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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2월 13일 금요일 성녀 루치아 동정 순교자 기념일
제1독서 : 이사 48,17-19
복 음 : 마태 11,16-19
그때에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말씀하셨다.
16 “이 세대를 무엇에 비기랴?
장터에 앉아 서로 부르며 이렇게 말하는 아이들과 같다.
17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가슴을 치지 않았다.’
18 사실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자,
‘저자는 마귀가 들렸다.’ 하고 말한다.
19 그런데 사람의 아들이 와서 먹고 마시자,
‘보라, 저자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다.’ 하고 말한다.
그러나 지혜가 옳다는 것은 그 지혜가 이룬 일로 드러났다.”
<오늘의 묵상>
김재덕 베드로 신부
하느님 때문에 자신이 변화되기를 바라는 신앙인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느님께서 바뀌시기를 바랍니다.
자신이 바라는 것을 위하여 열심히 기도하지만,
그 기도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하느님께 원망을 늘어놓습니다.
실천하기 어렵거나 힘든 말씀은 외면하고 위로와 감동을 주는 말씀만 들으려고 합니다.
“사실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자, ‘저자는 마귀가 들렸다.’ 하고 말한다.
그런데 사람의 아들이 와서 먹고 마시자,
‘보라, 저자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다.’ 하고 말한다”(마태 11,18-19).
변화가 없는 신앙인은 하느님의 계획과 그분의 말씀 앞에서 늘 못마땅해하기만 합니다.
참된 믿음은 하느님 말씀 때문에 나 자신이 변화하는 열매를 맺게 합니다.
인색하던 사람이 이웃에게 자선을 실천하고,
바쁘다며 기도할 시간조차 없다던 사람이 기도를 합니다.
상처받고 끊임없이 험담만 하던 사람이 자신의 잘못을 돌아보고 고해소로 향합니다.
주일 미사 말고는 결코 성당에 갈 생각을 하지 않던 사람이 평일 미사에 날마다 참례합니다.
모두 하느님에 대한 참된 믿음이 그 사람 안에서 일으키는 일들입니다.
변화가 없고 하느님의 말씀이 열매 맺지 못하는 신앙생활,
끊임없이 누군가를 비난만 할 뿐 정작 본인은 꿈쩍도 하지 않는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면,
가장 중요한 것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바로 ‘하느님에 대한 믿음’입니다.
우리 믿음이 하느님의 말씀으로 삶의 변화가 일어나는 결실을 얻었으면 좋겠습니다.
“너희는 춤추지 않고, …… 너희는 가슴을 치지 않았다”(11,17). 아멘.
조명연 마태오 신부
‘남들처럼만 하면 중간은 간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래서 남 따라 하는 것이 정답인 것처럼 생각합니다.
이 과정 안에서 남과의 비교가 생겨나고, 또 따라갈 수 없음에 좌절감을 느끼기도 합니다.
물론 남 따라 하는 것이 편하고 쉽기도 합니다.
하지만 진짜 자기의 삶이 될까요?
남이 알아주든 말든 진정 독창적인 무엇인가를 잘해 나가는 삶이
진짜 자기만의 삶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른이 편하고 쉬운 삶을 살겠다고 어린이처럼 놀면 잘못입니다.
신부인 제가 편하고 쉬운 삶을 살겠다고 미사를 안 하면 어떨까요?
큰 잘못입니다. 자기 역할에 충실한 삶은 특별한 것이 아니라 당연하고 평범한 삶입니다.
그리고 그런 삶을 무시하면 게으른 삶이 되는 것입니다.
모든 성인 성녀는 자기 역할에 충실한 삶을 사셨습니다.
이를 특별하다고 생각하지 않으셨고(물론 다른 사람은 특별하다고 생각합니다),
평범한 자기 일상으로 만들어 자기 삶의 방향을 바꾸셨던 것입니다.
성당 안에서 봉사하시는 분의 고충을 많이 듣습니다.
열심히 봉사한다고 했는데 돌아오는 것은 부정적인 평가일 때,
봉사의 힘을 잃게 된다고 하십니다.
바로 이때 ‘자기 역할’을 떠올려 보면 어떨까요?
봉사가 원래 해야 할 자기 역할이라고 생각하면,
특별한 삶이 아닌 평범한 삶을 살고 있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세상의 눈으로 볼 때에는 편하고 쉬운 길이 아닌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 세상의 눈으로 보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의 눈으로 봐야 하며, 주님과 함께하는 나의 역할에 집중할 때
평범한 삶으로 당연하게 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장터에서 노는 아이의 비유 말씀을 하십니다.
장터에서 피리를 불면서 놉니다. 그러면 함께하는 친구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같이 춤추며 놀아야 합니다.
이번에는 장례 놀이를 합니다. 그때 춤추고 있다면 장례 놀이를 할 수 없습니다.
장례 놀이를 할 때에는 가슴을 치면서 곡을 해야 합니다.
이처럼 자기 역할에 충실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 시대의 사람들은 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외쳤을 때 진심으로 참회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구원이라는 기쁜 소식을 전하지만, 예수님을 비판하면서 전혀 기뻐하지 않습니다.
모두 자기가 해야 할 것을 하지 못하는 모습이었습니다.
자기 역할을 떠올려 보십시오.
어떤 역할을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셨을까요?
사랑의 역할을 주셨는데, 어렵고 힘든 이런 특별한 삶을
어떻게 따를 수 있냐면서 거부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그러나 사랑의 역할은 우리의 고유한 역할로 지극히 평범한 삶인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전해주신 지혜입니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이 세대를 무엇에 비기랴? ~우리가 피리를 불어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가슴을 치지 않았다.”(마태 11,16-17)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곡을 하여도 가슴을 치지 않는 아이들의 놀이는
요한의 “회개의 세례의 선포”(마르 1,4;루카 3,3)에도 회개의 가슴을 치지 않고,
예수님의 “하늘나라의 복음의 선포”(마태 4,23;9,35)에도 기뻐 춤추지 않는 세대를 말해줍니다.
이러한 타자에 대한 폐쇄와 계시에 대한 배척의 뿌리에는
무관심과 영적무지와 완고함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완고함’이란 마치 엎어져 있는 항아리를 보고 입이 없다고 투덜거리거나
바닥이 없다고 불평하는 것과 같습니다.
사실 바로 세워놓고 보면 입도 있고 바닥도 있는데 말입니다.
그 뿌리에는 바로 보고자 하지 않는 ‘비뚤어지진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완고함’이란 사실을 바로 보고자 하지 않는
비뚤어진 마음 때문에 ‘목이 뻣뻣해진’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의 외침을 듣고도 죄를 뉘우치기는커녕 ‘귀신들렸다’고 비난하고,
예수님의 선포를 듣고도 진리를 받아들이기는커녕
‘먹보요, 술꾼이요, 죄인들의 친구’라고 조롱합니다.
사실, 이쯤 되면, 예수님의 사랑은 안타까움과 비탄을 넘어 아픔입니다.
결국, 당신의 사랑은 춤추지도 곡하지도 않는 냉대와 완고함이라는 가시에 찔려,
얼굴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이 됩니다. 사랑이 거부당한 아픔입니다.
내가 당신의 말씀을 귀담아 듣지 않고 냉대할 때, 바로 그러할 것입니다.
내가 당신의 사랑을 거부하고 완고할 때, 그렇게 당신의 눈에는 눈물이 흐를 것입니다.
내가 내 형제를 거부하고 배척할 때, 당신은 그렇게 가시에 찔릴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오시어 하신 일은 십자가에 달리시어
자신을 ‘깨뜨려’ 찢고 나누어 건네주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니, 진정으로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게 된다면,
예수님의 그 피와 살을 먹고 자신도 ‘부서져’ 쪼개고 나누어져
다른 이에게 건네주는 일이 벌어질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을 들려주실 때 벌리시는 일은
우리를 ‘깨뜨리고 부수는’ 일이요, 진정으로 말씀을 받아들이게 된다면,
우리가 ‘찢기어지고 나누어지는’ 일이 벌어질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힘이 있고, 살아 있으며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 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냅니다.”(히브 4,12)
그렇습니다. 오늘 말씀의 영께서 오시어 벌리시는 일은
우리와의 교제와 친교로 진리를 깨닫게 하고 새롭게 하여,
변화와 성화로 주님과 일치를 이루게 하는 일입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가 성령께 응답한다면,
다윗이 주님의 계약 궤 앞에서 춤추었던 것처럼 우리도 춤추게 될 것입니다.
하오니, 주님! 당신 말씀과 영에 제가 꺾이고 부서져 당신 마음에 들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울지 않았다”(마태 11,17)
주님!
불의를 보고도 안타까움의 눈물을 흘리지 않고
진리를 보고도 기쁨의 노래를 부르지 않으니
무디어 진 제 마음이 빛보다 어둠에 치우친 까닭입니다.
제가 당신의 말씀을 냉대할 때, 당신의 가슴은 가시에 찔리실 것입니다.
형제들을 거부하고 배척할 때, 당신의 눈은 눈물을 흘리실 것입니다.
완고함의 벽을 헐고 함께 웃고 함께 울며 사랑의 노래를 부르게 하소서!
피리를 불면 춤을 추고, 곡을 하면 가슴을 치게 하소서! 아멘.
복음적 삶을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반영억 라파엘 신부
예수님께서는 이 세대를 장터에 앉아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가슴을 치지 않았다”(마태11,17).고 말하는 아이들에 비유하십니다.
이 말씀은 제 뜻대로 하자고 우기는 세상을 말해줍니다.
제 입맛에 맞지 않으면 틀렸다고 하며 상대에게 무관심한 것입니다.
그러니 거기에 하느님의 말씀이 어찌 제대로 통하겠습니까?
자기 마음에 들면 하하거리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투덜대는 세상에서
누구의 비위를 맞추고 살아야 하겠습니까?
요즈음 소위 정치지도자들이 하는 일은 하느님 마음에 드실까요?
누가 무엇이라고 해도 하느님 앞에 당당해야 합니다.
내 뜻을 고집하지 않고 하느님의 뜻을 헤아려야 합니다.
그러기에 지금은 기도할 때입니다. 그리고 사랑할 때입니다.
정의는 사랑을 포용하지 못하지만 사랑은 정의를 포용합니다.
정의와 공정을 내세우는 이들이 참으로 하느님 앞에 부끄럽지 않기를 희망합니다.
요즘 나라의 혼돈상태를 보십시오. 서로 남 탓만 하고 있잖습니까?
사람들은 아주 엄격한 속죄의 생활을 하였던 요한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습니다.
그를 마귀 들린 사람으로 취급했습니다.
그리고 버림받고 고통을 받는 사람들을 위로하며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기를 거리끼지 않는 예수님을 보고는
너무 세속적이라고 비난을 퍼부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예수님은 먹보요, 술꾼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마음이 굽어서 이것도 저것도 좋지 않게 여겼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요한의 길을 가는 것이요, 예수님은 예수님의 길을 걷는 것입니다.
어느 누구의 비위를 맞출 이유도 없이 아버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길을 가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시대나 요한의 시대나 마음이 굽어있는 이상
볼 것을, 제대로 보지 못했습니다. 오늘도 여전합니다.
성경을 통해서 주님의 말씀을 듣고 새겨 마음의 눈을 뜨기를 희망합니다.
그리하여 누구의 비위를 맞추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가야 할 길을 가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열어주신 길을 굳건하게 걸어가야 합니다.
그리고 선한 것은 선한 것으로, 봐줄 줄 알아야 합니다.
“세상의 모든 것이 변해도 좋습니다. 주 하느님 당신 안에 뿌리 내리면!”
참 신앙인은 세상이 아무리 흔들어도 동요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세상의 삶이 복음적인 삶이 될 수 있도록 끝까지 노력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네 눈은 네 몸의 등불이다.
네 눈이 맑을 때에는 온몸도 환하고, 성하지 못할 때에는 몸도 어둡다.
그러니 네 안에 있는 빛이 어둠이 아닌지 살펴보아라.
너의 온몸이 환하여 어두운 데가 없으면,
등불이 그 밝은 빛으로 너를 비출 때처럼,
네 몸이 온통 환할 것이다”(루카11,34-36)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자기주장만 옳고 상대는 그르다는 확신은 오류에 빠지기 마련입니다.
주님께서 마음의 눈을 밝혀 주셔서,
하느님의 백성이 된 우리가 무엇을 바랄 것인지 알게 해 주시길 빕니다.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여러분 가운데에 풍성히 머무르게 하십시오”(콜로3,16).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죽음 교육에서 ‘버킷 리스트’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버킷 리스트란 죽기 전에 꼭 해보고 싶은 일이나 이루고 싶은 목표를 목록으로 정리한 것입니다.
이 용어는 “죽는다”를 의미하는 영어 표현 “kick the bucket”에서 유래했습니다.
삶이 유한하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남은 시간을 가치 있게 보내기 위해
개인적으로 소중한 일을 기록하고 실천하려는 의지를 담고 있습니다.
인간의 삶은 제한적이라는 사실이 버킷 리스트라는 개념의 근간입니다.
이를 통해 우리가 일상을 살아가는 방식과 우선순위를
어떻게 설정해야 하는지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버킷 리스트는 단순한 욕망의 목록이 아니라, 개인이 무엇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 성찰하는 도구로 볼 수 있습니다.
버킷 리스트를 통해 스스로 열망을 적극적으로 추구하면,
나중에 ‘하지 못한 일’에 대한 후회가 줄어듭니다.
신앙적 관점에서, 버킷 리스트는 우리가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
실천하고 싶은 덕목이나 영적 목표를 세울 수도 있습니다.
여행, 배움, 관계, 봉사, 영성 등 다양한 영역에서
리스트를 작성하도록 권유함으로써 더 풍성한 삶을 설계할 수 있습니다.
버킷 리스트를 주제로 한 영화도 있습니다.
버킷 리스트(The Bucket List, 2007)는 말기 암 진단을 받은 두 노인이
병원에서 만나 서로의 버킷 리스트를 공유하며
남은 시간을 가치 있게 보내기로 결심합니다.
함께 스카이다이빙, 세계 여행 등 다양한 버킷 리스트 항목을 실천하며
삶의 의미를 되찾고, 우정을 쌓아가는 과정이 감동적으로 그려집니다.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The Secret Life of Walter Mitty, 2013)은
평범하고 지루한 일상을 살던 주인공 월터가 자신만의 상상 속 모험에 머물지 않고
실제로 세계를 여행하며 꿈을 이루는 과정을 그린 영화입니다.
아웃 오브 아프리카(Out of Africa, 1985)는
한 여성의 아프리카에서의 삶과 사랑 이야기를 중심으로,
그녀가 꿈꾸었던 삶의 모험과 성취를 담고 있습니다.
직접적인 버킷 리스트 이야기는 아니지만, 새로운 경험과 자유를 찾아가는 여정을 통해
버킷 리스트의 철학적 측면을 느낄 수 있습니다.
나우 이즈 굿(Now Is Good, 2012)은 암에 걸린 소녀가 죽음을 앞두고
"버킷 리스트"를 만들어 자신의 마지막 소원을 하나씩 이루어나가는 과정을 그린 영화입니다.
그녀의 여정을 통해 사랑과 가족, 삶의 가치를 재발견하게 됩니다.
우리는 대림 시기를 지내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성탄을 기다리면서 버킷 리스트를 만들면 어떨까요?
동방박사들은 황금, 유향, 몰약을 준비해서 먼 길을 떠났습니다.
가는 길이 험하고, 멀지라도 동방박사들은 포기하지 않고 별을 보며 길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예수님께 경배드렸습니다.
한나와 시메온은 예수님의 탄생을 기다리며 성전에서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아기 예수님께 축복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본당에서도 성탄을 기다리며 몇 가지 버킷 리스트를 마련했습니다.
하나는 ‘고린토 전서’를 필사하는 겁니다. 지난 사순시기에는 로마서를 필사했습니다.
다른 하나는 ‘대림 특강’입니다.
올해는 오클라호마 박락군 신부님이
‘구약과 신약에서 드러나는 성탄의 의미’를 강의해 주시기로 했습니다.
버킷 리스트는 거창한 것일 수 있습니다.
버킷 리스트는 큰 비용과 시간이 필요한 것일 수 있습니다.
신앙인에게 버킷 리스트는 일상의 삶에서 얼마든지 실천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죽음이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삶으로 옮겨가는 것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인류에게 큰 영감을 주는 고전을 읽는 것도, 가슴을 울리는 음악을 듣는 것도,
대가의 그림을 감상하는 것도 버킷 리스트가 될 수 있습니다.
오늘 성서 말씀은 신앙인이 지녀야 할 버킷 리스트를 이렇게 말합니다.
“아, 네가 내 계명들에 주의를 기울였다면
너의 평화가 강물처럼, 너의 의로움이 바다 물결처럼 넘실거렸을 것을.
네 후손들이 모래처럼, 네 몸의 소생들이 모래알처럼 많았을 것을.
그들의 이름이 내 앞에서 끊어지지도 없어지지도 않았을 것을.
행복하여라! 악인의 뜻에 따라 걷지 않는 사람,
죄인의 길에 들어서지 않으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는 사람,
오히려 주님의 가르침을 좋아하고, 밤낮으로 그 가르침을 되새기는 사람.”
우리가 하느님의 계명을 충실하게 지킨다면, 우리는 이미 버킷 리스트를 살고 있는 겁니다.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조욱현 토마 신부
예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장터에서 놀이하는 아이들 비유를 말씀하신다.
그것은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세례자 요한도 배척하였고,
세리들과 죄인들과 어울리며 식사하시는 예수님도 배척하였다.
그 모습이 마치 장터에서 편을 갈라 노는 아이들과 같다고 하시는 것이다.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17절),
즉 우리는 너희가 선행하도록 노래를 불러 주었지만, 너희는 그렇게 하기를 싫어했다.
너희가 회개하라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17절), 너희는 회개하지 않았다.
이렇게 두 가지 선포, 즉 지은 죄를 회개하라는 것과 선행에 힘쓰라는 권고를 다 거부했다.
이는 바로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을 거부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요한을 마귀 들렸다 하고, 예수께는 먹보요 술꾼이라고 했다.
그들이 둘 가운데 어떤 가르침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장터에 앉아 있는 아이들의 비유는 바로 세례자 요한의 엄격함도,
그리스도의 자유도 받아들이지 않는 유대인들을 의미한다.
그들은 어떤 가르침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요한은 “회개의 세례를 선포”(마르 1,4)할 때,
자신을 회개해야 할 사람의 본보기로 제시했고,
주님께서는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마태 4,23; 9,35)하실 때,
당신 안의 빛나는 자유를 보여주셨다.
이렇게 예수께서는 믿는 이들에게 형언할 수 없는 기쁨과 평안을 그려 보여주셨다.
“지혜가 옳다는 것은 그 지혜가 이룬 일로 드러났다.”(19절)
지혜는 믿음이 없는 자들에게서 자신이 전에 주었던 선물을 빼앗아,
순종하며 믿음 깊은 백성에게 선물로 준다.
지혜의 선물은 사용하지 않으면 빼앗기는 것이 아니라 잃어버리는 것이다.
자신의 잘못으로 잃어버리고도 알지를 못한다.
요한과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받아들인 사람들은 삶이 달라졌다.
그들은 진리를 추구하는 이들을 위해 그 지혜를 사용했다.
유다인들은 요한의 단식과 금욕적인 삶을 보고서도,
주 그리스도의 순종하는 삶의 모습과 하늘나라에 대한 약속을 듣고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들은 모든 것을 지혜롭게 완성하신 분을 단죄하였다.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은 그분을 살아계신 지혜라고 생각한다.
그분은 믿지 않는 유다인들에게는 고약한 대접을 받으셨지만,
그들에게 당신의 자녀가 되라고 부르신다.
하느님 나라 놀이
박상대 마르코 신부
세례자 요한의 선구자적 역할과 메시아의 실제적 도래로 말미암아
이 땅 위에 하느님 나라가 시작되었다.
세례자 요한을 끝으로 더 이상의 메시아에 관한 예언은 있을 수 없다.(13절)
이미 이 세상에 메시아가 도래했고 하느님 나라가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상은 자기 안에 도래한 하느님 나라를 인식하지 못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고의적으로 이를 배척하고 거부하고 있다.
하느님 나라에 대한 고의적인 배척과 거부가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는 이미 역사 안에 사실로 드러났다.
이사야 예언자는 외친다.
”주님인 내가 너의 하느님이다.
네가 잘 되도록 가르치는 너의 스승이요,
네가 걸어야 할 길로 인도하는 너의 길잡이다.
네가 만일 나의 명령을 마음에 두었더라면,
너의 평화는 강물처럼 넘쳐흐르고,
너의 정의는 바다 물결처럼 넘실거렸으리라.“(이사 48,17b-,18)
결국 이스라엘은 주님이신 스승을 외면하고 엉뚱한 길을 걸어갔고,
이스라엘의 바빌론 유배가 그 결과였던 것이다.
예수님시대 사람들도 같은 태도를 보이고 있다.
오늘 복음에서 보듯이 예수께서는 이러한 그들의 태도를
‘잔치 놀이’와 ‘장례 놀이’에 함께하지 않는 아이들에 비유하신다.
예수께서는 선구자인 세례자 요한과 메시아이신 당신을 받아들여
이 땅위에 도래한 하느님 나라를 깨닫고 이를 향하여 자신의 삶을 질서 지우는 태도를
‘하느님 나라 놀이’에 함께 노는 것으로 비유하신다.
장터에서 놀이하는 아이들의 비유에서
‘피리와 춤’은 잔치 놀이를, ‘곡과 울음’은 장례놀이를 의미한다.(15절)
그런데 편을 갈라 앉은 아이들이 서로 다른 편의 놀이를 같이 놀아 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놀이는 혼자 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하는 것이다.
잔치 놀이에는 술과 음식, 춤과 여흥이 필요하고,
장례 놀이에는 금욕과 절제, 울음과 기장이 필요하다.
따라서 장례놀이는 회개와 참회의 세례를 선포했던 금욕주의자 요한에 비유되고,
잔치놀이는 세리와 죄인들과 어루려 기뻐하고 食飮하시는 예수님에 비유되고 있다.
‘하느님 나라 놀이’에 함께 놀아 주지 않는 예수님 시대의 사람들은
장터에서 편 갈라 앉은 아이들보다 더 나쁘다.
그들은 놀이를 함께 하지 않고 구경만 할 뿐 아니라
놀이를 주관하는 주체를 야유하고 비난하여,
세례자 요한더러는 ‘미쳤다’(18절)고 하고,
예수를 두고는 ‘세리와 죄인들하고만 어울린다.’(19절)고 한다.
그러나 여기에 하느님의 지혜가 있다.
하느님의 지혜가 옳다는 것은 이미 도래한 하느님 나라에 의해 밝혀지겠지만
당장은 이 세대의 눈에 가려져 있음이 안타까운 것이다.
하느님의 지혜는 스스로 자신을 찬미하고, 군중 속에서 자기의 영광을 드러낸다.
하느님의 지혜는 지극히 높으신 분의 입으로부터 나왔으며, 안개와 같이 온 땅을 뒤덮었다.
하느님의 지혜는 높은 하늘을 두루 다니고,
심연의 밑바닥을 거닐면서 온 땅과 모든 민족과 나라를 지배하였다.
하느님의 지혜는 이 모든 것들 틈에서 안식처를 구했으며
어떤 곳에 정착할까 하고 찾아다녔다.(집홰ㅣ 2,1-6 참조)
하느님의 지혜가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
우리나라 사람들 모두의 마음 안에 안식처를 구하여 정착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기 위해서는 내 안에 먼저 하느님의 지혜가 잉태되어야 한다.
이 지혜가 시대의 징표를 읽을 수 있는 능력을 준다.
어느 때에 잔치 놀이를 하여야 하고, 또 어느 때에 장례 놀이를 하여야 하는지를 말이다.
그래서 주님의 성탄은 매년 오는 것이다.
내 안에 하느님의 지혜가 탄생할 때까지 말이다.
[출처] ‘벨라수녀 영화방’ : 오늘의 말씀 묵상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