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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경을 공략 중인 미군들
[ 영화, 북경의 55일 ]
1963년도에 만들어진 영화 <북경의 55일>은 당시로서는 어마어마한 1500만 달러(참고로 <벤허>의 제작비는 2,700만 달러)의 제작비가 투입되었습니다. 동서 냉전 체제로 인하여 이 영화의 촬영지는 북경이 아닌 스페인 마드리드 근교에 세트를 짓고 영화를 촬영했습니다.
이 영화는 찰턴 헤스톤, 에바 가드너, 데비드 니븐 등 당대의 유명한 배우들이 출연하는 호화 캐스팅을 자랑하는 전형적인 헐리우드영화였습니다. 그해 아카데미 영화제 음악상, 주제가상 후보에 올랐습니다.
영화는 당시 중국의 궁궐,성곽,가옥 등 사실적으로 재현한 볼거리가 많아 화제를 모으기도 햇습니다. CG가 없던 그 시절에 실제 북경과 닮은 세트를 만든 대단한 작업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북경의 55일>은 1900년 여름 서구 열강들이 너도 나도 달려들어 중국을 이리저리 농단하고 있는 상황 아래, 주인공인 미국 해병대의 루이스 소령(찰턴 헤스톤 분)이 군대를 이끌고 북경에 도착하는 장면에서 시작됩니다.
시끌벅적한 북경의 여름 대낮에 의화단들이 그리스도교 선교사를 살해하는 장면을 목격하며 의화단들과 루이스 소령과의 한판 신경전이 벌어집니다. 이 장면은 곧 이후에 심화될 소령과 의화단 사이의 대립관계를 예고해줍니다.
이 영화는 한편에서는 기독교를 탄압하고 북경에 거주하는 서구 열강들을 쫓아내려는 청국 정부와 이들의 사주를 받은 의화단과 그에 맞서는 열강 8개국들의 시가전을 담고 있습니다. 다른 한편에서는 주인공 루이스 소령과 러시아 여인 나타샤(에바 가드너 분)라는 매력적인 여성과의 55일간의 로맨스를 담아내고 있습니다.
영화 <북경의 55일>에서 묘사되는 의화단 운동은 중국의 입장에서 본 농민의 기독교를 앞세운 외세에 대한 정의로운 투쟁이 아닌 그저 하나의 이유 없는 폭동에 불과한 것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영화 속에 묘사 되는 의화단은 야만적이고 무식하며 위협적인 무리일 뿐입니다.
또한 영화 앞부분에 주인공 루이스 소령이 의화단과 살해된 사람을 놓고 돈으로 사고 파는 장면에서 볼 수 있듯이 의화단은 사람보다 돈을 중시하는 야만스러운 집단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영화의 어느 장면에서도 루이스 소령을 포함한 서구 열강들의 모습에서, 제국주의 열강들이 무력으로 중국을 약탈하려고 온 침략자의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그들은 모두 신사적이고 단지 의화단의 폭동 앞에서 위협을 느껴 용감하게 맞서 싸우는 영웅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의화단의 난>은 일본을 제외한 중국과 아시아인의 입장에선 치욕적인 사건일 수도 있지만 서양인들 입장에선 자랑스러웠겠고 그래서 당연히 영화는 편파적입니다. 영화는 외국인 거류지 내에서 의화단에 맞서는 영웅적인 용기와 희생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나름대로 일부 장면에서는 전쟁을 반대하고 평화를 위하는 듯한 분위기를 풍기지만 모든 잘못을 서태후와 청 왕조에 돌리고 있는 점이나 의화단을 광신도 집단으로 묘사하고 있는 점, 의화단의 난 진압 이후 제국주의 열강들의 약탈과 학살을 언급하고 있지 않는 점 등을 보면 역사적 시각이 상당히 왜곡돼 있는 영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서양인들의 서양인들에 의한 서양인들을 위한 영화였습니다.
[ 간략한 줄거리 ]
1900년 여름, 북경에 주재하고 있는 열강들의 헤게모니 다툼이 한창인 가운데 가뭄으로 인한 민심은 더욱 흉흉해 집니다. 거세지는 열강의 침략을 저지하기 위한 의화단의 폭동이 기승을 부리는 가운데 외국인 거주지역인 동교민항의 1천여 명의 거주자들은 긴급 대피를 서두르고 있습니다.
북경에 막 도착한 미 해병대의 루이스 소령(찰톤 헤스톤 분)은 호텔에서 묘한 매력을 풍기는 나타샤(에바 가드너 분)에게 호감을 느끼지만 주위의 시선이 따가움을 느낍니다.
러시아 사령관의 부인이었던 그녀는 중국 장교인 영록과 염문을 뿌려 남편을 자살하게 만든 과거가 있었던 것입니다. 열강 8개국 대표자들은 연합군이 4백명 뿐인 것을 우려, 떠날 것을 의결하지만 영국 공사(데이비드 니븐 분,당시는 대사를 공사라는 직명으로 불렀습니다)는 연합군이 도착할 때 까지 북경에 남을 것을 고집합니다. 결국 이들은 북경 사수를 결정, 임전 태세를 갖춥니다.
한편 서태후의 황실에서는 의화단을 비호하는 단군왕과 정부군을 지휘하는 영록 장군 사이에 묘한 갈등이 대두되고 있었습니다. 의화단의 활동에 대해 공식적인 입장을 표명하지 않았던 서태후는 이를 공식화 하면서 영록에게 시드니의 상륙을 막을 것을 명령합니다.
시드니는 청국군의 반격으로 천진으로 후퇴, 북경에 고립된 열강 대표들은 점점 위험에 빠집니다. 이어서 열강들의 군대로 이루어진 연합군이 북경에 도착, 의화단을 물리칠 때 까지 55일간의 처절한 사투가 벌어집니다. 한편에서는 루이스 소령과 나타샤간의 서사적 로맨스가 펼쳐집니다.
결국 루이스 소령과 나타샤의 사랑은 나타샤의 죽음으로 이루어지지 못하고 위험에 빠져있던 8개국 열강들의 연합군이 북경에 도착함으로써 북경에서의 고난의 55일이 끝납니다. 서태후와 그 일파들은 북경을 빠져나가 도주하고 루이스는 부하가 남긴 혼혈 딸을 데리고 북경을 떠납니다.
[ 의화단의 난(1900) ]
* 당시 너도나도 질세라 달려들어 중국을 요리하는 열강들
중국에 기독교가 전래된 것은 꽤 오래되었지만, 봉건주의적인 청나라 조정의 억압 정책에 따라 신자는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청나라 말기, 아편 전쟁 등 서구열강과의 전쟁에서 잇따른 패배에 따른 불평등 조약의 체결로 인해 포교활동이 일부 지역에서 제한적이나마 인정되기 시작햇습니다.
특히 애로호 사건 이후 체결된 텐진조약으로 대륙 내륙에까지 포교를 인정하는 조항이 삽입되면서 이후 외국인 선교사들이 본격적으로 내륙으로 진출하기 시작했습니다.
* 의화단원
이러한 외국인 선교사 중에는 중국 사람들의 정서에 어두워 무신경한 포교를 하는 이가 적지 않았습니다. 중국인 중에는 관헌에 쫓겨도 교회로 도망가면 숨겨준다는 이유로 신자가 된 악당들도 있었습니다.
또한 선교사들은 종교적 신념과 전승국에 속해 있다는 오만한 자세로 중국사회에 군림하여 중국의 전통관습을 무시하는 경향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때때로 지역 관리 및 향신(郷紳,생원 이상의 과거를 통과한 양반층)과 충돌하는 경우가 왕왕 있었습니다.
교회 내의 치외법권을 억지로 주장하고 그것을 미끼로 신자를 끌어들이는 사례도 있었습니다. 기독교 교회가 그렇게 고자세였던 것은 배후에 외국 군대가 도사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여러 일들이 벌어지면서 기독교에 대한 민중의 반감을 자극하기 시작했습니다.
* 영화에서...
의화단은 산둥성에서 발생했는데, 19세가 말에 산둥성은 독일의 진출로 인해 반기독교 사건이 빈발하던 지역이었습니다. 독일은 산둥성에 공자의 탄생지인 취푸가 있었어도 기독교의 관점에서 이를 경시하여 이 지역에서의 열렬한 포교활동은 오히려 민중들의 반감과 배외적인 감정만을 불러와 기독교에 대한 반감은 더욱 커져 갔습니다.
산둥은 원래 의협의 기풍이 강한 지역이었습니다. 또한 산둥 사람들은 다른 지방에 비해 체격도 좋습니다. 반체제 호걸들의 이야기인 <수호지>도 산둥이 무대입니다. 게다가 이 지방은 청대에 세상을 뜯어고치고자 했던 백련교 운동이 성했던 고장이기도 했습니다. 백련교가 진압이 된 뒤에도 그 잔당이 여러 가지 형태로 비밀결사를 만들었습니다.
* 영화에서...
의화단은 백련교적인 권법에서 유래되었다는 설과, 단련(團練)이라는, 지방관이 공인한 자경단에서 유래되었다는 설 등, 여러가지 설이 있습니다. 산둥에서는 원래 대도회라는 무장조직이 있었는데, 이 단체는 처음 도적을 잡아 관청에 넘기는 등, 향토방위와 치안유지를 담당한 자경단같은 성격을 가졌었습니다.
하지만 기독교 신자와 일반 민중들의 싸움에 개입하기 시작하면서, 1897년에 교회를 습격하여 이를 파괴하고 신부를 살해했습니다. 이에 독일이 청국 조정에 항의하자 관병이 진압에 나서면서 소동은 일단락되었지만 1899년이 되자 산둥성의 서북방면으로 더욱 세력을 확대하여 이 때 신권이라는 일파와 융합했습니다.
* 영화에서...
또, 산둥 각지에서도 무장조직과 기독교가 대립하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교회건설을 둘러 싼 토지문제시 재판에서 불리한 판결을 받은 백성이 매화권이라는 권법의 유파에게 도움을 요구한 것이 시초였습니다. 매화권은 이에 각 유파 3천명을 모아 1897년에 교회를 습격했습니다. 습격단은 매화권 전체에 누가 끼치는 것을 우려해 이름을 의화권으로 개명했습니다.
* 청국 군대
이는 반기독교적인 성격을 바탕으로 매화권 이외의 사람들도 많이 참가했기에 이에 대응하는 의미도 있었습니다. 반기독교적 운동이 확산되던 가운데 각지의 단체가 차례로 합류하면서 의화권이 된 것이었습니다. 의화권에 소속된 무술조직은 매우 강한 종교적 색채를 지니면서 내부에는 샤머니즘적인 의식도 진행했습니다.
이러한 조직이 숭배한 신은 제천대성(손오공),제갈량,조자룡 등 민간에 인기가 있던 것으로, 의화단은 신이 함께 하기에 칼이나 총탄도 비껴가는 불사신이 된다고 믿었습니다. 의화단의 세력확대는 들불처럼 삽시간에 퍼져나갔는데, 이는 지방 관료들이나 수령들이 소극적으로 대응한 것도 한 원인이 되었습니다.
산둥의 순무(각 성을 다스리는 최고 관리)였던 위셴은 의화단의 공격대상이 기독교 관련시설에 한정된 것에 의해, 이들에게 동정적이어서 의화권을 단련으로 공인해주었습니다. 의화권이 <의화단>이라 이름 붙게 된 것은 이러한 배경 탓으로, 1899년 말에 위셴은 결국 구미열강의 요구로 경질되고 말았습니다.
* 위화단
이어서 원세개가 부임하여 의화단을 탄압했는데, 오히려 이는 산둥성 바깥으로 의화단의 세력을 확대시키는 결과가 되고 말았습니다. 산둥성에서 내몰린 의화단은 허베이와 베이징으로 이동하여, 베이징과 텐진 사이에 있던 지역은 의화단으로 가득 차는 사태에 이르렀습니다. 이곳은 산둥성 이상으로 실업자와 천재지변을 겪던 난민들이 많아서, 이들을 흡수하여 의화단은 급속히 팽창했습니다.
그리고 외국인과 중국인 기독교 신자는 물론, 외제품을 취급하는 상점, 철도 및 전신에 이르기까지 공격대상으로 삼아 차례로 습격해 베이징과 텐진 사이의 연락선이 끊겨버리기도 했습니다. 이와 같이 위화단의 세력은 들불처럼 번져갔습니다.
* 영화에서...
이는 비록 서구열강의 강한 압력으로 인해 청국 조정은 진압에 나서기는 했지만 의화단의 부청멸양(扶清滅洋)이라는 청나라에 우호적인 구호와 위셴처럼 동정을 표시한 관리들이 많아서 철저한 탄압을 하지 않은 것도 한 원인이었습니다. 열강을 싫어했던 것은 당시 청조의 대신들과 실권자인 서태후도 마찬가지여서, 의화단을 은근히 지원해 서양세력에 대한 공격을 부추겼습니다.
* 영화에서 서태후와 단군왕
이러한 와중에, 불의의 사태가 일어나 청나라 조정을 긴장하게 만들었습니다. 1900년 6월 10일에 20만 명의 의화단이 보무도 당당하게 베이징에 입성했습니다. 당시 베이징을 경호하던 병사에게 일본 공사관의 서기관이던 스기야마 아키라가 살해당하고, 6월 20일에는 독일 공사였던 클레멘스 폰 케틀러가 의화단에게 살해당했습니다.
청나라 조정은 4차례의 어전회의를 열고는, 열강의 간섭에 대한 선전포고를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근본적인 이유는 다구 포대문제였습니다. 다구포대는 텐진 외항에 있는 포대인데, 베이징과 텐진을 항해하는 함선에 대한 방어적이 성격이 강한 포대였습니다. 5월 20일에 열강들이 포대의 인도를 요구하면서 동시에 서태후의 퇴위를 요구했기에 서태후 및 청국 조정은 큰 반감과 거부반응을 나타낸 것입니다.
* 일본군
6월 21일에 청나라는 열강의 간섭이 더 이상 계속될 경우 전쟁을 할 수 밖에 없다는 <선전포고>를 하기에 이릅니다. 당시 최고 권력자였던 서태후는 “중국이 약한 것은 이미 알고있다. 믿을 것은 민심 뿐...”이라고 말했다고 전해집니다. 민심은 바로 의화단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여튼 당시 서태후와 그 주변 인물들의 외국인 혐오는 극도로 달한 상태였습니다.
한편, 베이징 주재 공사들의 요청을 받고 5월말부터 열강의 연합군은 청나라에 대한 군사개입을 계획했습니다. 6월 초순에는 영국 해군 제독 시모어가 이끌던 연합군 2천명이 베이징으로 향했지만 청군에 의해 저지당하여 텐진으로 철수해야했습니다. 결국 청나라의 선전포고와 의화단 토벌을 의해 열강들 전체가 힘을 합쳐 연합군을 조직하여 군대를 파견하게 되기에 이릅니다.
* 영화에서...
군대를 파견한 나라는 총 8개국으로, 영국, 미국, 러시아, 프랑스, 독일,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 이탈리아의 서양국가를 비롯해 일본이 참가했습니다. 8개국 연합군의 지휘는 청나라에 가장 큰 이권을 가진 영국이 맡았어야 하는데, 실제로는 독일의 발데르제 장군이 총사령관을 맡았습니다. 독일은 자국 공사가 살해되었기 때문에 대청 전쟁에 가장 열성적인 이유에서였습니다.
* 의화단 포로들
총 병력은 약 2만여 명이었는데, 가장 많이 파병한 나라는 일본과 러시아였습니다. 이는 지리적으로 파병이 가장 쉬웠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파병 병력에 따라 전후 세력 관계도 영향을 받기 때문이라는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었습니다.
또한 일본과 러시아 이외의 각국은 자국이 안고 있던 여러 문제로 인하여 많은 병력을 중국에 파견할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특히 영국은 남아프리카에서 네덜란드 이민자들이 세운 자유국 및 트란스발 공화국과 보어전쟁을 치르던 중이었기에 군사적인 여유가 없어서였습니다. 미국은 필리핀과 전쟁 중이었기 때문에 파병은 소수에 그쳤습니다.
* 위화단
열강 연합군은 텐진 옆에 있는 다구 포대를 가볍게 제압하고 이어서 텐진도 점령합니다. 텐진성 남문 위에는 약 4,000명의 의화단 및 청군 병사들의 시체가 널려 있었습니다. 이 후 싸움은 몇 번 있긴 했지만 연합군은 무난하게 베이징으로 진군하면서 나아갔습니다.
연합군과 저항하는 청군과 의화단은 연합군에 비해 압도적인 병력을 보유하긴 했지만 무장이 매우 빈약했습니다. 더구나 근대적인 무기를 다루는 병사가 부족했던 점도 그 원인 중의 하나였습니다.
다구 포대를 점령한 일본병사의 수기에 의하면, 청군 병사들이 대포의 화약을 다룰 줄 몰라 스스로 자폭하여 사망한 것을 보고는 이렇게 훈련이 안된 군은 처음이라고 혀를 찼다고 합니다. 의화단도 마찬가지여서 근대적인 무기는 전무했고 대부분의 무장은 칼과 창으로 총기를 든 자는 매우 소수였습니다.
* 연합군 병사
한편 청나라의 선전포고로 인해 베이징에 있던 외국 공사 및 중국인 기독교도들은 자금성 동남쪽에 위치했던 동교민항이라는 조그만 공사관 구역 내에 몰려들었습니다. 당시 각국 공사관은 동교민항에 모여 있었는데 현재 천안문 맞은편의 동쪽, 역사박물관과 기타 관청들이 늘어서 있는 한 구획이었습니다.
6월 19일, 24시간 내에 외국인 거주자들에 대한 국외퇴거명령이 전해지자 다음 날부터 공격이 시작되었습니다. 이후 55일 동안, 8개국 연합군이 베이징으로 진격하여 점령하는 8월 14일까지 농성전을 이어나가게 됩니다. 농성자들 중에는 중국 연구가로 유명한 펠리오와 세무사로 중국에 오랫동안 체류했던 로버트 하트, <타임즈>지의 통신원인 G.E.모리슨, 중국사 연구가 및 철학대가인 핫토리 우노키치 등 저명인들도 있었습니다.
* 영화에서...
농성전 당시 전사자는 외국인 925명 중 20명에 불과했는데 이들 대부분은 실질적인 전투를 담당했던 일본 호위병들이었습니다. 함께 농성한 중국인 신자들은 18명이 사망했는데 소수병력으로 55일 동안 매우 선전한 편이었습니다. 동교민항 지역은 좀처럼 함락되지 않았습니다. 의화단은 20만 명이나 되었지만, 우두머리가 많아서 명령이 제각각이었던 것이 주요 원인 중의 하나였습니다.
8월 14일에 연합군은 베이징 공략에 나서 다음 날, 함락합니다. 베이징에는 청군 약 4만 남짓한 병력이 있었고 위화단도 있었지만 텐진에서 진군해 온 연합군의 적수가 되지 못하고 대패합니다. 전사자들 외에 대부분이 뿔뿔히 흩어져 도망을 가고 맙니다. 베이징의 점령으로 이 후 약 1년간 연합국에 의한 점령체제가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 북경으로 입성하는 연합군
점령 직후 연합군은 대 약탈에 나서서 자금성의 보물을 대량으로 중국 국외로 반출하였고 왕후귀족의 저택과 이화원 등의 문화유산이 약탈, 방화, 파괴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빼앗은 보물들을 돈으로 바꾸기 위해 도둑시장이 열릴 정도였습니다. 일본군은 자금성 방화수용 항아리의 도금된 금박까지 벗겨갔는데, 이 때문에 열강들 가운데 일본의 전리품이 가장 많았습니다.
한편, 서태후는 베이징 함락 전에 가난한 서민으로 위장하여 탈출해 도중에 산시성, 다퉁 등을 전전하면서 10월에 이르러 시안에 도착했습니다. 서태후는 애로호 사건으로 인해 일어난 전쟁 시에도 열하로 달아난 적이 있었기에 일생 두번에 걸쳐 도성을 버리고 달아난 셈이되었습니다.
* 시가전
서태후는 도망갈 때 조카였던 황제인 광서제도 이리저리 끌고 다녔습니다.광서제를 동행시킨 것은 베이징에 남아있을 경우 열강을 방패로 하여 황제의 친정이 부활될 가능성을 그녀가 두려워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서태후는 광서제의 애비(愛妃)였던 진비는 환관에 명하여 자금성 영수궁 뒷편의 우물에 빠트려 살해케 했습니다. 진비의 살해를 명령한 것은 그녀가 광서제의 총애를 독점한 것과, 야심적인 그녀가 제2의 서태후가 되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다고 합니다.
한편 진비의 시체를 우물에서 끌어올려 장사지낸 것은 아이러니컬하게도 최대의 약탈자였던 일본군이었습니다. 연합군의 베이징 점령은 약 1년간 이어졌는데 이를 싫어한 서태후는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1년 정도 시안에 체류한 뒤 1902년 1월에 철도편으로 베이징으로 돌아왔습니다.
전투가 끝난 후 의화단은 사방으로 흩어졌고, 일부는 베이징 근교에서 저항했으나 곧 진압되고 말았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사후 처리 문제였는데, 8개국의 이해득실이 서로 달라 질질 끌다가 이듬해 9월 7일이 되어서야 중국 측과 화약을 맺기에 이릅니다. 이를 <신축화약>이라고 합니다.
반기독교 운동은 사형으로 엄히 다스리며, 요소요소에 병력 주둔권, 다구포대의 철거 등의 조항이 있었고 배상금은 4억 5천만 량으로 이는 청조가 멸망한 후에도 중화민국이 인수해 1940년에야 모두 갚을 수 있었습니다.
* 일본을 포함한 서구 열강 대표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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