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列國誌] 361
■ 2부 장강의 영웅들 (17)
제 6권 꿈이여 세월이여
제 2장 선진(先軫)의 죽음 (8)
그 해 10월 어느 날 한밤 중, 세자 상신(商臣)은 세자궁에 배속된 군사를 거느리고 초성왕(楚成王)이 머무는 왕궁을 포위했다.
막 잠자리에 들려던 궁중 사람들은 기절초풍하여 제각기 달아났다.
상신(商臣)과 그 스승 반숭(潘崇)은 칼을 빼어들고 초성왕의 침실로 들어갔다.
초성왕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물었다.
"아들아, 너는 내게서 무엇을 원하느냐?"
상신 대신 반숭(潘崇)이 대답했다.
"왕이 군위에 오른 지 46년이 넘었소. 성공한 자는 물러가야 하는 법이오. 백성들은 지금 새로운 왕을 고대하고 있소. 바라건대, 왕은 군위를 세자에게 물려주십시오."
"왕위를 내놓으면 나를 살려줄 것인가?"
"자고로 임금이 죽어야 새 임금이 서는 법입니다. 한 나라에 어찌 두 임금이 존립할 수 있겠소? 왕은 이제 늙었소. 어찌하여 저 세상으로 가는 것을 싫어하는게요?"
초성왕(楚成王)은 다시 외쳤다.
"자식으로서 어찌 아비를 죽일 수 있는가?"
그러자 상신(商臣)이 차갑게 대답했다.
"왕은 형을 죽이고 임금자리에 올랐습니다. 동생이 형을 죽이는 것과 아들이 아비를 죽이는 것이 무엇이 다릅니까?"
이쯤되면 자신이 살아날 수 없음을 깨달을 법도 하다.
그런데도 초성왕(楚成王)은 삶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그는 노회한 왕답게 순간적으로 기지(機智)를 발휘했다.
"아들아, 내가 너의 뜻을 알겠다. 마지막으로 나의 소원을 들어다오."
"말하십시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요리가 곰 발바닥 요리다. 죽기 전에 곰 발바닥 요리를 먹게 해다오."
곰 발바닥 요리는 지금도 진미(珍味)라고 할 정도로 맛있다고 한다.
2천 6백 년 전에도 그것을 미식가들이 즐겨 찾는 요리였던 모양이다.
상신(商臣)은 죽기 직전까지도 맛있는 음식을 찾는 아버지 초성왕(楚成王)을 한껏 비웃었다.
"암군다운 소원이오. 어찌 들어드리지 못하겠습니까?"
상신이 막 포인(庖人)을 불러 곰 발바닥 요리를 해오라고 분부하려 할 때였다. 반숭(潘崇)이 상신을 가로막으며 말했다.
"안 됩니다. 곰 발바닥은 빨리 익지 않는 요리입니다. 완전히 익으려면 하루가 걸립니다.
지금 왕이 곰 발바닥 요리를 먹고 싶다는 것은 구원군이 올 시간을 벌기 위한 얄팍한 수에 불과합니다. 세자께서는 그 수에 속으시면 안 됩니다."
그제야 상신(商臣)은 초성왕의 저의를 깨닫고 불같이 노했다.
"가련하도다, 부왕이여. 죽는 순간까지 간교함을 버리지 못하는구나!"
상신은 허리띠를 풀어 초성왕 앞으로 던졌다.
목을 매 스스로 죽으라는 뜻이다.
마지막 희망마저 사라지자 초성왕(楚成王)은 하늘을 우러러 부르짖었다.
"투발아, 투발아! 내 그대 말을 듣지 않다가 이 지경이 되었구나. 내 다시 무엇을 말하리오."
마침내 초성왕(楚成王)은 아들 상신이 던져준 띠로 자기 목을 매었다.
반숭(潘崇)이 좌우 부하들에게 눈짓을 보냈다.
군사들은 일제히 달려들어 그 띠의 끝을 양 옆에서 잡아당겼다.
초성왕(楚成王)은 혀를 빼물고 죽었다.
그 날 밤, 강미(江羋)는 초성왕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통곡했다.
"내가 경솔히 입을 잘못 놀려 오라버니를 죽게 했구나. 내가 죽인 것이나 다를 바 없다."
그녀 또한 대들보에 목을 매고 죽었다.
이제 초(楚)나라 왕은 상신(商臣)이 차지했다. 그가 초목왕(楚穆王)이다.
처음 초목왕은 부왕의 시호를 '영(靈)'으로 하였다. 원한을 품고 죽은 영혼을 달래기 위해서였다.
부왕의 시체를 입관할 때였다. 초성왕은 죽었으나 눈을 부릅뜬 채였다.
반숭(潘崇)이 말했다.
- 시호(諡號)를 다시 정하십시오.
그래서 '성(成)'이라는 시호로 바꿨다.
'공(功)을 이루다'라는 뜻이다. 그러자 초성왕의 부릅뜬 눈이 스르르 감기었다.
초성왕(楚成王)은 '초영왕(楚靈王)'이 될 뻔했다.
왕위에 오른 후 초목왕(楚穆王)은 조정을 자기 식대로 뜯어고쳤다.
그는 먼저 스승인 반숭(潘崇)을 위해 세자궁과 그 재산을 모두 그에게 내려주었다.
또 새로이 3공(三公) 제도를 도입하여 반숭을 태사(太師)에 임명했다.
3공이란 태사(太師), 태부(太傅), 태보(太保)를 말함인데, 이들은 모두 영윤보다 높은 관직이었으며 이 중에서도 태사가 가장 으뜸이었다.
또한 초목왕(楚穆王)은 반숭에게 군사를 내주어 왕궁을 호위하는 임무를 부여했다. 이로써 반숭(潘崇)은 하루아침에 초나라 제2의 권력자가 되었다.
영윤 투반(鬪班) 등 모든 신하는 초성왕이 초목왕에 의해 죽은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도 그 원인을 드러내놓고 말하는 자는 없었다.
상(商)이라는 땅을 다스리는 지방 장관으로 투의신(鬪宜申)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일찍이 성득신과 함께 성복 전투에 참가했던 사람이다. 초성왕(楚成王)이 패전의 책임을 물어 자결을 명했다가 뒤늦게 사면하고 상(商)땅으로 좌천시킨 바 있었다.
투의신(鬪宜申)은 장례식에 참석하러 왔다가 초성왕 죽음의 진상을 알게 되었다.
- 아들이 아비를 죽이다니, 용서할 수 없는 일이다.
그는 대부 중귀(仲歸)와 함께 초목왕을 암살하기로 모의했다.
그러나 도중에 그 음모가 탄로났다.
초목왕은 사마 투월초(鬪越椒)를 시켜 가차없이 투의신과 중귀를 잡아죽였다.
그런데 이 투월초(鬪越椒)라는 사람이 또 음험하기로 치면 초목왕 못지않았다.
그는 명재상 투곡어토의 동생으로 늘 높은 관직과 권력을 꿈꾸었다.
그는 투곡어토가 죽은 이후로 조카 투반(鬪班)의 직위인 영윤자리를 탐냈다.
그런 중에 자신과 뜻이 통하는 초목왕이 임금에 올랐다.
그는 매일 초목왕 곁을 맴돌며 투반을 중상모략했다.
- 왕께서는 영윤 투반(鬪班)을 조심하십시오.
그는 요즘 사람들을 모아 '아버지(투곡어토)와 나는 초성왕에게 많은 은혜를 입었다.
어찌 이러고 앉아만 있을 것인가. 나는 초성왕의 생전 뜻에 따라 직(職)공자를 왕으로 모실 생각이다'라고 떠들어대고 있다 합니다.
그렇지 않아도 역모가 일어날까 두려워 밤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는 초목왕(楚穆王)이었다.
어느 날, 그는 영윤 투반(鬪班)을 궁으로 불러 말했다.
"경에게 한 가지 부탁이 있소."
"무엇입니까?"
"경은 즉시 공자 직(職)을 죽이고 오시오."
투반(鬪班)은 뜻밖의 말에 당황했다.
"무슨 까닭으로 직(職) 공자를 죽이려 하십니까? 죄 없는 공족을 죽여서는 안 됩니다."
초목왕(楚穆王)은 기다렸다는 듯이 소리쳤다.
"그대는 죽은 초성왕의 은혜를 갚기 위해 직(職)과 어울려 군사를 모으고 있다지?"
그러고는 뒤편에 감춰두었던 구리망치를 들어 부복하고 있던 투반(鬪班)의 뒤통수를 내리쳤다. 투반은 뇌수를 쏟고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이 소식이 공자 직(職)의 귀에 들어갔다. 직(職)은 위험을 직감하고 진(晉)나라로 도망가기 위해 성문을 나섰다.
하지만 하늘은 그의 편이 아니었다. 뒤쫓아온 사마 투월초(鬪越椒)의 한 칼에 목이 베어졌다.
투반에 이어 성대심(成大心)이 영윤에 올랐다.
그러나 성대심은 병이 깊어 있어 얼마 살지 못하고 죽었다.
마침내 투월초(鬪越椒)는 영윤자리를 차지했다. 그가 맡고 있던 사마직에는 위가(蔿賈)가 올랐다.
즉위 과정에서 짐작할 수 있듯 초목왕은 초무왕(楚武王) 못지않은 무법자였다.
한동안 조용하던 한수 일대가 모두 그의 군마에 짓밟혔다.
그는 현재의 하남성 식현 서남쪽 일대를 영토로 하고 있던 강(江)나라를 비롯하여 안휘성의 육(六)나라와 요(蓼)나라 등 소국을 차례차례 쳐서 멸망시켰다.
- 북으로!
초목왕(楚穆王)의 이 한마디에 중원에는 다시 거센 회오리바람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 다음에 계속........
< 출처 - 평설열국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