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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 | 이방의 희망, 예수님 말씀/ 마태복음 12:1-21 요절/ 마태복음 12:21 | 2026. 7. 26 | |
| 마태복음 제 16 강 |
“또한 이방들이 그의 이름을 바라리라 함을 이루려 하심이니라.”
인생을 살아가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은 희망입니다. 삶의 무게가 너무 무거워 견디기 어려울 때일지라도 희망이 있다면 이겨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어떤 희망도 보이지 않으면 무너지고 말 것입니다. 우리의 희망은 무엇입니까? 오늘 말씀을 통하여 내 인생의 참된 희망을 발견하고 어떤 상황에서도 넉넉히 이기는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16절은 안식일에 일어난 두 사건을 통하여 예수님과 바리새인들의 논쟁이 어떠했는지 그리고 참된 안식이 어디에 있는가를 보여줍니다.
어느 봄날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밀밭 사이로 가실 때 제자들이 시장하여 이삭을 잘라 먹었습니다. 배 고픈 제자들에게 밀 이삭은 참으로 맛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현장을 목격한 바리새인들이 그냥 넘어가지 않고 예수님께 시비를 걸었습니다. “보시오 당신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다.” 바리새인들은 종교지도자들로서 안식일을 매우 중시했고 안식일을 잘 지키기 위해서 많은 규정을 만들었습니다. 그들의 규정에 의하면 안식일에 추수를 하면 안 됩니다. 평일에 이삭을 잘라 먹는 것은 문제 될 것이 없었지만 안식일에 잘라 먹었기에 그것은 불법이라고 바리새인들은 지적질을 한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얼마나 배가 고팠으면 이삭을 잘라 먹었을까 하고 이해하는 마음을 갖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제자들을 안식일을 어긴 범법자들로 비난하고 정죄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의 비난에 대해 예수님은 어떻게 대답하셨습니까? 예수님은 제자들이 무죄하다는 것을 두 가지 예를 들어 설명해 주셨습니다. 첫째, 다윗의 예를 들었습니다. 3,4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다윗이 자기와 함께 한 자들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 그가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제사장 외에는 자기나 그 함께 한 자들이 먹어서는 안 되는 진설병을 먹지 아니하였느냐” 사울을 피하여 다윗이 그의 호위병들과 함께 도망칠 때 배가 고파서 하나님의 집 즉 성막에 들어가 제사장이 주는 진설병을 먹었습니다. 그 빵은 제사장만이 먹을 수 있는 것이었기에 다윗과 호위병들은 율법을 어겼습니다. 하지만 구약성경 어디에서도 그들을 정죄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율법을 어기려고 했던 것이 아니라 배 고픈 상황에서 그 빵을 먹었기에 정상참작이 된 겁니다.
둘째, 안식일에 많은 일을 하는 제사장의 예를 들었습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에게 또 반문하십니다. “또 안식일에 제사장들이 성전에서 안식을 범하여도 죄가 없음을 너희가 율법에서 읽지 못하였느냐” 제사장은 안식일에도 성전에서 제사와 관련된 여러 가지 일들을 하도록 율법이 규정하고 있습니다. 안식일 계명을 앞세운다면 이것은 안식일을 어기는 것이 됩니다. 하지만 제사법을 기준으로 삼으면 이것은 죄가 아니라 도리어 의무입니다. 모든 규정에는 예외가 있고 특별 규정이 있습니다. 안식일 규정과 제사법이 충돌될 때는 제사법이 우선적으로 적용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예수님은 자신이 ‘성전보다 더 큰 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제사장이 성전에서 안식일에 한 일이 문제되지 않은 것처럼 제자들은 성전보다 더 크신 예수님 안에서 일하고 있기에 문제되지 않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이 왜 무죄한 제자들을 정죄했는지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그들에게 하나님의 자비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7절을 보십시오.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라면 무죄한 자를 정죄하지 아니하였으리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자비 즉 긍휼입니다. 하나님은 긍휼을 원하시고 제사를 원하지 않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제사를 열심히 드리고 많은 율법 규정들을 잘 지키기만 하면 하나님의 인정을 받고 복을 받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법의 정신이 무엇인지, 그 법을 주신 하나님의 마음이 어떠한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법을 이용하여 사람들을 통제하고 자기 권위를 세우고자 했습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긍휼이 없고 사람들에 대한 이해와 사랑이 없었습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의 긍휼이 있었더라면 그들은 배 고파서 밀 이삭을 잘라 먹은 무죄한 제자들을 정죄하지 않았을 겁니다.
제자들을 변호해 주신 예수님은 결론적으로 자신이 어떤 분이심을 선언하십니까? 8절을 보십시오.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하시니라.” ‘인자’는 사람의 아들이라는 뜻인데 이 땅에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의 호칭입니다. 인자 예수님은 안식일의 주인이십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의 창시자이시며, 안식일을 완성하신 분이십니다. 참 안식은 예수님 안에 있습니다.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님이야말로 안식일 법을 바르게 해석하고 적용하시는 분이십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하고 예수님을 배우는 일에 힘쓰고 있기에 누구보다 안식일을 잘 지키고 있는 것입니다. 구약의 안식일은 창조를 기념하는 날이었지만 예수님이 부활하신 이후로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날, 주일로 바뀌었습니다. 우리는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고 있습니까? 주일에 육체적인 쉼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육체적인 쉼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 나아가 예배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배를 통해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의 복음을 마음에 새김으로 참 쉼을 얻고 새 한 주를 살아갈 힘을 얻게 됩니다.
신앙생활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그 계명을 주신 하나님의 마음, 긍휼을 알고 긍휼의 사람으로 빚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긍휼로 충만한 사람은 딱딱한 법 조문으로 사람들을 옭아매거나 비난하지 않습니다. 역지사지의 자세로 상대방 편에서 생각하고 이해하고 용납함으로 좋은 관계성을 맺는 데 힘씁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천국백성이 된 우리는 하나님의 법을 잘 알아야 합니다. 더 나아가 법을 주신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마음을 읽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은 엄격한 잣대로 판단하고 통제하는데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은 우리의 형편을 이해하고 어떻게 하면 우리를 행복하게 할까 하는 데 있습니다. 우리가 날마다 하나님께 나아가 하나님의 긍휼을 배우고 그 긍휼로 우리의 이웃들을 섬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또 다른 안식일에 어떤 일이 발생했습니까? 예수님께서 그들의 회당에 들어가셨는데 거기 한쪽 손 마른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장애인을 이용하여 예수님을 고발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예수님께 날카로운 질문을 했습니다. “안식일에 병 고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안식일 규정에 의하면 응급환자가 아니라면 안식일에 치료 행위를 하는 것이 금지 되었습니다. 그 사람들은 14절에 의하면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자비를 강조하신 예수님이 그 장애인을 고쳐주실 거라고 생각하고 그 질문을 던진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악한 의도를 간파하시고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한 마리가 있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으면 끌어내지 않겠느냐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그러므로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 탈무드에 의하면 동물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을 경우 안식일을 무사히 지낼 수 있도록 음식을 넣어주거나 동물의 목숨이 위태로울 때에는 그것을 끌어낼 수 있었습니다. 당장 자기 재산에 손실이 올 수 있기 때문에 안식일 규정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구덩이에 빠진 양을 구하는 행동을 취할 겁니다. 예수님은 사람이 양보다 더 귀한 존재임을 깨우치시고 그러므로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의 주인으로서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친히 보여주시기 위해서 한 쪽 손 마른 사람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손을 내밀라.” 이는 그의 병든 손, 내놓기 부끄러운 상처를 내밀라는 것입니다. 그는 주님의 말씀 권세와 사랑에 마음이 열려 마른 손을 내밀었습니다. 내밀었다가 창피만 당하지 않을까 하는 의심과 두려움을 물리쳤습니다. 오직 주님을 바라보고 믿음의 손, 순종의 손을 내밀었습니다. 그러자 놀랍게도 즉시 마른 손이 다른 손과 같이 회복되어 성하게 되었습니다. 그 손에 피가 돌고 힘이 생기고 이제는 두 손으로 손뼉도 치고 만세도 부르고 춤도 출 수 있었습니다.
이 치유의 광경을 본 바리새인들은 어떻게 했습니까? 그들도 영적 마른 손을 내밀고 치유받아야 마땅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나가서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까 의논했습니다. 그들은 교만과 시기심을 회개하지 않음으로 더욱 완악해졌고, 예수님을 죽이고자 하는 살인심으로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마른 손 문제가 없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어린 시절의 상처를 꼭꼭 숨겨둔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을 드러내면 너무 창피하여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학창 시절 사랑하는 사람에게 버림 받은 상처 때문에 어둡고 쓸쓸하게 살아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혼의 상처,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으로 인한 상처는 누구에게도 내밀고 싶지 않습니다. 가장 큰 상처는 죄로 인한 상처입니다. 죄는 그 죄 지은 사람의 영혼에 깊은 상처를 남깁니다. 영혼의 깊은 상처는 음악으로도 독서로도 명상으로도 상담으로도 치료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나의 그 상처, 그 마른 손을 내밀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이 치유하지 못할 상처는 없습니다. 그 상처를 감추지 않고 있는 그대로 주님께 내밀 때 주님께서 치유해 주십니다. 상처를 나음 받기 위해서는 믿음과 용기가 필요합니다. 사탄은 우리에게 ‘네 상처는 고칠 수 없어, 평생 네가 안고 가야 돼’ 속삭입니다. 이런 사탄의 고소를 물리치고 “네 손을 내밀라”하시는 주님 말씀에 순종하여 나의 상처, 나의 마른 손을 내밀어 건강하고 힘찬 새로운 삶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이 자기를 죽이고자 하는 것을 아시고 거기를 떠나가셨습니다. 그러자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랐고 예수님은 그들을 긍휼히 여기사 그들의 병을 다 고쳐 주셨습니다. 그리고 자기를 나타내지 말라고 경고하셨습니다. 이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병 고쳐주시는 메시아로 오해할 여지가 컸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죄인들을 부르시고 천국으로 인도하기 위해서 였습니다.
저자 마태는 한쪽 손 마른 사람을 고치시고 많은 병자들을 고치시고도 자기를 나타내지 말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을 상고하면서 바로 그 분이야말로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성취하신 메시아이심을 증거했습니다. 이사야 42장 1-4절에 의하면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예수님은 하나님이 택한 종 곧 하나님 마음에 기뻐하는 바 하나님이 사랑하는 아들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영을 그에게 부어주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함을 덧입어 심판을 이방에 알게 하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다투지도 아니하며 들레지도 아니하리니 아무도 길에서 그 소리를 듣지 못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혈기 부리며 싸우지 않습니다. 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시고 큰 이적들을 행하셨지만 자기를 들레지 않고 자기 자랑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온유하시고 겸손하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조용히 일하시고 철저히 자기를 낮추시고 묵묵히 고난의 길을 가셨습니다.
무엇보다 예수님은 상한 갈대를 꺽지 아니하고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십니다. 상한 갈대, 꺼져가는 심지는 연약하고 힘 없고 희망이 없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세상에서는 상한 갈대는 아무 짝에도 쓸모없기 때문에 꺽어 버립니다. 꺼져가는 심지는 그을음만 피우기 때문에 꺼 버립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상한 갈대 같고 꺼져가는 심지 같은 사람을 섬겨 주십니다. 예수님은 연약하고 힘 없고 상처 많은 한 영혼을 존귀히 여기시고 긍휼과 온유와 겸손으로 감당해 주시고 치유해 주시고 살려 주십니다. 그런 치유와 회복의 역사를 사탄과 악의 세력을 물리치고 정의를 세울 때까지 지속적으로 이루어가십니다.
이러한 놀라운 역사를 볼 때 이방들은 어디에 소망을 두게 됩니까? 21절을 보십시오. “또한 이방들이 그의 이름을 바라리라 함을 이루려 하심이니라.” 여기서 이방들은 모든 민족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 땅에 이루어진 예수님의 치유와 회복의 역사를 볼 때 유대인들뿐만 아니라 모든 민족들이 예수님께 소망을 두게 될 것입니다. 인간은 희망이 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입니다. 많은 부와 권력을 가졌더라도 희망이 없다면 그 인생은 무기력하고 불행합니다. 하지만 가난하고 연약하고 내놓을만한 것이 없을지라도 희망이 있다면 그 인생은 활기차고 행복합니다. 사람들은 어디에 소망을 둡니까? 눈에 보이는 것들을 소망으로 삼습니다. 좋은 직장과 멋진 결혼과 건강하고 사랑스런 자녀들과 편리한 아파트를 소망으로 붙들고 살아갑니다. 중고생들은 대학 진로를 정할 때 취업이 잘 되고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의료계열과 반도체학과를 선택합니다. 하지만 그 어떤 것도 참된 소망이 될 수 없습니다. 시대와 상황에 따라서 소망의 대상이 수시로 바뀌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런 것들은 세상에 속한 것들로 영원하지 않고 세월이 흐르면 시들고 썩어지고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결코 변하지 않고 절대적 가치를 가진 것만이 우리의 참된 소망이 될 수 있습니다.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고 선언하신 예수님만이 우리의 참된 소망입니다. 예수님을 참된 소망으로 붙들고 살아가는 사람은 어떤 문제와 고난과 실패와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낙심하지 않고 무너지지 않습니다. 다시 일어날 수 있고 도전할 수 있고 희망의 노래, 승리의 노래를 부를 수 있습니다.
요즈음 많은 대학생들은 학비와 생활비의 큰 빚을 안고 사회에 진출한다고 합니다. 취업 경쟁률이 높아 직장을 얻는 것이 어렵고, 안정되고 연봉이 많은 직장을 얻는 것은 더욱 어렵습니다. 대학 졸업생들 가운데 바로 취업하는 청년들은 50%밖에 되지 않고, 30% 이상이 실업자들이라고 합니다. 이런 암울한 현실 앞에서 청년대학생들은 “내 인생, 내 미래의 희망은 없다”고 말합니다. 이들은 상한 갈대 같고 꺼져가는 심지와 같습니다. 세상 어디를 둘러보아도 희망을 찾아보기 어렵지만, 성경은 희망에 대해 말합니다. 상한 갈대 같고 꺼져가는 심지 같은 인생들을 감당해 주시는 예수님께서 모든 민족의 참된 소망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상한 갈대와 같고 꺼져가는 심지와 같이 연약하고 힘 없고 희망이 없는 인생이었습니다. 하지만 긍휼과 온유와 겸손으로 충만하신 예수님께서 이런 우리를 돌보시고 치유와 회복의 역사를 이루어 주십니다. 우리의 참된 소망이 되시는 예수님을 찬양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