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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오년 7월 (1594년 7월)
727
7월 초1일 (정축) 맑다. [양력 8월 16일]
728
배응록(裵應祿)이 원수에게서 들어 왔다. 원수가 뉘우치는 말을 하고서 보냈다는 것이다. 우습다.
729
이 날이 나라제삿날(仁宗 祭日)이라 홀로 종일 앉있었다.
730
저녁에 충청수사가 여기 와서 서로 이야기했다.
731
7월 초2일 (무인) 맑다. [양력 8월 17일]
732
늦더위가 찌는 듯하다. 이 날 순천의 도청(원을 보좌하는 아전)과 색리 ∙ 광양의 색리 등의 죄를 다스렸다.
733
좌도 사수들의 활쏘기를 시험하고, 적의 장물을 나누어 줬다.
734
저녁나절에 순천부사 ∙ 충 청수사와 함께 활을 쏘았다. 배 첨지가 휴가를 받아 갔다.
735
노윤발(盧潤發)에게 흥양군관 이심(李深)과 병선색리 ∙ 괄군색리 등을 붙잡아 올 일로 전령을 주어 내보냈다.
736
7월 초3일 (기묘) 맑다. [양력 8월 18일]
737
충청수사 ∙ 순천부사가 활을 쏘았다.
738
웅천현감 이운룡(李雲龍)이 휴가를 신고하고 미조항으로 돌아갔다.
739
음란한 계집을 처벌했다. 각 배에서 여러번 양식을 훔친 사람들을 처형했다.
740
저녁에 새로 지은 다락으로 나가 보았다.
741
7월 4일 (경진) 맑다. [양력 8월 19일]
742
충청수사가 와서 같이 아침밥을 먹은 뒤에 마량첨사 ∙ 소비포권 관도 와서 같이 점심을 먹었다.
743
왜적 다섯 명과 도망병 한 명을 아울러 처형했다.
744
충청수사와 함께 활 열 순을 쏘았다.
745
옥과의 계원유사 조응복(曺應福)에게 참봉의 직첩을 주어 보냈다.
746
7월 5일 (신사) 맑다. [양력 8월 20일]
747
새벽에 탐후선이 들어와서 어머니께서 평안하심을 알았다. 참으로 다행이다.
748
심약(審藥: 궁중에 바치는 약재를 감시하기 위하여 각 도에 파견하는 종9품의 벼슬인데, 전의감 혜민서의 의원중에서 뽑음)이 내려왔는데 매우 용렬하니 한심스럽다.
749
우수사 ∙ 충청수사가 같이 왔다. 여도만호는 술을 가져와 같이 마셨다. 활 열여 순을 쏘았다. 너무 취해서 수루에 올랐다가 밤이 깊어서야 헤어졌다.
750
7월 6일 (임오) 종일 궂은비 오다. [양력 8월 21일]
751
몸이 불편하여 공무를 보지 않았다.
752
큰 도둑 세 놈을 최귀석(崔貴石)이 잡아 왔다. 또 박춘양(朴春陽) 등을 보내어 그 괴수를 잡아 왼쪽 귀를 잘라서 왔다.
753
아침에 정원명(鄭元溟) 등을 격군을 정비하지 않은 일로 이를 잡아 가두었다.
754
저녁에 보성군수가 들어온다고 했다.
755
어머니께서 평안하시다는 소식을 들었다.
756
밤 11시 쯤에 소나기가 퍼부었다. 빗발이 삼대 같아 새지 않는 곳이 없었다. 촛불을 밝히고 홀로 앉았으니, 온갖 근심이 치밀었다. 이영남(李英男)이 와서 봤다.
757
7월 7일 (계미) 저녁에 비가 뿌렸다. [양력 8월 22일]
758
충청수사는 그 어머니의 병환이 심하다고 아뢰고 모이지 못했다.
759
우수사는 순천부사 ∙ 사도첨사 ∙ 가리포첨사 ∙ 발포만호 ∙ 녹도만호가 함께 활을 쏘았다.
760
이영남(李英男)이 배를 거느리고 올 일로 곤양으로 간다고 아뢰고 돌아갔다.
761
사로잡혔다가 돌아온 고성 보인(保人)을 문초했다. 보성이 왔다.
762
7월 8일 (갑신) 흐리되 비는 오지 않았다. [양력 8월 23일]
763
종일 바람이 세게 불었다. 몸이 곤하여 장수들을 보지 않았다. 각 고을에 공문을 적어 보냈다.
764
오후에 충청수사에게 가서 봤다.
765
저녁에 고성 사람으로 사로잡혔다가 도망해 온 사람을 직접 문초했다.
766
광양의 송전(宋銓)이 그의 지휘관인 병사의 편지를 이곳에 가지고 왔다. 낙안과 충청우후가 온다고 했다.
767
7월 9일 (을유) 바람이 세게 불었다. [양력 8월 24일]
768
아침에 충청우후(원유남)가 교서에 숙배하였다.
769
저녁나절에 순천 ∙ 낙안 ∙ 보성의 군관과 색리들이 격군을 소홀히 하고 또 기일을 어긴 죄를 처벌했다.
770
가리포 ∙ 임치 ∙ 소근포 ∙ 마량첨사 및 고성현령이 아울러 왔다.
771
낙안의 군량 벼 이백 섬을 받아서 나누었다.
772
7월 10일 (병술) 아침에 맑다가 저녁에 비가 조금 내렸다. [양력 8월 25일]
773
아침에 낙안의 겨냥 벼 찧은 것과 광양 벼 백 섬을 되었다.
774
신홍헌(申弘憲)이 들어왔다.
775
저녁나절에 송전(宋筌)과 군관이 활 열다섯 순을 쏘았다.
776
아침에 아들 면의 병이 중태에 빠졌다는 말을 들었다. 또 피를 토하는 증세까지 있다고 하므로, 울(蔚)과 심약 신경황 ∙ 정사립 ∙ 배응록(裵應祿)을 아울러 내보냈다.
777
7월 11일 (정해) 궂은비가 내렸다. [양력 8월 26일]
778
바람이 세게 불고 종일 그치지 않았다.
779
울(蔚)이 가는 길이 고되고 힘들 것이 많이 염려되고, 또 면의 병이 어떠한지 궁금 하다.
780
장계를 손수 초잡아 고쳐 주었다.
781
경상순무(서성)의 공문이 왔는데, 원수사가 불평을 많이 했다는 것이다.
782
오후에 군관들에게 화살을 쏘게 했다. 봉학(奉鶴)도 같이 활을 쏘았다.
783
윤언침(尹彦 )이 점고 받으러 왔기에 점심을 먹여 도로 보냈다.
784
저물무렵에 비바람이 몹시 치더니 밤 내내 계속 되었다.
785
충청 수사가 와서 봤다.
786
7월 12일 (무자) 맑다. [양력 8월 27일]
787
아침에 소근첨사가 와서 보고 화살 쉰네 개를 만들어 바쳤다. 공문을 적어서 나누어 주었다.
788
충청수사는 순천 ∙ 사도 ∙ 발포 ∙ 충 청우후와 아울러 와서 활을 쏘았다.
789
저녁에 탐후선이 들어왔기에 어머니의 평안하심은 알았으나, 면의 병세는 중하여 몹시도 애타지만 어찌하랴.
790
영의정 류성룡이 죽었다는 부고가 순변사가 있는 곳에 왔다고 한다. 이는 류 정승을 미워하는 자들이 반드시 말을 만들어 비방하는 말일 것이다. 이런 통분함을 이길 수 없다.
791
이 날 어둘 무렵에 마음이 몹시도 어지러웠다. 홀로 빈 집에 앉았으니, 마음을 제대로 걷잡을 수 없다. 염려가 더욱 답답하여 밤이 깊어 가도 잠들지 못했다. 류 정승이 만약 어찌 되었다면 나랏일을 어찌하랴! 어찌하랴!
792
7월 13일 (기축) 비가 내렸다. [양력 8월 28일]
793
홀로 앉아 아들 면의 병세가 어떨까하고 글자를 짚어 점을 쳐 보았더니, 임금을 만나 보는 것과 같다는 괘가 나왔다. 아주 좋았다. 다시 짚으니, 밤에 등불을 얻은 것과 같다는 괘가 나왔다. 두 괘가 다 좋았다. 마음이 좀 놓인다.
794
또 류 정승의 점을 친니, 바다에서 배를 얻은 것과 같은 괘가 나왔다. 다시 점치니, 의심하다가 기쁨을 얻은 것과 같다는 괘가 나 왔다.무척 좋았다.
795
저녁내 비가 내리는데, 홀로 앉아 있는 마음을 가눌 길 없다.
796
저녁나절에 송전(宋筌)이 돌아가는데, 소금 한 휘를 주어 보냈다.
797
오후에 마량첨사와 순천이 와서 보고 어두워서 되돌아갔다.
798
비가 올 것인가 개일 것인가를 점쳤더니, 점은 뱀이 독을 뿜어 내는 것과 같은 괘가 나왔다. 앞으로 비가 많이 내릴 것이니, 농사일이 염려된다. 밤에 비가 퍼붓듯이 내렸다.
799
초저녁에 발포 탐후선이 편지를 받아 가지고 돌아갔다.
800
7월 14일 (경인) 비가 내렸다. [양력 8월 29일]
801
어제 저녁부터 빗발이 삼대 같았다. 지붕이 새어 마른 곳이 없다. 간신히 밤을 지냈다. 점괘를 얻은 그대로이니 참으로 묘하다.
802
충청수사와 순천부사를 청해 와서 장기를 두게 하고 구경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러나 근심이 뱃속에 있으니, 어찌 조금인들 편안하랴! 함께 점심을 먹고 저녁에 수루 위로 걸어 나가 몇 바퀴나 어설렁거리다가 돌아왔다.
803
탐후선이 오지 않으니 그 까닭을 모르겠다.
804
자정에 비가 또 내렸다.
805
7월 15일 (신묘) 비가 내렸다. 저녁나절에 개었다. [양력 8월 30일]
806
조카 해 ∙ 종경이 들어와서 아들 면의 병이 차도가 있다는 소식을 자세히 들으니 기쁘기 그지없다.
807
조카 분(芬)의 편지에, 또 아산 고향의 선산이 아무 탈 없고, 가묘도 편안하며, 어머니께서도 편안하시다는 걸 알게 되었으니, 다행이다.
808
이흥종(李興宗)이 환자하는 일로 매를 맞다가 숨졌다고 했다. 놀랍다. 그 삼촌(충청수사 李純信)이 처음 이를 듣고서 비통한 나머지, 그 어머니도 듣고 병세가 더욱 위중해졌다고 한다.
809
활 열 여 순을 쏜 뒤에 수루에 올라가서 이리저리 거닐 적에, 박주사리(朴注沙里)가 급히 와서 명나라 장수의 배가 이미 본영 앞에 이르러 이리로 온다고 했다. 그래서 곧 삼도에 전령하여 진을 죽도(통영시 한산면)로 옮겼다. 밤을 지냈다.
810
7월 16일 (임진) 흐리고 바람이 차겁다. [양력 8월 31일]
811
늦은 아침부터 큰 비가 내리더니 종일 퍼붓듯이 왔다.
812
경상수사 원균(元均) ∙ 충청수사 ∙ 우수사가 모두 와서 봤다.
813
소비포가 소의 다리 등을 보내 왔다.
814
명나라 장수가 삼천진(사천시 삼천포)에 이르러 머물러 묵는다고 했다.
815
여도만호가 먼저 왔다. 저녁에 본진으로 돌아왔다.
816
7월 17일 (계사) 맑다. [양력 9월 1일]
817
새벽에 포구로 나가 진을 쳤다.
818
오전 열 시쯤에 명나라 장수 파총 장홍유(張鴻儒)가 병호선(兵號船) 다섯 척을 거느리고 돛을 달고 들어와서 곧장 영문에 이르러서는 육지에 내려서 이야기하자고 청했다. 그래서 나는 여러 수사들과 함께 활터 정자에 올라가서 올라오기를 청했더니, 파총이 배에서 내려 곧 왔다. 이들과 같이 앉아서 먼저 바닷길 만리 먼 길을 어렵다 않으시고 여기까지 오신데 대하여 감사함을 비길 길이 없다고 하였더니, 대답하기를,
819
"작년 7 월 절강에서 배를 타고 요동에 이르니, 요동사람들이 말하기를, 바닷길에는 돌섬과 암초가 많고, 또 앞으로 강화가 이루어질 것이니 갈 필요가 없다고 억지로 말리는데도 그대로 요동에 머물면서 시랑(侍郞) 손광(孫鑛)과 총병(總兵) 양문(楊文)에게 보고하고, 올 3월초에 출항하여 들어왔으니, 무에 수고라고 할 것이 있는가"
820
했다. 나는 차를 마시라고 청하고 또 술잔을 권하니 감개무량하다. 또 적의 형세를 이야기하느라고 밤이 깊은 줄도 몰랐다. 조용히 이야기하다가 헤어졌다.
821
7월 18일 (갑오) 맑다. [양력 9월 2일]
822
다락 위로 올라가자고 청하여 점심을 먹은 뒤에 나가 앉아 술을 서너 차례 권했다. 대체로 내년 봄에 배를 거느리고 곧장 제주에 이르러, 공히 우리 수군과 합세하여 으시대면서 추악 한 적들을 무찌르자고 성의있게 이야기했다. 초저녁에 헤어졌다.
823
7월 19일 (을미) 맑다. [양력 9월 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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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환영 예물 단자를 올리니, 감사해 마지 못하겠다면서 주시는 물건이 매우 풍성했다. 충청수사도 드렸다.
825
저녁나절에 우수사가 예물을 주는데 몇몇은 나와 같았다. 점심을 먹은 뒤에 경상 원수사가 혼자서 술 한 잔을 올리는데, 상은 무척 어지럽건만 한가지라도 아래쪽 힘쓸 것이 없었다. 우습고 우스웠다. 또 자(字)와 호(別號)를 물으니, 써서 주는데, 자는 중문(仲文)이요, 호(軒號)는 수천(秀川)이라고 했다. 촛불을 밝히고 다시 이야기하다가 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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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많이 올듯하여 배로 내려가 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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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20일 (병신) 맑다. [양력 9월 4일]
828
아침에 통역관이 와서 전하여 말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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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나라 장수(장홍유)가 남원에 있는 총병 유정(劉綎)이 있는 곳에는 가지 않고 곧장 돌아가라"
830
고 했다. 나는 명나라 장수에게 간절히 말을 전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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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 파총(장홍유)이 남원으로 온다는 소식이 이미 총병관 유정에게 전해졌으니, 만약 가지 않는다면, 그 중간에 남의 말들이 있을 것이므로, 바라건대 가서 만나 보고 돌아가는 것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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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하였다. 그러니 파총이 나의 말을 전해 듣고, 과연 옳다고 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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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말을 타고 혼자 가서 만나 본 뒤에 군산으로 가서 배를 타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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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했다는 것이다. 아침식사를 하고서 파총이 내 배로 내려와서 조용히 이야기 하고, 이별의 잔을 권했다. 파총이 일곱 잔을 마신 뒤 홋줄을 풀 고 함께 포구 밖으로 나가 두번 세번 애달픈 뜻으로 송별하였다.
835
그리고 경수(景修:이억기) ∙ 충청수사 ∙ 순천부사 ∙ 발포만호 ∙ 사도첨사와 같이 사인암(舍人巖)으로 올라가 취하며 이야기하고서 돌아왔다.
836
7월 21일 (정유) 맑다. [양력 9월 5일]
837
아침에 원수에게 명나라 장수와의 문답 내용을 공문을 만들어 내 보냈다.
838
저녁나절에 마량첨사 ∙ 소비포첨사가 와서 봤다. 발포만호가 복병 내보내는 일로 와서 아뢰고 갔다.
839
저녁에 수루로 올라 있는데, 순천부사가 와서 이야기했다.
840
오후에 흥양의 군량선이 들어왔다. 그래서 색리와 배 주인에게 발바닥을 호되게 때렸다.
841
저녁에 소비포가 와서 보고는 하는 말이, 기한에 대지 못 했다고 해서 수사 원균(元均)에게 곤장 서른 대를 맞았다고 했다. 몹시 해괴한 일이다.
842
저녁나절에 우수사가 군량 스무 섬을 꾸어 갔다.
843
7월 22일 (무술) 맑다. [양력 9월 6일]
844
아침에 장계초고를 수정했다. 임치첨사와 목포만호가 와서 봤다.
845
저녁나절에 사량만호와 영등포만호이 와서 봤다.
846
오후에 충청 수사 ∙ 순천부사 ∙ 충청우후 ∙ 이영남(李英男)이 함께 활을 쏘았다.
847
저물 무렵 수루에 올라가 밤이 되어 앉아 있다가 돌아왔다.
848
7월 23일 (기해) 맑다. [양력 9월 7일]
849
충청수사가 우수사 ∙ 가리포첨사와 같이 와서 봤다. 활을 쏘았다.
850
조카 해(荄)가 돌아갔다. 목년(木年)이 들어 왔다.
851
7월 24일 (경자) 맑다. [양력 9월 8일]
852
여러 가지 장계를 직접 봉했다. 영의정(류성룡)과 심병판(심충겸) ∙ 윤판서(윤근수) 앞으로 보냈다.
853
저녁에 활 일곱 순을 쏘았다.
854
7월 25일 (신축) 맑다. [양력 9월 9일]
855
아침에 하천수에게 장계를 지니게 하여 내보냈다.
856
아침 식사를 하고서 충청수사 ∙ 순천부사 등과 함께 우수사에게로 가서 활 열 순을 쏘았다.
857
몹시 취하여 돌아왔는데 밤새도록 토해냈다.
858
7월 26일 (임인) 맑다. [양력 9월 10일]
859
각 고을에 공문을 써 보냈다. 밥을 먹은 뒤에 수루 위로 옮겨 앉았다. 순천과 충청수사가 와서 봤다.
860
저녁나절에 녹도만호가 도망병 여덟 명을 잡아 왔다. 그래서 그 중 주모자 세 명을 처형하고 그 나머지는 곤장을 쳤다.
861
저녁에 탐후선이 들어왔다. 아들들의 편지를 보니, 어머니께서 편안하시고 면(葂)의 병도 나아 진다고 한다. 허씨 댁이 병이 점점 더해졌다고 한다. 걱정이다. 유홍(兪弘)과 윤근수(尹根壽)가 세상을 떠나고 윤돈(尹敦:1551~1612)이 종사관으로 내려 온다고 한다.
862
신천기(申天機)도 들어왔다. 어둘 무렵 신제운(申霽雲)이 와서 봤다. 노윤발(盧潤發)이 흥양의 색리와 감관을 붙잡아 들어왔다.
863
7월 27일 (계묘) 흐리고 바람이 불었다. [양력 9월 11일]
864
밤 꿈에 머리를 풀고 곡을 했다. 이 조짐은 매우 좋은 것이라고 한다.
865
이 날 충청수사 ∙ 순천부사와 함께 수루 위에서 활을 쏘았다. 충청수사가 과하주(여름을 지내도 시어지지 않는 약주)를 가지고 왔다. 나는 몸이 불편하여 조금 마셨다. 역시 좋아지지 않았다.
866
7월 28일 (갑진) 맑다. [양력 9월 12일]
867
흥양의 색리들의 죄를 다스렸다. 신제운이 주부의 직첩을 받고 서 갔다. 저녁나절에 수루에 올라가 벽 바르는 일을 감독했다. 의능이 와서 그 일을 맡았다. 저물 무렵에 숙소로 내려 왔다.
868
7월 29일 (을사) 종일 가랑비가 왔다. [양력 9월 13일]
869
바람기는 없었다. 순천부사와 충청수사가 바둑을 두는데, 구경했다. 몸이 몹시 불편하다. 낙안군수도 와서 같이 했다. 이 날 밤 신음했는데 아침까지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