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
<그의 이름은 요한이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57-66.80
57 엘리사벳은 해산달이 차서 아들을 낳았다.
58 이웃과 친척들은 주님께서 엘리사벳에게 큰 자비를 베푸셨다는 것을 듣고,
그와 함께 기뻐하였다.
59 여드레째 되는 날, 그들은 아기의 할례식에 갔다가
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아기를 즈카르야라고 부르려 하였다.
60 그러나 아기 어머니는
“안 됩니다. 요한이라고 불러야 합니다.” 하고 말하였다.
61 그들은 “당신의 친척 가운데에는 그런 이름을 가진 이가 없습니다.” 하며,
62 그 아버지에게 아기의 이름을 무엇이라 하겠느냐고 손짓으로 물었다.
63 즈카르야는 글 쓰는 판을 달라고 하여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고 썼다.
그러자 모두 놀라워하였다.
64 그때에 즈카르야는 즉시 입이 열리고 혀가 풀려 말을 하기 시작하면서
하느님을 찬미하였다.
65 그리하여 이웃이 모두 두려움에 휩싸였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이 유다의 온 산악 지방에서 화제가 되었다.
66 소문을 들은 이들은 모두 그것을 마음에 새기며,
“이 아기가 대체 무엇이 될 것인가?” 하고 말하였다.
정녕 주님의 손길이 그를 보살피고 계셨던 것이다.
80 아기는 자라면서 정신도 굳세어졌다.
그리고 그는 이스라엘 백성 앞에 나타날 때까지 광야에서 살았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의 복음묵상
루카 1,57-66.80
수도자들의 모델이요 이정표 세례자 요한!
좀 의아스럽게 느껴질지 모르겠지만 성인(聖人)들에게도 등급이 있습니다.
어떤 성인은 대성인(大聖人)으로 분류되어 교회 전례 안에서 대축일로 경축합니다. 축일을 앞두고 9일기도까지 바칩니다.
그러나 어떤 성인은 전례 안에서 이름만 기억할 정도입니다.
보통 성인들은 세상을 떠나신 날, 다시 말해서 하늘나라에 입국하신 날을 축일로 정해 한번만 기억합니다.
그러나 어떤 성인은 여러 번에 걸쳐 축일을 경축합니다.
성모님이나 수제자 베드로 사도, 바오로 사도, 그리고 오늘 우리가 기억하는 세례자 요한이 그렇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수난과 죽음도 축일로 정해 기억하지만, 오늘같이 그의 탄생도 경축합니다.
그만큼 세례자 요한은 교회 안에서 탁월한 업적을 남긴 대성인이었습니다.
구약과 신약을 연결시키는 다리 역할에 충실했는가 하면,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의 길을 닦는 선구자로서의 역할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복음서에 드러난 세례자 요한의 행적을 통해 우리는 그가 얼마나 예언자로서 충실한 삶을 살았는지 잘 확인할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오로지 주님의 길을 닦는데 온 힘을 다하기 위해 그는 결혼조차 포기하고 홀로 살았습니다.
지극히 겸손했으며 철저히 순명했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세례자 요한은 오시는 주님을 재빠르게 알아보기 위해 늘 깨어 있으려고 노력했습니다.
술이나 산해진미나 세상의 좋은 것들을 철저히 멀리하고 광야 깊숙한 곳에서 극단적 청빈 생활을 해나갔습니다.
오늘날 우리 수도자들의 모델이요 이정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 한 가지 세례자 요한의 삶에서 두드러지는 측면 한 가지가 있습니다.
그는 거대한 불의와 구조적인 악 앞에서 절대 침묵하거나 뒤로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단호하게 예! 라고 할 것은 예! 라고 하고, 아니오! 라고 할 것은 아니오! 라고 말했습니다.
예언자로서의 삶, 말만 들어도 왠지 그럴 듯 해보입니다.
‘있어’보입니다.
‘나도 그렇게 한번 살아봤으면’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멋있어 보입니다.
가는 곳마다 수많은 사람들이 내 예언을 들으려고 몰려 들었겠지요.
모여든 사람들 앞에서 품위 있고 장엄하게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할 것입니다.
사람들의 환호는 하늘을 찌르겠지요. 추종자들은 늘 나를 큰 스승으로 떠받들 것입니다.
그러나 정작 예언자들의 삶은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모습과도 거리가 멀었습니다.
전해야 할 하느님의 말씀에 담긴 ‘진의’(眞意)를 파악하기 위해 밤샘기도를 해야 했습니다.
하느님 말씀의 참전달자로 계속 존재하기 위해 부단히 화려한 도시를 떠났습니다.
황량하고 고독한 광야로 계속 깊이 들어갔습니다.
세례자 요한을 보십시오.
그의 나날은 그야말로 ‘초근목피’의 삶이었습니다. 그의 주식은 날아다니는 메뚜기였습니다.
음료수는 전혀 가공되지 않은 들꿀이었습니다. 그가 걸치고 있었던 의상을2 보면 기가 막혀 말이 안 나올 지경이었습니다.
무슨 원시인입니까? 낙타털옷에 가죽띠입니다.
왜 그렇게 살았을까요? 맑은 정신으로 깨어있기 위해서였습니다.
맑은 정신으로 계속 기도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고결한 영혼을 계속 소유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정확한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온통 만연해 있는 세상의 죄악과 타락 앞에 당당히 맞서기 위해서였습니다.
결국 끝도 없는 자기 비움의 삶, 뼈를 깎는 자기 통제의 연속, 자아 포기, 자기 연마, 자기 부정의 나날이 세례자 요한의 삶이었습니다.
이런 세례자 요한이었기에 죽기까지 하느님의 뜻에 충실할 수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부여하신 사명에 목숨 걸고 헌신할 수 있었습니다.
끝까지 철저한 겸손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복음 묵상글을 옮겨 보내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