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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용서하라(엡 4:32)
감리교를 창시했던 요한 웨슬레의 전기에 보면 이런 기록이 입습니다. 웨슬레가 인도하던 집회에서 어떤 장군이 회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요한 웨슬레는 그 장군이 정말 회개하고 주님을 믿게 되었는지 궁금했습니다. 웨슬레는 그 회심의 진정성을 확인하고 싶어서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장군님은 하나님께서 장군님의 죄를 용서해 주셨다는 사실을 확신하십니까?" "물론이지요." "그러면 장군님은 자신에게 잘못을 범한 이웃들을 정말 다 용서하셨나요?“
장군은 한참 생각하더니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한 사람만 빼고 다 용서했습니다. 군대에서 함께 일하는 동료가 있는데, 나는 다른 사람은 다 용서해도 그 사람만은 죽어도 용서할 수 없습니다." 그때 웨슬레는 이렇게 경고했습니다. "그렇다면 장군님에게는 두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첫째, 앞으로 진정한 의미에서 주기도문을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가르쳐 준 기도에서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라는 기도를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둘째, 장군님은 앞으로 절대로 죄를 범하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래야만 다른 사람에게 용서를 구할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잘못을 범하지 않아야만 하나님앞에 용서를 구할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가 용서를 우리의 신앙생활에 적용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하나의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를 미워하고. 나에게 상처를 주고, 나에게 해를 끼친 사람을 용서한다는 것은 진짜 어려운 문제입니다. 인생에 가장 어려운 문제가 있다면 그것은 용서의 문제입니다. 만약 나에게 해를 끼친 사람을 용서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은 가장 성숙한 그리스도인일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용서하라고 말씀하십니다.
(32절)“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안에서 우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용서는 그 사람의 잘못을 완전히 잊어버리는 용서입니다. 설교가 비처(H.W. Beecher)는 말하기를 ‘용서할 수는 있으나 잊을 수는 없다고 하는 말은 용서하지 않는다고 하는 말과 같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용서는 상대방의 잘못을 완전히 잊어버리는 용서입니다. 구약성경 시편 103편 12절은 말씀합니다.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우리의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 하나님은 우리의 죄악을 동쪽에서부터 서쪽이 먼 것 같이 멀리 두고 완전히 잊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용서는 상대방의 잘못을 완전히 잊어버려 주는 용서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해야할 용서입니다. 신약성경 마태복음 18장 35절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마 18:35)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마음으로 용서한다는 것은 상대방의 잘못을 완전히 잊어버리고 생각하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사실 우리가 다른 사람의 잘못을 완전히 잊고 용서를 한다는 것은 내 힘으로는 어렵습니다. 그래서 내 힘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힘을 구해야 합니다.
우리가 용서해야 하는 사람이 생길 때 우리는 하나님의 도움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만이 진정한 용서를 하게 하는 힘입니다. 영적 지도자인 프로이드 맥글랑은 말하기를 ‘당신에게 상처를 준 사람의 얼굴이 떠오르고 통증이 느껴질 때마다 그 사람을 용서하라. 당신은 그 사람을 이미 용서했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사랑하기로 결정했노라고 하나님께 기도하라.
그리고 당신에게 상처 입힌 사람을 완전하게 용서했다고 느껴질 때까지 계속 반복해서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기도는 우리가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을 용서할 수 있도록 힘을 줍니다. (욥 42:10) “욥이 그의 친구들을 위하여 기도할 때 여호와께서 욥의 곤경을 돌이키시고 여호와께서 욥에게 이전 모든 소유보다 갑절이나 주신지라” 1979년 노벨평화상을 받은 마더 테레사수녀에게 어떤 사람이 찾아와 갈등을 겪고 있는 부부에게 충고를 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때 테레사 수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기도하고 용서하십시오.’ 폭력적인 부모 밑에서 자란 젊은이들에게 테레사 수녀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기도하고 용서하십시오.’ 가족에게 아무런 도움도 받지 못하는 이들에게도 이렇게 말했습니다. ‘기도하고 용서하십시오.’ 우리는 기도하기 위해 눈을 감는 순간 용서의 마음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기도는 우리가 용서할 수 있는 힘을 얻게합니다. 왜냐하면 기도속에는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황해도 봉산군에 있는 개동교회는 6.25전쟁중에 장로 네 명이 순교를 당했습니다. 그중 강덕희 장로는 교회를 지키다가 공산주의자들에게 잡혀 나무에 매달려 눈을 뽑히고 몽둥이로 수없이 얻어 맞았습니다. 눈에서 피와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그래도 찬송을 부르니까 공산군이 와서 총으로 턱을 때려서 이빨이 다 빠지고 턱이 부서져서 숨을 거두었습니다.
얼마 후에 국군이 진격해 올라왔을 때 미쳐 도망가지 못한 공산당원들이 잡혔습니다. 강덕희 장로의 이야기를 들은 군인들은 그 사건을 주도했던 공산당원을 잡아서 나무에 묶어 놓고 강장로님의 아들을 불렀습니다. 그리고 ‘자! 여기 당신 아버지를 무참하게 죽인 원수가 있으니 당신 마음대로 죽이십시오.’ 그리고 총을 주었습니다. 이때 강장로의 아들은 그를 보는 순간 아버지의 죽어가는 모습이 떠올라 마음을 진정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그 순간 고개를 숙이고 눈을 감고 기도를 드렸습니다. 겁에 질려서 벌벌 떨고 있는 공산당원에게 그는 천천히 다가갔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은 내 아버지를 죽인 원수지만 우리 아버지는 그래도 당신들을 용서하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나도 아버지의 뜻을 좇아 당신을 용서하겠습니다.’하며 그를 죽이지 않았습니다. 용서가 안되는 사람이 있으면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앞에서 눈을 감고 기도하면서 그 사람을 용서할 수 있는 힘을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면 용서할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우리가 해야할 일은 다만 용서하는 일입니다. 우리는 우리 손으로 원수를 갚지 말아야 합니다. 신약성경 로마서 12장 19절은 말씀합니다. (롬 12:19)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내가 원수를 갚지 말아야 합니다. 원수갚는 것은 하나님께 맡기고 우리는 용서를 하는 것입니다. 용서하는 자가 진정한 승리자입니다. 눈을 감고 기도를 해야 합니다. 그러면 도저히 용서가 되지 않는 사람도 용서가 되는 역사가 있습니다.
본문을 다시 보십시다. (엡 4:32)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제일 먼저 강조한 것이 "친절하게"입니다. 이것은 정말 상대방을 사랑하고 상대방을 돌보려는 의지로 다가가는 친절한 태도를 말합니다. 그리고 "불쌍히 여기며"라는 말은 상대방의 연약성을 깊이 이해하는 태도를 가리키라는 말입니다. '저 사람도 별 수 없는 사람이어서 그런 실수를 했겠지'라고 이해하는 것입니다.
상대방의 실수나 잘못을 정말 불쌍히 여기는 태도로 상대방을 이해하는 것, 그것이 불쌍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이 가르치는 용서의 의미를 정의한다면 "용서는 그의 인간성의 연약함을 이해하고 그를 용납하며 그의 실수를 더 이상 문제 삼지 않고 더 나은 관계로 회복하는 과정이다." 한마디로 말하면 용서는 사랑의 실제입니다. 제가 늘 사랑의 속성에 대해서 5가지를 소개했습니다. 1)관심 2)이해 3)존중 4)희생-섬김 5)용서-사랑의 실제입니다.
우리가 상대방도 나와 똑같은 실수를 할 수 있는 연약한 인간성을 지녔음을 이해하고 상대방을 용납하며 그의 실수를 더 이상 문제 삼지 않고 그와의 관계를 더 나은 관계로 회복시켜 나가기 위한 과정이 용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진정으로 사랑을 실천하기를 원한다면 용서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용서의 중요한 동기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 안에서"입니다. 이 말의 의미는 "예수님 때문에 용서하라"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용서의 동기가 그리스도께 있다는 말입니다. 예수께서 먼저 우리를 용서하고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회복시키기 위해서 값비싼 대가를 치르셨습니다. 우리가 원수되었을 때에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값을 대속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엄청난 용서를 받았는지 생각해보십시오. 물론 용서 그 자체는 값없이 선물로 주어진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 그분을 우리의 구주와 주님으로 모시는 순간에 그 용서는 선물로 주어졌습니다.
용서 자체는 값없는 선물로 주어졌지만 그 용서의 배경에는 그리스도가 값 비싼 희생을 치르셨다는 사실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받은 용서는 아주 값비싼 용서입니다. 우리가 이웃을 쉽게 용서하지 못하는 이유는 아직도 우리가 주께 받은 용서가 얼마나 값비싼 용서인지 모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주님의 비유가 있습니다.
마태복음 18장 21-35절 말씀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묻기를 형제를 몇 번이나 용서해야 하느냐고 했습니다. 이때 주님은 "일흔번씩 일곱 번이라도 하라", 즉 용서의 한계가 없음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어떤 빚진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무려 일만 달란트를 빚진 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그 빚을 갚지 못했기 때문에 처자식까지 팔아서 빚을 갚아야 할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주인은 그종이 불쌍해서 모든 빚을 탕감해 주었습니다.
일만 달란트라는 어마어마한 빚을 탕감받은 사람이 잠시 후에 어떤 모습을 보입니까? 그 사람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친구가 있었습니다. 그는 그 친구를 만나 당장 빚을 갖지 않는다고 옥에 가두어 버렸습니다. 두 사람이 빚진 액수를 비교해 봅시다.
일만 달란트와 백 데나리온이 얼마나 큰 차이인지 아십니까? 한 달란트가 6천 데나리온입니다. 한 데나리온은 하루 품삯입니다. 일만 달란트면 그 당시로는 가히 기하학적인 액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일만달란트를 탕감받은 종이 백 데나리온 빚진 자기 친구를 용서하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우리 인생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받은 용서는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가 생명을 바쳐 얻어 낸 것입니다. 십자가 보혈로 용서받은 사람들이 왜 이웃의 작은 잘못을 용서하지 못합니까?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받은 용서가 얼마나 엄청난지 깨닫지 못해서입니다. 우리는 일만 달란트를 탕감받은 자보다 더 어리석은 자인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의 용서사건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 주는 사건이 탕자이야기입니다(눅 15:11-32). 탕자는 예수님 당시 유대의 상황에 비추어 보면 최악의 범죄를 저질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둘째 아들은, 아버지가 버젓히 살아계신데 아버지에게 자기 몫의 유산을 요구한 것도 황당한 일인데, 그나마 분배받은 재산을 가지고 먼 나라에 가서 다 탕진하고 돼지치는 일을 하였습니다. 이 아들은 자기 자신에게도 치욕이지만 아버지의 명예까지도 더럽히는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정말 이런 아들은 없는 게 백 번 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아버지는 아들을 용서하였습니다. 아버지의 용서속에 네가지 요소가 있습니다.
1. 조건없이 용서했습니다.
아버지는 조건없이 아들을 받아들였습니다. 물려준 유산을 다 탕진하고 돼지를 치다 돌아온 아들을 비웃지도 않고 야단치지도 않고 있는 그대로 품안에 안았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있는 모습 그대로, 죄로 더럽혀져 상처 입은 모습 그대로를 받아들여 용서해 주십니다. 그분의 용서는 조건이 없습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용서할 때 용서의 조건을 달기 쉽습니다. 우리 하나님 아버지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용서하신 것처럼 우리도 조건없이 이웃을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롬 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2. 용서를 구체적으로 표현했습니다.
아버지는 탕자를 용서했다는 사실을 입으로 알리고 행동으로도 표현했습니다. 우리도 상대방을 용서했을 때 그 용서를 구체적으로 표현해야 합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용서했다는 사실을 어떤 모습으로 보여 주었습니까? 아버지는 집을 향해 오고 있는 아들을 발견하고 아들을 향해 달려 갔습니다. 아들은 '아버지가 나를 받아 주실까? 종으로라도 써 주시면 좋으련만' 하면서 무거운 발걸음으로 집을 향해 걷고 있었을 것입니다.
자기의 잘못을 후회하면서 때로는 한숨을 쉬면서 터벅거리며 걸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아들을 발견하자마자 달려갔습니다. 스펄젼은 이 장면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아들이 한 걸음을 뗄 때 아버지는 열 걸음을 달려왔다." 이 달려오는 아버지를 보면서 아들은 무엇을 확인했겠습니까? 아버지가 정말 자신을 용서하신다는 사실을 아버지의 모습에서 알아챘을 것입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끌어안고 입을 맞추었습니다. 돼지를 치면서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던 아들이니 그에게서 얼마나 악취가 났겠습니까? 얼마나 초라한 모습이었겠습니까? 그러나 아버지에게는 그런 것이 상관없었습니다. 아들이 돌아온 것을 기뻐하며 끌어안고 입을 맞추었습니다. 아들은 아버지의 용서를 피부로 실감했습니다. 돌아온 아들의 과거를 묻지 않습니다.
그저 아버지의 사랑으로 감싸주시고 용서해주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요 하나님의 용서인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다면 이웃을 사랑하고 용서하는 것은 마땅한 것입니다. 이유도 조건도 없습니다. 그저 용서해주는 것입니다.
3. 이전의 죄를 문제 삼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그동안의 잘못을 낱낱이 고하라고 역정 내지 않았습니다. 분배받은 재산을 어디에 다 썼느냐고 고함치지도 않았습니다. 대신 아버지는 (눅 15:24)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하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아들에게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살찐 송아지를 잡아 동네잔치를 열었습니다.
아들의 과거를 문제삼는 흔적은 전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용서하기로 했으면 지나간 일은 문제 삼지 않아야 합니다. 이럴 때 진정한 용서가 이루어집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신다는 말이 단순히 잊어버린다는 말입니까? 성경은 하나님이 "기억을 안하신다"는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사실 잊어버린다는 것과 기억을 안한다는 것은 비슷한 것 같지만 차이가 있습니다.
잊어버린다는 것보다는 기억을 안한다는 것이 더 적극적인 용서의 의지가 담겨 있는 말입니다. 예를 들면 이사야 43:25, “또 그들의 죄와 그들의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하셨으니” 이런 말씀이 성경에 여러 번 나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용서하실 때 우리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십니다.", 이 말의 의미는 어떤 일에 대해서 더 이상 문제 삼지 않겠다는 말입니다. 단순히 어떤 일을 잊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더 이상 그것을 문제삼지 않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나에게 잘못한 일, 상처 준 일 따위를 기억해 두었다가 상대에게 복수하거나 제삼자에게 그를 비판하는 일은 그를 용서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나에게 손해를 끼친 일을 기억하지 않는 것이 용서입니다. 특별히 지난 일을 기억하지 않음으로써 용서를 베풀어야 할 사람들이 있습니다. 다름 아닌 부부들입니다. 부부 싸움을 할 때 보면 옛날 옛적 일까지 들추어내면서 서로를 깎아내립니다. 이는 함께 살면서 서로 용서하지 않은 채 지낸다는 증거입니다. 진정한 의미에서 용서는 단순한 망각이 아니라 지난 일을 더 이상 문제삼지 않는 것입니다.
4. 죄인을 온전히 회복시켜 주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이 온전한 부자관계를 맺을 수 있도록 도왔습니다. 새 신발을 신기고 손에는 가락지를 끼우고 새 옷을 입히는 것은 모두 아들로서의 당당한 권위를 회복시켜 주는 것입니다. 이전보다 아버지와 더 가까운 자리에 설 수 있도록, 새로운 내일을 향해 힘차게 나아갈 수 있도록 온전한 삶을 회복시켜주는 것입니다. 상대방을 회복의 자리에까지 서게 하는 것이 진정한 용서입니다.
아마 탕자는 옛날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아버지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아들은 아버지의 용서를 체험하고 난 뒤에 아버지의 사랑 안에서 성실하게 살았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이처럼 용서는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명령하십니다.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이어지는 5:1에서는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용서할 때 우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됩니다. 윌리암 아더 워드라는 사람이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우리가 복수할 때 우리는 짐승 같다. 우리가 누군가를 판단할 때 우리는 인간 같다. 그러나 우리가 용서할 때 우리는 하나님같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허물과 죄를 아시고 보시면서도 그리스도로 우리의 죄를 대신 담당하게 하시고 우리를 용납하시고 끊임없이 용서하셨습니다. 우리는 용서받은 죄인입니다. 그것도 일흔번씩 일곱 번이상으로 용서받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도 이웃을 용서해야 합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서로 용서하라. 용서는 명령이기 이전에 먼저 우리가 하나님의 한없는 용서를 받았습니다. 우리는 이웃을 정죄하고 미워할 만한 자격조차 없습니다. 그저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 사랑의 실제가 바로 용서입니다. 너만 용서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서로 용서해야 마땅한 존재입니다. 그럼에도 용서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를 위해서 기도하고 용서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나에게 상처를 주고 손해를 끼친 이웃들을 진정으로 용서하고 있습니까? 그들을 회복의 자리에 서게 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용서하신 것처럼 우리도 서로 용서하는 기쁨을 누려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잘 들으십시오. “서로 용서하라” 이렇게 용서하는 것은 따지고 보면 나를 위한 것입니다. 내안에 미움이 있으면 내가 고통스럽고 내가 매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마음으로 용서를 실천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