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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14:12 교회가 해야 할 일
(요14:12)『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
야고보 사도는 그의 서신 약2:17이하에서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하시며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고 사실 증명을 요구하시며, “네가 보거니와(?)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 그러므로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라고 결론짓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믿음의 결과는 행함이고, 행함은 믿음의「사실 증명서」라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 말씀을 누구에게 했느냐는 것입니다. 오늘날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자기 스스로 여기는 모든 자에게가 아닙니까?
분명한 진리는 영원 천국은 믿음으로만이 아니라(약 2:24) 그 믿음과 함께 일하는 행함으로 간다는 것입니다. (마25:40, 롬 2:6)
문제는 ‘어떤 행함이냐’ 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 행함을 가롯유다식의 행함으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행함을 열심히 하고서도 지옥 간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가롯유다식의 행함은 어떤 행함입니까?
(마26:6~13, 요12:1~8)이하를 보면 주님께서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 계실 때에 한 여자가 매우 귀한 향유 한 옥합을 주님의 머리에 부은 일이 있었습니다.
그때 제자들의 반응이 “분하여”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무슨 의사로 이것을 허비하느뇨 이것을 많은 값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없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이것이 허비냐? 믿음의 행함이냐? 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주님의 말씀은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주었다면? 주님이 “온 천하 어디서든지...기념하리라” 라고 까지 말씀 할 필요가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짚고 넘어갈 문제가 있습니다. 기독교의 도덕률은 세상 적, 상식적 도덕률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당시 가롯인 유다가 말한 것처럼 이것으로 가난한 자들을 돕는다는 것은 반드시 기독교 신자가 아닌 다른 사람들도 얼마든지 하고 있고, 할 줄 아는 인간의 기본 문제인 것입니다.
어버이 주일에 목사가 강단에서 “나를 낳아준 부모를 잘 섬기라”를 5계명 운운하면서 까지 장황한 설교를 해야 할 필요성이 있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그 말은 대통령으로부터 초등학교 교장 선생님을 비롯해 심지어 TV 개그맨까지도 삼강오륜을 들먹이며 떠들어 대고 있는 기본 문제를 기독교가 그것을 강조하면서 “인간이 되라”(?)를 가르쳐야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그것이 행함이라면 반드시 기독교 신자가 아닐지라도 천국인지 극락인지 몰라도 갈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성경이 말하고 있는 그 행함(삶)의 성격은! 어떤 것이어야 합니까?
그것은 주님 차원의 행함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님 차원의 행함은 어떤 것입니까?
오늘 본문 요14:10절을 보면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하시면서 계속해서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러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을 인하여 나를 믿으라”라고 촉구하심을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주님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 곧 “내 말(τά ρήματα 타 레마타)”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을 하는 것이 곧 주님 차원의「행함」이신 것입니다. 주님의 일 행하심입니다. 이것을 믿음을 가진 자는 분명히 깨달아야 합니다.
그래서 요 6:63에서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라고 하시며,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τά ρήματα,타 레마타)이 영(πυεύμά,프뉴마)이요 생명(ζωή,조에)이다“ 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역시 같은 원리로 오늘 본문 요14:12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가 되게 되어 있고, 또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일이 교회가 해야 하는 일인 것입니다.
요14:20을 보면, “그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바로 이 상태가 된 자들을 「나를 믿는 자」로 보실 뿐 아니라 23절에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실 것이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가 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며 자연스러움인 것입니다.
이 원칙에 입각해 사도 바울도 “내게 능력주시는「자」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 라고 하였고,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 하시는「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골 1:29)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당연히 그래야 하며, 그렇습니다.
주님은 마12:34에서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 하셨고 계속해서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하시며, 36절에서는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라고 심판의 기준을 말씀하셨습니다.
마 15:11에서는 “입에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라는 말씀으로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위험성을 경고하셨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믿는 것과 믿지 않는 것은 어떻게 구별해야 합니까?
주님은 어떻게 구별하셨습니까?
요한복음 5:38에서 한마디로 이렇게 정의하셨습니다.
“그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지 아니하니 이는 그의 보내신 자를 믿지아니 함이니라”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말씀이 우리 속에 거하면 우리 속에 거한 그 말씀이 어떻게 됩니까?
롬 10:8절에서 “말씀이 네게 가까워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
이 상태가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가 되고,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게”되며, 이것이 곧 11절의 “성경에 이르되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버지께서 독생자를 보내신 줄로 믿고 있습니다.
어떤 근거로 그가 아버지께서 보내신 유일한 나의 구주로 믿습니까?
요5장31절에 보면 “내가 만일 나를 위하여 증거 하면 내 증거는 참되지 아니하되 나를 위하여 증거 하시는 이가 따로 있으니 나를 위하여 증거 하시는 그 증거가 참인 줄 아노라”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자기를 위하여 증거 하시는 이.....?
당시 사람들은 이 말씀의 주인공이 누구인가를 선입관 적으로 알고 있는 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바로 세례요한입니다.
그래서 33절에 “...요한이 진리에 대하여 증거 하였느니라 그러나 나는 사람에게서 증거를 취하지 아니 하노라” 하시며 36절에서 내게는 요한의 증거보다 더 큰 증거가 있다면서 앞에서 「증거 하시는 이」를 말씀하십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선입관적 증거가 있습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예수시니까, 또는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셨기 때문에, 또는 성경이 증거하고 있기때문에 라든지, 목사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니까 식의 여러 가지 근거를 댑니다.
그러나 그런 것은 「악귀」도 알고 떱니다. (행 19:15)
또한 그것을 알고 믿었다고 해서 그분이 나의 구주가 되는 것도 아니고 내가 구원받은 것도 아닌 것입니다.
왜 그런지 생각해 보겠습니다.
요5:36절은 “...아버지께서 내게 주사 이루게 하시는 역사 곧 나의 하는 그 역사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친히 나를 위하여 증거” 하신 것이 되는 것입니다.
이 사실이 없었다면 그가 십자가에 죽음이나 그의 가르침이 아무 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이 일을 하시는 분이고 또 아버지께서 그 일을 통해 그를 보내신 것을 친히 증거하고 계시기 때문에 그분의 가르침이 가치가 있고 그분의 죽음이 효력이 있는 것입니다.
또한 성경도 그 일을 하실 그분을 증거하고 있고(구약) 또 그 일을 하신(신약) 그분을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상고해야 하며 성경을 상고할 때 영생을 얻을 목적으로 상고해야 하고, 그 결과가 언제든지 주님을 만나는, 즉 영생을 발견하는 것이어야 바로 성경을 본 것이요, 바른 상고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5:38절에서 “그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지 아니한다”라는 말씀은, 지금 너희는 교회를 세우고 이런 저런 여러 많은 일들을 주의 이름을 부르면서 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성경을 상고하지도, 또는 영생, 곧 주님을 찾지 않았다는 말이나 같은 뜻입니다.
결국 “주의 말씀이 우리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은 그의 보내신 자를 믿지 않았다는 말씀이요 영생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40절)하였다”라는 말씀이기도 한 것입니다.
또한 그 말씀이 우리 속에 거하지 않는다는 말은, 교회를 다니면서도 수 많은 설교를 들었음에도 아무 때에도 그 분의 음성을 듣지 못하였고 그 형용을 보지 못한(37절) 결과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실제로 요 14:7에서는 “너희가 나를 알았더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όραω,호라오)다”라고 하시면서 빌립이 아버지를 보여달라(δέιχνυμι,데이크누미) 하시자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όραω,호라오)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όραω,호라오)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δέιχνυμι,데이크누미) 하느냐?”라고, 그들의 보지(όραω) 못하면서 보여(δέιχνυμι) 달라고만 졸라대는 것을 안타까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자기 자신들이 유대인이며, 유대 종교로 살고, 제자로 따르면서도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20절) 있음을 체험해 보지 못했기 때문에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믿지 아니(10절)하는 것이요, 그 상황을 믿지 못하기 때문에 “행하는 그 일”(11절)도 믿지 못하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하는 일”(12절)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나를 사랑하는(άϒαπάω, 아가파오) 자요 (21절),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άϒαπάω, 아가파오) 내 말을 지키는데(23절), 그러지 못하기 때문에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 보다 나를 더 사랑(άϒαπάω,아가파오)하느냐”라고 물어도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φιλέω,필레오)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라는 대답밖에는 할 수 없는 베드로였던 것입니다. (요 21:15) 이는 성경의 사랑과 다른 사랑으로 자기 의지로 사랑하는 그 사랑으로 사랑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롬13:8 이하에서 결론적으로 주님의 사랑으로 를 강조하면서 “피차 사랑의 빛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του έτερου,톤 헤테론)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하시며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του πληόιου,톤 프레시온)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하시며 “...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라고 갈파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요5:42에서 “다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원문에는 하나님의 사랑을) 너희 속에 없음을 알았노라” 하신 것입니다.
또한 그러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그 유명한 고전 13장에서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된다.”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요 14:12)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요 14:23)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교회를 다니면서 주님이 하신 본문의 말씀을 깊이 묵상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그래서 오늘날 교회(우리)가 하나님의 생명으로 영혼 구원함의 일 에서 떠나, 건물 교회 관리하는 일이나, 사람 많이 모으는 일이나, 헌금을 걷어 구제하는 일들을 하면서 그 일을 하나님의 일로 착각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우리는 주님처럼, 또 사도 바울이나 제자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가진 자로 우리 삶에 목적이 오로지 영혼을 구원하여 하나님의 자녀 삼는 일이어야 할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요14:12)『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
우리는 지금 이 글을 대하면서 내가 누구인지....교회 다니는 종교인인지... 아니면 교회를 통해 말씀을 믿는 그래서 주님이 하는 일, 그 일 하고 사는 나인지..... 확인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