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 인간 공격용이다.
사람은 공격받고는 가만있을 인간이 아니다. 맞공격하든지, 저항하든지, 도망치든지, 아니면 숨든지 한다. 요한계시록 6:14-17에 보면 인간들의 이런 양상이 나온다.
“하늘의 별들이 무화과나무가 대풍에 흔들려 선 과실이 떨어지는 것 같이 땅에 떨어지며 하늘은 종이 축이 말리는 것 같이 떠나가고 각 산과 섬이 제 자리에서 옮기우매 땅의 임금들과 왕족들과 장군들과 부자들과 강한 자들과 각 종과 자주자가 굴과 산 바위 틈에 숨어 산과 바위에게 이르되 우리 위에 떨어져 보좌에 앉으신 이의 낯에서와 어린 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우라 그들의 진노의 큰 날이 이르렀으니 누가 능히 서리요 하더라”라고 되어 있다.
여기에 보면, 인간들이 안절부절 어쩔 줄을 모르면서 피신하고 있고, 자기를 향해 공격하는 분이 누군지도 잘 안다. 그 분은 바로 ‘어린 양’이다. 예수님의 명칭이 하필이면 ‘어린양’일까? 그것은 그 분의 지속적인 기능의 성격을 대변해주는 명칭이기 때문에 그러하다.
요한계시록에서 예수님은, 자신이 ‘어린양’이 될 수 밖에 없었던 상황으로 우주 국면을 몰아세우고 계시다. 그리고 자신이 ‘어린양’의 진가를 확실히 드러내는 무대로서 전 우주를 동원하신다. 악마를 바다에서 끄집어내시고, 귀신들을 옥에서 끄집어내는 이유도 이런 차원에서 활용하시기 위해서이다.
이점이 더욱더 분명한 것은, 어린양에 대해서 무서워하기는커녕, 어린양을 졸졸 따라다니면서 어린양을 환호하는 자들의 특징을 통해서 알 수 있다. 그들의 특징은 ‘어린양’의 피가 묻힌 흰 옷을 입고 있다.
“내가 가로되 내 주여 당신이 알리이다 하니 그가 나더러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그러므로 그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고 또 그의 성전에서 밤낮 하나님을 섬기매 보좌에 앉으신 이가 그들 위에 장막을 치시리니 저희가 다시 주리지도 아니하며 목마르지도 아니하고 해나 아무 뜨거운 기운에 상하지 아니할지니 이는 보좌 가운데 계신 어린 양이 저희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저희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러라”(계 7:14-17)
이들은 결코 “어린양의 진노에서 우리가 가려라”라는 식으로 절망의 절규를 외치지 아니한다. 똑같은 어린양을 결국 대하게 되면서도 이들은 도리어 평소에도 더불어 인도함을 받아왔으며 수시로 교제를 나누는 사이였기에 그야말로 ‘화목’ 그 자체이다. 즉 이들은 일상 속에서는 단독적으로 있었던 것이 아니라 ‘어린양’으로 더불어 함께 지내왔었다.
물론 ‘어린양’께서는 이들과 함께 계신 이유가, 이들의 구원욕망을 충족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어린양’으로만 일하셔야만 하는 그 취지를 위해서이다.
결국 성도란 ‘예수님이 왜 죽으셔야 하는가?’를 증거하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부르신 자들이다. 예수님의 부활이란 이 ‘어린양’의 취지를 담아내는 영화 스크린과 같은 환경 조성이다. 예수님의 부활 앞에서 인간은 ‘나도 살았다’가 아니라 ‘이제 나라는 존재는 십자가만을 말해야 한다’이다. 영화관에서 허연 스크린만 2시간동안 보여주려고 입장료 받는 것이 아니다. 그 스크린의 영상이 돈 값을 하고 감동을 자아낸다. 물론 스크린 없이 영화관을 그것을 보여줄 환경이 못된다는 것은 당연한 이야기이다.
주님께서 부활하신 것은, 왜 자신이 영원토록 ‘어린 양’ 행세만 하셔야 하는지를 본격적으로 개시하시기 위해서이다. 결국 인간들은 요한계시록 1:7의 국면을 접하게 된다. “볼지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터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하여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
왜 예수님은 과거에 자신이 십자가에 당한 수모를 그냥 잊어버리시지 않는 것인가? 왜 혼자 속으로 삼키면서 감내하시지 않고 인간을 상대로 그 억울함을 유감없이 분풀이 하셔야만 하는가? 그것은 피조물인 인간을 상대로 갈구기 위함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처음부터 ‘어린양’이 되셔야만 하는 자기 운명 때문이다.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부여받은 운명이다.
그 ‘어린양’ 중심으로 온 우주가 지배받는 주가 되시기 위해 ‘어린양’의 형상으로 존재하셔야만 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형상’의 본질이다. 이 본질을 위해 예수님은 아담을 ‘자기 형상’으로 지으셨다. 그런데 인간은 이점을 모르고 자기만 생각하고, 자기만 사유(思惟)하고 자기만 챙긴다.
즉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은 받았지만 정작 ‘하나님의 형상’이 어떤 식으로 등장되는가는 몰랐다. 인간들의 무지몽매함으로 인해 다음과 같은 주장을 쏟아낸다. “우리 인간은 성경을 문자적으로 보니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었단다. 그러면 우리 자체가 하나님의 형상이구나 그러면 이 하나님의 형상만을 잘 유지하면 되겠구나. 혹시 범죄로 훼손되면, 다시 용서받아 다시 회복하면 그만이지 뭐”라는 식이다.
즉 하늘의 하나님이 인간 자기를 위하여 우주를 만들어 놓은 것처럼 착각하고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 착각이 유지되는 동안, 하늘에서 메시야마저 ‘자기를 위한 어린양’으로 해석해 버린다. 하지만 정작 하늘의 ‘어린양’을 인간을 진노로서 공격하시는 ‘어린양’이시다.
직업이나 직장이나 연륜에 상관없이 공격하신다. 그 공격의 근거와 이유는 예수님의 ‘어린양’ 기능이다. 이 기능이 곧 ‘십자가’이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해서 비로소,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의 모습을 제대로 완료적으로 드러내셨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시므로 그 ‘십자가’ 기능이 본격적인데 그 증거가 바로 성령이시다.
성령은 십자가밖에 모르신다. 다른 말로 말해서 ‘어린양’의 취지 밖에 모르신다. 이것은 곧 인간 전체를 공격하시고자 함이다. 세상을 ‘어린양’ 중심으로 통일하시려는 것이다. 이 과정은 공격없이 이루어지지 않을 일이다. 이 일을 위하여 사도 바울도 뽑혀나왔다.
그는 십자가라는 ‘어리석음’을 가지고 모든 세상 지혜를 다 부수려고 한다. “아무도 자기를 속이지 말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이 세상에서 지혜 있는 줄로 생각하거든 미련한 자가 되어라 그리하여야 지혜로운 자가 되리라 이 세상 지혜는 하나님께 미련한 것이니 기록된 바 지혜 있는 자들로 하여금 자기 궤휼에 빠지게 하시는 이라 하였고 또 주께서 지혜 있는 자들의 생각을 헛것으로 아신다 하셨느니라”(고전 3:18-20)
여기에 보면, 인간의 지혜를 구축하려는 자는 도로 그 ‘교묘한 사기술’에 스스로 푹 빠지도록 조치하시는 능력이 십자가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곧 하늘의 ‘어린양’께서 부지런히 지금 그 작업을 행하시고 계시다는 것이다. 이 말씀과 다음의 말씀과 관련있다.
“ 그 말을 믿는 사람도 있고 믿지 아니하는 사람도 있어 서로 맞지 아니하여 흩어질 때에 바울이 한 말로 일러 가로되 성령이 선지자 이사야로 너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것이 옳도다 일렀으되 이 백성에게 가서 말하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도무지 깨닫지 못하며 보기는 보아도 도무지 알지 못하는도다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로는 둔하게 듣고 그 눈을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아와 나의 고침을 받을까 함이라 하였으니”(행 28:24-27/ 요 12:40 / 마 13:17 / 사 6:8-10 )
즉 진정 ‘어린양’에서 벌리시는 활동을 이해하는 자는 십자가 자체가 인간의 지혜에 포착하거나 함유될 성질의 것이 아님을 알고 더 나아가 도리어 그 십자가를 ‘신학’이라는 이름으로 붙잡으려는 자는 공격하는 능력이 그 십자가에서 나온다는 것을 믿게 된다. 즉 믿게 하시는 십자가일 뿐만 아니라 절대로 안 믿어지도록 부지런히 역사하는 것도 십자가에서 나오는 능력이요 어린양의 보좌에서 나오는 능력이다.
이것은 곧 심판 하실 수 있는 권한과 그 심판 속에서 구원하실 수 있는 권한 행세에는 인간들이 어떤 식으로 완전히 배제되어 있음을 뜻한다. 주님의 능력으로 구원코자 한다는 그 어떤 방해도 개의치 않고 구원할 수 있는 일이요, 주님께서 적극적으로 버리고자 하는 자는 그 어떤 방해에도 불구하고 그 자는 버려지게 되어 있다.
왜 그런고 하니 이미 우주의 주도권은 ‘어린양’에게만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구원해달라도 아우성쳐도 소용없는 일이다. 인간의 아우성으로 구원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 피에서 나온 고유 능력으로만 구원된다.
그러니까 인간들이 신학을 할 수 밖에 없으되 결코 그 신학으로 구원되는 경우는 전무하다는 이야기이다. 그렇다면 늘 신학을 치는 신앙 고백이 나올 수 밖에 없다. ‘십자가 신학’을 쥐고 있으면 안된다. 십자가 신학보다, 십자가가 늘 자신을 죽이고 친다는 사실을 고백되어지는 것만이 참된 신앙이다.
왜냐하면 십자가를 외치는 사도 바울조차 ‘자신은 성도들을 위한 십자가 피를 흘린 적이 없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고전 1:13) 사도 바울은 복음을 창시자도 아니요 복음의 제조자도 아니다. 그렇다고해서 복음을 소지하고 있는 정도가 아니라 도리어 복음이 그를 소지하여 그 복음으로 인해서 날마다 은혜로서 죽는 자이다. 자신이 강자로 등장되면 자기 속에 계시는 그리스도 능력이 증거 되지 않기 때문이다. (고후 12:9-10)
이런 십자가 고백으로 인하여 사도 바울은, 자칭 사도라는 자들로부터 이단시되었다. 그들은 양의 탈을 쓴 자들이다. 실제로는 악마의 힘으로 움직이면서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의 힘으로 산다고 위장하는 자들이다. 사도는 그들에게 다음과 같이 평한다.
“저런 사람들은 거짓 사도요 궤휼의 역군이니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는 자들이니라 이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라 사단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그러므로 사단의 일꾼들도 자기를 의의 일꾼으로 가장하는 것이 또한 큰 일이 아니라 저희의 결국은 그 행위대로 되리라”(고후 11:13-15)
도대체 사도가 무슨 근거로 함부로 외람된 평을 하고 그 사람들의 인격을 일률적으로 매도하는가? 그냥 입다물고 있으면 왜 안되는가? 그것은 사도 바울은 망하는 자들의 특징을 말해야만 하는 것이 사도의 복음 전파의 필수적 요소가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구원 얻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 좇아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 좇아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것을 감당하리요”(고후 2:15-16)
망해야만 하는 자의 특징은, 혼자서만 어린양 되시고 혼자서만 피를 흘렸다는 그 십자가 앞에서 자꾸 뭔가 인간적인 긍정적인 면으로 치장을 하려고 한다. 그렇게 되면 십자가의 피가 가려지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결과이다. 그 피는 이제 말라붙어 버린 피인양 규정짓고, 그 피 흘림을 과거 한 때의 일로 넘기려는 시도하는 저의가 무엇인가?
오로지 자기 자신을 믿고 싶기 때문이다. 결국 어린양의 진노는 이처럼 자기 안으로 깊숙이 고개를 숙여버린 그런 자들에게 온 우주적인 저주로 퍼붓게 된다. 무엇으로 이 저주의 심판을 가릴 것인가! 아무 것도 소용없다!
십자가의 공격을 막을 위인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 어떤 신학이라도 막을 수 없다. 그것은 지금도 하늘의 어린양께서 직접 감행하시는 일이기 때문이다.
첫댓글 이근호 십자가 신학에 대한 저의 마지막 글입니다. 이 글을 끝으로 더 이상 이근호 목사의 글을 옮겨오지 않을 껍니다.
가을바람님 이젠 가을바람도 거의 물러간 것 같습니다. 이젠 매서운 겨울 바람이 불게 되겠죠. 십자가는 절대 인간을 공격하지 않습니다. 십자가는 주님의 자비하심이 어떠한지를 맛보게 합니다.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 우리 자신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한 우리들을, 하나님은 율법을 통하여 우리가 죄인됨을 고발하고 우리를 정죄하지요/ 죄성을 가진 우리는, 절대로 율법을 지킬 수 없음을 깨닫게 하면서 우리가 죄인인 것을 공격합니다. 이러한 율법의 공격앞에 무기력한 우리들을 구원해 주시고자 우리를 대신하여 주님께서 십자가를 져주시고 율법이 정한 모든 것을 이루시고 십자가를 바라보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십자가는 곧 주님께서 우리를 죄의 사슬에서 구원해준 자비의 십자가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한 구원의 십자가이지 인간을 죽일려고 덤벼드는 공격용 십자가가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사단에게 있어서는 공격용 십자가라는 말이 맞지만, 주의 택하신 자녀에게는 주님의 사랑을 나타내는 사랑의 십자가 입니다.
이 분은.. '탕자의 비유' 같은 걸 들으면 참 싫어하실 것 같은 느낌이..
글세 말입니다. 탕자가 돌아와서 아버지의 용서하심에 감격하여, 기뻐하며 아버지의 뜻을 따라 사는 것을 저들은 가장 싫어하죠
이가노님의 질문에 대한 이근호목사의 답변에 대해서 저의 견해를 올리느라고 시간을 못내었습니다. 하지만, 이 글에 대해서도 저의 견해를 곧 올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