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톡홀름 증후군과 패트리샤 허스트】
1973년 8월 23일 스웨덴 스톡홀름의 크레디트 은행에서 은행 강도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은행에 침입한 강도 2명은 6일간 인질극을 벌이면서 경찰과 대치했는데, 4명의 인질들이 자신들을 억류한 강도들에게 정서적으로 밀착하는 현상을 보인 것.
강도들에게서 풀려날 때 포옹과 키스를 하는가 하면, 감옥으로 이송되는 강도들의 안전을 걱정하는 행동을 하기까지 했다. 또 강도들에게 유리한 증언을 하고, 심지어 한 여성 인질은 강도 중 한 명에게 반해 약혼자와 파혼까지 하는 기막힌 일이 벌어졌다.
이 인질극은 처음부터 끝까지 TV에 생중계되었는데, 거기서 수사를 도우며 해설을 맡았던 범죄심리학자 닐스 베예로트는 인질들의 이해하기 힘든 행동을 일컬어 ‘스톡홀름 증후군’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스톡홀름 증후군은 이처럼 인질이나 피해자들이 자신의 생존에 대한 위협을 경험하는 와중에 가해자의 부당한 폭력을 부정한 채 가해자의 친절한 특성에 대해서만 애착 관계와 유대를 형성하는 것을 말한다.
1974년 2월 4일 오후 9시 20분 버클리大 2학년이었던 19세의 패트리샤는 연인과 함께 있던 고급 아파트에 2인조의 좌익 과격파 공생 해방군의 습격을 해서 그녀만을 납치한다.
1974년 2월 7일 신바이오니즈 해방군 (SLA)을 자칭하는 범인들이 지역 방송국을 통해 몸값 요구를 하는 범행 성명이 도착했다.
2월 12일 "캘리포니아주의 모든 빈민층에 1인당 70달러분의 식량을 지급하라"는 이들의 요구조건에 허스트가는 200만달러 규모의 빈민지원계획을 추진하면서 9만여개의 식량상자를 빈민들에게 제공했다.
그러나 4월 3일 "식량배급은 사기"라며 허스트가를 비난하는 패트리샤의 목소리가 담긴 녹음테이프가 SLA의 전투복을 입은 패트리샤의 사진과 함께 허스트가에 배달되자 사람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1974년 4월 15일 SLA 일당은 샌프란시스코 교외에 있는 한 은행을 습격한다.
이때 은행 CCTV에 납치되었던 패트리샤 본인이 범인 일당과 함께 소총을 가지고 함께 강도하고있는 영상이 언론을 통해 공개됨에 따라 미국인들은 경악한다.
강도사건의 피해자,그것도 미국에서도 손꼽히는 재벌가의 딸이, 불과 두 달 후에 범인들과 같이 강도질을 한 것이다.
일당 중의 한 명인 윌리엄 울프가 경찰들과의 총격전에서 죽은 후 패트리샤 허스트는 "나는 그와 사랑하는 사이였다.애인이며 동지인 그는 가난한 사람들의 편이었다"라고 고백한다
1974년 5월 17일 FBI가 수사 끝에 SLA의 범인 일당의 아지트를 찾아내 급습. 범인 6명을 사살하지만 패트리샤는 외출중이었기 때문에 체포되지 않는다
1974년 6월 7일 패트리샤는 체 게바라의 동지와 같은 이름의 타니아라는 가짜이름을 사용 로스앤젤레스 방송국을 통해 조직의 동지가 된 것을 선언하고 카세트 테이프와 사진을 제공했다.
이 테이프의 내용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끝까지 싸우겠다"는 성명 외에 부모에 대해 "파시스트 돼지"라고 욕을 하고 약혼자에 대해서도 심한 욕을 해, 너무 충격적인 선언에 미국은 더욱 어수선해진다. 테이프가 공개된 직후 약혼자는 패트리샤와의 약혼을 파기했다
그녀는 1975년 9월18일 체포되는데 재판과정에서 변호인단은 그녀는 단지 SLA에게 세뇌당한 것뿐이며 협박과 폭력으로 어쩔 수 없이 범행에 가담했고 윌리엄 울프는 사랑하지도 않았다고 주장했지만 배심원들은 그녀에게 징역 35년의 판결을 내린다,
패트리샤가 윌리엄 울프의 사진이 담긴 목걸이를 항상 걸고 다니는 게 결정적인 이유였다.
그러나 후에 대통령이 된 당시 로널드 레이건 캘리포니아 주지사와 영화배우 존 웨인 등 많은 유명인사들이 석방탄원서를 내서 그녀의 징역형은 7년으로 줄어들고 그나마 감옥에 간 지 2년도 채 되지 않아 지미 카터 대통령에 의해 가석방되었다. 2001년 1월 20일 클린턴대통령은 그녀에게 사면조치를 내렸다.
그녀는 당시의 경험을 책으로 펴내고 영화도 찍었다.
무장 강도(혹은 정치 테러)가담은 철없던 시절의 실수담으로 만들 만큼 그들에겐 돈이 많았던 것이다.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