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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레니엄
테트라포드에서 울진항으로 불어오는 세찬바람은 그냥 불어오는 낯익은 계절풍이 아니었다. 예삿바람이 아니었다.
한 세기가 바뀌는 바람이었다.
2000년.
2000년을 실어 온 바람이었다.
2000년은 울진항 테트라포드에서 불어 온 바람 때문에 울진항에서 제일 먼저 시작됐다. 아니, 유기오울진종합수산센터에서 2000년이 시작된 것이다.
대망의 밀레니엄 여섯 번째 날.
2000년1월6일.
성탄캐럴이 아직도 곳곳에 쌓인 눈길에 묻어 있는 울진항. 유기오울진종합수산센타의 8층 전면유리창에 동백보다 더 붉은 대망의 밀레니엄 일출이 한 폭의 장엄한 수채화를 연상시킨 지 꼭 여섯째 되는 날.
유기오울진종합수산센타는 이른 새벽부터 5일간의 특별휴가를 끝내고 70여명의 직원이 정신없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밀레니엄 특별휴가 5일 동안 인터넷과 오프라인과 팩스로 들어 온 오더를 정리하는 영업팀과 천금 같은 휴가를 반납하고 휴가기간 내내 입하된 활어와 생물을 분류해 온 물류팀. 그리고 배송라인을 기획하는 배송팀이 제일 바빴다. 엘리베이터를 한꺼번에 이용하지 못해 성질 급한 직원은 8층까지 계단을 오르락내리락 뛰어다녔다.
유기오종합수산이 5일이나 특별휴가를 준 것은 년 말까지 3개월간 단 하루도 쉬지 못했고, 유기오수산센터의 최신장비 AT625와 TW625 덕분이었다. 자동온도 및 산소공급장치인 AT625와 전천후배송라인 TW625가 있는 유기오울진수산센터는 폐쇄회로를 통해 24시간 모든 상황을 원거리 체크할 수 있었고 무인감시가 가능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요건이 있었다. 유기오수산과 거래하는 모든 국내거래업체는 유기오울진수산센터가 미리 대비한 프로그램에 따라 5일간 휴가에도 전혀 영업지장을 받지 않았지만, 만약 영업지장을 초래했다하더라도 유기오울진수산의 거래방침에 따라야 하는 것이 실정이었다. 어떻게 보면 거대한 갑질甲의 우선권일 수 있지만 유기오수산과 거래하는 한, 이 시스템은 변할 수 없는 구조였다. 이런 점 때문에 박성기회장은 과감하게 5일간의 긴 연휴를 전 직원에게 내린 것이다.
5일간의 특별휴가기간 중 유기오수산센터에 오더만 쌓인 것은 아니다. 미미한 사건이 하나 있었다.
휴가동안 박성기회장은 그동안 마음 놓고 읽지 못했던 만화 수십 시리즈를 읽고 독서후유증인 각막염에 시달리며 출근했다. 여직원이 수북한 결재서류를 가져왔다.
결재서류의 맨 끝에 하얀 봉투가 첨부되어 있었다. 여직원에게 물었다.
“뭐죠?”
“번개아저씨가 주고 간 거에요.”
“뭐야? 아직도 번개를 아저씨라고 불러요? 과장된 지가 언젠데?”
“일주일 밖에 더 됐어요?”
“일주일이면 지구를 24바퀴 돈다. 신세대가 그 모양이야?”
“사장님은 구세대에요?”
“아. 제발 말꼬리 좀 물지마요. 요꼬같애.”
요꼬는 일본만화 등장인물의 소설애명이다.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가와바타 야스니리 원작의 설국雪國을 만화로 재 수성하면서 요꼬를 말 많은 여성으로 등장시켰는데 원작에서는 스승의 치료를 위해 간호사 공부를 하는 여성이고 게이샤인 주인공 고마코와 동질감을 가진 의협의 여자다.
여직원이 눈이 휘둥그래졌다.
“사장님도 그 소설 읽었어요?”
“설국 안 읽은 사람 어디 있어요? 촌스러운 질문도 다하네?”
여직원이 설국을 읽었다는 박성기회장의 말에 팔팔 뛰었다.
“어머머, 사장님 진짜 멋쟁이다. 그 소설 읽는데 이해하시기 어려웠죠?”
“그 정도가지고 뭘?”
“어머머 어머머. 사장님 진짜 다시 봤어요. 사장님 진짜 진짜 이게에요.”
여직원이 호들갑스럽게 엄지를 치켜세웠다. 박성기회장? 진짜 책읽기 싫어하는 인물이라는 것. 우리 다 아는데 정말 엄청난 거짓말을 박성기회장은 눈도 깜짝 안하고 했다. 만화를 소설로 착각하는 것은 분명 아니었을 텐데. 거짓말이란 양념고추장과 초고추장의 차이도 용납 않던 사람이었는데.
“그래, 번개가 언제 주고 간 거요?”
설국을 읽었다는 박성기회장에게 호들갑 떨던 기분이 아직도 몸에 배어있는 여직원이 촐랑거리며 대답했다.
“망년회날입니다. 새해 출근하시면 사장님 드리라고 그러셨어요.”
박성기회장은 여직원의 말에 문득 지난 망년회를 생각했다. 좌석의 중앙에 앉긴 했지만 꾸어다 놓은 보리자루처럼 궁색하게 앉아 있던 세 사람의 자리에 어느 순간 번개만 혼자앉아 있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 후 경매사와 통발반장은 망년회파티가 끝날 때까지 보이지 않았다.
박성기회장이 여직원에게 짜증 섞인 투로 말했다.
“이런! 이런 건 즉시 보고해야 하잖아요?”
여직원이 볼멘소리로 대답했다.
“그날 사장장님께 드렸지만 사장님이 몹시 술에 취하셔서 받지 않으셨잖아요?”
“내가? 그럼 다음날 전화로 보고해야죠.”
이번엔 골난 표정으로 여직원이 말했다.
“사장님이 전화 안 받으셔 놓고. 휴가기간 내내 전화 꺼 놓셨잖아요.”
“내가?”
여직원의 말처럼 전화를 받지 않은 것은 사실이었다. 만화에 빠져 있었으니까.
“아하. 그랬군요. 신년 구상하느라 전화 꺼 놓았어요. 그건 내 실수가 맞아요.”
결재 후 여직원을 내보내고 봉투를 뜯었다.
붉은 줄이 사방으로 쳐진 봉투 속에 글자들이 비틀거리는 편지 한 장이 있었다.
사장님 그라고 유기오수산센타 여러분
2천년 새해 복 마니 바드시고 무궁한 발전 기원합니더.
그동안 탈도 많고 정도 많았던 유기오수산을 오늘부터 떠나기로 했심니더.
인자부터 우리들은 우리들 자리로 물러감니더.
사람이 살아가는데 언덕배기가 있어야 비비는 법인데 요리조리 아무리 생각해도 비빌 언덕이 사라진거 갖심니더
코끼리도 죽을 때가 되몬 지 죽을 자리 차자 간다카던데 사람이 떠날 때를 알아야한다 아입니꺼.
그래서 유기오를 떠나기로 결심했심니더.
그기 유기오울진종합수산의 미래를 위해 보탬이 되는 거시라 판단했심니더.
그래도 항상 마음은 유기오수산에 두고 가이께 너무 심려마이소.
그럼 이만 줄입니데이.
경매사하고 통발반장이 동시에 올림.
아참 그라고 하모호선장님 한번 찾아 가보이소.
오늘 내일한다 카데예.
1999년12월31일.
물론 모두 본명으로 서명한 사표였다. 박성기회장은 잠시 생각에 젖었다. 지난 일들이 전광석화보다 더 빠르게 스치고 지나갔다. 새벽경매현장. 머하노식당. 파도. 통발에 올라오는 대게. 천둥비바람 그리고 번개. 폭풍우속에 뛰어들던 자신의 모습. 돗돔파티.
박성기회장은 멀티시스템의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급하게 다이얼을 돌리기 시작했다. ‘뚜우’ 하고 신호가 가기 전에 수화기를 다시 제자리에 올려놓았다. 눈을 감았다. 울진항 전경을 내려다 봤다. 오랫동안 출어하지 못한 하모호가 어선들 속에 묶여 있었다.
박성기회장은 그렇게 한참 하모호와 울진항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한참 후 인터폰으로 여직원을 불렀다. 여직원을 쳐다보지도 않고 봉투를 여직원 앞으로 던지듯 밀었다.
“이거 기안 작성해서 전결하세요.”
“누가 전결해야 하죠?”
“아무나 해요.”
봉투를 받자 심통한 표정으로 돌아서서 혀를 내밀며 여직원이 사장실을 나갔지만 박성기회장은 하모호를 내려다보기만 했다. 멀리서 봐도 한동안 손보지 않아 하모호는 무척 지쳐 보였다.
유기오종합수산은 하루 종일 눈코 뜰 새 없었다. 밀린 업무를 어느 정도 정리했을 때였다. 밀레니엄이사가 노크도 없이 들어 왔다. 신임중역인 채장수이사를 밀레니엄이사라고 부르는 이유는 외국어에 능하기 때문이고 2000년1월1일자로 발령했기 때문이다.
7층에서 뛰어 올라 온 밀레니엄이사가 헐떡거리는 호흡을 가누지 못하고 말했다.
“사장님. 큰일났습니다.”
박성기회장이 의아한 표정으로 밀레니엄 이사를 쳐다봤다.
“왜 또 지진이랍니까?”
지난 연말부터 삼일간격으로 일본에서 심심찮게 크고 작은 지진이 일어나고 있었다. 일본지진으로 우리나라는 별다른 피해가 없지만 일본은 상당한 곤경에 처했다는 뉴스가 새해벽두부터 연일 계속되고 있었다. 1월1일과 1월3일엔 강도7.8의 지진이 두 차례나 있었고 지진여파로 해일이 일어나 피해가 막심하다는 속보도 나오고 있었다. 두 지진 모두 일본지바와 이바라키 동해 쪽에서 일어난 지진이라 사할린이나 오츠크해로 출어하는 선박은 세심한 주의를 요한다는 방송을 귀가 따갑게 재방하고 있었다.
그래서 일본에서 3년이나 살았던 밀레니엄이사를 두고 박성기회장이 지진이냐고 물었던 것이다.
박성기회장의 물음에 동문서답하듯 밀레니엄 이사가 말했다. 전혀 뜻밖의 말은 아니었다. 자주 듣는 말이었다.
“오다발주가 너무 커서요. 이걸 어떻게 처리하죠?”
밀레니엄이사가 내민 복사본은 유기오수산 개업 이래, 아니 유기오울진종합수산센타 창업 이래 최대의 오더페이퍼였다.
박성기회장이 긴 오더페이퍼를 다 체크하는데 20여분의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박성기회장이 밀레니엄이사에게 밝은 얼굴로 그리고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말했다.
“2000년은 우리 유기오를 위해 시작된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이사님.”
밀레니엄이사는 박성기회장의 질문에 맞장구치는 대신 겁먹은 표정으로 간신히 대답했다.
“이걸 다 무슨 수로 처리하죠?”
박성기회장이 빙긋 웃었다.
“사람과 짐승의 차이는 무엇인지 아십니까?”
말귀를 못 알아들어 머쓱해진 밀레니엄이사에게 박성기회장이 강한 어조로 말했다.
“짐승은 배가 부르면 먹지 않지만 사람은 생기는 대로 다 챙깁니다. 한 번에 다 못 먹은 건 냉장고에 보관하니까요. 하하하.”
그리고 다시 꼭 3년이 흘렀다.
2003년1월6일.

첫댓글 박성기 회장이 이제 완전히 성공 하였군요..
하모호 선원들과 인연도 끊어지는것 너무 아쉽슴니다.
그러게요..허지만 사업가는 사업이 우선이니까...뭐라 할 수 없습니다.
고운밤되세요
유기오 울진종합 수산쎈타가 새로운 운영진들로 본격적인 출발
새로운 기계씨스템으로 첨단 물류쎈타 시설을 갖춘 회사로 변모 되어가.
대성공하는 모습에서 많은걸 배우게 합니다. 잘읽었슴니다
젠틀맨님 사업이 더 좋은 겁니다
자연사업이니까요...고운 밤되시구요
사업구상 할라 만화볼라 바쁜 박성기
그래도 사업은 번창하고 독자의 한사람도 신바람 나네요...
만화 한번 빠지면 정신 없더군요...ㅎ
유기오 문류쎈타가 이제 명실공히 큰회사로 변모 되어 버렸군요..
직원이 70명이나되고 울진항에서 잘나가는 박회장 앞으로 많은 관심사가 아닐수없슴니다.
잘돼야겠죠...계속 지켜 봐주세요
근데요..오늘은 왜 이리 피곤하죠? 졸리고...ㅋ
성공도 할려면 박성기처럼 해야하겠슴니다.
8층 삘딩 이 되기까지 풍랑으로 죽을고비 넘기고 하루아침에 이루진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그래도 오늘날의 유기오 눈부시게 발전 한것은 그만은 노력이 있었겠죠~~
큰 사업 좋은 것만 아닙니다. 떡잎은 떡잎 일 때가 제일 예쁜 법이니까요
고운밤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