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엌과 친해지기
황선유
늦은 밤에 상제들만 남았다. 조문객과 도우미들은 다 떠나고 장례 첫날의 낯설고 분주했던 하루가 마무리되고 있었다. 무엇 입다실거리라도 내올까 하고는 주방에 들어갔다가 그 아이와 마주했다. 머뭇하는 내 앞에서 마치 그 부엌의 원래 주인인 양 척척 해내는 그 아이, 질녀를 본 것이다. 미리 준비해 두었던 것처럼 먹을거리를 챙겨서 나에게 건네고, 남아 있는 마른 음식을 봉지에 담아 봉하고, 빈 그릇들을 포개 넣는 손놀림이 예사 틀스러운 게 아니었다. 명색이 맏상제인 나는 아무 거들거리도 찾지 못한 채 멀뚱히 보고 있었다. 그때 질녀가 막 대학을 졸업했던가? 지금은 저 닮은 딸을 낳아 예쁘게 살고 있다. 보스턴 동서네 집에 갔을 때다. 흠치르르 부엌살림에 윤이 났다. 김치냉장고에 그득한 김치가 직접 담근 것이란다. 맛이 혀에 착 감기는 김치를 먹으며 한참 나이 어린 동서를 거짓 없이 우러렀다. 생각해보니 그녀는 갓 시집온 그해 명절에도 부엌에 별로 낯을 가리지 않았다. 요즈음도 그런 것 같더라만 입맛이 담백한 그녀가 기름진 명절 음식을 가렸다. 가리는 데는 내 솜씨 없음도 한몫 보탰을 터. 어느샌가 냉동실에서 찹쌀가루 뭉텅이를 찾아내고는 “형님, 나 찹쌀부꾸미 부쳐 먹어도 되죠?” 처음으로 ‘형님’ 하며 나를 불렀다. 그때 화안한 모습이 잊히지 않을 만하게 떠오른다. 부엌과 낯가림이 없다는 것은 음식 솜씨가 만만하다는 뜻이다. 음식 만들기에 주저함이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어디서든 드러나기 마련이다. 요샛말로 짱 먹는 일이다. TV에 나온 그 연예인은 말하기를, 음식 솜씨 좋은 며느리가 시집오더니만 단번에 부엌을 장악하더란다. 그러하니 여태도 부엌에 낯을 가리는 내가 짱 먹을 일일랑 없어 보인다. 야무지게 딸을 키워낸 시누이에게, 맛이 혀에 착 감기게 김치를 담그는 동서에게, 손맛 좋은 뉘게라도 부엌 짱을 내줄 따름이다. 부엌에 낯설었던 시절의 전설 같은 이야기, 아직도 잊히지 않는 지인들의 이야기가 있다. 큰맘 먹고 사 온 게가 빨리 죽지 않아서 남편과 둘이 숟가락으로 게를 때렸다는 이야기. 끓는 물에 삶은 낙지를 건져내어서는 찬물에다 바락바락 주물러 껍질을 벗겼다는 이야기. 산후 보양으로 곤 가물치의 진액은 다 부어버리고 흐물흐물한 가물치 살을 젓가락으로 뜯어먹었다는 이야기. 주택 화단에다 무를 거꾸로 무청을 땅속에 묻어두었다는 이야기. 그랬던 그녀들 모두가 이제는 부엌의 대가가 되어 있다. 부엌이라는 말이 가진 함의 중 으뜸은 밥상이다. 우리네 어머니들은 실로 무한한 밥상을 부엌에서 차려냈다. 몸 푼 며느리를 위하여 첫국밥을 내왔고, 친정 나들이 온 딸을 위해 더운 밥상을 차렸고, 입대하는 아들 앞에, 새벽차를 타고 떠나는 남편 앞에 간절함을 담아 밥상을 차려냈다. 그 밥상에 얹힌 것이 무엇이었던지 먹는 순간 이미 소울푸드가 된다. Soul Food, 미국 남부의 아프리카계 흑인 전통음식을 일컫던 그 말이 요즘에 와서는 어린 시절의 음식, 추억의 음식, 위로가 되는 음식, 영혼을 감싸는 음식 등으로 또 다른 카테고리를 만들어 간다. ‘내가 먹는 음식은 제2의 자아이며 내 존재이다’ 어느 철학자의 말이 가슴에 딱 와닿는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마르셀 프루스트는, 보리수 차에 적신 마들렌 과자 맛이 유년기의 추억을 불러일으키어 행복한 기분이 들었다고 했다. 기억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이를 두고 “프루스트 현상”이라고 부른다. 심리학자들의 주장으로는 인간의 미각은 이미 엄마 뱃속에서 각인된다고 한다. 양수를 통해 엄마가 가진 식습관과 선호 음식을 얼마간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전생에 나는 수라간 상궁이었을라』의 신서영 수필가는 입덧하는 며느리가 짜안하여, 속이 노랗게 오글오글 들어찬 배추와 사철 땅 기운을 받고 자란 뿌리채소들을 사고, 시조모님이 쓰시던 무쇠 칼과 소나무 도마를 꺼내어 고기를 다듬으며 머잖아 태어날 손녀 생각으로 행복해하면서 육개장을 끓였다 한다. 그녀가 며느리에게 보낸 음식의 상서로운 기운은 태중의 손녀에게까지 그대로 전해졌으리라. 며느리의 부엌과 만날 날이 가까워진다. 둘째를 낳고 산후조리원에 있는 동안 제 엄마와 떨어져 있을 첫째를 돌보러 간다. 내 아들과 함께 보낼 시간이 기다려진다. 소울푸드라 하기는 낯짝 부끄럽다만 아들이 그나마 한 가지 들먹여주는 게 하필이면 호박이다. 호박과 아들과 손녀와 함께 잠시 그 예전으로 돌아가 볼까나. 곱게 채 썰어서 다진 새우와 함께 볶은 파릇한 호박나물, 씹히는 맛이 괜찮은 애호박전, 풋호박 얄팍하게 삐져 넣은 수제비, 듬뿍 넣어 된장국도 끓이고, 내친김에 곱게 갈아서 단호박죽도 끓일까. 아껴먹는 호박오가리 찹쌀시루떡도 빠뜨리지 말고 갖고 가야 해. 아무쪼록 며느리의 부엌과 친해져야만 하는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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