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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이상화
지금은 남의 땅 ―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나는 온 몸에 햇살을 받고
㉠푸른 하늘 푸른 들이 맞붙은 곳으로,
가르마같은 논길을 따라 꿈 속을 가듯 걸어만 간다.
입술을 다문 하늘아 들아
내 맘에는 내 혼자 온 것 같지를 않구나!
네가 끌었느냐 누가 부르더냐 답답워라 말을 해다오.
바람은 내 귀에 속삭이며,
한자욱도 섰지 마라 옷자락을 흔들고.
종다리는 울타리 너머 아가씨같이 구름 뒤에서 반갑다 웃네.
고맙게 잘 자란 보리밭아,
간밤 자정이 넘어 내리던 고운 비로
너는 삼단같은 머리털을 감았구나. 내 머리조차 가뿐하다.
혼자라도 가쁘게 나가자.
마른 논을 안고 도는 착한 도랑이 젖먹이 달래는 노래를 하고, 제 혼자 어깨춤만 추고 가네.
나비, 제비야, 깝치지 마라.
맨드라미 들마꽃에도 인사를 해야지.
아주까리 기름 바른 이가 지심 매던 그 들이라도 보고 싶다.
내 손에 호미를 쥐어다오.
살진 젖가슴과 같은 부드러운 이 흙을
발목이 시리도록 밟아도 보고, 좋은 땀조차 흘리고 싶다.
강가에 나온 아이와 같이,
셈도 모르고 끝도 없이 닫는 내 혼아,
무엇을 찾느냐 어디로 가느냐, 웃어웁다, 답을 하려무나.
나는 온 몸에 풋내를 띠고,
푸른 웃음 푸른 설움이 어우러진 사이로,
다리를 절며 하루를 걷는다. 아마도 봄 신명이 지폈나 보다.
그러나 지금은 ― 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기겠네....
< 핵심 정리>
▶ 감상의 초점
이 시는 이상화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이 시를 실은 <개벽>은 곧 폐간(1926)되고 말았다. 1920년대의 암울한 시대에 귀중한 저항시로 남아 있다.
제1,2연과 제9,10연이 서로 대응하는 관계임을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 성격 : 낭만적, 상징적, 저항적
▶ 구성 : ① 조국 상실의 현실(제1연)
② 광복이 된 조국 천지를 상상함(제2연)
③ 조국과의 일체감을 회복하고 싶은 심정(제3연)
④ 국토와의 친화감(제4연)
⑤ 풍요와 성장에의 감사(제5연)
⑥ 봄을 맞이하는 유별난 기쁨(제6연)
⑦ 동포와 일체감을 느끼고 싶음(제7연)
⑧ 국토에 대한 한없는 애착(제8연)
⑨ 현실을 재인식, 자신을 자조함(제9연)
⑩ 조국 상실의 현실 인식(제10연)
▶ 제재 : 국권 상실의 현실과 봄의 들판
▶ 주제 : 국권 상실의 울분과 회복에의 염원㎈
<연구 문제>
1. 이 시가 나의 침실로 등 이상화의 1920년대 초기의 시적 경향과 구별되는 바를 쓰라.
☞ 관능적, 감상적, 낭만적 경향을 극복하고 국권 상실의 현실을 냉정하게 인식한 저항시로 쓴 점이 다르다.
2. 현실 인식에 기초한, 저항적인 의식이 가장 강하게 드러나는 시행을 찾아 쓰라.
☞ ‘그러나 지금은 ― 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기겠네.’
3. ㉠이 상징하는 의미를 쓰라.
☞ 조국 해방의 아득한 지평
4. 현실과 이상의 틈바구니에서 한 지식인이 겪는 아픔을 가장 잘 표현한 두 어절의 말을 찾아 쓰라. ☞ ‘다리를 절며’
<감상의 길잡이>
이상화 시인은 삶의 가치를 부정하는 우울한 낭만주의자로서 출발한다. 3·1운동의 좌절이 가져온 결과였다. 그러나 20년대 중반부터 우리 문단은 냉정한 현실 인식을 회복하게 된다. 이 시도 그러한 흐름을 반영한다. 작품의 핵심이 되는 것은 ‘빼앗긴 들’에 과연 참다운 삶이 가능한가 하는 의문이다.
제1연에서 이 질문을 던지고 마지막 제10연에서 이에 대해 대답한다. 나머지 연들은 이러한 대답에 도달하기까지의 과정으로 이해된다.
대칭 구조로 되어 있는 이 시의 제2연과 제9연을 비교해 보면 흥미 있는 사실이 발견된다.
‘푸른 하늘 푸른 들이 맞붙은 곳’은 열려 있는 조국 해방의 지평을 의미한다. 그 지평을 향해 ‘한 자국도 섰지 마라’, ‘혼자라도 가쁘게나 가자’는 강박에 사로잡혀 ‘짬도 모르고 끝도 없이’, ‘꿈속을 가듯’ 화자는 걸어가고 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푸른 하늘 푸른 들’은 그에게 ‘푸른 웃음’이기도 하지만, ‘푸른 설움’이기도 한 것이다. 이상과 현실 속에서 그는 ‘다리를 절며’ 걷고 있다. 이상과 현실의 틈바구니에서 한 지식인이 느끼는 아픔이 ‘다리를 절며’라는 말로 표현되었다고 하겠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가 그러한 아픔 속에서 발견한 것이 허황한 관념이 아니라, 고통 속에 있는 민중의 실체라는 점이다. ‘아주까리 기름 바른 이’로 표현된 빈농(貧農)의 아내와 누이에 대한 뜨거운 눈물을 우리는 이 시에서 본다. 창백한 지식인의 한계를 넘어서고자 하는 시인의 의지가 ‘내 손에 호미를 쥐어 다오’, ‘좋은 땀조차 흘리고 싶다’는 싱싱한 표현을 가능케 했으리라.
이상화論
민족의 봄을 갈망한 이상화
시인 이상화(1901-1943)는 1920년대 식민지 시대의 비극적인 역사 상황 속에서 문단 활동을 시작하고 있다. 그는 ‘백조’ 동인으로 문단에 참여하여 박종화, 나도향, 현진건 등과 교유하면서 나라를 빼앗긴 민족의 통분을 격렬한 정조로 노래한다. 이상화의 저항적인 의식은 기미 독립 만세 운동에서부터 강하게 드러나고 있다. 그는 독립 만세 운동이 일어나자, 대구에서 학생 독립 운동에 참여하였고, 독립 운동의 주동자로서 활동한 바 있다. 그러나 만세 운동이 실패로 돌아가자 깊은 좌절감에 빠져들었고, 그 정신적인 좌절을 딛고 일어서면서 문학의 길에 나서게 된 것이다.
이상화의 시에는 두 가지의 시적 경향이 자리잡고 있다.
하나는 퇴폐적인 정서와 병적인 관능이다. 이것은 시대적인 상황에 대한 시인의 정신적인 대응 방식의 하나다. 물론 그가 관심을 보였던 프랑스 상징파의 시적인 영향이라고 지적하는 사람도 있다. 「나의 침실로」와 같은 작품에서 볼 수 있는 시적 열정은 ‘마돈나’라는 시적 대상을 놓고, 오지 않는 사랑을 기다리는 시인의 애절한 심사가 잘 그려져 있다. 이 작품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환상과 관능으로 휩싸여 있다. 그러나 그 관능적인 요소들이 모두 대상에 대한 신비화를 돕고 있기 때문에, 시적 열정 자체를 더욱 고양시키고 있다 할 것이다.
이상화 시의 또 다른 경향은 저항적인 의식이다. 이것은 앞의 열정이나 퇴폐성과 무관하지 않다. 그 이유는 두 가지의 시적 경향 자체가 모두 민족의 비극적인 현실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관능에 머물러 있거나 퇴영적인 분위기에 휩싸여 있지 않고 오히려 그러한 현실을 극복할 수 있는 시적 의지를 구현한다. 그의 대표작인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비롯하여 「선구자의 노래」, 「역천」 등에서 이러한 특징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