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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930 묵상글 들 ( 성 예로니모 사제 학자 기념일. - 헛됨에 빠져들지 않게 하소서.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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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930. 성 예로니모 사제 학자 기념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헛됨에 빠져들지 않게 하소서
“오늘도 말과 행동 지켜주시고 온갖 악 피하도록 도와주소서. 우리 혀 삼가토록 보살피시어 시비에 말려들지 않게 하시고 우리 눈 조심토록 지켜 주시어 헛됨에 빠져들지 않게 하소서.” 성무일도의 찬미가 일부입니다. 온갖 악을 물리쳐 이겨야 하고, 헛됨에 빠져들지 않아야 한다는 것은 다 아는 사실입니다. 몰라서 잘못을 범하는 것은 아닙니다. 나의 의지가 약하고 인간적인 욕심 때문에 넘어지는 것입니다. 일순간의 기쁨을 맛보기 위해 큰 것을 잃어버려서는 안 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며 “양들을 이리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고, 길에서 인사하느라 가던 길을 멈추지도 마라”고 하시며 헛됨에 빠지지 않도록 단속하셨습니다. 우리의 생각은 넉넉해야 무슨 일을 해도 할 것이 아닌가? 하는 마음이지만 그것을 허락하지 않으시고 그저 ‘하느님 나라가 다가 왔다’고 전하길 원하셨습니다. 말씀을 따르는 사람은 여장을 꾸리고 인사치레를 하는 것에 그리고 고의적으로 거부하는 이를 설득하느라 시간을 허비할 틈이 없습니다. 그리고 마음에 드는 사람을 찾아 이 집 저 집으로 옮겨 다니는 사람은 주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보다 자신의 안락을 더 중히 여기는 사람입니다. "파견받는 제자는 파견된 곳에 전적으로 뿌리내릴 수 있는 자신으로부터의 해방을 살아가야 할 사람들입니다."
소돔이나 띠로, 시돈은 이방인 지역입니다. 이 지역은 하느님의 저주가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지역이 오히려 가벼운 벌을 받는다는 것은 하나의 경고입니다. 제자들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곧 주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고 결국 그 지역은 심판을 받게 됩니다. 그것은 자신들이 스스로 파괴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음의 문을 닫으면 헛된 것에 빠지게 되고 주님의 말씀을 듣고도 실행하지 않으면 그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합니다. 주님께서 은총으로 다가오시지만 거부하는 사람에게는 구원을 보장하지 못합니다. “나 없이 나를 내신 하느님께서는 나 없이 나를 구원하지 못하십니다”.
우리도 자칫 그릇된 신심에 빠져 자기가 최고인 것처럼 생각하고 이중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몸은 교회 안에 머무르면서 삶은 교도권에 순종하지 않고 자기주장에 빠지는 그들에게는 겸손이 없습니다. 성령께서 원하시는 일치가 없고 분열을 조장하고 자기도 모르게 교만에 빠집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믿음에 따르는 순명을 통해 그리스도의 빛이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분열은 성령의 역사가 아닙니다.
사실 “사람 앞에는 생명과 죽음이 놓여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원하는 대로 받을 것입니다”(집회 15,17). 그러므로 어떤 처지, 상황에서든지 생명을 선택하시기 바랍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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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930. 성 예로니모 사제 학자 기념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가거라.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예수님께서는 공생활의 초기에 열두 제자를 파견하신 바 있으십니다(루카9,1-6).
그리고 이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에서 다시 일흔 두 제자를 파견하십니다.
일흔 혹은 일흔 둘이라는 숫자는 요셉을 따라 이집트로 내려간 이스라엘 백성의 수였고(탈출 1,5), 모세와 함께 시나이 산에 올라갔던 이스라엘의 원로들의 숫자로 이스라엘을 대표하기도 합니다(탈출 24,1;민수 11,25).또한 <창세기> 10장에서는 이방 나라들의 수로 표기되는 바, 열두 제자의 파견이 유대인들을 상대로 한 파견이라면, 일흔 두 제자의 파견은 이방인을 포함한 모든 민족을 상대로 파견하시는 의도를 암시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가거라.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루카 10,3)
참으로 난감한 일입니다. ‘이리 떼’가 없는 곳이나 ‘이리 떼’를 제거해 준 다음에 보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낸다고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평화로운 곳에 보내진 것이 아니라, 갈등과 대립이 있는 곳으로 평화를 이루는 일꾼으로서 보내졌습니다.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이루는 이로, 불화가 있는 곳에 화목을 이루는 이로 보내졌습니다.
지금 내가 있는 이곳이 바로 그곳이요, 내가 파견된 이곳, 이 세상이 바로 그곳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파견하실 때, ‘돈지갑이나 여행 가방이나 신발을 가져가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도움에만 의존하라 하십니다. 오로지 하느님께만 신뢰를 두라는 말씀입니다. 자신의 능력으로 사명을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권능이 이루어지도록 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뒤에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결정의 시간이 다가왔을 때는 ‘돈지갑도 여행가방도 신발도 없이 가서, 부족한 것이 있었느냐?’ 물으시고 제자들이 ‘아쉬운 것이 없었다.’(루카 22,35)고 대답했을 때에는 ‘돈주머니와 여행가방과 칼을 장만하라’(루카 22, 36 참조)고 말씀하셨습니다.
곧 자신의 생계를 해결하고, 박해받을 각오를 하고, 말씀의 칼로 무장하여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지금 우리의 믿음의 돈주머니와 희망의 여행가방과 말씀과 성령의 칼로 영적 무장을 해야 할 때입니다. 그것은 먼저 다름 아닌 기도로 무장하는 일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말고’ 서둘러서 사명을 이행해야 한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먼저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루카 10,5) 라고 인사하라고 하십니다. 이처럼, 먼저 기도하는 일이 사명입니다. 왜냐하면 평화는 하느님께서 주시는 선물이요, 하느님 나라의 표지이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하느님 나라는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라,
성령을 통하여 누리는 정의와 평화와 기쁨입니다.”(로마 14,17)
사실, 우리 역시, 예수님으로부터 파견 받은 자들입니다. 파견 받은 자로서의 삶은 하느님께 신뢰를 두고, 먼저 주님이신 그분께 기도하는 삶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특별히 평화를 위해 기도하는 일이요, 세상 안에서 주님의 평화를 이루고 증거 하는 일이요, 무엇을 하든 먼저 하느님을 앞세우는 일일 것입니다.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먼저,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하고 말하여라.”(루카 10,5)
주님!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
먼저 해야 할 일과 나중 해야 할 일을 알게 하소서.
제가 하고자 하는 일보다, 당신께서 하시고자 한 일을 깨달아 알게 하소서.
먼저 인사하고 먼저 다가가며, 먼저 사랑하게 하소서.
먼저 신뢰를 두고, 먼저 평화를 빌게 하소서.
먼저, 당신의 나라와 의로움을 구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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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930. 성 예로니모 사제 학자 기념일. 이기우 사도요한 신부님.
◈ 신앙 감각을 보정해 주는 하느님 말씀
오늘은 성 예로니모 사제 학자 기념일입니다. 4세기에 태어난 예로니모는 일찍부터 히브리어와 그리스어 그리고 라틴어를 공부하여 사제가 된 후 다마소 교황의 지시에 따라 히브리어로 된 구약성경과 그리스어로 된 신약성경을 라틴어로 번역하는 일을 했고, 그후에는 성경을 풀이한 주해서를 비롯하여 성경을 신앙의 이치로 체계화시킨 신학 저술까지 남김으로써 암브로시오, 그레고리오, 아우구스티노와 더불어 서방 교회의 4대 교부로 존경받고 있습니다. 예로니모 덕분에 히브리어와 그리스어를 모르는 로마 제국 시대의 신자들이 성경을 통해 하느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게 되었고, 그 이후 성경을 각국 언어로 번역하는 전통의 기원이 되었습니다. 우리도 오늘날 우리 글로 번역된 신구약성경을 통해서 하느님의 말씀을 읽고 들을 수 있게 된 것도, 또 한 세대마다 달라진 시대의 언어로 새로이 번역해 오고 있는 전통도 예로니모가 개척한 성경 번역 작업에 기원합니다. 그 덕분에 성령의 이끄심으로 다가오시는 그리스도의 현존을 우리는 막연한 신앙 감각에 기대서만이 아니라 정확하고 구체적인 하느님의 말씀으로 식별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조선에 복음이 오묘한 섭리로 전해진 것도 한역서학서들을 통한 말씀이었습니다. ‘천주실의’ 같은 믿을 교리서나 ‘칠극’ 같이 지킬 계명 교리서뿐만 아니라 ‘성경직해’ 같은 복음 해설서도 전해졌습니다. 이 책은 포르투갈 출신의 예수회 선교사인 디아즈 신부가 1636년 북경에서 간행하였습니다. 전례력에 따라 연중 주일과 축일에 읽히는 복음을 한문으로 번역하고 필요한 부분에는 주해를 붙여 차례로 설명했는데, 한문으로 저술된 최초의 신약성서 관련 서학서입니다. 조선에서는 신앙 공동체가 창설된 직후에 전래되어 한글로 번역되기 시작했는데, 신자들의 주일과 축일 모임에서 활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 후 여러 번 성서 번역 작업이 이루어졌고, 오늘날에는 새 성경과 함께 매일미사 책이 널리 활용되고 있습니다. 성서를 읽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성서를 필사하는 신자들도 많이 있지만, 아직도 자기가 읽을 성서를 가지고 있지 않는 신자들도 많이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양심과 함께 신앙 감각으로 신자들은 살아가고 있습니다만, 이는 하느님의 말씀이 기록되어 있는 성경 읽기와 묵상으로 보정되어야 정확한 신앙으로 성숙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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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930. 성 예로니모 사제 학자 기념일. 조명언 마태오 신부님.
예전에는 새로운 것을 배우는 것이 너무 신났습니다. 그래서 새로운 기계를 누구보다 먼저 구매해서 공부하는 얼리어답터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기가 참 힘듭니다. 노안으로 조그마한 글씨로 되어 있는 사용 설명서가 잘 보이지도 않고, 지금 사용하고 있는 익숙한 것을 내려놓고 새로운 것을 받아들일 용기도 부족합니다. 그래서 지금 가지고 있는 스마트폰도 또 타고 다니는 차도 모두 오래되었습니다. 그 밖에도 오래된 것들을 계속 사용하게 됩니다.
하긴 이제 달리는 것도 내 맘대로 되지 않습니다. 신체도 예전 같지 않다는 것입니다. 예전의 뛰어다니고, 새로운 것을 익히는데 두려움이 없었던…. 그래서 ‘10년만 젊었으면 참 좋겠다.’라는 생각이 절로 납니다.
언젠가 70대 어르신과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습니다. 어르신이 지금의 아쉬움을 이야기하며 이런 말을 사용하십니다.
“10년만 젊었어도….
어르신의 나이에서 10년만 젊어지면 60대입니다. 지금 제 나이보다도 더 많은 나이입니다. 그런데 60대만 되어도 할 수 있는 것이 많다고 생각하십니다. 그렇다면 50대인 저는 어떨까요? 맞습니다. 누군가가 엄청나게 부러워할 나이를 살고 있으며, 지금 할 수 있는 것이 분명 많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세상에 파견하시며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왜 일꾼이 적다고 말씀하실까요? 그렇다면 지금은 어떨까요? 인구 총수가 늘었으니 일꾼이 많아졌을까요? 이 일꾼을 단순히 사제나 수도자에 한정 지으면 적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사제나 수도자만 세상에 주님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직분에 상관없이 사랑을 전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주님의 일꾼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일꾼이 적다’라는 주님 말씀이 지금 이 순간에도 똑같이 울려 퍼지는 것 같습니다.
주님께 충실한 사람이 적기 때문입니다. 항상 우리 인간들에게 충실하신 주님과 달리, 우리는 주님께 충실하기보다는 자기 자신에게만 충실하려고만 합니다. 세속적인 것에 대한 지나친 관심, 욕심과 이기심으로 인해 자기 자신만을 바라보는 그 마음이 주님께 대한 충실함을 없애고 있습니다.
얼마나 주님께 충실하십니까? 그래서 사랑을 전하라는 주님의 그 말씀을 얼마나 따르고 계십니까? 주님의 충실한 일꾼이 되지 못하는 것 같아서 너무 죄송할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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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실수를 외면하는 대신 그 일을 책임지고 후회를 성찰하여 두려움과 부정에 빠진 삶을 떨칠 수 있다(루스 오제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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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일에 대한 재미는?
어떤 사람이 지금 하는 자기 일이 너무 즐거워서 신이 났습니다. 이 모습을 본 동료 중 한 명이 “일이 재미있으세요?”라고 묻습니다. 이 사람은 “너무 재미있어요.”라고 말했고, 이에 동료는 아주 재미있는 말을 해줍니다.
“월급은 재미없는 일에 대한 대가인데, 일이 재미있다니 반대로 돈을 내고 회사에 다니셔야겠네요.”
정말로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는 나의 재미를 위해 돈을 냅니다. 놀이공원, 야구장, 동물원, 극장…. 내게 재미를 주는 곳에 이렇게 돈을 지불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일터는 내가 돈을 받는 곳이니, 내가 재미없는 것은 당연하지 않을까요? 이 당연한 것을 많은 이가 재미없다, 힘들다, 적성에 맞지 않는다 등의 이유로 일터에서 그만두고 있습니다.
가장 이상적인 직업은 ‘10%는 재미있는 일이고, 60%는 그럭저럭 별 감흥 없는 일이고, 30%는 하기 싫지만 그냥 하는 일’이라고 합니다.
저 자신을 스스로 평가해봅니다. 지금 최고의 직업을 가지고 있는 저였습니다. 더 신나고 또 재미있게 살겠습니다. 남들이 엄청나게 부러워할 수 있도록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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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930. 성 예로니모 사제 학자 기념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9월을 예전에는 ‘복자성월’이라고 하였습니다. ‘장하다 복자여, 주님의 용사여’라고 시작되는 복자찬가를 불렀습니다. 1984년 성인이 되신 요한 바오로 2세 교황께서 한국에 오셔서 103위 순교성인을 시성하였습니다. 그 뒤로 복자성월은 순교자성월로 명칭이 바뀌었습니다. 성가 복자찬가도 순교자찬가로 제목이 바뀌었습니다. 제가 있는 부르클린 교구는 9월 20일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이면 4개의 한인 성당이 함께 모여서 순교자들을 기억하는 미사를 봉헌하였습니다. 안타깝게도 작년에 이어 올해도 코로나19로 인해서 함께 미사를 봉헌하지 못하였습니다. 특히 올해는 한국인 최초의 사제 순교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의 탄생 200주년입니다. 더불어 피의 순교는 하지 않았지만 땀의 순교를 하였던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의 탄생 200주년이기도 합니다. 순교자성월인 9월의 마지막 날을 지내면서 순교자 영성에 대해서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순교자 영성의 시작은 ‘부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의 아들이 잡혀 사람들의 손에 넘어가 그들에게 죽었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다.” 마르타에게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토마사도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손가락을 여기 대 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되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여러분의 믿음은 덧없고 여러분 자신은 아직도 여러분이 지은 죄 안에 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되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우리의 복음 선포도 헛되고 여러분의 믿음도 헛됩니다. 우리는 또 하느님의 거짓 증인으로 드러날 것입니다.”
부활이 없으면 바오로 사도가 전한 복음이 거짓이 됩니다. 바오로 사도가 전한 복음의 핵심은 “하느님께서 그리스도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느님께서 오래 전에 약속하신 대로 죽음의 권세를 없애시고 우리에게 생명의 길을 열어놓으신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의 부활”이 그 시작입니다. 그러나 “부활”은 성서 전체의 주제이기도 합니다. “부활”은 생명의 근원이신 하느님의 전능하심이 드러나는 표징입니다. 아브라함, 요셉, 모세, 다윗, 다니엘과 같은 믿음의 조상들이 다 죽음과 같은 절망 속에서 하느님의 자비를 체험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죽은 자의 부활”을 통해서 창조주이시며 구원자심을 우리에게 드러내시고 증거하십니다. 부활이 없다면 “하느님의 영광”은 “죽음의 그림자”에 가려지게 됩니다. 이와 함께, 하느님께 대한 성서의 모든 증거들도 다 거짓이 됩니다.
부활이 없으면 우리는 여전히 죄 가운데 있게 됩니다. 바오로 사도는 분명하게 이야기합니다. “죽은 이들이 되살아나지 않는다면 그리스도께서도 되살아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되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여러분의 믿음은 덧없고 여러분 자신은 아직도 여러분이 지은 죄 안에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통해서 믿는 것은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위해서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우리의 죄를 사하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죄인”이 아닙니다. 모든 죄를 용서받은 것입니다. 우리가 죄인이 아니기 때문에, 죽음이 더 이상 우리를 가둘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죽음이란 “죄의 결과” 곧 죄에 대한 벌이기 때문입니다.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면, 예수님의 죽으심도 이를 통한 죄의 용서도 우리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믿기 이전의 삶에서 아무것도 해결된 것이 없는 것입니다.
부활이 없으면 우리에게 더 이상 하느님 나라의 희망이 없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잠든 이들도 멸망하였을 것입니다. 우리가 현세만을 위하여 그리스도께 희망을 걸고 있다면, 우리는 모든 인간 가운데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일 것입니다.” 부활은 믿는 사람들이 하느님 나라로 들어가는 과정입니다. 따라서 부활이 없다면 하느님 나라로 들어가는 길이 막히는 것이며, 우리의 희망도 사라지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또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위에 있는 것을 생각하고 땅에 있는 것은 생각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이미 죽었고, 여러분의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 안에 숨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생명은 하늘에 있습니다. 따라서 부활이 없다면 우리는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온 백성은 자기들에게 선포된 말씀을 알아들었으므로, 가서 먹고 마시고 몫을 나누어 보내며 크게 기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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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930. 성 예로니모 사제 학자 기념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우리는 주님의 제자들이다
- 관상과 활동 -
“행복하여라!
주님의 가르침을 밤낮으로 되새기는 사람,
그는 제때에 열매를 맺으리라.”(시편1,2-3)
오늘은 9월 순교자 성월의 끝날이자 성 예로니모 사제 학자 기념일입니다. 대부분의 성인이 그렇지만 성 예로니모 역시 파란만장한 생애였고 그 고난과 시련의 와중에도 80세 장수를 누리셨으니 이 또한 주님의 은총입니다. 그러나 시종일관 진리탐구의 치열한 삶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고 업적도 놀라울 뿐입니다. 성 아우구스티노를 제외한 누구도 성인과 견줄 사람은 없었다 합니다. 그리하여 성 암브로시오, 성 아우구스티노, 성 그레고리오 대 교황과 더불어 서방의 4대 교부로 손꼽히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성인의 가장 큰 업적은 391년부터 406년까지 무려 15년 동안 계속된 성경의 라틴어 번역으로, 1546년 트리엔트 공의회는 성 예로니모의 불가타 번역을 공식적인 성경으로 인정했습니다. ‘성경을 모르면 그리스도를 모른다’는 성 예로니모의 언급에서 보다시피 얼마나 그리스도를 사랑하여 말씀 공부에 전념한 삶인지 깨닫게 됩니다. 참으로 주님의 제자로써 한결같이 열정적으로 살았던 성인이었습니다. 오늘 화답송 시편은 그대로 성 예로니모의 심중을 대변했을 것입니다.
“주님의 법은 완전하여, 생기 돋우고, 주님의 가르침은 참되어 어리석음 깨우치네. 주님의 규정 올바르니, 마음을 기쁘게 하고, 주님의 계명 밝으니, 눈을 맑게 하네. 금보다 순금보다, 더욱 값지며, 꿀보다 참꿀보다, 더욱 달도다.”(시편19,8.9.11)
새삼 주님의 말씀은 인간의 본질이며 인간 무지와 허무에 대한 근원적 답임을 깨닫습니다. 말씀의 빛이 무지와 허무의 어둠을 몰아냅니다. 말씀이야 말로 영혼의 식이자 약입니다. 말씀공부와 실천을 통해 치유되고 주님을 닮아감으로 참나의 실현이요 구원입니다. 그러니 성 예로니모처럼 주님의 제자들은 말씀의 사람들임을 깨닫습니다. 교황님께서 미리 발표하신 내년에 있을 ‘세계 통교의 날’ 담화문 주제도 단 한마디, “들어라!(Listen!)”입니다. 그러니 우리 그리스도교는 말씀과 들음의 종교라 할 수 있겠습니다.
성인 축일을 지낼 때 마다 참 많이 배우고 깨닫습니다. 똑같은 성인이 하나도 없다는 것도 큰 위로와 힘이 됩니다. 꽃들처럼 색깔과 향기, 모양과 크기가 다 다릅니다. 성 예로니모는 마치 사막의 선인장처럼 가시가 많은 참 까칠한 성인이었고, 사제가 될 마음이 없었기에 사제로 미사를 드린 적이 한번도 없었다 합니다.
그러나 그의 하느님을 찾는 구도 여정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사막에서 5년간의 은수생활, 말년에는 30년 동안 예루살렘에서 수도생활에 전념하면서 오직 말씀 탐구에만 전념했습니다. 성인의 방에는 십자가와 성경과 외투와 깔판 하나로 참으로 단순한 본질적 삶이었음을 봅니다. 말 그대로 모두로부터 초연한 하느님만으로 충분했던 무소유의 가난한 삶이었습니다.
성덕의 잣대는 열렬한 하느님 향한 사랑입니다. 성 예로니모의 이런 진리탐구의 열정도 결국은 하느님 사랑의 표현입니다. 주님과 사랑의 일치인 관상의 친교는 활동의 선교를 통해 표출되기 마련입니다. 복음 선포의 선교는 교회의 존재이유요 그에 앞선 관상의 일치입니다. 바로 미사후의 파견이 이를 입증합니다. 전례와 삶이 얼마나 긴밀한 관계에 있는지 깨닫게 됩니다.
오늘 제1독서 느헤미야서의 집회장면은 그대로 미사의 구조인 말씀전례와 성찬 전례를 압축하고 있습니다. 느헤미야 총독과 율법학자이자 사제인 에즈라와 백성을 가르치던 레위인들은 온 백성에게 타이릅니다. 다음 말씀은 교회의 미사전례에 참석한 오늘의 우리 모두에게 주시는 말씀처럼 들립니다.
“오늘은 주 여러분의 하느님께 거룩한 날이니, 슬퍼하지도 울지도 마십시오. 가서 맛있는 음식을 먹고 단 술을 마시십시오. 주님께서 베푸시는 기쁨이 바로 여러분의 힘이니, 서러워하지들 마십시오. 오늘은 거룩한 날이니, 조용히 하고 서러워하지들 마십시오.”
날마다의 오늘이 거룩한 날이며 주님께서 베푸시는 기쁨의 날입니다. 주님께서 베푸시는 기쁨은 우리의 힘입니다. 참으로 주님의 제자들은 주님과 만남의 기쁨으로 인해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는 제자로 살 수 있게 됩니다. 주님과 관상의 일치는 파견을 통해 복음 선포의 활동으로 드러나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제자들을 둘씩 짝지어 당신에 앞서 파견하십니다. 친교의 관상과 선교의 활동은 우리 제자들의 영적 삶의 리듬이기도 합니다. 다음 주님의 복음 말씀에서 우리는 귀한 가르침을 배웁니다.
“가거라.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돈 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고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마라.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먼저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하고 말하여라. 이 집 저 집으로 옮겨 다니지 마라. 병자들을 고쳐주며,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습니다’하고 말하여라.”
우리 삶의 자리가 관상과 활동의 복음 선포의 현장입니다. 예나 이제나 영전 전투 치열한 삶의 현장입니다. 이리떼 세상에 양들처럼 파견되는 제자들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를 위한 최소한의 간소한 삶과 소유가 아닌 존재의 본질적 삶이 주님의 제자들에게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참으로 우리가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 주님의 평화입니다. 무소유의 정신에서 샘솟는 평화입니다. 정주의 환대를 통해 복음 선포의 삶을 살아가며 수도원을 찾는 이들에게 주님의 평화를 선물하는 우리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의 형제들입니다.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마태5,9)
텅 빈 가난한 영혼 안에서 샘솟는 평화입니다. 평화와 더불어 하느님 나라의 실현이요 저절로 치유의 구원입니다. 참으로 주님의 제자들은 말씀의 사람이자 평화의 사람임을, 하느님 나라의 사람임을 깨닫습니다.
그러니 우리 하나하나가 하느님의 기쁨이 되어, 하느님의 나라가 되어 살아야 합니다. 선교의 활동에 앞서 주님 안에서 공동체의 관상적 일치가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코로나로 인해 교회 전례에 자주 참여하지 못하드라도 내 삶의 자리에서 주님과의 관상적 일치를 통해 날로 내적 삶의 깊이를 더해 가면서 이웃과도 끊임없이 하느님 나라의 기쁨을 나누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주님 말씀에서 생명의 샘을 찾고 구원의 양식을 얻어, 더욱 풍요한 본질적 깊이의 하느님 나라를 살게 하십니다.
“주, 하느님, 당신 말씀을 찾아 받아먹었더니, 그 말씀이 제게 기쁨이 되고 제 마음에 즐거움이 되었나이다.“(예레15,16).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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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930. 성 예로니모 사제 학자 기념일.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치열하게 말씀을 사랑하신 예로니모 성인을 기리는 오늘, 미사의 말씀은 복음의 일꾼들에게 용기를 주십니다.
"가거라.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루카 10,3)
첫 파견을 받아 설레며 길을 떠나는 일흔두 명의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아주 직설적으로 말씀하십니다. 좀 완곡히 표현을 하셔도 가뜩이나 여러 걱정이 앞설 텐데 회유나 감언이설 따위는 없습니다.
사실 예수님이야말로 이리 떼 가운데 오신 어린 양이십니다. 이를 요한 복음사가는 직설적으로"그분께서 당신 땅에 오셨지만 그분의 백성은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았다."(요한 1,11)고 전하지요. 악과 어둠이 판치는 세상에 하느님의 진리를 전하는 여정이 절대 녹록치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루카 10,5)
제자들은 만나는 이들이 자기들에게 호의를 가질지, 적대감을 가질지, 아니면 그저 무관심할지 가리지 않고 먼저 평화를 선사합니다. 이 평화의 축복은 낯설고 어색한 첫 만남의 분위기를 누그러뜨릴 수도 있지만, 백인백색의 세상에서 아직 누가 이리인지 알 길 없으니 그조차도 모를 일입니다.
그래도 복음의 일꾼이 전하는 평화는 상대가 어떻게 반응하든 소멸되지 않습니다. 그 평화를 반기는 이에게는 평화가 내리고, 거부하는 이 앞에서는 그 평화가 되돌아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혹여 거부를 당하더라도 평화의 축복을 건넨 이는 자기 평화를 잃지 않을 겁니다. 인간적으로 감정이 동요하고 실망과 수치심을 느낄 수도 있지만 이내 되돌아온 평화를 껴안고 꿋꿋이 다음 길을 가면 그만입니다.
"그러나 이것만은 알아 두십시오.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습니다."(루카 10,11)
복음의 일꾼은 한 집에서뿐 아니라 한 고을 전체에서도 거부를 당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 고향 나자렛에서도 그러셨지요.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지만 어둠은 그를 깨닫지 못하"(요한 1,5)는 까닭입니다. 오랜 세월 세상에 겹겹이 쌓인 짙고 음울한 어둠은 그리 만만히 자리를 내주고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복음의 일꾼은 진리의 말씀에 대한 저항과 박해를 각오해야 합니다.
제1독서에서는 말씀을 만나는 가장 이상적인 장면이 펼쳐집니다.
"온 백성이 일제히 '물 문' 앞 광장에 모여, 율법 학자 에즈라에게 주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명령하신 모세의 율법서를 가져오도록 청하였다."(느헤 8,1)
말씀에 대한 갈망이 아래로부터, 즉 백성들에게서 싹터서 율법을 읽어 달라고 청하는 모습이 놀랍고도 감동적입니다. 많은 어려움과 방해를 극복하고 예루살렘 도성이 제 꼴을 갖추게 되자, 이제 백성은 내용으로 들어가고 싶어합니다. 사실 하느님의 도성도, 성전도, 온갖 제도와 신분도 하느님의 말씀을 담은 그릇이고 구현이지요. 하느님을 만나고 그분의 뜻을 사는 진짜 하느님 백성이 되려면 이제는 형식들로 겹겹이 둘러싼 껍질을 뚫고 내용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백성은 모두 율법서의 말씀에 귀를 기울였다."(느헤 8,3)
"온 백성은 손을 쳐들고 '아멘, 아멘!' 하고 응답하였다. 그런 다음 무릎을 꿇고 땅에 엎드려 주님께 경배하였다."(느헤 8,6)
"먹고 마시고 몫을 나누어 보내며 크게 기뻐하였다."(느헤 8,12)
말씀을 듣고 백성들은 주님을 경배하며 눈물을 흘립니다. 말씀 안에 이스라엘의 역사와 자기들이 걸어온 삶의 궤적을 위로하시는 주님의 음성이 가득했기 때문이었을 겁니다. 또 유배와 귀환, 도성과 성전 재건의 지난하고 고된 과정을 통해 구원을 체험하고 확신했기에, 무엇보다 하느님의 말씀을 소유한 그분의 백성이라는 자긍심이 율법을 통해 다시금 일깨워졌기에 그랬을 것 같습니다.
말씀과 다시 하나 된 그 날, 에즈라는 백성들에게 울지 말고, 맛있는 음식과 단 술을 즐기며 기뻐하라고 다독입니다. 또 미처 마련하지 못한 이들과도 나누라는 권고 또한 빼놓지 않지요. 말씀은 듣고 깨닫고 머무르는 이에게 고여 있지 않고 가난한 이들에게로 흘러나갈 때 비로소 완성되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렇게 되기까지 이스라엘이 얼마나 많은 고통과 난관을 넘어섰는지 우리는 모르지 않습니다. 말씀의 가치와 사랑을 깨닫기까지 우리 또한 얼마나 많은 물음과 공허와 불안의 산들을 넘어왔고 또 넘어가야 하는지요! 불확실성 앞에 던져졌던 무수한 복음의 일꾼들이 뿌린 씨앗이 세상 어디선가 열매를 맺고 있다는 명백한 증거가 어쩌면 우리 자신이 아닐까 싶습니다.
"행복하여라! 주님의 가르침을 밤낮으로 되새기는 사람, 그는 제때에 열매를 맺으리라."(입당송)
주님께서 부족하지만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말씀의 일꾼으로 살아가는 우리에게 용기를 주십니다. 갖가지 방해와 냉소와 몰이해 속에서도 지치지 않고 말씀을 듣고 머무르고 사랑하는 이는 언젠가, "제때에"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당장 지금이 아니어도 "제때"는 반드시 올 것이니 오늘도 묵묵히 말씀과 함께 나아가시길 기원합니다. 말씀의 사람인 여러분을 축복합니다저항9월 한 달도 수고많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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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930. 성 예로니모 사제 학자 기념일. 이병우 루카 신부님.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루카10,2)
'일흔두 제자의 파견!'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일흔두 제자를 파견하시면서 제자들에게 당부하시는 말씀입니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고 말씀하시면서,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은 이 말씀에 더 마음이 머물렀습니다.
얼마 전에 묵상할 때에는 '지금 우리 주변이나 교회에는 일꾼들이 참 많은데...'하는 묵상을 했었는데, 오늘은 예수님 말씀처럼, '일꾼들이 참으로 적다.'라는 묵상을 합니다.
신성과 인성을 두루 갖추시고 우리가 사는 세상 안으로 오신 예수님의 간절한 마음은 '모두를 살리시는 것'입니다. '모두가 하느님 말씀 안에 사는 것', '모두가 하느님의 나라 안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런 예수님의 간절한 마음과 함께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의 모습, 삶의 자리의 모습을 바라보니 참으로 많은 일꾼들이 필요함을 느끼게 됩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말씀 안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이 적어 보이기 때문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은 더 그렇고, 믿는 사람들까지도 그러해 보이기 때문입니다.
머리와 입으로는 예수님을 믿고 따른다고 하지만, 구체적인 삶의 모습은 믿지 않고 따르지 않는 '비그리스도인의 모습'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 다르게 생각하고, 다르게 말하고, 다르게 행동하는 '죽은 믿음, 죽은 신앙의 모습'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9월 순교자 성월의 마지막 날이자,
성경을 대중 라틴말로 번역하여 쉽게 하느님의 말씀을 대할 수 있도록 하신 '예로니모 성인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예로니모 성인께서 번역하신 '대중 라틴말 성경'이 바로 '불가타(Vulgata) 성경'입니다.
감사와 함께 9월 순교자 성월을 잘 마무리하고,10월 묵주기도 성월을 기쁘게 맞이합시다!
그리고 예로니모 성인께 특별한 감사를 드리면서, 살아있는 신앙생활을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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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930. 성 예로니모 사제 학자 기념일. 신우식 토마스 신부님.
오늘의 묵상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 이 말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가장 먼저 말하라고 가르쳐 주신 축복의 인사입니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모두 주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제자입니다. 주님의 참다운 제자란 온 세상에 파견된 사람으로, 주님께서 주시는 참평화의 전달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주님의 복음을 전하는 모든 제자에게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마라.” 하십니다. 세상의 것에 신경 쓰면서 하느님의 나라를 전할 수 없기에, 복음 전파에 온 힘을 기울이고 그 밖의 것은 주님께 온전히 의탁하라는 뜻입니다. 또한 제자들이 할 일은 세상 사람들의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축복을 전하고, 아픈 이를 낫게 하며 구원의 날이 왔음을 알리는 것입니다.
실지로 우리는 많은 시간을 세상의 것에 신경 쓰며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걱정하고 신경 쓰는 것의 대부분은 쓸데없는 생각이나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한 상상입니다. 또는 나의 오해에서 비롯된 근심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하루에 얼마나 자주 주님께 기도합니까? 잠깐이라도 세상 것을 내려놓고 주님과 소통하는 시간을 마련한다면 세상의 어떤 것도 우리를 흔들지 못할 것입니다. 평화가 깨어지지 않고, 주님께서 주신 참평화를 이웃에게도 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순간의 만족을 가져다주는 것에 집착하지 말고, 영원한 만족을 가져다주는 것에 집중하는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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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930. 성 예로니모 사제 학자 기념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일흔 두 제자를 파견하심
예수께서는 열두 제자들 외에 일흔두 제자를 둘씩 짝을 지어 당신이 가시려는 모든 곳으로 보내셨다. 그러시면서 “가거라.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3절) 하신다. 이 양들은 이리 떼의 먹이가 되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은총이 되도록 보내신 것이다.
주님께서는 어째서 양들과 같은 사도들을 이리 가운데로 보내셔서 복음을 전하라고 하셨을까? 너무나 위험하지 않겠는가? 평화밖에 모르는 양들이 어떻게 잔인한 맹수를 이길 수 있겠는가? “그럴 수 있다.”라고 주님께서는 말씀하신다. 그분은 복음을 전하는 모든 사람에게 목자가 되어주실 것이다. 주님께서는 그들 가운데 함께 계시며, 그들을 도와주시고 모든 악에서 구해주실 것이다. 그러기에 주님께만 의탁하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당신의 말씀을 전하라고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돈주머니와 여행 보따리, 신발도 지니지 말라고 하신다. 그들은 바삐 다녀야 한다. 그들이 생필품도 사용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신발을 신었느냐 벗었느냐가 문제가 아니다. 이것은 제자들이 살아가는 일을 모두 주님께 맡기기를 원하셨다. “네 근심을 주님께 맡겨라. 그분께서 너를 붙들어 주시리라.”(시편 55,23)라고 하셨다. 그분은 당신의 일꾼들에게 필요한 것을 넉넉히 채워 주시는 분이시다.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마라.”(4절) 이는 길에서 누구와 이야기하느라고 자시의 임무를 수행하는 일이 늦어지지 않도록 복음선포의 직무를 서둘러 수행하라는 말씀이다. 인정에 끌린 행위가 거룩한 임무를 방해할 수 있다는 말씀이다. 또 수입을 바라고 그 일을 해서는 안 된다. 아무 음식이나 잘 먹고, 더 좋은 음식, 더 나은 숙소를 바라거나 찾아다녀서도 안 된다는 말씀을 하신다.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먼저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 하고 말하여라.”(5절) 우리는 방문을 하면서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하고 인사한다. 좋은 습관이다. 우리는 만나는 모든 사람이 구원받도록 평화를 빌어주어야 한다. 우리가 빌어준 평화는 우리에게 돌아올 것이다. 복음을 전하는 일은 복음을 받아들이는 사람보다, 우리 자신에게 더 유익한 것이다. 평화가 전달되면 그 사람과 우리에게 다 유익한 일이다.
“너희 발의 먼지를 털어 버려라.”(마태 10,14) 예수께서는 당신의 제자들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을 응징하시겠다고 한다. 그러나 이 응징은 주님께서 하시는 것이 아니다. 그들이 주님의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즉 복음을 선택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미 죽음의 길로 가고 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그날에는 소돔이 그 고을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12절) 라고 말씀하신다. 나는 이제 어떠한 마음으로 복음을 받아들이고 전할 것인가? 깊이 묵상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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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930. 성 예로니모 사제 학자 기념일.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루카 10, 2)
무르익어가는
가을이라는
계절은
수확을
만끽하는
일꾼들의
계절이다.
가을도
최선을 다해
무르익어간다.
열매의 맛은
말씀의 맛이며
행복의 맛이다.
수확과 말씀
말씀과 일꾼은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실천이다.
모든 시간에
필요한 말씀이
바로 우리가
접하는
생명의
성경이다.
성경을 통하여
삶의 고통과
갈등을 우리는
극복하여 나간다.
예로니모의
쉬운 번역은
온 마음과
온 정신을
다하는
실천이었다.
더더욱 친숙한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에게
다가왔다.
말씀은
누군가의
노력으로
세상을 비춘다.
나태해진 삶을
반성한다.
성경은
우리 삶을
다시
비춘다.
최선을 다하는
삶은 아름답다.
성경은
우리 삶에
정성을 쏟도록
가르친다.
정성과 마음은
일꾼들의
소중한
봉헌이다.
무언가가
소중해 지는
만남이 참된
만남이다.
성경은
소중한 것을
가르쳐준다.
나의
손가락으로
성경을 읽고
성경의
페이지를
넘긴다.
말씀의 향기는
영원하다.
말씀의 힘이
삶의 힘임을
안다.
말씀의
열매와 함께
말씀의
일꾼들이
있다.
말씀이 바로
무르익는
행복이다.
말씀을
펼쳐야 할
말씀의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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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930. 성 예로니모 사제 학자 기념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가거라.>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가거라.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고,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마라.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먼저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 하고 말하여라.
그 집에 평화를 받을 사람이 있으면 너희의 평화가 그 사람 위에 머무르고,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되돌아올 것이다. 같은 집에 머무르면서
주는 것을 먹고 마셔라. 일꾼이 품삯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이 집 저 집으로 옮겨 다니지 마라. 어떤 고을에 들어가든지
너희를 받아들이면 차려 주는 음식을 먹어라. 그곳 병자들을 고쳐 주며,
‘하느님의 나라가 여러분에게 가까이 왔습니다.’ 하고 말하여라(루카 10,2-9).”
1) 신앙인은 ‘하느님의 자녀’이면서 동시에
하느님 나라 건설 사업에 동참하는 ‘하느님의 일꾼’입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 주는 활동은 잃은 자녀를 되찾는
활동이기도 하고, 하느님의 일꾼을 모집하는 활동이기도 합니다.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라는 말씀은,
여기서는 “더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믿고 받아들일 수 있도록
사람들을 인도해 주십사고 하느님께 청하여라.” 라는 뜻이고,
복음을 전해 주는 활동은 ‘기도하면서’ 해야 하는 활동이라는 가르침입니다.
2) 신앙인은 세상 속에서 살고 있지만, 세상에 속하지는 않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항상 ‘이리 떼 가운데에 있는 양들’ 같은 처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끊임없이 기도해야 합니다.
3) 신앙인은 세상 사람들과 함께 살고 있지만,
세상 사람들과 ‘다르게’ 사는 사람입니다.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고” 가라는 예수님 말씀은,
세상 사람들과 다르게 사는 방법에 관한 말씀입니다.
신앙생활의 목표는 세속의 부귀영화가 아닙니다.
복음을 전해 주는 일은, 세속에서 부자가 되는 방법을 알려 주는 일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보물을(생명을) 얻는 방법을 알려 주는 일입니다.
4)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마라.” 라는 말씀은,
세속 일에 연연해서 시간 낭비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세속의 인간관계를 모두 끊어 버리라는 뜻은 아닙니다.)
이 말씀은,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고, 너는 가서
하느님의 나라를 알려라(루카 9,60).” 라는 말씀과 같은 가르침입니다.
5) 여기서 ‘평화’는 구원받은 사람들이 누리는 영원한 생명, 영원한 행복,
영원한 기쁨을 모두 포함하는 말입니다.
따라서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 라는 인사는,
“나는 당신에게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행복을 얻는 방법을
알려 주려고 왔습니다.” 라는 인사입니다.
신앙인은 이미 그 생명과 행복을 누리고 있는 사람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행복은
이곳에서 시작되어서 그곳에서 완성됩니다.)
그 생명과 행복을 누리고 있음을 잘 나타내는 표시는 바로 ‘기쁨’입니다.
복음을 전해 주는 일은 자신의 기쁨을 나누어 주는 일이기도 합니다.
(기쁨은 나눌수록 커지고, 슬픔은 나눌수록 작아진다는 속담은
신앙생활과 선교활동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만일에 신앙인이 ‘기쁨’ 없이 신앙생활을 하고 있으면,
다른 사람에게 아무것도 전해 줄 수가 없습니다.
복음을 전해 주는 일은 ‘내가 기쁘니까’ 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기쁨이 아니라 의무감으로 하는 경우를 볼 때가 있습니다.
기쁨 없이 의무감으로만 전하는 그것이 ‘기쁜 소식(복음)’이 될 수는 없습니다.
6) 복음을 전해 주는 일은, ‘나의 기쁨’을 나누어 주는 일이면서
동시에 상대방의 슬픔을 나누어 받는 일입니다.
복음을 전해 주려면 상대방의 근심, 걱정, 슬픔, 두려움 등을
모두 들어 주어야 하고, 함께 아파해야 하고, 함께 걱정해야 하고,
함께 울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의 여러 가지 걱정들을 쓸데없는 걱정이라고 비웃거나
나무라지 말고, ‘진심으로’ 함께 걱정해 주어야 합니다.
사랑이란 상대방이 있는 곳으로 내가 내려가는 것입니다.
만일에 그런 ‘사랑’ 없이 복음만 전한다면,
듣는 사람 입장에서는 그것이 복음으로 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 줄 때, 마치 큰 깨달음을 얻은 사람이
어리석은 사람들을 가르치는 것처럼 행동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그런 행동은 ‘교만’이고, 사랑 없는 짓입니다.
복음을 전해 주는 일이 ‘잘난 체’가 되면 안 됩니다.
세상 사람들보다 조금 먼저 신앙인이 되었다는 것이
우월감을 가질 이유가 되지는 못합니다.
복음을 전해 주는 일은, 함께 하느님 나라를 향해서 가야 할 형제로서
형제애를 실천하는 일입니다.
7) “같은 집에 머무르면서 주는 것을 먹고 마셔라. 일꾼이 품삯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이 집 저 집으로 옮겨 다니지 마라. 어떤 고을에 들어가든지
너희를 받아들이면 차려 주는 음식을 먹어라.” 라는 말씀은,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일꾼을 먹이시는 분이다. 그러니 너희는 아무것도
걱정하지 마라. 하느님께서 너희를 먹이실 때, 너희는 감사히 여기면서
주시는 대로 먹어라.” 라는 뜻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오지 않았으며 이 세상에서 아무것도
가지고 갈 수 없습니다.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우리는 그것으로
만족합시다. 부자가 되기를 바라는 자들은 사람들을 파멸과 멸망에 빠뜨리는
유혹과 올가미와 어리석고 해로운 갖가지 욕망에 떨어집니다.
사실 돈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악의 뿌리입니다. 돈을 따라다니다가 믿음에서
멀어져 방황하고 많은 아픔을 겪은 사람들이 있습니다(1티모 6,7-10).”
이 말은, 신앙인의 인생살이에 관한 권고이지만,
복음을 전해 주는 일을 할 때에는 특히 더 명심해야 할 말입니다.
<우리는 ‘참 신앙’과 ‘기복신앙’을 구분할 줄 알아야 합니다.
‘기복신앙’에 빠져 있으면, 자기 자신도 하느님 나라에 못 들어가고,
다른 사람들이 들어가는 것도 방해하게 됩니다(마태 2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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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930. 성 예로니모 사제 학자 기념일.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살아있는 복음이 되어 걸어가는 복음선포자>
“너희의 평화가 그 사람 위에 머무를 것이다.”(루카 10,6)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일흔 두 제자를 뽑아 당신이 가실 여러 마을과 고장으로 파견하십니다. 그분께서는 파견하시면서 제자들이 가져야 할 마음가짐과 사명을 알려주십니다. 오늘 복음말씀은 특히 아씨시 성 프란치스코의 초기 삶에 있어 복음적 생활양식을 따르는 삶의 방향을 제시해준 중요한 말씀이기도 하지요.
특히 성 프란치스코는 이 말씀에 영감을 받아 거룩한 복음을 실행하며 모든 이에게 회개와 평화를 선포하라는 사명을 받습니다. 그는 그 사명을 실행함에 있어서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라.”(10,4)는 말씀을 깊이 인식하게 됩니다. 따라서 그는 예수님처럼 가난한 순례자의 모습으로 세상을 순례하며 예수님의 말씀과 삶을 그대로 실행하고자 온힘을 기울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일흔 두 제자를 파견하는 것은 의미심장한 변화입니다. 이제 예수님의 사명이 열두 사도라는 작은 제자공동체에 한정되지 않고, 그분을 따르는 모든 이들에게 맡겨진 것입니다. 사실 제자들에게 맡겨진 자비와 치유, 해방과 평화를 선포하는 일은 미룰 수 없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마음과 자세로 제자들에게 주어진 사명을 실행해야 할까요?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고,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마라.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먼저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 하고 말하여라.”(10,4-5)
그렇습니다! 복음을 선포하는 일은 뒤로 미루거나 다른 일을 한 다음에 시간나면 할 수도 있는 그런 일이 결코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매순간 내가 살아가는 삶의 자리에서 ‘지금’ 복음을 선포하라 하십니다. 그러니 안전을 보장해줄 여장을 꾸리고, 일일이 인사치레를 다 하고, 악의로 복음을 거부하는 이들을 설득하느라 시간을 허비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 시급한 사명 수행을 위해 현세의 그 어떤 것에도 의지하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나에게 주어진 그 사명만을 바라고 그것에만 집중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을 소유하지 않고서 하느님의 기쁜 소식을 선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자신의 영광과 안락, 개인의 이익과 세상의 가치들에 마음을 빼앗긴다면 결코 하느님의 얼굴이 드러나지 않는 까닭이지요.
아울러 우리는 모든 이에게 하느님의 평화를 선포해야 합니다. '평화를 빕니다!’라는 인사는 평화이신 하느님께서 함께하길 기원하는 축복입니다. 그것은 하느님 나라의 선포가 평화를 가져다주는 자비와 정의를 실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 사람 안에, 이 세상에 하느님의 자비와 정의가 실현되기를 바라는 축복을 전해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때때로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들을 만나기도 하지요. 그럴 때에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그들과 씨름하느라 헛되이 시간을 보낼 필요가 없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통해서 전해지는 생명과 해방의 선물을 거절함으로써 하느님과 예수님을 배척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스스로를 심판한 셈입니다.
우리 모두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가난한 순례자로서 ‘지금 여기서’ 하느님의 자비와 생명, 자유와 평화를 선포하는 ‘걸어가는 복음’으로 살았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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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930. 성 예로니모 사제 학자 기념일.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고.”
루카 복음에서는 주님께서 열 두 제자 외에 ‘일흔 두 명의 제자들’을 파견하신
대목을 전하고 있습니다.
공교롭게도 히브리 원본에서 외국의 유대인 공동체(Diaspora)를 위한 고대 희랍어 번역을 위해 일흔 두 명의 학자들이 동원되었다는 숫자와 연결되고 있습니다.
각 지파에서 여섯 명의 학자들이 나왔다고 하는데 ‘아리스데아스의 편지’에서 이 사실을 밝히고 있습니다.
이 편지에서 히브리 율법서를 72명의 학자가 모여서 72일만에 그리스어로 번역했다고 전합니다.
그래서 이 번역서를 원칙적으로는 ‘칠십이 인의 번역본’이라고 해야 하는데 부르기 쉽게 ‘칠십인’이라는 뜻인 ‘셉뚜아진따(Septuaginta LXX)라고 했지요.
또한 창세기 10장에 소개된 세상 민족들의 숫자와 연결된다고 추측하는 학자도 있습니다.
주님께서 열둘을 파견하실 때와는 달리 일흔 두 명의 제자들을 파견하실 때에는 둘씩 짝지어 보내시는 것입니다.
제일 먼저 그들에게 이르시는 첫 번째 말씀입니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루카 10,2)
제자들을 보내시는 심정이 ‘이리 떼 가운데로 양들을 보내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돈주머니도 여행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고 심지어는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어떤 집에 들어가든지 먼저 평화를 빌어주고 그 집에 머무르면서 주는 것을 먹고 마시라고 하십니다.
‘이집 저집 옮겨 다니지 말라.’고 하시는 이유는 ‘조건이 더 좋은 것을 이리저리 따지지 말고 대접하는 대로 그 집에서 지내라.’는 말씀으로 이해됩니다.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하고 선포하며 받아들이는 않는 집에서는 떠날 때 먼지를 털어 버리고 가라고 하십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을 파견하시며 당부하신 말씀은 사실 지키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돈주머니도 여행보따리, 심지어는 여벌의 신발’은 사실 여행하는 데에 필수적인 것인데도 그것을 챙기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이유는 이런 것들이 하느님 나라 선포하는 데에 는 거치장스러운 짐이 된다는 것이지요.
‘길 가다가 사람들에게 인사도 하지 말라’라는 말씀은 사람에게도 묶이지 말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가나안의 약속의 땅을 열한 지파에게는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레위지파에게는 예외로 땅을 주지 않으시며 말씀하십니다.
“주님께서 아론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들의 땅에서 상속 재산을 가질 수 없다. 그들 사이에서 너에게 돌아갈 몫은 없다. 이스라엘 자손들 가운데에서 네가 받을 몫과 상속 재산은 바로 나다.’”(민수 18,20)
기업을 받는다는 것은 그들의 삶에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바로 하느님 자신이 레위의 몫이었던 것입니다.
느헤미야서에서 에즈라의 행적을 전해 주고 있습니다.
율법학자는 ‘주님의 율법을 연구하고 실천할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에서 규정과 법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에즈 7,11)
에즈라는 바빌론 유배 이후에 알려진 율법학자입니다. 그는 원래 사제 출신이었고 페르시아 왕 아르타크세르크세스(기원전 464-424)에게 간청해서 예루살렘으로 귀환할 허락을 받습니다.
그리고 그는 예루살렘에 도착한 후 대사제 가문이면서도 백성들에게 율법을 읽어주고 가르쳐줌으로써 교사와 사제 직무를 수행합니다. (에즈 8장)
그는 사제집안이면서도 사제와는 독립되는 율법학자의 위치에서 백성들을
이끌었던 것입니다.
유배 이후에 축소된 성전의 사제들 보다 율법학자들이 군중의 지지를 더 받게 되었고 이스라엘의 특별한 권위를 세웁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제 출신인 에즈라는 율법학자로서 군중에게 율법서를 권위 있게 읽어주는 것입니다.
광장에 모여 율법을 듣고 있는 사람들은 하느님을 찬양하며 손을 쳐들고 환호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레위인들과 율법서의 관계에 대한 정황을 느헤미야 저자는 이렇게 전해 주고 있습니다.
“레위인들이 백성에게 율법을 가르쳐 주었다. 백성은 그대로 서 있었다. 그들은 그 책, 곧 하느님의 율법을 번역하고 설명하면서 읽어 주었다. 그래서 백성은 읽어 준 것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느헤 8,7-8)
이스라엘의 레위지파는 요셉이 열두 지파에 들어오면서 함께 등장하지만 (창세 35,23-26; 49,5) 그러나 요셉의 두 아들 에프라임과 므나쎄가 지파의 명단에 들어오면서 레위는 제외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다윗시대에 레위는 사제직, 성전의 악사, 성전문지기, 그 외에의 레위인들은 백성을 가르치는 일을 맡았던 것입니다.
레위인들은 하느님으로부터 분깃의 땅을 받지 못했어도 그들을 위해 48개의 성읍이 제공되었고 십일조 일부가 그들에게 돌아 갔습니다.
이렇게 놓고 볼 때 레위인들은 비록 재력에서는 넉넉하지는 못했어도 지파와 땅의 경계를 넘어서 활동할 수 있었고 유배 중에서도 하느님의 율법을 보존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던 것입니다.
귀환 후 에즈라와 사제들은 율법학자의 모습으로 기울어지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의 레위들이 땅으로부터 자유로웠기 때문에 또한 어느 지파의 경계에서도 자유로울 수 있었습니다.
그러한 그들이 신원 때문에 유배 중에서도 율법을 보존할 수 있었고 예루살렘 귀환 후에도 율법을 읽어주고 가르쳐 주는 지도자의 역할을 하였던 것입니다.
다른 지파는 북부 이스라엘과 남부 유다에 나뉘어 있던 땅과 함께 지파의 정체가 흔들리고 사라졌지만 사제들 그 세력이 약해졌지만 바빌론 유배 후에 성전을 중심으로 자신들의 역할에 충실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구약의 레위 지파이며 사제들의 삶이 넉넉하지는 못했어도 하느님의 성전과 말씀인 율법에 충실했던 것입니다.
제자들도 재물에서 가난했지만 어디에도 구애되지 않고 성실하게 복음선포의 충실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종교가 재물과 권력과 깊이 연결되어 있으면 가속을 받은 ‘세속화(世俗化)’의 수순을 밟습니다.
특히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사람들은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강조하셨습니다.
그러나 재물은 교회의 신원을 변질시킬 수 있는 힘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구약에서 레위인들에게 땅으로부터 ‘가난’을 주문하셨고 신약에서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재물로부터 ‘가난’을 당부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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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930. 성 예로니모 사제 학자 기념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그저 주면 주는 대로 기쁜 얼굴로 감사하며 먹어야겠습니다!
제자 선발과 교육을 완수하신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사목실습 현장으로 파견하십니다. 마지막 특별 훈화 말씀에는 복음선포자가 취해야 할 가장 기본적인 태도와 사명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당시 예수님의 제자단은 12사도뿐만 아니라 72제자까지 꽤 수효가 많았습니다. 오늘날 교회로 치면 12사도는 주교단의 시작을 의미합니다. 72제자는 사제단에 가깝습니다. 교부들은 바르나바라든지 소스테네스, 마티아, 타대오 등이 72제자단에 포함된다고 가르쳤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다른 무엇에 앞서 복음선포자는 기도하는 사람이어야 함을 강조하십니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루카복음 10장 2절)
또한 언제나 지체없이 길 떠나야 하는 복음선포자는 몸과 마음이 깃털처럼 가벼워야 한다고 가르치십니다.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고...” 제자들은 돈이나 물건에 신경쓰지 말고 언제나 모든 것을 주님께 의탁하며 복음 선포에만 전념하라는 당부입니다. 말씀선포자는 절대 장사꾼이 되어서는 안되겠습니다.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복음선포자들은 평화를 전하는 사도가 되어야 한다고 가르치십니다. 단 평화를 비는 인사는 아버지의 본질을 드러내는 것이기에, 누구에게나 차별 없이 해야 합니다. 그러나 평화의 자녀들만이 그 인사를 받게 될 것입니다.
정말이지 특별한 당부가 이어집니다.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마라.” 해도 해도 너무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인사를 나누는 마음까지 버리라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 선포라는 중차대한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서 방해되는 인사치레를 삼가라는 것입니다. 하늘의 명이 떨어졌을 때는 거기에 최우선적인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필요합니다.
더불어 복음선포자는 어딜 가든 절대로 민폐 끼치지 말 것을 부탁하십니다. “이 집 저 집 옮겨 다니지 마라. 어떤 고을에 들어가든지 너희를 받아들이면 차려주는 음식을 먹어라.”
복음선포자들은 어딜 가든 신중하고 조신하게 처신해야 됩니다. 얻어 드시는 주제에 짜니 맵니 하지 말아야하겠습니다. 남의 집에 가서 감 놔라 대추 놔라 하면 절대 안 됩니다. 그저 주면 주는 대로 기쁜 얼굴로 감사하며 먹어야겠습니다. 안주면 안 주는 대로, 그러려니 하고 다른 고을로 발길을 돌려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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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930. 성 예로니모 사제 학자 기념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거절당하면 더 좋은 이유: 평화가 되돌아오기에>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파견하시며 여러 가지로 당부하시는 내용이 나옵니다.
오늘은 특별히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먼저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 하고 말하여라. 그 집에 평화를 받을 사람이 있으면 너희의 평화가 그 사람 위에 머무르고,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되돌아올 것이다.”라는 말씀을 묵상해보겠습니다.
평화를 전하는 것은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기쁜 소식과 평화는 하나입니다. 그런데 그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 기쁜 소식이 그것을 전한 사람에게 되돌아옵니다. 이 말은 기쁨과 평화가 곧 행복인데 기쁨과 평화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을 전하는 사람은 더 평화롭고 기쁘게 된다는 뜻입니다.
이게 무슨 뜻일까요? 복음을 전하고 그 복음을 많은 사람이 받아들여 회개할 때 더 기쁘지 않을까요? 어떻게 그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 때문에 더 평화롭고 기쁠까요?
전에 들었던 것이라 확실하지는 않지만, 성 프란치스코가 행복에 대해 한 제자에게 이렇게 가르쳤다고 합니다.
“형제여, 가장 큰 행복이 무엇인지 아는가? 잘 먹고 마시는 것? 혹은 감명 깊은 설교로 많은 사람을 회개시키는 것? 그런 것이 아니라네.
내가 어느 집 문을 두드려 그 집 주인에게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먹을 것을 좀 주시오.’라고 할 때 그 사람이 나를 문전박대하면 그것이 행복이라네.
그러면 나는 문을 다시 두드려 똑같이 청한다네. 그러면 그 사람은 나에게 구정물을 퍼부을 것이라네. 이것이 행복이라네.
그러면 나는 다시 문을 두드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먹을 것을 청한다네. 그러면 그 사람이 몽둥이로 나를 때리겠지. 이것이 가장 큰 행복이라네.”
그때는 이 말이 무슨 의미인지 깨닫지 못했었습니다. ‘내가 더 많은 사람에게 복음을 전해서 주님께서 기뻐하시면 그것이 기쁨이 아닐까?’라고 생각했는데, 프란치스코 성인은 오히려 복음이 잘 받아들여지지 않아 멸시와 모욕, 고통을 당할 때가 더 행복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다 ‘아, 그럴 수 있겠구나!’라고 생각하게 된 것은 대학에 입학해서 방학 때 아르바이트를 할 때였습니다.
대학 1학년 때 무턱대고 돈을 벌어보겠다고 용역회사에 연락하였습니다. 용역회사에서는 조금 편한 곳으로 경험이 없는 저를 배정해 주었습니다.
오전의 일은 비계라고 불리는 공사장 쇠파이프를 나르는 일이었습니다. 긴장되고 정신이 없는 상태에서 일을 시작했는데 시작하자마자 사고가 났습니다. 쇠파이프를 들면서 세워져 있는 비계에 제 얼굴이 상처가 난 것입니다. 눈 아래에서 턱까지 길게 상처가 났습니다.
피가 흐르고 있었지만, 어차피 혼자 해내야 하는 일이라 목장갑이 시뻘게질 때까지 피를 닦아가며 일을 하였습니다. 점심때 저의 모습을 본 감독은 “아이, 경험자 좀 보내라니까 맨날 이런 초보를 보낸다니까!”라며 용역회사에 투덜댔습니다. 얼굴이 찢겨 피가 나고 있었지만 아무도 관심 가져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오후에는 지하실로 내려가 물을 퍼내는 일을 혼자 하였습니다. 그렇게 처음으로 벌어본 돈이 5만 원이었습니다. 용역회사에 갔더니 거기에서 만 원을 뺐습니다. 그리고는 연고를 사서 바르라며 2천 원을 다시 주었습니다. 그 상처는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한 3년은 갔던 것 같습니다. 이후에도 여러 번 막일을 했습니다.
그러며 저는 평생을 노동 현장에서 돈을 벌어 우리를 가르치셨던 아버지의 노고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저는 부모로부터 사랑받는 사람이었다는 것이 감사했습니다.
만약 너무 쉽게 공사장에서 돈을 벌고, 그래서 아버지가 우리를 키우기 위해 받은 고통을 느껴보지 못했다면 그만큼 감사하고 평화롭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복음을 전하시기 위해 지셔야 했던 십자가의 무게는 우리가 감히 상상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가끔 잘 표현된 예수님 수난의 영화를 볼 때는 그 느낌이 더 깊이 다가옵니다. 그때 느끼는 것이 무엇일까요? ‘평화’입니다.
아이의 행복은 부모에게 사랑받는 것에 있습니다. 아이가 부모로부터 사랑받는다는 확신이 없는 상태에서 무언가 좋은 업적을 이뤄냈을 때보다는 그런 업적을 이뤄내지 않아도 상관없다는 확신을 가질 만큼 사랑을 믿는 것이 더 행복합니다.
부모에게 인정받기 위해 악착같이 공부하는 아이가 행복해 보이지는 않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업적을 바라지 않으십니다.
따라서 우리의 행복은 내가 이뤄내는 성취에 있지 않고 나를 사랑해주시는 하느님께 대한 사랑이 증가하는 데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나를 위해 받지 않은 고통이 없습니다. 그러니 나도 복음을 전하며 박해받고 멸시받고 천대받고 고통을 받을 때 그것이 그리스도를 더 사랑하게 되는 계기가 되니 마음의 평화가 배가되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성인들은 주님께 ‘고통과 멸시’를 청했던 것입니다. 행복의 크기는 곧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의 크기와 같기 때문입니다.
부모의 사랑을 확신하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그분들의 영광이 아닌 고통에 동참해보는 것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를 더 사랑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분처럼 복음을 전하다 멸시와 고통을 당해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분이 나를 향해 가졌던 마음을 알게 되고 그러면 그만큼 평화와 행복을 얻습니다. 예수님의 평안에 머무는 길은 그분의 십자가 고통에 머무는 것뿐입니다.
알바니아 예수회 사제인 ‘안톤 룰릭’ 신부님은 서품을 받자마자 공산정권에 의해 평생 감옥에서 모진 고통을 겪으며 살아야 했습니다. 그해 성탄절 밤에 그분은 당신의 고통에서 십자가의 고통을 보았습니다. 추운 겨울 맨몸으로 매달려 구타를 당하여 울고 있을 때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위해 십자가에 매달리기 위해 오셨음을 깨닫고 큰 위로와 평화, 기쁨이 솟아나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 첫해 성탄절의 체험이 40년이 넘는 동안 감옥살이를 기쁘게 견뎌낼 힘을 주었습니다. 복음을 전하러 다니지도 않았지만,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통을 조금이라도 체험해 본 것이 참 행복의 원천이 되었던 것입니다. 나의 고통이 그리스도의 고통을 이해하는 마중물이 될 때만큼 행복한 일은 없습니다.
폴 틸리히(Paul Tillich)는 “고통의 깊이는 진실의 깊이로 향하는 유일한 문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고통의 깊이는 그것이 만약 그리스도를 더 사랑하게 만드는 데 사용된다면 행복의 깊이로 향하는 유일한 문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러니 행복을 전합시다. 그리고 거부당하고 멸시당하고 무시당할 때 기뻐합시다. 주님을 더 사랑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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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930. 성 예로니모 사제 학자 기념일. 이승화 시몬 신부님.
너희의 평화가 그 사람 위에 머무를 것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파견하면서
어떤 자세로 지내야 하는지를 알려주십니다.
그러나 파견의 목적은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는 일입니다.
무엇을 선포할지가 아닌
어떻게 지내야 하는지를 알려주신 이유가 있습니다.
복음 선포의 본질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은
지식으로만 전해지지 않습니다.
또 감성을 통해서만 전해지지도 않습니다.
우리의 신앙은 이성적 노력을 하면서도 그것을 초월하며
감성적이고 감각적이면서도 그것을 넘어가는
신비의 영역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내가 전할 수 있는 복음은
내가 느끼고 체험한 만큼 전할 수 있으며
내가 깨닫고 살아가는 만큼 신비를 증명하게 됩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당부하십니다.
제자들을 파견하면서도
아무것도 가지지 말고 떠나기를,
누구에게도 인사하지 않으며 마음을 두지 않기를,
어디에 머물든 주는 대로 만족하며
파견된 목적을 잊지 않기를 당부하십니다.
바로 겸손과 순명의 자세를 취하라 하십니다.
오늘 기억하는 예로니모 성인은
바로 이러한 말씀을 잘 지켜낸 분이십니다.
뛰어난 능력으로 촉망받았지만
자신에게 주어진 환경에 순응하고
그 안에서 할 수 있는 부분에 충실하였습니다.
결국 성인은 인간적 명예가 아닌 하느님 나라의 일꾼이 되었고
더 많은 이들이 하느님 말씀을 접할 수 있도록
성경을 번역하고 해설하는 일에 충실하였습니다.
성인의 모범을 따르며 우리도 기도합니다.
먼저 하느님을 알아가고 체험하는 가운데
우리의 겸손된 삶으로 믿음을 증명할 수 있기를,
그리하여 더 많은 이가 하느님께 다가올 수 있는
그런 하루 보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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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930. 성 예로니모 사제 학자 기념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어제 댓글-
김레오나르도김찬선 2021.09.29 03:15:13
앞으로 3일 강론을 올리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럴 경우 토요일이나
주일에 다시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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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930. 성 예로니모 사제 학자 기념일. 김대군 형제님.
독서, 복음서 주해
예로니모 성인은 340년 무렵 크로아티아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는 일찍부터 로마에서 라틴 말과 그리스 말을 깊이 공부한 뒤 정부의 관리로도 일하였으나, 수도 생활에 대한 관심으로 사막에서 오랫동안 은수 생활을 하며 히브리 말을 연구하는 데 몰두하였다. 사제가 된 그는 다마소 1세 교황의 비서로 일하면서 교황의 지시에 따라 성경을 라틴 말로 번역하였다. ‘대중 라틴 말 성경’이라고 하는 불가타가 그것이다. 또한 성경 주해서를 비롯한 많은 신학 저술을 남겼다. 420년 무렵 선종한 예로니모 성인은 암브로시오 서인, 그레고리오 성인, 아우구스티노 성인과 함께 서방 교회의 4대 교부로 존경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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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에즈라가 율법서를 펴고 주님을 찬양하자 온 백성은 “아메,아멘!”하고 응답하였다.
느헤미야기의 말씀입니다. 8,1-4ㄱ,5-6,7ㄴ-12
그 무렵
1 온 백성이 일제히 ‘물 문’앞 광장에 모여, 율법 학자 에즈라에게 주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명령하신 모세의 율법서를 가져오도록 청하였다.
2 에즈라 사제는 남자와 여자, 그리고 말귀를 알아들을 수 있는 모든 이로 이루어진 회중 앞에 율법서를 가져왔다. 때는 일곱째 달 초하룻날이었다.
3 그는 ‘물 문’앞 광장에서, 해 뜰 때부터 한낮이 되기까지 남자와 여자와 알아들을 수 있는 이들에게 그것을 읽어 주었다. 백성은 모두 율법서의 말씀에 귀를 기울였다.
4 율법 학자 에즈라는 이 일에 쓰려고 만든 나무 단 위에 섰다.
5 에즈라는 온 백성보다 높은 곳에 자리를 잡았으므로,그들이 모두 보는 앞에서 책을 폈다. 그가 책을 펴자 온 백성이 일어섰다.
6 에즈라가 위대하신 주 하느님을 찬양하자, 온 백성은 손을 쳐들고 “아멘, 아멘!”하고 응답하였다. 그런 다음에 무릎을 꿇고 땅에 엎드려 주님께 경배하였다.
7 그러자 레위인들이 백성에게 율법을 가르쳐 주었다. 백성은 그대로 서 있었다.
8 그들은 그 책, 곧 하느님의 율법을 번역하고 설명하면서 읽어 주었다. 그래서 백성은 읽어 준 것을 알아 들을 수 있었다.
9 느헤미야 총독과 율법 학자며 사제인 에즈라와 백성을 가르치던 레위인들이 온 백성에게 타일렀다. “오늘은 주 여러분의 하느님께 거룩한 날이니, 슬퍼하지도 울지도 마십시오.” 율법의 말씀을 들으면서 온 백성이 울었기 때문이다.
10 에즈라가 다시 그들에게 말하였다. “가서 맛있는 음식을 먹고 단 술을 마시십시오. 오늘은 우리 주님께 거룩한 날이니, 미처 마련하지 못한 이에게는 그의 몫을 보내 주십시오. 주님께서 베푸시는 기쁨이 바로 여러분의 힘이니, 서러워하지들 마십시오.”
11 레위인들도 “오늘은 거룩한 날이니, 조용히 하고 서러워하지들 마십시오.”하며 온 백성을 진정시켰다.
12 온 백성은 자기들에게 선포된 말씀을 알아들었으므로, 가서 먹고 마시고 몫을 나누어 보내며 크게 기뻐하였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 에즈라 사제는 회중 앞에서 율법서를 읽어 주며, 오늘은 거룩한 날이니 서러워하지들 말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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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너희가 평화가 그 사람 위에 머무를 것이다.>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0.1-12
그때에
1 주님께서는 다른 제자 일흔두 명을 지명하시어, 몸소 가시려는 모든 고을과 고장으로 당신에 앞서 둘씩 보내시며,
2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3 가거라.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4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로 지니지 말고 ,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마라.
5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먼져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하고 말하여라.
6 그 집에 평화를 받을 사람이 있으면 너희의 평화가 그 사람 위에 머무르고,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되돌아올 것이다.
7 같은 집에 머무르면서 주는 것을 먹고 마셔라. 일꾼이 품삯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이 집 저 집으로 옮겨 다니지 마라.
8 어떤 고을에 들어가든지 너희를 받아들임녀 차려 주는 음식을 먹어라.
9 그곳 병자들을 고쳐 주며, ‘하느님의 나라가 여러분에게 가까이 왔습니다.’하고 말하여라.
10 어떤 고을에 들어가든지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한길에 나가 말하여라.
11 ‘여러분 고을에거 우리 발에 묻은 먼지까지 여러분에게 털어 버리고 갑니다. 그러나 이것만은 알아 두십시오.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습니다.’
12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날에는 소돔이 그 고을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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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서 주해(해제. 역주 정 양 모)
1절
1.17절의 제자 숫자가 사본에 따라 다르다. 시나이. 살렉산드리아 사본에서는 70명. 파피루스 75호. 바티칸. 베자 사본에는 72명이라 한다. 루카가 70명 또는 72명 숫자를 어록에서 따왔는지 또는 루카 자신이 만들어 넣었는지를 밝히기는 쉽지 않다.
“당신에 앞서”는 직역하면 “당신의 얼굴에 앞서”로서 이런 표현이 7.27; 9.52;사도 13.24에도 나온다.
2절
2절과 같은 말씀이 마태 9,37-38에도 있다. 또한 그 변체가 요한 7.35에 나온다. 이 말씀은 몬디 앞뒤 문맥과 상관없이 따로 발설하신 것으로 그 뜻을 풀이하면 이렇다: 원래 추수는 종말심판을 가리키는 상징이다. 그리고 종말심판인 추수의 일꾼들은 본디 천사들을 뜻한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지금이 추구할 때라고 하셨으니 지금이 종말이라는 것이요 제자들은 추수 일꾼이라 하셨으니 그들이 곧 천사들의 임무를 수행한다는 것이다.
3절
마태 10.16에 변체가 있다. “이제 내가 여러분을 보내는 것은 마치 양들을 이리들 가운데 보내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뱀같이 슬기롭고 비둘기같이 순박하게 되시오.” 마태 10.16ㄴ은 마테오복음에만 있는데, 이는 본디 10.16과 상관없이 전해온 훈계였으리라. 짐작컨대 마태오가 그것을 수용하여 10.16ㄱ에 덧붙였을 것이다. 루카 10.3 상징어의 뜻인즉, 세상은 제자들을 박해할 것이요, 그리고 세상에서 전도하는 제자들은 정당방위도 할 수 없으리라는 것이다.
4절
4ㄱ절은 여행 채비에 대한 훈시다. 마르 6,8-9에서는 지팡이와 샌들을 허락하시는데 어록에서는 그것들조차 금하신다.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마시오”라는 훈시는 여기에만 있다. 예수시대 근동인들은 인사할 때 두루두루 안부를 물으면서 여러 가지 소식을 주고받았다. 제자들은 이런 예의범절에 시간ㅇ르 낭비하지 말고 곧장 전도하러 가라고 하신다.
5절
5-7절은 남의 가정에서의 처신에 관한 훈시로서, 그 병행문이 마태 10.12-13.10ㄴ에 있다. 그런가 하면 그 변체가 마르 6.10에 전해온다. 유다인들은 인사할 때 으레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라고 한다. 그러나 여기서는 일상적 인사말을 너어서 하느님 나라의 평화를 비는 축원이다.
6절
어느 누가 평화를 주시는 하느님을 받아들이면 하느님은 그와 함께 계실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하느님은 그에게서 떠나가실 것이라는 뜻이다.
7절
7ㄱ절의 변체가 마르 6.10에 있다.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그곳을 떠날 때까지 거기 머물러 있으시오.” 변체의 뜻인즉 처음 집을 불만스럽게 여긴 나머지 좀더 좋은 집을 찾아 나서지 말라는 것이다. 7ㄷ절에서도 같은 뜻의 말씀이 있다.
“”일꾼은 제 품삯을 받을 자격이 있습니다“의 병행문이 마태 10.10ㄴ에 있다. 여기 7ㄴ절과 똑같은 말이 1티모 5.18에도 있다. 1코린9.14에는 그와 비슷한 말이 있다.
8절
8-12절은 도시에서의 처신에 관한 훈시로서 그 병행문이 마태 10.7-8. 14-15에 있다.
9절
병행문 마태 10.7에서는 ”하늘 나라가 다가왔습니다“. 루카 11.20에서는 ”하느님의 나라는 여러분에게 왔습니다“라 한다. 하느님의 나라는 예수님의 설교주제였다.
11절
병행문 마태 10.14, 변체 마르 6.11을 참조하라. 먼지를 터는 것은 절교를 뜻한다.
12절
병행문이 마태 10.15에 있다. 소돔은 남색을 일삼다가 천벌로 멸망한 도시. 제자들의 전도를 받아들이지 않은 도시는 종말 심판 날에 소돔보다 더한 벌을 받을 것이다.
200주년 신약성서 주해/분도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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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930. 성 예로니모 사제 학자 기념일. 김 로마노 형제님.
연중 제26주간 목요일 제1독서(느헤8,1~4ㄱ.5~6.7ㄴ~12)
그는 '물 문'앞 광장에서,해 뜰때부터 한낮이 되기까지 남자와 여자와 알아들을 수 있는 이들에게 그것을 읽어 주었다~ 그 책, 곧 하느님의 율법을 번역하고 설명하면서 읽어 주었다. 그래서 백성은 읽어준 것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느헤미야총독과 율법학자며 사제인 에즈라와 백성을 가르치던 레위인들이 온 백성에게 타일렀다. "오늘은 주 여러분의 하느님께 거룩한 날이니, 슬퍼하지도 울지도 마십시오." 율법의 말씀을 들으면서 온 백성이 울었기 때문이다.(8,3.8-9)
'물 문' 앞 광장에서(3)
느헤미야서 3장 26절에도 나오지만, '물 문'앞 광장이란 예루살렘 동쪽 성벽에 있던 성문인 '수문(水門; 샤아르 함마임; shaar hammaim; the Water Gate) 앞에 있는 사람들이 많이 모일 수 있는 넓은 광장을 말한다.
동쪽 '물 문'(동편 수문)은 성 밖에 있던 기혼샘과 느티님(the Nethinims)사람들의 거주지인 오펠(Ophel)사이에 있는 문을 말한다.
이 문이 기혼샘과 가까이 있었기 때문에 수문(水門)으로도 불리워졌으며, 식수를 얻기 위하여 사람들이 이 문으로 많이 드나들었다. 뿐만 아니라 이곳에는 공중 집회를 가질 수 있는 넓은 광장도 있었다(느헤8,1).
'그 책, 곧 하느님의 율법을 번역하고 설명하면서 읽어 주었다'
여기서 '번역하고'로 해석된 '메포라쉬 웨솜'(mephorash wesom; making it clear; gave distiinctly)에서 '메포라쉬'(mephorash; clearly; distinctly)는 에즈라에 의해서 봉독된 율법책의 말씀을 백성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레위인들이 통역하였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설명하고 해석하였음을 묘사하는 단어라고 할 수 있다.
당시 오랜 기간 동안 바빌론 지역에서 생활하였던 이스라엘 후손 가운데는 모국어인 히브리어를 잊어 버렸거나 능통하게 사용하지 못해서 히브리어로 봉독된 율법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자들이 있었기 때문에 일종의 통역이 필요했다는 견해가 나름대로 설득력을 갖는다.
동시에 하느님의 뜻이 담겨있는 내용을 분명하고 정확하게 알아들을 때까지 뚜렷하게 설명해 주었다는 의미도 가지고 있다.
'오늘은 주 여러분의 하느님께 거룩한 날이니, 슬퍼하지도 울지도 마십시오.'
느헤미야와 에즈라 및 가르치는 일을 맡았던 레위인들은 백성들이 율법의 말씀을 듣고 통회하며 울자 그들에게 '슬퍼하지도 울지도 마십시오'고 권고하였다.
비록 그 슬픔과 눈물이 그들의 죄에 대한 자각과 하느님의 말씀에 대한 깨달음에서 오는 긍정적인 것이었지만 그들이 울지 말아야 할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오늘은 주 여러분의 하느님께 거룩한 날'이기 때문이었다.
원문은 '하이욤 카도쉬 후 라이흐와 엘로헤켐'(haiyom qadosh- hu laihwah ellohekem; This day is sacred to the LORD your GOD)이다.
여기서 새 성경에서 번역이 불분명하게 된 히브리어 '후'(hu)는 인칭 대명사 3인칭 단수로 '그' 곧 '주 여러분의 하느님'을 가리킨다.
또한 이 '후'(hu)가 '거룩한 날'에 해당하는 '카도쉬'(qadosh)와 '막켑'(-)으로 직접 연결됨으로써, 그 거룩한 날이 바로 '그'와 밀접하게 관계되어 있음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여기서는 거룩한 날의 근거가 바로 주 하느님께 있음을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새 성경이 '주(의)'로 번역한 '라이흐와'(laihwah)는 '주'를 뜻하는 '예흐와'(yehwah)에 전치사 '레'(le)가 결합된 형태이다. 전치사 '레'(le)는 여기서 '~에게 속한'이란 소유의 의미를 갖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즉 원문은 '오늘'이 누구에게 속한 날인지를 강조하여 표현하고 있다. 다시 말해 본문은 '오늘은 거룩한 날이다. 너희 주 하느님께 속한, 바로 그분의 거룩한 날이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오늘의 주인공은 바로 주 하느님이시고 모든 것은 그분을 중심으로 그분의 뜻대로
그분의 말씀대로 행해져야만 되었다.
여기서 '오늘'은 유대 종교력으로 칠월 초하루인데, 나팔을 불어 기념일임을 알리고 거룩한 모임을 열어야 하는 날이다.
이 날은 주님을 위한 향기로운 번제물로 황소 한 마리와 숫양 한 마리와 일 년 된 흠 없는 어린 숫양 일곱 마리를 바쳐야 하고, 이와 함께 기름을 섞은 고운 곡식 가루를 곡식 제물로 곁들일 뿐 아니라 숫 염소 한 마리를 속죄 에식을 드리는 매우 특별한 날이다(레위 23,24.25; 민수29,1-6; 여호6,21; 1사무 22,19; 1역대16,3).
이 칠월 초하루에는 모든 노동을 금하였을 뿐 아니라 남녀노소 모두가 참여하는 거국적인 절기였다. 유대 종교력으로 7월은 새해가 시작하는 첫날이며, 유대 민간력으로는 1월이다.
이스라엘 후손들은 이 날, 새해 첫날을 하느님께 바침으로써 그밖의 모든 날도 하느님의 날임을 고백하고 하느님의 뜻대로 살기를 다짐함으로서 자신이 하느님의 백성임을 확인하는 날이다.
하느님께 이 날을 드림으로써 한 해 전체를 하느님의 뜻에 합당하게 살기를 다짐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오늘' 칠월 초하루는 주님의 말씀에 따라 기쁘고 즐거운 축제일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레위23,24.25; 민수29,1-6; 신명12,7.12).
'온 백성이 울었기 때문이다'
느헤미야서 8장 4절에서 8절까지 에즈라가 율법을 봉독하고 레위인들이 그 말씀을 알기 쉽게 해석해 주어 백성들로 하여금 깨닫게 하였음을 보도하였다.
이제 본문은 이에 대한 백성들의 반응을 보도한다. 율법의 말씀을 듣고 깨달은 백성들은 모두 울었다.
여기서 '울었기'에 해당하는 '보킴'(bokim)은 '울다'라는 뜻의 동사 '빠카'(baka)의 분사형이다. 이처럼 분사형이 사용된 것은 백성들이 잠시 잠깐 운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흐느껴 울었음을 보여준다.
바빌론에서 돌아온 유다 귀환민들은 율법책에 기록된 말씀을 듣고 울지 않을 수 없었다.
즉 율법에 대한 바른 이해를 통하여 진정한 회개 운동이 일어난 것이다.
연중 제26주간 목요일복음(루카10,1~12)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가거라.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2~3)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의 갑작스런 도래와 함께 그때 올 악한 자에 대한 심판의 준엄함에 대해 '그날에는 소돔이 그 고을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 (루카12,12)고 말씀하셨다.
복음을 직접 전해 듣고 회개할 시간을 충분히 가진 고을들이 그렇지 못한 소돔보다 훨씬 더 무거운 심판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하느님의 나라가 이런 심판의 엄정섬을 전제하고 급격하게 온다면, 시급하게 선교가 이루어져야 할 것은 당연하다.
따라서 추수하는 행동은 그들을 하느님의 나라로 모으는 종말론적인 과업을 뜻한다.
여기서 '수확'에 해당하는 '테리스모스'(therismos; harvest)는 '수확' 그 자체 뿐만 아니라 수확의 대상인 거두어 들여야 할 곡식 및 수확의 과정을 의미할 때도 사용된다.
무르익은 곡식을 거두어 들이는 수확은 농경 사회의 사람들에게는 평범한 주제이다.
하지만 '수확'이란 예수님께 있어서 하느님의 나라의 여러 국면들을 설명하는 좋은 소재였다.
여기서는 하느님께서 이미 복음을 받아들일 소지를 미리 마련해 놓으셨기 때문에, 사람들은 수확을 기다리는 완전한 무르익은 곡식과도 같다는 의미를 전달해 준다.
따라서 여기서의 예수님의 명령은 사람들로 하여금 하느님의 나라로 빨리 들어오게 하라는 말씀이다.
루카 복음 10장 2절은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는 일이 시급한 데 비해서, 이 일을 몸소 행할 일꾼이 너무나 부족하다는 안타까움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내용이다.
또한 지금 파견을 받고 있는 일흔두 제자들의 책임이 중대하다는 사실도 강조하고 있다.
따라서 부르심을 받은 일꾼들은 자신들의 책임을 다할 뿐만 아니라 동시에 주인에게 또 다른 일꾼들을 더 보내달라고 요청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로 번역된 '데에테테'(deethete; ask; pray)는 단순히 '요청하다'는 의미 이상의 '기도하다', '간구하다'는 뜻을 가진 동사 '테오마이'(deomai)의 부정 과거 명령법으로서, '너희들은 간구하라'는 매우 간절하면서도 강력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천국의 복음이 전해지기 시작할 당시의 그 복음을 알지 못한 채 죽어가는 영혼들을 보시는 주님의 안타까움이 묻어있는 말씀이다.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사실은 루카 복음 10장 3절과 유사한 내용을 담고 있는 마태오 복음 10장 16절에는 제자들을 상징하는 단어가 '양'('프로바타'; probata)이라고 되어 있는 반면에, 여기서는 '어린 양'('아렌'; aren; lamb)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루카 복음사가는 마태오 복음사가보다 이 단어를 통해 제자들의 '연약함'을 더 부각시키고 있다.
양은 목자의 보호가 없으면 이리에게 무방비 상태로 당할 수 밖에 없는 나약한 짐승이다.
또한 '양'이 착한 것의 상징이라면, '이리'는 악한 것의 상징이다.
그러니까 이 구절은 양과 같은 제자들이 이리 떼와 같은 세상의 악한 세력들과 영적 싸움을 수행해야 한다는 것을 나타낸다.
특히 '가운데로'에 해당하는 '엔 메소'(en meso; among)라는 전치사구는 이미 그 자체로 '가운데'라는 뜻이 있는 '메소'(meso)와 '~안에'라는 뜻의 전치사 '엔'(en; in)이 결합되어 '한가운데 속에'라는 뜻이다.
이것은 어린 양과 같이 연약하고 착한 예수님의 제자들이 선교하기 위해 험악하고 공격적인 세상 한가운데로 들어가지 않으면 안된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그러기에 복음 전파자들은 험하고 공격적인 세상 속에서 마땅히 뱀처럼 지혜롭고 비둘기처럼 온순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마태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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