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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누구나 살아가면서 너무나 다양한 형태의 유혹을 받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다이어트를 하는 사람에게 ‘저녁을 먹을 것인가. 말 것인가?’라는 사소한 유혹도 있겠지만 자신의 운명을 바꿔버리는 중대한 유혹도 있습니다. 또 그 유혹을 이겨낼 때도 있고 이겨내지 못하고 무너질 때도 있습니다. 그 유혹은 직업을 통해 찾아오기도 하고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를 이용해서 찾아오기도 합니다. 사람들의 관계에서 찾아오기도 합니다. 유혹은 진실을 왜곡하게 만들고 편법을 쓰게 만들며 자신과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게 된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특히 그리스도인들에게 찾아오는 유혹에 무너지게 된다면 하나님의 자녀들을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만들고 하나님의 뜻과는 다른 행동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유혹에 무너지면 하나님의 자녀들을 파멸의 길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설교자에게 찾아오는 유혹이 있다면 그냥 말씀과는 상관없는 일상적인 세상의 도덕이나 개인적인 견해로 사람들을 현혹시키는 자기 의견을 재미있게 이야기하다 끝내는 시간을 보내려는 유혹이 있습니다. 또는 말씀 본연의 뜻이 아닌 성도들이 듣기 좋은 말을 하며 기복적이거나 율법적인 설교를 하고 싶은 유혹도 있습니다. 깊은 묵상과 많은 기도의 시간등이 필요없는 무난한 잡다한 이야기를 하는 설교로 간단히 설교시간을 때우고 싶은 유혹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유혹에 빠지면 예배가 인간의 예배가 되는 것이고 인간의 강연시간같은 그냥 지식만 채우다 마는 시간이 될 수 있습니다. 설교를 들었지만 본질은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말씀의 본연의 뜻을 분별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진정 설교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무엇인지, 하나님께서 무슨 뜻을 우리에게 가르치시는 지를 깨닫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렇듯 성도에게나 목회자에게나 오늘도 유혹이 찾아옵니다. 이 예배시간안에서도 사탄마귀는 어떻게든 우리를 유혹하고 넘어뜨리려고 합니다. 오늘 읽은 성경본문에서 십자가위에서 죽음의 바로 직전에 계신 예수님에게도 유대인들을 통해 온갖 유혹이 찾아왔습니다. 유대인들은 그들의 관점대로 예수님을 판단하며 십자가에서 내려오라며 놀리는 악한 행동을 하게 됩니다. 예수님을 유혹하며 십자가를 포기하도록 만들려고 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에게 온갖 조롱을 하며 예수님에게 요구하는 유대인들의 이야기들을 살펴보면 결국 유대인들이 얼마나 예수님에 대해 잘못 이해했는 지를 우리는 발견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런 유대인의 모습이 바로 우리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우리 또한 예수님에 대해 오해할 때 유대인들이 요구하는 그런 모습의 예수님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오늘 유대인이 예수님에 대해 생각했던 여러 가지 착각들을 보면서 저와 여러분은 바른 신앙속에서 예수님의 모습을 찾고 바른 가치관으로 예수님을 믿고 따르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유대인들이 착각하는 예수님에 대해 첫째로, 성전을 사흘에 짓는다는 것을 잘못 이해하고 있습니다.
마가복음 15장 29절입니다.
“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이르되 아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다는 자여”
유대인들은 ‘아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다는 자여 네가 너를 구원하여 십자가에서 내려오라’라고 예수님을 향해 조롱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존재에 대해 의심하면서 성전을 사흘만에 짓는다는 사실에 대해 조롱하며 놀리고 있습니다. 성전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은 분명했습니다. 성전에 관한 사실중 하나는 우리 주 예수님께서 성전을 하나님의 집으로 귀하게 여기셨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역사를 알고 계셨습니다. 광야의 성막으로부터, 솔로몬이 세운 첫 번째 성전, 바벨론 포로기 이후 다시 세운 두 번째 성전 일명 스룹바벨성전에 대해서도 잘 아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 당시 새로 건축중이던 헤롯성전까지 성전에 관한 모든 사건을 상세히 알고 계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그 사실을 어떻게 모르시겠습니까? 또한 이 각 성전안에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지성소가 있습니다. 이름이 솔로몬성전, 스룹바벨성전, 헤롯성전이라고 나눠져 있지만 하나님께서 가르쳐주신 양식대로 구조는 똑같이 생겼습니다. 이 성전들은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들 가운데 계신 것을 보여주시는 영적인 표식이었습니다. 성전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는 귀한 장소였습니다. 그런 성전을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이 그 곳에서 돈벌이를 하는 모습에 화가 나셨습니다. 거룩한 성전에서 거룩한 사역을 하며 하나님의 부어주심으로 살아가야할 사람들이 이익추구을 추구하고 성전안에서 돈벌이를 하는 것을 보며 예수님께서는 대단히 화가 나셨습니다. 성전은 더 이상 하나님의 집이 아니라 권력싸움을 하며 우상숭배를 하며 돈으로 사람들이 판단되는 장소가 되었습니다. 성전안에서 돈이 중심이 되었습니다. 성전을 관리하던 지도자들은 백성들을 가르치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보다 성전을 통해서 자기 배를 불리기 위해 마음을 쏟는 것을 보며 예수님은 정말 분노하셔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후 성전의 앞뜰에서 장사꾼의 상을 뒤집어 놓으시는 장면을 보여주셨습니다. 기도하는 집이 강도의 소굴로 변해 버린 것을 본 예수님은 성전을 정결케 하셨습니다. 장사하는 사람들을 내쫓으시고 성전에서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던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성전 본연의 모습에 대해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성전을 깨끗하게 하시는 것을 넘어서 예루살렘에 세워진 성전이 이제 무너지고 새로운 성전 개념이 생길 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요한복음 2장 19절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이것은 예루살렘 성전을 다시 세우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부활하실 자기 몸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고 요한복음에서는 설명하고 있습니다. 부활하시는 예수님의 몸이 새 성전입니다.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의 몸이 성전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인 두 세 사람의 모임이 성전입니다. 예수님이 함께 하시는 그 곳이 성전이 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유대인들은 새 성전에 대한 그분의 말씀을 결코 잊을 수 없었습니다. 왜냐면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엄청나게 먼 거리를 찾아와서 희생제물을 잡아 예물을 드리며 제사드릴 때 제사장이 대신 집례를 해야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성전은 자기가 사는 곳에서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는 곳에 위치한 너무나 찾아가기 힘든 곳이었습니다. 구약성경 어디에서도 하나님을 찾고 부르짖기 위해 성전을 찾아와야 한다고 가르치지 않았음에도 유대인들은 성전에 찾아와서 제물과 함께 드려지는 제사만 참 제사라고 생각했던 오류를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 시대의 유대인들은 새 성전에 대한 그분의 말씀을 결코 잊을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메시아적 부활 공동체는 하나님이 성령으로 함께하시는 새 성전이 되었습니다.
고린도전서 3장 16절입니다.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고린도전서 6장 19,20절입니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유대인들은 잘못된 성경해석으로 잘못된 신앙생활하다보니 건물로서의 성전에 하나님을 가두어두고 성전에서만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성전에서 드리는 제사만 거룩한 제사라고 생각하며 성전건물에 대한 우상숭배의 모습이 강했습니다. 그러면서도 건물로서의 성전도 본연의 모습을 잃어버리고 더러운 성전, 잘못된 성전을 만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런 잘못된 신앙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정말 이 시대 우리 또한 정말 참 성전의 의미가 무엇인지 발견하고 참 성전되신 예수님, 거룩한 성전된 하나님 백성의 몸을 회복하며 우리를 위해 대신 죽어주셔서 옛 성전을 헐고 새 성전으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따라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유대인들이 착각하는 예수님에 대해 둘째로, 구원의 참 의미에 대해 잘못 알고 있었습니다.
마가복음 15장 31절입니다.
“그와 같이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함께 희롱하며 서로 말하되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길을 가던 사람들은 슬픈 척 고개를 저으며 예수를 조롱했습니다. “성전을 헐고 사흘 만에 다시 짓겠다고 으스대던 네가 아니냐. 그러니 실력을 보여 봐라! 네 자신을 구원해 보라고! 네가 정말 하나님의 아들이면 그 십자가에서 내려와 봐!” 우리는 여기서 유대 종교지도자들이 말하는 구원과 참 구원에는 차이가 있음을 우리는 발견할 수 있습니다.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어울려 함께 예수님을 신나게 비웃고 있습니다. “그가 다른 사람은 구원하더니 자기는 구원하지 못하는군! 메시아라고? 이스라엘의 왕이라고?”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생각하기를 십자가에서 매달려 죽게되는 것은 결국 실패와 멸망이었습니다. 그러니 성공을 위해서는 구원을 위해서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내려와서 살아나게 되는 것이 진정한 구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에게 있어서는 그것이 참 구원이 아니었습니다. 만약 그것이 진정한 구원이라면 사람들이 예수님을 조롱하며 빈정대듯 예수님께 십자가에서 내려오라고 말하고 있는 이 순간 조롱과 빈정거림속에서 그냥 내려오셨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분은 십자가에서 내려오시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일을 못하시는 것이 아니라 안하시는 것입니다. 스스로 내려오실 수 있지만 스스로 내려오시면 이제 참 구원은 물 건너가는 것이기에 십자가에서 스스로 내려오시는 것을 안 하시는 예수님을 우리는 발견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어주시는 댓가를 지불하셔서 인류를 구원하시고 택함받은 하나님의 백성을 천국으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구원받은 것이 ‘공짜 은혜’라고 설명합니다. “값없이 받은 은혜”라고 고백합니다. 이 말은 누구나 예수를 믿고 영접하기만 하면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 받게 되는 구원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에게 있어서도, 또한 이런 구원의 역사를 계획하시고 진행하신 하나님에게도 있어서도 이것이 공짜였을까요? 우리는 댓가를 지불하지 않고 공짜로 받았지만 그 공짜 구원을 주시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엄청난 댓가를 지불하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뿐인 독생자를 우리를 위해 아낌없이 희생시키신 것입니다.
우리가 어느 빌딩에 가서 엘리베이터를 타면 엘리베이터 층을 표시하는 버튼의 아래 혹은 위쪽에 ‘문닫힘’ 버튼이 있습니다. 그 버튼 주위에 이런 문구가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버튼을 누르지 마세요. 15초 후면 자동으로 문이 닫힙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대체로 문이 스스로 닫히는데 소요되는 15초를 너무 길게 느낍니다. 우리가 무심코 누르게 되는 ‘문닫힘’ 버튼을 누르지 않고 기다린다면 어느 큰 빌딩의 경우는 일 년간 수 억원의 전기료를 아낄 수 있다고 합니다. 빌딩에 엘리베이터 한 두 개만 있는 곳이라면 수 백만원, 수 천만원을 일 년에 아낄 수 있는 전기료가 승객들이 무심코 누른 ‘문닫힘’ 버튼으로 날아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땅에 살아가는 사람 누구나 왠만한 빌딩을 방문할 때 엘리베이터를 공짜로 이용합니다. 관광용 엘리베이터외에 일반 엘리베이터를 돈내고 타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탈 때마다 엘리베이터 사용료를 지불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주인도 그럴까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주인은 우리가 공짜로 이용하는 엘리베이터를 위해서 엄청나게 많은 전기료를 지불해야 합니다. 공짜로 이용하지만 그 자체가 공짜는 아닌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장 18절입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베드로전서 3장 18절입니다.
“그리스도께서도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예수님께서 죽으신 십자가형은 예수님만을 위해 만들어진 형벌이 아닌 그 당시 고대 근동지방에서 죄수를 처형하던 형벌이었습니다. 죄수를 십자가에 매달아 놓고 못을 박아서 천천히 피를 뽑아내어서 기진맥진하게 만들고 서서히 죽어가게 만드는 형벌은 너무나 잔혹한 형벌이었습니다. 개인에 따라 다르지만 어떤 죄수는 1주일동안 십자가 위에서 달려 있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어떤 죄인들은 몇 번이나 깨었다 기절했다 깨었다 기절했다 죽음의 연습을 수없이 반복한 후에 결국 맥박이 멈추게 되는 너무나 잔인하고 무서운 형벌이었습니다. 성경은 아무런 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죄를 대신 갚아주시기 위해 이런 무서운 형벌을 받으시고 십자가를 지시고 결국 우리를 위해 죽어주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십자가 처형은 성난 군중의 성화와 압력에 못 이겨 본디오 빌라도가 허락한 것으로 보이지만 엄밀히 따지면 하나님께서 이 모든 일을 계획하시고 이루신 것입니다. 우리의 죄가 너무 중하고 도저히 우리 힘으로 구원받을 수 없어서 하나님께서 인간의 세상속에 찾아오셔서 십자가 처형을 계획하신 것입니다. 말로써 온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이지만 사랑은 대가를 지불하는 것이란 사실을 보이기 위해 독생자를 십자가에 매달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구원은 우리에게는 공짜지만 하나님은 엄청난 대가를 지불하셨습니다.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란 바로 아들을 죽이면서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그 놀라운 사랑입니다.
에베소서 2장 1절입니다.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에베소서 2장 8,9절입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구원은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주시는 선물이기에 은혜라고 말씀합니다. 구원받기를 원하는 사람에게 요구되는 단 한 가지는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죄인임을 모르는 사람은 자신에게 흠이 없기에 구원자가 필요없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나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죄로부터 자기를 구원하러 오신 예수님도 거부한다는 사실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그러기에 이 세상의 모든 인간은 구원자가 필요한 죄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저와 여러분은 구원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세상에서 생활속에서 잘 먹고 잘 살고 내가 몸 건강하고 내가 부자가 되고 내가 지위를 얻고 내가 사람들위에 군림하고 인정받게 되는 것이 구원이라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그런 구원은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을 죽이면서 예수님을 조롱했던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구원입니다. 그렇게 따지면 예수님은 구원받지 못한 실패자입니다. 자신도 구원할 수 없는 실패자라고 세상의 사람들은 생각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십자가는 실패의 상징이 아닌 구원의 상징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은 세상의 모든 구원받을 백성을 위한 참 귀한 선물입니다. 참 은혜를 구원을 위한 죽으심이었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잘못된 가치관으로 신앙생활하지 마시고 세상적 기준의 구원을 바라는 삶이 아닌 참 영원한 구원, 하나님의 궁극적인 구원을 받고 구원의 인생을 살아가시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유대인들이 착각하는 예수님에 대해 셋째로, 뭔가를 봐야 믿을 수 있다고 착각하고 있습니다.
마가복음 15장 32절입니다.
“이스라엘의 왕 그리스도가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 우리가 보고 믿게 할지어다 하며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자들도 예수를 욕하더라”
유대지도자들은 예수님에게 “네가 구원자, 메시야, 그리스도라고 한다면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시지. 그러면 우리가 다 믿을 텐데!”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들까지도 조롱에 가세했습니다. 예수님을 희롱하고 비난을 퍼붓는 그들이 이제 최후의 도전을 해왔습니다. ‘십자가에서 내려와 우리가 보고 믿게 하라’는 말은 합리적인 말처럼 느껴집니다. “십자가에서 고통스럽게 매달려 있지 말고 너가 신이라니 그럼 스스로 내려와 봐. 그럼 우리가 믿어줄게”... 우리는 이런 사람들의 조롱속에서 우리 스스로 언 듯 생각하기에는 ‘정말 예수님께서 내려오셨다면 사람들이 모두 믿었을텐데’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렇게 생각해보지 않으셨습니까? 그런데 여러분, 물고기 두 마리 보리떡 다섯 개로 5000명을 먹이신 예수님, 수 많은 죽을 병자를 기도로 말끔히 치료하신 예수님, 이미 죽어서 장사지낸 사람마저도 살리시는 예수님, 풍랑을 잠잠케 하시는 예수님, 갈릴리바다를 물위로 걸어서 건너시는 예수님 등 수 많은 기적을 보여줬음에도 그 자리에서 그 광경을 보았던 사람마저도 계속 예수님을 믿고 따르지 않았던 것을 우리는 성경에서 발견합니다. 예수님 당시에 예수님의 기적을 보면서도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믿지 않았던 수 많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 때나 지금이나 “기적이 눈앞에 보이면 하나님을 믿어주겠다.” “하나님이 계신 것을 눈 앞에 딱 보여주면 내가 교회 나가줄게”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지만, 수많은 사람이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하나님의 기적을 경험했던 체험을 이야기하지만 그들은 절대 그 사실을 믿지 않고 있습니다. 놀라운 일을 보고도 믿지 않는 사람들이 너무 많듯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고도 믿지 않는 수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혹은 잠시 얼마간 믿음이 생긴 척 살아가다가 또 시간이 지나면 믿음이 시들해지고 또 기적을 요구하는 사람들의 습성을 우리는 보게 됩니다. 계속해서 기적을 쫓아다니게 되는 것입니다. ‘보여주면 믿겠다’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우리는 ‘믿으면 보인다’라고 외쳐야 합니다. “보고 믿는 것이 아니라 믿고 나니 보이게 된다”고 가르쳐줘야 합니다.
요한복음 20장 29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신 후 예수님의 부활 소문으로 제자들이 모두 예수님의 부활을 기정사실로 알고 믿고 있는데 도마는 직접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보지 않고는 믿지 못하겠다고 했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모여있던 장소에 찾아오셔서 도마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보았기 때문에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다” 어떻게든 믿음이 생기는 것은 귀한 것이지만 정말 참된 믿음은 예수님이라는 분 자체를 믿고 따르는 것임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전에 어느 목사님께서 믿음을 가지게 되는 과정에 대해 설명하시면서 이런 예화를 이야기해주셨던 것이 생각납니다. 우리가 어느 처음 가는 집을 찾아갈 때 경험했기 때문에 그 집을 찾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어느 누군가가 나에게 그 집 주소나 그 집을 찾아갈 수 있도록 주변 건물들, 주변 지형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주었을 때 그 설명을 듣고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그 곳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찾아가 봤더니 진짜 그 집이 있어서 이제 그 집을 갈 수 있는 방법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그 이후에 이젠 한 번 찾아가 보았던 그 길을 기억하고 다시 찾아가는 것입니다. 모르는 상태에서 찾아가서 알게 된 후에 이제 길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믿음이 먼저이고 믿고 난 후 경험을 통해 성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찾으려고 찾을 수 없는 길이 바로 구원의 길입니다. 그러니 먼저 믿을 수밖에 없습니다. 믿고 난 후에 발견하게 되는 것이 구원의 길입니다. 기독교에만 있는 것은 바로 십자가입니다. 인간이 신을 찾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찾아 오셨다는 사실을 보여주시는 것이 십자가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위해 인간이 되셔서 죽으셨다는 사실을 보여주시는 것이 십자가입니다. 신이 인간이 되셔서 죽어주심으로 우리가 생명을 얻게 되었다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이 십자가입니다. 그리고 결국 그 십자가에서 예수께서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셨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참 구원을 보여주시고 정말 어떤 것이 기적인지를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와 여러분도 혹 이 시대에 혹여나 내가 기적을 봐야 신앙을 가질 수 있겠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이미 놀라운 기적을 체험하고 수 많은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였으면서도 뭔가 하나님의 역사, 하나님의 임재를 실제적으로 경험하지 못하는 것 같아 우울해하며 신앙생활에서 낙담하며 지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미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가운데 함께 하시며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을 보여주시며 역사하시는데 보여주시면 믿겠다고 하나님께 따지며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기적을 체험하면서도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몰라봤던 유대 종교지도자들과 같은 신앙인이 되지 마시고 보이지 않는 듯한 기적이 매일매일 내 눈앞에 보이면서 하나님의 임재와 역사에 감사하며 살아가는 신앙인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을 맺을까 합니다.
저와 여러분은 어떤 신앙생활을 하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을 조롱하며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참 신이시고 참 구원자이신 것을 부정하는 사람들처럼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가 세상의 유혹에 빠질 때 우리는 예수님 존재의 의미를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예수님의 능력에 대해 외면하며 예수님을 제대로 따르지 않게 될 것이라고 오늘 본문은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말씀을 내 맘대로 생각하며 내 생각에 끼워맞는 성경말씀으로 살아갈 때 우리는 잘못된 신앙생활을 하게 될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구원의 포커스를 세상적인 안위, 세상에서의 쾌락에 맞추며 살아가고 예수 믿는 것에 대해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것에만 관점을 맞추게 될 때 우리는 잘못된 신앙생활을 하게 될 것입니다. 또한 내가 하나님을 믿고 따르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내게 실제적으로 나에게 기적을 안 보여주시기 때문이라고 핑계하면서 내게 기적의 경험이 없다라고 말하는 잘못된 신앙의 모습을 보여주지는 않습니까? 우리가 유대인처럼 잘못된 신앙적 가치관으로 살아가게 된다면 하나님의 뜻과는 반대의 삶을 살고 하나님 구원의 역사를 거부하는 삶을 살아갈 것입니다. 오늘 말씀처럼 정말 이제는 참 가치관을 가지고 십자가만 바라보고 십자가 구원의 역사를 감격하며 십자가로 인한 참 구원의 길을 따라 살아가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