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名流
金璠 墓碣銘[李希輔]
吾益友承旨金公瑛, 永嘉人也。 文行高一世。 有令季曰璠, 字文瑞。 其才與德, 與承旨公難兄弟。 初, 隨計偕入澤宮, 若雲機入洛, 一時輩流, 皆慕其名。 希輔時在澤宮, 得交, 侯昆弟特款焉。 厥後十載, 希輔以直提學左官一善府, 承旨公爲吏曹正郞, 侯新登第, 受命來榮覲。 希輔隨兩公, 拜大夫人於豐山三龜亭上, 秩進壽觴, 如三昆弟焉。 自是情好益篤。 後三十餘載, 希輔丁外憂, 衰且病, 臥京第, 聞侯訃焉。 時嘉靖二十三年甲辰冬也。 越明年乙巳, 嗣子生海葬侯于楊州陶穴里, 一如侯顧言, 旣堋數月, 書侯家牒, 扶衰曳苴, 蹐門以禮, 請銘甚勤。 希輔時年已過稀矣, 憂患錮, 神志昏耗, 沮筆力, 吾安忍銘吾友也? 逮事先侯, 詳先德者, 盡歸地下, 在地上者, 唯衰病一棘人, 則吾安忍不銘吾友也? 侯之焯德、懿行著在聞人者, 吾皆略而不錄, 唯取目擩耳熟者言之。
侯之友孝著家庭, 信義洽鄕黨, 無落落之行, 而人自不及; 謝訾訾之悅, 而士爭趨附, 廉於己而厚於人, 篤於古而不忤今, 此其槪也。 年未髫齕, 學通大義, 能屬文。 中戊午進士科。 未幾, 丁內憂, 服闋, 仍不樂進取, 喜弛置自便, 奉大夫人于鄕閭, 極其孝餉。 上堂問溫凊, 入廚調甘旨, 一如古人。 大夫人嘗戒之曰: “三牲列鼎之養, 不若一揚以顯親, 汝何不取科第, 以悅先靈於地下?” 侯自聞戒, 慨然自奮勵, 忘寢廢食, 遂通經史, 登正德癸酉文科甲科。 初, 授軍資監直長, 例陞成均館典籍。 時適旱、蝗, 北路尤甚, 昏札相望。 朝廷建議, 船南粟活北民, 水程約三千餘里, 濤澇襄山蹴天, 船藏魚腹者十常八九。 轉運使若不得人, 徒費粟而無實效, 故嘗擇大臣中饒幹局有重望者命之, 其從事之選, 視運使又加愼焉。 朝右多以侯名薦者, 銓曹以新進難之, 廣詢無出侯右者, 竟用之, 侯於初程負重寄, 大懼孤時望, 晨夜憂悸, 其規劃處置, 一遵劉度支海運事, 雖往復百綱, 如涉津梁, 無一敗者, 所活不可勝計。 侯賢能自此始, 昌胤大聞世。 歷兵、禮二曹佐郞, 遂陞京畿都事, 以侯有老母, 以便養也。 俄三遷, 得冬官正郞。
侯之聞望, 方赫赫日隆冾, 第侯性多骯髒, 不能偃仰, 順時卽默。 侯爲安陰縣監, 窘鸞鳳棲枳棘, 人多憾懊, 侯怡然不介意。 下車之日, 先訪民疾苦, 抑豪右, 賑窮殘, 恐不及。 數月間, 敎化大行, 盜遁奸革, 前之訾侯者, 反多譽之。 未一歲, 以外憂去縣, 民遮道啜泣, 若喪怙恃。 制畢, 除翊衛司右翊衛, 選爲春宮文學者再, 移爲正郞兵、禮兩曹, 遂陞濟用監僉正。 時平壤缺府尹, 難其人。 府西關之鈐轄, 鴨江界上國, 狄踰連靺鞨, 朝聘之使途聯轍, 控御之將館不絶。 自癸未征西之役, 癘疫大侵一道, 或闔境如屠, 積尸京觀, 非才兼文武, 袖手毉國者, 莫副其任, 往往有譴。 侯自赴官卽兼春秋館職, 竭誠殫慮, 首建屯田策。 力勸課農桑, 先實民食, 次實倉廩, 外盡除軍卒無名之賦, 民擧悅喜, 家謳戶謠, 則以其餘積大備酒肉, 餉賓旅, 喧歌管, 逮日夜往來多忘歸。 自古尹是府者, 能飾廚傳, 則必剝民, 未有能兼之者, 侯之政, 豐賓館而民不瘠, 不增賦而財常饒, 如神施鬼供, 人莫測政成。 五載, 侯之賢騰聞朝著, 將加奬擢, 不幸憂勞入骨髓, 不能官輿致京師。 垂二十載, 卒不起, 疾少間, 則痛掃漑一室, 架千卷書于堂上, 臥披閱忘倦, 佳辰吉日, 則招親戚隣里, 設酒肴侃侃以相樂, 不知有疾。 逮甲辰冬, 聞中宗大王賓天, 涕泣强不肉, 疾復卒不救。 侯初用母戒, 收野迹, 縛簪纓, 及聞國訃, 發忠憤入地中, 侯可謂忠孝相得者。 朝廷惜侯有大才不大試, 借侯閑地祿食沒世, 此尤難焉。
侯生己亥, 卒甲辰, 享年六十六。 其先曰宣平, 事麗祖, 有大功, 至今祭於社, 其苗裔世居安東。 曾大父諱三近, 比安縣監; 祖諱係權, 漢城判官。 考諱永銖, 司憲府掌令。 妣金氏, 縣令博之女, 溟州郡王周元之後。 侯之齊曰洪氏, 社稷署令傑之女, 係出南陽貴族。 生男女各一: 男曰生海, 掌隷院司議, 有令名。 女適宗簿寺僉正、兼春秋館編修官金義貞。 生海娶王子景明君之女, 生三男: 長曰大孝, 其次達孝、克孝, 皆幼。 僉正生一男五女: 男曰農。 女皆嫁爲士人妻。 曾孫男女若干人。 侯有經綸之才, 而不施於國; 有澤物之能, 而不被於民。 沈綿一床, 坎軻以終, 與晉郗太尉越千載如一轍, 君子惜之。 銘曰:
辛勤百年之養, 揠一恙兮。 堂堂廊廟之器, 局郞吏兮。 天固惜之, 世厥子兮。 身不食報, 存不死兮。 玄晏之名, 與石壽兮。
김번[金璠]의 묘갈명(墓碣銘) 이희보(李希輔)
나의 익우(益友) 승지(承旨) 김영(金瑛) 공은 영가(永嘉, 안동(安東)) 사람이다. 그는 학문과 행실이 한 시대에 높으며 훌륭한 동생이 있으니, 이름이 김번(金璠)이고 자(字)는 문서(文瑞)인데, 그 재주와 덕(德)은 승지공과 비슷하여 누가 형이고 누가 아우라고 할 수 없다. 처음에 계획에 따라 형제가 함께 성균관[澤宮]에 들어갔는데, 마치 운기(雲機)가 낙양(洛陽)에 들어오는 것과 같아서 한 시대의 제배(儕輩)들이 모두 그들 이름을 흠모하였다. 나 이희보(李希輔)도 그 때의 성균관에 있으면서 그들 형제(兄弟)와 교유(交遊)할 수가 있어 특별히 절친하였다. 그 뒤 10년이 지나서, 이희보는 직제학(直提學)으로서 좌천되어 선산 부사(善山府使)가 되었고, 승지공은 이조 정랑(吏曹正郞)이 되었으며, 김후(金侯, 김번)는 새로 과거에 급제(及第)하여 왕명을 받고 와서 영친연(榮親宴)을 베풀었는데, 이희보도 양공(兩公)을 따라서 (안동) 풍산(豊山)의 삼구정(三龜亭) 위에서 대부인(大夫人)에게 절하고 차례로 축수(祝壽)하는 술잔을 올리기를 마치 3형제처럼 하였다. 이때부터 정의(情誼)가 더욱 돈독하였으며, 그 뒤 30여 년이 지나서 이희보가 아버지의 상(喪)을 당하여 쇠약하고 병들어서 서울의 집에 누워 있다가 김후의 부음(訃音)을 들었는데, 그 때가 가정(嘉靖) 23년 갑진년(甲辰年, 1544년 인종 즉위년) 겨울철이었다. 그 다음 해 을사년(乙巳年)에 사자(嗣子) 김생해(金生海)가 김후를 양주(楊州)의 도혈리(陶穴里)에 장사지냈는데, 한결같이 김후의 유언(遺言)과 같이 하였으며, 이미 봉분(封墳)을 만들고 몇 달이 지나서 군의 가첩(家牒)을 써 가지고 쇠약한 몸을 부지하고 지팡이를 끌면서 조심스럽게 문전(門前)에 이르러 예(禮)를 갖추어 비명(碑銘)을 청하기를 매우 부지런히 하였으나, 이희보는 그때 나이가 이미 희수(稀壽)를 넘었으므로, 우환(憂患)이 고질이 되서 정신이 혼모(昏耗)하여 필력(筆力)을 방해하니, 내가 어찌 차마 내 친구의 비명을 쓰겠는가? 선후(先侯, 선군(先君))에 대한 일에 미쳐 선덕(先德)을 자세히 알고 있는 분들은 모두 지하(地下)에 돌아가고, 지상(地上)에 남아 있는 자는 오로지 쇠약하게 병들어 상중(喪中)에 있는 나 한 사람뿐이니, 내가 어찌 차마 내 친구의 비명을 쓰지 않겠는가? 김후의 훌륭한 덕과 아름다운 행동이 드러나서 사람들에게 알려진 것들은 내가 모두 생략하여 기록하지 아니하고, 오로지 눈에 선하고 귀에 익은 것만을 말하겠다.
김후의 효우(孝友)는 가정에 나타나고 신의(信義)는 향당(鄕黨)에 두루 미쳐 남보다 뛰어난 행동이 없었으나 사람들이 스스로 이에 미치지 못할 바였고, 남을 헐뜯는 기쁨을 사절하여 선비들이 다투어 달려와서 붙좇았으며, 자기에게 청렴(淸廉)하고 남에게 후덕(厚德)하였으며, 옛것에 돈독(敦篤)하고 금세(今世)를 거역하지 아니하였는데, 이것이 그 대강이다. 7, 8세의 나이에 공부를 배워서 대의(大義)를 통하여 능히 글을 지었는데, 무오년(戊午年, 1498년 연산군 4년)에 진사과(進士科)에 합격하였다. 얼마 안되어 어머니 상(喪)을 당하여 복상(服喪)을 끝마치고는 이어서 벼슬길에 나아가기를 즐겁게 여기지 아니하고 느슨히 방치되어 스스로 편안히 살면서 향려(鄕閭)에 내려가 대부인을 받들어 효성스럽게 공궤(供饋)하기를 극진히 하면서 대부인이 거처하는 방에 나아가서 따뜻한지 시원한지를 물어보고, 부엌에 들어가서 맛 좋은 음식 맞추기를 한결같이 옛사람들이 부모를 섬기는 것같이 하였다.
대부인이 일찍이 경계하여 말하기를, “세 마리의 희생(犧牲)을 여러 솥에 삶아서 부모를 봉양하더라도 한번 양명(揚名)하여 어버이를 빛내는 것만 같지 못한데, 너는 어찌하여 과거(科擧)에 뽑혀 지하에 계신 선령(先靈)들을 기쁘게 하지 않는고?”라고 하였는데, 김후가 이 훈계를 들은 뒤부터 개연(慨然)히 스스로 분발하여 잠자는 것도 잊어버리고 음식 먹는 것도 폐지하고서 열심히 공부하여, 드디어 경사(經史)에 통달하였다.
정덕(正德) 계유년(癸酉年, 1513년 중종 8년) 문과(文科)의 갑과(甲科)에 급제하여, 처음에 군자감 직장(軍資監直長)에 제수(除授)되었다가, 관례대로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에 승진하였다. 이때에 가뭄과 황충(蝗蟲)의 피해가 있어 북로(北路) 지방이 더욱 심하여 굶주려 죽은 자가 서로 잇달았는데, 조정(朝廷)에서 건의(建議)하여 남방의 곡식을 배로 날라서 북방의 백성들을 살리도록 하였으나, 큰 파도(波濤)가 산(山)을 이루어 하늘까지 치솟아서 배들이 침몰되어 고기의 밥이 되는 것이 보통 10중 8, 9였으므로, 전운사(轉運使)에 알맞은 사람을 얻지 못하면 한갓 곡식만 허비하고 실제 효과가 없기 때문에, 일찍이 대신(大臣) 중에서 재능과 수완이 풍부하여 여러 사람의 기대를 많이 받는 자를 골라서 그 자리에 임명하려고 하였으며, 종사원(從事員)의 선임(選任)도 전운사에 비교하여 또 신중을 더하였다. 조정에서 김후의 이름을 추천한 사람들이 많았으나, 전조(銓曹)에서 신진(新進) 인사라고 하여 어렵게 여기어, 널리 찾아 보았지만 김후보다 나은 사람을 구할 수가 없었으므로, 마침내 김후를 초행길의 종사원에 등용하였는데, 중대한 임무를 맡아 당시의 인망(人望)에 고독함을 크게 두려워하여 이른 새벽부터 밤 늦게까지 걱정하고 가슴을 두근거리면서, 그 계획하고 처치(處置)하기를 한결같이 유탁지(劉度支, 당 숙종(唐肅宗)때 유안(劉晏))의 바다로 운송한 고사(故事)에 따라 비록 수없이 배에 곡식을 싣고 왕복하였으나, 마치 나루의 교량(橋梁)을 건너는 것과 같이 하여 하나도 패몰(敗沒)한 배가 없었으므로, (북로(北路)에서) 목숨을 살려낸 사람들은 이루 다 헤아릴 수가 없었으니, 김후의 현명하고 능력 있는 것이 이때부터 비로소 계속 나타나서 크게 세상에 알려졌다.
병조(兵曹)와 예조(禮曹)의 좌랑(佐郞)을 역임하고, 마침내 경기 도사(京畿都事)에 승진하였는데, 김후가 노모(老母)가 있다고 하여 봉양(奉養)에 편리하도록 하였기 때문이었다. 얼마 안되어 세 번 관직을 옮겨서 공조 정랑(工曹正郞)에 임명되었다.
김후의 명망(名望)이 바야흐로 빛나고 빛나서 날마다 융성하여 널리 퍼졌으나, 다만 김후의 성품이 꼿꼿하고 굴하지 않은 면이 많아서 능히 남에게 고개를 숙이지 않았고, 시기에 따라서 곧 침묵을 지켰는데, 김후가 안음 현감(安陰縣監)이 되어 난봉(鸞鳳)이 탱자나무와 가시나무에 서식하는 것처럼 군색하자, 사람들이 많이 유감스럽게 여겼으나, 김후는 마음을 편안하게 가지고 이것을 개의(介意)하지 않으면서 임소에 부임하는 날부터 먼저 백성의 질고(疾苦)를 물어본 다음 호족(豪族)을 억누르고 궁핍한 백성을 진휼(賑恤)하면서, 그 손길이 미치지 못할까봐 걱정하였다. 몇 달 사이에 교화(敎化)가 크게 행해져 도적이 숨어버리고 간사한 자가 뉘우치니, 전에 김후를 헐뜯던 자들이 도리어 많이 칭찬하였다. 1년도 안되어 아버지의 상(喪)을 당하여 안음현(安陰縣)을 떠나니, 백성들이 길을 막고 훌쩍거리고 울면서 마치 믿고 의지하던 어버이를 잃는 것과 같이 하였다.
복제(服制)를 끝마치고, 익위사(翊衛司)의 우익위(右翊衛)에 제수되었다가 뽑혀서 춘궁(春宮)의 문학(文學)이 되었던 것이 두 번이고, 옮겨서 병조(兵曹)ㆍ예조(禮曹) 2조(曹)의 정랑(正郞)이 되었다가 마침내 제용감 첨정(濟用監僉正)에 승진되었다. 그때의 평양(平壤)의 부윤(府尹)의 자리가 결원(缺員)이 되자 그 알맞은 사람을 구하기 어려웠는데, 평양부(平壤府)는 서북 관문(關門)의 요충지로서 압록강(鴨綠江)이 중국과 경계하고 적유령(狄踰嶺)이 말갈(靺鞨, 여진(女眞)을 가리킴)과 연접하였으므로, 조빙(朝聘)하는 사신의 행차(行次)가 길에 잇달았고, 저들을 제어하는 장수(將帥)가 관사(館舍)에 끊어지지 아니하는데다가 계미년(癸未年, 1523년 중종 18년)에 서북 오랑캐를 정벌(征伐)한 사건 이후 전염병이 온 도(道)에 크게 침범하여 혹시 온 경내(境內)가 도륙(屠戮)당하여 시체를 쌓아 놓은 무덤처럼 되었던 상황이었으므로, 재주가 문무(文武)를 겸하여 태연히 나라를 다스릴만한 자가 아니면 그 직임에 부응하지 못하여 자주 견책(譴責)당하였다. 김후는 그 관직에 부임하면서부터 즉시 춘추관(春秋館)의 직무를 겸하였는데, 정성을 다하고 생각을 기울여 맨 처음 둔전(屯田)에 대한 방책을 건의하기를, “힘써 농상(農桑)을 권장하여 먼저 백성들의 식량(食糧)을 충만하게 하고 다음으로 창고(倉庫)를 충만하게 하면서, 그 밖에 군졸(軍卒)의 명분 없는 부세(賦稅)를 전부 없애어, 백성들이 모두 즐거워하고 기뻐하여 집집마다 노래를 부르게 된 다음에 그 나머지 저축으로 주육(酒肉)을 크게 준비하여 빈려(賓旅)들을 대접한다면, 아침부터 밤이 되도록 떠들며 노래하고 피리 불며 왕래하면서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을 대부분 잊어버릴 것입니다.” 하였다. 옛부터 이 평양부의 부윤을 지냈던 자들이 역참(驛站)의 음식과 거마(車馬)를 꾸밀려면 반드시 백성의 재물을 박탈하였으므로 능히 이것을 겸행(兼行)한 자가 아직 있지 않았었는데, 김후가 정사(政事)를 맡고부터는 빈관(賓館)을 넉넉하게 하였으나 백성들이 야위어지지 않았고, 부세(賦稅)를 늘리지 아니하였으나 재정(財政)이 항상 풍부하여 신(神)이 베풀고 귀신이 제공하는 것과 같아서, 사람들은 정령(政令)이 이루어짐을 예측하지 못하였다. 5년 만에 김후의 현명(賢明)하다는 소문이 비등(沸騰)하여 조정에 알려지자 장차 격려하여 발탁(拔擢)하려고 하였는데, 불행하게도 걱정과 노고(勞苦)가 골수(骨髓)에 파고들어 병이 되어 관가의 수레를 타고서 서울[京師]에 이를 수 없었다. 20년이 지나서 마침내 병으로 일어나지 못하였는데, 병이 조금 차도가 있으면 방(房) 하나를 아주 깨끗이 청소하여 천 권(卷)의 책들을 서가(書架)에 꽂아두고, 방바닥에 드러누워 책을 열람하면서 피로한 줄을 알지 못하였으며, 좋은 계절이나 길(吉)한 날에는 친척(親戚)과 이웃 사람들을 초청하여 술과 안주를 베풀고 화기 애애(和氣靄靄)하게 서로 즐거워하니, 아무도 그가 병이 있는 줄을 알지 못하였다.
갑진년(甲辰年, 1544년 중종 39년) 겨울철에 이르러 중종 대왕(中宗大王)이 승하[賓天]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눈물을 흘리면서 억지로 자기 질병을 보살피지 아니하다가 다시 마침내 병을 치료하지 못하고 사망하였다. 김후는 처음에 어머니의 훈계를 듣고서 초야(草野)의 생활을 거두고 벼슬길에 나아갔는데, 국상(國喪) 소식을 듣기에 미쳐 충성스러운 분개심이 폭발하여 지하(地下)에 돌아갔으니, 김후야말로 가위 ‘충성과 효도를 서로 다한 사람’이라고 할 만하다. 조정에서 김후는 큰 재주가 있는데도 크게 쓰이지 못한 것을 애석하게 여기는데, 가령 김후는 지하에서 세상을 떠날 때까지 녹식(祿食)한 것을 물을 것이니, 이것이 더욱 어려운 일일 것이다.
김후는 기해년(己亥年, 1479년 성종 10년)에 태어나서 갑진년(甲辰年)에 졸(卒)하였는데, 향년(享年)이 66세였다. 그 선조(先祖)는 김선평(金宣平)인데, 고려 태조(高麗太祖)를 섬겨서 큰 공을 세웠으므로, 지금에 이르도록 사당(祠堂)에서 제사를 지내고 있으며, 그 후손(後孫)들이 대대로 안동(安東)에 살고 있다. 증조부는 휘(諱) 삼근(三近)으로 비안 현감(比安縣監)을 지냈고, 조부는 휘 계권(係權)으로 한성 판관(漢城判官)을 지냈으며, 아버지는 휘 영수(永銖)로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을 지냈고, 어머니는 김씨(金氏)인데, 현령(縣令) 김단(金慱)의 따님이고 명주군왕(溟洲郡王) 김주원(金周元)의 후손이다.
김후의 부인[齊]은 홍씨(洪氏)인데, 사직서 영(社稷署令) 홍걸(洪傑)의 따님이고 계통(系統)은 남양(南陽)의 귀족(貴族)에서 나왔다. 남녀(男女) 각각 1인을 낳았는데, 아들 김생해(金生海)는 장례원 사의(掌隷院司議)로 훌륭한 명성이 있으며, 딸은 종부시첨정 겸 춘추관편수관(宗簿寺僉正兼春秋館編修官) 김의정(金義貞)에게 시집갔다. 김생해는 왕자(王子) 경명군(景明君)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3남을 낳았는데, 맏이는 김대효(金大孝)이고, 그 다음은 김달효(金達孝)ㆍ김극효(金克孝)로 모두 어리다. 첨정 김의정은 1남 5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김농(金農)이고, 딸들은 모두 시집가서 사인(士人)의 처(妻)가 되었다. 증손(曾孫)의 남녀가 약간 명이 있다.
김후는 경륜(經綸)할 재주가 있었으나 나라에 베풀어보지 못하였고, 만물을 윤택하게 만들 재능이 있었으나 백성들에게 펴보지 못하였다. 오랫동안 병이 낫지 않아 병상(病床)에 누웠다가 불우(不遇)하게 세상을 끝마치니, 진(晉)나라 태위(太尉) 치감1)(郗鑒)과 더불어 1천여 년을 넘었지만 같은 길을 걸었기에 군자(君子)들이 애석하게 여긴다. 다음과 같이 명(銘)을 쓴다.
일생 동안 애써 부지런히 한 가지 병통 뽑아 버렸으니, 당당(堂堂)한 낭묘(廊廟)의 기국(器局)으로서 낭리(郎吏)에 처하였도다. 하늘도 진실로 애석하게 여겨 그 아들에게 계승시킴이여, 자신이 못다 한 복록 보존하여 끼쳐 주었는데, 옛 진(晉)나라 때의 현안(玄晏, 황보밀(皇甫謐))과 같은 명성 비석(碑石)과 더불어 오래도록 가리라.
각주
1) 치감(郗鑒) : 진 명제(晉明帝) 때 사람으로, 경적(經籍)을 널리 읽었고 향리(鄕里)에서 몸소 농사를 지으며 시가(詩歌)나 읊으면서 나라의 소명(召命)에 응하지 않다가, 안서 장군(安西將軍)을 거쳐 도독 서연청 3주 군사(都督徐兗靑三州軍事)가 되었으며, 명제의 유조(遺詔)를 받들어 5세였던 유주(幼主) 성제(成帝)를 보좌하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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