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르심 -
☆ 2013년 다해 12월1일 (자) 대림 제1주일
[수원]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
수원교구 오산성당 전 삼용 요셉 신부
† 제1독서 : 이사 2, 1 - 5
† 제2독서 : 로마 13, 11 - 14ㄱ
† 복음 : 마태 24, 37 - 44
오늘은 대림 제1주일입니다. 전례력으로 새로운 한 해를 시작하는
오늘, 교회는 마지막 때에 대하여 묵상하도록 우리를 초대하고
있습니다. 세상이 끝나면 그것으로 우리 모두가 멸망하는 것이
아니라, 다시 오시는 주님에게서 구원을 얻게 됩니다. 마지막 때가
곧 참된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대림 시기를 시작하며 다시 오실
예수님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늘 깨어 있도록 합시다.
★ 이사야 예언자는 유다와 예루살렘의 앞날에 대하여 예언한다.
예루살렘은 모든 민족들이 하느님을 경배하고자 모여드는 곳이 될
것이다. 그리하여 주님의 말씀에 따라 민족들이 영원한 평화를 누리게
될 것이다(제1독서).
★ 바오로 사도는 로마의 신자들에게 어둠의 행실을 버리고 빛의 갑옷을
입으라고 권고한다. 구원이 더욱더 가까워졌기 때문이다(제2독서).
★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재림에 관하여 언급하시며 그것은 노아의
홍수처럼 예고 없이 닥치게 된다고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도둑이 언제
올지 모르는 것을 대비하는 집주인처럼 주님을 맞이하기 위한 준비를
해야 한다(복음).
◈ 오늘의 묵상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두 가지 방식으로 오십니다. 첫 번째는
‘숨어서’ 오시는 것입니다. 그분의 강생은 비천한 가운데 이루어졌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뒤에도 숨어서 오십니다. 곧
그분께서는 가장 보잘것없는 이의 모습으로 오시며(마태 25,40 이하 참조),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그분의 이름으로 함께 모였을 때에도 그 자리에
오십니다(마태 18,20 참조). 성체성사를 통해서 오시는 방식도 숨어서
오시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로, 예수님께서는 ‘영광 속’에
오십니다. 당신의 권능으로 세상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러 오시는
것입니다. 이를 예수님의 ‘재림’이라고 합니다.
오늘 복음은 사람의 아들 곧 예수님께서 오시는 것에 대하여 이야기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오시면 노아 때와 같은 일이,
소돔에서 일어난 일이 벌어진다고 하십니다. 그러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때에 두 사람이 들에 있으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 두 여자가 맷돌질을 하고 있으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서로 다르지 않고 비슷한 처지에서
산다고 할지라도, 그 사람의 내면에 따라 어떤 이에게는 예수님의 재림이
심판이 되고, 어떤 이에게는 구원이 된다는 것입니다.
숨어서 오시는 예수님을 제대로 만나고자 평소에 노력했던 사람은 분명코
그분께서 영광 속에 오시더라도 당황하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영광에
싸여 오시는 예수님을 더욱 기꺼이 맞이하며 반길 것입니다. 대림 시기를
시작하면서, 우리에게 오시는 예수님을 잘 맞이하도록 늘 깨어 있어야
하겠습니다.
- 매일 미사 -
◈ [청주] 나보다 먼저 나를 /
반영억라파엘 감곡매괴 성모성당 신부님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2013년 가해 12월1일 대림 제1주일
<너희는 준비하고 깨어 있어라.>
+ 마태오 24,37-44
나보다 먼저 나를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언제나 우리를 기다리십니다. 우리가 주님을 기다리기보다 먼저
우리를 기다리고 계시는 주님의 마음을 헤아리는 가운데 은총을
입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성탄축일 전 4주간을 대림절이라고 합니다. 대림이라는
말은 기다린다는 뜻입니다. 무엇을 기다립니까? 주님을 기다립니다.
세 가지 의미로 구분해 보면,
첫째로 우리는 우리를 구원하실 구세주의 탄생을 기다립니다.
예수님께서 베들레헴 마구간에서 우리의 구원자로 탄생하셨고
실제로 인류에게 구원의 은총을 주시고 계시니 그 날을 경축하는
것은 마땅한 일입니다. 우리도 생일을 기억하고 축하합니다.….
여자는 기념일을 먹고 산다고 하잖아요…
일찍이 이스라엘 백성들은 구세주를 목마르게 기다렸습니다.
4천년을 기다렸습니다. 자유와 해방을 주실 메시아를 기다렸습니다.
대림초를 4개로 하는 것은 바로 4천년을 4주간으로 상징화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4개의 초는 예수님께서 동서남북, 온 세상의
구세주이심을 의미합니다. 초를 꽃을 수 있도록 바탕을 녹색으로
하여 원형으로 만들기도 하는데 녹색은 생명의 푸르름을 상징하고
원형은 온 우주를 말합니다. 초의 색깔은 어두운 자색으로 시작하여
점점 밝은 색으로 불이 밝아짐으로써 주님께서 가까이 오시는 기쁨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우리의 마음도 맑고 또 밝아져야 한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맑고 밝아진다는 것은 우리의 허물을
벗는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은 메시아를 기다렸지만 정작 구세주이신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 그분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마음의 문이
닫혀 있었고 자기들만의 선입견과 틀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언제 오시더라도 알아볼 수 있는 눈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늘 깨어 있어야 합니다.
둘째는 세상의 마지막 날에 다시 오실 심판자 주님을 기다립니다.
마태복음을 보면 “그때 하늘에 사람의 아들의 표징이 나타날 것이다.
그러면 세상 모든 민족들이 가슴을 치면서, 사람의 아들이 큰 권능을
떨치며 하늘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볼 것이다”(마태24,30).하고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사도신경에서도 “산
이와 죽은 이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믿나이다.” 하고 고백합니다.
미사 안에서도 “주님의 자비로 저희를 언제나 죄에서 구원하시고,
모든 시련에서 보호하시어, 복된 희망을 품고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게 하소서.”하고 기도합니다. “복된 희망을 품고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립니다. 우리는 기다리되 다시 오시는 주님
앞에 당당하게 설 수 있도록 준비하고 기다려야 합니다. 준비된
사람에게는 그날이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드는 날입니다. 속량의
날이요, 구원의 날입니다(루카21,28).
대림절에 자주 부르는 성가 91번 ‘구세주 빨리 오사’ 가사를 보면
1절. “구세주 빨리 오사 어두움을 없이 하며 동정 마리아에서 탄생
하옵소서. 원조들이 범죄한 후 성조에게 허락하신 메시아를 보내소서.
어지러운 세상에 방황하는 우리들의 간구함을 들으사 보내 주옵소서.
2절. 우리 죄를 잊으시고 참회하는 자녀들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세상 모든 유혹 항상 우리 괴롭히니 이 어려움 이기게 도와주옵소서.
3절. 고통 중에 만민들은 메시아를 고대하여 애타게 기다리오니
오소서 메시아여. 이 인류를 돌보소서. 구세주 언제 오나. 언제
오시나.” 입니다. 참회하는 자에게 용서를, 그리고 시련과 어려움,
온갖 유혹에서 지켜주시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습니다. 바로 대림
기간에 준비할 것이 무엇인지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구세주 빨리오사! 어두움을 없이하실 분으로 빨리 오시면 좋으련만
지금 당장 심판자로서 오셔도 당당할 수 있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시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1코린1,8). 그리고 하느님께서 “당신의 아드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친교를 맺도록”(1코린1,9) 우리를 불러 주셨습니다. 우리는
각자의 위치에서 주님과의 관계를 새롭게 해야 하겠습니다.
‘쓰레기통’의 동의어는 ‘성직자’랍니다.
쓰레기통 같은 사람
남들이 인상 찌푸리는 것을 껴안는다. 아무 불평 없이.
가운데 자리 마다하고 구석으로 간다. 아무 불만 없이.
화려한 것, 화려한 곳만 찾는 성직자가 있다면
그는 쓰레기통 같은 사람이 아니라 쓰레기일지도 모른다.-정철-
각자의 본분에 충실하지 못한 사람은 쓰레기가 됩니다. 이러저러한
환경이나 여건을 탓하거나 핑계 대는 일 없이 근본에 충실해야
하겠습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주 하느님, 당신 안에 뿌리 내리면
세상의 모든 것이 변해도 좋습니다.”하고 말했습니다. 진리의 말씀,
말씀이 사람이 되어 오신 주 예수님 안에 머물러 오시는 주님을
당당히 영접해 드려야 하겠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우리가 집안에 손님을 초대한다면 먼저 집안 청소를
하고 정리정돈을 하잖습니까? 어떤 이는 그릇을 새로 장만하기도
하고,..명절을 맞아 음식을 준비하고 가족을 기다리며 설레였잖아요.
그런데 하물며 주님을 만나기위해서라면 얼마나 더 잘 준비를 해야
하겠습니까?
예비자 한 분을 만나게 되었는데 성당을 찾게 된 동기가 이웃에
사는 부부의 행복한 모습이었습니다. 성당에 다니는 부부의 기쁘고
행복한 모습을 보면서 성당에 가면 무엇인가 좋은 것이 있는가 보다
생각하게 되었고 어린 자녀에게 일찍 신앙에 눈뜨게 해 주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 나오셨다고 했습니다. 사실 하느님 말씀 따라서
행복하게 사는 것이 복음 선포입니다. 전교한다는 것이 다른 것이
아닙니다. 내가 하느님때문에 기쁘게 사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도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히게
하여라”(마태5,16).
장가든 남자들이 제일 싫어하는 사람이 누군지 아십니까? 이웃집
남자랍니다. 어느 여성잡지에서 “우리나라 남편들이 이 세상에서
가장 싫어하는 사람은 누구일까?” 라는 설문조사를 했습니다. 그
결과 1위는 바로 ‘이웃집남자’라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도대체 이유는
뭘까? 이 설문에 참여한 한 남성이 그 이유를 이렇게 말했습니다.
허구헌날 우리집 마누라는 이렇게 소리쳐요~ “이웃집 남자는 돈도
잘 벌어온다더라, 인간성도 좋고, 날이면 날마다 부인에게 비싼 옷도
덥석 사주는데 당신은 뭐꼬? 집안일도 척척 잘하재, 게다가 아이들
공부도 도와주재,
처갓집 일도 꼼꼼히 챙겨주는 걸 잊지 않는다더라. 도대체 당신은
잘 하는 게 뭐꼬?” 그런데 참 이상하다. 아무리 이사를 다녀도 옆집엔
꼭 그런 남자만 산다!! 항상 비교를 해서 우리의 행복지수가 하위라고
하네요! 절대 비교금지!!!
하느님께서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당신의 모상대로 창조하시고
당신의 영, 숨을 불어 넣어 주셨습니다. 그분께서 주신 탈렌트를 잘
활용하며 살아갈 수 있어야합니다. 욕심 부리지 않고 자기 그릇대로
빛을 발하는 것이 주님을 잘 기다리는 모습입니다. 남과 비교하여
빛을 가리지 않기를 바랍니다. 자꾸 비교하면 비참해지고 절망하게
됩니다.
셋째 의미는 우리의 일상 안에 오셔서 우리와 함께 살기를 희망합니다.
엠마오로 가는 길 위에서 제자들과 동행하시면서 뜨거운 감동을 주셨던
그 기쁨을 기다립니다. 요한복음 14장 23절을 보면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잘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그에게 가서 그와 함께 살 것이다. 그러나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내 말을 잘 지키지 않는다.” 하셨습니다. 따라서 주님을
사랑한다면 주님의 말씀을 잘 지키면서 주님께서 함께 해 주시기를
기다려야 합니다. 특별히 미사 안에서 주님을 더 가깝게 만날 수 있다면
미사시간에 급급해서 오시지 않고 미리 준비해야할 것입니다. 말씀을
읽고 적어도 10분 전에 오셔서 마음을 가다듬는다면 그 기쁨은 더할
것입니다.
묵시록 3장20절에서는 “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의 집에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그 사람도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문을 여는 일은 우리의 몫입니다. 사실 성당에서는 매일 미사가 봉헌
되고 있습니다. 성체성사를 통해 당신의 살과 피를 내어 주시고 영혼의
양식을 주십니다. 그러나 내가 이런 저런 핑계로 그분을 모시지 못할
뿐입니다. 주님께서는 미사 안에서 나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묵시록
21장 3절에 보면, “보라, 이제 하느님의 거처는 사람들 가운데에 있다.”
하셨습니다. 하느님은 늘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분은 나를 한 번도
떠나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내가 밖에서 허우적거렸을 뿐입니다.
“님은 내안에 계셨지만 나는 님 안에 있지 않았습니다.”
어떤 분은 열심히 기도하는데 하느님께서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는다고
불평하시는 분이 계십니다. 그런 분은 먼저 자신을 돌아봐야 합니다.
시편을 보면 “올바른 이라야 찬미가 어울리도다.” “겸손한 자의 기도는
하늘의 구름을 꿰뚫는다.”했습니다. 그러나 야고보사도는 청하여도 얻지
못하는 까닭은 “여러분의 욕정을 채우는 데에 쓰려고 청하기 때문입니다.”
(야고 4,3) 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청하기에 앞서 마음의 문을
열어야 합니다. 허물이 있으면, 잘못이 있으면 고해성사를 통해 용서를
받고 청해야 효과 있는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고해 성사를 통해
영혼을 맑게 하시기 바랍니다. 집에 손님이 오면 청소를 하고 꽃꽃이도
합니다. 마찬가지로 주님의 탄생을 기다리면서 무엇보다도 영혼의
청소를 하였으면 좋겠습니다.
사실 주님께서는 우리가 기다리기도 전에 먼저 우리를 간절히
기다리십니다. 성경 안에서 당신의 말씀을 열어주기를 기다리십니다.
감실 안에서 당신을 조배하는 이들을 기다리시고 당신 앞에서 무릎
꿇어 기도하는 이들을 보고 싶어 하시며 십자가 위에서 당신을
바라보는 이들을 기다리십니다. 우리가 주님을 기다리는 것보다도
더 간절한 마음으로 당신의 모든 것을 가져갈 수 있기를 희망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애타게 기다리시는 주님을 외롭지 않게 해 드려야
하겠습니다. 우리에 앞서 언제나 기다려 주시는 주님이 계심을 기뻐하고
감사하는 날들 이루시길 기도합니다.
세상의 끝 날, 종말이 언제 오든 아무 걱정 하지 마십시오. 기다리시는
그분이 계신데….그날을 대비하여 지금 깨어 있으면 됩니다. “주님, 제가
당신의 구원을 기다립니다”(창세49,18). 사랑합니다.
- 청주 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 [인천] 매 순간을 주님의 뜻에 맞게
2013년 가해 12월1일 대림 제1주일
드디어 교회 전례력으로는 새해를 맞이했습니다. ‘다’해가 지나가고,
오늘부터 ‘가’해가 시작되지요. 우리가 새해를 맞이하면 항상 새로운
마음으로 열심히 살겠다는 다짐을 합니다. 물론 이 다짐이 한 해의
마지막까지 계속 가는 경우는 거의 없지만, 아무튼 여러분들의 오늘
한 다짐들이 한 해의 마지막까지 계속되기를 주님께 기도하는 시간이
되셨으면 합니다.
생각해보면 어떤 것이든 꾸준히 하기란 참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매일 운동하는 것, 매일 어학 공부를 하는 것, 매일 기도하고 묵상하는
것 등등 매일 꾸준히 한다는 것은 정말로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저는
매일 꾸준히 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이 글, 새벽 묵상 글이지요.
그리고 사람들은 어떻게 매일 다른 글을 꾸준히 쓸 수 있느냐는 질문을
많이 하시면서 저를 아주 신기하게 쳐다보십니다.
물론 쉽지는 않지만, 또 그리 어렵지도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새벽
묵상 글을 쓰기 위한 준비를 계속적으로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묵상 속에 떠올려지는 것들, 생활 안에서의 소소한 체험들, 그리고
시간 날 때마다 읽는 책의 좋은 내용들 모두를 메모합니다. 이 메모의
양의 A4용지로 한 200페이지 정도 되지요. 그러한 준비를 미리미리
하다 보니 15년 가까이 꾸준히 쓸 수가 있었으며, 앞으로도 이러한
작업을 이루어지는 동안은 계속되지 않을까 예상하여 봅니다.
갓난아기도 태어날 때 10달이라는 준비기간이 있어야지만 세상의
공기를 마실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준비가 필요하지 않을까요? 이 준비가 바로 우리의 삶 자체입니다.
그래서 어떤 성인은 삶 전체가 죽음을 위한 준비라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오늘 예수님의 탄생을 준비하면서 다시 오실 구세주를 기다리는
대림시기가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을 위해 어떤 준비가
필요할까요? 이 준비가 곧 하늘나라에 들어갈 준비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 말씀을 통해 사람의 아들이 다시 올 날을 위해 항상
준비하고 깨어 있으라고 말씀하시지요. 왜냐하면 그날과 그때는 아무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마치 대홍수 이전 시대의 사람들이 향락에 빠져서
결국 대홍수를 깨닫지 못해 죽음을 당했던 것처럼, 예수님의 재림 때에도
똑같이 아무것도 깨닫지 못한 채 죽음을 맞이할 것이라고 경고하십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왜 재림의 정확한 때를 말씀하시지 않으실까요?
정확하게 몇 년 몇 월 몇 시에 재림이 온다고 말씀하시면 사람들이 더
잘 준비하지 않을까요? 바로 항상 경계하면서 열심히 살아야하기
때문입니다. 악이 들어오지 않도록 언제나 방심하지 않고 노력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재림의 정확한 때를 말씀하시지 않는 것입니다.
결국 삶 전체가 죽음을 위한 준비, 곧 하늘나라에 들어갈 준비라는
어떤 성인의 말씀이 크게 공감됩니다. 안일하고 이기적인 마음 등
주님께서 싫어하는 모습을 버리고, 주님께서 원하시는 사랑과 평화의
마음으로 매 순간을 주님 뜻에 맞게 살아가야 합니다.
이런 마음으로 오늘 교회 전례력의 시작을 맞이하십시오. 이런 마음이
하루하루 더해져서 마지막 그날까지 주님과 함께 하는 우리가 될
것입니다.
당장은 노력해도 잘 안 보이잖아. 그건 ‘점’이기 때문이야. 차차 그 점을
순서대로 연결해 가면 그림이 완성되는 거야(김사라).
대림제1주일. 대림환의 첫번째 초가 타오릅니다.
그래도 사는 길은 있다.
대기업에서 승승장구했던 어떤 형제님께서 퇴출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좌절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가족들에게 이렇게 말했지요.
“이제야 살 것 같아. 내가 오랫동안 회사에 얽매여서 가족들과 좋은 시간도
못 가졌고 또 내가 좋아하는 취미 활동도 전혀 못했잖아. 이제는 가족과
함께 하고 취미 활동도 마음껏 할 수 있으니 얼마나 잘 되었어?”
가족들 모두 정말로 그런 줄 알았습니다. 실제로 가족과 함께 여행도 다녀오고,
취미 활동도 열정적으로 하기 시작했으니까요. 그런데 3개월쯤부터 이
형제님의 말이 점점 없어지는 것입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 형제님은
스스로 목숨을 끊을 생각을 했다고 합니다. 직장을 다니지 못하는 자기 자신이
너무나도 초라해 보였고, 가족들에게 피해만 주고 있는 것 같아서였지요.
다행히 가족들이 먼저 그 사실을 알게 되었고, 이 형제님의 생일에 가족들은
특별한 선물을 준비했습니다. 바로 남편이 있어 고마운 일, 아빠가 있어
자랑스러웠던 일 등등을 깨알 같이 종이 적어서 전해 준 것입니다.
이 글을 읽고서 형제님께서는 다시 일어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자존심이
다 무너져서 이제는 살 가치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자기에게는 아직 소중한
가족이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지요.
극단적인 선택을 하려는 사람들이 종종 있습니다. 그러나 그 안에도 분명히
사는 길이 있습니다. 특히 주님께서 우리를 너무나도 사랑하시기에, 필요
없다고 쉽게 버리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돌봐주시고 책임져 주십니다.
포기하는 삶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바라는 삶이 아닙니다. 포기할 수도 있는
상황에서도 주님을 찾고 힘차게 살아가는 사람만이 주님의 뜻에 맞게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여러분이 바로 주님의 뜻에 맞게 살아가는
주인공입니다.
- 인천교구 성소국장 조 명연 마태오 신부 -
◈ [서울] 대림 제1주일
2013년 가해 12월1일
대림 제1주일입니다. 대림은 주님의 탄생을 기다리는
4주간을 말합니다. 어떤 마음으로 기다리는지, 무엇을 하면서
기다리는지가 중요합니다. 구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4000년 동안
‘구세주’를 기다렸습니다. 오랜 기다림 끝에 시메온과 안나는 구세주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착한 목동들은 주님께 경배를 드릴 수 있었습니다.
판공성사를 보고, 교무금도 잘 내고, 대림특강도 열심히 듣고, 지난 1년
동안 이웃과 사랑을 나눈 분들은 다가오는 성탄이 기쁨의 기다림,
희망의 기다림, 설렘의 기다림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판공성사도 보지
않고, 교무금 정리도 못하고, 성당에 잘 나오지 못한 분들, 가정생활에
소홀하고, 이웃들과 자주 다툰 분들은 다가오는 성탄이 큰 의미도 없고,
주님의 탄생이 그저 담담하게 다가올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시간, 매년 다가오는 성탄이 의미 있고, 가치
있게 되기 위해서는 무엇을 했는가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살았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세상은 업적과 실적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주님은 우리가 하느님의 뜻을 따라서 살았는지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십니다. 집안에 손님이 오시면 청소를 하고 손님을 위한 음식을
준비하듯이 우리는 판공성사를 통해서 우리 마음에 오시는 주님을
깨끗한 마음으로 모셔야 하겠습니다.
저를 기다리는 사람이 제가 좋아하는 선물을 준비하고, 제가 좋아하는
일들을 하면서 기다린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예전에 ‘노란 리본’
이라는 글을 읽었습니다. 순간의 잘못으로 오랫동안 가족과 떨어져야
했던 남자가 있었습니다. 남자는 가족들이 자신을 기억하고 기다리고
있을지 걱정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가족들에게 가기 전에 편지를
썼습니다. ‘만일 나를 기억하고 있고, 나를 기다리고 있다면 마을
입구에 있던 큰 나무에 노란 리본을 달아 주십시오. 이제 나를
기억하지 않고 있다면 나를 기다리지 않고 있다면 그 나무에 빨간
리본을 달아 주십시오.’ 남자는 기차를 타고 가면서 생각하였습니다.
어떤 리본이 달려 있을까! 드디어 기차는 마을 입구에 정차를 하였고
마을 입구에 있던 커다란 나무에는 가지마다 노란 리본들이 수도
없이 달려 있었습니다. 그 노란 리본을 보면서 남자는 기쁜 마음으로
내릴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께 보여 드릴 노란 리본은 무엇일까요?
2014년 대림시기를 지내면서 주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하면서 기다린다면
주님께서도 무척 좋아하실 것입니다.
어떤 일들이 있을까요? 주님께서는 이미 그 답을 알려 주셨습니다.
“지금 헐벗고, 굶주리는 사람들이 있으면 그들을 생각하고 그들과
함께 하십시오. 지금 병들고 고통 중에 있는 사람들이 있으면 그들의
아픔과 고통을 함께 나누십시오.” 그것이 주님께서 그렇게 원하시는
일이었습니다.
우리가 타인의 아픔을 함께 하기 위해서는 영적으로 자유로워야
합니다. 영적으로 자유로운 사람들은 오늘 주님의 말씀처럼 ‘깨어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자유를 얻기 위해서는 3가지의
자유를 얻어야 합니다. 첫 번째, 상처로부터의 자유입니다. 상처라고
하는 것은 내 과거 속에 남아 있는 상처도 있고, 무의식 속에 있는
어둠의 상처도 분명히 내 삶을 가로막고 있을 수 있습니다. 이번
대림시기에는 그런 상처들로부터 자유로워 질 수 있도록 기도했으면
좋겠습니다.
두 번째, 죄의식으로부터의 자유입니다. 오래 묵은 죄악은 영혼을
병들게 합니다. 정신의학자들이 말하기를 심장병 위장병 우울증,
암과 같은 병이 걸리는 중요한 원인 중에 하나는 과거의 깊은 죄의식을
청산하지 못하고 감추어둠으로써 육신의 병으로 드러난다고 말합니다.
죄의식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서 판공성사를 잘 보시기 바랍니다.
세 번째는 불평불만으로부터의 자유입니다. 다른 말로 이야기를 하면
입으로부터, 혀로부터의 자유입니다. 불평불만이라고 하는 것은 말을
통해서 주변사람에게 상처를 줍니다. 불평불만이 있는 곳에는 사탄의
유혹이 있을 뿐입니다. 이번 대림시기에는 늘 감사하는 마음을 갖도록
청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우리들은 대림시기를 시작하면서 세 가지의 자유를 묵상하면
좋겠습니다.
첫 번째는 상처로부터의 자유
두 번째로는 죄의식으로부터의 자유
세 번째로는 불평불만으로부터의 자유
그리고 주님께서 좋아하실 ‘노란 리본’을 우리들 마음의 나무에 가득
매달아 드리면 좋겠습니다.
- 서울 대 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2013년 가해 12월1일 대림 제1주일
< 너희는 준비하고 깨어 있어라. >
복음 : 마태오 24,37-44
<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
사랑도 기억이 사라지면 지속될 수 없음을 보여주었던 영화가
‘내 머리 속의 지우개’입니다.
수진은 유달리 건망증이 심합니다. 편의점에서 콜라를 사고는 그냥
나와 버립니다. 그런데 어떤 남자가 자신의 콜라를 들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그 콜라를 빼앗아 마셔버립니다. 그런데 지갑까지 놓고 나온 것을
다시 기억하고서는 편의점으로 들어갑니다. 그런데 지갑은 물론 콜라까지
그대로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인연으로 수진은 콜라를 영문도 모르고
빼앗겨 버린 철수를 만나게 되었고 그들은 사랑이 깊어져 결혼에
골인하게 됩니다.
그러나 기억력이 점점 사라져서 어느 날은 집에 오는 길도 떠오르지
않게 됩니다. 혹시나 해서 병원에 가서 진료를 받았는데, 그 판정이
건망증이 아니라 알츠하이머, 즉 치매였던 것입니다. 치매는 가까운
기억부터 하나하나 사라져가는 무서운 병입니다. 결국 수진은 철수에게
헤어지자고 합니다.
“내 머리 속에 지우개가 있대.”
그러나 철수는 끝까지 수진을 지켜내려고 합니다. 모든 물건에 사용법과
이름을 써줍니다. 수진의 머리에서 철수의 기억부터 지워졌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자신에게 상처만 주고 떠났던 옛 애인 영민이가 수진의
옛 물건들을 가져다 주러 찾아왔습니다. 수진은 자신이 결혼한 줄도
모르고 옛 애인을 사귈 때의 기억만 남아있어서 그를 여전히 애인처럼
대합니다. 영민은 또 이런 수진을 이용합니다. 급기야 수진은 철수를
보며 영민이라 부릅니다. 철수는 영민처럼 행동해주지만 그의 마음은
찢어집니다. 수진의 마음엔 더 이상 철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문득문득 자신이 철수를 사랑했고 그와 결혼했다는 사실이 떠오르게
되는데 그 때 더욱 가슴이 찢어지는 것은 자기 자신입니다. 결혼한 것도
잊고 옛 애인 이름만을 불렀다는 것을 자신도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기억이 지워질수록 사랑은 고통만 남게 됩니다.
지금 사랑하면 지난 기억은 중요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기억이 사라지면 사랑도 사라집니다.
기억을 조금씩 상실해 가는 남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의사를 찾아가
상담을 청했습니다. 의사는 뇌수술을 하면 기억이 더 이상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덧붙입니다.
“그러나 수술부위가 시신경과 접해있기 때문에 시력을 잃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는 묻습니다.
“어느 쪽을 선택하겠습니까? 시력입니까, 아니면 기억입니까?”
여러분은 기억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시력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저는
기억을 선택하겠습니다. 비록 보이지는 않더라도 나의 부모님이 누구이고
내가 그리스도로부터 사랑받았고 또 사랑하는 수많은 사람들과의 추억을
버린다면 이 세상을 본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늑대에게 길러진 아이들은 자신들이 늑대로부터 길러졌다는 기억밖에는
없습니다. 그런데 그 기억이 온 삶을 지배합니다. 기억을 잃는다는 것은
자신의 존재가 무엇인지조차 알지 못하고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 모든 것들은 하느님께 대한 기억을 지우는 지우개와
같습니다. 정신이 팔리게 해서 기억해야 할 것을 망각하며 살게
만듭니다. 예를 들면 몇 년 전에 컴퓨터 게임에 빠진 젊은 부부가
자신의 자녀를 굶겨죽게 만든 것과 같습니다. 그들은 게임을 하느라
자신들에게 아이가 있는지조차 잊고 살았던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은 당신이 오실 때가 마치 노아의 홍수 때와 같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홍수가 들이닥치는 날까지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하면서, 홍수가 닥쳐 모두 휩쓸어 갈 때까지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노아만은 하느님을 잊지 않았습니다. 노아가 배를 만든 기간은
결코 짧지 않습니다. 어떤 학자들은 노아가 480세부터 600세가 될
때까지 120년간 방주를 만들었다고 합니다. 즉 노아가 깨어있었다고
하는 뜻은 그 오랜 세월동안 하느님 말씀을 잊지 않고 실천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옛 일본의 한 성주가 새로운 성을 짓고 싶어 하였는데 성을 지을 때
기둥에 산 사람을 한 명 넣는 전통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 성주는 누구든
자신의 성에 기둥이 되면 아들을 사무라이로 만들어 주겠다고 하였습니다.
사무라이는 신라시대 화랑들처럼 귀족가문의 자제들로 구성된 높은
신분의 단체였습니다.
이에 평민 한 어머니가 새로 짓는 성의 기둥이 되겠다고 자원하였습니다.
성주는 그 어머니를 기둥에 넣고 성을 지었습니다.
그 어머니의 아들은 성주의 약속대로 사무라이가 되는 훈련을 받게
됩니다. 그런데 높은 귀족신분이 아닌지라 함께 훈련받는 귀족
자제들로부터 심한 차별을 받게 됩니다. 몇 번이고 때려치우고 싶은
마음이 들었지만 그 때마다 어머니가 들어가 있는 기둥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사무라이로 만들기 위해 성의 기둥이 되어버린 어머니를
생각하며 끝까지 참고 견뎌서 훌륭한 사무라이가 되었다는 내용입니다.
이것이 바로 깨어있음입니다. 기억해내려고 노력해야만 기억되는
것이 사랑입니다. 사무라이는 깨어있었습니다. 깨어있다는 뜻은
잊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잊지 않기 위해서는 기억될 수 있는 무언가가
있어야 하고 우리는 수시로 그 기억될 수 있는 무언가를 찾아보며
나의 기억이 사라지지 않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세상은 자꾸 사랑을
지워버리도록 만들기 때문입니다.
역사상 사랑의 마음을 담아낸 아주 유명한 표현 가운데 하나는
타지마할입니다. 타지마할은 39세에 아이를 낳다가 유명을 달리한
인도 여왕 뭄테츠 마할을 위한 무덤입니다. 그녀의 남편은 사별의
슬픔을 이기지 못하여, 자신이 사랑했던 여인을 온 세상이 기억할 수
있도록 기념비를 건축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강 근처에 있는 정원을
건축 장소로 선정했고, 나라에서 가장 뛰어난 건축가와 석공을
동원했으며, 귀한 건축 자재를 먼 곳에서 수입했습니다. 무려 20여
년에 걸친 공사 끝에 아름답고 정교한 건축물이 완공되었습니다.
결혼하면 그 결혼을 기억하기 위해 반지를 교환하고 반지를 항상 차고
다니며 자신이 결혼한 사람임을 잊지 않으려고 합니다. 사무라이가
되기 위해 항상 어머니가 들어있는 기둥을 찾았던 것처럼 예수님도
당신의 사랑을 ‘기억’하라고 ‘미사’를 제정했습니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미사를 드리면 그분의 사랑을 기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미사만
꾸준히 나와도 우리는 어느 정도 깨어있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미사에 빠지면서 하느님을 생각하며 살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사람은
망각의 동물입니다. 따라서 어떤 표징을 통해 항상 기억을 새롭게 하여야
합니다. 부모를 항상 기억한다고 하면서 성묘를 한 번도 가지 않는 것이
말이 안 되듯이, 미사를 하지 않으면서 그분을 기억했다고 말하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아빌라의 데레사는 그리스도와의 영적혼인을 경험하고는 단 한 순간도
그리스도를 잊어본 적이 없다고 말합니다. 이는 저절로 기억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분을 기억하기 위해 그만큼 완전한 노력을 했다는 뜻입니다.
그분은 우리를 잊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우리도 잊지 않도록 미사와 밥
먹을 때, 혹은 아침저녁 기도나 삼종기도 등을 만들어놓았습니다. 우리도
내 시간을 억지로라도 잘라서 자주 기도를 바치며 그분을 삶 안에서
지우는 시간을 줄여가도록 노력합시다. 이것이 깨어 있으려고 노력하는
삶입니다.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라 합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자극이 필요한
것이라고 합니다. 깨어 있으려면 잠과 싸워야합니다. 마찬가지로
기억하려면 잊혀지는 것과 또 잊혀지게 만드는 것들과 맞서야합니다.
노력하지 않고서는 결코 깨어있을 수 없습니다. 자주 그분을 기억하기
위해 나만의 노력들을 만들어가야 할 것입니다.
오산 성당 홈페이지: http://cafe.daum.net/ca-osan
- 수원 교구 오산 성당 전 삼용 요셉 신부 -
◈ [기타] 깨어 있어라..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깨어 있으라는 말씀은 복음적으로 살라는 말씀입니다.'
2013년12월1일 대림 제 1주일 복음묵상
“그러니 깨어 있어라. 너희의 주인이 어느 날에 올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다.” (마태오24,42)
---
깨어 있으라는 말은 의식하고 행동하라는 말이다.
그리고 삶이 되라는 말이다.
의식한다는 것은 정말 중요한 일이다. 때로는 멈추어지고, 때로는
휩쓸려 흘러갈 수 있는 것이 우리의 삶이다. 무엇을 의식해야
하는가? 의식한다는 말은 눈치를 본다는 뜻이 아니다. 의식한다는
것은 진실을 보고 옳은 것을 놓치지 않으려는 자기 싸움을 말한다.
진실을 본다는 말은 한쪽만을 바라보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옳고 그름 모두를 함께 보는 것이다. 선과 악은 항상 공존하며, 그
안에서 선을 선택해야만 우리가 행복할 수 있다는 진실을 보는
것이다.
악에 눈을 감고 선에만 눈을 뜨는 것도 반쪽짜리 의식이라는 말이다.
선과 악 모두에 우리는 적극적으로 반응을 보이고 행동해야 한다.
옳음을 위해서 최선을 다할 뿐만 아니라, 그름을 없애는데도 최선을
다해야 한다.
옳음과 그름은 내 안에도 내 바깥 세상에도 존재한다.
따라서 우선적인 싸움은 내 안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내 안에서 깨어있는 삶이 자리를 잡는다면, 세상을 바라보는 눈도
자연스럽게 진실을 보게 되어있다.
바로 이것이 깨어있는 삶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을 통해서, 같은 공간에서 같은 일을 하던
두 사람 중 한 사람만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질 것이라는 무서운
말씀을 하신다. 하느님이 선택하시는 것은 선(善)만이라는
말씀이시다. 어떤 일이 있어도 우리는 선(善)의 모습으로 살아야만
한다. 그러한 노력이 바로 깨어있는 삶의 모습이고 교회의 용어를
사용하자면 복음화된 삶임을 믿는다.
교회 전례력으로 새해 첫 날이다. 다시 한 번 마음을 다잡고, 보다
복음적인 삶을 살겠다는 각오를 해보는 우리이기를 희망한다.
사이타마 교구 오타(太田)본당 주임
김 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
https://www.facebook.com/WithfatherPinetree
-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
◈ [기타] 재림, 회개
2013년 가해 12월1일 대림 제1주일
<너희는 준비하고 깨어 있어라.>
(마태 24,37-44)
<재림, 회개>
"이것을 명심하여라. 도둑이 밤 몇 시에 올지 집주인이 알면, 깨어
있으면서 도둑이 자기 집을 뚫고 들어오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기 때문이다(마태 24,43-44)."
예수님 말씀의 본래 뜻을 생각하면, "도둑이 밤 몇 시에 올지 집주인이
알면"이라는 말은, "도둑이 밤 몇 시에 올지는 몰라도 확실하게 온다는
것을 집주인이 알면"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몇 시에 올지 알면 그 시각에만 지키면 됩니다.
그러나 그 시각을 알 수 없으니 계속 깨어 있으면서 지켜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오는 시각'이 아니라 오는 것이 확실하다는 점입니다.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다." 라는 말씀은,
"나의 재림은 분명히 이루어지지만 그 날과 그 시간은너희가 계산하거나
예상할 수 없다." 라는 뜻입니다(마태 24,36).
그 날은 오늘일 수도 있고, 좀 늦어질 수도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부터 준비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니 깨어 있어라. 너희의 주인이 어느 날에 올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다(마태 24,42)." 라는 말씀도 언제 오시든지 간에 오신다는
것은 확실하다는 것을 강조하시는 말씀입니다.
(그 날이 언제인지 모르니 깨어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오시는 것이
확실하기 때문에 깨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때에 두 사람이 들에 있으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
두 여자가 맷돌질을 하고 있으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
(마태 24,40-41)."
이 말씀은, 회개는 각자 자신이 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시는 말씀입니다.
들에 있는 두 사람은 부부일 수도 있고, 아버지와 아들일 수도 있고, 형제일
수도 있습니다.
맷돌질을 하고 있는 두 여자는 어머니와 딸, 또는 시어머니와 며느리,
또는 자매일 수도 있습니다. 어떻든 가족이라고 해도 누구는 구원을 받고
누구는 받지 못하는 일이 생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가족(친척, 친구, 이웃)의 구원을 위해서 기도할 수 있고(기도해야
하고), 하느님께서는 그 기도를 외면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래도 회개는 자기 자신이 스스로 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죄인들을
구원하려고 손을 내미실 때, 죄인들 쪽에서도 능동적으로 손을 내밀어서
예수님의 손을 잡아야 합니다. 그것이 회개입니다.)
모니카 성녀가 아들의 회개를 위해서 눈물로 기도했고, 그래서 어머니와
아들이 모두 성인품에 오르는 영광을 얻었지만, 아우구스티노 성인 자신이
스스로 회개했다는 사실도 간과하면 안 됩니다.
"노아 때처럼 사람의 아들의 재림도 그러할 것이다. 홍수 이전 시대에
사람들은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는 날까지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하면서, 홍수가 닥쳐 모두 휩쓸어 갈 때까지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사람의 아들의 재림도 그러할 것이다(마태 24,37-39)."
지금 이 말씀에서 "홍수가 닥쳐 모두 휩쓸어 갈 때까지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라는 말은, 사람들이 홍수가 닥친다는 것을 몰랐다는 뜻이
아니라, 자기들의 운명을 몰랐다는 뜻으로 해석됩니다.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라는 말은 죄가 아니라 사람들의 일상적인
일들을 가리킵니다.
아마도 분명히 대홍수가 예고되었을 것이고, 회개하라는 경고가 있었을
것입니다. 노아가 방주를 만드는 데 걸린 시간은 사람들이 회개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사람들은 회개하고 구원을 받는 일에는 관심이 없었고 그냥
살던 대로 살았습니다. 아마도 사람들은 "설마, 내가..." 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사실 우리도 지난 이천 년 동안 종말과 재림에 관한 말을 너무 많이 들어서
별로 긴박감을 느낄 수 없는 것이 사실인데, 그래도 '늘 깨어 있어라.' 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무시하면 안 됩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노이로제 걸릴 정도로 날마다 불안해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것도 아니고, 내일이 없는 사람처럼(하루살이처럼) 살아야 한다는
것도 아닙니다.
늘 깨어 있으면서 날마다 회개하는 신앙생활을 한다고 해서 생활 자체가
크게 다르지는 않을 텐데, 평소에 그렇게 생활하는 사람은 갑자기 종말과
재림이 닥친다고 해도 편안한 마음으로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언제 시행될지 모르는 시험에 대비하기 위해서 평소에 꾸준히 공부하는
학생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학생들 경우에는 평소에 놀기만 하다가 갑자기 벼락치기 공부를 해서
점수를 얻을 수도 있겠지만, 재림과 심판의 경우에는
벼락치기 회개를 할 수 있는 기회 자체가 전혀 없을 것입니다.)
- 송 영진 모세 신부 -
◈ [서울] 인간이 영물이라면
2013년 가해 11월1일 대림 제1주일
인간이 영물이라면
미리 준비하며 사는 데에 아주 익숙한 우리의 현실 세상 같습니다.
전문 기술 자격증 학벌 등 배우려는 것 모두가 뭔가를 준비하는 거지요.
블랙박스 녹취 CCTV 등의 설치나 노력도 뭔가를 대비하는 거고요.
그런데 이 모든 대비 준비 작업들은 죽음 앞의 시간까지만 고료하지요.
차라리 죽기 바로 앞, 죽음을 위한 준비라 해도 참 덕스럽다 하겠는데.
그러나 인간이 영물이라면 죽음 후 내 영을 위해서도 준비해야지요?
“그러니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기 때문이다.(마태오 24,44)”
- 이기정 사도 요한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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