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바 1,2-3; 2,2-4; 2티모 1,6-8.13-14; 루카 17,5-10
+ 오소서, 성령님
명절을 맞아 몸도 마음도 바쁘실텐데 미사에 참례하신 우리 교우 여러분께 감사와 환영의 인사를 드리고, 또 명절을 맞아 우리 노은동 본당을 찾아주신 가족분들께 환영의 인사를 드립니다. 또한 다른 곳에서 명절을 보내고 있는 우리 가족들을 위해 기도드리면서, 너무나 큰 고통 중에 있는 가자 지구에 하루빨리 평화가 찾아오기를 기도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두 가지 말씀을 하시는데요, 첫째는 믿음에 대한 말씀이고, 둘째는 종의 비유 말씀입니다.
사도들이 주님께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하고 말씀드리자 예수님께서는 “여러분이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갖고 있다면, 이 돌무화과나무(또는 뽕나무)더러 ‘뿌리째 뽑혀 바다에 심어져라’ 하더라도 그것이 여러분에게 순종할 것입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돌무화과나무는 뿌리가 매우 크고, 바닷가에서 자라지도 않습니다. 이 나무가 뿌리째 뽑혀 바다에 심어지다니, 엄청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제가 고등학생 때 학교에서 야간 자습 시간에 오늘 복음을 읽다가, ‘제가 눈을 감았다 뜨면 집에 가 있게 해 주세요’라고 간절히 기도하며 눈을 감았다 뜨기를 여러 번 했지만, 계속 학교에 있어서 실망했던 기억이 납니다.
주목할 것은, 제자들은 예수님께 믿음을 ‘더하여’ 달라고 청했는데, 예수님께서는 믿음을 더하는 것에 대해서가 아니라, 믿음이 ‘있느냐’에 대해 말씀하고 계시다는 점입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99% 믿는데, 1% 믿지 못하겠다면, 그를 믿는 것일까요, 믿지 않는 것일까요? 우리는 믿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나머지 1%의 정체는 무엇일까요? 그것이 스승께서 붙잡혔을 때 제자들을 도망가게 하고, 박해의 때에 순교가 아니라 배교를 택하게 하고, 우리를 냉담함으로 이끌기도 합니다. 그 1%의 ‘믿지 못함’은 결코 1%가 아니었다는 것을 나중에서야 깨닫게 됩니다.
믿음은 양으로 측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믿으면 믿는 것이고, 믿지 않으면 안 믿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100% 믿으면 어떻게 될까요? 돌무화과나무가 뿌리째 뽑혀 바다에 심어질 만큼, 우리 마음을 감싸고 있는 불신앙과 불안함의 뿌리가 뽑히고, 어떠한 고난이나 역경도 우리 마음을 어지럽히지 못할 만큼 평화가 우리를 다스리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을 100% 믿는다면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어서 종의 비유를 드십니다. “여러분 가운데 누가 밭을 갈거나 양을 치는 종을 두고 있다면 그가 들에서 돌아올 때에 ‘어서 와서 식탁 앞에 자리잡아라’ 하겠습니까? 오히려 그에게 ‘내 저녁부터 마련하여라. 그리고 … 허리를 동이고 내 시중을 들어라. 그 후에 너는 먹고 마시거라’ 하지 않겠습니까?”
이 말씀에 대한 한 가지 인상적인 해석은, 이 종이 하는 일, 즉 밭을 가는 일은 복음의 씨를 뿌리는 것이고, 양을 치는 것은 사목을 의미하며, 허리를 동이고 시중을 드는 것은 섬김을, 먹고 마시는 것은 성체성사를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즉 이 종은 바로 사도들을 의미하며, 이 말씀은 사도들의 일을 이어받아 수행하는 사목자들을 향해 하신 말씀이기에, 그들이 주님을 위해 봉사하면서 자화자찬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Gadenz, 292)
예수님의 말씀은 이렇게 이어집니다. “그 종이 지시받은 대로 했다고 해서 주인이 그에게 고마워하겠습니까? 이처럼 여러분도 지시받은 일을 모두 하고 나서도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하시오.”
예수님의 말씀 중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라는 말씀 때문에 성경학자들 사이에서는 많은 논란이 있습니다. 그중 이보 스토르니올로라는 브라질 신부님의 해석을 인용해 드립니다.
“이 말씀을 어떻게 소화할 수 있을 것인가? 여기서 우리는 하느님의 뜻을 따른다는 것은 우리의 뜻에 반하여 행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유념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하느님의 뜻은 우리 마음속 깊은 곳에 자리잡은 염원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하느님이 원하시는 것을 행하는 것은 우리의 가장 절실한 바람을 실현하는 것이다.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아직 진정한 하느님을 모르고 있다. 모든 인간이 갈망하는 하느님이 자유와 생명의 원천이시기 때문이다. 하느님을 섬기고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것은 우리가 그토록 열망하던 진정한 자유와 영원한 생명을 얻어 만나는 것을 뜻한다. 그렇게 하는 것이 무슨 특별한 상급인가? 그렇게 할 수 있게 된 것은 하느님이 거저 주신 무한한 은총일 뿐이다.” (이보 스토르니올로, 255-256)
우리는 간절히 바라는 것이 있지만, 하느님께서 다른 것을 원하시기에, 하느님의 뜻을 따른다는 것은 내가 원하는 것을 거슬러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즉 하느님의 뜻은 내가 원하지 않는 일을 하는 것이라고 여기기 쉽습니다. 그러나 이보 신부님은 이를 정반대로 해석합니다.
하느님은, 내 마음 깊은 곳에서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바를 발견하고 그것을 행하라고 하신다는 것입니다.
성모님께 가브리엘 천사가 나타나서 예수님 잉태 소식을 전했을 때, 그것은 성모님의 인간적 기대를 거스르는 소식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성모님은 정말로 하기 싫은 것을 하겠다고 대답하신 것이었을까요? 마음 가장 깊은 곳에, 주님께서 진정 원하시는 것을 따르고 싶은 열망이 있었기에, 그리고 그 열망을 하느님께서 아셨기에 천사를 보내신 것은 아니었을까요?
예수님은 겟세마니 동산에서 ‘이 잔을 거두어 달라’고 아버지께 청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어서 ‘제 뜻이 아니라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소서’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인간적인 뜻 아래에 있는 예수님의 가장 깊은 열망은, 아버지의 뜻이 당신의 뜻이기를 바라는 염원이었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신학교에 간 후, 사제가 된 뒤 40일 피정을 하면서, ‘저를 사제로 부르시려면 인간적인 조건을 좀 더 편안하게 해 주신 후에 부르시지, 왜 이렇게 어려운 조건에서 부르셨느냐’고 하느님께 원망을 드린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제 멱살을 붙잡고 신학교에 데려다 놓으신 것이 아니라는 것을 기도 중에 깨달았습니다. 마음 깊은 곳에 사제가 되고 싶은 염원이 있었고,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한 것은, 저 역시 그것을 간절히 원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을 사제로 살아가면서 하느님 앞에서 솔직하게 말씀드립니다. “저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위해 하는 봉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정말로 원하지 않는 봉사를 억지로 하고 있지 않습니다. 마음 깊은 곳에서 내가 주님의 도구가 된 것을 기뻐하며, 나의 봉사를 통해 하느님께 응답을 드리고 있습니다. “저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가 믿어야 할 믿음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은 ‘내가 원하는 대로 하느님께서 해 주실 것이다’라는 믿음이 아닙니다. 오히려 정반대로, 나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고 계신 하느님께 온전히 의탁하는 믿음이고, 하느님을 100% 신뢰하는 믿음이며, 쓸모없는 종이라고 고백하는 나에게 당신 아드님까지 내어주시는 하느님께 나의 모든 것을 내어 맡기는 믿음입니다. 나의 약함과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서 나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신다는 것을 믿는 그 믿음이 바로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입니다.
오늘 제1독서는 “그러나 의인은 성실함으로 산다.”라는 말씀으로 마무리됩니다. ‘성실함’으로 번역된 말은 ‘믿음’에서 파생된 말이기에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라고 번역하기도 합니다. 사실 성실함은 믿음에서 나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는 오늘 믿음과 성실한 종을 연결하여 말씀하십니다.
바오로 사도는 제2독서에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힘과 사랑과 절제의 영을 주셨다’고 말합니다. 우리에게 주신 힘과 사랑과 절제의 영에 힘입어 오늘도 기쁘게 주님의 일을 하며, 주위 사람들에게 사랑을 베풀며, 오늘을 마칠 때 주님께 말씀드려야겠습니다.
“저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빈센트 반 고흐, 뽕나무, 1889년
출처: The Mulberry Tree (Van Gogh) - Wikiped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