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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2월 12일 대림 제2주간 목요일
제1독서 : 이사 41,13-20
복 음 : 마태 11,11-15
그때에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말씀하셨다.
11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하늘 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
12 세례자 요한 때부터 지금까지 하늘 나라는 폭행을 당하고 있다.
폭력을 쓰는 자들이 하늘 나라를 빼앗으려고 한다.
13 모든 예언서와 율법은 요한에 이르기까지 예언하였다.
14 너희가 그것을 받아들이고자 한다면, 요한이 바로 오기로 되어 있는 엘리야다.
15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
<오늘의 묵상>
김재덕 베드로 신부
유배 중이던 이스라엘에게 하느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 주님이 너의 하느님, 내가 네 오른손을 붙잡아 주고 있다. ……
두려워하지 마라, 벌레 같은 야곱아, 구더기 같은 이스라엘아!
내가 너를 도와주리라.
주님의 말씀이다. 이스라엘의 거룩한 분이 너의 구원자이다.”(이사 41,13-14)
여기서 ‘벌레’와 ‘구더기’는 비참함과 경멸을 뜻합니다.(시편 22[21],7 참조)
이스라엘이 유배로 벌레와 구더기처럼 비천하고 경멸당하는 대상이 되었더라도,
하느님께서는 ‘오른손’을 붙잡고 계십니다.
여전히 그들을 잊으시지 않고, 포기하시지도 않으며,
오히려 구원으로 이끄시고자 합니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께서 오시기 전에 광야에서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마르 1,4)를 선포하였습니다.
그리고 그가 증언한 예수님께서는
“사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태 9,13)라고 말씀하시며,
하느님께서 죄인들을 구원하시기를 바라고 계시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죄로 내 처지가 벌레나 구더기와 같아도 여전히 나를 사랑하시는
그분의 사랑은 단 한 순간도 멈추지 않았음을
당신 십자가 죽음과 부활로 증명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저와 여러분,
나아가 모든 죄인에게도 이 사랑을 멈추지 않습니다.
만일 예수님의 이 사랑이 ‘나에게만’ 이루어지고
내가 싫어하는 사람들과 미워하는 사람들에게는 이루어지지 않기를 바란다면,
우리도 하느님 나라를 폭력으로 빼앗으려는 사람이 되고 말 것입니다.
“폭력을 쓰는 자들이 하늘 나라를 빼앗으려 한다.”(11,12) 아멘.
조명연 마태오 신부
러시아 민화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운 좋게 마술램프를 발견한 농부가 있었습니다.
램프를 문지르자, 램프 속에서 ‘지니’가 나타나서
자기를 이 램프에서 구해줬으니, 농부의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말합니다.
농부는 말했습니다.
“옆집에 젖소가 있는데 온 가족을 다 먹이고도 남을 만큼 우유를 생산했어요.
옆집 사람들은 남은 우유를 팔아 큰 부자가 되었죠.”
농부 이야기를 듣던 ‘지니’가
“그러면 우유가 잘 나오는 젖소를 구해드릴까요?”라고 물었습니다.
이때 농부는 어떻게 말했을까요? 그는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아니, 옆집 젖소를 죽여주세요.”
‘부러우면 지는 것이다’라는 말도 있습니다.
따라서 부러워하지 말아야 하는데, 부러워하고
그래서 그 사람처럼 되기 위해 노력합니다.
그런데 자기 능력의 부족으로 그 사람처럼 되지 못하면,
앞의 이야기에 나오는 농부처럼 그 사람이 망하길 바랍니다.
질투와 시기는 모두가 망하는 길입니다. 상대의 망함을 떠나 나부터 망하게 됩니다.
따라서 그 사람처럼 되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습니다.
자기의 고유함을 간직하면서 사는 노력만이 필요할 뿐입니다.
이 고유함을 간직하는 사람은 질투와 시기에서 벗어나, 자기 안에서 만족하며 살 수 있습니다.
진정한 겸손의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예수님을 준비한 세례자 요한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인정하시듯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없었습니다.
실제로 그는 사람들에게 엄청난 인기를 얻고 있었기에,
많은 이가 세례자 요한의 제자가 되고자 했습니다.
사제인 즈카르야의 아들로 편하고 안락한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광야로 향했고, 그곳에서 낙타털 옷을 입고
메뚜기와 들 꿀을 먹으면서 회개의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당신은 누구요?”라는 사람의 질문에 “나는 그리스도이다.”라고 말해도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정도의 위치였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오실 주님을 준비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면서 겸손의 모습을 보입니다.
자기를 높이는 삶이 아닌, 자신의 고유함이라 할 수 있는
주님을 높이는 삶을 철저하게 살아갑니다.
세례자 요한이 큰 인물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자기 고유함인 주님 높이는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보였던 겸손을 본받아,
자기보다 주님을 높이는 삶을 사는데 자기 고유함을 발휘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에 인정받는 것이 아닌 주님께 인정받아야 합니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하늘나라에서는 가장 작은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마태 11,11)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이는 어마어마한 사실을 말해줍니다.
세례자 요한의 전과 후에 획을 긋는 획기적인 사실을 말해줍니다.
곧 예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은총’,
곧 ‘하늘나라’는 구약의 시대와는 본질적인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렇습니다.
요한은 메시아가 오리라는 것을 선포했을 뿐만 아니라, 이미 와 계심을 알렸습니다.
그러니 하늘나라는 이미 그분과 함께 온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이제 당신의 도래와 더불어 시작되는
‘새로운 질서’, ‘하늘나라의 질서’를 선포하십니다.
그러니 누가 더 큰 사람인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다스리는 ‘새 시대’, 곧 ‘하늘나라’에 속해 있는지가 중요합니다.
그렇지만,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 빛이 세상에 왔고,
그분께서 세상에 계셨지만, 세상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분께서 당신 땅에 오셨지만, 그분의 백성은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았습니다.'(요한 1,9-11)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하늘나라는 폭행을 당하고 있다.
폭력을 쓰는 자들이 하늘 나라를 빼앗으려고 한다.”(마태 11,12)
사실 오늘날도 마찬가지의 모습입니다.
‘하늘 나라’는 거부되고 배척되기만 한 것이 아니라,
불의와 거짓과 미움으로 폭행당하고 박해당하고,
또한 물질의 나라가 권세를 부리며 ‘하늘나라’를 침략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믿음의 귀’를 지닌 우리는 이를 알아들어야 할 일입니다.
사실 “요한이 바로 오기로 되어있는 엘리야다.”(마태 11,14)라는 말씀은
곧 당신의 나라가 오심을 알려줍니다.
왜냐하면 요한이 미리 오기로 된 엘리야라면(말라 3,23; 집회 4-10 참조),
당신이 바로 ‘오시기로 된 구세주’심을 선포해 주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 가운데 와 있는 ‘하늘 나라’를 폭행해서는 안 될 일입니다.
또한 방치하거나 빼앗겨서도 안 될 일입니다.
그 나라는 ‘정의’와 ‘평화’와 ‘기쁨’의 나라입니다.
한갓 ‘계엄’이라는 이름으로 빼앗겨질 수 없는 나라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더 깊은 곳으로 이끄십니다.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마태 11,15).
“들어라”는 말씀은 ‘쉐마 이스라엘’을 떠올려 줍니다.
곧 ‘들어라’는 히브리 단어 ‘쉐마’는 단순히 청각을 통해 무엇인가를 알아듣는 것보다,
‘마음의 귀에 담아 행동에 옮긴다.’라는 의미를 지닌다고 합니다.
그것은 ‘말씀을 하신 분을 마음에 담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예수님을 ‘마음의 귀에 담아’,
그분의 말씀을 삶에 옮길 수 있도록 은총을 청했으면 좋겠습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하늘 나라는 폭행을 당하고 있다.”(마태 11,12)
주님!
기쁨과 정의와 평화의 당신의 나라가
불의와 거짓과 미움으로 폭행당하지 않게 하소서.
우상과 물질의 나라가 권세를 부리며 당신의 나라를 침략하지 못하게 하소서.
더 이상은 당신의 다스림을 외면하거나 방치하지 않게 하소서.
저희 안에 와 계신 당신을 거부하지도 배척하지도 않게 하소서.
세상이 당신의 다스림과 뜻이 이루어지는 공간이요 장소가 되게 하소서.
당신의 나라가 되게 하소서. 아멘.
우리는 참으로 위대합니다.
반영억 라파엘 신부
세례자 요한을 구약시대의 마지막 인물로 얘기합니다.
요한은 메시아의 길을 준비하는 그의 임무에 있어서
위대한 인물일 뿐 아니라 인간으로서도 위대한 인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여자의 몸에서 태어난 사람 중에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없었다.”(마태11,11)고 선언하였습니다.
당대의 누구보다도 뛰어난 사람, 과거에 있었던
수많은 하느님의 사람보다 더 뛰어난 인물로 요한을 칭찬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늘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마태11,11). 하십니다.
이 말씀은 결국, 요한은 이미 앞으로 일어날 일을 말하며 새로운 시대를 살기 시작하였지만,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새 시대가 성취되고 완성되어
거기에 속한 사람은 은총 속에 구원된다는 말씀으로 예수님을 통하여
구원의 은혜를 입은 신약의 사람들은 아무리 별 볼 일 없어 보이는 사람이라도,
구약의 어떠한 위대한 예언자보다 더 높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구원의 은혜가 그만큼 크다는 말씀입니다.
나같이 부족한 사람이 구약의 위대한 예언자보다도 더 크다니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다 예수님의 덕분입니다. 주님께 감사드릴 뿐입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참으로 위대합니다. 이미 구원을 받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메시아가 오실 것을 예언하면서 이미 미래를 준비한 인물이기에
구약의 마지막 인물이기도 하지만 새 시대의 인물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세례자 요한 때부터 지금까지 하늘나라는 폭행을 당하고 있다.
폭력을 쓰는 자들이 하늘나라를 빼앗으려고 한다”(마태11,12). 하신 것을 보면
세례자 요한 때부터 이미 하느님의 나라가 현존하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세례자 요한은 진리를 외치다가 감옥에 들어가게 되었고 목이 베어졌습니다.
폭행을 당하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도 마귀들의 힘을 빌려 일한다고 비난을 받기도 하였으며
사람들은 언덕 위에서 밀어 떨어뜨려 죽이려 하였으며 적대자들의 공격을 받아야 했습니다.
요한과 예수님께서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선포하였고,
예수님께서 하늘이었지만, 결국은 처참한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바로 이러한 사실들이 하느님 나라가 폭행을 당한 모습입니다.
우리 삶의 자리에서 드러나는 제 욕심과 탐욕, 기득권의 유지를 위해
이웃을 단죄하고 심판하는 것이 하늘나라를 폭행하는 일입니다.
유혹 사화를 보면 사탄은 모든 것을 노립니다.
빵으로, 명예로, 부귀영화를 주겠다는 정치적인 유혹으로
적대자들의 뒤에 숨어서 하느님의 통치권을 빼앗으려 하며
그 자리에 자신의 권력을 구축하려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어둠의 세력은 오늘도 여전히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권력의 횡포를 겪고 있습니다.
생명의 존엄과 인격을 우습게 여기는 욕망을 봅니다.
성을 상품화하고, 물질만능주의의 노예가 되도록 만드는 세상입니다.
진리를 추구하기보다는 개인의 이익을 위해서
거짓을 합리화하는 권력에 물들어가고 있습니다.
재물 때문에, 명예 때문에 불의를 선택하기도 합니다.
술과 도박 때문에 패가망신하고 권력에 집착하다가
제명대로 못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정의를 부르짖으며 사랑을 놓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요?
주먹질이나 욕설만이 폭력이 아니랍니다.
정말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하는 세상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세상의 빛이 되어야 합니다.
하느님 나라를 방해하는 세력의 유혹에 결코 넘어가서는 안 됩니다.
아무리 폭력의 힘이 크다 하더라도
“예” 할 것은 “예”하고, “아니오”할 것은“아니오”라고
분명하게 대답함으로써 하늘나라를 지켜야 합니다.
잘 지키기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너희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요한15,5). 하셨기 때문입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사제관에서 사용하던 노트북은 배터리가 부풀어 올라서 고장났습니다.
컴퓨터를 잘 아는 형제님이 노트북을 가져가서 업그레이드를 시켜 주었습니다.
배터리도 새로 바꾸었고, 메모리 용량도 늘렸습니다.
한글 프로그램도 최신 걸로 바꾸어 주었습니다.
10년 된 노트북이 새것으로 바뀌었습니다.
여행 갈 때 사용하던 노트북은 인터넷이 안 되었습니다.
이번에도 컴퓨터를 잘 아는 형제님이 노트북을 가져가서
인터넷이 될 수 있도록 업그레이드를 시켜 주었습니다.
다만 인터넷이 될 수 있도록 커넥터를 끼워야 했습니다.
그래도 문제가 있던 노트북들이 다시 사용할 수 있게 되어서 감사할 일입니다.
저의 사정을 아는 형제님이 새로운 노트북을 마련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습니다.
2024년 신형 노트북입니다.
아무리 업그레이드를 시켰어도 2024년 신형 노트북의 기능과 성능을 따라갈 수 없었습니다.
제가 노트북을 강론 쓰고, 인터넷 검색하는 용도로 쓰기에
새로운 노트북의 기능을 제대로 활용하지는 못합니다.
서울에서 온 동창 신부님이 제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벤츠 타고 마트만 다니면 벤츠가 아까운 거 아닌가!’
이참에 새로운 노트북의 기능과 성능도 배워보려고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
세례자 요한은 구약의 마지막 예언자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의 길을 미리 준비한 예언자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을 알아본 예언자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저분은 점점 커지셔야 하고, 나는 점점 작아져야 합니다.
저기 하느님의 어린양이 가십니다.
나는 저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르는 걸 기꺼이 허락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나라에서는 아주 작은 이라도 세례자 요한보다 크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물 안에 있는 개구리’라는 말이 있습니다.
개구리에게는 우물이 세상의 전부였지만, 사실 우물밖에는 엄청난 세상이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지구가 세상의 전부이지만 지구는 태양계의 부분입니다.
우주는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크고 넓습니다.
저도 예수님의 말씀을 실감한 적이 있습니다.
중학생 때 제법 공부를 했습니다. 하지만 고등학교에 오니 상황이 달랐습니다.
저보다 잘하는 학생이 많았습니다. 공부는 외우면 되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공부는 이해할 줄 알아야 하는 거였습니다.
나보다 부족한 사람이 있다면 손을 내미는 따뜻함이 있어야 합니다.
나보다 뛰어난 사람이 있다면 인정하는 겸손함이 있어야 합니다.
한문으로 ‘宗敎’라는 말은 으뜸가는 가르침을 뜻합니다.
영어로 'Religion' 엉켜 있는 실타래를 풀어서 다시 쓸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과 사람과의 관계가 엉켜 있다면
다시 풀어서 하느님과 소통할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인간과 인간의 관계가 엉켜 있다면 이 또한 풀어서 평화를 이루도록 하는 것입니다.
으뜸가는 가르침의 핵심은 ‘비움’입니다.
내가 집착에서 벗어날 때, 참된 평화와 깨달음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과 인간 그리고 인간과 인간의 엉킨 실타래는 무엇으로 풀 수 있을까요?
이 또한 비움입니다. 내려놓음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신 것입니다.
인간의 비움은 ‘회개’와 ‘회심’으로 나타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하늘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
하늘나라는 상대평가가 아닙니다.
그래서 성적을 정하고, 순위를 정해서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하늘나라는 절대평가입니다. 얼마나 하느님을 향한 열정이 있느냐를 생각합니다.
얼마나 양심을 따라서 살았느냐를 생각합니다.
얼마나 이웃을 위해서 헌신하였느냐를 생각합니다.
그러기에 하느님 나라는 정원 제한이 없습니다.
그러기에 누구나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나 들어가는 곳은 아닙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세례자 요한 때부터 지금까지 하늘나라는 폭행을 당하고 있다.
폭력을 쓰는 자들이 하늘나라를 빼앗으려고 한다.”
우리가 하느님 나라를, 순위를 정해서 시험을 치르듯이
들어갈 수 있는 곳으로 만들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경쟁과 업적으로 들어가는 곳이 아닙니다.
하느님 나라는 협력과 나눔을 실천한다면,
사람과 봉사할 수 있다면 누구나 들어갈 수 있는 곳입니다.
여자의 몸에서 태어난 사람 중에
조욱현 토마 신부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11절)
예수께서는 구원사에서 요한의 위치는 매우 중요하다고 하신다.
구약에 예언된 엘리야가 바로 세례자 요한이라고 선언하신다.
구세주의 길을 준비하는 위치란 다시 있을 수 없는 위치이며
요한에게 주어진 특권이기도 하다.
요한 세례자는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가장 큰 인물이다.
“그러나 하늘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11절)
성령이 충만한 곳에서는 성령을 아주 조금 나누어 받은 사람이라도
죽음에 떨어지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하느님과 함께 있는 모든 사람은 하늘나라를 아직 기대하며 싸움터에 있는 이보다 더 크다.
하늘에서 하느님을 섬기는 가장 나중에 성인이 된 사람도
여전히 지상에서 하늘나라를 희망하며 사는 가장 훌륭한 이보다 더 크다는 말이다.
“하늘나라는 폭행을 당하고 있다.”(12절)
하늘나라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사람들은 세례자 요한을 믿지 않았으며,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들도 하찮게 여겼다.
그분의 백성들은 그분을 비난하고, 그들의 적들은 그분을 감싸 주었다.
자녀가 되는 권한이 상속으로 주어졌지만, 가족이 그것을 거부하였다.
아들들은 아버지의 유언을 받들기를 거부하고, 집안의 종들이 그것을 받았다.
이것이 폭행을 당했다는 말이다.
성조들이 이스라엘에 약속하고, 예언자들이 예고하고, 그리스도께서 주신 영광이
이제 믿음으로 다른 민족들에게 넘어가 그들의 차지가 되었다.
예수께서는 요한을 엘리야라 하셨다. 그가 엘리야의 힘과 영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가브리엘 천사도 요한에 대해 같은 말을 했다.
“그는 또 엘리야의 영과 힘을 지니고 그분보다 먼저 와서”(루카 1,17)라는 말은,
요한이 비록 사람의 모습에서는 엘리야와 달랐지만 바로 엘리야임을 알려준다.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에 앞서 그 길을 마련하러 왔고, 그 사명을 다하였으며,
예수께서 사랑과 봉사로 하늘나라를 선포하셨다면, 우리의 자세도 그러해야 할 것이다.
우리의 자세는 사랑과 봉사의 원리에서 길을 발견하는 것이어야 한다.
큰 사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
오늘 주님께서 세례자 요한을 언급하며 큰 인물에 대해 말씀하시니
오늘은 큰 사람은 어떤 사람인지에 관해 한번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큰 인물 하면 꿈과 비전이 큰 사람,
포용력이 있고 마음이 넓은 사람,
소탐대실하지 않는 사람 곧 작은 이익을 탐하다
큰 것을 잃지 않고 대의를 쫓는 사람 등이 당장 떠오릅니다.
그런가 하면 자신을 굽힐 줄 아는 사람,
자신을 낮추고 다른 사람을 높여줄 수 있는 사람,
공동선이나 이웃 사랑을 위해 손해 볼 줄도 아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데
주님께서 가장 큰 인물이라고 칭송한 세례자 요한이 바로 이런 사람이지요.
그런데 오늘 주님께서 가장 큰 인물이라고 한 맥락은 좀 다릅니다.
오늘 복음에서 하늘나라는 세례자 요한 때부터 지금까지 폭행당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오늘 독서는
“두려워하지 마라, 벌레 같은 야곱아, 구더기 같은 이스라엘아!
내가 너를 도와주리라.”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이 둘을 연결하면 큰 사람은 이런 사람이 되겠습니다.
거대한 권력의 횡포에도 두려워하거나 졸아들지 않고,
담대하게 하느님 나라의 정의를 선포하는 사람입니다.
세상의 큰 권력 앞에서 두려워 떨지 않는 사람이 큰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요한처럼 하느님의 사람이기에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느님의 사람이 큰 사람입니다.
그래서 오늘 주님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늘 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
하느님의 사람은 이 세상일에 일희일비하지 않고 초연하고,
무엇보다 하느님의 큰 사랑을 지녔기에 두려워하지 않으며,
힘 있는 사람과 힘없는 사람을 구별치 않고 똑같이 대하고,
하느님의 큰 사랑으로 모두를 사랑하는 사람임을 묵상하는 오늘 우리입니다.
하늘 나라는 자기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자의 것
전삼용 요셉 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세례자 요한을 칭찬하시며
여자의 몸에서 세례자 요한보다 큰 사람은 나지 않았다고 하십니다.
그러면서도 하늘 나라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라도 그보다는 크다고 하십니다.
이는 인간에게서만 태어난 존재는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음을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물과 성령으로 새로 나야 하고 성령은 하느님의 살과 피임을 압니다.
이후 좀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을 하십니다.
“세례자 요한 때부터 지금까지 하늘 나라는 폭행을 당하고 있다.
폭력을 쓰는 자들이 하늘 나라를 빼앗으려고 한다.”
여기서 폭행이나 폭력은 긍정적인 의미일까요, 부정적인 의미일까요? 직역하면 이렇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하늘 나라는 폭행을 당하고 있다.
그리고 폭력을 쓰는 자들이 하늘 나라를 쟁취하고 있다.”
저는 전에 하늘 나라는 예수님 자신을 의미하고
유대 지도자들이 그분에게 폭력을 행사했다는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폭력’은 분명 하늘 나라를 쟁취하는 도구로서
부정적 의미로 쓰인 것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교부들의 해석을 읽어보니 대부분은 세례자 요한처럼
자기 자신을 ‘폭력적으로’ 낮추고 버리는 이들이 하늘 나라를 쟁취한다고 해석하고 있었습니다.
이젠 조금 다른 방식으로 접근해 보려고 합니다.
하늘 나라는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한다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혹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령으로 얻는 사랑과 기쁨과 평화입니다.
이를 위해 폭력을 쓰게 하는 자가 세례자 요한입니다.
사실 어린이들은 아버지에게 폭력을 가하며 평화를 얻습니다.
이를 어머니에게서 배웁니다. 어머니는 세례자 요한과 같습니다.
구약에서 레베카 어머니는 야곱에게 에사우의 장자권을 강탈하게 하였습니다.
이것은 폭력입니다. 겨우 불콩죽으로 말입니다.
이것을 가르치는 분이 어머니이고 교회이고 세례자 요한입니다.
인간은 그리스도께 폭력을 가하지 않고는 자녀의 지위를 얻을 수 없습니다.
자녀만이 아버지에게 이러한 종류의 폭력을 가할 수 있는 것입니다.
[김창옥쇼리부트] ‘아빠, 그동안 어찌 그렇게 사셨어요?’란 프로그램은
조금은 아빠를 고발하면서도 아빠의 마음을 뒤늦게나마 이해하게 되는 내용이었습니다.
‘34년 만에 철든(?) 남편’에서 결혼 34년 차 아내가 남편에 대한 불만을 이렇게 터뜨립니다.
“남편이 전화를 받으러 간 사이 두 아이를 다 자연분만으로 낳았고
친정의 도움을 받아 가며 아이들을 키웠습니다.
아이들이 한창 자랄 무렵 ‘아이가 왜 날 보면 우는 겨~?’ 그 말에
저는 ‘모르는 아저씨라 우는 겨~.’ 했습니다.
이 아이들이 성장하여 큰딸이 34살, 아들이 32살이 되었는데
딸이 결혼해 손녀를 낳고서야 자신이 아이들에게 얼마나 소홀했는지
남편 스스로가 느끼고 있습니다.
손녀가 예쁘긴 예쁜지 카톡 프로필에 사진 올리고 모임에서 자랑까지 합니다.
남편은 30년 전에는 왜 이 기쁨을 몰랐을까요?”
남편은 지금 와서 매우 미안해하면서 아내가
‘골반’이 좋아서 잠깐 전화 받고 오면 아기가 태어나 있더라는 식으로 말합니다.
사람들은 다 어이없어합니다.
미안하다고 하면 될 것을 골반 이야기만 하는 것입니다.
이때 김창옥 씨가 말합니다.
당시 남편이 15세에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소년 가장이 되었습니다.
어머니와 함께 돌봐야 할 동생이 다섯 이나 되었습니다.
거기다가 어머니까지 부양해야 했습니다.
분명 그때 걸려 왔던 전화는 일에 관한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다섯 동생과 어머니, 아내, 두 자녀의 가장으로서
당시는 죽으라면 죽으라는 시늉을 할 정도로 돈을 벌어야 했을 때입니다.
그런데 이제 은퇴하고 손주가 태어날 때쯤엔
아내는 ‘내가 필요할 때 없었던 남편’, 자녀들은 ‘우리가 자랄 때 없었던 아빠’가 되어있습니다.
아빠는 아내와 자녀들을 위해 돈을 벌어야 했던 것은
너무 당연하기에 그것을 주장할 수 없어 그저 미안하기만 합니다.
어쩌면 아이들도 엄마를 따라 아빠에게 폭행하는 게 아닐까요?
아이들의 설문 조사에서 자신에게 고민이 생기면 먼저 이야기를 나눌 사람으로
‘1. 엄마, 2. 형제, 3. 친구, 4. 선생님, 5. 아빠’라고 적습니다.
아빠는 자녀가 자신에게 제일 먼저 이야기할 것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50%이지만,
실제로 아이들의 4%만이 아버지를 대화 상대로 여겼습니다.
아이들은 아버지가 해 주는 것만큼
아버지에게 고마움을 느끼지 못합니다. 강탈하는 것입니다.
저의 아버지는 비가 오면 일을 가지 않는 직업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럴 때면 어머니는 돈 때문에 걱정을 하셔야 했습니다.
저도 아버지가 일을 나가지 않으면 불안했습니다.
저도 모르게 아버지가 집에 계시면
“오늘은 일 안 가?”라고 물었던 기억이 납니다.
어느 날은 아버지가 서운하셔서 조금 화를 내셨던 것도 기억합니다.
아들인 제가 돈 벌어오는 기계처럼 당신께 폭력을 행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돈은 바로 성령과 같이
저에게 사랑과 기쁨과 평화를 가져다주기 때문입니다.
폭력을 당해주는 분이 계신다는 것이 행복입니다.
어린 양은 구약에서 폭력을 당하였습니다.
그 피가 문설주에 칠해지고 그 살이 그들에 의해 먹혔습니다.
부모는 자녀에게 먹히며 자녀에게 평화를 줍니다.
이것을 아는 자녀들은 가출하지 않습니다.
가출해서 살아봐야 부모에게 폭력을 행사하며 사는 것보다 나아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자녀는 어떻게 해서든 부모에게 폭력을 가해서 부모의 살과 피를 먹고 마셔야 합니다.
그래야 그분이 사는 곳에 살 수 있는 존재로 성장합니다.
이렇게 이해하면 세례자 요한이 왜 ‘엘리야’와 같다고 했는지 이해가 갑니다.
엘리야는 하늘에서 불을 내렸습니다. 그때 바친 제물은 소였습니다.
제단에 바쳐지는 소는 바로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하늘 나라가 폭력을 당한 것입니다.
하느님은 그 아드님을 사르기 위해 성령을 불을 내려주셨습니다.
그 불로 우리가 하늘 나라를 맛보게 되는 것입니다.
자녀는 엄마를 통해 아버지에게 폭력을 행사하여 하늘 나라를 쟁취하는 존재들입니다.
그런 존재일 수 있음을 아는 게 하늘 나라입니다.
아버지에게 돈 벌어오라고 폭력을 행사할 수 있는 존재가 된 것 자체가 바로 행복이란 뜻입니다.
우리는 아버지께 당연히 아드님을 죽여 그 살과 피를 내어달라고 청할 수 있습니다.
이 위치란 얼마나 행복한 위치입니까?
하느님께 이러한 폭력을 쓸 줄 아는 존재만이 하늘 나라의 행복을 차지합니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