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도창의군[ 十三道倡義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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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jy9713
2024.02.27. 15:51조회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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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도창의군
[ 十三道倡義軍 ]
요약 일제에 의해 군대가 해산되자 전국의 의병을 모아 서울로 진격하여 통감부를 격파하고 국권을 회복하고자 1907년 12월 경기도 양주에서 조직된 전국의병부대.
13도창의군 탑
1907년 9월 강원도 원주에서 의병군을 모아 활동하던 이은찬(李殷瓚) ·이구재(李九載:본명 求采) 등이 경북 문경의 이인영(李麟榮)을 총대장으로 추대하였다. 그는 이은찬의 의병부대를 원주를 거점으로 하는 관동창의부대로 개칭하여 의병을 모집하는 한편, 각도의 의병부대에 격문을 보내 11월에 경기도 양주에 집결하도록 하였다. 이에 호응하여 모인 각도의 의병부대는 이인영을 13도창의대장으로 추대하고 전국연합부대를 편성하였다.
그 편성을 보면, 총대장 이인영, 군사장 허위(許蔿), 관동의병대장 민긍호(閔肯鎬), 호서의병대장 이강년(李康秊), 교남(嶠南)의병대장 박정빈(朴正斌), 경기 ·황해 ·진동 의병대장 권중희(權重熙), 관서의병대장 방인관(方仁寬), 관북의병대장 정봉준(鄭鳳俊), 호남의병대장 문태수(文泰洙)였다. 이들은 모두 양반유생 출신으로 평민출신의 신돌석(申乭石)·홍범도(洪範圖)·김수민(金秀民) 등은 참여하지 못하였다. 총병력은 1만여 명에 이르렀으며, 이 가운데는 해산된 군인 3,000명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듬해 1월 이인영은 먼저 각국 공관에 의병부대를 국제공법상의 전쟁단체로 인정해 줄 것을 요구하는 격문을 보내는 한편, 군사장 허위가 이끄는 3백 명의 선발대가 동대문 밖 30리까지 진격하여 일본군과 혈전을 벌였으나 후속부대의 지원이 없어 퇴각하고 말았다. 이때 부친의 부음(訃音)을 받은 총대장 이인영은 지휘권을 허위에게 맡기고 귀향해버렸다. 이후 의병들이 여러차례 이인영을 찾아가 복귀를 권유하였으나 아버지 3년상 때문에 이를 거절하였다.
서울진공에 실패하고 총대장이 없는 연합군은 다시 전국으로 흩어졌다. 13도창의군은 사실상 양반유생만의 의병부대로서 평민 의병장이나 평민부대를 제외하였기 때문에 폭넓은 대중적 지지기반을 형성하지 못하였다.
참조항목
민긍호, 십삼도의군, 을사의병, 이강년, 이인영, 허위
역참조항목
김수민, 문태수, 변학기, 신돌석, 왕회종, 이은찬, 강윤희
[네이버 지식백과] 13도창의군 [十三道倡義軍]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