롭습니다. 바오로와 바르나바가 리스트라에 머물 때였습니다. 거기에는 태어날 때부터 심각한 지체 장애를 안고 살아온 사람이 있었습니다. 설교 중이던 바오로 사도의 눈에 그의 모습이 포착되었습니다.
그를 유심히 바라보던 바오로 사도는 그에게 외칩니다. “두 발로 똑바로 일어서시오.”(사도 14,10) 그러자 그가 벌떡 일어나 걷기 시작했습니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군중은 한 목소리로 외쳤습니다. “신들이 사람 모습을 하고 우리에게 내려오셨다.” 그러면서 바르나바를 제우스라 부르고 바오로를 헤르베스라 불렀습니다. 신과 동격으로 본 것입니다. 그리고 두 사도에게 황소 몇 마리와 화환을 제물로 바치려고 했습니다.
그 모습을 본 두 사도는 화들짝 놀라 자신들의 입고 있던 옷을 갈기갈기 찢으며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여러분, 왜 이런 짓을 하십니까? 우리도 여러분과 똑같은 사람입니다. 우리는 다만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할 따름입니다.”
보십시오. 바오로 사도와 바르나바 사도의 자신의 신원에 대한 정확한 자기 이해를! 그들은 자신의 손으로 엄청난 기적을 행했지만, 절대 우쭐거리지 않았습니다. 이 모든 놀라운 치유와 기적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시는 것임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스스로를 절대로 신격화하거나 우상화하지 않습니다.
반면에 사이비 교주들은 정반대입니다. 그들에게는 참된 종교인으로서 반드시 지녀야 할 가장 중요한 덕행인 겸손의 덕이 심각하게 결여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스스로를 하늘 높이 높이 들어 올립니다. 모든 문제의 해결사로 과장 홍보합니다.
2027년 서울 세계 청년대회를 앞두고 요즘 나주에서는 각종 홍보 영상이나 광고물을 제작해서 지속적으로 올리고 있는데, 내용은 언제나 한결같습니다. 불치병 환자 치유 케이스, 그리고 누군가를 신격화하는 강론이 계속 올라옵니다. 강론 내용 들어보면 너무나 유치하고 기괴하고 허무맹랑합니다.
나주의 결정적인 문제 한 가지는 불순명입니다. 불순명 하는 이유는 이미 확보해놓은 대지며 건물이며, 후원자며, 이것을 포기할 수 없는 것입니다. 거기다 자매가 신격화되어 버렸습니다. 추종자들이 똘똘 뭉쳐있습니다. 이미 여러 사악한 무리들 생계 수단으로 전락해버렸기에, 되돌이킬 수가 없습니다.
정통 가톨릭교회로부터 끝도 없이 멀어진 사이비 집단들이 조속히 따뜻하고 편안한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오길 기도합니다. 허무맹랑하고 기괴한 가르침에 현혹되어 신앙생활의 균형 감각을 상실한 형제자매들이 하루빨리 제정신을 차리고 교회의 품으로 돌아오길 고대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누울 자리를 보고 다리를 뻗어라.’라는 말이 있습니다. 판단을 잘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은 작년 겨울에 베네수엘라의 대통령을 체포해서 미국의 법정에 세웠습니다. 베네수엘라는 부통령이 대행을 맡으면서 별다른 저항이 없었습니다. 지난 2월 28일에 트럼프 대통령은 이번에는 이스라엘과 함께 이란을 공격했습니다. 이란의 최고 지도자와 군 수뇌부가 그 공격으로 사망했습니다. 베네수엘라처럼 이란도 별 저항 없이 미국의 공격을 받아들일 거로 생각했습니다. 미국의 군사력은 세계 최강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란은 베네수엘라가 아니었습니다. 3,000년 넘는 역사를 가진 민족입니다. 제국을 이루었던 민족입니다. 험준한 산악이 있고, 바다가 있는 나라입니다. 그런 민족이기에 미국의 공격에 바로 반격하였습니다. 미국의 군사시설을 공격했고, 세계 원유의 20%가 움직이는 호르무즈 해협을 봉쇄한다고 했습니다. 이란 국민은 베트남 국민이 그랬던 것처럼 미국의 공격에 저항했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누울 자리가 아닌데 다리를 뻗었고, 그 영향으로 세계 경제는 심각한 어려움을 겪어야 했습니다.
지난 3월 10일 미국 전쟁부 장관 피트 헤그세스는 기자단 브리핑에서 구약성경의 시편을 근거로 미국과 이스라엘의 이란 공격으로 촉발된 전쟁을 정당화했습니다. 그는 시편 144편 1절에서 “나의 반석이신 주님께서는 찬미 받으소서, 내 손에 전투를, 내 손가락에 전쟁을 가르치시는 분”이란 표현을 인용했습니다. 그러자 예루살렘 라틴 총대주교 피에르 바티스타 피자발라 추기경은 “전쟁을 정당화하기 위해 하느님의 이름을 사용하는 것은 중대한 죄에 속한다.”라고 반박하면서, “하느님은 분쟁 속에 고통받고 죽어가는 이들과 함께 계시지, 종교를 정치적 목적에 이용하는 이들과 함께 계시지 않는다.”라고 역설했습니다. 미국의 전쟁부 장관도 누울 자리를 보고 다리를 뻗지 못했습니다. 마치 바리사이와 율법 학자들이 하느님의 이름으로 하느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했던 것과 같습니다. 대사제 가야파가 ‘이스라엘 민족을 위해서 많은 사람이 죽는 것보다는 한 사람이 죽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라고 말했던 것과 비슷합니다. 그것은 세상의 논리이지, 하느님의 뜻이 될 수 없습니다.
구약성경과 신약성경 모두 하느님을 계시하는 책이지만, 구약은 약속이고, 신약은 그 약속의 실현입니다. 계시의 정점은 신약성경이 증언하는 예수 그리스도이시고, 그 정점을 근거로 성경의 다른 내용들을 해석하는 것이 가톨릭의 전통적 성경 해석 원칙입니다. 이런 원칙에 따르면, 신약성경이 증언하는 예수님은 말씀과 행동으로 비폭력의 하느님을 선포하시고, 자신도 철저히 비폭력의 삶을 사셨기에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이라면, 하느님의 이름으로 전쟁을 정당화할 수 없습니다! 말과 행동으로 철저히 비폭력을 추구하셨던 예수님을 하느님 계시의 절정이라고 믿는 그리스도인이라면, 구약성경의 일부 대목을 근거로 하느님의 이름으로 폭력과 전쟁을 정당화할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의 네타냐후 총리는 역사적으로 예수님보다 칭기즈칸이 더 위대했다고 말하면서 자신들의 전쟁을 합리화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군사적으로 그렇게 막강했던 칭기즈칸의 제국은 지금 사라지고 없습니다. 그에 반해서 너무도 무력하게 십자가에 죽었던 예수 추종자들의 모임인 교회는 과거에도 있었고, 지금도 앞으로도 계속 존속할 것입니다.
사람들은 오늘 바오로와 바르나바를 신으로 생각했습니다. 바오로는 헤르메스로, 바르나바는 제우스로 생각했습니다. 세상의 관점에서는 그렇게 생각할 수 있고, 바오로와 바르나바도 그렇게 대접을 받으면서 기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그것은 누울 자리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발을 뻗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여러분, 왜 이런 짓을 하십니까? 우리도 여러분과 똑같은 사람입니다. 우리는 다만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할 따름입니다. 여러분이 이런 헛된 것들을 버리고 하늘과 땅과 바다와 또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드신 살아 계신 하느님께로 돌아서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신앙은 누울 자리를 보고 다리를 뻗는 것입니다. 우리가 누울 자리는 전쟁과 폭력이 아닙니다. 우리가 누울 자리는 권력과 명예가 아닙니다. 우리가 누울 자리는 겸손과 희생입니다. 우리가 누울 자리는 나눔과 사랑입니다. 그것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 주셨던 ‘누울 자리’였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도 누울 자리를 잘 아셨습니다. 이제 교회의 시대, 성령의 시대를 아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보호자,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해 주실 것이다.”
<우리, 사랑을 사랑해요>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나도 그를 사랑하고 그에게 나 자신을 드러내 보일 것이다.”(요한 14,21)
우리
사랑을
사랑해요
우릴
사랑이
만날 거예요
우리
사랑을
사랑해요
우린
사랑을
만날 거예요
우리
사랑을
사랑해요
우릴
사랑이
품을 거예요
우리
사랑을
사랑해요
우린
사랑을
품을 거예요
우리
사랑을
사랑해요
우릴
사랑이
사랑할 거예요
우리
사랑을
사랑해요
우린
사랑과
하나될 거예요
우리
사랑을
사랑해요
우릴
사랑이
사랑 삼을 거예요
우리
사랑을
사랑해요
우린
사랑이
될 거예요
우리
사랑을
사랑해요
오늘의 성인
성 플로리아노 (Florian)
활동년도 : +304년
신분 : 순교자
지역 : 로어흐(Lorch)
같은 이름 : 플로리아누스, 플로리안
오스트리아 지방 노리쿰(Noricum)에 주둔하고 있던 로마군의 장교이던 성 플로리아누스(Florianus, 또는 플로리아노)는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그리스도교 박해 때 스스로 그리스도인임을 선언하고 집정관인 아퀼리누스(Aquilinus)에게 자수하였다. 그는 온갖 고문을 당한 후 몸에 큰 돌을 매단 채 엠스(Ems) 강에 던져지는 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그의 시신은 한 신심 깊은 여인에 의해 수습되어 로어흐 근방 아우구스티누스 수도원에 모셨다가 1138년에 다시 로마(Roma)로 옮겼다. 1184년 교황 루키우스 3세(Lucius III)는 성인의 유해 일부를 폴란드의 카시미르(Casimir) 왕과 크라쿠프(Krakuw)의 주교에게 주었다. 그래서 그때부터 성 플로리아누스는 오스트리아뿐만 아니라 폴란드에서도 수호성인으로서 공경을 받게 되었다. 또한 그는 소방관들의 수호성인이다.
성녀 펠라지아 (Pelagia)
활동년도 : +300년경
신분 : 동정순교자
지역 : 타르수스(Tarsus)
같은 이름 : 뻴라기아, 뻴라지아, 펠라기아
성녀 펠라기아(또는 펠라지아)는 용모가 매우 뛰어난 덕분에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아들과 약혼하였으나 이를 탐탁하게 생각지는 않았다. 그래서 그녀가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인이 되자 그 젊은이는 자살하고 말았다. 황제가 성녀 펠라기아를 벌하는 대신 오히려 탐하려고 했을 때 그녀는 오히려 부끄럽게 만들었다. 이에 화가 치민 황제는 그녀를 불에 구워 죽이고 말았다.
성 요한 후톤(John Houghton)
활동년도 : +1535년
신분 : 신부, 순교자
지역 : 영국(UK)
같은 이름 : 요안네스, 요한네스, 조반니, 조안네스, 조한네스, 존, 죤
성 아우구스티누스 웹스터(Augustine Webster)는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수학한 뒤 카르투지오 회원이 되었으며, 1531년에는 잉글랜드(England) 악솔름(Axholme)의 원장이 되었다. 그는 런던의 수도원을 방문하러 가던 중 성 요한 후톤(Joannes Houghton)과 성 로베르투스 로렌스(Robertus Lawrence)와 함께 토마스 크롬웰을 만나려다가 체포되어 런던탑에 갇혔다. 그들은 헨리 8세의 수장령을 적극 거부하고 타이번(Tyburn)에서 순교하였다. 그들은 모두 1970년 10월 25일 교황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잉글랜드와 웨일스(Wales)의 40명의 순교자들로 시성되었다.
성 고데하르도(Godehard)
활동년도 : 960-1038년
신분 : 주교
지역 : 힐데스하임(Hildesheim)
같은 이름 : 고데하르두스, 고타르도, 고타르두스, 고타르드
독일 바이에른(Bayern) 지방에서 태어난 성 고데하르두스(Godehardus, 또는 고데하르도)는 그의 아버지가 일하고 있던 니더 알타이흐(Nieder-Altaich) 수도원의 참사회에서 교육을 받고 후에 참사회 의장이 되었다. 그는 990년에 사제 서품을 받고 베네딕토회 니더알타이크 수도원의 수도승이 되었다. 996년 수도원장이 된 그는 뛰어난 지도력을 발휘하여 수도원의 규율을 바로 잡았다. 이 사실을 높이 평가한 성 헨리쿠스 2세(Henricus II, 7월 13일) 황제는 그에게 다른 많은 수도원의 개혁작업을 맡겼다. 그는 이 모든 일들을 성공적으로 완수하였다.
1022년 힐데스하임의 성 베른바르두스(Bernwardus, 11월 20일) 주교가 선종하자 그가 후계자로 임명되었다. 그래서 그는 이번에는 교구의 성직사회를 정화하는데 혼신의 힘을 다해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는 주교좌 학교 건립에도 큰 기여를 하였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집을 만들어 구호사업에도 헌신하였다. 스위스와 이탈리아를 잇는 터널과 철도는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는데, 그 이유는 성 고데하르두스가 세운 여행자 숙박소가 인근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고타르두스(Gothardus)로도 불리는 그는 1131년 교황 인노켄티우스 2세(Innocenti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복자 미카엘 지드로익(Michael Giedroyc)
활동년도 : +1485년
신분 : 증거자
지역
같은 이름 : 마이클, 미가엘, 미구엘, 미키
리투아니아(Lithuania)의 빌나(Vilna, 오늘날 리투아니아의 수도인 빌뉴스, Vilnius) 근교에서 어느 귀족의 자제로 태어난 미카엘 지드로익은 머리는 크고 몸집이 작았을 뿐만 아니라 팔을 제대로 사용할 수 없었고, 어릴 때의 사고 때문에 다리까지 사용할 없게 되었다. 그는 건강 때문에 학업을 자주 중단하였다. 그러나 신심은 돈독하였으므로 어릴 때부터 그는 고행을 실천하고 말을 적게 했으며, 1주일에 4일은 단식하고 가능하면 숨은 생활을 하려고 애썼다. 그래서 그는 폴란드 크라쿠프(Krakow)의 메트로 성모 수도원에서 성 아우구스티누스회에 입회하였지만 그의 거처와 성당 왕래만을 허용 받았을 뿐이었다.
이런 조건에서도 그는 온종일 기도로 보냈고, 고기는 전혀 입에 대지도 않고 오로지 채소만 먹을 뿐이었다. 그의 고행은 극에 달한 듯하였고, 또 병중이거나 노령에도 조금도 완화하지 않았다. 이런 거룩한 사람에게 하느님께서 온갖 은혜를 허락하셨는데, 한 번은 성당의 십자가에서 내려주신 말씀을 듣기도 했다. 그 외에도 그는 예언과 기적의 은혜까지 받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